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15~16

나단비 | 2024.03.26 22:30:51 댓글: 0 조회: 53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728
15
뒤집힌 꿈





레드먼드에서의 공부, 강의실, 친구들한테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앤은 가슴이 부풀었다.
‘이제 한 주만 더 있으면 레드먼드로 돌아가는구나.’
‘패티네 집’에서의 행복한 생활이 눈앞에 그려졌다. 아직 그곳에서 살아보지는 않았지만‘패티네 집’을 생각만 해도 온기가 느껴졌다.
역시나 이번 여름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여름의 태양과 하늘과 함께한 즐거운 시간이었고 건강하고 온전한 기쁨을 누렸으며 옛 친구와 나눈 우정이 더 새로워지고 깊어진 시간이었다. 좀 더 고귀하고 가치 있게 사는 법을 배웠고 좀 더 끈기 있게 일하고, 좀 더 신나게 놀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인생의 모든 교훈을 대학에서 배우는 건 아니야. 인생은 어디에서나 우리에게 교훈을 가르쳐준다고.’
앤은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행복한 방학 마지막 주를 맞았을 때 뒤집힌 꿈처럼 앤의 여름을 완전히 망쳐놓는 일이 생겼다. 누가 장난질을 한 것처럼.
“최근에 뭐 쓴 거라도 있어, 앤?”

어느 날 밤, 해리슨 씨 부부와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해리슨 씨가 친근하게 물어왔다.
“없어요.”
앤은 짧게 대답했다.
“앤을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어. 하이람 슬론 부인이 며칠 전에 한 말을 듣고혹시나 해서. 한 달 전에 몬트리올의 롤링스 릴라이어블 베이킹파우더 사 앞으로 보내는 커다란 봉투가 우체국에 접수되었다더군. 슬론 부인은 그 회사 베이킹파우더를 주제로 쓴 이야기 중에서 최고 작품을 뽑아준다는 상을 노리고 누군가 원고를 보내는 걸 거라고 했어. 앤의 글씨체 같진 않았다고 했지만 그래도 난 앤이 보냈을 거라고 짐작했지.”
“절대로 저는 아니에요. 물론 상금을 준다는 광고는 봤지만 거기 응모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베이킹파우더를 선전하는 글이라니, 그거 정말 우스운 일 아니에요? 저드슨 파커의특허 약품광고담장만큼이나요.”
앤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제 앞으로 다가올 굴욕의 계곡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밤 다이애나가‘초록 지붕 집’동쪽 방으로 불쑥 나타났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장밋빛 붉은 볼로 손에는 편지 한 통을 들고 있었다.
“앤, 여기 편지 왔어. 내가 우체국에 갔었는데 너한테 온 편지가 있어서 가져다주러 왔지. 빨리 열어봐. 네가 원하던 편지라면 나도 너만큼 신나게 기뻐해줄게.”
당황한 앤은 봉투를 열고 타이핑된 글자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프린스에드워드 섬, 에이번리 마을,
‘초록 지붕 집’의 미스 앤 셜리에게

앤 셜리, 우리는 당신이 보내준 ‘에이버릴의 속죄’가 최근 본사에서 개최한 글 응모 대회에서 최고 작품상을 획득하는 영광을 차지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여기 상금 25달러짜리 수표를 동봉합니다. 저명한 캐나다 신문 몇 곳에 당신의 소설이 실릴 것입니다. 또한 고객들에게 발송할 팸플릿에도 게재될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롤링스 릴라이어블 베이킹파우더 주식회사

“이해가 안 돼.”
어리둥절한 앤이 말했다.
다이애나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네 작품이 상을 받을 줄 알았어. 난 확신했지. 내가 그 대회에 네 글을 보냈거든, 앤.”
“다이애나 배리!”
“그래, 내가 했어. 그 광고를 보는 순간 네 글이 갑자기 떠올랐어. 처음엔 글을 보내도 되느냐고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네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어. 넌 그 글에 확신이 없었잖아. 그래서 네가 준 복사본을 보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지. 네가 기분 나빠할 일은 없을 줄 알았어. 왜냐하면 상을 못 받으면 원고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무슨 회신이 온다면 넌 크게 기뻐할 거라 생각했거든.”
다이애나가 침대 위로 벌떡 누우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애나가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아니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앤이 무척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당연히, 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그다음순서인 기쁨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나?
“왜, 앤? 넌 조금도 기쁘지 않은 것 같아.”
다이애나가 소리치자 앤은 그 즉시 미소를 만들어냈다.
