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55회)

죽으나사나 | 2024.04.09 14:07:11 댓글: 0 조회: 164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9685
너를 탐내도 될까? (55회) 너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누나!"
원하는 장소까지 데려다준 은서와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커피숍 안에 얼마 안 있었는데 저를 부르는 익숙하고 밝은 목소리에 하정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오래 기다렸어?"
가까운 걸 떠나서 훅 제 얼굴 앞에 다가온 서울에 놀란 것도 잠시 금세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놓으며 앞자리도 아닌 굳이 또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의자까지 끌어오며.
그 덕분에 하정의 몸은 자연히 옆으로 살짝 빼게 되었다.
너무 가까워.
서울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당황해하는 하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굴엔 기쁨, 슬픔 하나 없이 고요했다.
아침 출근 시간에 정연 누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누나가 이상하단다. 
쌍둥이 언니를 알고 난 뒤로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갑자기 안 하던 운동을 하고 가끔씩 멍을 때린다고 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고 했단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한테 전화를 한 거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바로 오늘 스케줄을 확인했다. 퇴근해서 만나도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다른 동료가 가야 할 외근을 뺏어서 회사에서 나왔다. 회사는 돌아가야 했지만 핑계를 대고 퇴근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 이제부터 뭐 할까?"
속을 꿰뚫을 듯 하정을 지그시 직시하던 서울이 입술이 떨어졌다.
"뭐? 너 오늘 꼭 봐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아...
그랬었지. 아니면 안 만나줄 거 같아서 큰일이라도 있는 듯 얘기했었지.
그걸 깜빡한 서울이가 순간의 실수에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하정의 팔을 당겼다.
"가자."
"어딜?"
"파주"
싱긋 웃으며 엉거주춤 일어나는 하정의 팔을 내리쓸어 어느새 손을 맞잡은 서울에 의해 커피숍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파주는 왜 가?"
서울의 차에 올라가자마자 안전벨트를 매주려고 손을 뻗는 서울의 의도를 알아챈 하정이가 급히 제 손으로 클립을 잠그며 물었다.
사뭇 아쉬운 표정을 한 서울이가 하정에게 비스듬히 기댔던 몸을 운전석으로 바로잡으며 답했다.
"지혜의 숲."
"거긴 뭐 하는 곳인데?"
"도서관이야."
"응?"
시동을 거는 서울을 눈썹을 구기며 쳐다봤다.
"아, 누나 책 안 좋아하나?"
서울이 하정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뭐...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하정이 뜸을 들이며 답했다.
일하면서 진짜 필요한 자료 아니면 굳이 느긋하게 책을 읽은 적이 없었던 지라 도서관은 평소에는 갈 일이 없긴 했었다.
"거기 일반 도서관보다 꽤 크고 괜찮은 곳이라 책을 안 좋아하는 사람도 한 번쯤은 가볼 만한 곳이야."
"아..."
입을 쩝쩝 다시며 별로 내키지 않는 하정의 표정을 보며 서울은 픽 하고 웃었다.
파주로 가는 길에서 하정은 조용했다. 적막이 흐르는 차 안에서 서울은 음악을 틀었다.
<언제부터인지 그대를 보면
운명이라고 느꼈던 걸까,
밤하늘의 별이 빛난 것처럼
오랫동안 내 곁에 있어요>
잔잔한 멜로디에 애틋한 가사가 흘러나왔다.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던 하정이도 어느새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느껴졌다.
서울은 그저 그렇게 하정에게 말을 안 붙인 채 조용히 운전만 했다.
"와..."
도서관으로 들어선 하정의 입에서 나지막이 감탄이 나왔다.
"책이 정말 많네."
떡 벌어진 입과 눈으로  천장까지 솟은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 땅꼬마로 보일 만큼 천장 높이가 어마어마했다.
평일인데도 꽤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 내부를 구경을 하기도, 여기저기에 배치한 의자에서  책을 읽기도 했다.
서울은 생각해두었던 책이 있었는지 하정이 보고 잠깐 구경하고 있으라고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하정은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무감하게 빼곡히 꽂혀있는 책을 훑다가 다른 곳엔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해 앞으로 더 가려 했다.
"누나."
뒤에서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저를 부르자,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휴대폰을 꺼내 들고 하정을 향해 사진을 찍는 듯한 포즈의 서울을 보았다.
"뭐해?"
서울은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하정이  앞으로 다가와 자연스러운 하정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의 하정은 서울이가 뭐하나 싶어서 두 눈은 동그랬고 표정은 없었다.
"예쁘다."
갑자기 허락도 없이 찍힌 사진을 보며 하정은 그저 싱긋 웃는 서울을 힐끗 흘겨보았다.
"갑자기 웬 사진을 찍어?"
"여기서 다들 한 번씩 찍길래. 생각해 보니 나한테 누나 사진이 없더라고."
"뭐? 그럼 너도 찍어 줘?"
"아니."
놀리 듯이 픽 웃으며 성큼 앞으로 걸어가는 서울이다.
...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 책 다 골랐어?"
도서관이라 해서 그 자리에서 책이라도 읽을 줄 알았던 서울은 책 몇 개를 고르고 난 뒤 결제를 하고 나왔다.
