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가 살해되었다 (20회)

죽으나사나 | 2024.01.20 05:12:01 댓글: 0 조회: 201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41596
내 여자친구가 살해 되었다. (20회) 너와 나의 거리.

"와아... 드레스 종류가 이렇게 많아??"

드라마를 찍을 때 드레스를 입는 상대 역 때문에 가상 드레스 숍을 못 본 건 아니다. 단지 어떤 드레스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던 터라  어쩌다 유심히 살펴본 오늘은 새로운 신세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예약을 안 해도 되는 가게라 하길래 그냥 작은 가게인 줄 알았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드레스는 처음 보았다. 단아한 드레스, 섹시한 드레스, 귀여운 드레스.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신이 나서 쑤시고 다니는 혜주에 비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주혁을 본 혜주는 의아했다.

"야. 남주혁.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너 내가 드레스 입은 모습이 궁금하지 않아?"

그러자 주혁이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하는 말이 있었다.

"난 이런 구석진 가게 말고 네가 누구나 알아봐 주는 브랜드 드레스를 입었으면 했다고. 뭔 구멍가게 같은 데 와서 체험을 한다고 그러냐. 나중에 진짜로 좋은 걸로 입으면 되지."

투덜대는 주혁을 보면서 어딘가 마음이 씁쓸해졌다.

이 바보야.

알아. 네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부자들만 한다는 상급 브랜드의 드레스를 혜주한테 입혀보고 싶은 마음은 나도 알지.
하지만 넌 오늘이 아니면 혜주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영영 못 보게 될 거야. 내가 과거로 돌아가면 너의 기억은  사라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도 너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그러면서 혜주는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뭔 데이트에 이런 것도 하냐는 의문을 가지며 멀뚱멀뚱 드레스숍을 한참 뚫어져라 보던 주혁의 앞에 피팅룸 커튼이 활짝 열리면서 난생처음 보는 혜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

"나 어때? 예뻐?"

살짝 부끄러운 듯 발개진 볼을 하고서 묻는 혜주의 질문이 안 들리는지 그 자리에 굳어버린 주혁이다.
무더운 한 여름에 눈이 내린 듯 우아하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혜주를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예쁘다는 말? 그런 말은  입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냥 입이 저도 모르게 쫘악 벌어졌고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짙고 그윽한 눈으로 보기에 바빴다.

주혁이가 그렇게 바라던 드레스를 입은 혜주의 모습이었다.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혜주는 분명히 천사 같은 모습을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디 브랜드 인지도  모를  드레스를 입었는데도 이렇게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가 없는걸 보면 내가 진짜 이 여자한테 10년 넘게 미친 건 맞다고 생각했다.
질리지가 않는 혜주가 너무 좋다. 평생 내 옆에 갇아두고 싶다.

앞에서 눈을 못 떼는 주혁이랑 다르게 또 한껏 마음이 무거워진 한 사람이 있었다. 아까 커튼을 열기 전부터 전신거울로 이미 보았다. 아름다운 자태의 혜주의 모습을. 감히 아름답다 이쁘다로 만 끝낼 수가 없는 혜주의 드레스 입은 모습을.

앞에 있는 녀석은 아직 모르지. 이런 모습을 한 혜주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걸.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는걸. 그걸 잘 알고 있는 혜주 속 주혁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혜주야. 역시 내 생각대로 드레스를 입은 너의 모습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어둑해진 이 밤이 다 밝혀지는 느낌이야.
난 너랑 한 평생 같이 지낼 줄 알았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에서 백발이 되어 나이를 먹어도 서로를 아끼면서 그렇게 그냥 서서히 죽어갈 줄 알았어. 이렇게 네가 갑자기 갈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하고 싶었던 걸 안 참았지... 너와의 추억들. 너와의 결혼. 너를 닮은 아기까지... 나의 짜여진 인생 계획엔  너는 빠진 적이 없었어. 그러던 네가 어떻게 그리 쉽게 내 곁에서 사라질 수가 있니.

혜주의 눈에서는 지금의 주혁으로 하여금 절대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혁은 혜주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에 넋이 나갔다가얼떨결에 거울을 통해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는 그녀를  보았다.

