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17회)

죽으나사나 | 2024.02.27 09:04:51 댓글: 0 조회: 227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0008
너를 탐내도 될까? (17회) 실수입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에서 아는 얼굴이 많은 영진 그룹 대표와 마주 서서 그날 밤 얘기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 바람에 의도치 않게 또 그날 그 객실로 들어왔다. 

9120호.

하정이는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간 사냥감 마냥 마른 침만 꿀꺽 삼켰고 손바닥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테이블 하나를 두고 자신 앞에 떡 하니 앉아 있는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하정이는 누가 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런 표정으로 거기에 서있었어요?”

입을 먼저 뗀 건 기혁이었다. 

자신을 잡아달라는 신호 같은 거였나요?

“하품을 하는데 딱 마침 마주쳤던 거예요.”

누구라도 울었다는 걸 바로 인정하기엔 뻘쭘하겠지만 말하면서 뭐에 삐진 듯한 저 말투는 뭐지? 

기혁이 소리 없는 헛웃음을 쳤다. 

“윤하정 씨. 날 좀 봐요.”

내내 시선을 다른 데만 두고 있는 하정을 불렀다. 몇 초 멈춰 있던 시선이 천천히 기혁이한테로 향했다. 그러다 이내 또 갈피를 못 잡은 채 딴 데로 돌려버렸지만. 

“그날 일은 미안했어요. 술을 좀 마셨는데…. 윤하정 씨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하정이가 고개를 돌려 기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차가워진 그 시선으로 왠지 기혁을 크게 혼내는 느낌이 들어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다른 사람 누구요?”

마주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하정이가 물어왔다. 

누구라고 해야 하지? 갑자기 당신의 쌍둥이 언니라고 하면 
많이 혼란스럽겠지?

은서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오픈하는 건 원치 않을 테니.

“그런 사람 있어요. 미안합니다. 술로 인한 실수입니다.”

기혁이가 뱉은 말이 무척이나 불쾌한지 하정의  한쪽 눈썹이 한없이 치켜 올라갔다. 

얼마 전, 

회사 1층에서 자신의 이름을 로비가 떠나가라 부르던 이 여자. 보안 직원한테 잡혀 있을 게 뻔했는데 어떻게 그 손에서 빠져나왔는지 엘리베이터 안으로 자신을 밀치고 들어왔더랬지. 닫히는 문틈으로 이한이가 바닥에 우스꽝스럽게 자빠져 있는 걸 보고는 웃음을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 

그리 좁지 않은 엘리베이터인데도 자신한테 바짝 붙어서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그 덕분에 검정 수트에 얼굴을 들이박기까지. 나중에야 알았는데 수트에 커다랗게 분가루가 찍혀 있었지. 

그리고 나랑 눈을 마주쳤을 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서랑 똑같은 얼굴,

찾으면 금방 찾았겠지만 굳이 찾고 싶지 않았던 은서의 동생이었다. 

이름이 윤하정이라고?

[납품일을 조금만 늘려주세요. 대표님.]

[왜 그래야 하죠?]

[그건…]

당당하게 쳐들어온 것과는 다르게 벙해 서있는 그 모습을 보니 이런 당연한 질문에 답조차 생각을 안 하고 온 모양이었다. 

[왜 그런지 합당한 이유도 못 찾은 채 저를 찾아온 겁니까?]

은서는 동생인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신념 하나로 자기 자신을 희생했다. 수많은 괄시를 받으면서 제 뜻대로 살지를 못했지. 그러는 당신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겠지. 적어도 은서보다는. 

쌍둥이라서, 자매라는 천륜이라서 그렇다지만. 
당신이 뭐길래,
뭐길래 은서만 다치면서 살아야 하는지. 

저도 모르게 유치한 마음이 들었다. 괘씸했다. 비록 아무것도 모를 그녀라는 걸 알지만. 

[소송을 한답니다.]

[소송? 누가.]

[저희 회사에서 이번에 사고를 친 회사 상대로 소송을 할 거라는데 그 보상액이 어마어마해요. 그 작은 회사가 감당을 못할 겁니다.]

근데 분명히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쓸데없는 오지랖은 은서랑 비슷했다. 

[… 이번 한 번만 눈을 감아주시면 다음엔 아무 차질이 없도록…]

[다음은 없습니다. 이만 나가세요.]

