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21회)

죽으나사나 | 2024.02.29 19:58:11 댓글: 2 조회: 573 추천: 3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0783
너를 탐내도 될까? (21회) 공생은 개뿔.

정연이한테 온갖 추궁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온 하정은 오늘따라 유난히 적막이 도는 이 고요한 집안이 더 싫어졌다.

터벅터벅 거실로 걸어가 진그레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습관적으로 티비를 틀었다.

스무 살이 좀 지났나, 엄마 아빠는 갑자기 선전포고를 했다. 태국으로 이민을 갈 거라고 했다. 혼자 잘 살아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진짜 그 다음 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때부터 하정은 쭉 혼자였다.

티비는 이 집안의 적막을 깨기 위한 수단이었다. 마침 토크쇼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MC들이 배를 끌어안고 깔깔깔 웃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그 웃음에 전염이 되었는지 입꼬리를 올리던 하정이가 피식피식 웃더니 자신도 소리 내어 깔깔 웃었다.

잘 웃고 있었는데 어느새 두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누구도 없어서 다행이지 있었다면 크게 놀랄 장면이었다.

배를 끌어안고 웃던 하정이 입꼬리가 스르륵 내려가더니 어느새 어깨를 들썩이면서 끼어끼어 울고 있었으니.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할 것처럼, 중요한 누군가가 돌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그러다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는 하정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혼자라는 것이 적응된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닌가보다. 감기처럼 기침이 나고 목이 아프고 열나며 즉각 반응이 오는 게 아니라 잊고 있었다.

난 아픈 사람이라는걸. 아픈데 누구한테도 얘기할 수가 없었고 또 얘기한다고 한들, 불쌍하다고는 말해주겠지만 이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연은…. 아마 많이 슬퍼하겠지. 정연한테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유일한 베프 정연이한테는 또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정연은.

다음날,

요란한 휴대폰 벨이 연신 울려댔다. 패션쇼로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다 여유로워진 하정이에게 또 지독한 불면증이 찾아왔다. 늦은 새벽에야 겨우 눈을 붙였는데 정신없이 울리는 벨 소리에 눈을 떴다.

“여보세요…“

꾹 감은 눈처럼 천근만근 무거운 입을 겨우 떼었다.

”팀장님! 뭐 하세요? 우리 이제 다 죽었어요!”

또또, 이놈의 정 과장. 내가 사직서를 냈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또 전화질이냐고!!

“왜애~”

꾹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짜증을 냈다.

“팀장님.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어요!“

”응? 왜?“

하정이가 반사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이제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라 다짐을 했으면서도 회사 얘기에는 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영진 그룹이 인수 합병을 한대요. 리더스를.“

“뭐?”

[그 소문이 진짜인 걸까?]

[뭔 소문?]

[중소기업 인수 합병설.]

정 과장의 다급한 말에 순간,

정연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런 낌새가 없었는데 무슨 인수합병이지?

“근데 그것보다 더 충격인 건 뭔지 알아요?”

정 과장이 한숨을 푹푹 쉬면서 하소연하듯이 뱉었다.

“인수 합병 얘기는 전부터 나왔었지만 영진 그룹 쪽에선 사실 거의 부정적인 반응이었대요. 근데 이번에 팀장 님이 제안한 크루즈 선내 패션쇼를 성공시키면서 바로 인수합병하기로 결정을 내렸대요. 이건 뭐, 콜라보가 아니라 대기업에서 팀장님의 성과를 독식하겠단 게 아니겠어요?“

”뭐??“

”그리고 또요!! 아직 소문이긴 하지만 인수 합병을 하면서 리더스 전 직원이 구조조정 대상이래요. 무려 60%나요!! 어떡해요. 팀장 님. 우리 다 잘리게 생겼어요!!“

”잠깐, 그게 다 무슨 소리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 과장이 불 쇼처럼 토해내는 여러 말들이 하정이 머리를 콕콕 불태웠다.

”인수 합병을 갑자기 결정하게 된 이유가 패션쇼가 잘 돼서라고?”

