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7~8

나단비 | 2024.03.30 17:57:26 댓글: 0 조회: 67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598
7





따뜻한 12월 말의 어느 금요일 저녁, 앤은 칠면조 만찬회에 초대를 받아 로우벨에 갔다. 수업이 끝난 후 로우벨에 있는 큰아버지 집에 사는 윌프레드 브라이스가 자기하고 함께 교회의 칠면조 만찬회에 갔다가 토요일은 자기 집에서 보내자고 수줍게 청했기 때문이었다. 앤은 윌프레드를 계속 학교에 다니게 해달라고 큰아버지를 설득해볼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의 청에 응했다. 앤은 윌프레드가 영리하고 야망도 있는 아이라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새해에는 학교를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앤은 그렇게 윌프레드의 큰집을 방문하게 되었지만 아끼는 제자를 기쁘게 해주었다는 것 외엔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윌프레드의 큰아버지와 큰엄마는 좀 별나고 무례한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토요일 아침에는 바람이 불고 눈발까지 흩날렸다. 처음에 앤은 그날 하루를 어찌 보내야 할지 암담한 기분이었다. 전날 칠면조 만찬회에 늦게까지 있었기 때문에 피곤하고 졸리기도 했다. 윌프레드는 타작 일을 도와야 했다.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책 한 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 2층 복도 구석에서 본 낡은 선원용 궤짝 생각과 함께 스탠턴 부인의 부탁도 생각이 났다. 스탠턴 부인은 프린스 주의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어서 옛날 일기나 서류 같은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보면 알려달라고 했었다.

“물론 프링글 집안이 그런 자료를 많이 갖고 있겠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도움을 구할 수 없어요. 프링글과 스탠턴은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으니까요.”
부인은 앤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안타깝게도 저 역시 그들에게는 부탁할 수가 없네요.”
앤도 말했다.
“오, 선생님에게 부탁해달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원하는 건 어디든 방문했을 때 눈에 띄는 게 있거나 들은 게 있다면 내게 알려주고 혹시 오래된 일기장이나 지도 같은 걸 보게 되면 나를 위해 좀 빌려다 달라는 거죠. 오래된 일기장에서 어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지도모르잖아요. 대수롭잖은 일상의 단편 덕분에 옛날 개척자들의 새로운 생활상을 발견할 수도 있고요. 통계와 족보에만 그런 물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내 책을 위해서도 필요해요.”
앤은 브라이스 부인에게 혹시 그런 오래된 물건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지만 브라이스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건 없어요.” 이어 부인의 얼굴이 곧 밝아지며 “아, 앤디 삼촌의 물건들이 저기 있기는 한데, 그 안에 뭔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에이브러햄 프링글 선장과 함께 배를 탔으니까요. 내가 가서 던컨에게 선생님이 뒤져봐도 될 물건인지 물어보죠.” 하고 덧붙였다.
던컨은 앤이 뒤져도 될 뿐 아니라 쓸 만한 걸 찾으면 가져도 좋다고까지 했다. 그 궤짝 안에 든 것을 전부 다 태워버리고 궤짝은 연장통으로 쓰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앤은 그 짐을 뒤져봤지만 찾아낸 것이 라고는 앤디 브라이스가 배를 타던 시절 적은 것으로 보이는 오래되어 누레진 일기장인지 항해일지인지가 전부였다. 앤은 눈보라가 치는 그날 오전 내내 앤디의 일기장을 흥미진진하게 읽으며 보냈다. 앤디는 바다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았고 에이브러햄 프링글 선장과 함께 수없이 항해에 나섰던 것으로 보였다. 일기장에는 철자와 문법은 엉망이었지만 선장에게는 찬사로 가득했다. 용기 있고 어려움에 직면해서는 훌륭한 기지를 발휘했으며 희망봉을 도는 일과 같은 어려운 위업을 달성한 훌륭한 선장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다른 배의 선장이었던 에이브러햄 선장의 동생 마이럼까지는 존경하지 않았던 듯했다.

‘오늘 밤엔 마이럼 프링글한테 다녀왔다. 마이럼은 부인에게 마구 화를 내며 부인 얼굴에 물을 끼얹어버렸다.’

‘마이럼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자기 배가 불타버려 모두들 보트를 타고 구조선을 기다렸다. 거의 굶어 죽게 되자 그들은 스스로 총을 쏘아 목숨을 끊은 조너스 셀커크를 먹어치웠다. 그들은 메리 G 호에 의해 구조될 때까지 그를 먹으며 연명했다. 이 일은 마이럼이 자기 입으로 말해주었다. 그는 이 일을 무슨 농담처럼 얘기했다.’

