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5~26

나단비 | 2024.02.14 14:19:40 댓글: 0 조회: 9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47140
25

매슈와 퍼프 소매





매슈는 괴로운 10분을 보냈다. 황혼이 내리는 춥고 흐린 12월의 어느 날 저녁 무렵,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장작 통 귀퉁이에 앉아 무거운 장화를 벗고 있었다. 앤과 반 친구들이 거실에서 <요정의 여왕> 연습에 한창이었지만 그것도 알지 못했다. 얼마 안 있어 아이들이 즐겁게 깔깔거리며 부엌으로 몰려 들어왔다. 아이들은 매슈를 보지 못했다. 매슈가 장화와 구둣주걱을 각각 한 손에 나눠 들고 장작 통 너머의 어둠 속으로 몰래 숨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모자나 윗옷을 입어보고 대화극과 발표회에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매슈는 그들을 10분 동안이나 수줍게 지켜보았다. 아이들 사이에서 눈을 반짝이며 서 있는 앤은 생기발랄해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매슈에게 앤이 다른 아이들과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것이 매슈를 우울하게 했다.

지금까지 매슈가 사람들의 차이점을 알아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앤은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밝은 얼굴에, 키도 더 크고 더 반짝이는 눈을 가졌다. 여러 면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더 섬세한 면모가 엿보였고, 부끄럼 많고 무엇이든 주시해서 보는 법이 없는 매슈라도 한눈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앤의 다른 점은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매슈는 소녀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길게 줄을 지어 반쯤 얼은 긴 오솔길을 벗어난 후에도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앤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릴라에게 그 의문을 지적할 수도 없었다. 마릴라가 십중팔구 콧바람을 내면서, 앤과 다른 아이들의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다른 아이들은 잠깐 동안이라도 말이 없는데 앤은 혀를 쉬는 법이 없는 거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마릴라에게 물어도 별 소용이 없다고 매슈는 느꼈다.

그날 저녁 매슈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그 이유를 알아내려 애썼다. 그 때문에 마릴라가못마땅해했지만, 2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며 골똘히 생각한 끝에 매슈는 의문의 해답을 찾아냈다. 앤의 옷차림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매슈가 이 문제에 관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앤이‘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에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다른여자아이들처럼 옷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마릴라는 앤에게 평범하고 짙은 색의 옷을 고집스레 입혀서, 모든 옷이 거의 똑같아 보였다. 매슈가 그때 유행하는 옷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면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매슈는 앤의 소매가 다른 아이들이 입은 소매와 달라 보인다는 것만을 알았다. 그날 저녁 매슈는 앤과 함께 있던 아이들을 떠올려보았다. 모두들 붉은색이나 파란색, 분홍색이나 흰색의 밝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마릴라는 왜 앤에게 평범하고 수수한 옷만을 입히는지 궁금했다.

물론 그래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마릴라가 더 잘 알았고 앤을 올바르게 교육시키고 있기는 했다. 거기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앤에게도 예쁜 옷, 가령 다이애나가 항상 입는 옷처럼 예쁜 옷을 입힌다고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매슈는 앤에게 옷 한 벌을 사주기로 결심했고, 그것이 부당한 참견이라고 반대에 부딪힐 것 같지도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보름 정도 앞둔 때여서, 예쁜 새 옷이면 선물로도 안성맞춤일 듯싶었다. 매슈가 만족한 한숨을 내쉬며 파이프를 내려놓고 잠자리로 가자, 마릴라는 모든 창문을 열어 집 안을 환기시켰다.

다음 날 오후 매슈는 옷감을 사려고 카모디로 나갔다. 힘든 일일수록 얼른 해치워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시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매슈가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흥정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있기는 했지만,여자아이의 옷을 사려 한다면 점원의 힘을 빌어야 했다.

매슈는 생각을 거듭한 끝에 윌리엄 블레어네 가게보다는 새뮤얼 로손의 상점으로 가야겠다고 결정했다. 물론 커스버트네 가족은 언제나 윌리엄 블레어네 가게를 찾았고, 그런 것은 장로교회에 출석하고 보수당에 투표하는 것만큼이나 양심의 문제였다.

그러나 윌리엄 블레어 가게에는 두 딸들이 자주 손님을 맞았고, 매슈는 그들을 무척 어렵게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물건을 정확히 알 때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물건을 가리키면 되겠지만, 이번처럼 설명과 조언이 필요한 경우에는 남자 직원을 상대하는 편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매슈는 새뮤얼이나 그의 아들이 주로 가게를 지키는 로손의 가게로 갔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매슈는 새뮤얼 로손이 얼마 전에 상점을 확장하면서 여직원을 두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는 새뮤얼 부인의 조카딸이었는데 무척 맵시 있는 처녀로, 앞머리를 크게 부풀려 내려뜨리고 큰 갈색 눈을 굴리며 매혹적으로 활짝 웃었다. 지나칠 정도로 세련된 옷을 입고, 장식용 팔찌를 여러 개나 껴서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반짝거리고 짤랑거렸다. 매슈는 가게에 여자가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요란한 장식 팔찌에 매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커스버트 씨, 무엇을 찾으세요?”

