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1~2

나단비 | 2024.02.29 22:38:42 댓글: 0 조회: 13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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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이웃





8월의 어느 늦은 오후, 키가 크고 날씬한 한 아가씨가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있는 농장 집 널찍한 붉은 사암 돌층계에 앉아 어려운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기어코 풀이해보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나이가 열여섯 반도 더 지난 이 아가씨의 잿빛 눈은 무척 진지해 보였고 머리 색깔은 친구들 말에 따르면 적갈색이다.
하지만 곡식이 익어가는 비탈길 들판 위로 푸른 아지랑이가 감도는 8월의 오후는 죽은 언어와 씨름하기보다는 꿈을 꾸기에 더 좋았다. 산들바람이 요정처럼 미루나무 잎사귀에 속살거리고, 벚나무 과수원 한구석에 자리한 어린 전나무 숲을 배경으로는 붉은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긴 꽃대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베르길리우스 시집은 곧 땅으로떨어져 버렸지만 앤은 그것도 모른 채 양손에턱을 괴고 J. A. 해리슨 씨 집 너머로 거대한 하얀 산처럼 높게 떠 있는 뭉게구름 쪽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앤은 지금 미래 정치가의 운명을 만들고, 어린 새싹들의 머리와 가슴에 높은 야망을 불어넣으며 훌륭한 선생님의 길을 걷는 자기 모습을 상상하느라 저 멀리 달콤한 세상을 헤매는 중이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로 눈을 돌려보면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이상 앤이 거의 하지 않는 말이기는 하지만. 에이번리 학교에는 유명 인사가 될 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재목이 있어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가진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도울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앤은 자기가 선생님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만 한다면 성취할 수 있는 일이 많으리라는 장밋빛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렇게 앤은 지금부터 40년 후에 벌어질지도 모를 유쾌한 장면을 꿈꾸는 중이었다. 편의상 아직 어떤 유명 인물인지는 정해두지 않았지만, 대학의 총장이나 캐나다의총리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한 유명 인사가 앤의 주름진 손에 머리를 숙여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제게 처음으로 야망의 불씨를 심어주신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오래전 에이번리 학교에서 선생님이 제게 주신 가르침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 즐거운 꿈은 몹시 불쾌한 한 훼방꾼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주 여유로운 표정을 한 작은 저지종1)소 한 마리가 오솔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오더니 5초도 안 있어 곧바로 해리슨 씨가 나타났다. 뜰로 갑자기 뛰어 들어온 해리슨 씨의 기세를 표현하기에 ‘나타났다’는 말이 적당한 것 같지는 않지만.
해리슨 씨가 몹시 화난 표정으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란 앤은 벌떡 일어서 황망히 바라보았다. 해리슨 씨는 옆집으로 이사를 온 사람으로 앤도 한두 번 본 적이야 있지만 아직 정식으로 인사도 나누지 못한 사이였다.
4월 초 앤이 퀸스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커스버트네 서쪽 이웃에 살던 로버트 벨 씨가 농장을 팔고 샬럿타운으로 이사를 갔다. 벨 씨의 농장을 산 사람이 바로 이 J. A. 해리슨 씨였고, 앤은 이 새 이웃에대해서는아는 것이 없었다. 이름과 뉴브런즈윅에서 왔다는 사실 외에는. 하지만 그는 에이번리에 오기 한 달 전부터 이미 괴상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레이철린드 부인은 그 사람이 ‘괴짜’라고 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 린드 부인은 자기 생각을 그대로 뱉어버리는 사람이었고, 해리슨 씨는 분명히 다른 사람과는 다른 구석이 많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괴짜의 특성이 바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점 아니던가.
해리슨 씨의 괴상한 점들을 들어보자면, 우선 혼자 살고 있으며 여자 같은 어리석은 존재는 곁에 두지 않는 것이 낫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에이번리 여자들은 해리슨 씨가 어떤 생활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는지에 관한 괴상한 소문을 퍼트리는 것으로 보복을 해주었다. 해리슨 씨는 화이트 샌즈에서 온 존 헨리 카터라는 소년을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 존 헨리가 바로 소문을 내기 시작한 장본인이었다. 그 소문 중 하나는 해리슨 씨 집에는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해리슨 씨는 배가 고프면 ‘한 입 먹고’ 말면 되는데 존 헨리가 마침 곁에 있으면 자기도 한 입 얻어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에는 해리슨 씨의 배가 다시 고플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존 헨리는 일요일마다 집에 가서 배를 채워오고, 월요일이 되어 돌아올 때는 어머니가 항상 먹을 것을 바구니에 챙겨주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기는 벌써 굶어 죽었을 것이라고 처량하게 말했다.
