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11~12

나단비 | 2024.03.31 13:56:28 댓글: 0 조회: 69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716
11
(그로부터 2주 후에 길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





드디어 에스메이 테일러와 레녹스 카터 박사가 약혼을 발표했어. 이곳 소문을 전부 종합해보면 카터 박사는 그 끔찍했던 금요일 저녁에 에스메이를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한 것 같아. 그 아버지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에게서 사랑하는 이를 구출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거지. 에스메이가 처한 곤경이 그의 기사도 정신을 자극한 거라고 볼 수 있어. 트릭스는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나래. 내가 이번 일에 정말로 한몫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번갯불의 꼬리를 잡으려 드는 일처럼 너무 무모한 짓이었어. 내가 잠시 어떻게 되었던가 봐, 길버트. 프링글 냄새가 나는 일이라면 말만 들어도 무엇이든 싫었던 지난날이 남긴 부작용이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그 모든 일이 지금에 와서는 아주 옛날 일처럼 여겨져. 내가 그랬었는지도 다 잊어버렸어.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지만. 미스 밸런타인은 내가 프링글 집안을 이겼다는 얘기를 듣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대. 내게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나. 목사님 부인은 나를 위해 기도했었는데 그 기도가 이루어진 거라고 생각한대. 글쎄, 뭐가 어떻게 돼서 내가 프링글 집안을 이겼는지는 중요한 얘기가 아니야. 그저 그렇게 되었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지.
어제는 젠 프링글과 학교에서 집으로 함께 걸어 돌아오면서 구두와 배와 봉랍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 기하학 말고는 우리가 나누지 않는 이야기란 없지. 우리는 가급적이면 기하 이야기는 피해. 젠은 내가 기하학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마이럼 선장에 얽힌 어떤 일화를 알고 있다는 작은 이유로 내 그 약점은 무마되어버리지. 젠에게 폭스의 《순교자 열전》을 빌려줬어. 내가 소중히 아끼는 책을 남에게 빌려주는 것은 정말 싫어.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을 때는 전과 같은 책으로 여겨지지 않으니까. 이 책은 아주 오래전에 주일 학교 상품으로 받은 것인데, 내가 폭스의 《순교자 열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앨런 부인이 내게 준 것이기 때문이야. 나는 순교자들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아. 그들의 삶을 읽다 보면 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인 듯 부끄러워지니까. 난 추운 날 아침 잠자리에서 빠져나오기 싫고, 치과에 가기도 싫어! 그런데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게 했잖아.
하여튼 에스메이도 트릭스도 모두 행복해져서 너무 기뻐. 나 또한 로맨스를 꽃피우는 중이라 남의 일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이건 좋은 쪽의 관심이야, 그렇지? 순전한 호기심이나 악의가 담긴 것이 아니라 행복이 퍼져 나가는 이야기라서 기뻐.
아직 2월이야. ‘수도원 지붕에 쌓인 눈이 달빛에 반짝이고’17)있어. 이건 시의 한 구절일 뿐이고 사실은 수도원 지붕이 아니라 해밀턴 씨네 곳간 지붕이야. 이 풍경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이제 앞으로 2~3주일 뒤면 봄이네. 그리고, 그리고 다시 몇 주일만 지나면 여름, 그러면 여름방학, 그럼 ‘초록 지붕 집’과 에이번리의 목장 위로 쏟아지는 황금빛 햇볕을 실컷 누리게 될 거야. 바다는새벽 녘엔 은빛으로, 낮에는 사파이어 빛깔로, 해 질 녘에는 진홍빛으로 물들겠지. 그곳에는 내 사랑 길버트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난 엘리자베스와 함께 봄이 되면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있어. 우리는 아주 좋은 친구지. 나는 엘리자베스에게 매일 저녁 우유를 가져다주고, 가끔씩은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산책도 나가. 우리는 생일이 같아. 엘리자베스는 그 사실을 알고 너무 기뻐서 볼을 ‘성스러운 장밋빛’으로 물들였어. 발그레한 엘리자베스 얼굴은 너무 사랑스러워. 보통 때는 너무도 핼쑥해서 신선한 우유를 마셔도 붉은 기운이 돌지 않았거든. 둘이서 저녁바람을 맞으며 걷다 돌아오면 그 조그만 뺨에 사랑스러운 장밋빛이 돌아.
언젠가는 내게 정색을 하고 묻더라.
“셜리 선생님, 밤마다 얼굴에 우유를 바르면 제가 어른이 되었을 때 셜리 선생님처럼 예쁜 크림빛 피부가 될까요?”