“물론 나에게 기쁨을 주려는 너의 그 사심 없는 동기는 고마워. 하지만 난 너무 놀랐고 전혀 실감이 안 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겠어. 내 소설에는 없어. 그런 단어, 그런 단어가…….”
앤은 그 단어를 말하려는데 목이 메었다.
“그 베이킹파우더란 말.”
“맞아. 그래서 내가 집어넣었지.”
다이애나는 앤을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그건 눈 깜짝하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어. 물론 우리의 예전 이야기 클럽 시절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지. 에이버릴이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 기억나지? 그 장면에다 ‘에이버릴이 롤링스 릴라이어블 베이킹파우더를 사용했다.’란 말만 집어넣었어.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좋게 나온 거야.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퍼시벌이 에이버릴의 손을 꼭 잡으면서 이렇게 말하잖아. ‘내 사랑, 이제 우리의 앞날은 아름다울 것이오. 우리의 꿈의 집을 지을 날도 멀지 않았고.’ 거기다 내가 한 마디 더 덧붙였지, ‘그 집에서 우리 베이킹파우더는 롤링스 릴라이어블 이외에는 어떤 것도 사용하지 맙시다.’라고”
“어머나.”
앤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누가 달려들어 찬물이라도 확 끼얹은 느낌이었다.
“넌 25달러의 상금을 받았어. 있잖아, 프리실라가 옛날에 그랬는데, <캐나다 여성>지에선 소설 하나에 고작 5달러 정도만 준대.”
다이애나가 계속해서 활발하게 지껄였다.
앤은 떨리는 손으로 보기도 싫은 분홍색 봉투를 내밀었다.
“난 이거 가질 수 없어. 공정하게 따지면 이건 네 거야. 다이애나 네가 소설을 보냈고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도 너잖아. 난, 나라면 절대 그런 곳에 안 보냈을 거야. 그러니 수표도 당연히 네가 받아야 해.”
“난 그저 이 결과를 보는 것만으로 기뻐. 내가 한 일이나 내가 그랬던 이유는 전혀 힘든 게 아니었어. 난 상을 탄 작가를 친구로 둔 것만으로 충분해. 난 이제 가야겠다. 우체국에서 곧바로 집으로 가야 했는데. 집에 손님이 와 있거든. 그래도 난 내 귀로 직접 이 소식을 듣고 싶었어. 난 네가 상을 받게 돼서 정말 기뻐, 앤.”
다이애나가 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새치름하게 말했다.
앤은 갑자기 앞으로 몸을 숙이더니 양팔로 다이애나를 꼭 껴안고 양 볼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넌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가장 친절한 친구야.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한 건지 잘 알아. 그 마음은 고맙게 생각해.”
앤의 목소리가 약간 떨려 나왔다.
다이애나는 기뻤지만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황급히 돌아가 버렸다. 앤은 아무 죄 없는 분홍색 수표 봉투를 마치 더러운 돈이나 되는 것처럼 서랍 속에 얼른 넣어버리고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치욕과 함께 화가 들끓어 올라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지다니, 절대 그럴 수 없어.
저녁 무렵 길버트는 마음에 축하 인사를 잔뜩 준비해‘초록 지붕 집’에 왔다. 오는 길에‘비탈길 과수원집’에서 앤의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앤의 표정을 보자 길버트는 준비한축하 인사를 건넬 수 없었다.
“무슨 일이니? 난 네가 롤링스 릴라이어블 상을 탈 만큼 충분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었어.”
“오, 길버트, 너마저.”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너마저’ 하고 말했던 바로 그 어조로 앤이 말했다.
“난 너만큼은 날 이해해줄거라 생각했는데, 이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르겠니?”
“아니, 솔직히 난 모르겠어. 뭐가 문제라는 거니?”
“모두 다. 내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불명예를 떠안은 것 같아. 아들이 온몸에 베이킹파우더 광고 문신을 새긴다면 엄마 마음이 어떨까? 내가 지금 그런 느낌이야. 나는 내 불쌍하고 작은 이야기를 사랑해.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것 중 최고를 골라 그 이야기를 만들어냈어. 하지만 그런 내 이야기가 베이킹파우더 광고글로 추락해버리다니, 이건 엄청난 불명예야. 해밀턴 교수님이 퀸스에서 문학 수업 시간에 한 말 기억나니? 우리는 저급의 혹은 가치 없는 동기로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하셨잖아. 항상 가장 이상적인 목표만 생각하라고. 내가 로링스 릴라리어블 베이킹파우더를 선전하는 글을 쓴 걸 교수님이 아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내가 레드먼드에 도착할 때쯤이면 사람들은 이미 벌써 다 알고 나를 놀리겠지!”