"읽는 건 집에 가서 천천히 할 거고. 그냥 좀 유명한 거 같아서 와봤어. 그리고 누나가 나 책 읽는 동안 안 기다려줄 거 같기도 하고."
말하면서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하정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는 걸 잊지 않았다.
"조금은 기다려줄 수도 있는데..."
하정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금은 얼마나?"
"응?"
그냥 한 소리에 서울이가 물어왔다.
"뭐... 30분?“
입을 삐쭉거리며 답하는 하정에 서울이 소리 내어 웃었다.
"됐네요. 누나랑 같이 뭔가를 하고 싶은 거지 누나가 나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아."
주차장에서 뒤따르던 하정이가 걸음을 뚝 멈추었다.
발자국 소리가 안 들리자 앞서 걷던 서울이가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왜 그래?“
고개를 살짝 숙였던 하정이가 짙은 서울의 눈동자와 마주하며 입매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다음 코스는 뭐야?"
"응?"
"우리 데이트하는 거 아니었어? 다음 코스는 뭐냐고."
갑자기 깨우치기라도 한 듯 뱉은 그녀의 말에 서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은... 프로방스?"
역시나 가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하정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서울은 그녀의 이마를 탁하고 튕기고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앗. 뭐야."
난데없이  밀려오는 이마 통증에 그에게 끌려가면서도 하정은 다른 한 손으로 제 이마를 부여잡았다.
"소문이 맞나 보네. 회사서 누나가 지독한 일벌레라고 소문난 게.“
그동안 도대체 뭘 즐기면서 산 거지? 
서울은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들한테는 혈기 왕성하고 호기심이 많은 20대 시절은,
하고 싶은 걸 하고 도전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특권 같은 나이였을 텐데 누나는 그동안 왜 회사에만 매진을 한 걸까.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정연 누나한테서 들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양 부모님은 누나만 두고 이민을 가셨다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14살이던 누나는 그때도 그분들이 저를 버릴까 두려워했다.
근데,
성인이 되어서 이제는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서 누나만 두고 간 것일까.
아니면 질투심으로 죽은 제 아들의 추억을 훼손한 누나에 대한 벌인 걸까.
꼭 그렇게 누나를 버리고 가야만 했을까.
그렇게 옆에 두고 봤으면서도 누나는 저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걸까.
우리 누나 어떡하지.
그동안 정연 누나라도 곁에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누나한테는 정연 누나밖에 없었다는 게 제 마음을 너무 무겁게만 했다.
처음 우연히 누나를 봤을 때라도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누나를 더 챙겨줄 수 있었을 텐데.
몰랐다.
밝게 웃는 내면에 그런 아픔이 또 생겼을 줄은.
잘 살았는 줄 알았다.
그랬으면 했으니까.
"누나 연애해봤어?"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역시나 조수석에 올라탄 하정이가 가늘게 뜬 눈으로 서울을 째려봤다. 아직도 제 이마를 갑자기 튕긴 거에 삐진 거 같았다.
"자. 나한테도 한 대 때려."
서울이가 하정에게 몸을 기울며 가지런히 내려왔던 제 앞머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뽀얀 이마를 보여줬다.
"진짜 한다?" 라는 말과 동시에 순식간에 서울의 이마에 딱하는 소리와 함께 하정의 가는 손가락이 튕겨졌다. 생각보다 꽤 힘이 들어가 뽀얀 이마가 금세 발갛게 올라오고 있었다.
"풋,"
살짝 찡그린 서울의 눈꺼풀을 보고 나서 하정은 그제야 웃었다.
"짜식, 꽤 아프지?  그니까 이제 누나한테 덤비지 마. 난 받은 그대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거든."
어깨를 으쓱하면서 벨트를 당기려던 하정의 손을 덮으며 서울이가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하정의 두 눈동자가 한없이 커져 갔다. 제 손을 덮고 벨트를 당겨주면서 하정의 입술에 맞닿은 서울이 때문에.
하정이가 무슨 반응이라도 하기 전에 하정에게서 금세 떨어진 서울은 그녀 대신 클립을 잠갔다.
"...야."
무척이나 당황한 하정이가 ​미간을 한껏 좁히며​ 여유로운 표정의 서울을 노려봤다.
"아, 난 그냥 테스트를 한 건데."
입매를 끌어올리는 서울은 제 입술을 깨물고 있는 하정에게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누나가 받은 건 그대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린 대서 이것도 돌려주나 해서."
허,
하정의 작은 입에서 탄식이 흩어져 나왔다.
얘는 뭐지, 하는 표정으로 한참을 째려보는데 시동을 걸던 서울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 돌려줘요?"
씩 웃었다.
"야!!"
좁은 차 안에서 귀까지 빨개진 하정의 앙칼진 목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서울은 씩씩 거리는 하정이 때문에 제 배를 끌어안으며 깔깔 웃어댔고 하정은 더 열받았는지 그의 어깨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누나랑 있으면 너무 좋아.
나랑 이대로 쭉 같이 있을래?
나랑 같이 있으면,
내가 누나를 평생 웃게 해줄 수 있는데.
하정에게는 들리지 않는 그 말들을 서울은 속으로 곱씹었다.
이제 날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이들은 프로방스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저녁을 먹어야 했다.
"누나. 닭갈비 어때?"
"응. 좋지."
아직도 화가 나 있나 싶어서 하정의 눈치를 살피던 서울은 벌써 잊었는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성큼 식당 안으로 먼저 들어가는 하정의 뒷모습을 보며 느릿하게 뒤따라 들어갔다.
“누나. 받아.”