“네. 그렇다네요. 부장 님한테서 들었어요. 사실  인수 합병 얘기는 작년부터 나왔었는데 영진 그룹에서 쭉 망설이고 있었대요. 영업이익은 좋은데 여러 문제가 많다고 판단을 했나 봐요. 그러다 팀장 님이 제안한 콜라보 사업 계획서가 통과 되면서 영진 그룹에서 그 결과를 보고 판단하려고 했나봐요. 9월 패션 위크에서 정하려고 했다는데 이번에 크루즈에서 미리 결과를 얻은 바람에….“

정 과장의 말은 그걸로 되었다.
대충 나갈 채비를 하고 급히 회사로 향했다.

정 과장의 말인즉,

여태 뉴스에서 말만 반지르르하게 웨쳐댔던 영진 그룹의 중소기업에 향한  선행은 진짜 선행이 아니라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여러 제안서를 올린 건 수도 없이 많았다. 그중영진 그룹 측에서 내보낸 뉴스였는데 중소기업과의 공생 시대라고 하면서 서로 도우며 위기의 코로나를 이겨내자고 하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하정이도 그 뉴스를 토대로 여러 조사를 했고 전자 부품만 위주로 납품을 하던 리더스는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 생각되어 큰 그림을 그리며 그 제안서를 조심스레 내밀었었다.  작년 그 한때는 그 어떤 보고서도 다 퇴짜를 놓던 부장 님이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게 이번 패션 콜라보 사업 보고서였다.

바로 대표님한테까지 전달이 되었고 그게 생각지 않게 진행이 잘 되었다.

대표님은 그러면 그때 이미...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노크를 할 새도 없이 부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어이없게도 하정이 눈에 들어온 건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부장의 모습이었다. 씩씩 거리며 들어온 하정이를 힐끗 보더니 다시 커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리 찾아올 걸 미리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부장님!"

"윤 팀장. 이거 인사팀 박 부장이 저번 말레이시아에 출장 다녀오면서 갖고 온 현지 커피야. 다 마시고 말하자."

허,

지금 커피나 마실 상황인가 싶어서 여유를 부리는 김 부장을 노려보다가 하정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일단 열을 식히고 무슨 영문인지 따박따박 물어볼 멘탈이 중요했다.

"음..."

몇 분을 조용히 기다리니 느릿하게 하정이 맞은 켠 소파에 기대는 김 부장은 금방까지 마신 커피가 마음에 쏙 드는지 잔향을 느끼며 작은 소리를 냈다.

"갑자기 인수 합병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보니까 대표 님은 자리에도 없던데요?"

"어, 해외로 나갔어."

담담한 김 부장.


"왜요? 300 명 넘는 리더스 직원들 볼 면복이 없대요? 하루아침에 회사를 팔아넘겨서?"

하정이 한없이 비꼬는 말투를 쏟아냈다.

그 말에 너털웃음을 지어 보이는 건 김 부장이었다.

"인수합병은 리더스 입장에선 좋은 일이야. 윤 팀장도 사실 알잖아. 우리 대표 님 몇 년 전부터 해외에 투자한 게 한두 푼이 아니라는 거. 리더스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뭐 하나, 거기에 싹 들어가고 빈 껍데기인데. 우리 대표님은 더 이상은 리더스를  운영할 조건이 못 돼. 이 정도 성장한 회사를 더 크게 살리려면 영진 그룹 같은 대기업에 인수 합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꽤 논리 있게, 조리 있게 김 부장이 미리 준비한 듯한 말들을 천천히 읊어댔다.

"이번 콜라보 사업을 성공하면 리더스는 위기를 벗어날 수도 있었다고요. 계약으로 인한 자금 확보도 가능하고요."

"아, 윤 팀장은 이번 사업 계약서를 제대로 못 봤지? 약정에 이런 게 있었어."

왠지 불안했다. 뭔가가 생각난 듯 허공을 쳐다보다 하정과 눈이 마주친 김 부장이 할 말은.

"콜라보 사업이 잘 되면 모든 인수 합병과 함께 모든 결정권은 영진 그룹한테만 있어. 잘 안됐을 시에는,"

"안 됐을 시에는 없던 일로 하고요?"

"그래."

마저 보태준 하정의 말을 들으며 김 부장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잘 안되어서 인수합병이 물 건너가면 리더스는 어떻게 되는 거였는데요?"