앤이 한탄했다.
“절대 그렇지 않아!”
길버트가 말했다. 하지만 고약한 3학년 몇몇은 앤이 걱정하듯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레드먼드 학생들은 그냥 모두 나처럼 생각할 거야. 우리들 열 명 중 아홉은 대단한 재력을 가지지 못했으니, 그저 글로 정당하게 돈을 벌어서 학비에 보태려고 했다고. 그러니 저급한 의도나 가치 없고 어리석은 동기로 글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 물론 사람들은 분명 문학 작품을 쓰고 싶어 하지. 그렇더라도 학비와 생활비는 필요한 거잖아.”
길버트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위로로 앤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놀림거리가 되고 말 거라는 끔찍한 생각은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앤의 이상은 여전히 깊은 상처를 입은 채였다.




16
새로운 생활





주위를 둘러보던 필리파 고든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본 곳 중에서 가장 아늑한 곳이야. 우리 집보다 더 아늑해.”
해 질무렵, 모두들 널찍한‘패티네 집’거실에 모여 있었다. 앤과 프리실라, 필리파와 스텔라, 제임시나 아주머니와 러스티, 조지프, 사라, 그리고 고그와 매고그가 모두한자리에 모였다. 벽난로 불빛 그림자가 춤추듯 벽에서 너울거리고 고양이들은 가르랑거렸다. 필리파 주위를 맴돌며 기꺼이 희생양을 자처하는 남자들 중 한 명이 보내온 온실 국화가 꽃병 가득 꽂혀 달빛처럼 부드럽게 빛났다.
이제 여기서 생활한 지도 3주가 지났고, 모두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모두들‘패티네 집’생활에 성공적으로 적응했다고 여겼다. 집에서 돌아온 후 첫 2주는 정말 신나는 시간이었다. 모두들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자기 방을 꾸미느라 바빴으며 서로들 다른 의견을 조율했다.
앤은 레드먼드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와도 에이번리를 떠나는 것이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마지막 방학 며칠이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앤이 상금을 받았다는 소식이 섬 신문에 실렸고 윌리엄 블레어 씨는 상점 계산대 위에 앤의 소설이 실린 분홍색, 초록색, 노란색의 팸플릿을 잔뜩 쌓아놓고 손님이 올 때마다 한 부씩 나눠주었다. 블레어 씨는 앤의 소설을 읽고 고객들이 보내온 소감문을 한 다발씩 건네주기도 했지만 앤은 그것을 받는 즉시 부엌의 요리용 화로에 던져버렸다. 앤은 이렇게 상처받게 된 자기 이상에 수치심을 느낄 뿐이었다. 마을 이웃들은 앤이 글을 써서 상을 받은 것을 대단한 일로 여겼다. 앤의 많은 친구들도 진정으로 존경심을 표해주었다. 반면 얼마 안 되는 앤의 적들은 시기심에 불타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특히 조시 파이는 앤이 틀림없이 다른 이야기를 그대로 베꼈을 거라고 했다. 몇 년 전 신문에서 앤의 글과 똑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찰리가 앤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나 그렇다고 추측하고 있던 슬론 가족은 앤이 상을 받은 일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모두들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일을 앤은 실제로 도전한 것뿐이라고 했다. 아토사는 앤이 소설 나부랭이나 쓴다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부모가 누구인지 어디 출신인지 오직 신만이 알고 있는 고아이니 그런 일을 하지, 에이번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라 했다. 심지어는 린드 부인조차도 소설 같은 걸 왜 쓰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25달러짜리 수표를 보고 나서는 그런 의구심을 마음속에서 싹 지워버렸다.
“정말 놀랄 일이야. 그런 거짓말에 이만한 큰돈을 지불하다니, 그럼.”
반은 자랑스럽다는 투고 반은 쓸데없는 짓이란 투였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집을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는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돌아가면 더 현명하고 경험도 많은 2학년 대접을 받을 것이다. 거기에 개학 첫날 반갑게 서로를 맞아줄 친구들이 있는 레드먼드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다 벅차올랐다. 프리실라와 스텔라, 길버트, 2학년이 되어 전과는 다르게 위엄 있어 보일 찰리 슬론도 있고, 여전히 알렉과 알론조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필리파와 무디 스퍼전 맥퍼슨도 있을 것이다.
