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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24)

혜원1008 | 2018.12.24 09:32:24 댓글: 15 조회: 2999 추천: 16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3801448

나 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혜원

5 장 새삶의 꽃

(3)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건데 계획대로 무탈하게 진행되는 일은 없었던것 같다. 그만큼 다사다난한 지난 세월 유일하게 순조롭게 흘러갔던건 재깍재깍 지나갔던 시간이였고 물처럼 흘러지나는 세월뿐이였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우리의 경숙이는 그 많은 우예곡절속에서도 굳건히 자신의 신 한국인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로지 혼자 감당했고 혼자 이겨나갔다. 가끔 외로움이 닥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누가 선자리를 주선해도 경숙이는 더이상 남자를 만나지는 않았다. 경숙의 삶은 일에 대한 성취감으로만 충족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일로도 벅찬 인생 가족을 챙기기에도 역부족한 세월동안 중국에서 태생하여 한국에 팔려왔던 그런 과거까지 들먹이면서 몸에 새겨져 지울수 없는 그런 상처들까지 납득시키며 새로운 인연을 맞춰가기 싫어서였다. 사랑하는 사람이면 다 이해한다고? 결혼은 사랑이랑 긴밀한 연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그 단순한 마음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이였다. 결혼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외에 두 가족의 배경, 조건,가족성원들의 세세한 생각까지 서로 맞춰져야 하니 말이다. 경숙이는 그 모든것이 귀찮았다. 그리고 그런 경숙이 옆에는 점점 늙어가고 있는 그 키다리 아저씨가 있었다. 창휘는 몇년새 훨씬 늙어버린 얼굴로 다시금 경숙이 앞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한달에 최소 한번은 중국집에서 만나 짜장면에 깐풍기나 탕수육을 시켜놓고는 고량주 한병을 나눠 마시며 이런저런 속에 있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승승장구 하는 경숙이 보다는 하루아침에 기러기아빠가 된 창휘가 신세한탄할 내용이 더 많았다. ‘기러기아빠란 처자식을 해외에 유학으로 보내놓고 한국에서 돈을 벌어 해외에 보내고 일년에 한번 식구들 보러 해외에 다녀오는 남자들을 칭하는 새로운 별명이였다. 물론 그 뒤에 비둘기아빠’’펭귄아빠등 비슷한 별명들이 더 많이 생겼고 이는 한국사회 남성들의 아픈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기러기아빠- 1년에 한번 처자식보러 갈수 있는 아빠로 처자식이 해외에 가 있는 경우, 비둘기아빠 직장때문에 아빠만 한국에 타지역에 떨어져 있어 주말에 한번 처자식 보러 갈수 있는 경우, 펭귄아빠 처자식이 너무 멀리 가 있거나 아예 가족이랑 연이 끊어져 결국 처자식 보러 갈수 조차도 없는 남극에 홀로 떨어진 날수도 없는 펭귄같은 아빠들... 떠도는 소문으로 해석했음) 창휘는 전형적인 기러기 아빠였고 그건 그의 부시시한 헤어스타일이나 언제 다렸는지 티가 않나는 후줄근한 셔츠에서도 알수 있었다. 그렇게 두사람은 인간대 인간으로 민족 성별 나이 국적 같은 속세에 그친것들은 다 버려버린채 서로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좋은 친구로 지냈다. 그땐 그저 막연하게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지금의 말로 쏠 메이트 였다.

경숙이와 아버지의 쉬지않던 노력의 성과로 경숙이네는 이제 연길에서 아파트 두채에 상가(市房) 두개까지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연로한 아버지는 그정도까지 해놓고 나서야 일을 관두고 연길에 돌아가셨고 할머니의 임종을 지킬수가 있었다. 그리고 2003년 되던해에 혜숙이는 경숙이 뒤를 이어 한국에 왔다. 혜숙이는 국제결혼도 노무수출도 아닌 유학으로 한국에 올수 있었다. 거기엔 경숙이가 모아놓은 자금도 한목했지만 그때부턴 워낙 한국 대학교에서도 중국유학생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어서 혜숙이 동창들은 아예 서울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회를 해도 될 정도였다. 경숙이랑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혜숙이는 한국에 와서도 공부를 꽤 잘했고 2년만에 석사학위를 취득하고는 보란듯이 중국 상해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하여 언제 그 가난하던 흥안초가집에서 기어다니던 아기였던가 싶게 중국의 신 경제발전을 한껏 이끌며 그야말로잘나갔. 구김살 없이 사회에 자리 척하니 잡은 혜숙이를 볼때마다 경숙이는 뿌듯했다. 여직 남아있는 몸에 상처들은 그런 결과들 앞에서 더이상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희생은 그 만큼의 보답으로 돌아와주었다.

