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9~10

나단비 | 2024.03.30 17:58:15 댓글: 0 조회: 67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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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어느 날 밤 트릭스 테일러는 앤의 탑 방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쉭쉭 소리와 함께 눈발이 창문을 때리며 흩날렸고 귀여울 정도로 작은 난로는 붉은빛을 내는 검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트릭스는 앤에게 하소연을 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두들 앤에게 비밀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앤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서 서머사이드 아가씨들은 앤을 사랑의 경쟁자로 두려워할 걱정도 없었다. 앤에게는 어쩐지 비밀을 털어놓아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트릭스는 앤에게 내일 저녁 식사에 와 달라는 청을 하러 왔다. 트릭스는 작은 키에 몸이 포동포동하게 생긴 쾌활한 아가씨로 갈색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뺨은 장밋빛으로 발그레해 스무 살 어깨에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었다.
“레녹스 카터 박사가 내일 저녁 우리 집에 와요. 그래서 선생님이 와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레녹스 박사님은 이번에 레드먼드 대학의 근대 어학부 부장이 되었어요. 너무나 박식한 분이라 그분과 대화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해요. 알다시피 난 자랑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고, 우리 식구들도 다 마찬가지예요. 에스메이 언니로 말하면, 글쎄, 있잖아요, 선생님, 에스메이 언니는 무척이나 상냥하고 명석하지만 부끄럼을 타고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카터 박사가 곁에 있을 때는 그 좋은 머리도 아무 소용없게 돼버리죠. 언니는 박사를 굉장히 사랑해요. 딱할 정도로요. 나도 조니가 견딜 수 없이 좋지만, 그래도 그 사람 앞에서 그렇게 녹아버리지는 않죠!”
“에스메이 언니와 카터 박사는 약혼한 사이인가요?”
“아직은 아니에요.”
트릭스는 거기에 무슨 연유가 있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오, 선생님, 언니는 이번에야말로 카터 박사가 청혼해줄것으로 믿어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학기 중에 사촌을 만나러 여기 프린스에드워드 섬까지 왔겠어요? 언니를 위해서라도 난 그가 이번에는 말을 꺼내주었으면 해요. 언니는 만일 이번에도 청혼을 못 받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하거든요. 하지만 이 말은 선생님과 저 침대 기둥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말인데요. 난 그 사람을 우리 형부로 삼고 싶지 않아요. 너무 까다로운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카터 박사가 우리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까 봐 정말 걱정하고 있어요.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에스메이 언니에게 청혼하지 않을 거래요. 언니는 내일 저녁 식사가 무사히 끝나길 얼마나 바라는지 몰라요. 나는 잘될 거라 생각해요. 어머니는 누구보다도요리 솜씨가 좋고 착실한 하녀도 있는데다, 동생은 내 일주일분 용돈에서 절반을 주어 얌전히 있어달라고 매수해두었거든요. 물론 동생도 카터 박사를 좋아하지 않아요. 머리가 꼭 풍선 같대요. 언니는 폭 빠져 있지만. 아버지만 부루퉁해 있지 않으면 돼요!”
“뭐 그런 걱정을 해야 할 이유라도 있어요?”
앤이 물었다.
사이러스 테일러가 얼마나 골을 잘 내는지는 서머사이드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언제 아버지가 또 골을 낼지 아무도 몰라요. 오늘 밤에도 새 플란넬 잠옷을 찾을 수 없다고 화가 났어요. 언니가 그걸 옷장 다른 칸에 넣었거든요. 얼른 그 일을 잊어버려야 할 텐데, 내일 저녁까지도 화가 나 있으면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망신 줄 거라고요. 그렇게 되면 카터 박사는 이런 집안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결정하겠죠. 언니가 그렇게 말했어요. 언니 말이 모두 맞을까 봐 몹시 걱정이 돼요. 내 생각에는 레녹스 카터도 언니를 좋아하고는 있는 것 같아요. 에스메이 언니를 적당한 아내감으로 생각하지만 일을 서두른다거나 섣부른 결정으로 자기 인생을 망칠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 사람이 자기 사촌한테, 결혼할 때는 상대방 가족을 신중하게 잘 알아보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거든요. 카터 박사는 아주 사소한 문제로 중대 결정을 내리려 하는 거죠.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아버지의 골내는 버릇은 더 이상 사소한 문제가 아니죠.”