루실라 해리스가 계산대를 두 손으로 두드리며 쾌활하고 싹싹하게 물었다.

“저, 저, 저기, 음, 정원에서 쓸 만한 갈퀴가 있을까요?”

매슈가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해리스 양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12월 중순에 정원용 갈퀴를 찾으니 그럴 만도 하기는 했다.

“한두 개쯤은 남아 있을 거예요. 하지만 2층 창고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볼게요.”

점원이 나가 있는 동안 매슈는 진땀을 흘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해리스 양이 갈퀴를 들고 돌아와서는 명랑하게 물었다.

“찾으시는 또 다른 물건은 없으세요, 커스버트 씨?”

매슈는 두 손에 힘을 주고 용기를 총동원해 물었다.

“그렇게 물으시니 저, 그거, 풀씨 좀 보았으면 하는데요.”

해리스 양도 매슈 커스버트가 좀 이상한 사람이란 얘기는 들었지만 그때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풀씨는 봄에만 있어요. 지금은 남은 게 전혀 없는데요.”

말투가 금방 오만해졌다.

“아, 그렇지요, 그렇겠죠.”

당황한 매슈가 말을 더듬거리면서 갈퀴를 갖고 문 쪽으로 향했으나 문턱에서 아직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나 비참한 기분으로 다시 돌아섰다. 해리스 양이 거스름돈을 세고 있는 동안 다시 한 번 마지막 힘을 다해 물었다.

“저어, 괜찮으시다면, 음, 저어, 설탕을 좀 보았으면 하는데요.”

“흰 설탕이요, 흑설탕이요?”

해리스 양이 꾹 참으며 물었다.

“음, 흑설탕으로요.”

완전히 맥이 빠져버린 매슈가 간신히 대답했다.

“저기에 통이 있어요. 저것밖에 없어요.”

해리스 양이 팔찌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럼, 그거 9킬로그램만 주세요.”

매슈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간신히 말했다.

매슈는 집까지 거의 절반을 와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끔찍스러운 경험이었으나 그 이상한 가게로 가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런 일을 당한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갈퀴를 헛간에 숨겨두고, 설탕은 마릴라에게 가져다주었다.

“아니, 흑설탕 아니에요!”

마릴라가 소리를 질렀다.

“흑설탕을 이렇게 많이 사고, 귀신한테라도 홀린 거예요, 오라버니? 이건 일꾼들 죽이나 검은색 과일 케이크 만들 때가 아니면 쓸 일이 없다고요. 제리도 가버렸고 케이크도 이미 다 만들었는데…… 그리고 이건 너무 거칠고 검군요. 윌리엄 블레어는 이런 설탕을 팔지 않는데.”

“난 이런 것도 곧 쓸 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슈가 변명을 해보았다.

매슈는 그 문제를 다시 생각했고,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해줄 여자가 있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마릴라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마릴라에게 물으면 곧바로 그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뻔했다. 린드 부인밖에 없었다. 에이번리에서 매슈가 힘들더라도 조언을 구할 만한 여자는 린드 부인밖에 없었다. 그리고 매슈가 린드 부인을 찾아가자마자 이 사람 좋은 부인은 금방 매슈의 짐을 덜어주었다.

“앤에게 선물할 옷을 골라달라는 건가요? 알았어요. 내가 내일 카모디에 나가니까 살펴볼게요. 특별히 생각해둔 옷이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니죠? 그렇다면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짙은 갈색이 앤에게는 어울릴 거예요. 윌리엄 블레어 상점에 새로 들어온 글로리아 옷감이 있던데 무척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옷도 만들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마릴라가 옷을 지으면 앤이 미리 눈치를 채서 깜짝 놀라게 해줄 수 없잖아요. 내가 직접 만들게요. 아니에요, 조금도 부담 갖지 마세요. 전 바느질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조카딸 제니 길리스 몸에 맞추면 될 거예요. 제니와 앤은 몸매가 쌍둥이처럼 똑같으니까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음, 그런데…… 내 생각엔 요즘엔 소매가 옛날이랑 달라진 것 같더군요. 너무 까다롭지 않으면 소매를 요즘 식으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퍼프 소매요? 물론 그렇게 해야죠. 그런 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매슈. 최신 유행으로 만들 테니까.”

린드 부인이 대답하고는 매슈가 나가자 혼잣말을 했다.

