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5~6

나단비 | 2024.02.29 22:53:55 댓글: 0 조회: 9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0825
5

교사의 길로 들어서다





학교로 향하는 ‘자작나무 길’에서 앤에게 아무런 속살거림도 들려오지 않고 그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기는 그날 아침이 처음이었다. 학교에 도착해보니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전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새로 선생님이 오시면 모두 제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어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둔 덕이었다. 교실로 들어선 앤의 눈에 반듯하게 줄을 맞춰 앉은 ‘반짝이는 아침의 얼굴들’이 들어왔다. 모두들 뭔가가 잔뜩 궁금한 듯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몹시 긴장한 앤은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바보스럽게 보이지 않길 바라면서 모자를 걸고 학생들 앞에 섰다.
앤은 어젯밤 거의 12시가 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앉아첫인사로 무슨 말을 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할 말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런 다음에는 쓴 것을 모두 외우기까지 했다. 꽤 좋은 글이었고 서로 도우면서 성실하게 지식을 탐구해가자는 매우 멋진 이상도 담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그 멋진 인사말이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실제로는 10초나 지났을까 하는 시간이었지만, 1년은 지난듯한시간이 흐른 뒤에앤은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다들성경책을 꺼내세요.”
기진맥진한앤은숨을 죽이고아이들이 책상 뚜껑을 여닫으며 내는 시끄러운소리를 틈타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이들이 성경 구절을 읽고 있는 동안흐트러진마음을 진정시키고 어른의 세계로 떠나려는 작은 순례자들을 바라볼 여유를 얻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들은 낯이 익었다. 앤의 동급생은 작년에 졸업했거나 아니면 앤과 함께 상급학교에 진학했고,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아이들은 그 나머지 초급반 학생과 에이번리에 새로 온 열 명의 학생이었다. 앤은 이미 그 가능성을 자세히 알고 있는 학생보다는 이 새로 온 열 명의 학생한테 관심이 더 쏠렸다. 이 아이들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아이일지 모르지만 개중에는 천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뛰었다.
앤서니 파이는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검고 무뚝뚝해 보이는 작은 얼굴에, 그 검은 눈으로 앤을 노려보듯 쏘아보았다. 앤은 저 아이의 사랑을 얻어 파이 씨네 사람들 고집을 완전히 꺾어놓겠다고 즉각 마음을 먹었다.
반대편 구석에는 다른 낯선 아이가 아티 슬론과 함께 앉아 있었다. 명랑해 보이는 아이로 들창코에 얼굴은 주근깨투성이였으며 옅은 푸른색 큰 눈에 옅은 색깔의 속눈썹이 거의 하얀색으로 보였다. 아마 도넬 씨네 아이일 것이다. 이 아이와 매우 닮은 것으로 보아 통로 건너편에 메리 벨과 같이 앉아 있는 아이가 누나일 것 같다.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앤은 이런 차림으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궁금했다.가장자리를 빙 둘러 면 레이스가 엄청나게 많이 달린 빛바랜 분홍색 실크 드레스에 더러운 하얀색 양가죽 구두와 실크 양말을 신고 있는 아이는 모래 빛깔의머리를 너무 심하게 꼬고 곱슬거리게 만들어 머리 꼭대기에다가는 제 머리보다 더 크고 화려한 분홍색 나비 리본을 달았다. 그 표정으로 보아하니 아이는 자기 모습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창백한 얼굴에 부드러운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찰랑거리는 아이는애너터벨이 틀림없었다. 원래는 뉴브리지 학교 구역에 살았지만 아이의 집이 5미터쯤 북쪽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에이번리 구역으로 편입되어 오게 된 아이였다. 한 책상에 오밀조밀 앉아 있는 저 하얀 얼굴의 세 아이들은 아마 코튼 집안의 아이들일 것이다. 그리고 긴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을 가진 저 꼬마 미인은 틀림없이 프릴리 로저슨일 것이다. 이 아이는 지금 성경책 너머로 잭 길리스에게 요염한 눈길을 보내느라 정신을 팔고 있다. 얼마 전에 재혼한 아버지가 그래프턴의 할머니 집에 맡겨두었던 프릴리를 데려와 에이번리 학교로 오게 된 아이였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큰 키에 뭔가 불편해 보이는 소녀는 자기 손과 발이 몇 개씩 되기라도 하는 듯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바버라쇼라는 아이로 에이번리의 고모 집에서 살고 있었다.바버라는 통로를 지날 때마다 제 발이나 남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는 해서바버라가 넘어지지 않은 날은 아이들이 학교 현관 벽에 크게 축하의 글을 써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앤의 눈이 맨 앞줄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과 마주쳤을 때 앤은 자기가 찾고 있던천재라도발견한 듯 뭐라 말할 수 없는야릇한 전율을느꼈다. 앤은 이 아이가 폴 어빙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린드 부인이 내다본 대로 이 소년은 에이번리의 아이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에이번리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고장 아이와도 달랐다. 앤을 유심히 지켜보는 깊고 파란 눈에 이상하리만치 앤과 닮은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느껴졌다.
앤은 폴이 10살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8살쯤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앤이 본 어떤 어린아이보다도 작고 섬세하며 귀공자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밤색 고수머리가 후광처럼 감싸고 있었고 입 모양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적당한 크기에 부드럽게 다문 붉은 입술이 아름다운 선을 그리면서 양쪽 끝으로 모아져 옆에 예쁜 보조개를 만들었다. 진지하고 생각이 깊어 보이는표정으로 보아 이 아이의 육체보다는 정신이 훨씬 어른스러울 것 같았다. 앤이 다정하게 미소를 짓자 폴도 곧 미소로 답해서 이런 진중한 표정은 곧 사라져 버렸고, 그 미소는 소년의 내면에서 타올라머리끝에서발끝까지 소년의 모든 것을 비추어주는 불빛 같았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 점은 의식적인 노력이나 그러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답고도 부드러운 성품이 아이 내면에 있어, 그것이 저절로 흘러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순간적인 미소를 주고받았을 뿐 아직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지만 앤과 폴은 영원한 친구가 되었다.
