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39)

개미남 | 2019.06.15 10:47:09 댓글: 0 조회: 617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37442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2 - 14.

도가미의 집을 올려다보며 역시나 저택이라는 표현은 이런 집을 위한 말이구나. 하고 시즈나는 생각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전체적인 크기를 알 수는 없지만, 길 쪽의 담장 길이만 봐도 부지가 100평은 훌쩍 뛰어넘으리라는 건 분명했다. 지붕에 기와를 얹은 것은 일본식이지만 거기서 위로 뻗어나간 굴뚝에는 벽돌이 사용되어 서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굴뚝이 있는 집은 처음 봤어요." 시즈나는 솔직한 느낌을 말했다.
"거실에 난로가 있거든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유키나리가 말했다. "물론 이제는 쓰지도 않아요. 아버지가 맨틀피스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개축할 때도 그대로 남겨뒀다는군요. 그래서 굴뚝도 그저 장식품이에요."
유키나리가 문기둥에 붙은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예에." 여자의 침착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다카미네 씨와 함께 왔어요."
네에. 라는 부드러운 대답. 그 목소리만으로도 여유 있는 살림을 꾸려가는 주부의 모습이 엿보였다.
문을 지나 화초가 가득한 앞마당을 건너갔다. 작은 계단이 있고 그 위가 입구였다. 현관문이 너무나 커서 시즈나는 놀랐다.
"독일 사람은 워낙 키가 크니까요. 문이 이 정도는 되어야 마음이 놓였나 봐요." 유키나리가 웃으며 그 문을 열었다. "자, 어서 들어와요."
"실례합니다." 시즈나는 안으로 발을 들였다.
보통 집에서라면 아이들 방으로 써도 될 정도의 현관 홀에 몸집이 자그마한 여자가 서 있었다. 연한 보랏빛 니트를 입고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뺨이 둥그런 느낌이지만 결코 뚱뚱한 편은 아니었다. 눈가에 주름이 있어도 피부에서는 윤기가 느껴졌다.
부잣집 안주인의 얼굴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시즈나는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이름이 기미코라는 건 택시 안에서 유키나리에게 들었다.
"다카미네라고 합니다. 오늘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아이, 천만에요. 이런 집이라도 괜찮다면 얼마든지 구경하셔야죠. 근데 청소를 제대로 못했어요. 그런 점은 살짝 눈을 감아줘요."
"어라. 어제 급하게 대청소를 하시는 거 같던데? 우리 어머니, 자신이 없으신가?"
놀리듯이 말하는 아들을 기미코가 흘겨보았다.
"그런 비밀 이야기를 해버리다니. 이건 반칙이잖니? 청소가 제대로 안 된 부분은 다카미네 씨의 눈에 띄지 않게 네가 눈치껏 안내해줘. ㅡ자, 그런 것보다 어서 올라와요. 우선 차라도 한잔 마셔야지? 얘는 눈치가 없어서 당장 집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잠시 의자에 앉지도 못하게 할까 봐 걱정이네."
기미코의 입에서 다정한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것이 전혀 고까운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내심으로는 귀찮은 부탁을 하는 아가씨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것을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한 아들에게도 화가 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전혀 느끼게 하지 않는 점이 이 여자가 단순히 유복한 부인네만은 아니라는 증거처럼 생각되었다. 10여 년 전ㅡ. <도가미 정>이 이만큼 성공하기 전에 그녀는 허름한 양식당의 안주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손님을 다루는 데는 익숙할 터였다.
구두를 벗고 집 안에 오른 뒤에 시즈나는 들고 온 선물이 생각났다.
"저어, 이거‥‥‥, 좋아하신다는 말씀을 들어서요."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어머.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데." 기미코는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로 받아든 뒤, 종이봉투 안을 들여다보고 환하게 웃었다. "아이, 저런. 유키나리가 그런 얘기까지 했어? ㅡ 얘,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응?"
"뭐 어때?" 유키나리도 웃고 있었다.
"미안해요. 다카미네 씨. 그럼 사양 않고 고맙게 받을게요. 자, 이쪽으로 들어와요."
복도를 건너가는 기미코의 등을 바라보며 시즈나는 시어머니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일 이 아주머니와 한 지붕 아래 살게 된다면 내가 과연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지금은 다정하게 보이는 저 표정도 며느리가 되고 보면 크게 달라지는 걸까ㅡ.
갑자기 기미코가 뭔가 생각난 듯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아참, 아버지도 들어오셨어." 유키나리에게 말했다.