“다행히 그 불쌍한 아이가 이번에는 쓸 만한 옷을 입은 걸 보게 되겠군. 마릴라가 앤에게 입히는 옷은 너무 우스꽝스러워. 마릴라에게 수십 번이나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마릴라가 내 충고를 바라지 않을 거란 것을 알고, 늙은 노처녀이면서도 나보다 아이 키우는 걸 더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동안 꾹 눌러 참았는데 이제 제대로 된 거야. 하기야 아이를 길러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알지. 모든 아이에게 들어맞는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는 걸. 그런데 아이를 길러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는 게 그저 조건만 맞추면 올바른 답이 나오는 비례법칙처럼 쉽고 간단하다고 생각한다니까. 하지만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은 수학적 머리로 나오는 게 아닌데, 마릴라는 그 부분에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마릴라가 앤에게 그런 옷을 입히면서 겸손한 마음을 키워주려 한다는 건 알지만, 오히려 시샘과 불만만을 키울 수도 있다고. 앤이 자기 옷과 다른여자아이들의 옷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테니까. 하지만 매슈가 그런 것까지눈치채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어! 그 남자가 60년 동안 잠을 자다가 이제 깨어난 것 같아.”

그 후 2주 동안 마릴라는 매슈가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못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린드 부인이 새 옷을 가지고 온 후에야 알았다. 마릴라는 전반적으로 점잖게 행동하긴 했지만, 마릴라가 옷을 만들면 앤이 너무 일찍 눈치를 챌까 매슈가 걱정해서 자기가 직접 옷을 지었다고 린드 부인이그럴듯하게설명했어도 그 말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라버니가 지난 2주 동안 이상하게 보였고 혼자 히죽거렸던 것이군요. 뭔가 엉뚱한 짓을 벌였다는 건 알았어요.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앤에게 새 옷이 더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올가을에도 따뜻하고 실용적인 좋은 옷을 세 벌이나 만들어주었거든요. 그 이상은 사치예요. 이런 소매를 짓는 데 필요한 천만으로도 블라우스 한 벌은 만들겠어요. 오라버니가 앤의 허영심을 키워주는 거예요. 그러잖아도 공작처럼 허영심이 강한데. 어쨌든 앤이 만족했으면 좋겠군요. 앤이 처음 그 말을 꺼내곤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 이상한 소매 옷을 무척 원했었거든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퍼프 소매는 더 커지고 우스꽝스러워지네요. 이젠 커다란 풍선만 하잖아요. 내년이면 퍼프 소매를 입은 사람들이 문을 지날 때는 옆으로 걸어야 할 것 같네요.”

마릴라는 약간 퉁명스럽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으면서 아름다운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그때까지 포근한 12월이 계속되어 그린 크리스마스를 예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밤새 많은 눈이 소리 없이 에이번리의 풍경을 바꾸어놓았다. 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성에가 낀 창밖을 내다보았다.‘유령의 숲’의 전나무들이 깃털 같은 눈에 덮여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자작나무와 산벚나무는 진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듯했다. 온통 눈벌판으로 변한 쟁기질이 된 밭은 여기저기 보조개처럼 움푹 패여 있었다. 장관을 이룬 풍경만큼이나 공기도 상큼했다. 앤은‘초록 지붕 집’이 떠나가도록 노래하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마릴라 아주머니, 메리 크리스마스! 매슈 아저씨, 메리 크리스마스! 정말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지요? 세상이 하얗게 변해 너무 기뻐요. 눈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진짜 같지 않잖아요? 저는 그린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지 않아요. 정말 초록색은 아닌데, 그저 죽은 갈색이나 회색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왜 그린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걸까요? 매슈 아저씨, 왜 그러는 걸까요? 어머나, 매슈 아저씨, 그거 저한테 주시는 선물이에요? 오, 매슈 아저씨!”

매슈가 포장을 벗기고 수줍게 옷을 꺼내, 마릴라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옷을 펼쳐 보였다. 마릴라는 무시하듯 찻물을 채우면서도 약간 관심을 두고 곁눈질로 앤의 반응을 살폈다.

앤은 옷을 집어 들고 감격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아, 얼마나 입고 싶었던 옷인가! 비단처럼 윤기 나는 부드러운 갈색 글로리아 천에, 우아한 프릴34)과 셔링35)이 잡힌 치마, 블라우스는 가장 유행하는 스타일로 공들여 핀 턱36) 장식을 넣었으며 목깃에도 얇은 레이스로 만든 주름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소매! 그 무엇보다도 멋진 것은 소매였다. 팔목에서 팔꿈치까지 아주 잘 맞았고, 그 위로는 여러 겹의 셔링과 가운데는 갈색 비단 리본이 나비 모양으로 묶여 있었다.

“앤,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매슈가 수줍은 듯 말했다.

“왜, 앤, 옷이 마음에 안 드니? 자, 자, 자!”

앤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넘쳤다.

“마음에 무척 들어요! 오, 매슈 아저씨!”

앤이 그 옷을 의자에 내려놓고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매슈 아저씨, 이 옷은 완벽하게 예뻐요. 오, 뭐라고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소매를 보세요! 오,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에요.”

“자아, 자아, 이제 아침을 먹자.”

마릴라가 끼어들었다.

“앤, 나는 너한테 그런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지만, 매슈 아저씨가 너를 위해 선물한 옷이니까 조심해서 입도록 해라. 린드 아주머니는 너에게 주라고 머리 리본을 갖고 오셨다. 갈색이어서 그 옷하고 잘 어울릴 거다. 자, 이제 앉아서 식사를 하자.”

