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히가시노 게이고 (2)

개미남 | 2019.06.18 10:33:38 댓글: 0 조회: 761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39006
악의/히가시노 게이고


2.

내 방으로 돌아와 잠시 일을 하고 난 참에 현관 차임벨이 울렸다. 내가 사는 곳은 히다카와는 달리 겨우 5층짜리 맨션 한 칸이었다. 작업실 겸 침실로 쓰는 세 평짜리 방 하나에 네 평쯤 되는 거실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이었다. 그리고 리에 씨 같은 아내도 없었다. 차임벨이 울리면 내가 직접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어스코프로 상대를 확인한 뒤에 걸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도지 출판사의 오시마였다.
"여전히 시간에는 정확하군" 하고 나는 말했다.
"제 특기가 그거 하나거든요. 이거 좀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 그가 내민 것은 모 유명 제과점의 이름이 새겨진 과자 상자였다. 그는 내가 단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여기까지 오라고 해서 미안하네."
"아뇨.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인데요, 뭐."
오시마 군을 좁은 거실로 안내하고 차를 타주었다. 그리고는 작업실로 가서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원고를 가져왔다.
"자. 여기 있네. 잘 됐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원고를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신문을 펼쳤다. 항상 그렇지만 내 눈앞에서 누군가가 내 작품을 읽는다는 건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오시마 군이 반쯤 읽었을 때 거실 테이블 위의 무선 전화기가 울렸다. 잠깐 실례. 라고 말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노노구치입니다."
"여보세요. 나야." 히다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침울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응. 어쩐 일이야?"
그렇게 물어본 것은 후지오 미야코의 일이 은근히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지만, 그는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뜸을 들인 뒤에 "자네, 바쁜가?"라고 물어왔다.
"바쁘다고 할까. 지금 손님이 좀 와 있어."
"그래? 몇 시쯤 끝날까?"
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6시를 조금 넘어선 참이었다.
"앞으로 조금 더 걸릴 거야. 근데 무슨 일이야?"
"응. 전화로는 말하기가 어려워. 잠깐 자네하고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래. 이쪽으로 좀 와줄래?"
"그거야 뭐, 괜찮지만……." 후지오 미야코 일때문이냐고 물으려다가 나는 그 생각을 거두었다. 오시마 군이 곁에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8시면 어때?"라고 그는 말했다.
"응, 괜찮아."
"자, 그럼 기다릴게." 그렇게 말하고 히다카는 전화를 끊었다.
내가 무선 전화기를 내려놓자 오시마 군이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려는 몸짓을 보였다.
"볼일이 있으시면 저는 이제 그만……."
"아냐. 괜찮아. 괜찮아." 나는 그에게 어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8시에 누구하고 좀 만나기로 약속한 것뿐이야.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마음 편히 읽어봐요."
"아, 그러세요? 자, 그럼." 그는 다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나도 다시 신문 활자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머릿속은 히다카가 상의하고 싶다는 게 뭘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필시 후지오 미야코 일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거 말고는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히다카에게는 <수렵 금지구역>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었다. 어느 판화가의 생애를 묘사한 소설이었다. 일단 픽션이라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실은 이 작품에는 실제 모델이 있었다. 후지오 마사야라는 사내였다.
후지오 마사야는 나와 히다카와 같은 중학교를 다녔었다. 동창이라는 인연이 있어서 히다카도 그에 대해 소설을 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다만 이 소설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즉 작품 속에 후지오 마사야로서는 그다지 명예롭다고 할 수 없는 일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가 중학교 시절에 저지른 수많은 악행에 대해 히다카는 거의 사실 그대로 소설 속에 써놓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이야 물론 다르지만, 그 부분만 읽어보면 나처럼 후지오 마사야를 아는 사람은 도저히 픽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또한 후지오 마사야가 창녀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는 대목도 완전히 실제 사건 그대로였다.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지오 마사야를 아는 사람들로서는 소설의 모델이 누구인지 추리하는 건 그야말로 간단했다. 이윽고 그 소설책이 후지오 가족의 눈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번에 항의에 나선 것은 어머니와 여동생이었다. 그녀들의 주장은 이러했다. 소설의 모델이 후지오 마사야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런 소설이 집필되는 것을 허락한 기억이 없다. 또한 이 소설에 의해 후지오 마사야의 프라이버시가 폭로되었고 그 결과 부당하게 명예에 손상을 입게 되었다. 자신들은 이 소설책의 회수와 전면적인 개고改稿를 요구한다.
히다카도 말했던 대로 그녀들이 배상금이라는 형태로 보상을 요구한 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순수하게 소설을 다시 써달라고 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협상의 줄다리기를 계획하고 있는 것인지, 그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조금 전에 걸려온 히다카의 전화 목소리를 통해 추측해보자면 후지오 미야코와의 협상은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기 집에 와달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이야기가 상당히 틀어져버린 건가, 그렇다고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맞은편에서는 오시마 군이 원고를 다 읽은 모양이었다. 나도 신문에서 눈을 들었다.
"참 좋은데요?" 원고를 읽고 난 오시마 군의 말이었다. "어쩐지 훈훈하고 그리운 듯한 느낌도 들어요. 저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네." 나는 실제로 마음이 푹 놓여서 후르륵 차를 마셨다. 오시마 군은 영리한 젊은이였지만 괜한 공치사를 하는 일은 없었다.
통상 하던 대로라면 앞으로의 작업에 대해 상의를 할 참이었지만, 히다카와의 약속이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6시 반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시간은 괜찮으세요?" 오시마 군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응. 괜찮긴 한데. 어때. 근처에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으니까 거기서 밥이라도 먹으면서 우리 야기를 계속하는 게 어떨까? 그러면 나도 시간상으로 좋겠는데."
