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37~38

나단비 | 2024.03.29 13:39:26 댓글: 0 조회: 68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278
37
학사가 되다





필리파가 끙끙거렸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지금이 내일 밤이든지.”
“네가 오래 살다 보면 그 소원도 이루어지는 날이 오겠지.”
앤이 차분하게 말했다.
“너는 그렇게 편안한 소리가 나오겠지. 철학을 아주 잘하니까. 하지만 난 아냐. 내일 있을 그 끔찍한 시험 생각만 하면, 난 온몸이 다 움찔거려. 내가 만일 시험에 실패하면 조가 뭐라고 할까?”
“넌 실패 안 해. 오늘 그리스어 시험은 어땠어?”
“모르겠어. 아마 시험은 잘 봤겠지. 아니면 호머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올 만큼 잘못 썼던가. 공책을 보면서 너무 골똘히 생각을 했더니 나중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머리가 백지가 되어버리더라. 아, 이 시험 집행이 모두 끝나면 이 연약한 필리파가 얼마나 기쁠까.”

“시험 집행?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말을 만들어내면 안 되나?”
필리파가 대꾸했다.
“말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그냥 생겨나 자라는 거지.”
앤이 말했다.
“어쨌거나. 시험 때문에 괴롭기는 하지만 저 멀리 희미하게나마 맑은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어. 얘들아, 레드먼드에서의 생활이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 알고 있니?”
“아니, 난 실감이 안 나. 프리실라와 내가 레드먼드의 북적이는 신입생들 틈에 외롭게 서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가 벌써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있는 4학년이라니.”
앤이 슬픈 듯이 대답했다.
“‘능력 있고 현명하며 존경받는 4학년이여!’ 우리가 정말 레드먼드에 처음 왔을 때보다 더 현명해진 걸까?”
필리파가 읊조렸다.
“때로는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행동하지.”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주머니, 우린 대체적으로 착한 여학생들 아니었던가요? 아주머니가 우리들을 돌봐주신 3년 동안요?”
필리파가 호소하듯 말했다.
“너희 넷은 가장 착하고,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주머니는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었다.
“너희가 분별력을 얻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으련다. 물론 그래서도 안 되지. 하지만 분별력은 경험으로 얻는 거란다. 그리고 경험이란 대학 공부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지. 너희들은 대학교육을 4년이나 받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경험은 너희 젊은 아가씨들보다 내가 훨씬 더 많아.”

“정해진 법칙대로 통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고,
배워야 할 것도 참으로 많도다.
경험은 대학에서 얻을 수 없는 것,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 많기도 하여라.”

스텔라가 읊조렸다.
“죽은 언어와 수학, 그런 쓰레기들 말고 레드먼드에서 뭘 배웠니?”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물었다.
“우리는 우둘레이 교수님이 마지막 수업시간에 말씀해주신 진리를 배웠지요. ‘유머는 인간의 삶을 즐겁게 하는 가장 효과 좋은 향신료다. 실수를 보고 웃되, 실수에서 배워라. 고통을 농으로 삼되 그것을 이길 힘을 얻어라. 고난을 즐기되 그것을 극복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이런 것들은 배울 가치가 충분한 거 아닌가요, 아주머니?”