버터밀크는 ‘도깨비 길’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화장품 같아. 레베카 듀도 그걸 바르는 걸 봤어. 레베카 듀는 미망인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래. 자기 나이의 여자가 그런 짓을 하면 아주 경망스러운 일이라고 흉들을 볼 거라면서. ‘윈디 포플러’에는 지켜야 할 비밀이 너무나 많아서 내가 늙어버리는 것 같아. 나도 얼굴에 버터밀크를 바르면 내 이 일곱 개의 주근깨를 없앨 수 있을까? 그나저나 내 피부가 예쁜 크림색이란 생각을 해본 적 있어? 그런 적이 있다 해도 넌 내게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비교적 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나도 그런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어.
“미인의 기준이 뭐죠, 미스 셜리?”
지난번 내가 새로 맞춘 비스킷 색깔 평직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 레베카 듀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어.
“나도 가끔 그게 뭘까 생각해요.”
내가 대답했지.
그러자 레베카 듀가 말했어.
“미스 셜리는 아름다워요.”
“레베카가 나를 비꼬는 말을 할 줄 몰랐는걸요.”
내가 책망하는 말을 했어.
“비꼬는 게 아니에요, 미스 셜리. 미스 셜리는 비교적 미인인걸요.”
“오, 비교적이요.”
내가 그랬지.
“그 옆 선반 거울을 좀 보세요. 나와 비교하면 미스 셜리는 미인이잖아요.”
레베카 듀가 거울을 가리키며 말했어. 그 말이 맞긴 했어.
그런데 아직 엘리자베스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니야. 어느 날 저녁 우리는 ‘도깨비 길’에 비바람이 몰아쳐서 산책을 나갈 수 없었어. 대신 우리는 내 방으로 올라와 요정 나라 지도를 그렸지. 의자 높이를 맞추려고 파란 도넛 같은 쿠션에 올라 앉아 책상에 몸을 잔뜩 수그리고 지도를 그리는 엘리자베스 모습이 마치 진지한 작은 도깨비처럼 보였어.(작은 도깨비가 아니라 난쟁이가 어떠냐고 하지 마. 작은 도깨비인 편이 훨씬 으스스하고 더 요정 같으니까.)
우리 지도는 아직 미완성이야. 날마다 뭔가 더 그려 넣을 것을 생각해내지. 어젯밤에는 ‘눈의 마녀’ 집이 있는 곳을 정했어. 그 집 뒤로 언덕을 세 겹으로 그려 넣었고. 언덕에는 꽃이 활짝 핀 산벚나무로 뒤덮이게 했지.(우리 꿈의 집 옆에도 산벚나무가 좀 있었으면 좋겠어, 길버트.)당연히 우리 지도에는 ‘내일’도 그려져 있어. 그곳은 오늘의 동쪽이고 어제의 서쪽이야. 요정의 나라에는 아주 많은 시간이 있어. 봄의 시간, 긴 시간, 짧은 시간, 초승달이 뜨는 시간, 꿈나라로 가는 시간, 다음 시간, 하지만 마지막 시간은 없어. 요정의 나라에는 슬픈 시간은 없으니까. 어린 시간도 있어. 아주 오래된 옛날 시간이 있으니까 어린 시간도 있어야 하거든. 산의 시간, 이 말은 너무 듣기 좋아. 그리고 낮 시간과 밤 시간도. 하지만 자야 하는 시간이나 학교에 가야 하는 시간은 없어. 크리스마스 시간처럼 단 한 번밖에 없는 시간도 없어. 그것도 너무 슬프니까.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있어.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으면 기분이 너무 좋잖아. 어떤 시간, 좋은 시간, 빠른 시간, 느린 시간, 키스를 하고 난 30분의 시간, 집으로 가는 시간, 아득한 태고의 시간, 이 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여러 시간들을 가리키도록 작고 깜찍한 붉은 화살표들을 여기저기에 그려두었어. 레베카 듀가 나를 어찌 생각할지 알아. 너무 어린아이처럼 논다고 하겠지. 하지만 오, 길버트, 우린 너무 나이 들지도 너무 현명해지지도 말자. 그건 재미없어. 요정의 나라에서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것도 바보 같은 것도 안 돼.
레베카 듀는 분명히 내가 엘리자베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아이를 환상에 빠져 살도록 부추긴다고 생각하지. 어느 날 저녁에는 내가 외출을 해서 레베카 듀가 엘리자베스에게 우유를 가져갔는데, 엘리자베스는 대문에 나와서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더래. 요정의 발소리와는 거리가 먼 레베카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던 거지.
“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레베카 아줌마.”
아이가 그렇게 말을 하더래.
“넌 언제나 귀만 기울이고 있잖아.”
레베카가 나무랐대.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아주 우스울 정도로 진지한 표정으로 웃더래.(레베카 듀가 정확하게 그런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난 엘리자베스가 바로 그렇게 웃었으리라는 걸 아니까.)
“내가 가끔씩 무슨 소리를 듣는지 안다면 레베카 아줌마는 아주 놀랄걸요.”
아이의 말투에 레베카 듀는 뼛속까지 섬뜩했대. 레베카가 그렇게 주장했어.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항상 요정과 함께 사는 아인데,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어?