설거지도 비 오는 일요일이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커다란 통에다가 빗물을 받아 한꺼번에 그릇들을 닦고 마를 때까지 그대로 두어버리면 끝이란다.
게다가 해리슨 씨는 몹시 인색하기도 했다. 앨런 목사님 월급을 드리려고 기부를 해달라고 했을 때도 설교를 먼저 들어보고 자기가 목사님 설교에서 몇 달러어치나 얻어낼 수 있는지 판단해야겠다고 했다. 자기는 절대로 덮어놓고 물건부터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린드 부인이 해리슨 씨 사는 모습을 ‘무심코’ 들여다보기도 할 겸, 선교 기금 모금을 위해 그 집을 방문했을 때도 그가 했다는 말이 기가 찼다. 자기가 알기로 다른 어느 곳보다도 에이번리에는 말 많은 이교도 할머니가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겠다면 기꺼이 기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기가 막혀 재빨리 그 집을 나와버린 린드 부인은 마릴라에게 찾아와 로버트 벨 부인이 무덤 속에 편안히 잠들어 있으니 망정이지 살아생전 그녀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지금의 자기 집 꼴을 보았더라면 틀림없이 가슴이 찢어졌을 거라면서 분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벨 부인은 이틀에 한 번씩 마룻바닥을 닦았잖아요. 그런데 지금 그 집 꼴이 어떤지 알아요? 세상에나!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지 않고는 걸을 수도 없었다니까요.”
해리슨 씨가 진저라는 앵무새를 기르고 있는 것도 말썽이었다. 에이번리에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앵무새를 길러본 적이 없어서 이 일로도 무척이나 말이 많았다. 더구나 그 앵무새는 존 헨리 카터 말에 따르면 어찌나 욕을 심하게 해대는지 천하에 그런 못된 새는 없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 일자리만 있었다면 카터의 어머니는 당장 아들을 데려가 버렸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어느 날 존 헨리는 새장 바로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가 앵무새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긴 적도 있었다. 일요일에 이 운수 사나운 존 헨리가 집에 돌아오면 카터의 어머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붙들고 그 상처를 보여주었다.
분노로 말도 잃어버린 채 자기 눈앞에 떨고 서 있는 해리슨 씨를 보는 순간, 앤의 머릿속으로 이런 모든 것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해리슨 씨는 가장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도 결코 잘생긴 사람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키도 작고 뚱뚱한 데다 대머리였다. 게다가 지금은 그의 동그란 얼굴이 분노로 보라색으로 변해버렸고, 그렇지 않아도튀어나온 파란 눈은 얼굴에서 거의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앤은 이렇게 흉하게 생긴 사람은 처음 보겠다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막혀버린 말문이 갑자기 터진 듯 해리슨 씨가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절대로 참지 못하겠어. 단 하루도 못 참는다고, 내 말 알아들었어, 아가씨? 세상에나 이번이 세 번째야, 세 번째라고! 인내심도 한계가 있는 법이지. 지난번에 아가씨 숙모한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내가 당부를 했는데. 또 그냥 이렇게 내버려두다니. 도대체 무슨 작정으로 이러는 건지 내가 알아야겠어. 그래서 내가 온 거라고.”
해리슨 씨가 침까지 튀겨가며 말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앤이 최대한으로 품위를 지키며 말했다. 앤은 요즘 학교에 나갈 때를 대비해 위엄 있는 태도를 몸에 익히도록 연습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성이 난 J. A. 해리슨 씨에게는 이런 태도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였다.
“뭐가 문제냐고? 기가 막혀서! 심각한 문제지. 그래, 문제가 뭐냐 하면, 당신네 소가 우리 귀리를 또뜯어먹었다고.바로 조금전에. 이번이 세 번째야. 알겠어? 지난주 화요일에도 내 밭에서 그 소를 봤는데, 어제도 봤어. 내가 여기 와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아가씨 숙모한테 말했는데도 말이야. 숙모는 지금 어디 있지? 내가 숙모를 만나서 좀 따져야겠어. 이 J. A. 해리슨이 좀 따져야겠다고.”
“마릴라 커스버트 아주머니를 말하는 거라면, 그분은 제 숙모님이 아니세요. 그리고 지금은 이스트 그래프턴에 사는 먼친척분이 몹시 아파 찾아뵈러 가서 집에 계시지도 않아요.”