무디 스퍼전은 퀸스 학교를 떠난 뒤로 줄곧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제 가르치는 일은 그만두고 목사가 될 공부를 해야 할 때라고 결정을 내렸다. 가엾은 스퍼전은 대학생활의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같은 집에서 하숙하고 있던 예닐곱 명의 무자비한 2학년 선배들이 어느 날 밤 떼거지로 스퍼전에게 덤벼들어 머리를 반 이상 밀어버렸다. 이 불쌍한 스퍼전은 머리가 다시 자랄 때까지 가발을 쓰고 다녀야 했다. 오래전 그는 자기가 목사가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스럽다고 앤에게 쓰디쓴 고백을 했던 적이 있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패티네 집’의다른 식구들이 자기들 거처를 잘 정리하고 꾸민 다음에 도착했다. 미스 패티는 앤에게 열쇠를 보내면서 고그와 매고그를 상자에 넣고 포장해 손님방 침대 밑에 넣어두었지만 원한다면 꺼내놓아도 괜찮다는 편지도 함께 동봉했다. 그림을 거는데 주의를 했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있었다. 거실은 5년 전에 새로 도배를 해놓았으니 정말 필요한 곳 이외에는 새 그림을 다느라 벽에 구멍을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 외의 일은 앤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했다.
모두들 자기 보금자리를 즐겁게 정리했다. 필리파가 말했듯이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멋진 일이라고들 생각했다. 방해하는 남편도 없이 집안일을 하니 즐겁기만 했다. 모두들 작은 집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꾸밀 것들을 가지고 왔다. 프리실라와 필리파, 스텔라는 작은 장식품과 그림을 많이 가져와 미스 패티의 당부 같은 건 철저히 무시한 채 자기 기호에 따라 맘껏 벽에 걸어놓았다.
“우리가 떠날 때가 되면 저 구멍들은 모두 메워버리면 돼. 그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러면 안 된다고 말리는 앤에게는 그렇게 말했다.
다이애나는 앤에게 솔잎 쿠션을 선물해주었고 에이다 하비는 앤과 프리실라에게 공들여 장식한 멋진 쿠션을 하나씩 선물해주었다. 마릴라는 올 추수감사절에 쓰려고 둔 것이란 은근한 암시와 함께 잼이 잔뜩 든 큰 상자를 보내주었다. 린드 부인은 앤에게 누비이불을 보내주었는데, 한 장은 선물로 주고 나머지 다섯 장은 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네가 쓰도록 해라. 트렁크에 넣어 다락방에서 몇 달씩 좀 먹게 하는 것보다는 더 유용하게 쓰는 것이겠지.”
린드 부인은 그렇게 썼다.
하지만 린드 부인의 누비이불은 좀벌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좀약이 어찌나 진하게 배었던지 2주 동안이나‘패티네 집’과수원에 널어 냄새를 빼고 나서야 실내에서 쓸 만해졌다. 그 광경은 진정한 귀족 동네인 스포퍼드 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날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옆집의 늙은 백만장자가 찾아와 린드 부인이 앤에게 선물한 그 멋진 빨간색과 노란색 튤립 무늬 누비이불을 샀으면 한다고 했다. 자기 어머니가 생전에 그런 누비이불을 만들고는 했는데, 그걸 하나 갖고 있으면 어머니를 추억할 수 있어 기쁠 것 같다고 했다. 앤이 팔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실망했다. 앤은 그 얘기를 죄다 린드 부인에게 편지로 전했고, 사람 좋은 린드 부인은 너무나 흡족한 나머지 똑같은 누비이불이 하나 더 있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담배회사 사장도 그 누비이불을 갖게 되었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그의 아내를 곤혹스럽게 하면서까지 그것을 자기 침대에 깔았다.
린드 부인의 누비이불은 특히 겨울철에 아주 유용했다.‘패티네 집’이 장점도 많았지만 동시에 결함도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철이면‘패티네 집’은 몹시 추웠다.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밤이면 모두들 이 이불을 빌려준 린드 부인에게 감사하며 누비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앤은 처음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던 파란 방을 썼다. 프리실라와 스텔라는 큰 방을 택했고 필리파는 부엌에서 떨어진 비교적 작은 방에 만족해야 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아래층 거실 옆에 있는 방을 썼다. 고양이 러스티는 첫날 현관 문밖에서 잠을 자야 했다.