그대의 가장 앤다운 앤으로부터

추신 1: 난 자기 아내가 코바늘 뜨개질을 했다고 고자질했을 때 사이러스 테일러 씨의 얼굴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절대로, 절대로. 하지만 새끼 고양이를 찾아다녔던 사이러스 씨를 언제까지고 좋아할 거야. 그리고 자기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믿으면서도 아버지를 위해 변명해준 에스메이도 잊지 않을 거야.

추신 2: 나, 새 펜을 구했어. 난 너를 사랑해. 너는 카터 박사처럼 잘난 체하지 않으니까. 난 너를 사랑해. 조니처럼 귀가 튀어나오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냥 길버트이니까!

17.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의 시 <성 아그네스의 이브(St. Agnes' Eve)>에 나오는 구절.




12



도깨비 길, 윈디 포플러
5월 30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니 그보다도 더 사랑하는 길버트에게

이제 봄이야!
넌 지금 봄이 온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킹스포트에서 시험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하고 있겠지. 난 내 머리끝에서 발가락 끝까지 온몸으로 봄을 느끼고 있어. 서머사이드도 봄을 느끼고 있지. 가장 보기 흉한 거리조차도 봄옷으로 갈아입었어. 낡은 판지 울타리 너머로는 꽃나무 가지가 팔을 내밀고 길가 잡초 가운데서는 민들레꽃이 줄지어 피어났어. 내 선반 위에 놓인 도자기 인형조차도 봄을 느껴. 내가 한밤중에 잠이 깨 살짝 보면 금박 장식 띠를 두르고 분홍 신발을 신은 인형이 혼자서 춤을 추고 있거든.
모든 것이 “봄이야!” 하고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아. 웃음소리를 내는 시냇물, ‘폭풍 왕’ 언저리에 떠도는 푸른 안개, 네 편지를 읽으러 가는 단풍나무 숲, ‘도깨비 길’을 따라 늘어선 하얀 벚꽃 나무들, 고양이더스티 밀러에게 도전이라도 하듯 뒤뜰에서 파닥파닥 뛰어다니고 있는 날렵한 새침데기 울새들, 엘리자베스가 우유를 받으러 오는 쪽문을 뒤덮은 짙은 녹색 담쟁이덩굴, 새싹을 틔워 멋을 부린 옛 묘지를 빙 둘러선 전나무들, 심지어는 묘지도 봄을 느끼고 있어. 무덤 머리마다 온갖 종류의 꽃들이 피우고 푸른 잎을 틔워 ‘묘지에서도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고 자랑하는 듯해. 며칠 전날 밤에도 난 아주 즐겁게 묘지를 산책했어(레베카 듀는 내가소름 끼치는 산책을 나가는 취미가 있다고 여기는 게 틀림없어. 나한테 그런 음산한 곳으로 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한 걸 보면 그래).해 질무렵 봄 향기가 솔솔 풍겨오는 묘지의 푸른 길을 천천히 거닐며 나단 프링글 부인은 정말로 남편을 독살하려 했을까 생각해봤어. 나단 부인의 묘는 어린 새싹과 흰 백합에 둘러싸여 한 줌의 티도 없이 순박해 보여 괜한 의심이라고 결론을 내렸지.
이제 한 달만 있으면 여름방학이고 그럼 집에 돌아갈 수 있어! 나는 지금 ‘초록 지붕 집’ 과수원에 서 있는 하얀 눈을 뒤집어쓴 것처럼 하얀 꽃을 활짝 피운 나무들을 생각해. ‘반짝이는 호수’ 위의 그 낡은 다리며, 바다의 속살거림, ‘연인의 오솔길’의 여름날 오후도. 그리고 물론 네 생각도.
오늘 밤은 제대로 된 펜으로 글을 쓰고 있거든, 길버트. 그래서…….