필리파가 말했다.
“당연히 배울 가치가 있지. 너희들은 진정으로 웃어야 할 일에 웃어야 한다. 웃어서 안 되는 일에 웃어서는 안 돼. 그래야 이해심과 지혜를 가진 거야.”
“앤, 넌 레드먼드에서 4학년 동안 뭘 배웠다고 생각해?”
프리실라가 옆에서 속삭이듯 물었다.
“난, 난 작은 어려움은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고 큰 고난은 승리의 전조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그게 바로 내가 레드먼드에서 배운 거야.”
앤이 천천히 말했다.
“난 우둘레이 교수님이 우리에게 해준 다른 말씀을 들어 레드먼드가 내게 뭘 가르쳐주었는지 말할게. 교수님이 연설에서 말씀하신 거 기억나니? ‘세상에는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일들이 널려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것에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그리고 우리 손으로 그것을 주워 올릴 수만 있다면. 그 기회는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고, 예술과 문학을 가리지 않으며, 세상 어느 곳에도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할 일은 너무나 많다.’ 난 바로 그런 것을 레드먼드에서 배웠다고 생각해.”
프리실라가 말했다.
“너희들 말을 들어보니, 골자는 너희들이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인 것 같다. 천성적인 진취력과 배우려는 의지만 갖추어져 있다면 말이다. 대학 4년은 일상생활에서 20년 동안 배워야 할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곳이다. 그것이 바로 대학이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전에는 대학이 하는 일이 도대체 뭔가 하고 항상 의구심을 가졌지.”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럼 천성적인 진취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아주머니?”
“그런 사람은 배울 수 없어. 대학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백 년을 산다 해도 태어날 때 가졌던 수준 이상 발전할 순 없을 거다.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운이 없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우리처럼 진취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신께 감사드려야 해.”
“그럼 진취력은 정확하게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필리파가 물었다.
“글쎄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진취력이 있는 사람은 그게 뭔지 알고 있겠지. 없는 사람은 그게 뭔지 전혀 모를 테고. 그러니까 정의 같은 건 필요 없는 것 아니겠니.”
하루하루가 바삐 흘러갔고 시험도 끝났다. 앤은 영어에서 최고 성적을 받으며 졸업하게 되었고, 프리실라는 고전문학에서, 필리파는 수학에서 우등 졸업생의 영예를 안았다. 스텔라는 모든 과목에서 고루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드디어 졸업식 날이 왔다.
“오늘이야말로 내가 전에 ‘일생의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런 날이야.”
앤이 로이가 보낸 바이올렛을 상자에서꺼내 들며아련한 눈빛으로 말했다. 앤은 그 꽃을 들고 있을 작정이었지만, 웬일인지 눈은 자꾸만 다른 상자로 쏠렸다. 은방울꽃이 가득 든 상자였다. 6월이면 초록 지붕 집에 피어나는 은방울꽃처럼 신선하고 진한 향기가 났다. 상자 옆에는 길버트 블라이드가 보내온 카드가 놓여 있었다.

앤은 길버트가 왜 졸업식 날 자기에게 꽃을 보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난겨울에는 길버트를 거의 보지 못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서는 딱 한 번 금요일 오후에‘패티네 집’을 찾아왔었고, 다른 곳에서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앤은 길버트가 우등 졸업생과 쿠퍼 상금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길버트는 레드먼드의 사교 모임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앤은 활기차게 여러 사교 모임에 참석하면서 즐겁게 겨울을 보냈다. 가드너 집안사람들과도 자주 만났고 도로시와는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학교 내에서는 모두들 앤과 로이가 곧 약혼을 발표하리라고 믿었다. 앤도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앤이 졸업식을 위해‘패티네 집’을 막 떠나려는 순간, 앤은 로이의 바이올렛을 던지듯이 휙 내려놓고 대신 길버트가 보내온 은방울꽃을 손에 들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앤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토록 열망했던 꿈을 이루는 그날, 왠지 옛 에이번리의 생활과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그곳에서 꾸었던 꿈들이 더 친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앤과 길버트는 예전에 대학 졸업식장에서 멋진 가운과 학사모를 쓰게 될 날을 함께 꿈꾸었다. 그런 날이 정말로 왔고, 그곳에 로이의 바이올렛이 차지할 공간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함께 꿈꿔 온 그 오랜 꿈의 열매를 축하하는 자리에는 옛 친구가 보내온 꽃다발이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다.
그 후 오랫동안 앤은 이날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날 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새겨진 기억은 근엄한 레드먼드 학장이 앤에게 학사모를 씌워주고 학위증을 수여하면서 앤을 학사로 호명한 그숨 막히는순간이 아니었다. 앤이 들고 있는 은방울꽃을 바라보는 길버트의 강렬한 눈빛도, 단상으로 올라서면서 본 로이의 알 수 없는 고통의 눈길도 아니었다. 물론 앨린 가드너의 예의를 차린 축하의 말도 도로시의 열렬하고 아이다운 축하와 행운을 빌어주는 말도 아니었다. 뭐라고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까닭 모를 아픔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이날의 기분을 망쳤고, 희미하지만 오래도록 남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그날 밤 문과대 졸업생들을 위한 댄스파티가 열렸다. 앤은 평소에 즐겨 걸던 진주 목걸이를 제쳐놓고 트렁크에서 예전 크리스마스 날에 선물로 받았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상자 안에는 실 같은 금색 줄에 작은 핑크빛 에나멜 하트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상자 안에 든 카드에는 ‘항상 행운이 함께하길 바란다. 너의 오랜 친구, 길버트.’라고 적혀 있었다. 에나멜 하트 모양을 보면서 앤은 옛날 기억을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길버트가 앤을 ‘홍당무’라고 부르고는 화해의 표시로 분홍색 하트 모양의 사탕을 주었지만 앤이 무시해버렸던 기억이었다. 앤은 길버트에게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적은 쪽지를 전했지만 한 번도 그것을 목에 건 적은 없었다.오늘 밤앤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길버트의 선물을 하얀 목에 걸었다.
앤은 필리파와 함께 레드먼드까지 걸어갔다. 앤은 말없이 걸었고 필리파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아까 들었는데, 길버트 블라이드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오늘 약혼 발표를 한대. 졸업식이 끝나는 대로 할 거라던데. 앤, 너 뭐 들은 말 없니?”
필리파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아니.”
앤이 답했다.
“내 생각엔 이번엔 진짜인 거 같아.”
필리파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앤의 얼굴은 붉게 타올랐다. 앤은 목깃 안으로 손을 넣어 길버트가 준 목걸이를 만져보았다.그러고는목걸이를 힘주어 잡아당겨 버렸다. 끊어진 목걸이를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 앤의 손은 떨렸고 눈은 따끔거렸다.
그날 밤 모두들 흥겹게 파티를 즐겼지만 앤만큼 즐겁게 춤을 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버트가 춤을 신청하러 다가오자 미련이라고는 없이 신청자가 너무 많아 길버트와는 춤을 출 수 없노라고 차갑게 거절해버렸다. 그날 밤‘패티네 집’에 모인 처녀들은 모두들 타다 남은 벽난로 불빛 앞에 둘러앉아 공단처럼 부드러운 피부에 남아 있는 봄밤의 한기를 녹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밤 파티의 여신 앤보다 더 쾌활하게 떠들며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가 나간 다음 무디 스퍼전 맥퍼슨이 여기 왔었다.”
난로 앞에서 사그라지는 불꽃을 살리며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졸업 댄스파티가 있는지 몰랐다고 하더라. 그 젊은이는 잘 때 머리에 고무줄을 감고 자야 귀가 더튀어나오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사귀던 남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 방법으로 많이 좋아졌어. 내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고, 그는 내 충고대로 했지.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은 평생 나한테 화를 냈고 나를 용서하지도 않았다.”
“무디 스퍼전은 생각이 무척 많은 청년이에요. 아마 자기 귀보다는 더 심각한 문제들에 신경을 쓸 거라고요. 목사가 되려고 하거든요.”
프리실라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음, 난 하느님이 사람의 귀 모양에 신경 쓰시는 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무디 스퍼전을 조롱하는 말을 자제하고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진지하게 말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아직 목사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도 성직자라면 누구에게나 적당한 존경을 표하는 사람이다.