이 마지막 일기를 읽으며 앤은 몸을 떨었다. 이런 잔혹한 사실을 앤디가 무감각하게 적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소름 끼쳤다. 그런 다음 앤은 생각에 잠겼다. 이 일기장이 스탠턴 부인에게 소용 있을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미스 사라와엘런은 숭배하는 아버지의 일이 적힌 이 일기장에 관심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것을 두 사람에게 보내면 어떨까? 던컨 브라이스는 이것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무엇 때문에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그렇지 않아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만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더부추긴단 말인가.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나를 내쫓을 수 있을지만 궁리하고, 또 거의 성공을 거두고 있지 않은가. 그 두 사람과 그 일가로부터 내가 얼마나 당하기만 했는데.
그날 저녁때 윌프레드는 앤을 ‘윈디 포플러’로 바래다주었다. 둘 다 만족스러웠다. 앤은 윌프레드를 계속 학교에 보내겠다는 던컨 브라이스의 약조도 받았다.
“앞으로 학교를 마치면 어떻게든 퀸스 전문학교를 1년 동안 다녀보겠어요. 그다음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혼자서 공부를 할 거예요. 선생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큰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셜리 선생님은 좋아해요. 큰아버지가 헛간에서 ‘난 옛날부터 빨간 머리 여자가 시키는 건 뭐든 다 했어.’ 하고 말씀하셨는걸요. 하지만 선생님 머리 색깔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생님 머리는 무척 아름답긴 하지만 그냥 선생님이기 때문이죠.”
윌프레드는 말했다.
새벽 2시에 잠이 깬 앤은 앤디 브라이스의 일기를‘단풍나무 저택’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그 노부인들에게 얼마쯤은 호의가 있었고, 그 사람들은 삶을 따뜻하게 느낄 만한 것도 없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버지에 자부심뿐이라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벽 3시경에 다시 눈을 뜬 앤은 일기장을 보내지 않기로 또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미스 사라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하지 않았어, 정말 그랬다고! 4시에 앤의 마음이 다시금 흔들렸으나 마침내는 보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옹졸하게 굴지 말자. 앤은 파이 집안사람처럼 소견머리가 좁은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마음을 정한 앤은 올겨울 들어 처음으로 찾아온 눈보라가 탑 주위로 휘몰아치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꿈나라로 갈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 생각하며 이번엔 진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월요일 아침 앤은 그 낡은 일기장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간단한 편지와 함께 미스 사라에게 보냈다.

친애하는 미스 프링글께,

이 오래된 일기장에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해 보내드립니다. 이것은 이 주의 역사를 쓰는 스탠턴 부인께 드리려고 브라이스 씨에게 얻어 온 것이지만, 스탠턴 부인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내용인 듯하고 미스 프링글이 관심 있어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럼 안녕히.
앤 셜리

‘이건 정말이지 딱딱한 글이군. 하지만 그들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글을 쓸 수가 없는걸. 그리고 저쪽에서 이 일기장을 거만하게 되돌려 보내온다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거야.’
앤은 생각했다.

