어느 봄날

단차 | 2023.12.13 23:23:16 댓글: 18 조회: 528 추천: 4
분류단편 https://life.moyiza.kr/mywriting/4528998


내가 그 애를 처음 본 장소는 학원이었다.

그무렵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덜컥 영어회화학원에 등록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7시에는 집에서 나서야 했다. 730분 수업이 왕초보 영어회화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수업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원어민 강사는 먼저 자기 영어이름을 정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간단하게 영어 이름으로 자기 소개를 하게 되었다.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직업도 다른 사람들의 소개를 차례차례 듣다가 그리고 내 옆 자리에 앉은 남자애가 입을 열었다.

“Hi, my name is Jun. I am 26 years old. I like music and movies. Nice to meet you. (안녕. 내 이름은 준이야. 나이는 26살이고 음악과 영화를 좋아해. 만나서 반가워.)”

간단한 자기 소개였지만 나는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너무 감미롭고 듣기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와 목소리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분명.

그리고 우연히 첫 수업 날 옆자리에 앉은 이후로 나의 영어회화 연습 짝궁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나는 조금 웃긴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남자애는 번번히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고 들어와서는 내 옆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러다 가끔 5분에서 10분 정도 지각하기도 했다.

나는 뭔가 귀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도 그럴듯이 그애는 나보다 두 살 어리기도 했고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살짝 고지식해 보이는 뿔테 안경에 말투는 조근조근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나와서 그런지 그 남자애와 영어 회화 연습을 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 애의 조근조근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스르르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남자애가 나한테 영어단어를 물어보면서 가까이 다가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나는 조금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머리와는 다르게 심장은 쿵쿵 뛰었다.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연하는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지만. 나와는 결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친한 사이로 지내는 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성적인 호감 관계로 넘어가기보단 친구사이로 지내면 더 오래 갈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날 학원 안 가는 날에 학원에서 친해진 다른 친구 한 명까지 셋이 만나서 밥을 같이 먹고 헤어졌다.

그날 이후로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긴 했다. 그 애는 어딘가 조용하고 수줍게 느껴졌던 첫 인상과 다르게 친해지고 난 후로는 쾌활한 편이었다. 생각보다 대화도 잘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귀엽게도 술이 약했다. 집에 돌아가서도 자꾸 생각이 났다. 이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호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하지만 그 애는 그저 나를 친한 지인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이상형에 관한 주제가 나왔는데 나는 자기도 모르게 너 좀 내 이상형인 것 같아.” 라고 말해버렸다. 말하고 나서 놀라서 그 애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애는 그저 싱긋이 웃으며 진짜? 좋게 봐줘서 기쁘네.” 라고만 하고 웃어 넘겼다.

그 날 이후로는 나는 최대한 말을 줄였다. 미처 정의되지 못한 감정이 새어 나오는 게 싫었다.

그 애는 늘 스스럼없이 나에게 연락을 먼저 해왔고 나는 바로바로 답장을 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답장이 느렸다. 한 시간, 두 시간 뒤는 예사 일이고 가끔은 이튿날에 답장을 하기도 했다.

이상한 오기로 아예 연락을 먼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정작 그 애가 연락이 와서 만나서 밥이나 먹자고 하면 바로 그러겠다고 하는 내가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런 관계가 친구는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어느날. 그 애는 나한테 아무렇지 않게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는 거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 후배라고 했다.

친구로 곁에 있다보면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았지만 정작 너무 빨리 듣게 되니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겉으로는 잘해보라고 쿨하게 이야기했지만 속으로는 묘한 상실감이 들었다. 가진 적도 없는 걸 상실했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얼마 안 가서 그 친구는 과 후배와 연애를 시작했다가 한 달 뒤에 헤어졌다. 그리고 헤어진 걸 딱히 아쉬워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정작 만나보니 성격이 안 맞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약간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헤어졌다고 해서 나에게 기회가 올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역시 좋아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는 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애는 겉보기엔 참 수수하게 생겼다. 키도 크지 않고 안경도 답답해 보이고 패션 스타일도 좀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애의 부드러운 말투와 잔잔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는 그 애와 카페에 앉아서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 새인가 그 너머의 영혼까지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어느 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애는 참 나와 다르구나 하는 것. 우리는 절대 같은 길로 갈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인생관도 가치관도 어느 것 하나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안정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그 친구와는 다르게 나는 자유로운 사고관으로 어딘 가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편이라서 친구로서는 즐겁게 지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면 충돌할 수밖에 없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인정하고 난 뒤로는 놀랍게도 그 애를 볼때마다 두근두근 설레던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제야 비로소 나의 마음속에서 그 애가 친구로 받아들여 진 것이다.

그 친구는 졸업하고 곧 취업에 성공해서 바빠졌고 우리 사이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한동안 묵묵히 그 친구의 앞날을 응원했다. 딱히 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도 새로운 도시로 이사한 뒤로 바빠졌고 그 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이 생겨서 정신을 다른 쪽에 쏟기 시작하니 그 친구도 차츰 기억속에서 희미하게 멀어져갔다.

하지만 추억은 여전히 아름답게 그 시간에서 꽃 피우고 있다.

어느 봄날. 혼자 피고 진 나만의 엔딩.

추천 (4)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3/12/14 01:33:36

얘기들어보니 딱 우리아저씨네.근데우린 둘다 안정적인 미래를
지향하다보니 결혼햇어요.