시즈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지? 웬일로?"
"잘은 모르겠는데 가게 쪽 일은 괜찮으신가 봐. 아마 궁금해서 들어오셨을 거야. 아무튼 얘가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게 처음이거든요." 뒤의 말은 시즈나를 향한 것이었다.
"아휴, 구경꾼이 늘었네." 유키나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미안해요. 아버지까지 들어오시고. 다카미네 씨, 그래도 괜찮겠어요?"
"저는 괜찮아요."
"잠깐 인사나 하시려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기미코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즈나의 마음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었다. 그녀를 시어머니로 상상한 자신을 질타했다. 지금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기미코가 멈춰 서더니 옆의 문을 열었다.
"여보, 손님 오셨네요." 문 안쪽을 향해 말을 건네고 나서 시즈나 쪽을 보았다. "자, 들어와요."
시즈나는 머리를 숙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큼직한 센터 테이블이 있고 그것을 에워싸듯이 가죽 소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옆에 도가미 마사유키가 서 있었다. 회색 카디건을 걸친 모습이었다.
"도가미입니다. 지난번에는 실례했어요."
"아뇨. 저야말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시즈나는 새삼 머리를 숙였다.
<도가미 정> 히로오 점에서 유키나리를 만났을 때, 나오는 길에 도가미 마사유키와 우연히 마주쳤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들은 단순한 사기 작전의 타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직후에 다이스케가 마사유키를 먼발치에서 보았고, 사건 날 밤에 목격했던 그 사람이라고 크게 흥분했었다.
유키나리의 안내를 받아 시즈나는 3인용 소파 쪽에 앉았다. 유키나리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
"캐나다에 유학을 가신다고?" 맞은편에 앉은 마사유키가 물어왔다.
"네." 시즈나가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외 경험은 인생에 큰 영향을 줄 거예요. 하지만 그게 항상 플러스가 된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그게 어려운 점이지."
"아버지." 유키나리가 미간을 좁혔다. "괜히 찬물 끼얹는 말은 하지 마시구요."
"아, 그런 거 아니다." 마사유키는 시즈나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입에 웃음을 띠었다. "아가씨에게 의미 있는 유학이 되기를 빌어요."
"고맙습니다." 시즈나는 머리를 숙였다.
기미코가 홍차를 내왔다. 은은한 허브 향이 감돌았다. 잔을 입가에 대며 시즈나는 마사유키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는 쿠키에 손을 내미는 참이었다.
이 사람이 아버지와 엄마를 살해했다ㅡ.
듬직한 풍채 하며 이지적인 얼굴 생김새 하며, 살인을 저지를 만한 기척 따위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사람 속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사기 작전을 계속해온 시즈나는 지나칠 만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가면이 완벽하면 할수록 그 뒷면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얼굴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14년 전, 악몽의 그날이 되살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시즈나는 애써 그 생각을 억눌렀다. 실은 고이치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다.
"혹시 도가미 마사유키를 만나더라도 그날의 사건은 되도록 생각하지 마. 생각하면 분명 평정을 유지할 수 없어. 당장 그 자리에서 복수하고 싶을 거야. 하지만 우선은 참아야 해. 증오를 폭발시키는 것은 나중에 꼭 하자. 오로지 네가 할 일만 생각해. 그러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야."
고이치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마주 앉은 것만으로도 몸이 달아오르면서 고함을 내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시즈나는 눈을 내리뜨고 되도록 마사유키를 쳐다보지 않게 주의했다.
"우리 유키나리의 새 가게를 위해 도움을 많이 주셨다고? 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어."
"도움이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몸을 숙인 채 고개를 저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요. 뭐."
"실은 며칠 전에도 아자부쥬반 점의 새로운 하야시라이스를 시식해주었어요." 유키나리가 말했다.
"호오. 그래서 어떤 평을 해주셨지?"
"재료의 맛을 잘 살렸다는 칭찬을 받았죠. 우리 쪽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어서 정말 마음이 놓였어요."
"흠, 그랬군. 공치사는 아니겠지요. 다카미네 씨?"
"아닙니다. 생각한 그대로 말씀드렸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나도 그 정도 맛이라면 승부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ㅡ그런데 다카미네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시즈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등을 꼿꼿이 세우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네."
"유키나리에게 들었는데, 우리 원조 하야시라이스와 똑같은 것을 옛날에 다른 양식당에서 먹어본 적이 있다고?"
시즈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꼿꼿이 세운 상체가 휘청 흔들릴 뻔했다.