하늘이 맑게 갠 어느 초겨울 저녁에 일어난 일로 레베카 듀는 너무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단풍나무 저택’의 마차가 진눈깨비가 날리는 ‘도깨비 길’을 달려와 문 앞에 멈춰 섰다. 미스엘런이 마차에서 내리고 이어서 놀랍게도 10년 동안이나 저택에서 나온 적이 없다던 미스 사라가 나타났다. 모두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들이 현관문으로 와요.”
당황해 소리치는 레베카 듀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프링글 집안사람이 현관문 말고 어디로 들어오겠어.”
케이트 아주머니가 말했다.
“물론이죠, 그럼요. 그렇지만 문이 열리지 않는걸요. 아주 꼭달라붙어 버렸어요.지난봄 집을 대청소하면서 열고는 그동안 열어보질 않았잖아요. 이건 도저히 열지 못하겠어요.”
레베카가 비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현관문은 정말로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렇지만 레베카 듀가 문을부숴버리기라도 할 듯 필사적인 힘을 발휘하여 열었고‘단풍나무 저택’의숙녀분들을 응접실로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 응접실에 불을 피워놓았기에 다행이지, 저 고양이가 소파에 털을 묻혀놓지 않았어야 할 텐데. 만일 미스 사라 프링글 옷에 털이라도 묻었다가는…….’
레베카는 생각했다.
레베카 듀는 그 결과를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미스 사라가 미스 셜리는 집에 있느냐고 묻자 레베카는 탑 방에 있는 앤을 불러오고 부엌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저 프링글 노부인들이 도대체 무슨 일로 미스 셜리를 보자고 하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더 이상 못된 짓을 했다가는…….”
레베카 듀는 인상을 쓰며 혼잣말을 했다.
앤도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방에서 내려왔다. 저들이 나를 차갑게 경멸이라도 하며 그 일기장을 돌려주러 왔을까?
앤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인사조차도 없이 몸을 일으켜 입을 연 것은 주름살투성이에 작고 꼬장꼬장한 미스 사라였다.
“우리는 여기 항복하러 왔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군요. 물론 미스 셜리도 우리 가여운 마이럼 삼촌이 한 일이 굉장한 얘깃거리가 될 거라는 건 알겠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사실일 리가 없어요. 마이럼 삼촌이 앤디 브라이스를 놀려주려고 한 소리라고요. 앤디는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거든요. 하지만 우리 집안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그 말을 다 믿을 거라고요. 그렇게 되면 우리 집안은 아주 웃음거리가 되고 말아요,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지요. 오, 선생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야. 우리가 그 점을 인정하지. 젠이 사과를 할 거고 앞으로는 정중하게 행동할 거예요. 나, 사라 프링글이 보증해요. 스탠턴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아니,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그것만 약속해준다면 우린 어떤 일이라도 할 거예요. 어떤 일이라도.”
미스 사라가 파란 핏줄이 다 드러난 그 작은 손으로 섬세한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을 비틀며 말했다. 말 그대로 덜덜 떨면서.

앤은 그야말로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공포감마저 일었다. 저 가여운 할머니 꼴이라니!
세상에나, 저들은 지금 협박당하고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오, 저를 몹시도 오해하셨군요.”
앤은 미스 사라의 가여운 손을 꼭 쥐며 외쳤다.
“전 절대로, 꿈에라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전 단지, 오, 저는 단지 두 분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님의 일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어 하실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전 그 일기장을 누구에게 보이거나, 거기 무슨 이야기가 담겼는지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런 일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예요.”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런 다음 미스 사라가 자기 손을 부드럽게 빼내 눈가를 닦았다. 주름진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선생을 오해했군요. 세상에나, 우리가 선생에게 너무 몹쓸 짓을 많이 했어요. 우리를 용서해주겠어요?”
반 시간 동안, 그 반 시간 동안 레베카 듀는 궁금증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두 미스 프링글은 30분 동안 앤디의 일기장에 적힌 일들로 앤과 다정하게 이야기꽃을 피운 다음 집을 떠났다. 물론 논란을 일으킬 만한 내용은 피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번에는듣는 데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던 미스 사라는 현관문에서 잠깐 몸을 돌려 작은 핸드백에서 깨알 같은 글씨가 깔끔하게 가득 적힌 종이쪽지를 꺼냈다.
“내가 잊을 뻔했어요. 내가 얼마 전에 맥클린 부인에게 우리 파운드케이크 요리법을 알려준다고 약속했었는데. 이걸 부인에게 전해줄래요? 그리고 발효 과정이 아주 중요하다고도 전해주고요.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건데.엘런, 네 모자가 한쪽으로 약간 치우쳤다. 길로 나서기 전에 그것 좀 고쳐라. 우리가 아까 옷을 입으면서 좀 정신이 없었거든요.”
앤은 두 미망인과 레베카 듀에게 앤디 브라이스의 일기장을‘단풍나무 저택’의숙녀분들께 건넸더니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레베카 듀는 언제나처럼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분명 더, 훨씬 더 많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사라 프링글의 그 낡고 담뱃진이 밴 일기장 따위에 뭐가 그리 고맙다고 ‘윈디 포플러’의 현관문으로 나타나다니, 미스 셜리는 생각이 깊기도 하지, 참 깊기도 하지!
“난 이제 하루에 한 번씩은 저 현관문을 열어보겠어요. 연습으로요.”
레베카가 맹세를 했다.
“아까 문을 겨우 열고는 벌렁 나자빠져버렸잖아요. 어쨌거나 우리는 그 파운드케이크 요리법을 손에 넣게 되었네요. 계란을 서른여섯 개나 넣어야 한다니! 저 고양이를 없애버리고, 암탉을 기른다 해도 1년에 한 번밖에는 만들 수 없겠는걸요.”
말을 마치자 레베카 듀는 머리를 번쩍 들고 부엌으로 가 고양이가 간을 먹고 싶어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우유를 주었다. 셜리 대 프링글 간의 그 심했던 반목은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어찌 된 연유로 일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프링글 집안사람 말고는 아무도 몰랐지만, 서머사이드 사람들은 미스 셜리가 오직 혼자 힘으로 뭔지는 모르지만 불가사의한 방법을 써 그 집안을 완전히 패배시켰고 그 뒤로 그들은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젠은 다음 날 학교에 나와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순한 양처럼 앤에게 사과를 했다. 그 이후로 젠은 아주 모범생이 되었고 모든 프링글 학생들도 그 뒤를 따랐다. 프링글 어른들이 가졌던 반감도 태양을 만난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규율이나 숙제에 불만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고 그 일가 특유의 은근히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들 앤에게 잘하려고 애를 썼다. 이제는 앤을 빼놓고는 댄스파티나 스케이트 모임도 열리지 않았다. 미스 사라가 직접 그 치명적인 일기장을 불태워 없애버리기는 했지만 기억은 그대로 남는 것이며, 미스 셜리가 그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입 밖에 내놓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캐묻기 좋아하는 스탠턴 부인에게 마이럼 프링글 선장이 식인종이었다고 알려져서는 결코 안 된다!