“아버지도 카터 박사를 좋아하나요?”
“오, 그럼요. 아버지는 카터 박사가 언니의 좋은 배필이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하지만 아버지가 한번 삐져버리면 아무도 못 말려요. 그게 바로 아시겠지만 프링글 집안사람의 특징이기도 하죠. 우리 할머니 테일러도 프링글 사람이잖아요. 우리 가족이 어떤 일을 겪으며 사는지 절대로 모를 거예요. 아버지는 조지 삼촌처럼 단번에 달아오르지는 않아요. 그리고 조지 삼촌 가족은 삼촌이 그렇게 화를 내도 그리 신경 쓰지도 않고요. 삼촌은 울화가 치밀면 그대로 폭발해버려요. 삼촌의 고함소리가 세 블록 밖에서도 들릴 정도죠.그러고는양처럼 순해져, 사과하는 뜻으로 모두에게 새 옷을 사주고는 하죠.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냥 입을 비죽거리면서 사람을 노려보기만 해요. 식탁에 앉아서도 입을 꼭 다물어버리죠. 에스메이 언니는 그래도 아버지가 우리 사촌오빠인 리처드 테일러보다는 낫대요. 리처드는 식탁에 앉아 비꼬는 말 아니면 아내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는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난 아버지의 그 끔찍한 침묵보다 더 나쁜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우리가 몹시 불안하고 무서워서 입도 열지 못하거든요. 물론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그렇게 곤란할 것도 없어요. 하지만 꼭 손님이 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거든요. 에스메이 언니와 나는 아버지의 그런 무례한 침묵을 변명하느라 지쳐버렸어요. 언니는 아버지가 잠옷 일로 내일 밤까지도 저렇게 부루퉁해 있지 않을까 걱정이 말이 아니에요. 그런 일이 생기면 카터 박사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에스메이 언니는 앤 선생님이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와주었으면 해요. 언니의 새 드레스도 파란색이거든요. 카터 박사가 파란색을 좋아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파란색을 아주 싫어하죠. 그래서 선생님이 파란색 옷을 입고 있으면 아버지도 에스메이에게 시비를 걸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에스메이 언니는 다른 색 옷을 입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언니가 손님을 초대한 자리에서 입을 만한 드레스라면 아버지가 크리스마스에 사준 녹색 포플린으로 지은 드레스뿐이에요. 드레스만을 놓고 보면 예쁘죠. 아버지는 우리에게 예쁜 옷을 사주는 걸 좋아해요. 하지만 언니에게는 녹색 옷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문제예요. 동생 말을 빌면 꼭 폐병 말기 환자 같다나요. 게다가 카터 박사 사촌이 언니에게 한 말로는 카터 박사는 절대로 연약한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대요. 조니는 그렇게 까다롭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지 몰라요.”
“아버지에게 조니와 결혼을 약속했다고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트릭스의 연애사를 낱낱이 다 알고 있는 앤이 물었다.
“아니요.”
트릭스는 신음 소리를 냈다.
“난 그런 말을 할 용기도 없어요, 선생님. 그렇게 되면 난리가 날걸요. 아버지는 조니를 무시해요. 가난하기 때문이죠. 아버지는 자기도 철물 도매상을 시작하기 전에는 조니보다도 더 가난했었다는 사실을 잊었어요. 언니의 일이 잘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요.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면 아버지는 또 몇 주 동안이나 우리와 말도 하지 않을 거고 그럼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할 게 틀림없으니까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루퉁해 있으면 견디질 못해요. 아버지 앞에서는 우리 모두 아주 굉장한 겁쟁이가 돼버려요. 물론 어머니와 에스메이 언니는 원래부터 소심한 성격이어서 누구에게든 말도 제대로 못 하죠. 하지만 동생과 나는 제법 용기가 있어요. 우리가 무서운 사람은 아버지뿐이에요. 가끔씩 나는 누가 우리를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마비라도 당한 듯 꼼짝도 못 하죠.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손님을 초대하면 식사가 어떻게 되는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래도 내일 밤만 아버지가 분별 있게 행동해준다면 모든 걸 용서해드릴 참이에요. 아버지도 그럴 마음만 먹으면 남에게 무척 싹싹해요. 롱펠로의 시에 나오는 소녀와 똑같아요. 좋을 때는 더할 수 없이 좋고, 나쁠 때는 손을 쓸 수가 없이 나쁘죠. 우리 집에서는 모든 게 아버지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지난달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갔을 때는 아버지가 제게 아주 잘 대해주셨어요.”