30대를 넘어가면서 경숙이는 점점 인생에 대하여 더많은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중엔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를 뼈에 새겨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않좋은 일도 있을수 있다는 그래서 방심하고 으시대지 말라는 그런 뜻이다. 물론 않좋은 슬픈 일이 있어도 똑같이 실망하고 포기할 필요또한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혜숙이가 기대에 맞게 자기 인생을 차곡차곡 빛내가고 있을때 경숙이의 근심걱정은 철용이 한테 쌓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경숙이랑 아버지가 돈을 많이 모아놓아야 한다고 했다. 철용이 대학 공부를 시킬려면 말이다. 하지만 경숙이랑 아버지가 충분한 부를 축적해 놓고 이제 우리의 박씨가문대를 이어갈 철용이가 멋있게 대학이며 유학만 가기를 바라고 있을때 정작 철용이 본인은 그럴 생각이 눈티만큼도 없었다. 대학은 커녕 고중 3년동안 크고작은 사고를 쳐 결국 졸업직전에 아버지가 그 피같은 돈으로 여기저기 인사치례를 하고 나서야 간신히 고중이라도 졸업할수가 있었다.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지 않은가? 신은 이제 더이상 경숙이한테 일터의 시련도 사랑의 아픔도 주지 않았고 충분한 부와 먹고 살 걱정없이 여유로운 삶을 주는 대신에 철용이의 을 앗아갔다.소학교때 엄마를 하늘나라로 아빠는 한국으로 떠나보내고 결국 제대로 된 부모의 정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할머니의 오냐오냐와 아버지가 벌어들이는 쉬운돈으로 키워진 우리의 아이 철용이는 철이 들기에는 환경적 요인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거의 피씨방에서 지내다 싶이하고 똑같이 한국에 부모를 둔 관리가 않되는 애들이랑 휩쓸리면서 어린나이에 걸맞지 않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일찌감치 술담배를 붙이고 컴퓨터모티터에 피터지며 칼질하는 폭력성까지 이어받은 불쌍한 우리의 아이들은 그렇게 방황을 해나갔고 지금의 연변 조선족이라는 병적인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20살이 넘어가도록 방황하는 철용이를 아버지에 이어 경숙이까지 달래도 보고 원망도 해 보았지만 십수년 그런식으로 커온 아이는 쉽게 변하지를 않았다.