38
깨져버린 환상





린드 부인이 빌려주었던 누비이불을 상자에 넣어 끈으로 묶으면서 앤이 말했다.
“생각 좀 해봐, 다음 주면 난 에이번리에 가 있게 돼! 너무 기분 좋은 일이지! 하지만 또 일주일만 지나면‘패티네 집’과는 영영 이별을 고해야 하는구나. 그건 너무 끔찍해!”
“우리들 웃음의 망령이 미스 패티와 마리아의 꿈속에 나타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필리파가 말했다.

미스 패티와 마리아는 사람이 살 만한 땅은 거의 다 밟아본 후 이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5월 둘째 주에 집으로 가요. 카르나크 신전을 보고 난 지금은‘패티네 집’이 예전보다 더 작아 보이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난 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이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고 무척 기뻐요. 늘그막에 이르러 여행을 나서면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에 집착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게 돼요. 도를 지나치게 되는 거지요. 그나저나 마리아가 일상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네요.

“앞으로 이 방에 살게 될 사람을 위해 내 환상과 꿈은 여기 남겨두고 떠나야겠어.”
앤은 자기가 지내던 파란 방을 아련한 눈빛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3년 동안 그토록 행복하게 지냈던 이 예쁜 파란 방. 앤은 기도를 올리려고 창가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 몸을 앞으로 기울여 창 너머 소나무 숲 뒤로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가을비가 후드득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창턱에 앉은 울새를반겨주었다. 앤은 자기의 오랜 꿈이, 즐거워했고 슬펐고 울고 웃었던 이 방을 영원히 떠난다 해도,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어떤 부분은 여기 영원히 남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생각에는 어떤 사람이 꿈꾸고 슬퍼하기도 하고 즐거워하며 살았던 방은 저절로 그 사람의 성품이 고스란히 그 방에 배어들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50년 후에 이 방에 다시 들어온다 해도 이 방은 아마 나에게 ‘나, 앤이야, 앤.’ 하고 말을 걸어줄것 같아. ‘우리 이 방에서 참 즐겁게 지냈지!’ 하고. 그동안 나누었던 이야기, 농담, 친구들과의 멋진 모임! 이런, 세상에! 난 이제 6월이면 조와 결혼하는구나. 정말 날아갈 듯 행복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이 아름다운 레드먼드 생활이 계속되었으면 싶어.”
필리파가 말했다.
“나도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여기서의 생활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심정이야. 앞으로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기쁨이 찾아온다 해도 우리가 이곳에서 살며 누렸던, 맘껏 즐기며 자유롭던 생활만큼은 아닐 거야. 영원히 끝났어, 그렇지 필?”
앤도 필리파와 같은 심정이었다.
“러스티는 어떻게 할 거예요?”
특별대우를 받는 러스티가 어슬렁어슬렁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필리파가 물었다.
“조지프랑 사라와 함께 집으로 데려가야지. 이제 다들 같이 사는 법을 배웠는데 떼어놓을 수 없잖니. 고양이나 사람이나 함께 사는 법을 익힌다는 게 좀 어려운 일이니.”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러스티를 바라보며 말했다.
“러스티와 헤어지려니 너무 섭섭해요.”
앤이 안타까운 듯 말했다.
“하지만‘초록 지붕 집’에 데려갈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죠. 마릴라 아주머니는 고양이를 싫어하시고 데이비는 러스티를 괴롭힐 거예요. 그리고 저도 집에 오래 머무를 것 같지 않고요. 서머사이드 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와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그럼 수락할 거니?”
필리파가 물었다.
“글쎄, 아직 결정하진 않았어.”
앤은 혼란스러운지 얼굴이 흐려졌다.

필리파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가 어떤 말을 꺼낼 때까지는 당연히 앤의 앞날은 정해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로이가 곧 결정을 내리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일단로이가 ‘나와 결혼해주겠소?’ 하는 얘기를 꺼내면, 앤은 ‘그래요.’ 하고 승낙하리라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앤은 로이와의 관계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앤은 로이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진정이었다. 이 사랑은 앤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기는 했다. 하지만 앤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혹시 삶의 일부도 상상에서 나온 것이면 어쩌지? 이것이 어린 시절 겪었던 다이아몬드의 환상과 같은 것이면 어쩌지? 앤은 다이아몬드를 상상할 때마다 항상 보랏빛 환희를 떠올렸으나 진짜로 본 다이아몬드는 기대와는 달랐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앤은 생각했다. 하지만 로이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고, 비록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은 없다 해도 둘이 함께라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로이가 찾아와 공원으로 산책을 가자고 했을 때‘패티네 집’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감했다. 모두가 무슨 얘기가 나올지 정확하게 알거나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앤이 어떻게 대답할지도 알았다.
