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28회)

죽으나사나 | 2024.03.06 00:55:48 댓글: 2 조회: 534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1903
너를 탐내도 될까? (28회) 나에게 결혼이란,
이게 무슨 미친 짓인지,
하정이 흐트러진 정신까지 다 집어삼킬 듯이 그녀의 입술을 탐하는 서울은 낯설고 꽤 무섭기까지 했다.
가파 오르는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한 하정이는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신음했다.
멈출 줄 몰라 보이던 서울이가 그녀한테서 한 뼘 떨어져 나갔다.
차올라오는 눈물에 저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의 뜻을 알 길이 없었다.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려다보겠지.
로비에서 그  의사랑 하는 얘기를 다 들은 것 같았으니,
얼마나 한심하다 생각했을까.
하정이가 낙담하는 사이 서울은 그녀의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 침대 모서리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하아..."
그에게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대표님, 미팅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안 올라가십니까?"
이한은 어리바리한 신입 발레파킹 직원을 상대하느라 조금 늦게 호텔 로비로 들어왔다. 기혁이가 마주 서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방금 열렸다 다시 닫히고 있자 급히 열림 버튼을 꾹 누르며  한마디를 했다.
기혁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어, 하는 반응을 보이면서 다시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이한도 그 뒤를 덩달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같이 기혁은 말없이 고요했다. 정연한테서 금방 새로 들은 얘기가 있는데 얘기할지 말지 고민을 하던 이한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대표님. 윤하정 팀장 말입니다."
답은 없었지만 살짝 돌린 고개에 이한의 말에 집중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중학생 때 심리 치료를 받을 만큼 꽤 많이 아팠답니다. 오 비서도 정확한 건 기억을 못 하고 있던데 양부모가 처음에 무심했던 건 있었지만 윤 팀장이 아프면서 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꼭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또 아닌가 봅니다."
이한의 말에 기혁은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조용히 엘리베이터 앞만 주시하고 있었다.
***
새벽 시간,
하정이가 살고 있는 이 곳은 가끔 요란한 배달 오토바이 엔진 소리 빼고는 꽤 조용한 동네였다.
어릴 때 몇 살이었던가, 14살쯤이었나. 
그때 이 동네에서 몇 년을 살았었다. 친구도 있고 정이 든 동네가 좋아서 떠날 땐 눈물이 났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한 번도 발길을 들인 적이 없었던 동네이기도 했다.
2년 전인가, 다시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는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하원하면 친구랑 맨날 날이 저물 때까지 놀았던 놀이터는 사라지고 공영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다니던 중학교도 학생 수 감소로 결국은 폐교까지 했다.
추억거리가 사라져버렸다.
[너... 하정이 아니니?]
15년이 지났는데도 그때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영업 중이던 슈퍼 아주머니가 하정을 알아보고 물어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기억을 한다는 거에 놀랐다.
[맞구나! 윤하정이!... 와, 그 작은 애가 이렇게 컸어? 어엿한 처녀가 다 되었구나. 세월도 참 무심하지. 내가 벌써 이리 백발이 되었는데.]
고향 지인이라도 만난 듯 반갑다고 호들갑을 떠는 아주머니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다 하정이를 유심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이제 아픈 건 괜찮아진 거니?]
미소를 짓던 하정의 표정이 살짝 굳다가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요. 싹 나았어요.]
아주머니는 몇 초 느리게 답한 하정에 멈칫했다가 같이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배달도 없는지 유독 더 조용한 새벽이었다.
깊은 잠이 든 하정이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돋았다. 나쁜 꿈을 꾸는지 허연 얼굴을 찡그렸고 옅은 신음 소리를 냈다.
[으흑...으어어엉... 엉엉...]
꿈속에 나는 그냥 운다. 자신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그날 진짜 큰일이 날 뻔했다. 
놀이터에 있는 통 미끄럼틀 안에 온몸을 한껏 움츠린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새벽 시간이고 이른 봄이라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스며들었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왜 울어요?]
맑은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무릎을 감싸고 머리를 숙여 울던 난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눈물로 가득 찬 두 눈에 들어온 건 키가 작은 남자아이의 실루엣뿐이었다.
하정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시트는 축축했다. 
오랜만에 또 이 꿈을 꾸었다. 듬성듬성 끊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 장면.
매번 똑같았다.
결말이 없는 이 꿈은 몇 년 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았었다.
근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심경이 복잡해지는 하루긴 했다.
[누나. 무슨 일인지는 지금 묻지 않을 게요. 대신  다음에 내가 다시 연락할 땐 알려줘요. 오늘은 여기서 쉬세요.]
사람의 혼을 쏙 빼놓고 서울은 호텔 방을 나갔다.
그 자리에 조금 더 멍을 때리다 나도 거기서 빠져나왔다.
굳이 그런 곳에서 잘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권대표도 있을 그 호텔에서는,
나를 닮았다던 그 여자를 만나는 걸까.
스캔들을 신경 쓰는 거 같더니 저렇게 대놓고 자기 호텔에서 여자를 만난다고?
아니지.
바깥보다는 제 소관이  더 안전할 수도 있겠지.
땀으로 범벅이 된 찝찝함을 달래려면 샤워를 해야 했던 하정은 옅은 한숨과 함께 욕실로 향했다.
***
주말, 워라벨 호텔 입구.
"은서야, 여기."
말끔한 정장 차림의 준우가 입구에 갓 들어선 은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를 발견한 은서도 활짝 웃으며 총총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 안 늦었지?"
"응. 올라가자. 지금은 아기 사진 촬영 중이야."
"응."
준우의 안내를 받으며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위층으로 향했다.
온통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한 이곳은 지영이네 아기 돌잔치 장소였다. 사랑 넘치는 아기 사진들이 포토 테이블 위를 가득 장식했다. 눈도 제대로 못 뜬 금방 태어났을 때의 신생아, 범보의자에 겨우 걸쳐 앉은 100일 때 사진, 그리고 일상 속 웃고 우는 사진들. 그 어느 하나도 안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 사진이 없었다.
은서의 얼굴에 온통 화사한 봄기운이 맴돌았다. 준우는 그런 은서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빙글 미소를 지었다.
"근데 지영이 어디에 있지?"
한참을 사진에 빠져있던 은서가 주위를 살피며 주인공들을 찾았다.
"음... 아마 옥상에서 촬영 중일 거 같은데. 같이 가 볼래?"
"응."
은서가 격하게 머리를 끄덕이었다.
<옥상 정원>
"우르르~ 까~꿍~"
지영이 남편 팔에 꼭 안긴 아기는 졸린지 칭얼대었고 완벽한 사진을 찍기 위한 어른들의 고군분투가 엿보였다. 촬영 작가 옆에서 요상한 소리를 내며  딸랑이를 양손에 들고 주의를 주었지만 아기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빠한테서 엄마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어이구~ 우리 라희 어떡해~ 많이 졸렸쪄!~"
지영이가 입술을 한껏 오므리고 내밀며 아기를 남편한테서 조심스레 받아 안았다. 
한참을 어르고 달래며 진정이 되었지만 이제는 곤히 잠들어버린 아기 때문에 어른들은 난감했다. 그러나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보며 다들 얼굴에 기쁨이 서려있었다.
촬영을 급하게 마친 지영이가 준우와 나란히 서있는 은서와 눈이 마주쳤다.
아기를 꼭 안은 채 은서에게로 웃으며 다가갔다.
"강은서~! 왔구나?"
"응. 아기 참 예뻐. 지영이 너는 애 키우느라 고생했겠네."
얕은 숨을 솔솔 흘리며 잠든 아기의 얼굴을 사랑스레 쳐다보며 은서의 입이 귀에 걸렸다.
"고생 했지~ 오늘까지 기다리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야."
지영이가 지난 1년간 고생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는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있잖아.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생명이 찾아와서 저절로 뒤집지도 못하던 쪼그만 아기가 이리 컸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설레. 이제 3살, 4살이 되고 또 10 대가 되면 어떨지 너무 궁금해. 또다른 고난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지영은 잠든 아기 이마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은서도 같이 웃었다.
"준우야. 너 은서 바로 집에 보내면 안 된다? 오늘 네가 에스코트해. 알았지?"
지영이가 옆에서 싱긋 웃기만 하고 있는 준우한테 임무를 쥐어주 듯이 툭하고 던졌다. 
"알았어."

