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6회)

죽으나사나 | 2024.02.15 11:22:11 댓글: 2 조회: 357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47359
너를 탐내도 될까?    (6회) 딱 한 번뿐이었던 군인 아저씨.

강은서.  나 내일 결혼해. 

이 말은 그녀한테 직접 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오래전 짜여있던 정략결혼도 그대로 진행되었다. 

“정략결혼 같은 건 싫어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한다고 하셨어요?”

교양이 넘치는 집안 자제답게 술을 꽤 마셨는데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연이가  가냘픈 턱에 힘을 주며 하는 말이었다. 

약혼 얘기는 기혁이가 입대할 때쯤 이미 나왔었다. 그때는 죽어도 싫다고 펄쩍 뛰더니 2년 만에 순순히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 건 조금 이해가 안 갔다. 적어도 어릴 때 보았었던 기혁은 한번 뱉은 말은 다시 물리지 않았다. 

S 그룹 막내딸 김도연은 양쪽 어르신들 가족 행사에서 기혁이와 안면을 튼 사이였다. 승호는 매번 예의 바르고 예쁘게 커가고 있는 도연일 볼 때마다 기혁이 짝으로 점 찍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 기혁이가 독립을 하고서는 거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저희 같은 사람은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싫든 말든 제 의지와 상관없이.“

”… 그렇죠.“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도연이 너라서 다행이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 예의상으로. 

”좋아하는 여자는 없는 거죠?“

기혁이 잔에 술 대신 물을 따르던 도연이가 싱긋 웃으며 무심코 건네는 말이었다. 

”있어.“

”…“

따르던 물을 잠깐 멈추었다가 이내 다시 잔에 채워졌다. 

“다행이네요. 저도 사실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서로 미안해할 필요가 없겠네요.”

개의치 않다는 듯 여전히 싱긋 웃는 그녀를 기혁은 무감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 

”근데, 결혼하고도 따로 만날 거예요?“

물병을 살포시 내려놓으며 도연이가 물어왔다. 

“…”

하…

당신은 진짜… 

여전히 거짓말을 못하는군요. 일주일 뒤면 결혼식인데, 그 뜻인즉 내가 당신의 공식적인 아내가 될 거란 얘기인데 예의는 지켜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적어도 만나지 않을 거란 거짓말은 해줘야죠. 

기혁이한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도연이 속마음이었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가 다시 별일 없 듯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체 어떤 여자기에…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기혁은 도살장에 팔려가기라도 하 듯 결혼식 내내 표정이 어두웠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도연이도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내색을 안 했다. 

신혼여행은 없었다. 

이유인즉,
사실 승호의 몸이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었다.  심근경색으로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모든 걸 급히 앞당겼다. 

식이 끝나면 기혁이가 본격적으로 영진 그룹 경영권 승계 작업을 서둘러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장남인 권기훈은 해외 봉사 활동을 간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몇 년째 소식이 끊긴 상황이라 재벌가의 흔한 경영권 다툼은 없었다. 

주총에서 반대하는 임원들이 여럿 있었지만 지지율에 비해 너무 미약했고 그 어떤 잡음도 없애려면 공략을 걸어야 했다. 현재는 임시 대표 자리고 1년만 지켜봐달라고 했다. 그때 가서도 아니다 싶으면 기꺼이 물러나겠다고 했다. 

1년간, 영진 그룹 그 어디에도 그의 노력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언제가 낮이고 언제가 밤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일에만 매진했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기혁이 폰에 문자가 하나 왔다. 

<은서 요즘 잘 지내고 있어요. 대표님 말씀대로 장 마담이 잘 케어해주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기혁이한테서 부동산 명함을 받았던 웨이터가 수시로 은서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일에 묻혀 자주 갈 수가 없으니 장 마담이라는 여자한테 거금을 쥐여주고 은서한테 해코지하는 인간이 없게 신경을 써달라고 했다. 

그리고 은서의 빚을 갚기로 한 그 20억은…

도연과의 결혼식에, 그룹 경영권 승계까지 끝나자 승호는 약속대로  20억 현금을 바로 꺼내주었다. 

“이야, 부동산 업자로만 알았었는데 예상외의 대단한 인물이셨더라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따블로 부를 걸 그랬습니다. 영진 그룹 권기혁 임시 대표님.”

돈을 받아 쥔 사채업자는 낄낄 웃으며 금으로 도배한  노란 어금니를 드러냈다. 

“내가 누군지 알았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겠지?”