에이번리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난 후,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오던 앤은 사람들이 자기를 평소보다 더 유심히, 슬며시 미소까지 띤 채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왜 저러지? 내가 어디 이상한가, 모자가 삐뚤어졌나, 벨트가 풀어졌나? 뭐가 이상한지 찾아내려 목을 빼고 이리저리 살피던 앤의 눈에 러스티가 보였다.
앤의 발뒤꿈치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러스티는 앤이 이제까지 본 버림받은 고양이 중에서도 가장 가여운 꼴이었다. 새끼 고양이 시절은 예전에 지난 듯 보였고 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이 마른 몸에 얼굴도 몹시 보기 흉했다. 양쪽 귀 모두 약간잘려나갔고 한 눈은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턱뼈도 우습게 부어올라 있었다. 색깔로 말하자면 한때는 검은색이었던 고양이가 불에 완전히 그슬리면 바로 지금 이 꼴로 변할 것 같았다. 초라하고 빼빼 마른 고양이는 다리까지 질질 끌면서 앤을 따라왔다.
앤은 ‘쉬이’ 하고 쫓아도 보았지만 고양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앤이 가다 서면 고양이도 등을 둥글게 말고 앉아서 앤을 비난하듯 한쪽 눈으로 앤을 바라보았다. 앤이 다시 걷기 시작하면 고양이도 그 뒤를 따랐다. 결국 앤은‘패티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 고양이의 산책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앤은 고양이의 면전에서 문을 세차게 닫아버리고 이제 이 고양이를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된다고 안도했다. 하지만 15분쯤 지나 필리파가 문을 열었을 때 보니 초라한 갈색 고양이가 아직도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그 고양이는 문이 열리자마자 의기양양하게 앤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앤의 앞치마 위에 반쯤은 애원하듯 반쯤은 의기양양하게 누워 야옹거렸다.
“앤, 너, 그 고양이 키울 거니?”
스텔라가 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얘가 어디서부턴지 몰라도 집까지 날 따라왔어. 그냥 내칠 수가 없었어. 오,내려앉아. 난 점잖은 고양이가 좋지 너의 그 야수 같은 얼굴은 별로다.”
기분이 나빠진 앤이 말했다.
“이 고양이가 너를 골라잡은 것 같은데.”
프리실라가 웃었다.
“골라잡다니,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앤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 불쌍한 것이 배가 무척 고픈 모양이다. 뼈가 피부를 뚫고 나오겠어.”
프리실라가 측은한 듯 말했다.
“배불리 밥을 먹인 다음 돌려보내자.”
앤이 결심한 듯 말했다.
밥을 먹인 후 고양이를 다시 문밖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고양이는 여전히 문밖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불쑥뛰어 들어올 태세였다. 아무리 무관심하게 대해도 이 고양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기다 앤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고양이가 가여운 생각에 모두들 먹이는 챙겨주었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의 외모도 많이 달라졌다. 눈과 볼도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비쩍 마른 몸에도 살이 올랐으며 이제 스스로 자기 얼굴도 닦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이 고양이를 키울 수 없어.”
스텔라가 말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다음 주에 오실 텐데 사라라는 고양이를데려올거야. 고양이를 두 마리나 함께 키울 순 없다고. 그렇게 되면 낡은 코트 같은 털을 가진 이 녀석이 사라랑 온종일 싸움질을 할걸. 이놈은 싸움꾼으로 태어난 것 같아. 어젯밤에도 옆집 고양이하고 전투를 벌이더니 놈을 패배시키고는 짓밟고 놀려댔다고.”
“그러니까 저 고양이는 없애야 해.”
논란의 대상이 된 불쌍한 러스티를 바라보던 앤이 말했다. 러스티는 벽난로 앞 깔개 위에서 양처럼 순한 소리로 가르랑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없애지? 우리 아무런 힘도 없는 네 명의 여자가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는 고양이를 어떻게 없애버릴 수 있을까?”
“클로로포름을 쓰면 돼. 그게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야.”
필리파가 말했다.
“클로로포름을 좀 아는 사람 있어?”
앤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내가 알아. 클로로포름이야말로 내가 터득한 몇 안되는 쓸모 있는 일 중 하나지. 내가 집에서도 그걸로 고양이를 없애본 적이 있거든. 일단 아침에 고양이를 데려와서 아침밥을 많이 먹이는 거야. 그런 다음 삼베 주머니를 가져다가, 그건 저 뒤 베란다에 하나 있더라, 그 주머니에 고양이를 넣고 나무상자에 집어넣어.그러고는50그램 정도의 클로로포름이 든 병을 뚜껑을 연 채로 나무 상자에 넣어두는 거야. 그다음에는 나무 상자 뚜껑을 꽉 닫고 무거운 것으로 뚜껑을 눌러놓으면 돼. 그리고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고양이가 마치 잠자는 것처럼 평화롭게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을 거야. 죽은 거지. 고통도 없고 저항도 없이 말이야.”
