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9)

개미남 | 2019.06.11 18:50:08 댓글: 0 조회: 43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35119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 - 19.

새 체인점의 실내장식에 대해 디자인 사무실 측과 상의하고 있을 때, 도가미 유키나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잠깐 실례. 라고 말하고 그는 액정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다카미네 사오리. 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디자이너 야마베 히데카즈에게 등을 돌리고 통화 버튼을 누른 후에 입가를 가렸다.
"네. 도가미입니다."
"저어, 다카미네예요. 지난번 히로오 레스토랑에 초대해주셨던‥‥‥."
"예. 알고 있어요. 그 뒤에 몸은 좀 어땠어요?"
"네. 덕분에. 하지만 그때 너무 큰 폐를 끼쳐서‥‥‥. 아, 지금 전화. 괜찮으세요?"
"실은 지금 회의 중이에요. 이제 곧 끝날 테니 내가 다시 걸지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물론 괜찮죠. 미안해요. 일하시는 중에."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잠시 뒤에." 유키나리는 전화를 끊고 의자를 빙글 돌렸다.
야마베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반가운 사람에게서 온 전화인가 봐. 유키나리 씨?"
"엇, 왜요?"
"아니, 조금 전하고 표정이 전혀 달라.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무슨 철학자처럼 심각했는데. 지금은 왠지 싱글벙글이잖아? 여자친구한테서 온 전화?"
유키나리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 손을 옆으로 저었다.
"아이, 그러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인가? 지난번 사은회에 왔던 그 아가씨 아니야?"
정확한 지적에 유키나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사은회 날 저녁에 야마베도 히로오 점에 왔었던 것이다.
"내가 딱 맞춘 모양이군. 그거, 잘됐네. 유키나리에게도 그런 상대가 있는 게 좋아. 도가미 사장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유키나리는 합리적으로 일처리는 잘하는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합리성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고.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서 그 마음을 헤아려보며 이리저리 고민하는 일도 가끔 해보는 게 좋다고 하셨어."
야마베는 <도가미 정> 체인점 두 곳의 실내장식을 모두 맡아서 해준, 마사유키가 특히 신임하는 디자이너였다. 나이는 유키나리보다 정확히 열 살이 많았다.
유키나리는 난처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분명 그때 그 아가씨지만, 야마베 씨가 상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 그저 젊은 여성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사은회에 초대한 거였어요. 그날 저녁에 함께 오기로 한 친구가 몸이 안 좋아 오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같은 테이블에 앉았었죠. 그냥 그것뿐이에요."
"그래? 그렇다면 좀 서운한데? 남자가 큰일에 뛰어들 때는 그 뒤에서 지켜봐주는 여자가 있는 게 더 좋아. 그냥 이참에 그 아가씨를 공략해보면 어때? 굉장한 미인이던데."
"아유, 말도 안 돼요. 나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을 상대나 해주겠어요? 그 아가씨, 그렇게 보여도 아직 대학생인데."
"대학생? 그거, 놀랍네. 어떤 인생 경험을 쌓으면 그런 얼굴이 되지? 아, 나이 들어 보인다는 건 아니고, 어쩐지 어른스러운 분위기라는 뜻이야."
"그렇지요? 나도 그렇게 느꼈어요. 교토의 대학 4학년생이고, 현실 사회를 경험해보기 위해 휴학 중이라고 하던데, 그런 경험이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빚어낸 거 아닐까요?"
"흐음, 그런 아우라는 단기간 내에 생겨나는 게 아닐 텐데?" 야마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아무튼 연인까지는 아니어도 젊은 여성과 자주 접해보는 건 좋은 일이야. 이번 체인점은 젊은 층이 주 고객이기도 하니까."
"그건 나도 알죠. 그래서 그 아가씨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뿐이지 다른 마음은 전혀 없는ㅡ."
"알았어. 알았다니까. 그렇게 펄쩍 뛸 거 없어." 야마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뒤에 회의는 30분 정도로 끝이 났다. 디자인 사무실을 나서자 유키나리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사오리에게 걸었다.
"네. 여보세요." 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가미예요. 조금 전에는 실례했어요."
"저야말로. 일하시는 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이제 괜찮으세요?"
"예. 끝났어요. 이번에 오픈하는 체인점의 실내장식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어요."
"와아. 재미있겠다."
사오리의 그 말은 단순히 박자를 맞추기 위해서라기보다 정말로 관심이 있는 듯한 여운을 풍겼다. 도가미의 머릿속에 지난번 그녀가 가게 안의 조명에 대한 느낌을 말해주었던 게 새삼 떠올랐다.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몸은 이제 괜찮아요?"