2006년 설 경숙이와 혜숙이는 오랫만에 연길에 설쇠러 모였고 그날도 어디에 퍼질러져 있었는지 집에 들지 않는 철용이를 포기하고 세식구가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오랫만에 술한잔 하셨고 수년의 노가다로 꺼칠해진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는 철용이 걱정땜에 한숨만 쉬셨다. <니네 엄마 한테 너무 미안하구나.. 내가 부족해서 아들놈을 사람 못만들었어..>그게 어찌 아버지 탓이냐고 두 딸은 위안을 했으나 아버지는 계속 자책했었고 간만에 한가족이 다 모여야 했던 단란한설은 그렇게 눈물바다로 물이 들었다. 다음날 두 누이는 이 철없는 동생을 결코 잡아들이고야말거라고 결심하고는 연길바닥 모든 피씨방과 마작팅을 샅샅이 뒤졌다. 피씨방엔 며칠째 집에 않들어간건지 해빛을 못본듯 얼굴이 누르끼레 해진 아이들이 모니터 앞에서 혼이 털린채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드려대고 있었다. 우리 철용이도 저렇게 컷겠구나를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아파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작팅.. 손바닥만한 도시에 어쩜 마작팅이 그리도 많은지.. 담배연기로 꽉 메운 자그망한 방엔 성별 나이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현찰들을 얹어놓고 정초부터 도박에 푹 빠져 있었다. 거기엔 한국에서 노가다를 해서 피와 같은 돈을 벌어온 아저씨들도 있었고 뼈빠지게 식당에서 그릇을 헹궈내며 주인아줌마 한테 온갖 무시를 당하며 한두푼 벌어모은 아줌마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부모들이 피땀흘려가며 짐승처럼 일해서 벌어다 주는 돈을 가지고 온 아이도 있었다. 거기서 경숙이네는 철용이를 찾았다. 백원짜리 한묶음씩이나 얹어놓고 입에 담배를 대충 꼬나물고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서 단순한 몇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 네모난 돌에 정신이 팔려 눈까지 풀린 우리의 박씨가문소중한후손은 누이들이 찾아온것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작팅엔 어려보이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같은 테이블엔 더 애티 나는 조선족 남자아이도 보였다. 특이하게도 그 아이 옆에는 현찰이 아닌 부동산증서(产证)가 쌓여있었다. 대충 보아도 열개는 족히 넘었다. 그 주변으론 고리대를 주는 한족인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그 아이는 그동네에서 소문이 났다고 한다. 부모 둘다 한국에 간지 십년이 넘어 연길에 아파트만 열채가 넘는데 그 아이는 도박을 하다가 돈이 모자라면 그 현장에서 부동산을 넘기고는 도박밑천을 빌린다고 한다. 그렇게 15만원짜리 아파트를10만원만 받고는 넘겼으니 소문을 들은 한족들이 손에 돈따발을 들고 그 아이 한테 시세차익 얻을수 있는 부동산을 받을라고 두눈이 벌개진 하이에나 떼 처럼 모여있었다. 누이들은 분노했다. 철없는 동생에 대한 원망였고 대책없이 버려질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처지를 비관한 슬픔이기도 했다. 철용이는 길이길이 날뛰는 두 누이 한테 끌려나왔고 마작판은 한동안 소동이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 철용이는 누이들이라도 있었는데 그 부동산증서 가지고 도박하던 아이는 어찌 되었는지 경숙이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몇년만에 찾아가본 연길은 많이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고층건물도 많이 생겼고 밤만 되면 거리마다 번쩍번쩍 노래방이며 다방들로 북적였고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무슨 청담동 며느리인양 혹은 억대의 기업주인마냥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녔다. 그리고 연길에 사람들은 자랑스레 말했다. 이젠 연길이 동북에 작은홍콩으로 불린다고 말이다. 경숙이는 씁쓸했다. 간판에 적혀 있는 글자를 보지 않으면 실로 경숙이가 가보았던 홍콩의 네온등이 즐비한 골목으로 착각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알지 않은가? ‘작은 홍콩이 되기까지 우리의 엄마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그릇이며 뚝배기들을 손가락이 휘어지도록 씻어댔는지... 우리의 아버지들이 뜨거운 여름 해빛아래서도 얼굴을 에이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뎌가면서 얼마나 많은 벽돌들을 메어 나르고 얼마나 많은 세멘트와 힘들게 싸워 왔는가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우리의 아이들이 부모도 없는 동년을 보내게 되었는지도 말이다. ‘작은홍콩이 된 고향이 경숙이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았다.

철용이는 그 뒤로도 한동안 더 방황했다.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것만 같던 고삐풀린 망아지 같던 철용이의 방황은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진 그날에야 종점을 찍었다. 마작을 거하게 한판하고 돌아와 방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 아버지를 둘쳐없고 병원으로 뛰어가면서 철용이는 지난 세월을 뉘우치고 한없이 자책하였다.그는 드디어 철이 들었다. 아버지는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받고 반신불수가 되어 지팡이를 짚게 되었지만 철이 든 철용이를 보면서 차라리 잘됐다고 하셨다. 철용이는 밀린 공부를 했고 성인계속교육(成人继续教)을 받고 간신히 대졸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혜숙이처럼 한국에 유학왔었고 2년뒤엔 언제 그랬냐는듯이 어엿하게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엄마의 소원까지 다 이루어진 그날 밤 경숙이는 홀로 남산타워에 올랐다. 그리고 최대한 엄마랑 가까워진 그 높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엄마 한테 이 기쁜 소식을 알렸다. 이제 하늘에 계신 엄마는 필이 웃고계실것이라... 경숙이는 확신할수 있었다.