뭐가 뭔지 모르게 몽롱한 가운데 그날 하루가 지나갔다. 그 이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앤은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 같았다. 학생들의 말소리도, 계산을 하고 있는 자기 자신도, 칠판에 글씨를 쓰는 것도 모두 기계적인 동작일 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의 태도는 모두 훌륭했다. 몰리 앤드루스는 그날 잘 길들인 귀뚜라미 두 마리를 갖고 통로에서 달리기 시합을 시켰다. 앤은 몰리를 교단에 한 시간 동안 세워두고 귀뚜라미를 빼앗았다. 몰리에게는 벌을 받은 것보다 귀뚜라미를 빼앗긴 것이 훨씬 더 속상했다. 앤은 몰수한 귀뚜라미를 상자에 넣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제비꽃 골짜기’에서 놓아주었는데 몰리는 앤이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 갖고 놀려고 한다고 믿었다.
또 한 말썽꾸러기는 앤서니 파이로 석판용 물통에 남아 있던 물을 아우렐리아 클레이의 목에 부어버리는 장난을 쳤다. 앤은 쉬는 시간에 앤서니를 불러 신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결코 숙녀의 목덜미에 물을 붓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앤은 학생들이 모두 신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상냥한 목소리로 온 마음을 다해 호소했지만 안타깝게도 앤서니 마음에 아무런 감동도 일으키지 못했다. 전과 다름없이 심술궂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훈계가 끝나자 무시하듯 휘파람을 휘익 불며 나가버렸다. 앤은 한숨이 나왔지만 파이네 가족 중 누군가의 애정을 얻는 일은 로마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사실 파이 집안사람 중에 진정한 애정을 얻어낼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지만 앤은 앤서니도 조금은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저 무뚝뚝한 얼굴 뒤에 숨기고 있는 좋은 점을 끌어내 주기만 한다면.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자 앤은 완전히 지쳐버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고 심한 절망감에 휩싸여버렸다. 그리 나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이렇게 실망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앤은 몹시 피곤했고 자기가 절대로 가르치는 일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날마다, 40년은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앤은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여기서 울어버려야 하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아무도 없는 하얀 방에 가서 울어야 하나? 앤이 이 문제에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복도를 걸어오는 구두 굽 소리와 드레스 자락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앤 앞에 현란한 옷차림을 한 부인이 나타났다. 요전에 해리슨 씨가 샬럿타운 가게에서 보았다면서 몹시 흉을 보았던 그 여자인 것 같았다. 해리슨 씨는 “그 여자 꼴이 꼭 최첨단 유행을 걷는 무당 꼴이었다.”라고 말했었다.
갑자기 등장한 이 부인의 옷차림을 보자면, 옅은 파란색 여름 실크로 만든 옷에 잔뜩 부풀려놓은 퍼프와 프릴과 링이 옷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달렸고 머리를 점령하고 있는 커다란 흰색 시폰2)모자에는 세 개의 길고 너덜너덜한 타조 깃털이 달렸으며 거기에 커다란 검은색 점이 박힌 화려한 분홍색 시폰 베일이 모자 끝에서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져 머리 뒤에서 두 가닥의 깃발처럼 펄럭였다. 게다가 작은 여자 몸에 어쩌면 저렇게 많은 보석을 달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많은 보석을 주렁주렁 매달았고 강한 향수 냄새까지 코를 찔렀다.
“나는 ‘도네엘’ 부인이에요, H. B. ‘도네엘’이지요. 오늘 클러리스 알마이러가 점심 먹으러 와서 한 말 때문에 이렇게 찾아왔어요. 몹시 불쾌하더군요.”
“죄송합니다만.”
앤이 오늘 도넬 아이들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쓰며 더듬더듬 말했다.
“클러리스 알마이러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우리 이름을 ‘도넬’이라고 잘못 발음했다고 하더군요. 우리 이름은 끝에 강세를 둬서 ‘도네엘’이라고 발음해야 해요. 앞으로는이 점을명심해주셨으면 해요.”
“네, 그러죠.”
앤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이름을 잘못 부르면 얼마나 불쾌한지 잘 안답니다. 하물며 발음을 잘못한다면 더욱 불쾌하시겠죠.”
“그럼요. 그리고 클러리스 알마이러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제 아들을제이컵이라고 부르셨다면서요.”
“제이컵이 자기 이름을 그렇게 말하던걸요.”
앤도 이번에는 항의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H. B. 도넬 부인이 이렇게 타락한 시대에 아이에게서 어떻게 존중받기를 바라겠느냐는 말투로 말했다.
“그 아이는 너무 서민적인 취향이에요, 미스 셜리.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저는 그 애 이름을 세인트 클레어라고 하고 싶었어요. 아주 귀족적인 이름이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애 아빠가 삼촌 이름을 따서제이컵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지 뭐예요. 제가 양보했어요.제이컵삼촌은 아주 부자인데 나이가 많았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미스 셜리? 우리의 죄 없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제이컵삼촌이 결혼해버렸고 지금은 아들도 셋이나 두었답니다. 그런 배은망덕한 일이 어디 있어요? 결혼식 초대장이 왔을 때, 글쎄 뻔뻔스럽게 초대장까지 보냈더라니까요, 제가 모두에게 말했어요.제이컵이라는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사양하겠고, 오늘 이후로 내 아들 이름은 세인트 클레어라고요. 아이 아빠는 고집스럽게도 그 애 이름을 아직도제이컵이라고 부르고 우리 아이도 그 천한 이름을 더 좋아해요. 하지만 그 애 이름은 틀림없이 세인트 클레어이고, 앞으로도 계속 세인트 클레어가 될 거예요. 이 점도 분명히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미스 셜리, 그래 주실 거죠? 클러리스 알마이러에게도 단순한 오해고 말 한마디면 다 바로잡힐일이라고 말해두었어요. ‘도네엘’, 마지막에 악센트가 있어요. 그리고 세인트 클레어예요.제이컵은 절대로 안 돼요. 그렇게 불러주세요, 감사합니다.”
도넬 부인이 총총거리며 사라지자 앤은 교실 문을 잠그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언덕 아래‘자작나무 길’에서 폴 어빙을 만났다. 폴이 앤에게 에이번리 아이들이 라이스 릴리라고 부르는 작고 예쁜 야생 난초 한 다발을 내밀었다.

