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29)

개미남 | 2019.06.13 10:04:43 댓글: 0 조회: 439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36025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2 - 4.

파도의 물거품이 걷히자 일순 바다 표면이 우윳빛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것이 가라앉을 즈음에 다시 파도가 몰려왔다. 물거품이 발치까지 튀어왔다. 하기무라는 뒤로 물러섰다. 젖은 모래톱에 구두 바닥이 푹푹 빠졌다. 벌써 구두 속은 모래로 꺼끌꺼끌했다.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새 양말을 사는 게 좋겠다고 하기무라는 생각했다.
그들은 하시리미즈 해안에 와 있었다. 그 도난 차량이 발견된 장소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었다. 이 근처는 해안선이 국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가시와바라가 추운지 목을 움츠리며 다가왔다.
"어떻게 생각해?"
"뭘요?"
"사체가 발견될까?"
"글쎄요‥‥‥." 하기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이 동네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먼바다로 나가면 물결이 꽤 복잡하게 엉키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평소에는 별로 파도가 높지 않은데 최근 이삼일 동안은 심한 편이었대요."
"자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 얘기인가." 가시와바라는 먼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덩달아 하기무라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해상보안본부의 배가 멀리 떠 있었다. 수색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는지는 듣지 못했다.
뒤집어진 보트가 간논자키 바다 쪽에서 어선 승무원에게 발견된 것은 어제의 일이었다. 물론 보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하시리미즈 해안에서 도난당한 보트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나아가 요코스카 경찰서의 수사원이 부근을 조사해본바, 수상한 종이봉투가 놓여 있는 것도 발견했다.
종이봉투 안에는 장갑과 안경, 볼펜, 편지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편지봉투에는 종이 한 장이 들었고 써놓은 글이 있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도모코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돈은 마련하지 못했다. 나중 일을 부탁한다ㅡ.'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요코스카 경찰서에서는 곧바로 도난 차량과의 관련에 대해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 유류품에서는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장갑에 주목하게 되었다.
장갑은 꽤 오래 사용한 것으로 기름때 같은 것이 묻어 있어 매우 더러웠다. 그리고 도난 차량에서 발견된 DVD 등을 다시 조사해봤더니 일치하는 장갑 흔적이 몇 개나 검출되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수거된 종이봉투가 도난 차량을 타고 온 범인의 것일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는 얘기가 된다.
문제는 그게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현재로서 단서는 '도모코'라는 이름뿐이었다. 요코스카 경찰서에서는 그때까지 접수된 실종 신고에 대해 조사해보기로 했다. '도모코'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ㅡ. 아마도 이 여성이 신고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거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걸 유서라고 본다면, 범인은 돈이 필요했던 모양이지요?" 하기무라가 말했다.
"그렇지. 아마 빚일 거야."
"차 안에 있던 대량의 DVD는 대체 뭘까요? 그걸 판매할 생각이었나?"
"그럴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어디에서 입수했느냐 하는 거야." 가시와바라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 손에 휴대용 재떨이를 들고 있었다. "보트를 타고 일부러 먼바다까지 나가서 그대로 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건가? 하긴 뭐,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좀‥‥‥."
"뭔가 마음에 걸려요?"
"번잡하게 공을 들여가며 죽었다 싶어서 말이야. 자살할 거라면 더 빠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든가 말이지."
"범인은 도난 차량을 버린 뒤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해안선을 따라 걸어내려온 게 아닐까요? 그러다가 보트가 눈에 띄자 총동적으로 먼바다에 나가 물에 뛰어드는 자살을 생각했다.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 상사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하지만 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려."
"그럼 위장 자살이란 얘긴가요?"
"그쪽으로 생각 못할 것도 없지."
"무엇 때문에요? 물론 빚쟁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한 것처럼 꾸미는 방법은 예전부터 있었죠. 보험금을 타내려는 위장 자살도 있고요. 하지만 그러려면 누가 자살했는지 명확히 밝힐 거예요. 이번 범인은 유서에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써놓지 않았어요. 이상하잖아요?"