2011년 경숙이는 한테는 아주 의미 있는 해가 되었다. 한국의 무역역사에 고스란히 몸을 담았던 경숙이는 그해 자기의 법인설립을 했고 이름을 ‘P&J 코퍼레이션이라고 지었다. P는 경숙이의 박씨 성을 가리킨것이고 J는 당연히 잊을수 없는 영원한 경숙이의 롤모델 정대표를 뜻하였다. 경숙이는 한중무역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특히 뜨고 있는 화장품에 손을 대기 시작해서부터는 아예 화장품 제조공장까지 인수하여 자기 브랜드를 생산하여 중국에 본격적 납품을 하기 시작했다.그리고 같은 해 혜숙이는 늦은나이에 시집을 갔다. 상대는 똑같이 한국에서 유학하고 상해에 금융업에 종사하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였고 그날 지팡이를 짚은 아버지는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둘째딸과 함께 결혼행진곡에 맞춰 행진을 할수가 있었다. 신랑이랑 손잡고 앞으로 걸어가는 혜숙이를 보면서 아버지는 우셨다. 아버지한테 절을 마친 혜숙이는 경숙이 앞에도 무릎을 꿇었다. <언니 희생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내 인생이 있을수가 없었소. 언니는 내겐 엄마 같은 존재요. 그동안 고마웠소.> 무릎꿇고 우는 신부 옆에 엉겹결에 같이 무릎꿇은 신랑에 거기다가 경숙이네 사정을 아는 그 예식장의 모든 하객들은 다 울었다. 물론 경숙이도 울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였고 축복의 눈물이였으며 지난세월 경숙이가 고생한데 대한 칭찬의 눈물이였다.더 이상 바랄것이 없다면 바로 이런순간이 아닌가 싶었다. 혜숙이네는 상해에 아파트까지 사놓고 이듬해엔 이쁜 딸도 낳았다.

