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2)

개미남 | 2019.05.30 22:29:57 댓글: 0 조회: 474 추천: 1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27971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 - 12.

디캔터에서 글라스에 빨간 액체가 따라지는 순간, 이건 괜찮구나. 하고 도가미 유키나리는 감지했다. 글라스를 빙그르르 돌린 뒤에, 안쪽에 묻은 와인이 조용히 흘러내리는 모양을 살펴보았다. 그가 원했던 와인의 속도와 점성이었다. 다시 한 번 돌리면서 향기를 맡고, 한 모금 머금어보았다. 상큼한 맛으로, 약간 타닌의 맛도 나지만 희미하게 달콤함이 느껴져서 그리 나쁘지 않았다. 송아지고기 커틀릿에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산지는 피에몬테입니다." 디캔터를 든 젊은 남자가 말했다.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지만,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소믈리에 수업 중 정도일까.
"북이탈리아죠?"
"네. 이 와인에는 그랑 리제르바라는 글자가 찍혀 있습니다. 리제르바라는 것은ㅡ"
"아, 괜찮아요. 알고 있습니다." 유키나리는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시음 중에 이러니저러니 말을 걸어오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선입견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식사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았다. 커틀릿을 먹고 그 맛이 입에 남아 있는 동안에 이 와인을 마신다면 손님들은 어떻게 느낄까. 데미클라스 소스와의 어울림은 어떤가.
'리제르바'라는 건 숙성에 법적인 의무 기간을 설정해둔 와인을 말한다. 5년이었는지 6년이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그런 건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문제는 맛이었다. 그리고 메인 요리에 잘 맞는가 하는 점이었다.
나쁘지 않아. 라고 결론을 내리고 유키나리른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 하지만, 이라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가격이 맞지를 않아. 가게에 내놓자면 7천 엔이 넘는 가격표를 붙여야 할 것이다. 가볍게 저녁을 먹으러 나온 커플에게 이건 너무 비싼 가격이다.
유키나리는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우선 와인의 이름을 메모했다. 구입량에 따라서는 가격을 협상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식 파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탈리아 와인 시음회였다. 테이블에 차려진 요리마다 그 요리와 어울리는 것으로 추천하는 와인이 놓여 있었다.
초대된 사람들은 주로 음식점 관계자였지만 저명인사의 얼굴도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그중 어느 쪽도 아닌 듯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초대권이 네트 옥션에 나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주최 측에서도 사람이 모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그냥 봐주고 있을 터였다.
유키나리는 생선살 마리네와 화이트 와인이 늘어선 코너에서 멈춰 섰다. 화이트 와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요즘 그를 괴롭히는 문제 중의 한 가지였다.
글라스를 손에 들었을 때, 그의 귀에 여자의 목소리가 뛰어들었다.
"지난번에 굉장히 맛있는 식당을 누가 알려줬어요. 양식당인데요‥‥‥."
양식당이라는 말에 유키나리는 반응했다. 아주 조금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에 젊은 남녀가 서 있었다. 커플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남자 쪽이 저자세로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양식당이라는 건 좀 특이하군요. 어떤 가게인데요?" 남자가 물었다.
"<도가미 정(亭)>이라고 해요. 이름이 좀 이상하죠?"
여자의 말에 유키나리는 저도 모르게 몸이 꼿꼿해졌다. 그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예상도 못했다.
"와인 좀 따라드릴까요?" 여 점원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왔다.
"네, 좀 받을까요?" 유키나리는 빈 글라스를 내밀었다. 하지만 마음은 완전히 옆 사람들의 대화 쪽으로 가 있었다.
"그 식당이라면 나도 알아요. 도내에 체인점이 몇 군데 있지요? 나는 아직 가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맛있어요? 뭘 드셨는데?"
"나는 비프스튜를 먹었어요. 친구하고 함께 갔는데 그 애는 시푸드 프라이를 주문해서, 역시 맛있다고 했어요."
"그럼 나도 다음에 아내를 데리고 한 번 가볼까?"
"아, 여성들이라면 그 식당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크게 갈릴지도 몰라요. 부인을 데려가실 거면 그 점은 미리 말해주시는 게 좋을걸요?"
화이트 와인을 시음해보려던 유키나리의 손이 멎었다. 그대로 흘려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요? 어떤 점이?"