“이것 받으세요, 선생님. 라이트 아저씨 밭에서 찾았어요. 선생님이 이런 꽃을 좋아하실 것 같아 선생님께 드리려고 가던 길이었어요. 그리고…….”
아이가 수줍게 말하고는 크고 예쁜 눈을 들며 덧붙였다.
“전 선생님이 좋아요.”
“어머나, 고마워라.”
앤이 향기가 나는 꽃다발을 받아 들면서 말했다. 폴의 말로 앤의 마음에서는 마법처럼 낙담과 피곤이 가셔버렸고 가슴에서 희망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작나무 오솔길을 걸어가는 앤을 축복하듯 달콤한 난초 향기가 감돌았다.
“오늘 어땠니?”
마릴라가 궁금해 물었다.
“한 달 후에나 물어봐 주세요. 그때면 대답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대답할 수가 없어요.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까요. 누군가 제 머릿속에 손을 넣어 휘저어놓은 것 같아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어요. 오늘 제가 유일하게 한 일은 클리피 라이트에게 A자를 가르친 것뿐이에요. 글쎄, 그 애는 A자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이제부터 셰익스피어며 《실낙원》에 이를지도 모를 긴 여정에 한 아이를 세워놓았으니 굉장한 일을 한 거지요?”
린드 부인이 더욱 격려가 되는 소식을 갖고 잠시 뒤에 찾아왔다. 이 사람 좋은 부인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섰다가 새로 온 선생님이 어떻더냐고 일일이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네가 무척 마음에 든다고 하더구나. 앤서니 파이만 빼고 말이다. 앤서니는 너도 다른 모든 여선생님이나 마찬가지로 좋은 점이 하나도 없대. 파이네 아이가 아직도 남았다니. 하지만 마음 쓰지 마라.”
“네, 괜찮아요. 전 앤서니 파이도 절 좋아하게 할 거라고요. 인내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하면 그 애도 변하겠죠.”
앤이 차분하게 말했다.
“글쎄다, 파이네 집 아이들에 관한 얘기는 장담할 수 없지.”
린드 부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애들은 언제나 반대로만 하잖니, 마치 꿈에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도넬 부인도 말이다. 나한테는 절대로 도네엘이란 소리를 듣지 못할 거다. 그 여자는 제정신이 아냐, 그럼. 그 여자가 퀴니라는 작은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는데, 그 개를 식탁에서 가족과 같이 먹게 한다는구나. 그것도 도자기 접시에 개밥을 준대. 그런 짓을 하다니 나 같으면 천벌을 받을까 봐 두렵겠구먼. 토머스도 도넬이 지각 있고 성실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부인을 고르는 재주는 없었던 모양이라고 하더라. 그럼.”
2) 가볍고 얇은 견직물.​