"네. 멀쩡해요. 오늘은 그 일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그때 너무 죄송했어요. 그래서요, 사과도 하고 답례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도가미 씨, 가까운 날짜에 만나뵐 수 있을까요? 30분 정도라도 괜찮아요."
"아, 답례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아요. 물론 만나는 건 전혀 문제없습니다. 언제가 좋지요?"
"저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도가미 씨가 더 바쁘시니까 그쪽에서 좋은 날짜와 시간을 정해주세요."
"그래요? 아, 그러면‥‥‥."
유키나리는 앞으로의 일정을 더듬어보았다. 이윽고 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매력적인 아이디어였다. 약간 망설인 끝에 그는 말했다.
"혹시 괜찮다면 지금은 어때요? 갑작스런 이야기라서 미안하긴 하지만."
"지금요? 저는 괜찮은데‥‥‥." 역시 사오리는 약간 당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남감해하는 기척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게 해요. 실은 사오리 씨와 함께 가봤으면 하는 데가 있어요."
"어디인데요?"
"그건 만나서 말하죠."
1시간 뒤에 록폰기 힐즈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유키나리는 전화를 끊었다.
묘하게 마음이 들뜨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다카미네 사오리를 '그곳'에 안내한다는 최고의 아이디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갖게 될 그녀와의 만남 자체가 자신의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키나리는 야마베의 말을 떠올렸다. 이참에 그 아가씨를 공략해보면 어떠냐는 고색창연한 대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
만일 사오리가 나의 연인이라면ㅡ. 이 공상은 유키나리의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록폰기 힐즈로 향하는 동안에도 평소보다 가슴의 고동이 빨라져 있었다.
하지만 록폰기 힐즈 안의 가게 몇 군데를 둘러본 뒤에, 약속했던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를 샀을 무렵에는 조금쯤 냉정해졌다. 사오리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와인 품평회에서 만난 뒤, 두 차례 <도가미 정>에서 자리를 함께했었지만 그저 식당에 대한 느낌만을 물었을 뿐이다. 학생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전공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가족 구성도, 부친의 직업에 대해서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보석 '코르테시아 재팬'의 고객이라고 하는 걸 보면 웬만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는 건 틀림이 없겠지만.
유키나리는 자기혐오에 빠졌다. 여자와의 대화를 그리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것도 요리나 식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뿐이었다. 그 의외의 화제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상대에 대해 궁금해하고 물어본다. 라는 건 아예 처음부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난번 사은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리에 대한 감상을 물어본 뒤에는 계속 새 체인점에 대한 이야기만 떠들어댔다. 사오리 쪽에서는 내심 따분했겠지만, 차마 싫은 얼굴도 하지 못하고 정말 난감했을 것이다.
이쪽 이야기만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에 사오리의 변화를 깨닫는 것도 늦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식사 중에 눈물을 흘릴 리 없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뭔가 불편한 것이 그녀를 덮쳤을 터였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녀가 눈물을 쏟기 전에 미리 알아보고 살펴주지 못했는지, 지금도 자신이 한심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택시 안에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 마디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섣부른 말을 내뱉었다가 행여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거나 거꾸로 그녀에게서 경멸을 받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진짜로 한심하구나ㅡ. 유키나리는 자신의 무능함을 저주했다.
사오리가 나타난 것은 그 바로 뒤였다. 흰 니트 위에 회색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검정색 바지는 그녀의 긴 다리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기다리셨어요?" 그녀의 시선은 유키나리 앞에 있는 찻잔으로 향하고 있었다.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아니, 내가 너무 일찍 왔어요. 뭐라도 마실래요?" 유키나리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 제가 사올게요. 그거, 에스프레소죠? 똑같은 걸로. 괜찮으세요?"
"네. 좋아요. 이거, 미안한데."
음료 매장의 카운터로 향하는 사오리를 바라보며 유키나리는 다시금 마음이 들떴다. 연인이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가까운 테이블에 두 명의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이 뭔가 속닥속닥하면서 사오리를 눈으로 좇는다는 것을 유키나리는 깨달았다. 시선에 의한 그들의 추적은 사오리가 유키나리의 테이블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쪽이 여자들끼리만 왔다면 슬쩍 말이라도 걸어볼 생각이었던지, 명백하게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마직막에는 원망스러운 시선을 유키나리에게로 던졌다. 저런 형씨가 어떻게 저런 미녀와 데이트를?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흥, 두고 봐라. 하는 마음이 들었다.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사오리는 두 손을 무릎에 대더니 머리를 숙였다.
"지난번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이렇게 만나뵙기도 좀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 말아요. 나야말로 대접을 제대로 못했구나. 하고 반성했어요. 몸이 뭔가 불편하다는 걸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하는데."
