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13~14

나단비 | 2024.03.31 13:59:49 댓글: 0 조회: 105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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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 부인이 징징거렸다.
“아이고, 앤도 늙고 병들어 자리에 누우면 동정심이 좀 생길라나.”
“제가 동정심이 없어서라고 생각지 마세요, 깁슨 아주머니.”
앤은 지금 깁슨 부인의 목이라도 졸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30분 동안이나 붙들고 설득해보았지만 도무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 절망적인 짓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은 마음을 폴린의 애절한 눈빛을 생각해 간신히 억눌렀다.
“제가 아주머니를 외롭지도 불편하지도 않게 해드릴게요. 하루 내내 제가 여기 있으면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드리겠다고요.”
“오, 난 아무에게도 소용없는 사람이란 걸 알아. 그런 사실을 내게 자꾸 되새길 필요 없다고, 앤. 난 어느 때든 무덤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 그러니 폴린은 자기가 원하면 언제라도 시시덕거리고 다닐 수 있다고. 내가 여기 사는 동안만큼은 버림받은 느낌으로 살고 싶지 않아. 요즘 젊은 것들은 도대체 분별력이란 게 없어. 경박해, 너무 경박하다고.”

앤이 무슨 말을 하건 깁슨 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앤은 분별력 없는 경박한 젊은이가 자기라는 건지 폴린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있잖아요, 깁슨 아주머니, 폴린이 사촌의 은혼식에 가지 못하면 사람들이 아주 끔찍한 말들을 할 거예요.”
“말이라니! 무슨 말들을 한다는 거야?”
깁슨 부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사랑하는 깁슨 아주머니,(어이구, 이 마음에도 없는 형용사를 붙인 것을 부디 용서해주시길)아주머니도 그 연세까지 살아오시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 없이 말들을 참 많이도 하는지 보셨죠?”
“내게 나이 이야기를 할 건 없어. 뭘 하든 사람들이 얼마나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지도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고. 이 동네엔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다니는 못된 인간들이 우글거린다는 것도 내 잘 알지.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설마 그 사람들이 내 얘기를 나불거리는지는 몰랐는걸. 내가 늙은 폭군이라고들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폴린에게 가지 말라고 한 적도 없어. 그 애의 양심에 맡긴다고 했을 뿐이지.”
깁슨 부인이 쏘듯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 말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앤은 용의주도하게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깁슨 부인은 한참 동안 열심히 박하사탕을 빨고 나더니 말했다.

“화이트 샌즈에 지금 볼거리가 유행하고 있다고 해서.”
“어머니, 난 이미 볼거리를 앓았어요.”
“볼거리를 두 번 앓는 사람도 있다더라. 네가 두 번이나 앓게 될지 누가 알아, 폴린. 넌 무슨 병이 돌기만 했다 하면 다 걸려오잖아. 네가 아침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아 네 옆에서 지샌 밤이 얼마나 많았는데, 아, 어머니의 희생 따윈 오래 기억되지 않는 법이지. 거기다 화이트 샌즈까지는 어떻게 갈 건데? 넌 기차를 타본 지도 오래되었잖아. 토요일 밤에 돌아오는 기차도 없고.”
“토요일 아침 기차를 타면 되고, 돌아올 때는 제임스 그레거 씨가 데려다 줄 거예요.”
앤이 말했다.
“난 제임스 그레거는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사람 어머니는 타부시 집안사람이잖아.”
“제임스 그레거가 4인용 마차를 끌고 금요일에 거길 가요. 그러니 폴린을 같이 태워 가면 되긴 하지만 기차로 가는 게 더 좋을 거예요, 깁슨 아주머니. 서머사이드에서 타서 화이트 샌즈에서 내리면 되니까요. 갈아탈 필요도 없이요.”
“뭔가 꿍꿍이가 있어. 왜 자꾸 폴린을 보내려고 하는 거지, 앤? 그 이유를 말해봐.”
깁슨 부인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앤이 구슬 같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웃었다.
“폴린은 아주머니에게 너무나 착한 딸이니까요. 하루쯤 쉬는 날도 있어야죠, 다른 사람처럼요.”