상대 남자가 묻고 있었다. 유키나리도 귀를 바짝 세웠다.
"그게, 한마디로는 말씀드리기가 좀 어려워요. 여자라면 다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어쩌면 그저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고요."
"그거 궁금한데? 하지만 도리어 흥미가 생기는군요."
"그러니까 한 번 가보세요. 그러면 아실 거예요."
"흠, 그렇군. 나도 가까운 시일 내에 가봐야겠네."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유키나리는 당황했다. 마시던 화이트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담소하고 있었다. 여자는 키가 크고 언뜻 본 옆얼굴로 판단하자면 이십 대 초반이라는 느낌이었다. 남자 쪽도 젊은 사람인 듯했지만, 여자보다는 연상일까. 적당한 살집에 적당한 키. 어딘가의 비즈니스맨이라는 분위기가 그 등에 감돌았다.
저, 하고 뒤에서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둘 다 멈칫하는 얼굴이었다.
유키나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여자가 뒷모습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아‥‥‥. 갑작스럽게 미안합니다. 실은 저쪽에서 두 분의 이야기를 잠깐 듣게 되어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자 쪽이 고개를 갸웃했다.
"양식당 이야기요." 유키나리는 말했다. "<도가미 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죠?"
아아, 라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야기했는데. 그게 무슨‥‥‥?"
"저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던가요?"
"네?"
"아뇨, 그 <도가미 정> 말이에요. 여성들이라면 좋아하는 분과 싫어하는 분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셨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지. 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러자 남자 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실례지만, 당신은?"
"아, 이거 죄송합니다.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유키나리는 상의 호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실은 이런 사람입니다."
그 명함에는 '유한회사 도가미 정/ 전무 도가미 유키나리'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본 여자는 눈을 크게 떴다. 남자 쪽도 아연한 표정이었다.
"어머, 제가 괜한 소리를‥‥‥." 그녀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이거, 미안합니다." 그 즉시 남자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설마 바로 가까이에 그 식당 분이 계신 줄도 모르고. 그게 그러니까, 절대로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부디 기분 나빠하지 말아주십시요. 게다가 이분은 <도가미 정>의 음식이 맛있다고 한 거예요."
유키나리는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나쁘다니요, 오히려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객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니, 이건 웬만해서는 없는 기회에요. 그런 만큼 역시 마음에 걸리는군요. 숙녀분의 감상이." 그는 지그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난처한 듯 고개를 숙이고 눈을 깜빡거렸다.
"미안해요. 그리 깊은 뜻은 없었어요. 그저 아직 어린 여자의 말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그냥 흘려들어주세요."
"그런 순수한 감상이 소중한 겁니다. 부탁입니다. 부디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아! 잠깐, 진정하시고요." 남자가 사이에 들어왔다. "이 아가씨는 저희 고객의 따님이시고 음식점 관계자가 아닙니다. 그저 가벼운 마음에서 한 말이니, 이 정도로 끝내주실 수 없을까요?"
"아뇨, 결코 나무라자는 게 아니에요. 진심으로 의견을 듣고 싶은 것뿐입니다. 제 마음을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 유키나리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남자가 여자 쪽을 향해 말했다.
"어때요, 사오리 씨.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생각했던 대로 말씀드리면 어떨까?"
"꼭 부탁합니다." 유키나리는 머리를 숙였다.
"아이, 어떡하나. 일이 이렇게 되다니‥‥‥."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요, 지금 바로 말씀드려야 해요?"
"그러면‥‥‥?"
"가능하면 다시 한 번 식당에 가서 제가 확인한 뒤에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저희 식당 말인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식당 분께 직접 말씀드리는 거라면 무책임한 의견을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때그때 기분에 좌우되는 의견이라면 도리어 폐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아, 그 정도로도 충분히 참고가 됩니다."
"아뇨, 제가 마음이 개운치 않아요. 여기서 어설프게 말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며칠 사이로 <도가미 정>에 가볼게요. 그래서 지난번과 똑같은 느낌이 든다면 메일을 보내죠. 이 주소로 보내면 되지요?" 그녀는 유키나리의 명함을 보았다.
"네. 그래도 괜찮지만‥‥‥."
유키나리로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개운치 않다면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단순히 느낌을 말해달라고 한 것뿐인데 이토록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여자도 드물었다. 그런 만큼 아무래도 꼭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메일 같은 게 아니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죠. 메일이라면 사오리 씨도 솔직한 의견을 밝히기가 쉬울 거고." 같이 온 남자가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했다.