(2페이지 생략)

아까 저녁 무렵에 깁슨 댁을 다녀왔어. 마릴라 아주머니가 한번 다녀오라고 했거든. 화이트 샌즈에 살 때 알던 사람들이래. 그래서 한번 찾아갔는데 그 뒤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가고 있어. 내가 가면 폴린이 아주 좋아해. 난 폴린이 너무 가여워. 폴린은 말 그대로 자기 어머니의 노예야. 깁슨 부인은 참 지독한 할머니거든.
아도니람 깁슨 부인은 나이가 여든 살이나 되었고 온종일 휠체어에 앉아서 살아. 15년 전에 서머사이드로 이사 왔대. 폴린은 그 집 막내딸인데 나이는 마흔다섯 살이야. 폴린의 오빠와 언니들은 모두 결혼했는데, 자기 어머니를 자기 집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한대. 그래서 폴린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어머니의 손발 노릇을 다 하고 있어. 폴린은 몸집이 작고 얼굴빛도 창백한데 황갈색 눈과 윤기 나는 연한 갈색 머리가 참 아름다운 사람이야. 살림은 넉넉한 집이라 어머니 일만 아니면 폴린은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교회 부인회 일이며 선교 단체 일, 그리고 교회 만찬회와 환영회 같은 행사를 계획하고 주최하는 일도 아주 즐거워해. 시내에서 가장 훌륭한 얼룩자주달개비를 갖고 있다는 것도 큰 자랑으로 여기지. 그렇게 남부러울 것 없이 살 수 있었을 사람인데 지금 폴린은 외출 같은 건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 일요일에 교회도 마음대로 갈 수 없을 정도지. 폴린이 어떻게 하면 이런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지 도무지 방법이 보이질 않아. 깁슨 부인은 아마 백 살까지는 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깁슨 부인은 다리는 쓰지 못하더라도 입은 아무런 문제도 없거든. 깁슨 부인이 가만히 앉아서 가여운 폴린에게 온갖 비난을 다 늘어놓는 걸 보면 내가 다 화가 나. 하지만 폴린 말로는 어머니가 나를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옆에 있으면 자기에게 아주 잘해주는 거래. 사실이 그렇다면 내가 없을 때면 도대체 폴린에게 어떻게 대할까? 생각하면 분노가 다 치밀어.
폴린은 어머니에게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는 자기가 입을 옷도, 스타킹 한 켤레도 못 사. 어떤 일이건 깁슨 부인의 허락이 떨어져야 할 수 있다고. 옷도 다 닳을 때까지 입고, 또 뒤집어서 다시 입어야 한대. 폴린은 같은 모자를 몇 년이나 썼는지 몰라.
깁슨 부인은 집에서 무슨 소리라도 나면, 심지어는 숨 쉬는 소리마저 질색을 해. 평생을 웃지 않았다는 말도 있어. 나도 깁슨 부인이 웃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부인 얼굴을 보면서 웃으면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폴린은 자기 방마저도 가져본 적이 없어. 어머니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자야 하거든.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매 시간마다 깨어나서 어머니 등을 주물러주고 약을 챙겨주고 뜨거운 물을 대령하면서 말이야. 미지근한 물도 아니고 뜨거운 물을!