그 말에 여전한 미소쟁이 준우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은서 너도 좋은 남자 만나서 빨리 시집가. 네가 아들 낳으면 우리 애랑 사돈 맺자. 단지 우리 애가 연상인 거 괜찮다면?  너를 닮으면 얼마나 잘생긴 아들이 나오겠어."
"어?..."
갑자기 자기를 향한 결혼 얘기에 은서는 놀라서 입만 뻐끔거렸다. 
"은서 너 우리 애를 보는 눈빛이 남달라. 아기를 엄청 좋아하는 거 같아. 난 네가 하루라도 빨리 좋은 가정 이루었으면 좋겠어."
지영이가 한 손으로 은서의 손을 꼭 잡았다.
"으애애앵~"
선잠을 자다가 대화 소리에 잠을 깬 건지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머나~ 우리 라희 벌써 깼쪄~"
지영이가 다시 혀 짧은 소리로 아기를 달래기 시작했다.
돌잔치 행사는 짧았다. 옥상에서는 예민했던 아기가 정작 행사 중일 때는 거짓말처럼 하나도 안 보채고 프로 정신이 강해 보이는 촬영 작가에게 제대로 된 소원 성취를 해주었다. 
행사가 끝나고 지영이네는 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갔다. 
"은서야. 우리 조용한데 가서 커피 좀 마실까?"
주인공들을 보내고 나서 준우가 은서한테 물은 말이었다.
"어, 응."
<모 커피숍>