단차 (♡.252.♡.103) - 2023/12/14 01:36:55

갑자기 단편 소설도 한번 써보고 싶어서 휘리릭 써봤어요.
나이 한살 한살 더 먹다보면 안정적인게 좋아 지는 것 같아요. 다 그렇진 않겠지만요. 불안한 미래보단 어느정도는 계획이 있어야 마음이 편한게 있어요.
늦었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뉘썬2뉘썬2 (♡.169.♡.51) - 2023/12/14 01:48:36

한사람을 알아간다는건 너무힘들어요.결혼은 도박이지만 어떻게 운좋게 결혼은
햇네요.하지만 내동생은 결혼못햇어요.아마도 못갈것같아요.

단차 (♡.252.♡.103) - 2023/12/14 02:30:25

맞아요.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죠. 결혼은 운인 것 같아요. 운 좋으면 잘 만나서 잘 사는거고요.
요즘 안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전히 못하는 사람도 꽤 많죠.

뉘썬2뉘썬2 (♡.169.♡.51) - 2023/12/14 03:23:23

결혼안해두 그럭저럭 혼자 살더라구요.가끔 외로운거 빼고는 편할때가
많으니까.어차피 결혼해두 이혼하면 또 혼자가돼요.

단차 (♡.252.♡.103) - 2023/12/14 08:02:57

네. 요즘엔 돌싱도 많이 있으니까요. 남들보다 늦더라도 천천히 지켜봐야죠.

뉘썬2뉘썬2 (♡.169.♡.51) - 2023/12/14 01:51:54

나이먹고 40넘으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게을러지고 열정이 사그라지고 쉬는게좋고
내집에서 잠자는게좋고 그래요.

30대면 아직 꿈과환상이 많으면서 혼돈스러운 시기죠.40넘으면 좀 안정이 되면
서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보죠.

단차 (♡.252.♡.103) - 2023/12/14 02:31:06

아직 꿈 꾸고 싶은 단차가 소설을 끄적거려요. 꿈과 환상의 나라에서요.

저도 제가 그렇게까진 활동적이다 생각 안 해봤는데. 생각해보니 아직 좀 돌아다닐 열정은 있는 것 같아요~

뉘썬2뉘썬2 (♡.169.♡.51) - 2023/12/14 03:30:53

30대는 혼돈스럽고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가장 열정스러운 황금시기이고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시기지요.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30대가 빛나는 추억거
리가 가장많을것 같아요.

열정이많고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만나기때문에 상처도받고 치유와 위로가 필요
한 성장의 시기예요.

단차 (♡.252.♡.103) - 2023/12/14 08:04:13

많이 돌아다니면 즐겁기도 하지만 여기저기 치이게 되죠. 그래서 가끔 쉬어가면서 치유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뉘썬2뉘썬2 (♡.169.♡.51) - 2023/12/14 03:34:17

우리사장이 60대인데 이젠 기력이 딸려서 모임도 줄이고 주위 인간관계도
정리하고 친구도 줄이고 그런대요.

장사하고 자식들 챙기는것만으로도 벅차나봐요.

단차 (♡.252.♡.103) - 2023/12/14 08:06:26

젊은 때에는 사람 많이 만나도 나중에 가면 점점 줄어들게 될 것 같아요. 결혼하고 가정이 생기면 여유가 줄어들게 되잖아요. 제가 아는 언니도 결혼한 이후로 친구가 줄어들어서 주로 혼자 놀아요. 답답하대요.

뉘썬2뉘썬2 (♡.203.♡.82) - 2023/12/14 21:26:16

결혼하면 시댁쪽의 친척이랑 남편친구를 챙겨야 데니까요.자유는 줄어들고
챙겨야할것만 늘어나지요.

단차 (♡.252.♡.103) - 2023/12/14 21:38:24

그렇죠. 자유는 없어지고 그만큼 일이 늘겠죠. 그래도 나중에 가면 옆에 남을 사람은 짝궁 밖에 없잖아요 ㅋㅋ

황금보배 (♡.198.♡.58) - 2023/12/14 10:47:17

오욕칠정은 다 감정의 소관이며
오장육부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단차 (♡.252.♡.103) - 2023/12/14 10:48:47

그렇죠. 마음도 결국 몸의 일부니까요 ㅋㅋ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로즈박 (♡.43.♡.244) - 2023/12/17 09:52:47

자주 만나고 접촉하는 사람한테 관심이 갈수밖에요..ㅎㅎ
20대에는 그럴만하죠..
나도 어느 학원에서 만난 사람하고 아주 잠깐의 호감을 가지고 그때는 편지..ㅋㅋ편지를 주고받고 하다가 어느순간 서로 답장을 안하면서 헤여진적 잇어요..
나중에 서로 결혼한담에 우연히 만나서 그때 얘기를 햇엇는데 그 사람이 부모님들한테 그때 힘든일이 잇어서 자포자기하고 그랫다고 털어놓더라고요..ㅎㅎ
그때 계속 연락햇더라면 어떻데 됏을지..ㅋㅋ
암튼 그래도 지금의 삶이 훨씬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차님한테도 그 친구는 그냥 스쳐간 인연뿐인거죠..
이제 좋은 사람이 짠~~하고 나타날거예요..
우리 단차님~항상 행복햇음 좋겟어요~~

단차 (♡.252.♡.103) - 2023/12/17 09:56:43

이거 실화는 아니고 실화를 기반으로 쓴 단편소설이에요. ㅋㅋ
어릴 때 짝사랑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을 좀 보태서 썼어요~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즈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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