그뿐만이 아니야. 베개를 바꾸어주고 뒤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나가서 살펴보아야 하지. 깁슨 부인은 오후에 잠을 자고 밤에는 폴린에게 무슨 일을 시킬게 없나 연구하면서 보내나 봐.
그래도 폴린은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아. 언제나 어머니를 다정하고 너그럽게 대하면서 모든 일을 인내하지. 폴린이 사랑해줄개가 한 마리 있어 그나마 다행이야.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뜻대로 해본 일이라고는 이 개를 기른 것 하나래. 그것도 근처에 도둑이 드는 바람에 도둑을 지키는데 좋을 거라고 여겨서 깁슨 부인이 허락한 거래. 폴린은 어머니 앞에서는 개를 귀여워하는 모습을 감히 보이지 않는대. 깁슨 부인은 개를 싫어하고 뼈나 물어온다고 불평해대니까. 하지만 개를 내쫓아버려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대. 자기에게 필요하니까 그런 거지.
내가 드디어 폴린에게 뭔가를 줄 기회를 갖게 될 것 같아. 난 꼭 그렇게 할 거야. 폴린에게 하루 동안의 자유를 줄 거라고. 그렇게 되면 난 다음 주말 ‘초록 지붕 집’에 가는 걸 포기해야 하지만.
오늘 밤 내가 그 집에 갔을 때 폴린은 울고 있었어. 깁슨 부인은 내가 오랫동안 궁금해하지 않도록 무슨 일인지 얘기를 했지.
“폴린이 집을 떠나고 싶어 해. 나를 떠나려 한다고, 앤. 내가 아주 딸을 잘 두었지, 응?”
부인이 그렇게 말했어.
“꼭 하루예요, 어머니.”
폴린이 억지로 미소를 띠고 눈물을 삼키면서 말했어.
“꼭 하루라고 말을 하는 것 좀 봐. 글쎄, 내 하루하루가 어떤지 알아, 앤? 내 하루가 어떤지는 누구나 알아. 하지만 병들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보면 하루가 얼마나 긴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앤은 내 하루가 어떤지 몰라. 앞으로도 절대로 알 일이 없기를 바라지.”
난 깁슨 부인이 지금 전혀 고통당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그래서 동정하지 않기로 했어.
“물론 누가 대신 어머니를 돌봐드리도록 해두고 갈 거예요.”
폴린이 말했어. 그리고 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했지.
“내 사촌 루이저가 다음 주 토요일에 화이트 샌즈에서 은혼식을 올릴 예정인데 나를 초대했어요. 루이저가 모리스 힐튼과 결혼할 때 내가 들러리를 섰거든요. 어머니가 허락만 해주시면 난 꼭 가보고 싶어요.”
“내가 만일 혼자 죽어야만 한다면 죽어야겠지. 난 이 일을 네 양심에 맡기 마, 폴린.”
깁슨 부인이 말했어.
깁슨 부인이 양심에 맡기겠다는 말을 한순간에 폴린의 갈등은 끝이 나버린 것을 난 알았지. 깁슨 부인은 평생 모든 일을 사람들의 양심에 맡기면서 살아왔거든. 내가 듣기로는 오래전에 누군가 폴린에게 청혼했을 때도 깁슨 부인은 그 결정을 폴린의 양심에 맡기는 걸로 결혼을 막았대.
폴린은 눈물을 훔치고 억지로 미소를 짓고는 수선하던 드레스를 다시 집어 들었어. 끔찍하게 보기 흉한 녹색과 검은색 체크무늬 옷이었지.
“이제 샐쭉해 있지는 마라, 폴린. 난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하고는 절대로 같이 못산다. 그리고 그 드레스에 목깃 좀 달아라. 세상에나, 앤, 저 애는 저 옷을 목깃도 달지 않고 입으려고 했어. 내가 허락만 했으면 목이 깊숙이 팬 옷도 입고 다닐 거라고.”
난 가여운 폴린을 보았지. 좀 살이 쪘지만 아직도 어여쁜 폴린의 목은 높고 뻣뻣한 심이 박힌 목깃으로 둘러싸여있었어.
“목깃이 달리지 않은 옷이 유행이에요.”
내가 말했지.
“목깃이 달리지 않은 옷은 점잖지 못해.”
깁슨 부인이 말했어.(그때 난 목깃이 달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어.)
“그리고 난 모리스 힐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크로켓 집안사람이고 모리스는 점잖지도 못해. 아무 데서나 자기 아내한테 키스나 해대고.”
깁슨 부인은 그게 다 같은 일이라는 듯 말을 계속했어.(내게 키스할 때 분명히 적절한 곳에서 할 수 있겠어, 길버트? 내 생각에 깁슨 부인은 목덜미에다 키스하는 것을 가장 부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
“하지만 어머니, 그날은 교회 마당을 날뛰고 다니던 하비 위더의 말에 루이저가 하마터면 밟힐 뻔했다가 용케 살아난 날이었잖아요. 모리스가 좀 흥분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폴린, 제발 내 말에 토 좀 달지 마라. 그래도 난 교회 계단이 키스하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의견이란 게 누구에게 무슨 소용이나 있겠니. 모든 사람이 내가 얼른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마당에. 그래, 내 자리가 저 무덤밖에 더 있겠어. 나도 내가 너한테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안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 아무도 날 원하지 않아.”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폴린은 애원했어.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어. 내가 가지 말라는데 넌 지금 그 은혼식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잖아.”