적당한 자리를 찾아 마주 앉은 서울이가 하정이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책?”

아까 서울이가 도서관에서 결제한 책 중 하나였다. 

“왜 나한테?”

하정이 두 눈을 깜빡이었다. 봉투에 들어있는 책을 꺼내보라는 듯 눈짓하는 서울을 보다 마지못해 책을 꺼내들었다. 

<나를 가장 나답게.>

책 제목이었다. 

한참을 제목만 응시하던 하정이가 다시 봉투에 넣으면서 서울이 앞으로 밀었다. 

“나 책 잘 안 봐. 특히 이런 책은 더욱더.”

14살 때  강박성 인격 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꽤 오랜 기간 동안 심리치료에  들어갔다. 

마음을 치료한답시고 많은 책을 사들였던 그분들 때문에 억지로 읽었었던지라…

이런 류의 책은 특히나 달가워하는 편은 아니었다. 

“꼭 안 읽어도 돼요. 제 선물이니까 그냥 받아요.”

진중해진 서울의 태도에 이미 산 책을 물리라 하기도 뭐하니 하정은 입매를 길게 늘리며 고맙다고 했다. 

분명 저를 생각해서 일부러 산 것일 테니…

그 마음은 정말로 고마워. 서울아. 

하정의 눈이 반달로 접혔다. 

너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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