“전 아침을 먹지 못할 것 같아요. 이렇게 흥분이 되는데 아침 식사는 너무 시시하잖아요. 차라리 이 드레스를 보면서 눈을 즐기는 게 낫겠어요. 퍼프 소매가 아직도 유행이어서 너무 좋아요. 제가 퍼프 소매 옷을 입어보지도 못하고 유행이 끝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사실 제 옷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거든요. 또 린드 아주머니도 너무 좋으신 분이에요. 저에게 리본을 주시다니. 정말로 착한 아이가 되어야겠어요. 이런 때는 제가 모범생이 아니어서 정말 아쉬워요. 그래도 언젠가는 모범생이 되겠다고 항상 결심하지만, 견딜 수 없는 유혹이 밀려오면 결심을 실천하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오늘부터라도 더 노력을 할 거예요.”

그 시시한 아침 식사가 끝나자 다이애나가 심홍색 외투를 입고 즐겁게 분지의 하얀 통나무 다리를 건너왔다. 앤이 다이애나를 만나려고 비탈길을날 듯이달려 내려갔다.

“메리 크리스마스, 다이애나! 오, 너무 행복한 크리스마스야. 너에게 보여줄 멋진 것이 있어. 매슈 아저씨가 오늘 나에게 예쁜 드레스를 선물해주셨거든. 퍼프 소매가 달린 걸로. 그보다 더 멋진 옷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나도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다이애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여기, 이 상자.조제핀고모할머니가 우리에게 큰 상자를 보내오셨는데, 엄청나게 많은 것이 들어 있었어. 이것은 네 거야. 어젯밤에 가져다주려 했는데, 어두워진 뒤에야 도착했어. 깜깜한 밤에는 아직도 저‘유령의 숲’을 지나기가 쉽지 않거든.”

앤이 상자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맨 먼저 ‘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쓰인 카드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끝에는 구슬이 달리고 공단 매듭과 반짝이는 버클까지 있는 너무나 예쁜 양가죽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오, 다이애나, 이건 너무 과분한 것 같아.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니겠지?”

앤이 말했다.

“난 이런 것이 신의 섭리라고 생각해.”

다이애나가 말했다.

“이젠 루비에게 슬리퍼를 빌릴 필요가 없잖아. 이런 것이 축복이야. 루비의 발은 너한테 두 사이즈나 큰데, 요정이 신발 끄는 소리를 내면 얼마나 우습겠어. 조시 파이나 좋아하겠지. 그런데 그저께 연습이 끝나고 로브 라이트가 거티 파이를 집까지데려다주었대. 너, 그 얘기 못 들었니?”

그날 에이번리의 학생들은 모두 흥분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공회당을 장식하고 마지막 총연습을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발표회는 저녁에 시작되었는데 대성공이었다. 작은 홀이 관객들로 꽉 찼고 출연자들 모두가 훌륭하게 해냈다. 그중에서도 앤이 발표회에서 가장 빛난 별이었다. 조시 파이도 샘이 나긴 했지만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오, 정말 멋진 저녁이었지?”

앤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행사가 끝나고 다이애나와 앤은 별이 빛나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말 성공적이었어. 우리가 10달러는 벌었을 거야. 그리고 앨런 목사님이 오늘 행사를 정리해서 <샬럿타운> 신문사에 보내실 거야.”

“오, 다이애나, 우리의 이름을 정말로 신문에서 보게 되는 걸까? 생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지는 것 같아. 네 독창은 완벽하게 우아했어, 다이애나. 네가 앙코르를 받았을 때 너보다 내가 더 뿌듯하더라니까. ‘저렇게 박수를 받는 사람이 내 소중한 단짝 친구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어.”

“아냐, 네 암송은 관객들을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었잖아. 그 슬픈 시는 정말 최고였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 다이애나. 앨런 목사님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아. 백만 개의 눈이 나를 쳐다보고, 나를 뚫어보는 기분이었어. 그때 나는 시작조차 못 할 줄 알았어. 그때 내 아름다운 퍼프 소매를 생각하니까 용기가 나더라고. 이 소매에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시작할 수 있었고, 내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어. 내가 앵무새가 된 것처럼. 암송을 다락방에서 연습한 것이 다행이었어. 그러지 않았더라면 난 결코 해낼 수 없었을 거야. 내가 신음 소리를 잘 냈니?”

“그럼, 아주 실감 나게들렸어.”

다이애나가 힘주어 말했다.

“내가 낭송을 끝내고 앉을 때 슬론 부인이 눈물까지 닦는 게 보였어. 내가 누군가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좋아. 발표회에 출연하는 건 너무 낭만적이야, 그렇게 생각지 않니? 오늘 발표회를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남자아이들도 대화극을 잘하지 않았니?”

다이애나가 말했다.

“길버트 블라이드는 정말 잘했어. 앤, 내 생각엔 네가 길버트를 너무 심하게 대하는 것 같아.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줘. 요정의 대화극이 끝나고 네가 무대에서 나갈 때 네 머리에 꽂은 장미가 하나 떨어졌어. 길버트가 그 장미를 주워서 자기 가슴 호주머니에 넣는 걸 내가 봤어. 넌 아주 낭만적인 애니까, 그 얘기가 기분 나쁘지 않지?”