"바로 그거야. 진짜 자살이건 위장 자살이건, 어째서 이름을 써놓지 않았을까?"
"마음이 변한 거 아닐까요? 처음에는 번듯한 유서를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뭔가의 이유로 관두기로 했다. 일부러 이름을 쓰지 않은 게 아니라 거기까지 쓰다가 그냥 관둬버렸다. 그런 거 같은데요?"
"그야 뭐, 그런 쪽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 가사와바라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담뱃불을 휴대용 재떨이 안에 비벼 껐다.
"가령 위장 자살이라고 한다면 범인은 상당히 위험한 도박을 한 셈이네요."
하기무라의 말에 가시와바라는 흘끔 마주 쳐다보았다.
"왜?"
"아니, 범인은 보트를 타고 먼바다까지 나간 다음에 그 보트를 뒤집어 엎어놓고 다시 헤엄쳐서 해안으로 돌아왔다는 얘기가 되잖아요? 더구나 한밤중이었어요. 이건 상당히 위험한 짓이죠. 아무리 수영에는 선수라도 그건 선뜻 하기 어려운 일이예요."
가시와바라는 끄응 신음을 올렸다. 담뱃갑을 열고 손가락을 들이밀던 참에 얼굴을 들었다.
"혹시 두 사람이었다면?"
"두 사람?"
"만일 친구가 있었다면 어떻지? 두 대의 보트를 타고 먼바다까지 나간다. 한쪽이 또 다른 한쪽에 올라탄 뒤, 그때까지 타고 있던 보트를 전복시킨다. 이거라면 위험한 건 없겠지?"
하기무라는 머릿속에서 그 정경을 떠올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해봤자 누군가 자살했다는 흔적을 만들어놓는 것뿐이예요. 게다가 무슨 의미가 있지요? 아무도 득이 될 게 없어요."
"이유는‥‥‥." 가시와바라는 담배를 입에 물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지나치게 복잡한 생각이예요." 그렇게 말하며 하기무라는 발걸음을 돌렸다. 바닷바람을 맞아 몸이 꽁꽁 얼어왔다.

한 입 먹어보고서, 역시 이건 아니라고 유키나리는 생각했다. 케첩의 맛이 약간 강했다. 말하자면, 그리운 옛날의 맛이어서 이런 쪽을 오히려 좋다고 하는 손님도 적잖이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도가미 정>의 원조 하야시라이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내심 낙담한 채 식사를 계속했다. 이 하야시라이스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지만 음식을 남기는 데는 저항감이 있었다.
양식당 <야자키>는 샤쿠지이 공원 역 옆에 있었다. 이 식당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알아냈다. 막상 와보니 가게 앞에 자그마한 화단을 꾸며놓은 기품 있는 식당이었다. 점심때는 아니지만 젊은 여자 손님들이 몇몇 와 있었다. 그녀들은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메뉴를 살펴보고 이 양식당의 중심이 디저트라는 것을 알았다. 디저트라면 유키나리로서는 약한 분야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참고가 되겠지만, 오늘 이곳에 찾아온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접시를 비우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 손님은 자기 한 사람뿐이어서 실은 몹시 거북스러웠던 것이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나왔다.
역을 향해 걸어가며, 이런 짓을 해서 무슨 도움이 되나. 하고 자문했다. 아자부쥬반 점에 내놓을 새 하야시라이스의 맛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느니 요리사들과 레시피나 연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마음이 흔들렸다. 다른 양식당의 하야시라이스를 먹어보는 것도 연구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경우에는 진짜 목적이 전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채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하는 마음도 있었다.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는 점은 물론 아버지 마사유키의 태도였다.
유키나리는 아버지가 말을 번복한 원인이 다카미네 사오리에게 들었던 이야기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도가미 정>과 똑같은 맛의 하야시라이스를 내놓았다는 요코스카의 양식당ㅡ. 그것이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단서는 너무나도 적었다. 유일한 힌트는 다카미네 사오리에게서 들은 그 양식당의 딸 이름이다. 그 여자애는 야자키 시즈나라고 했다.