“아니요, 안 가겠어요. 어머니가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요. 그러니 그 일로 흥분하지 마세요.”
“오, 난 좀 흥분하는 것도 안 된다는 말이냐, 응 그래? 내 지루한 삶에 활기를 가져보려고 하는 것조차도? 아니 벌써 가려고, 앤?”
거기 더 머물렀다가는 내가 돌아버리든지 아니면 호두처럼 쪼글쪼글한 깁슨 부인의 따귀라도 한 대 때려줄 것만 같았어. 그래서 아이들 시험지를 채점해야 한다고 하고 나왔지.
“뭐, 우리처럼 두 늙은 여자가 젊은 사람에게 무슨 재미가 있으려고. 폴린도 기분이 안 좋고, 그렇지 폴린? 아니 굉장히 안 좋지. 그러니 앤이 가겠다고 나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깁슨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어.
폴린이 베란다까지 나와 나를 배웅해주었어. 조그만 정원 위로는 달빛이 빛났고 항구도 달빛을 받아 반짝였지.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와 하얀 꽃을 피운 사과나무 가지를 흔들리게 했지. 봄, 봄이야! 깁슨 부인도 자두나무가 꽃을 피우는 일을 막진 못하지. 그런데 폴린의 부드러운 회색 눈은 눈물로 가득했어.
“난 루이저의 은혼식에 꼭 가고 싶어요.”
폴린이 긴 한숨을 내쉬며 절망스럽게 말했어.
“가도록 해요.”
내가 말했어.
“오, 안 돼요. 난 갈 수 없어요. 우리 어머니가 절대로 보내주기 않아요. 그냥 잊어버리겠어요. 오늘 밤 저 달빛은 참 곱기도 하죠?”
폴린이 아주 유쾌한 목소리로 커다랗게 말했어.