6

각양각색의 사람들





9월의 어느 날 프린스에드워드 섬으로 바다를 넘고 모래 언덕을 지나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기다란 붉은 길은 구불구불 들판과 숲을 지나고, 울창한 가문비나무 숲 모퉁이를 감아 돌아, 기다란 깃털 같은 풀고사리가 무성하게 자라난 단풍나무 조림지를 지나쳐서는 비탈길이 되어 분지로 내려갔다. 그리고 숲에서 나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분지를 가로지르던 시냇물이 다시 숲으로 사라지고, 붉은 길은 이제 길 양쪽 가장자리에 노랗게 피어난 미역취꽃과 옅은 푸른색 과꽃 사이에서 햇살을 즐겼다. 여름 공기도 언덕의 주인인 귀뚜라미 노랫소리에 덩달아 신이 난 듯 흔들렸다. 이 길을 살집 좋은 밤색 조랑말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마차에 탄 두 처녀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싱싱한 젊음과 기쁨이 온몸에서 넘쳐흐르는 듯 보였다.
“아, 오늘은 에덴의 낙원이 남겨준것 같은 멋진 날이야, 다이애나.”
앤이 행복에 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공기 중에 마법의 기운이 들어 있나 봐. 저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의 보랏빛을 좀 보라고, 다이애나. 아, 마른 전나무의 이 향기! 에븐 라이트 씨가 울타리를 잘라놓은 저기 양지 바른 곳에서 나는 향기야. ‘이런 날 살아 있다는 건 축복이야. 마른 전나무에서 나오는 향기는 천국의 냄새고.’ 이 말의 3분의 2는 워즈워스가 한 말이고 3분의 1은 앤 셜리의 말이지. 천국에는 마른 전나무가 없을 것 같지 않니? 숲 속을 지나면서 전나무 향기를 맡지 못한다면 천국이라도 천국 같지 않을 것 같아. 마른 전나무가 없어도 향기는 날지 몰라. 그래, 그럴 거야. 저 향기는 전나무의 영혼인 거고. 물론 천국에는 영혼이 있지.”
“나무에는 영혼이 없어. 하지만 마른 전나무 향기는 정말 좋아. 난 쿠션을 만들어서 전나무 잎을 넣을 거야. 너도 하나 만들어, 앤.”
“그래야 할 것 같다. 낮잠 잘 때 쓰면 좋을 것 같으니까. 그럼 드리아드나 숲의 요정 같은 꿈을 꾸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아름답고 기분 좋은 날 길을 가고 있는 에이번리 학교의 선생님 앤 셜리로 만족할래.”
“정말 아름다운 날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름다운 일과는 거리가 멀어.”
다이애나가 한숨을 지었다.
“도대체 왜 이 길을 맡자고 했니, 앤? 에이번리의 괴짜들은 거의 모두 이 거리에 살잖아. 우리는 이제 우리 일로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 대접을 받게 될 거야. 여기는 최악의 길이라고.”
“그래서 내가 이 길을 선택한 거야. 물론 우리가 부탁한다면 길버트와 프레드가 이 길을 맡아주겠지. 하지만 있잖아, 다이애나. 난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에 책임감을 느껴. 내가 이 일을 제안한 장본인이니까. 그래서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하지만 네가 나서서 부탁하고 다닐 필요는 없어. 그런 말은 내가 다 할게. 린드 아주머니도 내가 말은 아주 잘한다고 하셨어. 린드 아주머니는 우리 일에 찬성을 해야 할지 반대를 해야 할지 결정을 못 하고 계셔. 앨런 목사님과 사모님이 이 일에 호의적이라는 걸 생각할 때는 찬성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을 개선회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반대하고 싶으신가 봐. 그래서 지금 아주머니는 두 가지 마음으로 망설이고 있는 거야. 우리가 성공을 해야지만 린드 아주머니의 눈에 우리의 일이 정당하게 비칠 거야. 프리실라가다음번우리 개선회 모임에 관한 글을신문에 기고하기로 했어. 나는 프리실라가 멋진 글을 쓰리라고 믿어. 그 애 고모가 글을 아주 잘 쓰시니까 틀림없이 그 집안사람 모두 글재주가 좋을 거야. 샬럿 E. 모건이 프리실라의 고모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난 너무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어. 《에지우드시절》과 《장미 정원》을 쓴 사람이 내 친구의 고모라니 너무 멋진 일이야.”
“모건 부인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대?”
“토론토에. 그리고 프리실라가 그러는데 모건 부인이 내년 여름에 이 섬에 오신대. 가능하다면 우리를 부인과 만나게 해준댔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잠자기 전에 상상하기 아주 좋은 일이지.”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 조직이 끝났다. 길버트 블라이드가 회장이 되었고, 프레드 라이트가 부회장, 앤 셜리가 총무, 다이애나 배리가 재무를 맡았다. 개선회원들은 회원 집을 돌아가며 2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기로 했다. 올여름에 당장 많은 일을 해내겠다는 욕심은 부리지 않고 ,다음 여름에 할 일들을 차근차근 계획할 예정이며, 아이디어를 모으고 논의하면서 보고서도 쓰고 읽고 할 것이다. 앤이 말한 대로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교육을 펼칠 생각이었다.
물론 일부 반대 의견도 있어서 회원들은 이런 반대 의견에 더욱 귀를 세웠다. 엘리샤 라이트 씨는 이 조직의 이름을 구혼 클럽이라고 짓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했다. 