“쉬운 일처럼 들리는데.”
앤은 여전히 기분이 뒤숭숭했다.
“정말 쉬워. 나한테 맡겨. 내가 잘해볼게.”
필리파가 앤을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그렇게 해서 클로로포름을 구했고, 다음 날 아침 러스티를 집 안으로불러들여아침을 배불리 먹였다. 맛있게 아침을 먹고 입맛을 다신 러스티는 앤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앤은 내심 마음이 무거웠다. 이 불쌍한 생명을 죽이는 데 어떻게 동조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러스티는 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르는데.
“여기, 데려가. 난 살인자가 된 것 같아.”
앤이 다급하게 필리파에게 말했다.
“괜찮아, 고통은 없을 거야.”
프리실라가 위로했지만 앤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숙명적인 사건은 뒤 베란다에서 이루어졌다. 그날은 아무도 그곳에 가려 하지 않았다. 석양이 질 무렵이 되자 필리파는 러스티를 땅에 묻어야 한다고 말했다.
“프리실라와 스텔라가 과수원에 땅을 파고 무덤을 만들어놓았으니 너는 나랑 같이 상자를 들고 가야 해. 나도 정말 이런 일이 싫어.”
필리파가 말했다.
두 명의 동조자는 머뭇거리며 뒤 베란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필리파는 상자 위에 올려놓았던 무거운 돌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갑자기 상자 속에서 희미하게야옹 하는소리가 들려왔다.
“얘가, 얘가 아직 안 죽었나 봐.”
앤은 너무 놀라 숨이 막혀왔다. 어지러운 듯부엌문앞 층계에 털썩 주저앉았다.
“틀림없이 죽었을 텐데.”
필리파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들리는 희미한 야옹 소리 때문에 고양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둘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이제 어떻게 해?”
앤이 물었다.
“왜들 안 오는 거야?”
그때 스텔라가 문가에 나타나며 물었다.
“무덤은 다 만들었는데, ‘어찌하여 이처럼 조용하고 모두들 말이 없느뇨?’”24)

스텔라가 장난스럽게 읊조렸다.
“‘오, 안 돼, 죽음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퍼붓는 빗소리처럼 들려오는구나.’”25)
앤도 상자를 가리키며 스텔라의 시구를 받아 읊조렸다.
갑작스럽게 두 사람의 웃음보가 터지면서 엄숙한 긴장감이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아침까진 얘를 그냥 놔둬야겠어. 거의 5분 동안이나 야옹거리지 않았으니 우리가 들은 소리는 죽어가며 낸 소린지도 몰라. 아니면 우리가 너무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잘못 들었거나.”
돌을 다시 상자 위에 올려놓으며 필리파가 말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다시 상자 뚜껑을 열자 러스티는 펄쩍뛰어올라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그러고는애정을 듬뿍 담아 앤의 얼굴을 핥아댔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로 똘똘 뭉친 고양이는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상자에 구멍이 있다. 왜 이것을 못 봤지. 그래서 죽지 않은 거구나.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것 같아.”
필리파가 신음소리를 냈다.
“아니, 아니야. 러스티가 다시 죽는 일은 없을 거야. 이제 내 고양이로 삼을래. 그러니 이제 모두 러스티에게 잘 대해주길 바랄게.”
갑자기 앤이 끼어들었다.
“오, 그래. 제임시나 아주머니와 사라와 잘 지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할게.”

스텔라가 허공에 대고 지금까지의 모의에서 물러나겠다는 듯 손을 씻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이제 고양이 러스티도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뒤 베란다에 놓인 쿠션 위에서 잠을 잤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도착할 때쯤엔 러스티는 토실토실 살이 붙고 윤기가 흘러 여느 고양이 못지않은 외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키플링의 고양이26)처럼 러스티도 항상 혼자 다녔다. 러스티의 걸음걸이는 다른 고양이의 발에 거치적거렸고, 다른 고양이의 걸음걸이도 러스티에겐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러스티는 스포퍼드 가의 귀족적인 고양이들을 하나하나 제압해나갔고 사람은 오직 앤만을 사랑했다. 앤만을. 아무도 감히 러스티를 쓰다듬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러스티의 성난 으르렁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런 일을 당한 사람도 러스티 못지않게 화가 나 같이 으르렁댔다.