“네, 아까도 말했듯이 아버지는 앤 선생님을 좋아해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선생님에게 와달라고 청하는 거지요. 아버지의 기분에 좋은 영향을 줄지 모르니까요. 아버지 기분을 좋게 하려는 것이라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아버지가 기분이 몹시 나쁠 때는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일도 소용이 없어요. 어쨌건 우리는 최고의 음식을 준비할 계획이에요. 디저트로는 아주 근사한 오렌지 커스터드15)를 내놓을 생각이구요. 어머니는 파이를 내놓자고 했어요. 아버지를 제외한 세상 모든 남자들이 디저트로 파이를 좋아한다면서요. 아무리 근대 언어학 교수라 하더라도별수없을 거라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파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일 저녁처럼 중요한 날 모험을 할 수는 없죠. 모든 일이 아버지 기분에 달렸으니까요. 오렌지 커스터드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예요. 가여운 조니와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젠가는 우리 둘이 함께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럼 아버지가 저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지만.”
“내 생각엔 트릭스가 용기를 좀 내서 말씀을 드리고 모욕적인 말을 좀 견딘다면 언젠가는 허락을 받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럼 수많은 세월, 당할지도 모를 고통을 면할 수 있고요.”
“아버지를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트릭스가 암울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내가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몰라요. 아무래도 지금 트릭스는 통찰력을 잃어버리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내가 뭘 잃어버렸다고요? 앤, 난 대학도 나오지 않았어요. 중등학교만 겨우 나왔죠. 나도 대학에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여자는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내 말은 아버지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아버지를 더 잘 모를 수도 있단 얘기예요. 잘 모르는 사람이 편견 없이 더 정확하게 볼 수도 있거든요.”
“난 우리 아버지가 입을 다물어버리겠다고 한번 마음을 먹으면 그 무엇도 아버지 입을 열게 할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아요. 아무것도요. 아버지는 그 점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죠.”
“그럼 아버지만 빼놓고 모두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대화를 나누면 되지 않을까요?”
“우린 그럴 수 없어요. 내가 말했잖아요.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마비시켜 버린다고. 아버지가 그 잠옷 일을 잊지 못하시고 내일 밤까지도 화가 나 있다면 앤도 직접 우리 아버지가 어떤지 보게 될 거예요. 나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세요. 아버지가 말만 한다면 아무리 괴팍하게 굴어도 상관없어요.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드는 건 바로 그 침묵이에요. 만일 아버지가 내일 밤에도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나는 결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어요. 에스메이 언니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요.”
“우리 모든 일이 잘되도록 기도해요, 트릭스.”
“네, 그렇지만 꼭 와주세요, 그럼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어머니는 캐서린 브룩 선생님도 초대해야만 한다고 하지만, 제 생각엔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기분만 더나빠질 것 같아요. 아버지는 브룩 선생님을 아주 싫어하거든요. 그거야 저도 아버지를 탓하지 않아요. 저도 그 선생님은 오지 않는 편이 더 고마우니까요. 앤 선생님은 어떻게 그토록 그 사람에게 잘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난 캐서린 선생이 안됐다고 생각해요, 트릭스.”
“가엾다고요? 하지만 모두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건 자기가 그렇게 했기 때문인걸요. 세상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참 가지가지지만 서머사이드에 캐서린 브룩 선생님 같은 사람은 없어도 괜찮아요. 무뚝뚝한 심술쟁이니까요.”