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점점 더 위엄이 들어갔다.

“제 소가 아저씨네귀리밭에 들어간 건 굉장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만, 그 소는 커스버트 아주머니 소가 아니라 제 소예요. 삼 년 전 그 소가 아직 송아지였을 때 매슈 아저씨가 벨 씨에게 사서 제게 주신 거죠.”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말만 하면 다인 줄 알아? 그놈의 소가 우리귀리밭에 들어가서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꼴 좀 보라고. 밭 한가운데서부터 가장자리까지 온통 다 짓밟아놓았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앤이 반복해 사죄를 했다.
“하지만 아저씨가 울타리를 더 잘 고쳐놓으면 돌리도 아저씨 밭에 들어가지 못했을 겁니다. 아저씨네귀리밭과 우리 목장을 막아놓은 담은 아저씨네 담이잖아요. 며칠 전에 봤을 때 좀 허술해 보였어요.”
“내 울타리는 전혀 문제가 없어.”
형세가 불리해진 해리슨 씨는 더욱더 화가 나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감옥 울타리라고 해도 그런 몹쓸 짐승을 가두어두지는 못할 거야. 그리고 너 빨간 머리 계집애! 그 소가 네 거라면 거기 앉아 돼먹지 않은 삼류 소설책이나 보지 말고 네 소가 다른 사람 밭에 들어가지 않게 감시나 잘해.”
해리슨 씨는 앤의 발 아래 떨어져 있는 죄 없는 노란 표지의 베르길리우스 시집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순간 빨간 것은 앤의 머리칼만이 아니었다. 아직도 앤에게 빨간 머리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민감한 부분이었다.

“머리카락이 귀 근처에 몇 가닥만 남아 있는 것보다는 빨간 머리가 훨씬 더 나아요.”
앤이 발끈했다.
그 공격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해리슨 씨는 대머리란 말에 아주 민감했다. 너무 화가 나서 또다시 말문이 막혀버린 해리슨 씨는 앤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 틈에 침착함을 되찾은 앤이 말을 이었다.
“해리슨 씨가 화를 내시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게도 상상력이란 게 있으니까요. 아저씨네귀리밭에 소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날지 상상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제게 심한 말을 하긴 했지만 그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는 않겠어요. 분명히 약속드립니다. 돌리가 다시는 아저씨네귀리밭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로 제 명예를 걸고 약속드릴게요.”
“그래,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신경을 쓰라고.”
해리슨 씨가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화가 덜 풀린 듯 발을 쾅쾅 구르며 사라져 갔다. 하지만 투덜거리는 소리는 저 멀리 갔을 때까지도 들려왔다.
앤은 속이 상해서 말썽꾸러기 돌리를 뒤뜰 젖소 우리 안에 가두었다.
“여기라면 울타리를 부수지 않는 한 밖으로 나올 수 없겠지. 이제는 좀 얌전해진 것 같은데. 귀리를 너무 먹어서 탈이 난 건 아닐까? 시어러 씨가 지난주에 사겠다고 나섰을 때 팔아버렸더라면 좋았을걸. 하지만 다른 가축들을 경매에 내놓을 때 같이 팔려고 했지. 해리슨 씨가 괴짜인 건 분명해. 그 아저씨하고는 절대로 통하는 게 없겠어.”

앤은 언제나 영혼이 통하는 친구를 찾으려고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앤이 집으로 돌아오자 마릴라 커스버트도 마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와서 앤은 얼른 저녁을 준비했다. 둘은 식사를 하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경매가 끝나야 한시름 놓을 텐데. 돌봐야 할 가축은 이렇게 많고, 돌볼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도 없는 마틴뿐이니. 숙모 장례식에 간다고 해서 보내주었더니 어젯밤에 돌아온다고 약속해놓고서 여태 돌아오지도 않는구나. 도대체 그 아이는 숙모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어. 일 년 전에 우리 집에 온 이후로 벌써 죽은 숙모가 넷이나 돼. 빨리 수확이 끝나고 배리 씨가 이 농장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마틴이 올 때까지는 돌리를 저 울타리 안에 가둬둬야겠다. 울타리를 고치기 전까지는 목장에 풀어둘 수가 없으니까.레이철말마따나 세상이 온통 힘든 일뿐이야. 메리 키스가 죽어가는데 두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산다는 메리의 오빠에게 편지를 보냈다는데 아직 답이 없는 모양이야.