8
(길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





난 내 탑 방에 있고 레베카 듀는 부엌에서 <천국에 갈 수만 있다면>이란 찬송가를 부르고 있어. 그 노래를 들으니까 목사님 부인이 나에게 성가대에 들어와 달라고 부탁한 일이 생각나. 물론 프링글 사람들이 목사님 부인에게 그렇게 하자고 했겠지. 이제 난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일요일이면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될 거야. 프링글 집안에서 내게 우정의 손길을 굳게 내밀었어. 나를 완전히 받아들여 주었다고. 정말 대단한 집안이야!
난 벌써 프링글 집안에서 연 파티를 세 군데나 다녀왔어. 나를 골탕 먹이는 일은 더 이상 없고 대신 모든 프링글 여자들이 내 머리 스타일이며 옷차림을 따라 해. 글쎄, 모두가 날 따라 한다는 건 기분이 좀 우쭐해지는 일이더라고. 나도 그 사람들이 정말로 좋아. 처음부터 난 그들이 내게 기회만 준다면 내가 그 사람들을 좋아하리란 걸 알았어. 머지않아 젠도 좋아하게 될 거란 예감이 들어. 그 애도 마음만 고쳐먹으면 꽤나 괜찮은 아이거든. 그렇게 될 소지가 다분히 보여.
어제 오후에는 용기를 내어 잠자는사자 굴속으로 뛰어들었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늘 푸른 집’ 정면 층계를 올라가 회칠이 된 귀퉁이마다 쇠 항아리들을 세워둔 베란다로 올라가 벨을 눌렀다고. 미스 몽크맨이 나오자 난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산책을 가도 되느냐고 물었어. 나는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 캠벨부인과 의논하고 나오더니 새침하게 엘리자베스를 데려가도 되지만 너무 늦게까지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어. 나는 캠벨 부인이 미스 사라의 명을 받고 허락해준 건 아닌지 궁금해.
엘리자베스는 춤을 추듯 신나게 계단을 뛰어내려왔어. 빨간 코트를 입고 녹색 모자를 쓴 모습이 꼭 작은 요정 같았어. 너무나 들떠 말도 못 할 지경이었지.
“가슴이 두근두근해요, 셜리 선생님, 지금 저는 베티예요. 이런 기분일 때는 언제나 베티예요.”
둘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엘리자베스가 속삭였어.
우리는 ‘세상 끝까지 이어진 길’을 갈 수 있는 만큼 멀리 갔다가 돌아왔어. 오늘 밤 선홍색 저녁놀 밑에 거뭇하게 드러누운 항구는 홀로 떨어진 ‘요정의 나라’처럼 느껴졌고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바다에 떠 있는 신비로운 섬들을 떠올리게 했어. 나는 가슴이 뛰었지. 내 손을 붙들고 있는 이 작은 아이의 가슴도 뛰었고.
“셜리 선생님, 우리가 달려가면 저 석양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엘리자베스는 궁금한 모양이었어. 그 말을 듣고 폴과 폴이 꿈꾸던 석양 나라가 생각났지.
“거기 닿으려거든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 저기 봐, 엘리자베스. 저 항구 위에 걸쳐진 구름에 있는 황금빛 섬. 저기가 너의 행복의 섬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말했어.
“저기 저 아래 어딘가에는 그런 행복의 섬이 있어요. 그곳 이름은 ‘흘러가는 구름’이에요. 아름다운 이름이죠. 바로 내일에서 나온 것 같은 이름이요. 다락방 창문에서 보면 거기가 보여요. 그 나라는 보스턴에 사는 어떤 신사의 땅이에요. 거기에 그의 여름 별장이 있죠. 하지만 그걸 제 별장이라고 생각할래요.”
엘리자베스가 꿈이라도 꾸듯 말했어.