“난 달을 쳐다보면서 하는 소리 중에 제대로 된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거기 서서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가서 내 빨간색 실내화나 가져와라. 위에 동그랗게 털이 달린 신발 말이야. 이 신발은 발이 눌려서 아파. 내가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신경 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난 깁슨 부인이 얼마나 고통을 받든지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어. 가여운 폴린! 이제 단 하루만이라도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게 될 거예요. 친구 은혼식에 갈 수 있을 테니까. 나, 앤 셜리가 약속해요.
집으로 돌아와서 레베카 듀와 미망인들에게 그 모든 얘기를 해주었어. 우리는 신나게 깁슨 부인에게 온갖 모욕적인 말들을 퍼부어주었지. 케이트 아주머니는 내가 폴린을 은혼식에 가도록 깁슨 부인의 허락을 받아 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신대. 하지만 레베카 듀는 나를 믿는다고 했어.
“미스 셜리가 못 하는 일이면 아무도 할 수 없어요.”
얼마 전에 톰 프링글 부인 집에서 저녁을 먹었어. 나를 하숙시켜주지 않았던 그 부인이야.(레베카는 나처럼 수월한 하숙생은 없을 거래. 늘 저녁 식사에 초대되어 가니까.)그 집에 가보고 난 그 집에서 날 받아주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 톰 프링글 부인은 마음도 좋고 상냥한 데다 파이 만드는 솜씨도 아주 좋은 사람이지만 그 집은 ‘윈디 포플러’도 아니고 ‘도깨비 길’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분이 케이트 아주머니나 채티 아주머니, 레베카 듀도 아니고. 난 이분들이 좋아.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난 여기서 하숙할 거야. 내 의자는 항상 미스 셜리의 의자로 불려. 그리고 채티 아주머니 말로는 내가 없을 때도 레베카 듀는 내가 있을 때처럼 식탁에 내 자리를 마련해둔대. 그래야 덜 쓸쓸해 보인다고. 가끔씩 채티 아주머니의 기분은 좀 복잡해져. 하지만 이젠 나를 이해하고 내가 고의로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할 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안대.
엘리자베스와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산책을 나가고 있어. 캠벨 부인도 허락한 일이야. 하지만 더 자주는 안 되고 일요일에는 아예 안 된대. 봄이 되면 엘리자베스가 지내기 한결 수월해져. 그 음산한 저택에도 햇볕이 좀 들고 집 밖도 나뭇가지들이 춤을 추면서 더 아름다워지거든.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기회만 있으면 밖으로 나가는 걸 좋아해. 가끔씩은 시내로도 데리고 나가서 조명이 화려하게 밝혀진 가게들을 구경시켜줘. 하지만 대부분은 세상의 끝까지 이어지는 저 길 아래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지. 모험심과 기대를 갖고 모퉁이마다 다 돌아가 봐. 혹시 거기서 내일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언덕들은 모두들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의지하고 있어. 내일이 되면 엘리자베스가 해보고 싶은 일 중 하나는 필라델피아에 가서 교회의 천사를 보는 거야. 성 요한이 묵시록에 적은 필라델피아가 펜실베이니아 주의 필라델피아가 아니라는 걸 나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해주지 않았어.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작정이야. 안 그래도 우리는 머지않아 환상에서 깨어날 테니까. 내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누군들 못 만나겠어. 천사라면 어디에서라도 만날걸.