“아이들은 어때요? 몇 살이나 되었어요?”
“여섯 살이란다. 쌍둥이야.”
“어머나, 하몬드 아주머니 댁에서 많은 쌍둥이를 돌보고 난 이후로 전 언제나 쌍둥이라면 관심이 아주 많아요. 아이들은 예뻐요?”
앤이 진지하게 물었다.
“세상에나, 애들이 얼마나 더러운지, 미운지 고운지도 모르겠더라. 데이비가 밖에서 흙장난을 치며 놀고 있어서 도라더러 데이비를 불러오라고 내보냈더니 글쎄 데이비가 도라를 커다란 진흙탕 속에 거꾸로 처박아버렸다는구나. 도라가 울음을 터트리자, 그게 뭐 울 일이냐면서 데이비가 아예 흙에서 뒹굴어버렸대. 메리가 그러는데 도라는 참 착한데 데이비는 장난이 무척 심하다고 하더구나. 그 애들은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지 않니. 아기였을 적에 아빠가 죽고 그 이후로 죽 병든 메리 혼자서 아이들을 돌봤으니 그럴 만도 하지.”
“전 항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버릇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앤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주머니가 저를 받아주시기 전까지는 저도 그랬잖아요. 아이들 삼촌이 아이들을 잘 돌보아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근데 키스 부인과 아주머니는 어떤 관계라고 하셨죠?”
“메리 말이냐? 메리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메리 남편이 우리와 먼친척 간이지. 린드 부인이 올라오고 있구나. 메리 일이 궁금해서 올 줄 알았다.”
“린드 아주머니한테 해리슨 아저씨와 소 얘긴 하지 말아주세요.”
앤이 간청하다시피 말했다.
마릴라도 그러마고 했지만 그런 약속은 소용이 없게 되었다. 린드 부인이 앉자마자 꺼낸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아까 카모디에서 돌아오다가 해리슨 씨가 자기 집귀리밭에서 이 집 소를 쫓아내고 있는 걸 봤어요. 굉장히 화가 난 것 같던데, 여기 와서 소란을 피우지는 않던가요?”
앤과 마릴라가 재미있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며 비밀스러운 미소를 교환했다. 에이번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린드 부인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그날 아침에도 앤이 마릴라에게 “아주머니가 한밤중에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블라인드까지 내린 채 재채기를 하더라도 린드 아주머니는 다음 날 아침 ‘감기는 좀 어때요?’ 하고 물을걸요!”라는 말을 했었다.
마릴라가 대답했다.
“그랬겠죠. 제가 외출 중이었는데, 앤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대요.”
“정말 불쾌한 사람이었어요.”
앤이 분하다는 듯 빨간 머리를 휙 젖히며 말했다.
“정말이지 뭐니. 나는 로버트 벨 씨가 뉴브런즈윅 사람에게 집을 팔 때부터 문제가 터질 줄 알았다, 그럼. 이렇게 자꾸만 다른 고장 사람들이 몰려드니 에이번리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야. 이러다가는 발 뻗고 잠도 자지 못할 날이 곧 오고 말지.”
린드 부인이 심각하게 말했다.
“왜요, 다른 사람들이 또 오나요?”
마릴라가 물었다.
“못 들었어요? 도넬 가족이 있잖아요. 피터 슬론의 낡은 집을 빌려서 들어온. 피터가 제분소를 맡기려고 고용한 사람이래요. 저 아래 동부 어딘가에서 왔다는 말이 있지만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대요. 거기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티머시 코튼네도 화이트 샌즈에서 이사 온다잖아요. 아마 틀림없이 모두에게 폐만 끼치게 될 거예요. 티머시는 폐병에 걸린 데다 멀쩡할 때는 도둑질이나 하잖아요. 그 부인은 또 얼마나 게으른지 손가락 하나 까닥하길 싫어한대요. 글쎄, 설거지도 앉아서 한다지 않아요. 그리고 조지 파이 부인은 고아가 된 남편의 조카를 맡기로 했대요. 앤서니 파이라는 아인데, 앤, 그 아이도 너희 학교에 다니게 될 테니 네가 고생 좀 하게 될 거다, 그럼. 그리고 낯선 아이가 또 들어올 거야. 폴 어빙이라는 앤데 할머니랑 살려고 미국에서 올 거래. 마릴라, 그 애 아버지를 알지 않아요? 스티븐 어빙 말이에요. 그래프턴의 라벤더 루이스를 차버린 남자죠.”