2013년엔 철용이가 장가를 간다고 바쁜 일년이 되었다. 쉽게 보낸혜숙이와 달리 철용이는 장가갈때 마지막으로 큰누이 속을 한번 더 태웠다. 처음 만난 철용이 여친은 이쁘장하고 똘똘해 보였다. 그리고 꽤 당돌하기도 했다. 이 큰 시누앞에서 좀처럼 기죽지 않는 우리의 예비신부는 두눈 똑바로 뜨고 요즘 결혼할려면 남자측에서 해와야 되는 예물에 대해 요구를 해왔다. 집은 반드시 있어야 한댄다. 물론 그 부분은 이미 연길에 철용이 결혼할때 신혼집으로 쓰려고 마련한 최신식 아파트가 있었다. 그리고 밍크코트에 명품백혹은 바바리코트 거기에 황금4종세트에 다이아몬드4종세트까지 그리고 젖값으로 10만원이상 함에 넣어야 한댄다. 그것도 그리 많이 주는건 아니라고 생색까지 냈다. 자기 친구는 BMW자가용한대까지 선물로 받았다나 머라나...그동안 수많은 비지니스담판을 겪어온 경숙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협상코드가 쉽게 찾아지지가 않았다. 연길에 새 신부들은 그 옛날 경숙이몸값보다는 훨씬 더 비싸져있었다. 돈만 따지는 저런 색시를 넌 꼭 데려와야 겠냐면서 철용이 한테 따졌지만 콩깍지가 이미 씌여버린 우리의 철용이는 끄덕도 않았다. 혜숙이는 다 때려쳐라고 난리를 쳤고 저 자식 평생 혼자 살게 냅두라고 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경숙이는 다른 대책을 내 놓았다. <그래 좋소. 그정도 조건은 다 들어주지. 아니 그 이상도 해줄수 있소 우리의 식구만 된다면야> 생각보다 대범하게 나오는 미래의 큰시누를 보면서 우리의 이쁜 색시감은 잠간 후회하기도 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더 많이 요구 했을걸라고 말이다. 하지만 협상에는 어디까지나 조건이라는게 있었고 어차피 가격을 매겨가면서 결코 이 혼인을 한차례의 장사로 만들어 버릴려고 했으니 그 룰은 반드시 우리의 오래된 장사꾼경숙이한테 따라야 했었다. 경숙이는 웃는 얼굴로 부드러운 어투지만 최대한 냉정하게 조건을 제시했다. < 결혼전에 계약서 쓸것이고 혼전 공정을 거칠것이요.황금세트와 다이아결혼반지는 결혼식날에 줄것이고 젖값5만원에 15만원 상당한 자가용을 사줄것이요. 밍크코트 ,명품백, 바바리코트 중 한개는 결혼식날 그 외에 하나는 결혼 1년기념일, 하나는 첫애 낳은날에 선물할것이요. 어떤걸 그때 받을지는 아가씨가 선택하면 되는것이고. 아파트는 혼전재산으로 공증을 거칠것이며 결혼 10년 되는해에 자동으로 두사람공동명의가 되게끔 해주지. 그 외에 애가 두명이상 되면 상가 하나는 올케명의로 돌려주는것으로 적어놓고. 대신 결혼식 준비 비용은 두집에서 똑같이 나누어서 쓰고 황금세트와 밍크코트 상당의 예물을 머 시계도 좋고 우리 철용이한테 주게끔 저네집에서 준비하오. 어떻소? 이렇게 하면 공평하겠소?> 우리의 야무진 새신부는 대꾸할 말을 잃은채 커다란 눈만 껌뻑거렸다. 경숙이는 국제 담판으로 잔뼈가 굵은 사업가였다. 그 외에도 협상은 두세차례 더 오갔고 정확히 말하면 사돈간의 흥정이 오갔다고 해야겠다. 마지막 사돈보기(상견례)자리에서 결국 결론을 만들어 두사람은 예식장에 서게 되었다. 손가락에 번쩍거리는 콩알만한1캐럿짜리 다이아반지를 끼고 함에 들어있는 착한 짐승 수십마리 때려잡아 그 가죽을 베껴 만든 밍크코트를 바라보며 우리의 신부는 꽤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바보같은 우리의 남동생은 그 모습을 보면서 헤벌죽 웃고 있었고 말이다. 멀 더 바라겠는가 내동생이 행복하다는데 다 해줄수 밖에.. 돈만 밝혀 살림을 잘 못할것만 같았던 우리들의 올케는 생긴것같이 야무졌고 다급하게 연년생으로 애 둘 (아들 딸)낳고는 꽤 알뜰하게 잘 살았다. 물론 경숙이는 약속에 맞춰 상가 하나를 올케 명의로 이전해줬다. <아우 감사함다.형님> 빵실빵실 웃으며 인사치레 하는 올케를 보며 경숙이도 덩달아 웃었다. (저 여우같이 ... 이쁜 년... 그래 내동생이랑 행복하게만 살아다오.내가 돈 벌어 머하겠냐 어차피 다 니들것이야.) 경숙이의 가족들은 그렇게 하나 둘 자기의 행복을 찾아 자신의 가족을 만들어 떠났다. 경숙이가 바라고 바라던 그런 꿈을 서서히 이루어 가던 시간들이였다.

과연 세상엔 그 누가 백프로 맞고 누가 백프로 틀리다고 할수가 있을가? 어차피 살아가면서 보면 이 세상에 절대적이라는건 없다. 다들 적절하게 그 때 당시 사회분위기에 그 당시 유행에 맞춰가며 비슷비슷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것일뿐 그건 그 어떤 개인의 탓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던 중국사람이던 다들 그저 좀 더 나은삶을 위하여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바꿔보고 하는것이지... 그리고 어떻게 변해가던 어떤 유행이 생기던 삶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아름답기도 하고 추악하기도 했다. 어차피 인생이라고 해봤자 수십년이 전부인것을 그 시간을 굳이 주변 모든 사람들을 틀렸다고 지적하며 미워하며 허비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뿐인데... 다 아름답게 보면 내 남은 인생도 아름답게 되는것이라는걸 경숙이는40대로 넘어가면서 느꼈다..