왜… 우니? 혜주야.

운전대는 주혁이가 잡았고  오늘 계획한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혜주는 말이 없이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아까 드레스숍에서 눈물을 훔치던 혜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는 주혁이다.  다른 때 같으면 진작에  물어봤을 텐데 오늘은 물으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 하루는 순 혜주의 갑작스러운 계획하에  데이트를 했다. 갑자기 절대 입은 적이 없던 야한 원피스를 사서 입지를 않나. 연애 초반 때 나 하던 오락을 찾아 하지를 않나. 오랜만에 혜주한테 또 다른 설렘을 느껴 나의 가슴 한편을 세차게 간지럽혔지.

너무도 오랜만의 연인 다운 데이트였다. 혜주나 나나 너무나 즐거운 하루였다. 그렇게 남들한테 들킬 가봐 전전긍긍을 하더니 무슨 생각으로 오늘 이런 계획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젯밤 기태 그 자식을 만나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거 같은 기분도 다 풀리는 거 같았고. 일탈의 타이밍도 기막히게 잡는 혜주한테 속으로 감탄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안 보는 혜주한테 고마움이 가득했다. 분명 어제 거의 죽어가면서 들어왔을 거다. 좋은 일이 있을 거 같다고 했지만 혜주는 알았을 거다. 잘 안 풀렸다는걸. 주혁을 너무나도 잘 아는 여자이니.

내가 아무 말을 안 해도 ...

근데 왜 마지막에 가서 그렇게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우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혜주는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더니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는 꼼짝을 안 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볼까 말까를 오는 길 내내 생각했다. 물어봐도 될까, 물어보면 왜 그러는지 답은 해줄까?

혹시 내가 어제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저... 혜주야."

등을 돌리고 누워있어 얼굴이 안 보이는 혜주를 불렀다.

"...응."

다행히 짤막한 응대는 있었고 잠을 자는 건 아니었다.

"내가 어제... 혹시 무슨 실수를 했니?"

"..."

혜주가 말이 없다. 그리고 확신을 했다. 주혁이는 자기가 술에 취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한 거 같았다.

어디까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주가 알아서는 안될 일이었다. 어제 일은. 절대로.

주혁이는 누워있는 혜주의 손목을 당겼다. 그 힘에 등을 돌렸던 혜주의 몸이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있었고 주혁은 그런 혜주의 위에 살포시 올라탔다. 그녀가 큰 덩치의 자신 때문에 눌려 아프기라도 할까 봐 살포시 다리 사이에 가뒀다.

"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그 자식이 단순히  내가 추락하는 꼴을  보려고  그걸 어디 가서 말할 놈은 아닐 거야. 여차하면 내가  협박을 하면 돼. 걔네 아빠 시장이잖아. 아들이 그런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게..."

아무래도 혜주가 다 아는 거 같아서 안심시키려고 주절주절 설명을 하던 주혁이가 말을 하다 멈추었다.

또, 또 그 눈에서 눈물이 잔뜩 고이다가 스르르 볼을  타고 내려가  베개잇을  적시고 있었다.

"왜 이러는데, 왜 이래. 김혜주!"

왜 이러는지 몰라 답답한 주혁이가 언성을 높이며 그녀의 침대에 늘어뜨러져 있던 손목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리고 꽉 잡았다.

"내 눈 피하지 마. 똑바로 봐. 김혜주."

몇 초 더 그 자세로  혜주를 바라보던 주혁이가 시선을 피하려고 머리를 돌리는 그녀한테 경고를 했다. 그새 화를 많이 삭힌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그의 말이 통하지는 않았다. 혜주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튼 채 시선은 다른 곳에서 멈추었다. 혜주의갸름한  턱 선이 부각되었고 주혁이한테 결박을 당해서  눈물을 참는 건지 아래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혜주가 말이 없이 우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울더라도 왜 우는지 이렇게 감이 안 잡히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화가 났고 그 화는 절대 혜주한테 향한 게 아니라, 10년 넘게 옆에 둔 그녀의 눈물의 의미조차 모르는 자신한테 화가 났다.