“차버린 건 아니죠. 좀 다투었을 뿐이지. 나는 양쪽에 모두 잘못이 있었다고 봐요.”
“어쨌거나 어빙이 라벤더와 결혼하지는 않았잖아요. 그 일로 라벤더 루이스는 완전히 사람이 변해버렸대요. 자기 스스로 ‘메아리 집’이라고 이름붙인그 작은 돌집에서 혼자 살고 있대요. 스티븐은 그 후 미국으로 가서 삼촌과 사업을 시작했고 미국 여자와 결혼을 했죠. 그 이후로는 집에 온 적이 없어요. 스티븐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러 두세 차례 미국을 다녀왔고요. 그런데 스티븐의 아내가 2년 전에 죽어서 아들을 당분간 어머니에게 맡기게 되었다는군요. 그 아이가 올해 열 살이라는데 좋은 아이인지 어떤지 모르겠어요. 양키들은 그 속을 알 수가 없으니까.”
린드 부인은 안타깝게도 프린스에드워드 섬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모두 다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우선은 조심하고 보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미국사람을 특히 싫어했다. 린드 부인의 남편이 전에 보스턴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고용주에게 10달러를 떼어먹힌 일로 미국 전체를 싸잡아 비난했다. 그 책임이 미국 전체에 있지 않다고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천사도, 원칙도, 권력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학생이 좀 들어왔기로서니 에이번리 학교에 무슨 일이야 나겠어요. 그리고 그 아이가 아버지를 닮았다면 착한 아이일 거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스티븐 어빙이 너무 거만하다고 하기도 했지만 이 부근에서 가장 착한 아이였어요. 그나저나 손자를 돌보게 돼서 어빙 부인이 몹시 기뻐하겠군요. 남편이저세상으로 떠난 후로 내내 외로워했잖아요.”
마릴라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물론 그 아이가 착한 아이일 수는 있지만 에이번리 아이들이랑은 다르잖아요.”
린드 부인은 이미 이 문제는 매듭이 지어진 일이라는 듯 말했다. 사람이건, 장소건, 물건이건 린드 부인이 한번 마음을 정하면 그 생각은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네가 마을 개선회를 조직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얘기가 다 뭐냐, 앤?”
“지난번 토론 클럽에서 몇몇 아이들과 얘기를 나눠봤을 뿐이에요. 그런 모임이 있으면 마을이 더 나아질 거라고요. 그리고 앨런 목사님과 사모님도 동의를 하셨고요. 지금은 여러 마을에 그런 모임이 있으니까요.”
앤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글쎄다, 문제 일으키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게 나아, 그럼. 사람들은 개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사람을 개선하자는 게 아니에요. 에이번리 마을이에요. 더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길이 많거든요. 예를 들어 우리가 레비 볼터 씨를 설득해 그 집 밭 가운데 있는 낡은 집을 철거하는 것도 마을을 개선하는 일이 되지 않겠어요?”
“그건 그래. 그 흉가는 늘 눈에 거슬렸지. 아무튼 너희 개선회 회원들이 레비 볼터가 한 푼의 이득도 생기지 않는 마을을 위한 일에 나서도록 설득할 수 있다면 나도 내 눈으로 그 과정을 한번 지켜보고 싶구나. 네 생각에도 좋은 점은 있으니까 너를 실망시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모두 저 쓸데없는 양키 잡지에서 나온 것 아니니? 내가 친구로서조언하는데너는 학교 일만으로도 바쁠 테니 개선회니 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게 나아, 그럼. 하지만 네가 한번 마음을 정한 일이면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넌 어떻게든 일을 해내는 아이니까.”
린드 부인도 그 점은 인정했다.
앤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린드 부인의 말이 틀린 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앤의 마음은 개선회를 조직하는 일에 온통 쏠려 있었다. 이 일에는 길버트 블라이드와도 뜻이 잘 맞았다. 길버트는 화이트 샌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금요일 밤이면 에이번리로 돌아와 월요일 아침에 돌아갔다. 다른 젊은이들도 가끔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일이라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모임을 갖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일이 될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개선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앤과 길버트뿐이었다.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이 계획도 짜고,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적인 에이번리 마을을 마음속에 그려두었다.
린드 부인은 다른 소식도 전해주었다.
“카모디 학교에 프리실라 그랜트라는 여자 선생님이 왔다더구나. 너 그 아가씨와 퀸스 전문학교에 같이 다니지 않았니?”
“네, 그래요. 프리실라가 카모디에서 가르치게 되었다니, 너무 잘됐어요!”