간절한 눈빛을 쏘는 이 여자를 매몰차게 내쫓았다. 합당한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본부장한테 제안서를 들고 나타난 이 여자를 다시 만나보아야 했다. 굳이 둘이서 따로 만날 필요는 사실 없었다. 

은서의 동생이라고 해서. 
어떤 사람으로 컸는지, 상처가 많은 은서랑 이대로 만나도 될지.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싶었다. 

[내가 그쪽 회사 납품일을 늘려줘야 하는 이유 다섯 가지를 대세요.]

만나서 할 얘기가 뭐였던지 잊었다. 사실. 

단도직입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을 수도 없으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 아니죠?]

누구든 그 상황이면 얼굴 근육이 일그러졌을 거였다. 이 여자도 그랬다. 마구 구겨진 종잇장처럼 그랬다.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

쓸데없는 거에 시간을 들이는 건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난처해하는 이 여자를 보며 은서 생각이 났다. 

아무리 봐도 너무 닮았다. 당돌하던 표정은 은서한테서 이제 흐릿해져갔고 이 여자한테서 학생이었던 은서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힘드시면 없던 일로 하죠.]

더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해져서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너무 닮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여자를 마주 앉아서 보기가 싫어졌다. 

[저 저, 대표님. 생각났습니다. 다섯 가지 이유.]

결정은 사실 식당으로 향하기 전에 내렸다. 계약 유지와 함께 하윤정이라는 이 여자도 같이 크루즈 패션쇼에 투입하기로. 

이 여자는 처음엔 돌처럼 굳어있더니 어느새 표정이 풀리면서 꽤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기혁이가 만든 차가운 분위기를 금세 따뜻한 물에 세제 녹이 듯이 풀어헤쳤다. 

“저기요, 권기혁 대표님.”

너무 사색에 빠져 있었나,
하정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기혁을 노려본다. 

“그냥 실수라고 하면서 이렇게 끝내시려고요?”

응?

하정의 꼿꼿한 시선에는 당황의 기색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게 아닌데,

당황한 건 하정이가 아니라 기혁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어이가 없긴 하네요.”

하정이 한쪽 다리를 올려  X 자로 꼬며 말을 이었다. 

“제가 누구랑 헷갈릴 정도로 그리 흔한 얼굴이라 생각 한 적은 없었는데, 착각했다는 그 말이 너무 어이가 없네요.”

이 여자는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혹시 이틀 동안 저를 일부러 피해 다니신 거 아니시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요. 저를 굳이 피할 이유는 없겠죠?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안 하면 되니 까요.”

그의 말을 확 자르고 하정이가 하루 종일 주머니에 갖고 있던 카드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착각을 하셨던 말던 이건 돌려드릴게요.”

기혁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올려있는 카드로 시선을 멈췄다. 

“아, 오늘 극장에서 쇼 준비를 하면서 스태프들이랑 같이 군것질을 했는데 대표 님 카드로 긁었어요. 대표로서 직원한테 그 정도는 사 줄 수 있는 거죠?”

허,

기혁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럼 대표 님 해명 잘 들었으니 이제 가볼게요.”

눈에 힘을 잔뜩 준 하정이가 예의 갖춘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덜컥- 하는 객실 문 소리가 귓가에 맴돌더니 사방은 금세 조용해졌다. 

이상하다. 

상처받은 얼굴로 울거나,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러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냥 술 때문이라 말했다. 

또 술 때문이 컸으니까.  

근데….

뒤끝 하나 없이 나가버린 그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기혁이 마음이 이상하리 만큼 가슴에 돌멩이를 얹은 듯 답답했다. 
종잡을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하정이한테 한 방을 먹은 느낌이었다.
***

“나쁜 새X .”

선상 위로 올라간 하정이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어둑한 바다를 멀리 응시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 멋대로 친한 척을 하고 지 멋대로 객실까지 쳐들어와 그런 표정으로 사람을 흔들어 놓고 뭐 실수다?

날 대체  뭘로 보고 그랬던 거지?

실수란 말만 달랑 하고 끝내려고 하다니. 

자기가 대표면 다야? 그것도 우리 회사 대표도 아니면서. 

그러고는 나한테 계약 유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를 대라고 했더라?