가끔씩 우리는 맑은 봄 공기를 뚫고 반짝이는 바닷길을 지나 순풍을 타고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지켜봐. 엘리자베스는 그 배 중에 아빠가 탄 배가 있을까 궁금해하지. 언젠가는 아빠가 올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거든. 난 왜 그가 올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엘리자베스 아빠도 자기 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아빠를 기다리는지 안다면 꼭 올 거야. 난 그가 자기 딸이 얼마나 자랐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아직도 엘리자베스를 자기 아내의 목숨을 앗아간 작은 아기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이제 곧 서머사이드 중등학교에서의 첫 해가 끝나. 첫 학기는 정말 악몽이었지만 나중 두 학기는 즐거웠어. 프링글은 아주 기분 좋은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파이네와 비교할 수 있겠어? 시드 프링글이 오늘 연령초 꽃 한 다발을 가져다주었어. 젠은 반에서 일 등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고. 미스엘런은 젠을 이해해준 유일한 선생이 나밖에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해. 내 생활의 단 하나 옥의 티라면 캐서린 브룩 선생이야. 계속해서 날 무뚝뚝하게 대하고 멀리하거든. 난 캐서린과 친구가 되어보겠다는 생각도 포기했어. 결국 레베카 듀 말대로 무슨 일이든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오, 하마터면 말하는 걸 잊을 뻔했는데 샐리 넬슨이 자기 결혼식에 들러리가 돼달라고 했어. 6월 마지막 날에 보니뷰에서 결혼식을 올린대. 보니뷰는 외진 곳에 있는 넬슨 의사의 여름 별장이야. 샐리는 고든 힐과 결혼해. 그렇게 되면 넬슨 의사의 여섯 딸 가운데 노라 넬슨 하나만 남게 돼. 레베카 듀의 말에 따르면 노라는 짐 윌콕스와 몇 년 동안이나 만났다 헤어졌다만 하고 도대체 둘의 관계에 진전이 없대. 지금은 아무도 둘이 맺어질 거라고 생각지도 않는다고 해. 나는 샐리는 아주 좋아하지만 노라와는 별로 친하지 않아. 노라는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내성적인데다 아주 자존심이 센 사람이야. 그래도 노라와 친해지고 싶긴 해. 노라는 예쁘지도 않고 애교가 있는 것도, 영리한 사람도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똑 쏘는 개성이 있거든. 그래서 노라와 친구가 되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
결혼식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에스메이 테일러가 지난달에 카터 박사와 결혼식을 올렸어. 수요일 오후라 결혼식을 보러 교회에 갈 수는 없었지만, 에스메이는 아주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고 레녹스도 옳은 일을 해서 자기 양심에 흡족하고 진정으로 기쁘다는 얼굴이었대. 사이러스 테일러 씨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됐어. 그날 저녁 식사 이야기도 곧잘 하지. 이제 그 이야기는 그저 재밌는 우스갯소리가 된 거야. 사이러스 씨는 내게 “그 후로는 절대 골을 낼 용기가 나지 않아. 이번에는 내가 바느질을 했다고 우리 집 사람이 얘기해버릴지도 모르잖아.” 하고 말했어. 그리고 잊지 말고 두 미망인에게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어. 길버트, 사람들이 무척 재미있어. 인생도 그렇고. 그리고 나도 사는 게 참 재밌어.

영원히 더더욱 사랑해!

추신: 해밀턴 씨네 목장에 있는 우리 늙은 붉은 소가 점박이 송아지를 낳았어. 우리는 석 달 동안이나 루 헌트네서 우유를 사 마셨는데, 레베카 듀는 이제 우리도 다시 크림을 만들 수 있대. 헌트네 우유탱크는 마르는 일이 없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자기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믿는대.
레베카 듀는 처음부터 송아지가 태어나는 일은 없어야 했대. 해밀턴 씨는, 우리 소가 송아지를 낳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케이트 아주머니를 설득했어야 했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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