하이람 슬론 부인은 개선회원들이 모든 길바닥을 갈아엎어 제라늄을 심을 계획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레비 볼터 씨는 이웃들에게 개선회원이 모두의 집을 부수고 개선회에서 지시하는 대로 집을 새로 지으라고 할 테니 두고 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제임스 스펜서 씨는 교회 언덕을 좀 깎아 내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에븐 라이트 씨는 앤에게 제발 조시아 슬론 노인이 수염을 깎도록 개선회원들이 설득해달라고 했다. 로렌스 벨 씨는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헛간에 회칠이야 하겠지만 소 외양간 창문에레이스 커튼을 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못을 박았다. 메이저 스펜서 씨는 카모디 치즈 공장에 우유 운반 일을 하는 개선회원클리프턴슬론에게 내년 여름에는 자기 집우유 통받침대를 페인트칠하고 자수 천으로 덮개를씌워야 한다는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런데도 마을 개선회 회원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가을쯤에는 무언가를 성취해보자는 투지에 불타 있었다. 아마도 인간의 본성이란 것이 그런 것이리라. 배리 씨의 응접실에서 만난 두 번째 모임에서 올리버 슬론은 공회당 지붕을 바꾸고 페인트칠을 하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줄리아 벨이 이 의견에 찬성했지만 숙녀답지 않은 행동이 아닐까 싶어 곧 마음이 불편해졌다. 길버트가 이 의견을 모두에게 제시했고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었다. 앤은 진지하게 이런 회의 내용을 모두 기록했다. 다음으로 할 일은 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이었다. 줄리아 벨이 모든 영광을 차지하도록 놔두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거티 파이가 용감하게 제인 앤드루스를 위원회의 위원장에 추천한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거티의 제안도 통과됐다. 제인은 그 보답으로 거티를 위원으로 지명했다. 길버트, 앤, 다이애나, 그리고 프레드 라이트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각자의 분담구역을 정했다. 앤과 다이애나는 뉴브리지 길을 맡게 되었고, 길버트와 프레드는 화이트 샌즈, 제인과 거티는 카모디 길을 맡았다.
“거티에게 카모디 길을 맡도록 한 이유는 파이 집안이 모두 그 길에 살고 있기 때문이야. 파이네 사람 중 하나가 권유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부금을 내놓으려 들지 않을 게 뻔하니까.”
유령의 집을 지나 둘이 집으로 걸어오며 길버트가 앤에게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그다음주 토요일에 앤과 다이애나가 기부금을 모으려고 나선 것이다. 일단 길 끝까지 간 다음 거기서부터 모금을 시작해서 집 쪽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맨 첫 집은 앤드루스 씨 딸들이 사는 집이었다.
“만일 캐서린 아주머니 혼자만 있으면 소득이 있을 거야. 하지만 엘리자 아주머니가 있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걸.”
다이애나가 말했다.
그러나 엘리자는 집에 있었다. 마치 이들이 오는 걸 알기라도 했다는 듯 평상시보다 더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 엘리자를 보면 삶이 눈물의 계곡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 같은 인상을 준다. 미소를 짓거나 특히 말하면서 웃는 일은 순전히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앤드루스 자매는 50년이 넘도록 처녀로 살아왔으며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처녀로 남을 모양이었다. 사람들 말로는 캐서린은 결혼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지 않았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염세주의자로 태어난 엘리자는 그런 꿈을 아예 가져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마크 앤드루스의 자작나무 숲 안쪽으로 쑥 들어간구석에 있는 작은 갈색 집에서 산다. 엘리자는 이 집이 여름이면 너무 더워서 끔찍하다고 불평하지만 캐서린은 겨울이면 따뜻하고 아늑해서 좋다고 말하곤 했다.
엘리자는 패치워크 바느질을 하던 중이었는데 필요한 일이라기보다는 캐서린이 쓸데없이 레이스 뜨개질을 하는 데 대한 반감으로 할 뿐이었다. 앤과 다이애나가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하자 엘리자는 얼굴을 찌푸리고 들었지만 캐서린은 미소를 짓고 들었다. 하지만 캐서린은 엘리자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양 얼른 미소를 거두어들였으나 슬그머니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내게 낭비해도 좋을 돈이 있다면 그 돈을불태워타오르는 불꽃이라도 구경하지 공회당에 내놓지는 않겠어. 단 한 푼도 말이야. 마을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는커녕…….젊은것들이 잠이나 자야 할 시간에 시시덕거리려고 모이는 장소나 되지 않겠어.”
엘리자가 마땅치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 엘리자 언니, 젊은이들에게는 즐거운 일이 필요해.”
캐서린이 항의했다.
“난 그런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가 젊었을 때는 공회당이니 뭐니 하면서 싸돌아다니지 않았다고, 캐서린. 이 세상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난 더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해.”
캐서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한다고? 네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캐서린. 사실은 사실일 뿐이라고!”
엘리자가 아주 경멸스럽다는 듯 말을 뱉었다.
“글쎄, 언니, 난 언제나 밝은 면을 보고 싶거든.”
“세상에 밝은 곳이란 없어.”
“오, 아니에요. 밝은 면은 아주 많아요. 이 세상은 정말로 아름답다고요.”
앤이 그런 말을 잠자코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 한마디 거들었다.
“나만큼 오래 살게 되면 이 세상을 그렇게 밝게 보지 못할 거야. 세상을 더 낫게 하겠다고 그렇게 설치고 다니지도 않을 거고.”
엘리자가 차갑게 되받아치고는 물었다.
“다이애나, 어머니는 잘 계시니? 세상에, 네 어머니가 요즘 몹시 안 좋아 보이더구나. 그리고 앤, 마릴라는 언제 완전히 눈이 멀게 된다니?”
“의사선생님 말씀이 조심만 하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거래요.”
앤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엘리자가 머리를 흔들었다.
“의사란 언제나 환자 기분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법이지. 내가 마릴라라면 그런 기대는 하지 않을 거야.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두어야지.”
“가장 좋은 경우도 생각해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최악의 일이 생길지, 최고로 좋은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앤이 쾌활하게 말했다.
“내 경험으로는 아니야. 넌 겨우 16년을 살았지만 난 57년을 살았다고. 가려고? 글쎄, 너희 그 새로운 모임이 이 에이번리를 더 나빠지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난 별로 기대하지 않아.”