"예. 좋습니다. 저도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니까요." 원고를 가방에 챙겨 넣으며 오시마 군은 말했다. 그는 아마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나이일 텐데 아직 독신이었다.
걸어서 집으로부터 2~3분 거리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그라탱을 먹으며 둘이서 집필에 대한 상의를 했다. 하긴 거의 대부분은 잡담이었다. 이야기 끝에 내가 이제부터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작가 히다카 구니히코라는 말을 했다. 오시마 군은 좀 놀란 듯 했다.
"히다카 씨하고 아는 사이세요?"
"응.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녔어. 부모님 집이 바로 이 근처였거든. 여기에서라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이야. 하긴 지금은 그 친구 집이나 우리 집이나 다 철거되고 맨션이 들어섰지만."
"어렸을 때 친구시군요."
"음, 그렇지. 그래서 아직도 서로 왕래하는 사이야."
"우와." 그의 눈에 선망과 동경의 빛이 배어 있었다. "저는 그건 또 몰랐네요."
"내가 자네 출판사에 글을 보내게 된 것도 그 친구가 소개해줬기 때문이야."
"와. 그러셨어요?"
"처음에는 자네 출판사 편집장이 히다카에게 원고를 의뢰했던 모양이야. 근데 그는 아동문학은 못 쓰니까 안 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그 대신 나를 소개해줬어. 그러니 나한테는 의리있는 친구인 셈이지." 포크로 마카로니를 입에 넣어가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분명 히다카 씨가 쓰는 아동문학도 흥미는 있겠네요." 그러고 나서 오시마 군은 내게 물었다. "노노구치 선생님은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은 안 쓰십니까?"
"언젠가는 쓰자고 마음먹고 있어. 기회만 있다면 이라고 할까?" 이건 나의 진심이었다.
7시 반에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와 역까지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반대 방향의 전차를 타고 돌아가는 오시마 군을 플랫폼에서 배웅했다. 곧바로 내 쪽의 전차도 왔다.
히다카의 집에 도착한 것은 8시 정각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집 안이 온통 캄캄했기 때문이다. 대문의 등도 꺼져 있었다.
그래도 일단 인터폰 버튼을 눌러보았다. 반쯤은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역시 아무 응답도 없었다.
그때 나는 내가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히다카는 전화로 8시에 와달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꼭 자기 집으로 8시까지라는 의미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왔던 길을 조금 되돌아 나왔다. 작은 공원이 있고 그 곁에 전화박스가 있었다. 지갑을 꺼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번호 안내를 통해 크라운 호텔의 번호를 알아본 뒤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히다카라는 사람이 그 호텔에 숙박하고 있을 텐데요. 라고 말하자 곧바로 연결해주었다.
"여보세요. 히다카입니다." 리에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노구치예요." 나는 말했다. "히다카, 그쪽에 있습니까?"
"아뇨, 이쪽에 안 왔어요. 아직 집에 있을 거예요. 일이 남았을 테니까요."
"아니, 근데. 그게……."
나는 집 안의 불이 모두 꺼져 있고 안에 사람이 있다는 기척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상하네요." 그녀는 전화 너머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색이었다.
"이쪽 호텔로 오는 건 빨라도 한밤중일 거라고 했었는데?"
"그럼 잠깐 어디 나간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리에 씨는 생각에 잠긴 듯 잠깐 침묵하고 나서 "알았어요.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요."라고 말했다. "40분쯤이면 도착할 거 같은데 노노구치 씨는 지금 어디 계세요?"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설명해준 뒤에, 그러면 근처 찻집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박스에서 나와 찻집에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히다카의 집앞까지 가보았다. 여전히 불은 꺼져 있었다. 주차장에 사브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약간 마음에 걸렸다.
내가 찻집이라고 한 곳은 히다카가 기분전환을 위해 자주 찾는 커피 전문점이었다. 나도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찻집 주인은 나를 기억해주었다. 오늘은 히다카 씨와 함께 안 오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집에 아무도 없더라고 나는 대답했다.
주인을 상대로 프로야구 이야기 등을 하다 보니 그새 30분 넘게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돈을 치르고 찻집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히다카의 집으로 향했다.
대문 앞까지 가자 마침 리에 씨가 택시에서 내리는 참이었다. 내가 말을 건넸더니 그녀는 웃는 얼굴로 응해주었다. 하지만 집쪽으로 시선을 던지자마자 그 얼굴이 금세 불안한 기색으로 흐려졌다.
"정말로 깜깜하네요?" 그녀는 말했다.
"아직 안 돌아온 것 같군요."
"하지만 외출할 예정이라고는 없었을 텐데……."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며 그녀는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리에 씨는 여기 저기 전깃불을 켰다. 실내공기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람이 있는 기척은 없었다.
리에 씨는 복도를 지나 히다카의 작업실 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외출할 때 항상 문을 잠가둡니까?" 나는 물었다.
그녀는 열쇠를 꺼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즘에는 별로 문단속을 안 했었는데?"
열쇠를 꽂아 돌리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작업실도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깜깜하지는 않았다. 컴퓨터 스위치가 켜진 채여서 데스크톱의 모니터 화면이 빛을 뿜고 있었다.
리에 씨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방 한복판에 다리를 이쪽으로 향하고 쓰러져 있는 히다카의 모습이 보였다.
영 점 몇 초쯤 공백의 시간이 흐르고 리에 씨가 말없이 히다카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중간쯤에서 발을 멈추고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 사이에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멈칫멈칫 다가갔다. 히다카는 엎드린 상태로 고개를 틀어 왼쪽 옆얼굴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 눈은 가늘게 뜨여 있었다. 이미 죽은 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죽었어……." 나는 말했다.
리에 씨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무릎을 끓으면서 동시에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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