“저 고양이의 태도는 정말 참을 수 없어.”
스텔라가 말했다.
“하지만 러스티는 멋진 고양이야. 정말 그래.”
러스티를 꼭 껴안으면서 앤이 말했다.
“글쎄, 러스티와 사라가 얼마나 사이좋게 지낼지 모르겠다. 한밤중에 과수원에서 고양이들이 서로 싸워댄다면 그것만큼 끔찍스러운 일은 없을 거야. 하물며 거실에서 싸우는 꼴은 상상도 못 하겠다.”
스텔라는 회의적이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예정한 날짜에 정확하게 도착했다. 앤과 프리실라, 필리파는 어떤 노부인이 나타날지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자리를 잡자마자 모두들 단번에 아주머니를 좋아하게 되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작은 체구에 얼굴도 작고 부드러운 삼각형 모양이었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푸른 눈은 그 무엇도 자기의 젊음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듯 빛이 났으며 마치 소녀의 눈처럼 꿈이 가득했다. 볼은 발그스레하고 눈처럼 하얀 머리는 양쪽 귀 뒤로 특이하게 부풀려 말아 올렸다.
“이건 아주 구식 뜨개질법이지.”
석양 녘의 구름처럼 우아한 분홍색 옷을 열심히 짜면서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내가 구식이다 보니까, 내가 입은 옷들도 그래. 또 내 생각도 구식이란 걸 입증해주는 것이기도 하겠지. 이런 옷이 요즘 유행하는 옷보다 더 낫다고 할 순 없지. 사실 훨씬 더 못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이것이 편하고 좋아. 새 신발은 헌 신발보다 멋있지만 그래도 오래 신은 신발이 발에는 더 편안한 법이잖아. 난 신발이나 의견이나 모두 내 방식을 고집해도 좋을 만큼 나이를 먹었어. 내 말은 난 여기서도 모든 일을 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지내겠다는 거야. 너희들은 내가 너희들을 돌봐주고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주기를 바랄지 모르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야. 너희들도 각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잖아.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한은 그런데.”
제임시나 아주머니의 생기 넘치는 눈이반짝거렸다.
“아니라면 모두 각자 제 방식대로 살아서 모든 걸 망쳐버릴 수도 있겠지.”
“누가 저 고양이들 좀 떼어놓을 수 없겠니?”
스텔라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애원하듯 말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데려온 것은 고양이 사라뿐이 아니었다. 조지프도 데려왔다. 조지프는 제임시나 아주머니의 친한 친구가 기르던 고양이인데 친구가 밴쿠버로 떠나는 바람에 데려오게 되었다고 했다.
“조지프를 데려가지 못하니 나더러 돌봐달라고 간청하더구나. 그러니 내가 어떻게 딱 잘라 거절할 수 있었겠어. 조지프는 아주 잘생긴 수고양이야. 성격도 아주 좋지. 털 색깔이 다양해서 조지프라고 부른단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고양이에 넌덜머리를 내는 스텔라의 말을 빌리면 조지프는 걸어 다니는 누더기 같다고 했다. 조지프의 털이 원래 무슨 색인지 구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27)다리는 하얀 바탕에 검은색 점이 박혔고, 등은 회색 바탕에 한쪽은 노란색 털이고 또 다른 쪽은 검은색 털이었다. 꼬리는 노란색이지만 꼬리 끝은 또 회색이었다. 한쪽 귀는 검은색, 다른 쪽 귀는 노란색이었고, 또 한쪽 눈만 검은 털로 덮인 모습은 몹시 험한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실제로 조지프는 온순하며 사람을 잘 따랐다. 더군다나 사람에게 거치적거리는 일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 만약 조지프가 고양이가 아니라 다른 피조물이었다면 들판의 백합28)같았을 것이다. 혼자 뱅글뱅글 맴도는 일도 없었고, 쥐를 잡으려는 수고도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든 영화를 누린 솔로몬이라 할지라도 부드러운 잠자리를 택하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을 탐하지 않았다.29)
조지프와 사라는 각각 다른 상자에담겨서속달 우편으로 도착했다. 상자에서 나와 밥을 먹은 조지프는 마음에 드는 쿠션을 골라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사라는 느긋하게 벽난로 앞에 앉아서 얼굴을 핥았다. 제임시나 아주머니의 세탁 일을 해주던 사람이 준 고양이 사라는 키가 크고 날씬했으며 회색과 흰색이 섞여 있는 고양이였는데 자존심이 너무 세다 보니 자신이 평범한 고양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 하는 것 같았다.