앤의 잿빛 눈이 저녁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자 린드 부인은 새삼스레 앤 셜리가 정말 미인이지 아닌지 언제쯤 분명하게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몸무게는 암컷이 300∼350킬로그램, 수컷이 460∼500킬로그램이다. 영국 저지 섬이 원산지. 브르타뉴 종과 노르망디 종이 교잡되어 성립된 것으로,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사육.​


2

성급한 매매, 때늦은 후회





다음 날 오후 앤은 사야 할 물건이 있어 다이애나와 함께 마차를 몰고 카모디로 나갔다. 물론 다이애나도 열렬한 마을 개선회 회원이라서 카모디로 가고 오는 내내 둘은 지칠 줄도 모르고 개선회 이야기를 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저 공회당 페인트칠이야.”
다이애나가 에이번리 공회당을 지나며 말했다. 공회당은 낡은 건물로 우거진 숲 안쪽에 자리를 잡았고 온통 가문비나무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 건물은 너무 보기 흉해. 레비 볼터 씨의 집을 허물기 전에 저 일부터 해치워야겠어. 우리 아버지는 레비 볼터 씨가 그런 일에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절대 아니라서 우리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하셔.”
“그분도남자아이들이 나서서 집을 허물고, 허문 집에서 나온 판자를 쪼개 장작으로 쓰게 해주겠다고 하면 허락해주실 거야.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해. 그리고 처음에는 일이 잘 진행되지 않더라도 성급하게 마음을 먹어서는 안 돼.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개선할 수는 없어. 우선은 생각을 바꾸도록 사람들을 교육해야 해.”

앤이 희망적으로 말했다. 다이애나는 그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지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좋은 생각인 것 같기는 했고, 이런 자랑스러운 목표를 가진 모임의 한 사람이라는 것에 자부심도 느꼈다.
“앤, 어젯밤에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저기 카모디 길과 뉴브리지 길, 그리고 화이트 샌즈로 가는 세 길이 만나는 곳 있지? 거기 있는 어린 가문비나무가 이제는 모두 자라버렸으니까 그 나무들을 베어버리고 자작나무 두세 그루만 남겨놓으면 어떨까?”
“그래, 좋은 생각이야. 자작나무 아래에다가 통나무 벤치를 만들면 더 좋겠다. 그리고 봄이 오면 화단도 만들어서 제라늄을 심는 거야.”
앤도 기꺼이 동의했다.
“그래, 그런데 하이람 슬론 할머니네 소가 길로 나오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제라늄을 다 먹어치워 버릴걸.”
다이애나가 웃으면서 덧붙였다.
“네가 말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교육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앤. 저기 볼터 씨의 낡은 집이 보인다. 너무 보기 흉한 꼴이야. 더군다나 저 집은 길가로 나와 있잖아. 창문도 모두 달아나버린 저런 흉가를 보면 눈알이 없어져 버린 죽은 사람이 생각나.”
“난 낡고 버려진 집만큼 슬픈 일도 없다고 생각해. 지난날을 돌아보며 옛날의 즐거움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거든. 마릴라 아주머니가 그러시는데, 그 집에도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대. 그때는 정말로 아름다운 집이었다고 하셨어. 예쁜 정원에는 장미가 빙 둘러서 피어났대. 어린아이들 소리,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넘치던 그곳이 지금은 바람만 지날 뿐 저렇게 텅 비어 있잖아. 저 집이 얼마나 슬프고 외로울까! 달빛이 비치는 밤이면 저기 살던 사람들도 모두 돌아올지도 몰라. 오래전에 여기 살았던 어린아이들의 영혼이랑 장미꽃과 노래들, 모두가……. 그러면 그 낡은 집도 다시 젊어져서 즐거운 꿈을 꿀 수 있게 되겠지.”
앤이 꿈에 잠겨 말하자 다이애나가 머리를 흔들었다.
“난 어떤 장소건 그런 일은 절대로 상상하지 않을 거야, 앤. 너, 우리가 ‘유령의 숲’에 귀신이 나온다고 상상했다가 우리 엄마와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얼마나 혼이 났었는지 기억하고 있는 거니? 난 지금도 어두워지면 그 숲을 마음 놓고 지나다닐 수가 없어. 내가 이 볼터 씨 집을 두고도 또 그런 상상을 한다면 난 여기도 지나다니기 무서울 거야. 게다가 그 어린아이들은 죽지도 않았잖아. 모두 어른이 되어서 잘살고 있다고……. 그중 한 명은 정육점을 하고 있지만. 그리고 꽃들과 노래에는 영혼도 없어.”