“캐서린은 우수한 선생님이에요, 트릭스.”
“어머나, 내가 그걸 모르는 줄 알아요? 나도 그 선생님한테 배웠어요. 확실히 그 사람은 내 머릿속에 여러 가지를 쑤셔 넣었죠. 그리고 내 뼈에서 살을 발라내듯 나를 빈정댔구요. 게다가 그 옷차림은 또 어떻고요! 아버지는 옷을 보기 흉하게 입고 다니는 여자는 싫대요. 분명 하느님도 그러실 거래요. 내가 이런 말까지 앤 선생님에게 한 것을 알면 어머니는 기절하실지도 몰라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일을 그냥 다 넘기신다니까요. 하지만 그거 하나만 그냥 넘기면 될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가여운 조니는 우리 집 근처에도 오지 못해요. 아버지가 너무나 심하게 경멸하는 말을 내뱉거든요. 날씨가 좋은 밤이면 내가 살그머니 집을 나가서 둘이서 끝없이 거닐어요. 몸이 거의 얼어붙어 버릴 때까지요.”
앤은 트릭스가 돌아가자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레베카 듀에게 간식을 좀 얻을 양으로 부엌으로 내려갔다.
“테일러 씨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간다고요, 정말이에요? 아이고, 사이러스 양반이 분별력 있게 처신하게 해주십사고 내 기도를 올리지요. 사이러스가 그렇게 부루퉁해 있어도 집안사람들이 겁내지만 않는다면 그 양반이 밤낮으로 그러진 않을 거예요. 내 장담하는데 미스 셜리, 사이러스는 그렇게 부루퉁해 있는 걸 즐겨요. 이제 저 고양이의 우유를 데워줘야 해요. 응석받이 고양이 녀석 같으니라고.”
15. 우유, 달걀, 설탕 따위를 섞어 찌거나 구운 과자.





10





다음 날 저녁 앤은 초대받은 집으로 향했다. 단정한 하녀가 손님방으로 안내해주었지만 집안 분위기가 싸늘한 것을 느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앤은 사이러스 테일러 부인이 식당에서 부엌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사이러스 부인은 창백하고 초췌하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얼굴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사이러스 씨가 아직까지도 그 잠옷 일을 두고 마음을 풀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사실은 잔뜩 걱정에 휩싸여 슬며시 방 안으로 들어온 트릭스가 확인해주었다. 트릭스는 불안스럽게 속삭였다.
“오, 앤 선생님, 우리 아버진 지금 기분이 몹시 나쁘셔요. 오늘 아침에는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여서 우리 모두가 희망을 가졌는데 오늘 오후에 휴 프링글과 아버지가 체스 게임을 해서 휴가 그만 아버지를 이겨버렸어요. 아버지는 체스 게임에서 지는 걸 참지 못하시거든요. 하필이면 오늘 그런 일이일어났어요. 아버지는 에스메이 언니가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에 빠져버렸다고 야단을 치고는 언니를 방에서 내쫓고 문을 쾅 닫아걸어 버렸어요. 가여운 언니는 단지 자기 모습이 레녹스 카터 박사 마음에 들지 어떨지 보고 있었던 것뿐인데요. 목에 진주 목걸이도 채 걸기 전이었다고요. 그리고 나를 좀 보세요. 난 머리를 말지도 못했어요. 아버지는 머리 마는 걸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좋아하지 않으세요. 내 모습이 너무 끔찍하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이 문제는 아니죠. 아버지는 어머니가 식탁에 장식한 꽃도 뽑아서는 던져버렸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무척 속이 상했어요. 얼마나 정성스럽게 그 꽃을 꽂았는데. 그리고 어머니더러 석류석 귀걸이도 걸지 말라고 했어요. 지난봄에 아버지가 서부에서 막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진보라색이 아닌 붉은색 커튼을 단 것을 보고 화를 낸 이후로 아버지 기분이 이렇게 심하게 나쁜 건 처음이에요. 오, 앤 선생님, 제발 부탁이니 아버지가 식탁에서 말씀하지 않으시면 선생님이 말을 아주 많이 해주세요.”