엘리자가 반박했다.
앤과 다이애나는 얼른 집을 나와서 가능한 한 재빨리 말을 달렸다. 너도밤나무 숲 아래로 난 모퉁이 길을 돌아 나오는데 뚱뚱하게 살찐 사람이 앤드루스 씨의 목장을 달려오면서 세차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캐서린 앤드루스였다. 숨이 차서 겨우 말을 하면서 앤의 손에 25센트짜리 동전 두 개를 쥐어주었다.
“공회당 페인트칠에 보태 쓰라고. 1달러 정도 내놓고 싶지만 계란 판 돈을 더 빼냈다가는 엘리자 언니한테 들키고 말 거야. 난 너희 모임에 아주 관심이 많아. 아주 좋은 일을 많이 하게 될 거라고 믿기도 하고. 난 낙천주의자거든. 언니와 살려거든 그래야만 해. 언니가 날 찾기 전에 얼른 들어가 봐야겠어. 내가 지금 닭 모이를 주러 나온 줄 알거든. 모금을 많이 하길 바라고, 우리 언니가 한 말에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마. 이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어. 암, 그렇지.”
다음으로 방문해야 할 집은대니얼블레어 씨의 집이었다.
“자, 이 집에서는 부인이 집에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어. 만약 부인이 집에 있으면 우리는 단 1센트도 얻어내지 못할 거야.대니얼블레어 씨는 머리 깎는 돈까지도 부인의 허락을 받아야 쓸 수 있대. 부인이 지독하게 인색한 사람인가 봐. 부인은 선심을 쓰기보다는 먼저 공정해야 한다고 말한대. 린드 아주머니의 말로는 공정하느라 바빠서 한 번도 선심을 쓴 적이 없다는 거야.”
마차 바큇자국이 깊게 난 좁은 길을 따라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다이애나가 말했다.
앤은 그날 저녁 블레어 씨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마릴라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말을 매놓고 부엌문을 두드렸어요. 아무도 나오지 않았지만 문은 열려 있었고 부엌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이애나는 그 소리가 욕설인 것 같다고 했어요. 저는 블레어 아저씨가 그렇게 욕을 하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어요. 블레어 아저씨는 항상 조용하고 온순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몹시 화가 나는 일이 있었는지 문을 나오는 아저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고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어요. 부인의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이 빌어먹을 것을 풀 수가 없어. 끈이 너무 꼭 묶여버려서 어쩌지를 못하겠으니 이대로 실례 좀 하자고.’ 하더군요. 우리는 정말 괜찮다고 말하고 안으로 들어가 앉았고, 블레어 아저씨도 앉았어요. 아저씨는 앞치마를 둘둘 말아 등 뒤로 휙 돌려놓으면서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죠. 그 모습이 너무 안돼 보여 우리는 정말 죄송하다는생각마저들었어요. 다이애나가 우리가 아주 난처한 시간에 방문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어요. 블레어 아저씨는 ‘오, 아니야, 전혀.’ 하고 말하면서 웃어 보였죠. 아주머니도 그 아저씨가 언제나 매우 예의가 바르다는 건 아시잖아요. ‘내가 좀 바쁘기는 했지. 케이크를 구워야 했거든. 우리 집사람이 오늘 밤 몬트리올에 사는 동생이 온다는 전보를 받고 역으로 마중을 나가면서 케이크를 구워놓으라고 했거든. 재료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적어놓고 어떻게 굽는지도 알려주고 갔는데, 벌써 절반은 잊어버리고 말았어. 그리고 여기 맛에 따라서 향료를 넣으라고 했는데 무슨 뜻이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 내 입맛이 다른 사람 입맛과 다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작은 레이어 케이크를 만드는데 바닐라 한 스푼이면 될까?’ 블레어 아저씨가 정말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거든요. 공처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어요. 저는 하마터면 ‘아저씨, 공회당에 기부금을 내주시면 케이크 재료 배합은 제가 해드릴게요.’ 하고 말할 뻔했어요. 하지만 전 갑자기 이렇게 곤경에 처한 사람을 이용해서협상하는건 이웃으로서 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전혀 조건을 걸지 않고 제가 그 케이크 반죽을 해주겠다고 했죠. 블레어 아저씨는 뛸 듯이 기뻐하셨어요. 결혼하기 전에도 빵이야 늘 자기가 만들었지만 케이크는 전혀 만들 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래도 부인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은가 봐요. 아저씨가 저한테 다른 앞치마를 가져다주었고 다이애나는 계란을 깨고 저는 재료들을 배합했어요. 블레어 아저씨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재료를 가져다주었죠. 뒤에서 앞치마가 펄럭거리는 것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바람에 다이애나는 웃음보가 터질까 봐 죽는 줄 알았대요. 아저씨는 빵은 아주 잘 구울 수 있다고 했어요. 늘 하는 일이라나요.그러고는우리 명부를 보여달라고 하더니 4달러를 기부해주셨어요. 우리는 보답을 받았다고요. 하지만 우리가 한 푼도 받지 못한다 했더라도 블레어 아저씨를 도와드린 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한 거 같아요.”