“그 애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나는 신경 안 써. 그 애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다이애나.”

앤이 뻣뻣하게 말했다.

그날 밤 마릴라와 매슈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다녀온 후 앤이 침실로 올라간 다음에도 한참 동안 부엌 화롯가에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글쎄, 우리 앤이 여느 아이들만큼은 하던데.”

매슈가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래요, 잘했어요.”

마릴라도 인정했다.

“앤은 영리한 아이예요. 유난히 예뻐 보이기도 했고요. 발표회 계획에 내가 반대하긴 했지만, 이제 생각하니 발표회가 그렇게 나쁜 것 같지는 않네요. 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늘 밤엔 앤이 무척 자랑스러웠어요.”

“그랬구나. 나도 앤이 자랑스러워서, 아이가 2층에 올라가기 전에 그렇게 말해주었는데. 앞으로 우리가 저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겠다, 마릴라. 내 생각에는 에이번리 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를 더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매슈가 말했다.

“그 문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기로 해요. 3월이 되어도 겨우 열세 살인데요. 그런데 오늘 밤엔 나도 앤이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드네요. 린드 부인이 옷을 크게 만들었는지 앤이 무척 커 보이더라고요. 앤은 무엇이든 빨리 배우는 아이니까 에이번리 학교를 마치면 퀸스 전문학교에 보내는 게 우리가 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책일 거예요. 하지만 1~2년 후의 일이니까 지금은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글쎄다, 가끔은 그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그런 문제는 많이 생각할수록 좋은 거니까.”

매슈가 말했다.




34) 주름을 잡아 물결 모양으로 만든 옷.
35) 원하는 간격을 두고 여러 겹의 주름을 만드는 기법.
36) 핀처럼 가늘고 긴 정교한 장식 주름.




26

이야기 클럽을 만들다





에이번리의 아이들은 다시 단조로운 생활로 돌아가는데 모두 힘들어했다. 특히 앤에게는 모든 것이 지독히 따분하고 시시하며, 쓸데없는 짓처럼 여겨졌다. 몇 주 동안이나 흥분의 술잔을 홀짝거린 탓이었다. 아득한 옛날처럼 여겨지는 발표회 전의 차분한 즐거움을 다시 누릴 수 없을까? 처음에는 도저히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에 다이애나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옛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아, 다이애나.”

앤은 마치 그 옛 시절이 적어도 50년은 지난 얘기라는 듯 말했다.

“아마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나도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기는 하겠지. 하지만 발표회가 우리 일상을 엉망으로 만든 것 같아. 그래서 마릴라 아주머니가 발표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거야. 마릴라 아주머니는 참 현명하신 분이야. 현명한 게 훨씬 좋은 건 틀림없지만, 내가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겠어. 그런 사람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잖아. 린드 아주머니 말로는 나에게는 현명한 사람이 될 싹이 보이지 않는다지만 앞날을 누가 알겠어? 나도 어른이 되면 현명해질 것 같지만 지금 내가 피곤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젯밤에 잠을 오랫동안 자지 못했거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발표회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이런 것도 발표회 같은 것의 좋은 점일 거야. 돌이켜보면 참 재미있거든.”

그러나 에이번리 학교는 옛날의 일상을 되돌아갔고 예전의 재미를 되찾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발표회는 흔적을 남겼다. 무대에서의 자리 문제로 다투었던 루비 길리스와 엠 화이트는 책상을 따로 썼을 뿐 아니라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던 3년간의 우정도 깨지고 말았다. 조시 파이와 줄리아 벨은 3개월 동안이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조시 파이가 베시 라이트에게 줄리아 벨이 암송하려고 일어서서 인사를 할 때 닭이 머리를 치켜드는 것 같았다고 말했고, 베시가 그 말을 줄리아에게 고자질했기 때문이었다. 또 벨 씨네 아이들이 슬론네 아이들에게 발표회를 거의 독차지했다고 말하자, 슬론 씨네 아이들이 벨 씨네 아이들에게 별것도 아닌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반박하면서 그들은 서로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끝으로 무디 스퍼전 맥퍼슨이 앤 셜리가 암송을 하면서 너무 잘난 척했다고 말해서 찰리 슬론이 무디 스퍼전 맥퍼슨과 싸웠고 무디 스퍼전은 흠씬 얻어맞았다. 그 때문에 무디 스퍼전의 누나인 에라 메이는 그겨우내앤 셜리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싸움을 제외하면, 스테이시 선생님의 작은 왕국에서는 모든 일이 규칙에 맞춰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해 겨울도 다 지나갔다. 겨울이었지만 유난히 따뜻해서 눈도 거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앤과 다이애나는 거의 매일‘자작나무 길’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앤의 생일날, 그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작나무 길을 내려가며, 끝없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을 똑바로 뜨고 귀를 바싹 세웠다. 스테이시 선생님이 곧 ‘겨울 숲 속의 산책’을 제목으로 그들에게 글짓기를 해야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해둬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이애나, 난 오늘로 열세 살이 되었어.”