“네, 최선을 다해볼게요.”
앤은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건 약속은 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모두들 식탁에 둘러앉았다. 꽃은 없었지만 식탁은 아주 보기 좋게 차려졌다. 하지만 잿빛 실크 드레스를 입은 소심한 성격의 사이러스 부인의 얼굴은 입고 있는 옷보다도 더 잿빛이었다. 가족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에스메이의 얼굴도 몹시 파리해 보였다. 부드러운 금발 머리에, 입술은 창백한 분홍색이고 눈은 물망초꽃 색깔이었는데 어느 때보다도 창백해 보여 곧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보통 때는 쾌활한 열네 살 장난꾸러기인 휴 프링글도 오늘은 꼭 끈에 묶인 개꼴이었다. 뚱뚱한 몸에 안경을 낀 둥근 눈, 너무 연해 거의 하얀색으로 보이는 금발 머리를 가진 소년이었다. 트릭스도 겁에 질린 어린 소녀 같았다.
카터 박사는 누가 보기에도 잘생기고 눈에 띄는 외모였다. 단정한 검은 머리에 무척 명석해 보이는 검은 눈에는 은테 안경을 썼다. 하지만 앤은 레드먼드 대학에서 그가 조교수로 있던 시절에 그를 보았고, 잘난 척이나 하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었다. 그런 카터 박사에게도 이 자리가 무척 거북한 듯했다. 분명히 그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주인이라는 사람이 인사 한마디 없이 식탁 상석으로 뻣뻣하게 걸어가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고 누군들 이상하다는 생각을 품지 않겠는가.
사이러스 씨가 식사 전 감사기도도 올리지 않자 사이러스 부인은 빨간 순무처럼 볼을 붉게 물들이며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느님,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에다 너무 긴장한 에스메이가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식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이러스 씨 말고는 모두들 화들짝 놀랐다. 모두의 신경이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으니까. 사이러스 씨는 튀어나온 푸른 눈에 노여움을 잔뜩 담아 말없이 에스메이를 노려보았다. 다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노려보아서 모두 얼어붙어 입도 열지 못했다. 주눅이 들 대로든 사이러스 부인이 고추냉이가 든 샐러드를 자기 접시에 더는데 사이러스 씨가 흘끗 노려보았다.그러자 부인은 마치 위가 약한데 그런 걸 먹느냐고 책망하는 눈빛이라도 되는 듯 그때부터 그 좋아하던 샐러드를 한 입도 먹지 못했다. 그것이 위에 탈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먹을 수 없기는 에스메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냥 먹는 시늉만 했다. 식사는 무시무시한 침묵 속에 이어졌으며 트릭스와 앤이 이따금씩 나누는 날씨 이야기로 간간이 침묵이 깨질 뿐이었다. 트릭스가 앤에게 아무 이야기라도 해달라고 간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아주 하찮은 것이나 입에 담기도 민망한 유치한 일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모두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마법에라도 걸려버린 것인가? 부루퉁하고 고집스러운 한 남자가 모두에게 미치는 영향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앤으로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걸 믿기도 힘들었다.
사이러스 씨는 자기가 식탁에 앉은 모두에게 견딜 수 없이 거북한 기분을 안겨주는 것을 알고 혼자서 기쁨을 맛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도대체 저 사람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저 사람을 핀으로 찌르면 튀어 오를까? 앤은 제멋대로인 아이를 다루듯이 사이러스의 따귀를 한 대 철썩 때려주고 실컷 나무란 다음, 구석에 세워두고 싶었다. 저 못된 고집불통 머리에 백발이 성성하고 호전적으로 보이는 턱수염을 기른 어른이거나 말거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사람의 입을 열게 하고 싶었다. 결코 말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은 사람을 응징하려면 입을 열어 말하게 만드는 외에 더 좋은 벌도 없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으니까.