의기양양한 사채업자한테 꽂은 기혁이 시선은 여지없이 싸늘했다. 입 벌리고 헤벌쭉 웃고 있던 사채업자는 어딘가 모르게 기분 나쁜 서늘함을 느껴 올라갔던 입꼬리를 살며시 떨어뜨렸다. 그리고 흐트러져있던 자신의 상체를 앞으로 당겼다. 

“암요, 이제 강은서는 대표님 겁니다. 저희는 오늘부로 깔끔하게 손을 떼도록 하죠.”

“그 말을 꼭 지켜야 할 겁니다.”

힘이 꽤 들어간 기혁이 날 샌 어조였다. 

***

그날 밤, 기혁은 K 룸살롱으로 향했다. 자기가 직접 은서한테 말할 테니 그자들한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자신을 옥죄고 있던 빚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기뻐할까, 
버스 안에서 발랄하게 웃고 떠들던 은서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비록 고맙단 말을 들으려고 도와주는 게 아니지만 그 고운 얼굴로 방긋 웃으면서 무슨 말을 전할까.

그러나, 

기혁이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혹시 저를 좋아하세요?”

기혁을 보자마자 비꼬며 묻는 은서의 질문이었다. 

“여태 저를 좋아한다던 사장님은 참 많더라고요. 비싼 음식, 비싼 옷을 사줄 테니 같이 나가 자네요. 자꾸. 대표님도 그런 맘이시냐고요.“

어딘가 혐오까지 담긴 목소리였다. 

왜…?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기혁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20억을 저한테 쉽게 베푸셨죠. 이제 그럼 저는 대표님 거겠네요. 어떤 걸 원하세요? 해달란 대로 다 해드릴 수 있어요.“

독기 어린 말이었지만 은서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에 고장이 난 듯 기혁은 그러는 은서의 말에 반박할 단어를 찾지 못해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다. 

”다른 사람이랑 같은 거죠? 그 더러운 생각. 그렇죠?“

이 세상에 체념을 한 듯한 은서의 풀린 동공이 계속 흔들렸다. 

”그 20억, 저 대표님한테 빠른 시일 내로 못 갚아요. 대표님께서 못 기다리시겠다 하시면 제가 기꺼이…“

기죽지 않고 또박또박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다가 뒷말이 흐려진 은서.  그 커다란 눈에서는 어느새 투명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홍조를 띤 볼을 타고 내려간 액체는 그녀의 갸름한 턱선에 잠깐 멈추다 앞 가슴에 툭 하고 떨어졌다. 

“강은서.”

기혁이가 예상한 반응은 아주 확연하게 빗나갔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아무 기억이 안 나냐고.

기혁이 말에 구슬 같은 눈물을 슥 닦아내던 은서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알죠. 군인 아저씨.“

그래서 다시 만난 그날이 죽도록 싫었다는 건 모를 테죠. 이런 곳에서 그런 꼴로 만나게 되었으니 제 속이 어떠했겠냐고요. 

그냥 모른 척 다시 안 오면 되잖아요. 왜 나를 자꾸 찾는 건지. 죽지 못해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나한테 왜 자꾸 자극을 주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슬픔과 원망이 뒤섞인 은서의 눈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기혁은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들이 은서한테 충분한 오해의 여지를 줬다는 걸 느꼈다. 

”널 어떻게 하려고 빚을 갚아준 게 아니야.”

해도 될까, 이런 말을. 

속으로 많이 되뇌다 끝내 참지 못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네 전화를 기다렸었어. 나는.“

그러자 서늘하던 은서의 눈빛이 다소 부드러워지는 걸 느꼈다. 

애초에 이런 말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왜 이런 말을 여기서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자신을 향해 차갑게 울고 있는 그녀한테 해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버스 안에서의 네 모습은 그랬으니까. 네 전화를 기다렸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생각했어.“

거기서 끝이어야 했어. 

”근데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 알 게 된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 네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 빚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너를 안 도와줄 수가 없었어.“

”아저씨가 뭔데요? 우리 딱 한 번밖에 못 봤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내가 빚을 핑계로 이 일을 선택했을 수도 있잖아요.“

은서가 더욱 날을 세우며 날카롭게 따졌다. 

그래, 네 말대로 딱 한 번 만난 너를 도와주려고 내가 치른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 너는 알면 알면 기겁을 하겠지. 

여태 내가 살면서 하는 모든 일에는 머리가 먼저 움직였었다. 그다음엔 가슴. 그래야 냉정한 판단을 오판 없이 내리기 쉬웠으니까. 얕은 감정에 휘둘릴 일이 없었다. 