“앤은 참 복도 많지.”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로이는 너무 멋진 사람이죠. 하지만 사실 그 사람에게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요.”
어깨를 으쓱하며 스텔라가 말했다.
“글쎄, 그 말은 질투심에서 하는 말 같은데, 스텔라 메이너드.”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꾸짖듯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전 앤에게 질투 같은 거 없어요. 전 앤이 너무 좋고 또 로이도 좋은 사람인걸요. 사람들이 다 두 사람이 멋진 한 쌍이라고 하잖아요. 천생연분이라고.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요, 아주머니.”
로이는 비 오던 날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항구 가까이의 작은 정자에서 앤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앤은 로이가 그 장소를 택한 것도 무척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로이가 자기에게 청혼하려고 한 말도 모두 어디서 베낀 것처럼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루비 길리스의 남자 중 한 사람은 정말 ‘구혼과 결혼’ 편에 나온 청혼을 그대로 베끼기도 했다. 로이의 청혼은 전체적으로흠잡을데가 없었다. 또한 거기에는 로이의 진심이 담겼다. 분명 진심이었다. 전체적인 음악에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음조 같은 것은 없었다. 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율이 훑고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앤은 그 순간 이상할 정도로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로이가 조용히 앤의 답을 기다려서 앤은 드디어 운명적인 말을 하려고 입술을 열었다. 바로 그때, 앤은 낭떠러지에서 뒤로 주춤 물러날 때처럼 온몸이 떨려왔다. 앤에게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번쩍거리는 자각의 섬광이 비쳤다. 지금까지 살면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한꺼번에 깨닫게 해주는 눈부신 섬광이었다. 앤은 로이에게서 조심스레 자기 손을 빼냈다.
로이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멍해져 버린 얼굴이 바보처럼 보였다. 앤이 승낙하리라고 확신한 것은 로이의 잘못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요?”
로이는 중얼거렸다.
“당신과 결혼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앤은 필사적으로 한 번 더 말했다.
“결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안 되겠어요.”
“왜 안 된다는 거요?”
로이가 조용히 물었다.
“왜냐하면, 결혼할 만큼 당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한 줄기 붉은 빛이 로이의 얼굴을 타고 지나갔다.
“그럼 지난 2년 동안 나를 놀렸단 말이오?”
로이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난처해진 앤은 숨이 막혔다. 로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당신은 내 인생을 망치는군!”
로이가 비통하게 말했다.
“용서해주세요.”
애절하게 간청하는 앤의 얼굴은 붉었고 눈은 쑤시는 듯 아팠다.
한동안 로이는 몸을 돌려 바다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다시 앤을 향해 선 로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럼 나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는 거요?”
로이가 물었다.
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가요. 난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이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누구를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지. 당신은 내가 지금까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였어. 그러니 당신이 내게 보여준 우정에라도 감사해야겠지. 그럼, 잘 지내요, 앤.”
“안녕히.”
앤의 말끝이 흐려졌다. 로이가 떠난 후에도 앤은 그 정자에 한참 동안 앉아서 서서히 항구를 덮어오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는 곧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항구를 완전히 감추어버렸다. 앤은 자기 자신에게 비난과 경멸을 퍼부었다. 굴욕의 파도가 앤을 덮쳤다. 하지만 가슴 저 밑바닥에서는 새로 찾은 자유에 묘한 기쁨이 샘솟았다.
황혼이 질 무렵, 앤은 조용히‘패티네 집’으로 돌아와 자기 방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필리파가 파란 방 창가에 앉아 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만.”
앤이 필리파가 무엇을 물을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잠깐, 내가 하는 말을 먼저 들어봐, 필. 로이가 내게 결혼하자고 했고, 난 거절했어.”
“뭐? 너, 네가 거절했다구?”
필리파는 아연실색했다.