주문한 음료가 다 되었다는 진동벨이 울리자 준우가 카운터로 커피 챙기러 갔다. 

“자, 네가 주문한 허브티.“

은서 앞에 투명 유리잔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고마워.“

은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커피는 아예 안 마시는 거야?“

은서의 앞자리에 다시 앉은 준우가 아이스커피를 쭉 들이켜고 물어왔다. 

”안 마시는 건 아닌데 티를 더 좋아하긴 해.“

커피보다 티를 좋아하는 누구 덕분에. 

이 순간에도 점잖게 차를 호로록 마시던 그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영이가 애 엄마라는 게 이제 좀 실감이 나는 거 같아. 백일잔치일 때는 그때 사정이 있어서 참석을 못 했었거든. 오늘 이리 보니 진짜 엄마 맞더라고.“

준우가 여운이 남은 지영이네 돌잔치를 되뇌며 픽 하고 웃었다. 그 눈빛은 부러움 가득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 들더라. 우리가 이제는 진짜 이럴 나이구나 하는 생각.“

은서도 준우의 말에 동의하며 눈을 깜빡였다. 

”은서야.“

준우는 다시 만난 은서에게  계속 할 말이 있었다. 여태 하지 못했던 마음속 그 말. 

”응.“

”너는 결혼할 생각 없어?“

웃던 은서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글쎄…. 나 자신이 결혼한다는 생각은 깊게 한 적이 없었어.“

”왜? 비혼 주의자야?“

가볍게 시작한 질문에서 갑자기 정색해져 묻는 준우를 쳐다보던 은서가 풋 하고 웃었다. 

“왜 웃어?”

웃는 이유를 알 길이 없는 준우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너는 어때? 결혼할 여자가 있는 거야?”

자신한테 온 질문 그대로 준우한테 던졌다. 

“난…”

입을 열었다가 은서한테 말렸다는 생각에 준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뚜렷하게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결혼할 여자는 없는데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는 있었지.”
 
촘촘하고 기다란 속눈썹을  살짝 감았다가 천천히 뜬 준우는 세상 밝은 미소를 지었다. 웃으면 왼쪽 볼에 움푹 골짜기를 만들어가는 작은 보조개는 여전히 보기 좋았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별로 달라진 거 같지 않고.”

멍하니 준우를 쳐다보던 은서가 준우의 마지막 뱉은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 반달을 그리며 같이 웃었다. 

준우의 의중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굳이 콕 집어서 말하지 않은 이상 자신도 뭐라고 더 할 말은 없었다. 

같이 웃는 것밖에는.

추천 (2) 선물 (0명)
IP: ♡.214.♡.18
나단비 (♡.252.♡.103) - 2024/03/06 05:42:52

은서도 행복을 찾아가면 좋겠어요. 웃는 모습이 느낌 좋네요.

죽으나사나 (♡.214.♡.18) - 2024/03/06 07:41:46

행복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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