그런데 복도 한구석에서 그놈한테 맞아서 초라하기 그지없는 너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내 가슴속에 난도질을 하는 거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가 않더라. 처음이었다. 

머리를 제치고 가슴이 시켜서 한 행동은. 

점점 더 빨려 들어가는 거 같았다. 넌 그냥 그 자리에 있는데 난 너라는 자석에 끌려 다가가게 되고 점점 더 궁금해지고 보고 싶어지더라. 

이런 게 혹시 그런 거라면….

“피지 못한 꽃송이가 나쁜 어른들 때문에 활개 한번 못 치고 여기서 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뭐, 꽃봉오리는 아니라도 이제 피려고 하는 꽃송이? 근데 지금은 아저씨 같은 어른 때문에 활개도 못 치고 지려고 하는 꽃이라고 하면 될까?]

은서의 가늘어져 있던 눈동자가 커졌다. 

장난을 치며 하던 나의 그 말을 기억하고 지금 이 순간에 그걸 끄집어내다니… 저 사람은 대체 어쩌려고.

“그때 빚을 갚았다 생각해. 네가 연락을 안 해서 못 갚았잖아.“

하…

36400원이었던가.

그걸 20억으로 갚았다고요?

너무 큰 대가 아닌가요.

은서의 표정이 또 한 번 부드러워졌다가 서늘해졌다. 

7살이 되던 해, 엄마는 아빠에 의해 죽고 아빠는 절로 목숨을 끊었다. 부모님은 없어도 여느 아이들처럼 버티고 지낼 수 있었던 건 자신을 많이 아껴주던 우희 이모의 살뜰한 보살핌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나의 반쪽 은지를 생각하면서 그리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희망이 있었으니까. 

아저씨를 만났던 그때가 아마 나의 마지막으로 순수했던 모습이 아닐까 싶다. 허황된 미래로 기대가 가득 찬 바보 같은 내 모습이었겠지만.

“빚을 갚아주면 제가 고맙다고 할 거 같았나요?”

여전히 뾰족한 칼날을 뱉은 은서의 말이었다. 

“일하면서 갚을 게요. 채권자가 바뀌었을 뿐이지 저한테는 달라지는 게 없어요.”

“여기서 나와. 그게 나한테 갚는 거야.”

“너무 과분한 거 알죠?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일단 나와서 다른 걸로 갚아.”

“어떻게요?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아서 어느 세월에 갚으라고요?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텐데요?”

[야. 강은서. 너 대학 졸업하고 반듯한 직장을 찾는다고 쳐. 그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언제 그 많은 빚을 갚냐? 여긴 고객 하나 잘 물면 네가 우리한테서 벗어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빠를 수 있다니까?]

은서 속이 울렁거렸다. 그 더러운 입으로 고양이가 쥐 생각하듯이 비아냥거리던 사채업자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나오기만 하면…”

“전 안 나가요.“

전 못 나가요. 

”왜, 왜 싫다고 하는데!“

참다못한 기혁이 크게 화를 냈고 은서는 흠칫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천 (1) 선물 (0명)
IP: ♡.101.♡.169
나단비 (♡.252.♡.103) - 2024/02/15 12:44:50

잘 보고 있습니다. 재밌어요.

죽으나사나 (♡.101.♡.169) - 2024/02/15 14:12:49

감사합니다

22,943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3044
죽으나사나
2024-03-31
1
260
죽으나사나
2024-03-28
1
262
죽으나사나
2024-03-26
1
357
죽으나사나
2024-03-24
1
420
죽으나사나
2024-03-20
1
435
죽으나사나
2024-03-19
1
270
죽으나사나
2024-03-18
1
348
나단비
2024-03-17
3
342
죽으나사나
2024-03-17
1
236
죽으나사나
2024-03-16
1
272
죽으나사나
2024-03-15
1
255
죽으나사나
2024-03-14
1
270
나단비
2024-03-14
2
239
죽으나사나
2024-03-13
1
261
죽으나사나
2024-03-12
1
568
죽으나사나
2024-03-12
1
636
죽으나사나
2024-03-11
1
655
죽으나사나
2024-03-11
1
576
죽으나사나
2024-03-10
2
563
죽으나사나
2024-03-10
2
633
나단비
2024-03-09
2
552
죽으나사나
2024-03-09
2
538
죽으나사나
2024-03-08
2
558
죽으나사나
2024-03-07
2
513
죽으나사나
2024-03-06
2
535
죽으나사나
2024-03-05
1
256
나단비
2024-03-04
2
225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