"몇 년을 못 버티고 자금난에 문을 닫겠지."

말도 안 돼.

리더스는 전자 부품 전문 회사로서  몇 년 새 큰 성장을 보이며 동종 업계에서는 시장 점유율이 꽤 큰 중소기업이었다. 그 덕분에 작년 매출은 회사 창업 이래 최고 이익을 바라봤다. 근데 자금난이라니...

"이해가 안 가는 게 정상이야. 나도 작년에 대표 님 말씀을 듣고 믿을 수가 없었거든.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그렇다고 영진 그룹에 그렇게 제 제안서까지 홀라당 다 팔아넘겨요? 나한테 아무런 얘기도 없이?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정이 목소리를 높였다.

억울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일한 거밖에 없었는데 이제 와서 들은 말들은 납득이 안 가는 수준이었다. 적어도 그 제안서를 내밀었을 때 회사에서 어떤 목적으로 쓸 건지 충분히 얘기를 해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비밀로 밀어붙였다는 건, 자신을 우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찍 말씀하였더라면 저희가 어떻게든 더 열심히 회사에 도움 될 방법을 생각했을 수도 있잖아요. 결국은 저희를 못 믿은 건 리더스였네요."

낙담하는  하정이 얼굴을 보며 김 부장은 한숨을 옅게 내쉬었다.

"어차피 윤 팀장은 나를 따라 그냥 여기에 남을 거야. 그냥 하던 대로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김 부장이 여기에 남을 거라는 말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정 과장한테서 들으니까 구조조정 들어간다면서요."

"어."

"진짜 60%의 인원이 다 인원 감축에 들어간다고요?"

"그렇지. 근데 윤 팀장은 걱정할 거 없어. 특별히 실적이 좋은 인원들은 다 남을 테니까."

"누가 결정하는 거예요? 인원 감축."

"우리 쪽에서 색출하긴 하겠지만 구조조정 비율이라던가, 결정적인 건  아무래도 영진 그룹에서 하지."

자신이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을 얘기하듯이 말하는 김 부장이 새삼 낯설었다.

영진 그룹...

권기혁 대표가 내린 결정이겠지.

중소기업과의 공생 관계? 대기업의 따스한 손길? 선의를 베푸는 아량?

다 개나 주라고 해.

그저 대기업의 횡포였다.

그 계략에 놀아난 건 자신이었고.

"부장 님. 전 쭉 얘기하고 있었지만 회사로 다시 나올 생각 없습니다. 저 말고 다른 사람이나 챙기시죠."

하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안일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 부장을 향해 잘근잘근 씹으며 내리꽂았다.

"아, 그리고 부장 님."

굳이 회사서 남겨주겠다는 데도 그만둔다고 하니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표정의 김 부장에 꼿꼿한 시선을 보냈다.

"마케팅 팀은 그래서 몇 명이나 남길 생각인가요? 남길 생각 있으신 건 맞나요?"

냉랭한 표정을 한 하정을 보며 김 부장은 아무 말도 안 했다.

하정은 그대로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이미 밖에서 흘러나온 둘의 얘기를 들은 동료들은 하정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벙해 서있기만 했다.
그들을 한번 둘러본 하정은 바로 회사에서 나왔다.

가야 할 곳이 생겼다.

리더스는 부장님 말대로 자금난으로 몇 년을 못 버티고 쓰러질 수 있겠지.

하지만 하정은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그때 그 계획서를 안 썼더라면, 그러면 혹시 대표님이 영진 그룹에 의지를 안 하고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려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았을까.

그러면 회사 절반이나 넘는 동료들이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 이 상황까지 안 오지 않았을까.

쓰디쓴 자책이란 두 글자가 하정이 속을 헤집어났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영진 그룹에 가서 권기혁 대표를 만나야 한다.

밟혀서 바로 죽겠지만 꿈틀대보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추천 (3) 선물 (0명)
IP: ♡.138.♡.217
나단비 (♡.252.♡.103) - 2024/02/29 20:05:49

아플때 혼자면 더 외롭죠.

죽으나사나 (♡.214.♡.18) - 2024/02/29 21:29:23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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