다음으로는시어도어화이트 씨 집을 방문했다. 앤도 다이애나도 전에 그 집을 방문해본 적은 없었고 별로 상냥하지 못한시어도어부인과는 살짝 안면만 있었다. 뒷문으로 들어가야 할까, 앞문으로 들어가야 할까 목소리를 낮춰 상의하고 있는데 신문지를 한 아름 안은시어도어부인이 현관문 앞에 나타났다. 부인은 베란다 앞바닥과 층계에 조심스럽게 신문지를 하나하나 깔더니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해 있는 두 방문객 앞까지도 신문을 깔았다.
“풀밭에서 발을 잘 턴 다음 이 신문지 위로 걸어 들어올래요? 방금 온 집 안을 청소했는데 집 안에 흙먼지가 떨어질까 봐 걱정이 돼서. 어제 비가 내린 이후로 길이 아주 질척거리거든.”
부인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웃으면 안 돼!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다이애나, 저 부인이 뭐라고 얘기하건 간에 나 좀 쳐다보지 마. 내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수가 없잖아.”
신문지는 복도를 지나 티끌 하나 없이 잘 정돈된 응접실까지 깔려 있었다. 앤과 다이애나는 조심스럽게 가장 가까운 의자에 얼른 앉아 용건을 말했다. 화이트 부인은 딱 두 번만 말을 가로막았을 뿐 매우 정중하게 말을 들어주었다. 한 번은 날아 들어온 파리를 쫓기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앤의 옷에서 카펫으로 떨어진 풀잎을 줍기 위해서였다. 앤은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화이트 부인은 2달러를 기부해주었다.
“우리가 다시는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야.”
집을 나오면서 다이애나가 말했다. 화이트 부인은 말고삐를 채 풀기도 전에 신문지를 걷어 치웠고 둘이 뜰을 벗어나면서 돌아보니 열심히 복도를 비질하고 있었다.
“난 시어도어 화이트 부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깔끔한 사람일 거라는 얘기는 듣고 있었지만, 이제야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어.”
안전한 곳으로 나오자마자 다이애나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저 집에 아이가 없어서 다행이야. 아이들이 있었다면 저 집에서 살기 끔찍했을 거야.”
앤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스펜서 씨 집에서는이사벨라스펜서 부인이 에이번리의 모든 사람을 험담을 늘어놔 기분을 비참하게 했다. 토머스 볼터 씨는 20년 전 처음에 공회당을 지을 때 자기가 짓자고 한 곳에 공회당을 짓지 않아서 한 푼도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건강의 표본으로 내놔도 될 만큼 건강하기만 한 에스더 벨 부인은 30분 동안이나 앤과 다이애나를 붙들고 여기가 아프니 저기가 쑤시느니 하는 불평을 늘어놓고 나서야 내년이면 자기는 무덤 속에 있지 여기 없을지 모른다며 슬프기 짝이 없는 얼굴로 50센트를 내놓았다.
그렇지만 최악의 대접을 받은 곳은 사이먼 플레처 씨 집이었다. 뜰로 들어섰을 때 분명 현관 창문으로 두 사람의 얼굴이비쳤는데도문을 두드렸을 때는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꾹 참고 기다렸지만 결국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둘은 화가 나고 분해서 사이먼 플레처 씨네 집을 나와버렸다. 이쯤에서는 앤조차도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일 이후로는 형세가 좀 바뀌었다. 다음으로는 슬론 집안이 이어졌는데 모두들 시원스럽게 기부금을 내주었고, 거기서부터 그 길 끝까지는 구두쇠 한 사람만 빼고는 상당히 모금이 잘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집은 연못 다리 옆에 사는 로버트 딕슨 씨네 집이었다. 집에 거의 다 왔지만 딕슨 부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둘은 앉아 차를 대접받았다. 딕슨 부인은 아주 ‘예민한’ 사람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앤과 다이애나가 거기 있는 동안 제임스 화이트 부인이 찾아왔다.
“내가 지금 로렌조 씨 집에 다녀오는 길이거든. 지금 그 사람은 에이번리에서 가장 기분이 좋을걸. 무슨 일이냐 하면, 그 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났거든. 딸을 줄줄이 일곱이나 나은 후이니 얼마나 기쁘겠어, 경사도 그런 경사가 없지.”
로렌조 부인이 말했다.
앤이 그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둘이 밖으로 나오자 말했다.
“지금 곧장 로렌조 화이트 씨 집으로 가자.”