"아, 어디가 불편했던 게 아니에요. 그 하야시라이스를 먹었을 때,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서 그랬는데‥‥‥."
"그건, 무슨 말‥‥‥?"
"어렸을 때 정말 친하게 지내던 친구네가 양식당을 했는데 거기서 먹은 하야시라이스 맛하고 너무 똑같아서 그만."
"우리 식당의 하야시라이스하고? 정말요? 어디 있는 가게였죠?"
"요코스카에 있던 양식당이에요. 하지만 정말로 똑같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둘 다 하야시라이스라서 그런 식으로 착각한 건지도 모르구요. 그 친구, 부모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그 일이 있은 뒤에 먼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어요. 그게 생각나서, 갑자기 너무 슬퍼져서‥‥‥, 정말 죄송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친구와는?"
"그 뒤로는 한 번도 못 만났어요." 사오리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자구나. 하고 유키나리는 생각했다. 게다가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음식 맛을 보고 어린 시절 이후로 만나지도 못한 친구를 다시 생각하며 눈물지을 리 없었다.
"사과를 드려야 하는데, 뭔가 시시한 변명을 해버렸네요." 사오리는 뺨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 옆의 종이봉투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저어, 하찮은 것이지만 받아주실래요?" 작은 포장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유키나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저런, 이런 거 안 해도 괜찮은데."
"제가 뭔가 마음에 걸려서요. 별로 대단한 물건도 아니예요. 그냥 도가미 씨의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와아, 이것 참." 유키나리는 포장 상자에 손을 내밀었다. 물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열어봐도 되겠어요?"
"네. 열어보세요.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구요."
유키나리는 신중하게 포장지를 벗겼다. 안에서 나타난 것은 가죽 케이스에 든 소믈리에 나이프였다. 손잡이 부분이 미묘하게 굽었고 청동의 연결 못이 박혀 있었다.
"샤토 라기올의 복각판이군요. 이건 명품인데요?"
"처음 만난 게 와인 파티 때여서 그냥 왠지‥‥‥, 도가미 씨라면 분명 더 좋은 것을 갖고 계실 테지만요."
"나는 이런 명품은 없어요. 그나저나 이걸 어쩌지? 정말 받아도 될까요?"
"제 마음이에요. 받아주시면 고맙겠어요."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하지요. 근데, 이런 비싼 물건은 10년 뒤에나 쓰라고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들을 것 같은데요?" 유키나리는 나이프를 다시 케이스에 넣고 포장지로 정성껏 감쌌다.
"아버님께서는 처음에 요코하마에서 양식당을 개업하셨다는 것 같던데, 맞나요?" 사오리가 물어왔다.
"맞아요.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어요. 작은 식당이었고 아버지도 장사에는 소질이 없는 일개 요리사에 불과했죠."
유키나리의 말에 사오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꼭 듣고 싶군요. <도가미 정>이 처음 문을 열었던 무렵의 에피소드들."
유키나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젊은 아가씨가 듣기에는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성공한 사장님들의 초창기 고생담이 저한테는 큰 참고가 될 거예요."
"아, 그건 그럴지도." 유키나리는 다시 곱게 포장한 선물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새삼 사오리를 바라보았다. "실은 지금부터 어디에 좀 함께 갔으면 해요. 그곳을 안내하면서 옛날이야기를 해보기로 할까요? 그리 대단한 이야기도 못 되지만."
"아까 전화로도 말씀하셨죠? 어디에 가는 거예요?"
"아무튼 여기를 나갑시다." 그렇게 말하고 유키나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천 (0) 선물 (0명)
IP: ♡.50.♡.0
23,498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07
0
46
나단비
2024-04-07
0
41
나단비
2024-04-07
0
47
나단비
2024-04-05
0
64
나단비
2024-04-05
0
61
나단비
2024-04-05
0
51
나단비
2024-04-05
0
60
나단비
2024-04-05
0
77
나단비
2024-04-04
0
77
나단비
2024-04-04
0
63
나단비
2024-04-04
0
73
나단비
2024-04-04
0
46
나단비
2024-04-04
0
54
나단비
2024-04-03
0
57
나단비
2024-04-03
0
68
나단비
2024-04-03
0
57
나단비
2024-04-03
0
60
나단비
2024-04-03
0
68
나단비
2024-04-02
0
56
나단비
2024-04-02
0
61
나단비
2024-04-02
0
55
나단비
2024-04-02
0
41
나단비
2024-04-02
0
62
나단비
2024-04-01
0
61
나단비
2024-04-01
0
57
나단비
2024-04-01
0
84
나단비
2024-04-01
0
58
나단비
2024-04-01
0
49
나단비
2024-03-31
2
58
나단비
2024-03-31
2
89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