만일 앤이 일어나 저 구석 탁자에 놓인 저 멋대가리 없이 크기만 한 구닥다리 꽃병을 일부러 깨뜨려버린다면? 그 꽃병은 장미꽃잎과 이파리 무늬가 올록볼록하게 새겨진 나름대로 공들여 만든 것으로 닦기가 아주 어렵게 생겼지만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간수해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가족들 모두가 싫어하는 꽃병이지만 사이러스 테일러는 자기 어머니가 간직하던 것이라며 다락방에 넣어버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앤은 화산이 터지듯 사이러스가 화난 목소리로 폭발하리라는 확신만 있다면 아무리 두려워도 그 꽃병을 깨뜨려버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레녹스 카터도 입을 다물고 있지? 저 사람이 입을 열기만 한다면 앤도 말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만 되면 트릭스도 휴도 입을 꽁꽁 묶어버린 주문을 풀고 나와 무슨 대화든 해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도 그저 거기 앉아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아마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무슨 말이든 하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미 화가 날 대로 나 있는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에게 무슨 말이라도 했다간 더 경을 치게 될 것으로 믿었는지도 모른다.
“미스 셜리, 피클을 좀 덜고 다른 사람에게도 돌리기 시작할래요?”
사이러스 부인이 꺼질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앤의 마음에 어떤 장난스러운 생각이 떠올랐다. 앤은 피클을 자기 그릇에 던 다음 다른 사람에게도 돌리기 시작했다. 앤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도 않고 몸을 앞으로 내밀어 커다란 잿빛 눈을 반짝이며 상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카터 박사님, 이 말을 들으면 놀라시겠지만 테일러 씨는 지난주에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대요.”
앤은 폭탄을 던지고 제자리에 다시 앉았다. 스스로도 뭘 기대하고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사이러스 씨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가 머리끝까지 골이 나 있어서가 아니라 귀가 들리지 않아서라면 카터 박사의 입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인가. 앤이 거짓말한 것도 아니었다. 사이러스 테일러가 귀머거리라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이러스 테일러의 입을 열도록 하려 했다면 아직도 실패였다. 사이러스는 그대로 말없이 앉아 앤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앤의 말은 생각지도 못한 트릭스와 휴에게 효과를 냈다. 트릭스는 말도 못 하고 속으로 분노를 삭이느라 애쓰는 중이었다. 앤이 그 웅변적인 한마디를 던지기 바로 전 에스메이가 절망에 빠져버린 푸른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을 남몰래 훔치는 걸 보았다. 이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레녹스 카터는 절대로 에스메이에게 청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누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떤 행동을 하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트릭스는 갑자기 자기밖에 모르는 아버지에게 보복을 해주고 싶다는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앤의 말이 묘하게 트릭스의 복수심을 자극했고 한순간 멍해 있던 휴도 눌려 있던 심술이 화산처럼 폭발해 나왔다. 이 아이는 하얀 속눈썹을 깜빡이더니 곧 트릭스의 뒤를 따랐다. 그 이후 15분은 앤, 에스메이, 사이러스 부인 모두 살아 있는 동안 절대로 잊지 못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 일을 당하다니 우리 아버지는 불쌍하기도 하지요. 나이도 이제 겨우 예순여덟밖에 안 되었는데.”
트릭스가 탁자 건너편의 카터 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 나이를 여섯 살이나 늘려 말하는 소리를 듣고 사이러스 테일러의 콧구멍이 들썩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자기 가족에게 과일과 달걀밖에 먹이지 않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터 박사님? 과일과 달걀 말고는 아무것도 안 줘요, 그것도 기분이 내킬 때만 주죠.”
휴 프링글이 아주 또렷이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당황한 카터 박사가 입을 열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커튼을 달았다고 아내를 때리는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을 가로막으며 트릭스가 다그쳤다.
“피가 철철 흐를 때까지요.”
휴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네 아버지가…… 말이니?”
“옷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 아내의 실크 드레스를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남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트릭스가 물었다.
“자기 아내가 강아지를 갖고 싶다는데 못 기르게 하는 남편은요?”
휴가 물었다.
“그렇게 기르고 싶다고 사정을 하는데도요.”
트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고무장화를 선물하는 남자는요? 고무장화밖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요.”