성씨를 그대로 가게 이름에 쓰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도가미 정>만 해도 그렇다. 그래서 요코스카에 있었다는 그 양식당의 이름도 혹시 <야자키>인 게 아닐까. 하고 대충 건너짚고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곳은 샤쿠지이 공원의 <야자키>뿐이었다. 고베 쪽에 <야자키야>라는 양식당이 있었지만, 그쪽은 쇼와 초기부터 영업해온 오래된 가게여서 요코스카에서 이전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역에 도착하여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하며 티켓 발매기에 다가갔을 때, 휴대전화가 문자 착신음을 울렸다. 아자부쥬반 점의 스태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하지만 문자는 다카미네 사오리에게서 온 것이었다.
상의할 일이 있으니 시간 있을 때 연락 주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야시라이스 문제로 머리가 꽉 차서 다른 건 생각할 여유도 없었는데, 그 문자를 보자마자 당장 마음이 달라졌다. 사오리가 상의할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자꾸만 궁금해졌다.
차표 사는 것도 나중으로 미루고 유키나리는 휴대전화의 버튼을 눌러대고 있었다.
"네." 사오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받아준 것이 기뻤다. 그녀가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가미입니다. 저어, 문자를 봤는데‥‥‥."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괜찮아요. 그래서, 상의할 일이라는 건 뭔지요?"
"그게요. 전화로는 좀 말하기 어려운 일이예요. 일간 만나 뵐수 있을까요?"
"물론 만날 수 있죠. 아니, 그보다 지금이라도 나는 괜찮은데."
"정말이세요? 지금 어디 계세요?"
"샤쿠지이 공원."
"샤쿠지이? 네리마 쪽의?" 사오리는 뜻밖이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이쪽에 봐두고 싶은 양식당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끝났어요. 어느 쪽으로 가면 되지요?"
"그럼 지난번에 만났던 긴자의 커피숍은 어떠세요?"
"알았어요. 5시에는 도착할 겁니다." 손목시계를 보며 유키나리는 말했다.
이케부쿠로까지 나가 지하철에 오를 때쯤 유키나리에게 하야시라이스 일은 완전히 머리 한 귀퉁이로 밀려나 있었다. 그 대신 유키나리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사오리의 일이었다. 그녀는 어떤 일을 상의하려는 것일까.
좋지 않은 상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혹시 사오리가 이제는 나와 만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닐까. 실은 연인이 있다. 라고 고백할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긴자 니초메의 커피숍에 도착한 것은 5시를 조금 지났을 즈음이었다. 창가의 테이블에서 사오리가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표정을 보고 유키나리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시간을 좀 만만하게 쟀군요. 오래 기다렸어요?"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유키나리는 사과했다.
"아뇨. 저도 지금 왔어요. 그보다 저야말로 무리하게 나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사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아, 마음 쓰지 말아요. 그리 큰 볼일도 아니고, 결국 헛걸음만 한 셈이거든요."
사오리는 아직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있었다. 유키나리를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그는 손짓으로 웨이트리스를 불러 각각 마실 것을 주문했다.
"그래서, 상의할 일이라는 건‥‥‥?" 유키나리는 머뭇머뭇 말문을 열었다.
사오리의 표정이 약간 긴장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입가의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실은 어제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요즘 근황 보고를 안 했더니, 은근히 애를 태우셨던 모양이예요. 그 참에 설교도 잔뜩 들었죠."
"설교?"
"대체 언제까지 놀고 있을 생각이냐구요. 내년 4월에 정말 복학하려는지 걱정하시는 모양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사오리가 휴학 중이라는 것을 유키나리는 새삼 생각했다. 동시에 초조감 비슷한 감정이 가슴 안쪽에서 밀려오는 게 느껴졌다. 내년 4월이면 그녀는 교토로 가버리는 것이다.
"물론 복학할 생각이겠지요?"
"그게요‥‥‥, 사실은 망설이는 중이에요."
"왜요?"