“그래.”
“앤 셜리 너, 제정신이니?”
“그래, 난 제정신이야. 그러니 제발 꾸짖지 마. 넌 날 이해 못 해.”
“그럼, 당연히 이해 못 하지. 넌 지난 2년 동안 로이 가드너에게 희망을 줬어.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그 사람을 거절했다고 말하는 거니, 지금 2년 동안 그 남자와 실컷 놀아났으면서, 앤. 널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그와 놀아난 게 아니야.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난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었어. 그런데 그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그럼 넌 그 사람의 돈을 보고 결혼하려 했는데, 그래도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고 말하는 거니?”
“아니야, 난 그 사람 돈 따윈 아무 관심도 없어. 로이에게도 설명 못 했지만 너에게도 설명 못 하겠다.”
“넌 로이에게 너무 큰 굴욕감을 줬어. 그는 잘생기고, 영리하고 또 부자야. 더구나 착한 사람이야. 도대체 뭘 더 원하는 거니?”
필리파는 격앙되어 소리쳤다.
“난 나에게 맞는 사람을 원해. 그는 나랑 맞는 사람이 아니야. 난 처음엔 그 사람의 잘생긴 외모와 낭만적인 칭송의 말에 정신을 잃었고 나중에는 그 사람이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내 이상형이라 믿고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한 거였어.”
“내 마음을 모르는 나도 나쁘지만, 넌 나보다 더 나빠.”

필리파가 말했다.
“난 내 마음을 알고 있어. 문제는, 마음이 바뀐다는 거고, 일단 마음이 바뀌고 나면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거야.”
앤이 반박했다.
“그럼 너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네.”
“그래, 난 지금 안개 속에 있어. 이번 일로 지나간 모든 추억이 다 엉망이 된 거야. 이제 레드먼드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 저녁의 이 비참한 기분이 떠오르겠지. 로이는 나를 경멸하고, 너도 나를 경멸하고 그리고 나 자신도 날 경멸해.”
“가여운 앤. 이리 와, 내가 안아줄게. 내가 너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있겠니. 나도 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알렉이나 알론조와 결혼했을 텐데. 현실에선 왜 이렇게 모든 게 엉망진창일까. 현실은 소설에서처럼 항상 명확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지가 않아.”
“내가 살아 있는 한 아무도 내게 청혼 같은 건 안 했으면 좋겠어.”
앤은 흐느꼈다.
앤의 말은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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