앤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앤은 다이애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둘은 언제나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에 앤은 환상의 세계를 여행할 때만큼은 혼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에 걸린 그 길로 향할 때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동행할 수 없었다.
두 처녀가 카모디에 있는 동안 천둥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지만 비가 이내 그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나뭇가지마다 빗방울이 매달려 반짝거렸고, 푸르른 골짜기에 자라고 있는 젖은 풀고사리마다 진한 향기를 풍겨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바로 오른쪽 앞에 초록빛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해리슨 씨의 늦은귀리밭도 물기에 어려 더욱 풍성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밭 한가운데 매끈한 옆모습을 보이고 당당하게 서서 평화롭게 눈만 끔벅거리고 있는 소 한 마리!
앤은 말고삐를 놓고 입술을 깨물며 벌떡 일어섰지만 그 약탈자는 아무런 동요가없었다. 앤은말한 마디 없이 재빨리 마차에서뛰어내려, 울타리를 넘어 밭으로 달려 들어갔다. 다이애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 있었다.
“앤, 돌아와! 밭이 그렇게 젖어 있는데, 옷을 다 망치잖아. 옷을 망친다고, 내 말 안 들려? 혼자 힘으로는 그 소를 잡지도 못할 거야. 어휴, 나도 가서 도와주어야겠어.”
사태를 파악한 다이애나가소리를 질러댔다.
앤은 미친 듯이 밭을 헤치며 달렸다. 다이애나도 마차에서 훌쩍뛰어내려 말을 말뚝에 단단히 잡아매 놓고 예쁜 드레스 자락을 어깨까지 걷어 올렸다. 그런 다음 울타리를뛰어넘어미친 듯 소를 쫓고 있는 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다이애나는 젖은 옷자락에 자꾸만 다리가 걸리는 앤보다 더 빨리 뛸 수 있어 곧 앤을 따라잡았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를 해리슨 씨가 보았더라면 통탄을 했을 것이다.
“앤, 제발 좀 멈춰. 난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너도 흠뻑 젖었잖아.”
다이애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앤도 숨을 헐떡였다.
“난…… 저 소를…… 잡아야 해. 해리슨 씨가…… 보기 전에…… 내가…… 젖는 건 상관없어…… 물에 빠져 죽어도…… 좋아…… 저 소를…… 잡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 소는 맛있게 풀을 뜯고 있는 이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숨이 턱에 가닿은 앤과 다이애나가 다가가자마자 몸을 획 돌리더니 반대편으로 달아나버렸다.
“빨리쫓아가.달려, 다이애나, 달려.”
앤이 소리를 질렀다.
다이애나는 정말 힘껏 달렸고 앤도 달렸지만 말썽꾸러기 소는 온 밭을 헤집고 도망쳐 다녔다. 무엇에홀려도 단단히 홀린 모양이라고,다이애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10분은 족히 소를쫓은다음에야 ‘초록 지붕 집’으로 통하는 오솔길로 나가는 구석으로 소를 몰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만큼은앤의 마음도천사 마음과는 거리가 멀었으리라. 더군다나 카모디의 시어러 부자가 길에다 마차를 세워둔 채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앤의 기분은 더욱 나빠졌다. 두 부자의 얼굴에는 활짝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지난주에 저 소를 팔라고 했을 때 팔았어야지, 앤.”
시어러 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저 소를 원하신다면, 지금 팔아버리겠어요. 지금 당장 저 소를 가져가셔도 좋아요.”
얼굴은 새빨갛고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앤이 말했다.
“좋아, 내가 지난번에 제안했던 대로 20달러를 주지. 짐이 이 소를 바로 카모디에데려가면 돼. 오늘 저녁때 소를 사고 싶어 하는브라이턴의 리드 씨한테 보낼 거야.”

바로 5분 뒤에 짐 시어러 씨와 소는 언덕길을 올라갔고 충동적인 앤은 20달러를 손에 들고‘초록 지붕 집’으로 가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마릴라 아주머니한테는 뭐라고 말할 거야?”
다이애나가 물었다.
“괜찮아. 돌리는 내 소고, 경매에 내놓아도 20달러 이상 받지 못할 거야. 하지만 이제 어쩌니. 해리슨 씨가 밭이 엉망이 된 걸 보면 우리 소가 또 그 밭에 들어간 걸 알게 될 텐데. 난 내 명예를 걸고다시는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어! 이번 일로 소 때문에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됐어. 하지만 젖소 우리를 뛰어넘고 부수어버리는 소가 어디든 못 가겠니.”