앤이 무척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열세 살이란 게 믿어지지가 않아.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았어. 넌 한 달 전에 열세 살이 되었으니까 나만큼 세상이 새롭게 보이지는 않을 거야. 열세 살이 되니까 인생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보이는 것 같아. 앞으로 2년만 지나면 정말로 어른이 되는 거야. 그때 누구에게도손가락질받지않고 거창한 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마저너무 편해져.”

“루비 길리스는 열다섯 살이 되면 곧장 남자 친구를 사귈 거래.”

다이애나가 말했다.

“루비 길리스는 만날 남자만 생각해.”

앤이 경멸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자기 이름을 게시판에 써놓으면 화가 난 척하지만 실제로는 좋아해. 하지만 이런 말은 너무 잔인한 말일 거야. 사모님은 우리에게 잔인한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내가 조심할 틈도 없이 그런 말이 줄줄 나와 버려. 또 조시 파이를 얘기하려고 하면 잔인한 말이 저절로 나온다고. 그래서 조시를 언급도 하지 않을 거야. 너도눈치챘지? 난 될 수 있는 한 사모님처럼 행동하려고 해. 난 사모님을 완벽하다고 생각하거든. 앨런 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야. 린드 아주머니는 목사님이 자기 부인이 밟은 땅까지 숭배한다고 말하면서, 목사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애착을 갖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지 않으신대. 하지만 다이애나, 목사님도 인간이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을 거야. 지난 일요일 오후 나는 사모님하고 그런 죄에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어. 일요일의 대화로 적당한 주제 아니겠니. 내 죄는 상상을 너무 많이 해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잊는 거야. 요즘 그 버릇을 고치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어. 이제 열세 살이 되었으니까 더 나아질 거야.”

“4년 후에는 머리를 올릴 수 있어. 엘리스 벨은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머리를 올리고 있더라. 내 생각엔 어리석은 짓 같아. 난 열일곱 살이 되면 머리를 올릴 거야.”

앤이 엄숙하게 말했다.

“만약 내가 엘리스 벨처럼비뚤어진 코라면난 절대로…… 그다음 말은 하지 않을래. 너무 냉혹한 말이거든. 게다가 엘리스의 코랑 내 코를 비교하는 것도 허영심이라고 생각해. 내가 아주 오래전에 내 코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는 내 코를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 그래도 나한테는 큰 위안이 돼. 오, 다이애나, 저기 토끼가 있다. 숲에 대한 작문을 위해서도 꼭 기억해둬야 할 거야. 숲은 겨울에도 여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것 같아. 숲이 잠들어 아름다운 꿈을 꾸는 것처럼 하얗고 조용하잖아.”

“작문 숙제는 걱정하지 않아. 그때가 되면 어떻게든 써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월요일에 제출해야 할 작문이 골칫거리야. 스테이시 선생님은 우리에게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꾸며서 쓰라고 하셨잖아!”

다이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윙크하는 것만큼 쉽잖아.”

앤이 말했다.

“너야 상상력이 풍부하니까 쉽지만, 나처럼 상상력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너, 벌써 작문을 끝냈구나?”

다이애나가 윽박지르듯 물었다.

앤이 잘난 척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난 월요일 저녁때 다 썼어. 제목은 ‘질투심 많은 사랑의 경쟁자’, 아니면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야. 내가 그걸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읽어드렸더니, 아주머니가 부질없고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하셨어. 그래서 매슈 아저씨한테도 읽어드렸지. 아저씨는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하셨어. 그런 평가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 슬프면서도 달콤한 이야기야. 나는 그 이야기를 쓰면서 어린아이처럼 막 울었어. 코델리아 몽모랑시와 제럴딘 세이머라는 아름다운 두 아가씨가 주인공으로 나와. 그들은 같은 마을에 살고 있고 서로 무척 사랑했어. 코델리아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눈동자가 새까맣고 피부가 거무스름한 여자고, 제럴딘은 우아한 금실 같은 금발에 눈동자는 벨벳 같은 자줏빛이야.”

“지금까지 자줏빛 눈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다이애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도 그래. 내가 그냥 상상한 거야. 흔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거든. 또 제럴딘은 석고 같은 이마를 가졌어. 석고 같은 이마가 어떤 건지 알아냈거든. 그것도 열세 살이 되어서 좋은 점이야. 열두 살 때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돼.”

“그래서 코델리아와 제럴딘은 어떻게 되었어?”