“얘 이름은 사라야. 하지만 우리 남편은 항상 고양이 사라라고 불렀지. 이제 8살이 되었고, 쥐도 잘 잡는단다. 하지만 걱정 마라, 스텔라. 사라는 절대 싸우는 법이 없고, 조지프는 아주 가끔씩만 싸운단다.”
“아마 이곳에선자기방어를 하느라 열심히 싸워야 할걸요.”
스텔라가 말했다.
바로 그때 나타난 러스티! 즐겁게 방을 반쯤 달려오다 난데없는 침입자들을 발견하고는 제자리에 우뚝서버렸다. 꼬리를 제 두께의 세 배는 될 때까지 부풀리더니 등을 둥글게 말아 등 털을 곧추 세웠다. 그다음엔 머리를 낮추고 공격 자세를 취하더니 증오심을 가득 담은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사라에게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고고한 사라도 얼굴 씻던 동작을 멈추고 러스티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러고는경멸스럽다는 듯 그 강력한 앞발로 달려드는 러스티를 향해 정면으로 내리쳤다. 러스티는 깔개 위에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방금 내 귀를 강타한 저놈은 대체 뭐야? 러스티는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사라를 바라보았다. 저놈이 그랬단 말인가? 다시 공격을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사라는 러스티를 무시하듯 몸을 홱 돌리고는 다시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러스티는 공격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절대로 사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사라가 모두를 지배했다. 러스티는 절대 사라를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지프는 지각없이 벌떡 일어나서 하품을 했다. 러스티는 자기가 입은 모욕감을 설욕하려고 온몸으로 조지프를 덮쳤다. 하지만 본성이 온순한 조지프도 경우에 따라서는 싸움을 했고 또 잘 싸웠다. 둘의 싸움은 쉬이 끝나지 않았고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렸다.

앤은 러스티를 떼어냈고 스텔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조지프를 말렸지만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냥 싸우게 내버려두어라. 한참 싸우고 나면 서로들 친해질 거야. 조지프도 운동을 좀 해야 해. 점점 더 살이 찌고 있잖니. 그리고 러스티도 세상에 저 혼자만 사는 건 아니란 걸 좀 배워야 한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싸움을 용인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조지프와 러스티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명백한 적에서 친구로 돌아섰다. 이제 둘은 앞발을 서로에게 갖다 대고 같은 쿠션에서 잠을 잤으며 아주 친한 척 상대의 얼굴을 핥아주었다.
“우리 모두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나 봐. 나도 설거지랑 마루 청소하는 법을 배웠으니 말이야.”
필리파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고양이에게 클로로포름을 어찌 쓰는 건지 알고 있는 것처럼 꾸밀 필요는 없었어.”
앤이 웃었다.
“아니야, 그건 구멍이 나 있어서 실패한 거야.”
필리파가 반박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둘을 탓하듯 말했다.
“구멍이 있어 다행이었지 뭐냐. 새끼 고양이는 확실히 물에 빠뜨려 죽여야 해. 안 그럼 온 세상이 고양이 천지가 되어버릴 테니까. 하지만 다 자랐고 행실도 나쁘지 않은 고양이를 죽이는 건 잘못이야. 달걀을 훔쳐 먹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주머니,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러스티를 보셨더라면 러스티가 행실이 착한 고양이라는 생각은 못 하셨을 거예요. 아무리 봐도 늙은 닉30)같았다니까요.”
스텔라가 끼어들었다.
“늙은 닉은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못생겼으면 못된 짓을 일삼고 다닐까. 내 생각에 늙은 닉은 항상 멋진 신사의 모습을 하고 다닌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24. 영국 시인 바이런(George Gorden Byron, 1788∼1824)의 <그리스 섬들(The Isles of Greece)> 8연 1행.
25. <그리스 섬들(The Isles of Greece)> 8연 2~3행.
26. 《정글북》을 쓴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의 《혼자 다니는 고양이(The Cat that Walked by Himself)》.
27. 구약성서에 야곱이 요셉(조지프)을 아이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여 ‘여러 가지 빛깔로 옷을 만들어주었다’고 쓰여 있다. ‘조지프’에는 망토 달린 외투라는 뜻이 있다.
28. 마태복음 6장 28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29. 마태복음 6장 29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악마의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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