이 일이 무척 신이 나는지 휴가 계속 물었다.
“고무장화만으로는 감동하기 힘들죠.”
카터 박사가 말했다. 앤과 눈이 마주치자 박사는 미소를 지었다. 앤은 지금까지 박사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미소 띤 그의 얼굴은 무척 보기 좋았다. 트릭스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누가 감히 트릭스가 이런 악마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카터 박사님, 고기가 알맞게 익었나 안 익었나만 생각하는 사람과 살면 어떨까요? 그거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하면서 고기가 잘 구워지지 않았으면 하녀에게 내던져버리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과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할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카터 박사는 사이러스 씨가 닭 뼈를 누구에게 던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듯 사이러스 테일러 쪽을 보았지만 그가 귀머거리란 생각에 이르자 마음을 놓았다.
“지구가 납작하다고 믿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휴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사이러스 씨도 무슨 대꾸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붉은 얼굴이 한순간 떨리는 듯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의 턱수염이 그리 도전적으로 일어서지 않았다.
“자기 고모를, 단 하나밖에 없는 고모를 가난한 사람이나 들어가는 빈민구제원에 넣는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트릭스가 물었다.
“그리고 소를 묘지에 방목하는 남자는요? 서머사이드는 아직 그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죠.”
프링글이 말했다.
“매일 저녁에 무얼 먹었는지 일기장에 적는 남자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트릭스가 물었다.
“그 위대한 피프스16)는 죽었는걸요.”
카터 박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곧 웃음이라도 터트릴 듯 목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거만한 사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너무 젊고 부끄럼을 많이 타거나 너무 진지한 성격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앤은 너무 놀랐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이제 앤은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보다는 끝내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절감했다. 트릭스와 휴는 악마처럼 영리하게 굴었다. 이들은 아버지가 이런 일을 했다고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앤은 프링글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짐작이 되었다. 그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고 뜨고 짐짓 순진무구한 척 “이런 사람을 카터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묻고 있을 뿐이었다.
“자기 아내의 편지를 훔쳐보는 남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트릭스는 여전히 질문을 계속해댔다.
“작업복을 입고 장례식에,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 가는 남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휴가 물었다.
이 둘이 다음에는 무슨 말을 더 할까 생각하며 사이러스 부인은 엉엉 울음을 터트렸고, 에스메이는 완전히 절망에 빠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문제 될건 없었다.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에스메이는 이제 영원히 자기를 떠나갈 사람인 카터 박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평생 자기가 한 말 중 가장 현명한 한 마디를 던지면서.
“이런 사람은 어때요? 고양이가 총에 맞아 죽었을 때 가여운 새끼가 굶어 죽을까 봐 온종일 새끼고양이를 찾아다닌 남자요?”
기이한 침묵이 방 안에 감돌았다. 트릭스와 휴는 갑자기 자기들이 한 짓이 부끄러워졌다. 그러자 사이러스 부인이 불쑥 일어섰다. 부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로 기대하지도 못했던 에스메이 아버지의 변호를 응당 지지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코바늘뜨기도 아주 잘해요. 지난겨울 허리가 아파 일을 할 수 없었을 때 응접실 탁자보를 아주 아름답게 떴다고요.”
누구에게든 인내심이란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사이러스 테일러도 자기 한계에 도달했다. 그는 앉은 의자를 뒤로 힘껏 밀쳐버렸다. 의자는 잘 닦인 마룻바닥을 주르륵 미끄러져 나가 꽃병이 놓인 탁자에 탕하고 부딪혔다. 탁자는 고꾸라져 버렸고 꽃병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하얀 눈썹을 치켜 올린 사이러스는 분노에 떨며 일어나 마침내 폭발했다.
“뜨개질! 내가 여자나 하는 뜨개질을 했다고? 별것도 아닌 조그만 레이스 조각 따위로 남자의 명예를 영원히 박살낼 참이야? 그때 나는 그 몹쓸 놈의 요통이 너무도 심해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그리고 뭐, 내가 귀머거리라니요, 미스 셜리?”