뺨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었다.
"정말 똑같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워낙 어렸을 때의 일이라서요."
"그 양식당이 요크스카에 있었다면서요? 가게 이름은 기억하고 있어요?"
"그건 나도 물어봤는데, 잘 모른다고 했어요." 유키나리가 옆에서 대답했다. "하지만 영어 이름이었다는 건 생각난다고 했었죠?"
"예." 시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어 이름이라‥‥‥, 그 가게에 대해 그밖에 뭔가 생각나는 일은 없었나? 이를테면 하야시라이스 이외의 요리는 뭐가 맛있었지요?"
"하야시라이스 이외에?"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유키나리가 은근히 항의하는 듯한 어조로 마사유키에게 말했다. "전에 그 가게 이야기를 했을 때는 별로 관심도 없으신 것 같더니."
"아냐, 그때도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꼬치꼬치 묻는 건 실례인가?"
"오늘은 집을 구경하러 온 거예요. 이야기 상대를 해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 그렇군." 마사유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즈나를 보았다. "마음에 거슬렸다면 미안해요."
"아뇨, 천만에요." 시즈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의 일이라 정확히 생각나지 않아요. 하야시라이스의 맛이 비슷했다는 것도 제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것뿐인지도 모릅니다. 저야말로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아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맛을 기억한다는 게 원래 어려운 일이죠?" 맨 끝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미코가 수습에 나서듯이 말했다.
"아니." 마사유키는 손을 흔들었다.
"어린 시절에 몸에 밴 맛이라는 건 의외로 강한 거야. 그래서 다들 어머니가 해주신 된장국과 주먹밥을 좋아하지. 혹시 뭔가 생각나거든 유키나리에게 말해줘요. 참고가 될 테니."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이만 물러가마. 부디 마음 편히 구경해요. 그리 대단한 건 없더라도."
마사유키가 나간 뒤에도 시즈나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얘. 내가 다카미네 씨에게 주고 싶은 게 있는데." 기미코가 들뜬 기색으로 유키나리에게 말했다.
"뭔데요?"
"이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내민 것은 네모난 상자였다. 샤넬 로고가 찍혀 있었다. 시즈나도 그것이 무엇인지 금세 알았다.
"그 향수, 작년에 파리 갔을 때 사온 거잖아?"
"그래, 맞아. 근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나한테는 아무래도 맞지를 않아. 너무 화려하다고 할까, 너무 상큼하다고 할까."
"한마디로 나이에 맞지 않는 걸 사셨구나?" 유키나리가 키득키득 웃었다.
"얘. 그저 타입이 다른 것뿐이야. 근데 다카미네 씨를 보니까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찮다면 써볼래요?" 기미코는 상자를 열고 안에 든 병을 시즈나 쪽으로 내밀었다.
"어머, 이런 비싼 물건을‥‥‥." 향수를 받아들고 시즈나는 유키나리 쪽을 보았다.
"내가 갖고 있어 봐야 쓰지를 않으니 아깝기만 해. 하지만 향수라는 건 각자 취향이 있으니까 억지로 권하지는 않을게요. 잠깐 냄새를 맡아봐요."
시즈나는 왼쪽 손목에 살짝 뿌리고 오른손으로 비빈 뒤에 코에 대보았다. 상큼한 감귤 계통의 달콤함이 담긴 향기가 났다. 정말 젊은 여자를 위한 향수인 것 같았다.
"아, 좋은 냄새!"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좋지? 받아줄래?"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고 말고. 솔직히 말하면 다카미네 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 없었어. 남의 집을 구경하겠다니, 맹랑한 아가씨구나 하고 생각했지.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까 왠지 자꾸 기분이 좋아지네? 이렇게 멋진 아가씨인 줄은 몰랐거든. 얘가 여자 보는 눈이 꽤 괜찮지 뭐야."
"어유, 어머니." 유키나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니 사양 말고 받아요. 만일 마음에 든다면, 그렇다는 얘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소중하게 쓸게요."
향수병을 꼭 쥐고 시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실은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기미코의 말이 거짓으로는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즈나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어디서부터 안내할 거니?" 기미코가 유키나리에게 물었다.
"우선은 게스트 룸부터 가볼까? 그 방이 가장 참고할 게 많아. 그다음은 서고와 선룸으로 갈 거야."
"구경 다 끝나면 말해줘."
"알았어요. ㅡ자, 갈까요?"
"네."
유키나리의 말에 시즈나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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