다음화에 계속

추천 (16) 선물 (0명)
IP: ♡.148.♡.5
나연이맘 (♡.111.♡.158) - 2018/12/24 10:20:42

경숙이 희생으로 가족들이 행복할수 잇다.
참 안타깝네요.경숙한테도 장미꽃 인생이
찾아왓으면 좋겠어요 ~~~

보라빛추억 (♡.137.♡.147) - 2018/12/24 10:36:22

경숙이의 인생을 통해서 90년초부터 연변에 불기 시작했던 한국바람과 그 경과 결과를 낱낱이 보여주었네요.
경숙이의 주변사람들은 행복을 얻었고 경숙이도 사업이 성공했으니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수 있죠.
다만 경숙이도 이젠 동생들처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강창휘는 그저 람안지기(蓝颜知己)일뿐인가요?

monica (♡.136.♡.121) - 2018/12/24 11:41:28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야 했는데...안타깝네요

레몬나무 (♡.216.♡.95) - 2018/12/24 11:43:46

고생끝에 락이 왔네요 오늘 감동적인 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hengz (♡.238.♡.136) - 2018/12/24 11:51:31

다 아름답게 보면 내 남은 인생도 아름답게 되는것이라는걸 ...
이제 며칠만 있으면 40살이 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좀더 깨닫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해브꿋타임 (♡.109.♡.239) - 2018/12/24 12:29:01

경숙이가 볼수록 대단하네요~

신짱 (♡.228.♡.82) - 2018/12/24 13:26:23

현식적 인생 너무 잘 맞게 써버렷네요.
담회 기대합니다.

kim제니하루 (♡.34.♡.209) - 2018/12/24 13:44:23

사업도 중요하지만 개인 행복도 찾아야 하죠

chunyup88 (♡.173.♡.198) - 2018/12/24 14:02:07

요즘에 출근하면서 유일하게 기대되는 일이 자작극을 보는것으로 오늘도 행복하네요..

이쁜아짐 (♡.131.♡.162) - 2018/12/24 14:59:51

오늘 또한번 울컥했네요

정작 경숙이 본인인생은 언제 꽃이 필지...

오늘도 수고하셔습니다

복쥐두마리 (♡.219.♡.94) - 2018/12/24 15:10:26

이글 단숨에 쭉 보고 정말 오랫만에 모이자 로그인햇어요.글속의 주인공이 나랑 나이도 비슷해서 더군다나 가슴에 와 닿네요.모진 고생 끝내고 경숙이도 좋은 인연만나 나머지 반생 행복하게 잘살앗으면 좋겟어요.

천리지척 (♡.59.♡.56) - 2018/12/24 18:03:31

경숙이는 집에서 맏이로 태여나서 가장 고생을 많이했네요.
두 동생 시집장가 다 보내고.

해피투투 (♡.37.♡.93) - 2018/12/24 18:52:20

정말 저번에 댓글처럼 한편의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조선족 사회를 너무 잘 풀어내십니다. 보면서 자아반성하게 되고 많이 배우게 되는 글이십니다.
혜숙이의 결혼식 언니한테 절하는 모습에 너무 울컥했습니다. 이쁘게 자라준 동생들이 경숙이에 대한 보답으로 무엇보다 귀중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오늘로 끝나지 않고 다음회가 더 있다는것에 다행입니다.
작가님도 경숙이도 메리크리스마스 하세요!

형단 (♡.189.♡.223) - 2018/12/24 22:28:06

경숙이도 좋은 서럼 만나서 의지하며 잘 살면 좋겠네요.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이상한나라66 (♡.133.♡.67) - 2018/12/25 07:11:15

에효...40대가 되다니..그 좋은 시절 좋은 사람 더 만날수도 있었겠는데...안타까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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