주혁은 꽉 잡았던 혜주의 손목을 풀고 눈가에 아직 서려있는 눈물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 뜨거운 손끝으로 천천히 얼굴을 만지다 그녀의 두 뺨을 소중하다는 듯 조심히 감싸고는 방금 씻어서 촉촉하고 불그스레한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 둘의 시선이 서로에게 고정되었다. 머릿속은 각자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지만...

[김기석 형이 내 말엔 껌뻑 죽는 시늉도 하는 사람인데. 넌 또 그런 김기석한테 작품을 받고 싶고. 그래서 날 찾은 거 아냐??]
주혁은 머릿속에서 기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생각하기 싫은데...

혜주 몸속에 들어가 있는 주혁은 마음은 너무 간절했지만 그날도 무심한 척 혜주한테 던졌던 말이 생각났다. 진지하게 나오면 혜주한테 또 크게 혼날 게 뻔해서.
[혜주야, 우리 이제 결혼할까?]

서로 각자 다른 생각에 서로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혁이는 혜주의 옆머리를  쓸어넘기고는 그녀한테 천천히 다가갔다. 뜨거운 입술이 아까 꽉 깨물고 있던 그녀의 아래 입술에 살포시 닿았다. 아프게 그러지 말라고 그러는 듯 아주 부드럽게 아래 입술을생크림을 핥듯이 핥다가 아래위 입술을 맞물렸다.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머릿속을 자극했다.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한 밤이었다.

***

"3천 원입니다."

새벽시간, 편의점 알바생한테  결제를 하고 캔 맥주를 받아든 혜주는 편의점 바깥에 비치되어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뭐가 그리 급한지 캔 뚜껑을 따자마자 정신없이 들이켰다.

"꺼억..."

한 캔을 한 번에 들이키니 저절로 트림이 나갔다. 이제야 긴장했던 몸이 좀 풀리는 거 같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까 주혁이랑 진하게 입술이 닿았던 게 생각나서 이내 눈을 번쩍 뜨고는 가녀린 팔뚝으로 입술을 빡빡 비벼댔다.

아깐 미쳤다. 아무래도 이게 혜주의 몸이라서 그런가 보다. 자기 위로 올라와 그런 뭐라도 할 거 같은 짙은 눈으로 쳐다보니 무장해제가 되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욕구가 차 올라왔다. 분명히.
하도 지금 그날이라 다행이지 하마터면  내 머릿속에 길이길이 기억될 사고를 칠 뻔했다.

그래, 나 남주혁은 배우다. 그것도 연기를  꽤 하는 연기자다.신인 시절 작품을 가려서 할 처지가 못됐던 난 게이 역할도 해보았고 상대역 남자랑 진한 키스랑 애무 비스름한 것도 했다. 연기라 생각해서 그런지 우려했던 거와는 다르게 그렇게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다. 나름 연기력을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오늘도 그런 거다.

미친 거 같은 자기 자신을 위로하며 머리를 끄덕끄덕하다가 또 아까 그 끈적거리던 장면이 떠올라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쿵 하고 의자에서 떨어졌다.

"아아..."

새벽이라 뭐 볼 사람은 없지만 창피함에 벌떡 일어나고는 엉덩방아를 찧은 아픈 엉덩이를 주무르며빠른 보폭으로 오피스텔로 향했다.

방에 들어와 보니 그 녀석은 단잠에 빠져 쿨쿨 자느라 정신이 없다.

하긴, 어제 그렇게 술을 퍼먹고 오늘 하루 종일 끌고 다녔으니… 힘들긴 하겠지.

아까 나한테 귀싸대기를 제대로 처맞아서 아직도 살짝 벌건 볼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정신줄을 놓았고 그 정신줄을 겨우 잡은 다음엔 저 녀석은 거의 사형감으로 처맞았지.

[야, 김혜주. 너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 네가 아닌 거 같다고.]

맞은 볼을 부여잡고 투덜투덜 대던 그 녀석.

이상할 수밖에.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데. 이상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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