두 사람의 운명이 궁금해진 다이애나가 물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성장해서 열여섯 살이 되었어. 그때 버트럼 드비어가 두 사람이 사는 마을에 오게 되었고 제럴딘과 사랑에 빠진 거야. 어느 날 제럴딘의 마차를 끌던 말이 사납게 날뛰는 바람에 제럴딘이 위기에 처한 것을 버트럼이 구해주었어. 제럴딘은 그의 품에 안겨 기절해버렸고, 버트럼은 제럴딘을 5킬로미터나 떨어진 집까지 데려다줬어. 물론 마차가 완전히 박살이 났으니 걸어서 말이야. 청혼하는 장면을 상상하기는 너무 어려웠어. 그런 걸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루비 길리스에게 남자가 어떻게 청혼하는지 아느냐고 물어봤지. 루비에겐 결혼한 언니들이 많으니까 그 방면에는 권위자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랬더니맬컴앤드루스가 루비 언니수잔에게 청혼할 때, 루비가 식품 저장실에 숨어서 지켜봤다면서 이야기를 해주었어. 루비 말로는맬컴이수잔한테 자기 아버지가 농장을 물려주었다면서 ‘올가을에 결혼해주겠소?’라고 하더래. 그러니까수잔이 ‘네…… 아니……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대. 하여간 그들은 그 후 곧바로 약혼을 했대. 하지만 그런 청혼은 그다지 낭만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그래서 결국은 내가 마음대로 상상해야 했어. 꽃 냄새가 물씬 풍기고 시적으로. 루비 길리스는 요즘엔 그렇지 않다고 우겼지만, 버트럼이 먼저 무릎을 꿇고 청혼하니까 제럴딘이 한 페이지도 넘는 긴 얘기 끝에 청혼을 받아들였어. 그 말을 짓느라고 정말 힘들었어. 다섯 번은 다시 썼을 거야. 나는 그 부분을 내 걸작이라 생각해. 버트럼은 제럴딘에게 다이아몬드 반지와 루비 목걸이를 주면서,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갈 거라고 말했어. 버트럼은 무척 부자거든. 하지만 그때부터 그들의 앞길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치기 시작해. 코델리아도 몰래 버트럼을 사랑한 거야. 그래서 제럴딘이 버트럼하고 약혼했다고 말하니까 코델리아는 화가 나서 미치는 거야. 더구나 목걸이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는 더 미칠 것 같은 거지. 제럴딘을 향한 사랑이 쓰디쓴 증오로 바뀌었고, 제럴딘이 버트럼하고 결혼하는 것을 방해하겠다고 맹세까지 해. 하지만 겉으로는 예전과 똑같이 제럴딘의 친구인 척해. 어느 날 저녁, 코델리아와 제럴딘은 물살이 거센 강에 놓인 다리에 서 있었어. 코델리아는 주변에 그들뿐이라 생각하고 ‘하! 하! 하!’ 빈정대듯 웃으면서 제럴딘을 난간 너머로 밀어버려. 하지만 버트럼이 그걸 보고는 ‘내가 당신을 구할 거요, 내 사랑 제럴딘.’ 하고 소리치면서 곧바로 거센 강물로뛰어들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버트럼은 자기가 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거야.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물에 빠져 죽어. 얼마 후, 그들의 시신이 물가로 떠밀려왔어. 그들은 한 무덤에 묻혔고, 장례식이 장엄하게 치러졌어. 결혼식보다 장례식으로 이야기를 끝내는 게 훨씬 낭만적이잖아. 코델리아는 죄책감에 빠져 미쳐버렸고 결국 정신병원에 갇혀. 그런 것이 죄의 대가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 같지 않니?”

“너무너무 아름다운 이야기다! 너는 그렇게 감동적인 얘기를 어떻게 머리에서 만들어내는 거니, 앤? 나도 너처럼 상상력이 풍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매슈만큼 앤의 이야기에 호의적인 다이애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상상력은 키우면 돼.”

앤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멋진 계획이 생각났어, 다이애나. 너랑 나랑, 우리만의 이야기 클럽을 만들어, 이야기를 짓는 연습을 하는 거야. 네가 혼자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도와줄게. 너도 상상력을 키워야 해. 스테이시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 물론 올바른 방향으로 상상해야 하지만. 내가 선생님께‘유령의 숲’을 얘기했더니 선생님이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상상을 한 거라고 말씀하셨어.”

그래서 이야기 클럽이 탄생했다. 처음에는 앤과 다이애나, 둘뿐이었지만 곧 제인 앤드루스와 루비 길리스, 그리고 상상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한 한두 아이가 이야기 클럽에 가입했다. 루비 길리스는 남자를 끼워주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남자아이는 입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회원들은 누구나 일주일에 이야기를 하나씩 지어야 했다.

“이건 정말로 재미있어요. 모두가 자기가 지은 작품을 큰 소리로 읽어야 해요. 그다음에 그에 관해 토론을 벌여요. 우리는 모든 작품을 소중히 보관해두었다가 우리 자식들에게 전해줄 거예요. 우리는 모두 필명으로 글을 써요. 제 필명은 로자먼드 몽모랑시예요. 모두가 꽤 잘해요. 루비 길리스는 약간 감상적이어서 이야기에 사랑이 빠지질 않아요.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모자란 것보다 좋을 게 없잖아요. 그런데 제인은 사랑 이야기를 큰 소리로 읽을 때 바보가 된 기분이라고 사랑 얘기는 전혀 넣지 않아요. 그래서 제인의 이야기는 너무 딱딱해요. 다이애나의 이야기에는 살인이 너무 많아요.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들을 없애려면 죽이는 수밖에 없대요. 거의 언제나 제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써야 하는지 말해주지만, 제 머릿속에는 생각이 수백만 개는 돼서 그것도 어려워요.”