“하지만 그 집은 화이트 샌즈 길에 있고 여기서는 아주 멀어. 길버트와 프레드가 맡은 길이기도 하고.”
다이애나가 반대했다.
“그 애들은 다음 주 토요일이나 되어야 그 집을 방문하게 될 거야. 그럼 너무 늦어. 아기를 새로 얻은 기쁨이 최고인 지금 가야 해. 로렌조 화이트 씨는 엄청나게 인색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라 지금이 아니면 한 푼도 기부하지 않을 거야. 이런 황금 같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다이애나.”
앤이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앤의 예상은 적중했다. 화이트 씨는 뜰에서 이들을 맞아주었고 부활절 날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앤이 기부를 부탁하자 흔쾌히 돈을 내주었다.
“그럼, 그럼, 지금까지 받은 가장 높은 금액에 1달러를 더 얹어 내놓겠다.”
“그럼 5달러가 되겠네요.대니얼블레어 씨가 4달러를 기부해주셨거든요.”
앤은 속으로 걱정이 되었으나 로렌조 씨는 눈 하나 꿈쩍 않고 돈을 내놓았다.
“5달러라…… 옜다, 여기 있다. 자, 이제 집 안으로 좀 들어가 보자고. 꼭 봐야 할 것이 있거든. 아직 본 사람이 몇 되지 않지. 들어가서 보고 어떤지 말 좀 해줬으면 좋겠어.”
“아기가 예쁘지 않으면 어쩌지?”
로렌조 씨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며 다이애나가 낮은 소리로 걱정을 했다.

“걱정하지 마, 아기들은 모두 다 예뻐. 혹시 예쁘지 않더라도 뭔가 칭찬해줄 말이 있을 거야.”

앤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아기는 정말로 예뻤다. 화이트 씨는 앤과 다이애나가 갓 태어난 통통한 아기를 보면서 진심으로 감탄해 마지않아서 5달러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로렌조 씨가 어떤 일에 기부금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앤은 이제 몹시 피곤했지만 마을을 위해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그날 밤 목장을 지나 해리슨 씨 집을 찾았다. 해리슨 씨는 평상시처럼 진저와 함께 베란다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집은 카모디 길에 있었지만 제인과 거티가 해리슨 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앤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해리슨 씨는 단 1센트도 내놓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고, 앤이 아무리 사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우리 일에 찬성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앤이 항의도 해보았다.

“그래, 그랬지. 그랬지만 내가 찬성하는 것과 내 지갑과는 상관이 없어, 앤.”

“오늘 같은 경험을 몇 번만 더 하게 된다면 나도 엘리자 앤드루스 아주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게 될 거야.”

그날 밤 동쪽 방 거울 앞에 서서 하루를 돌아보며 앤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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