"잠깐만요. <도가미 정>에는 언제 오시겠습니까?" 유키나리는 물었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는데‥‥‥."
"날짜와 시간이 결정되면 알려줘요. 그래서 그 식사를 마친 뒤에 잠깐이라도 좋으니 꼭 말씀을 들려주시면 좋겠어요."
"메일로 하면 안 되나요?"
"부탁합니다." 그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연락드리죠.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제가 그리 많은 식당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요리에도 문외한이에요."
"그런 분의 의견이 더 소중하답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같이 온 남자를 바라보았다.
"뭔가 일이 커져버렸네요."
"뭐, 괜찮은데요? 아, 그렇지. 인사가 늦었지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가 명함을 유키나리 쪽으로 내밀었다.
그 명함에는 '코르테시아 재팬 도코본사 영업부 영업1과 가스가이 겐이치'라고 적혀 있었다. '코르테시아'라는 이름은 유키나리도 알고 있었다. 귀금속과 보석을 취급하는 회사였다.
"음식점 관계자 분이 아니셨군요?"
"그러니 처음에 그렇게 말씀드렸지요? 이 파티의 관계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초대장을 보내주셨어요. 이쪽 아가씨가 와인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함께 모시고 왔죠."
"아, 이쪽 분은‥‥‥?" 유키나리는 새삼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카미네라고 합니다. 다카미네 사오리."
그녀는 가방에서 학생증을 꺼내 내밀었다. 한자로는 '高峰 佐緖里'라는 이름이었다. 쿄토에 있는 여자대학의 4학년생. 지금은 휴학 중이고. 도쿄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음, 여유가 있으시군요."
"하지만 사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졸업해버린다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는 도전하는 듯한 시선을 던져왔다. 기가 강한 면모도 있는 듯했다.
그렇군요. 라고 유키나리는 대답해두었다. 일개 식당에 대한 느낌조차 가볍게 발설하지 않는 아가씨다. 사회에 나오기 전에 세상을 경험해보는 기간을 갖는 것은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뒤, 사오리는 가스가이와 함께 시음회장을 떠났다. 유키나리는 와인 시음을 계속했지만 거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오리의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의 <도가미 정>에 대한 의견이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 그녀라는 사람에게 끌린 것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시음회는 9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유키나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메구로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10여 년 전에 아버지 도가미 마사유키가 사들인 집이었다. 전에는 독일인 가족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관문이 유난히 세로로 길었다. 바깥쪽에서 보면 일본의 전통 가옥이지만 실제로는 다다미방이 적은 것도 그 탓인 모양이었다.
거실에서는 마사유키가 전화로 이야기하는 참이었다. 이제 막 돌아왔는지 아직 양복 차림이었다. 전화 상대가 어딘가 체인점의 점장이라는 건 그 엄격한 말투로 알 수 있었다.
"아무튼 그런 실수는 두 번 다시 용서할 수 없어. 각별히 명심하도록 해." 그렇게 말하고 마사유키는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 있어요?" 유키나리가 물었다.
"시답잖은 소리야. 재료를 잘못 구입해서 코스 요리가 모자랐던 모양이다. 어린애도 아니고, 쯧쯧." 마사유키는 혀를 차며 상의를 벗었다. "어떻더냐, 와인 쪽은?"
"예, 나쁘지 않은 게 몇 가지 있었어요. 하지만 결정적인 건 없던데요?"
마사유키가 히죽이 웃었다.
"그래, 실컷 고민해봐. 나도 고민깨나 했었다."
"아버지 흉내는 안 낼 거예요."
"당연하지. 네 점포니까 전부 네가 책임지고 결정해."
"알고 있어요."
유키나리는 거실을 나와 계단을 올랐다. 그의 방은 이층에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도가미 정>의 새 체인점 점장이 될 예정이었다. 장소는 이미 결정되었고 공사도 시작했다. 그래서 날마다 새 점포에 대해 고민하며 준비에 쫓기고 있었다.
나만의 방식대로 점포를 꾸려나가고 싶다. 라는 게 최대의 희망이었다. 물론 고객이 좋아해주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다시금 다카미네 사오리가 머리에 떠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유키나리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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