마릴라는 린드 부인 집에 가고 없었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돌리를 팔아버린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린드 부인이 창문으로 앤과 시어러 씨가 거래하는 장면을 보았고 나머지는 추측으로 알아낸 것이다.
“소는 잘 팔아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앤, 일을 너무 서둘러 해치운 건 아니니? 그나저나 그 소가 어떻게 젖소 우리를 넘었는지 모르겠다. 판자를 부수어버리기라도 했나.”
“아직 젖소 우리를 살펴보지 못했어요. 지금 가서 보고 올게요. 그런데 마틴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마숙모 몇 분이 더 돌아가신모양이에요. 이건 피터 슬론 씨가 말한 팔순 노인 이야기 같아요. 며칠 전 밤에 슬론 부인이 신문을 읽다가 슬론 씨에게 말했대요. ‘또 팔순 노인이 죽었다는 기사가 났어요, 그런데 팔순 노인이 누구죠?’ 그러자 슬론 씨가 ‘나도 모르겠는데, 아마 몹시 아픈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그 사람에 관해 들은 말은 아무것도 없는데, 죽었다는 얘기만 자꾸 들리잖아.’ 하고 말했대요. 마틴의 숙모 이야기도 꼭 그렇잖아요.”
“마틴도 다른 프랑스 사람들과 똑같아. 그들은 단 하루도 믿을 수가 없다니까.”
마릴라가 지겹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난 후 앤이 카모디에서 사온 물건들을 살펴보던 중에 헛간에서 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들었다. 곧바로 앤이 두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부엌으로 달려 들어왔다.
“앤 셜리,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
“오, 마릴라 아주머니, 어쩌면 좋아요? 정말 큰일 났어요. 모두 다 제 잘못이에요. 오, 전언제쯤에나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하게 될까요? 린드 아주머니는 제가 언젠가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게 될 거라고 늘 말씀하셨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에요. 제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어요.”
“앤, 네 말은 정말로 요란스럽기도 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제가 팔아버린 소는 해리슨 씨의 소였어요…… 해리슨 씨가 벨 씨에게 산 소요……. 그런데 제가 그 소를 시어러 씨에게 팔아버렸다고요! 우리 돌리는 지금 젖소 우리 안에 있어요.”
“앤 셜리, 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니?”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건 꿈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꼭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해리슨 씨의 소는 지금쯤 샬럿타운에 있을 거라고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전 이제 이런 어리석은 실수는 졸업한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전 지금 제 생애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어요. 이제 어쩌면 좋아요?”

“어쩌다니? 다른 방법은 없다. 해리슨 씨한테 가서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해야지. 그 양반이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우리 소를 준다고 해라. 우리 소도 해리슨 씨네 소만큼 좋은 소잖니.”
“하지만 해리슨 씨는 몹시 언짢아하면서 화를 낼 거예요.”
앤이 신음했다.
“그야 그럴 테지. 성을 아주 잘 내는 사람 같던데. 원한다면 내가 가서 설명을 해보마.”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그렇게 비겁하지는 않다고요. 이건 모두 제 잘못인데, 아주머니가 벌을 받게 할 수는 없어요. 제가 가겠어요. 당장 다녀올 거예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잖아요. 끔찍하게 모욕을 당하게 될 거예요.”
가엾은 앤은 20달러를 들고 해리슨 씨 집으로 향해야 했다. 모자를 쓰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열린부엌문을 통해 탁자 위로뭔가가 보였다. 아침에 구워놓은 호두 케이크였다…… 위를 분홍색 크림으로 장식하고 호두를 넣은 특별히 맛있게 구워진 케이크였다. 금요일 밤에 에이번리의 젊은이들이‘초록 지붕 집’에 모여 마을 개선회를 조직하기로 해서 준비한 것이지만, 화가 나 있는 해리슨 씨에 비하면 그 모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앤은 그 케이크라면 어떤 남자의 가슴도 부드럽게 녹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특히 혼자서 요리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얼른 케이크를 상자에 담았다. 평화 협상을 위한 선물로.

“하지만 그것도 나한테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때 얘기야.”

몽롱한 8월의 저녁 무렵, 오솔길 울타리를넘고 들판을 가로질러지름길로접어든앤의 마음은 침울하기만 했다. 세상은 저녁놀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교수대로 끌려가는 사람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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