앤이 마릴라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 짓기라는 게 여태 들어본 중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짓 같구나. 머릿속을 쓸데없는 생각으로 채우면서 공부해야 할 시간이나 낭비하고. 이야기책 읽는 것도 나쁘지만 그 이야기 짓는 것은 더 한심한 짓 같다.”

마릴라가 나무라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조심스레 모든 이야기에 교훈도 넣어요, 마릴라 아주머니. 제가 그러자고 우겼어요. 착한 사람은 언제나 보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합당한 벌을 받는 식으로요. 그럼 이야기 짓기가 좋은 효과를 가질 거라고 확신해요. 도덕적 교훈이 좋은 거잖아요. 앨런 목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제가 이야기 하나를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읽어드렸더니, 두 분은 도덕적 교훈이 훌륭하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엉뚱한 부분에서 웃음을 터트리긴 하셨지만요. 저는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읽고 울어줄 때가 더 좋아요. 제가 비장한 부분을 읽으면 제인과 루비는 거의 항상 울어요. 다이애나가조제핀배리 할머니에게 우리 클럽 이야기를 편지로 써 보내드렸대요. 그랬더니 우리에게 이야기 몇 편을 보내달라고 답장을 보내셨어요. 그래서 우리 이야기 중 가장 잘된 것으로 네 편을 골라 다시 써서 보내드렸어요. 그랬더니 할머니가 평생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읽어본 적이 없다고 답장을 또 보내오셨어요. 우리는 어리둥절했어요. 모든 이야기가 가슴 아프고, 거의 모든 사람이 죽거든요. 하지만조제핀할머니가 우리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니 기뻐요. 우리 클럽이 조금은 세상에 좋은 일을 한다는 증거잖아요. 사모님은 그런 것이 모든 것에서 우리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거든요. 저도 그것을 제 목표로 삼으려고 정말 노력하지만 재미있는 일을 할 때면 잊어버린다니까요. 저도 어른이 되면 사모님을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렇게 될 가망이 있을까요, 마릴라 아주머니?”

“많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앨런 부인이 너처럼 엉뚱하고 툭하면 잊어버리는 아이는 아니었을 테니까.”

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겠다는 마릴라의 격려의 말이었다.

“그랬겠죠. 하지만 그분도 지금만큼 항상 착하지는 않았대요. 사모님이 저한테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분도 아이 때는 장난꾸러기여서 곧잘 곤경에 빠졌대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용기를 얻었는지 몰라요. 다른 사람이 못되고 장난꾸러기였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얻었다니, 저도 참 못됐죠? 린드 아주머니는 그런 게 못된 거라고 하셨어요. 어린 시절이었더라도 누군가 못된 짓을 했다는 말을 들으면 항상 가슴이 벌렁벌렁 뛴대요. 언젠가 어떤 목사님께서 어렸을 때 숙부님 댁 식품 저장실에서 딸기 파이를 훔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후로는 그 목사님을 다시는 존경하지 않았대요. 저라면 그랬을 것 같지 않아요. 오히려 목사님이 그런 고백을 하셨다면 정말 고결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못된 짓을 하고 후회하는남자아이들이 커서 목사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무척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제 생각은 그래요, 마릴라 아주머니.”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나한테 드는 생각은 말이다, 앤. 네가 설거지를 끝내야 한다는 거다. 수다를 떠느라 설거지를 30분이나 더 하고 있잖니. 우선 일을 먼저 끝내놓고 나서 얘기하는 것부터 좀 배우거라.”


추천 (0) 선물 (0명)
IP: ♡.252.♡.103
23,512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17
0
47
나단비
2024-04-16
0
74
나단비
2024-04-16
0
122
나단비
2024-04-16
0
75
나단비
2024-04-16
0
73
나단비
2024-04-16
0
60
나단비
2024-04-15
0
78
나단비
2024-04-15
0
58
나단비
2024-04-15
0
98
나단비
2024-04-15
0
64
나단비
2024-04-15
0
57
나단비
2024-04-14
0
71
나단비
2024-04-14
0
176
나단비
2024-04-14
0
81
나단비
2024-04-14
0
65
나단비
2024-04-14
0
54
나단비
2024-04-13
0
42
나단비
2024-04-13
0
38
나단비
2024-04-13
0
44
나단비
2024-04-13
0
46
나단비
2024-04-13
0
70
나단비
2024-04-12
0
42
나단비
2024-04-12
0
47
나단비
2024-04-12
0
50
나단비
2024-04-12
0
43
나단비
2024-04-12
0
43
뉘썬2뉘썬2
2024-04-11
1
76
뉘썬2뉘썬2
2024-04-11
1
132
나단비
2024-04-11
1
96
나단비
2024-04-11
1
128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