이런 앤의 웃음 띤 얼굴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그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이 무서워서인지 깁슨 부인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이 휠체어에서 벗어나 하루쯤 쉬고 싶어.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야.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나는 그저 이 괴로움을 말없이 참아내야만 한다고. 그래, 꼭 가야만 한다면 하는 수 없지. 폴린은 원래 자기 고집대로만 하는 사람이니까. 볼거리에 걸리거나 이상한 독모기에 물려도 내 탓일랑 마라. 나는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해나가야겠지. 앤이 여기 와 준다고는 하지만 앤은 폴린만큼 내 생활 방식에 익숙지 못하잖아. 그래, 단 하루만이니 어떻게든 견딜 수 있겠지. 어쩔 수 있나. 이미 몇 해 동안이나 덤으로 살아온 삶인데 내일 당장 죽어도 대수로울 것도 없지.”
결코 너그러운 허락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허락은 떨어졌다. 앤은 너무나 기뻐 자기도 생각지 못한 행동을 해버렸다. 몸을 굽혀 깁슨 부인의 꺼칠꺼칠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앤은 들뜬 목소리로말했다.
“내 비위를 맞추려는 짓일랑 그만두고 여기 박하사탕이나 먹어봐.”
깁슨 부인이 말했다.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앤.”
폴린이 앤을 바래다주며 말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화이트 샌즈에다녀오고, 가서 모든 순간을 즐기기만 하면 돼요.”

“오, 그럼요. 그럴 거예요. 이게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앤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루이저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가 전부는 아니에요. 루이저네 옆집 러클리네 집을 팔 거래요. 난 그 집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꼭 가보고 싶어요. 메리 러클리는 지금은 하워드 플레밍 부인이 되어 서부에서 살고 있죠. 내 어린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예요. 우리는 꼭 자매처럼 지냈어요. 나는 러클리 집에 가서 노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그 시절로 돌아간 꿈도 자주 꾸는걸요. 어머니는 내가 꿈을 꾸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세요. 미스 셜리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꿈은 아무나 꿀 수 있죠. 꿈을 꾸는데 나이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그리고 꿈은 절대로 나이를 먹지 않죠.”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 기뻐요. 오, 앤, 세인트로렌스 만을 다시 볼 수 있다니! 15년이나 못 봤어요. 저 항구도 아름답지만 세인트로렌스 만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아요. 모두 앤 덕분이에요. 어머니는 앤을 좋아하니까 나를 보내주는 거예요. 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어요. 앤은 언제나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에요. 앤이 방으로 들어오면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기분이 되는 걸 아세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멋진 칭찬이에요, 폴린.”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앤. 내겐 적당히 입을 만한 옷이 없어요. 낡은 검은색 호박단 드레스밖에는. 그 옷은 은혼식에 입고 가기에는 너무 어둡겠죠? 또 살이 빠져서 옷이 너무 커졌어요. 6년이나 된 옷이니까요.”
“어떻게든 어머니에게 옷을 새로 마련해달라고 해야죠.”

앤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깁슨 부인은 돌처럼 완고했다. 루이저 힐튼의 은혼식에는 폴린의 낡은 호박단 드레스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6년 전에 한 마에 2달러씩 주고 옷감을 사서 제인 샤프에게 3달러를 주고 만들어달라고 한 옷이야. 제인은 옷 만드는 솜씨가 좋지. 제인의 어머니는 스마일리 집안사람이거든. 밝은 색깔 옷을 입고 싶다는 저 생각하고는, 폴린 깁슨! 저 애는 그렇게 하라고만 하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주홍 색깔 옷도 입고 다닐 거야, 앤. 그러고 싶어서 내가 죽기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래, 넌 곧 나 때문에 네 멋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면하게 될 거야, 폴린. 그럼 네 멋대로 천하고 경박스럽게 옷을 입고 다녀라.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런 꼴 못 본다. 그리고 네 모자는 왜 그래? 이젠 너도 보닛18)을 써야 할 나이야.”
가여운 폴린은 보닛은 절대로 쓰고 싶지 않았다. 보닛을 쓸 바엔 차라리 평생 그 낡은 모자를 쓰는 편이 나았다.
“그냥 마음의 즐거움만으로 만족하고 옷에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두 사람은 뜰로 나와 백합과 금낭화를 꺾어 미망인들에게 줄 꽃다발을 만들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내 은회색 포플린 드레스 알죠? 그걸 빌려드릴게요.”
거실 창가에 앉아 감시하는 깁슨 부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앤이 말했다.
폴린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만 꽃바구니를 떨어뜨려 앤의 발치에 분홍과 흰색의 꽃무리를 만들어버렸다.