“셜리 선생님이 아버지를 귀머거리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입이 트이면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트릭스가 소리쳤다.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지! 너희들 누구 하나 내가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내 나이가 아직 예순두 살인데 예순여덟 살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어, 그렇지? 내가 너희 어머니에게 개를 못 기르게 한다고도 안 했지! 좋아, 당신이 개를 기르고 싶으면 4만 마리를 키워도 좋아. 대체 언제 내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말렸어, 언제?”
“한 번도 그런 일 없어요, 여보, 한 번도요! 그리고 나는 개를 기르고 싶다고 생각한 일조차 없어요. 한 번도 개를 기르고 싶다고 생각한 일이 없어요, 여보.”
사이러스 부인이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내가 언제 당신 편지를 뜯어봤어? 언제 내가 일기를 썼단 말이야? 일기라니! 그리고 내가 언제 작업복을 입고 장례식에갔어? 언제 내가 소를 묘지에 풀어놨냐고? 내 어떤 고모가 빈민구제원에 들어가 있어? 내가 언제 구운 고기를 내던졌어? 또 내가 너희들에게 과일과 달걀밖에 먹이지 않았다고?”
“아니요, 한 번도 그런 일 없어요, 여보. 한 번도 없었어요. 당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부족함 없이 주었어요. 최고로만요.”
사이러스 부인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당신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고무장화를 받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지?”
“네, 그럼요. 내가 그랬지요, 여보. 그래서 겨울 내내 얼마나 따뜻하게 지냈는지 몰라요.”
“그렇다면 좋아!”
사이러스 씨는 승리에 찬 눈으로 방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그 눈이 앤의 눈과 마주치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사이러스 씨가 쿡쿡 웃었다. 뺨에는 보조개가 피었다. 분명 보조개였다. 그 보조개가 사이러스의 표정 전체에 기적을 일으켰다. 사이러스는 의자를 도로 당겨와 앉았다.
“여보시오, 카터 박사, 나는 곧잘 부루퉁해 있는 나쁜 버릇이 있소. 모든 사람이 다 뭔가 나쁜 버릇이 있지 않소. 내 버릇은 이것이오. 내 나쁜 버릇은 오직 이것 하나지. 자, 여보, 그만 울어. 모두가 날 비난해도 하는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인정해. 다만 그 뜨개질 이야기는 기분이 나빴어. 에스메이, 너 하나만이라도 내 편을 들어주어 고맙다. 내 그걸 결코 잊지 않으마. 매기한테 들어와서 저 꽃병 조각들을 치우라고 해. 저 귀찮은 물건이 깨져버려서 모두들 좋아하겠구먼. 그리고 푸딩을 가져오라고 해.”
앤은 그처럼 험악하게 시작한 저녁이 이처럼 유쾌하게 끝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사이러스 씨처럼 상냥하고 기분 좋은 말상대도 없었다. 나중에 트릭스에게 들은 말로는 보복의 여파도 없었다고 했다. 이삼일 지나서 트릭스가 찾아와 마침내 용기를 내 아버지에게 조니 일을 말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화를 내던가요, 트릭스?”
“아버지는, 아버지는 전혀 화를 내지 않으셨어요. 그냥 흥하고 콧방귀만 뀌더니 조니가 2년 동안이나 졸졸 따라다녀 다른 사람을 다 쫓아버렸으니 이제 그런 말을 꺼낼 때도 되었다고만 하셨죠. 지난번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도 더 이상 골을 내진 못하시겠죠. 그리고 사실 아버지는 골만 내지 않으면 정말 좋은 분이에요.”
트릭스는 부끄러운 듯 말했다.
“트릭스에게는 너무 과분한 아버지죠. 그날 저녁에는 트릭스가 좀 심했어요.”
앤이 레베카 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하지만 앤 선생님이 먼저 시작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착한 휴가 좀 도왔고.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도 있는데요, 뭐. 그나저나 그 화병 닦을 일이 없어져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트릭스가 말했다.



16. 피프스(Samuel Pepys, 1633~1703) 영국의 정치가. 해군 제독을 지내고 정계에서 활약하였으며, 문학작품과 사료로 높이 평가되는 《일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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