"나, 오래전부터 유학하고 싶었어요."
"유학이라니‥‥‥, 외국에 말인가요?"
묻고 나서, 그야 당연하잖아. 하고 유키나리는 자신을 질책했다.
사오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졸업하면 일본 문화를 외국에 소개하는 그런 일을 해보고 싶어요. 일부러 교토 쪽 대학을 선택한 것도 그런 꿈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점에 대해서는 부모님도 이해해주셨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역시 어학능력이 필요하잖아요?"
유키나리는 눈을 깜빡이며 사오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녀와 다양한 이야기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장래의 꿈에 대해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다운 꿈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학연수를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키나리의 가슴속에서는 초조감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나마 교토라면 만나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외국이라면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그렇죠? 실은 몇 년 전에 우리 집에서 캐나다 여학생이 홈스데이를 한 적이 있어요. 이번에는 거꾸로 내가 그 친구 집에 신세를 질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거. 아주 좋군요." 유키나리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입에 올렸다.
"며칠 전에 그 친구에게 전화해서 말했더니 굉장히 반가워하더라구요. 그쪽 부모님은 일본인이 살기 쉽게 집까지 수리해주겠다고 하신대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된다고 말은 했는데, 딸이 신세를 졌으니 당연하다고 하셔서‥‥‥. 그래서 도가미 씨에게 부탁이 있어요. 너무 염치없는 부탁이라고 생각하실까 봐 좀 불안하긴 한데요‥‥‥."
"뭔데요?"
사오리는 망설이는 표정을 보인 뒤에 눈을 살짝 치켜뜨며 유키나리를 바라보았다.
"도가미 씨의 집을 좀 구경할 수 없을까요?"
일순, 무슨 말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마침 그때 마실 것이 나왔다. 유키나리는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앞에 놓인 잔을 가져다 마셨다. 아이스티였다.
사오리가 뭔가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아, 그건 내가 주문한 건데‥‥‥."
유키나리는 손에 든 유리잔과 테이블에 남아 있는 잔을 번갈아 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주문한 건 커피였다는 게 생각났다.
"이런, 미안해요. 내가 잘못 가져왔네. 어쩌지?"
사오리는 실눈을 뜨며 웃었다.
"아이, 괜찮아요. 그걸로 드세요. 제가 커피를 마실게요."
"괜찮겠어요? 아, 정말 이런." 유키나리는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관자놀이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염치없는 부탁을 하는 바람에 놀라셨지요?"
"아니, 절대 그런 게 아니고‥‥‥. 아, 예. 놀란 건 사실입니다만." 유키나리는 아이스티를 벌컥벌컥 마셨다. "왜 우리 집을 보려는 거지요?"
"전에 말씀하셨죠? 도가미 씨 댁은 예전에 독일인이 살던 집을 개축했기 때문에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한 부분이 많다구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했었군요."
방금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오리와는 항상 아자부쥬반 점이나 요리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저런 잡담도 나누었던 것이다. 집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은 있지만, 딱히 중요하게 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을 똑똑히 기억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기껏 유학생을 위해 집까지 고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쪽에서 장기간 머물게 될 테니, 기왕 수리를 하신다면 어떤 식으로 고쳐야 편리한 방이 될지 내가 알아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염치없는 부탁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유키나리는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 분명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염치없다니, 전혀 그렇지 않아요. 우리 집이라도 괜찮다면 언제든 보여드리지요. 그러잖아도 다카미네 씨에게는 항상 도움만 받았기 때문에 나도 뭔가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정말이세요? 하지만 번거롭거나 하시면 꼭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니까요."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집으로 정말 도움이 될지, 나는 그게 걱정이 되는데요?"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고맙습니다. 아, 내가 정말 상의하기를 잘했네요." 사오리는 커피 잔을 당겼다. 안도한 탓인지 그녀의 웃는 얼굴은 한층 환하게 빛나 보였다.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유키나리를 뛸 듯이 기쁘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가슴에는 검은 구름이 급속히 퍼져가기 시작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녀와는 이제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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