자신은 이렇게 얄팍한 사과 하나로 끝내려고 하는 남자가!!

하,

기가 하도 차서 헛웃음만 몇 번 나왔는지 몰랐다. 

난간을 꽉 틀어잡았다. 몸은 바짝 앞으로 당겼고 난간 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주르륵,

억울해, 너무 억울해.

가슴으로 처음 느낀 간질 거리는 감정이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화가 나는데 억울함에 참았던 눈물이 차고 올라왔다. 

객실 안에서는 허벅지를 꼬집으며 다행히 겨우 버텼다. 

윤하정. 길게 살지는 않았지만  생을 포기하려던 이 순간에 이런 감정이나 느끼고. 

너도 참 웃기는 인생이구나. 

너를 낳은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너는 형제자매가 있을까. 

알츠하이머병은 가족력이라는데 누굴까. 아팠던 사람이. 

좋은 분들은 아니었겠지. 아니면 너를 버렸을 리가 없겠지. 

곧 7월인데 늦은 밤의 바닷바람은 그리 따뜻하지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나, 높은 크루즈선 꼭대기 층에서 아래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하정이한테,

“누나!!“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인데 생소한 부름과 함께 그 사람의 힘에 끌려 바짝 붙어있던 난간에서 저 먼발치로 떨어져 나갔다. 

“아앗.”

아픈 손목을 어루만지며 하정이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요? 난간에 그렇게 바짝 매달려 있다가 떨어지면 어떡하려고요!”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한테 다짜고짜 화를 내는 이 인간은…
 
박서울이었다. 

“아니면, 또 죽고 싶어서 그래요?”

하정이 눈물로 게스름하던 눈이 번쩍 뜨이면서 동공이 커져 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이 크루즈 선 안에서는 아니다. 

근데, 또 라니?

박서울은 어떻게….

인상을 확 구긴 채 자신을 마주한 서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박서울 씨, 혹시…“

점점 더 서늘해지는 바닷바람과 함께 하정이 속도 덩달아 불안이라는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날 그 호텔에 있었던 남자… 아니죠??“

따지며 달려든 하정이 양손이 어느새 그의 가슴 팍에 올라갔다. 

얇은 티셔츠 위로 그의 살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하,

서울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하정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같은 회사 다닌다고 했지만 서울은 그저 하정이가 주변을 그다지 신경을 안 써서 본 적이 없었거나, 서로 아무런 인사를 주고받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기만 한 그냥 그런 직장 동료였을 거다. 

그럼에도 크루즈 선에서 처음 만난 서울이는 하정이한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말과 신체 접촉을 이어갔었다. 

하정이 생각이 맞다면…,

지금의 서울은 하정을 하룻밤을 같이 보낸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라는 기분 더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다. 
"누나. 아니, 팀장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자꾸 이러는 거예요? 도대체 팀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데요!?"
따져 봐야 할 건 하정이 같은데 그녀보다 더 열을 올리는 건 서울이었다.
추천 (2) 선물 (0명)
IP: ♡.101.♡.169
22,943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보라
2006-08-09
33
63040
죽으나사나
2024-03-31
1
260
죽으나사나
2024-03-28
1
257
죽으나사나
2024-03-26
1
356
죽으나사나
2024-03-24
1
420
죽으나사나
2024-03-20
1
433
죽으나사나
2024-03-19
1
266
죽으나사나
2024-03-18
1
348
나단비
2024-03-17
3
339
죽으나사나
2024-03-17
1
233
죽으나사나
2024-03-16
1
270
죽으나사나
2024-03-15
1
255
죽으나사나
2024-03-14
1
270
나단비
2024-03-14
2
238
죽으나사나
2024-03-13
1
261
죽으나사나
2024-03-12
1
565
죽으나사나
2024-03-12
1
635
죽으나사나
2024-03-11
1
655
죽으나사나
2024-03-11
1
575
죽으나사나
2024-03-10
2
561
죽으나사나
2024-03-10
2
630
나단비
2024-03-09
2
550
죽으나사나
2024-03-09
2
538
죽으나사나
2024-03-08
2
553
죽으나사나
2024-03-07
2
513
죽으나사나
2024-03-06
2
534
죽으나사나
2024-03-05
1
253
나단비
2024-03-04
2
224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