문에서 몸을 구부려 엘리자베스의 볼에 입을 맞추어주고 안으로 들여보냈어. 난 이 아이의 눈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길버트. 너무나도 사랑에 굶주린 아이의 눈빛이었으니까.
그런데 아까 우유를 주러 갔을 때 보니까 아이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었어.
“할머니와 그 여자가 제 얼굴을 씻어버리게 했어요. 전 셜리 선생님이입 맞추어 준 볼을 절대로 씻고 싶지 않았는데. 전 절대로 씻지 않겠다고 맹세했단 말이에요. 선생님이입 맞추어준 볼이니까요. 전 오늘 아침 얼굴을 씻지 않고 학교로 갔어요. 그런데 오늘 저녁에 그 여자가 저를 잡아서는 박박 문질러 씻어버렸어요.”
엘리자베스는 울면서 말했어.
나는 웃지 않았어.
“평생 얼굴을 씻지 않고 지낼 수는 없잖아. 그렇지만 걱정할 거 없어. 매일 저녁 우유를 받으러 나올 때마다 내가 뽀뽀해줄게. 그럼 아침에 얼굴을 씻어도 걱정 없겠지?”
“절 사랑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선생님 한 사람뿐이에요. 선생님이 얘기를 할 때는 제비꽃 향기가 나요.”
엘리자베스가 말했어.
그 누가 이토록 예쁜 찬사를 받아본 적이 있겠어, 길버트? 하지만 난 엘리자베스가 그보다 먼저 한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어.
“네 할머니도 너를 사랑하셔, 엘리자베스.”
“아니요, 저를 싫어해요.”
“넌 좀 바보로구나. 할머니도 미스 몽크맨도 둘 다 나이가 많아서 그래. 나이 든 분들은 금방 언짢아하고 모든 일에 걱정을 많이 하잖아. 물론 때로는 네가 할머니들을 애먹여서 그렇기도 하고. 할머니들이 어렸을 때는 지금 아이들보다 더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단다. 그래서 옛날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거야.”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결국 그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를 사랑하지 않고 이 아이도 그런 사실을 아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조심스럽게 집 쪽을 돌아보고 문이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조용히 속삭였어.
“할머니와 그 여자는 마귀 할머니예요. 그러니까 내일이 오면 전 그 사람들한테서 도망쳐버릴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내가 그 말을 들으면 놀라 나자빠질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난 엘리자베스가 그저 나를 놀래주려고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 나는 엘리자베스에게 입을 맞추어주면서 웃기만 했어. 이런 장면을 마르타 몽크맨이 부엌 창문으로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탑 왼쪽 창문으로 서머사이드 시내가 내려다 보여. 프링글 집안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나니 하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도 다정해 보여.이 집저 집박공 창이며지붕 창에서 반짝반짝 불빛이 새어나오고, 여기저기서 보일 듯 말 듯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그 위로 하늘에는 나직이 별들이 반짝여. 여기는 바로 그 ‘꿈의 거리’야. 아름다운 말이지? ‘갤러허드는 꿈의 도시를 지났다’는 테니슨의 시 구절 생각나?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해, 길버트. 이제는 패배해 면목을 잃은 채로 크리스마스에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까. 인생은 멋져, 너무 멋져!
드디어 레베카 듀가 미스 사라의 파운드케이크를 만들었어. 요리법에 따라 잘 발효를 시켰지. 발효라는 건 반죽을 갈색 포장지 몇 장으로 겹겹이 싸고 거기에 수건 몇 장을 다시 감아 사흘 동안 놓아두면 되는 거야. 추천할 만한 방법이야(추천이라는 단어에 ‘c’가 두 번 들어가던가? 내가 학사 학위를 받았어도 여전히 그건 헛갈려). 내가 앤디의 일기장을 발견하기 전에 프링글 집안에서 먼저 그걸 찾아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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