“오, 그럴 수 없어요! 어머니가 허락하지도 않을 거고요.”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를 거예요. 자, 들어봐요! 토요일 아침 그 옷을 검은 호박단 드레스 아래 입어요. 옷은 잘 맞을 거예요. 좀 길겠지만 내일 제가 세로로 장식 주름을 좀 잡아 줄여놓을게요. 그런 주름이 요즘 유행이잖아요. 그 옷은 목깃도 없고 소매도 팔꿈치까지만 와서 아무도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갈매기 만에 도착하자마자 호박단 드레스는 벗어버려요. 은혼식이 끝나고 돌아올 때 포플린 옷은 갈매기 만에 놓아두면 돼요. 다음 주말에 제가 집에 갈 때 가져올 테니까요.”
“하지만 내가 입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는 옷이 아닐까요?”
“조금도 화려하지 않아요. 회색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이니까요.”
“이렇게 어머니를 속여도 괜찮을까요?”
폴린은 주저했다.
“이런 경우에는 괜찮아요, 폴린, 기쁜 날에 검은 옷은 금물이에요. 검은 옷은 신부에게 불운을 가져다주는 색깔이라고요.”
앤은 태연히 잘라 말했다.
“오, 그래선 안 되죠. 그런다고 어머니한테 해가 되는 일도 아니고. 어머니가 토요일을 잘 보냈으면 좋겠는데. 내가 없으면 식사를 전혀 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내가 어머니의 사촌언니인마틸다의 장례식에 갔을 때도 어머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때 어머니를 돌봐드렸던 미스 프라우티 할머니가 말해줬죠. 사촌언니마틸다가 죽어 몹시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식사를 잘하실 수 있도록 돌봐드릴게요.”
“앤은 어머니를 어찌 대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까.”
폴린은 걱정을 좀 놓는가 싶었다.
“어머니 약은 시간을 맞추어 잘 챙겨드릴 거죠? 아, 역시 안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왜 그렇게 오래 밖에 있어. 꽃다발을 마흔 개는 만들었겠다. 어째서 그 미망인들은 우리 꽃을 가지고 싶다는 거야, 꽃이라면 자기 집에도 잔뜩 있으면서. 내가 레베카 듀의 꽃을 원했다면 평생을 기다려야 했을 거야. 나는 목이 마르단 말이야. 아무도 물을 가져오는 사람도 없고.”
깁슨 부인이 성마르게 소리를 질렀다.
금요일 밤 폴린은 몹시 흥분해 앤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목이 아픈데 혹시 볼거리에 걸린 건 아니냐는 것이다. 앤은 급히 갈색 종이에 은회색 포플린 옷을 싸들고 폴린을 안심시키려고 갔다. 앤은 그 옷을 라일락 나무에 감추어두었다. 그리고 그날 밤 늦게 폴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걸 꺼내 위층에 있는 작은 방으로 올라갔다. 그 방에서 잠을 자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옷을 보관하고 갈아입는 방이었다. 폴린은 그 옷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마 이렇게 목이 아픈 이유도 어머니를 속인 데 대한 벌을 받는 것인지 몰랐다. 그렇다고 루이저의 은혼식에 그렇게 기분 나쁜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토요일 아침 일찌감치 앤은 밝은 표정으로 깁슨 댁으로 갔다. 오늘같이 빛나는 여름날이면 앤은 더욱 아름다웠다. 앤의 온몸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고, 황금빛 공기 속을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날씬한 여신처럼 움직였다. 앤이 들어서자 방도 살아났다. 그 암울한 방도 빛이 났다.
“걸음새가 아주 이 땅을 다 차지한 사람 같구먼.”
깁슨 부인은 비꼬듯 한마디 던졌다.
“정말 그런 기분이에요.”
앤은 유쾌하게 대답했다.
“너무 젊어서 그래.”
깁슨 부인이 불쾌하다는 듯 내뱉었다.
“‘내 마음이 기뻐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19)이건 권위 있는 성경에 나와 있는 말이에요.”
앤이 말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나니’20)이 말도 역시 성경에 나와 있지.”
깁슨 부인이 앤의 말을 되받아쳤다. 학사인 앤의 말을 이처럼 훌륭하게 맞받아쳤다는 만족감으로 깁슨 부인은 기분이 꽤 좋아졌다.
“나는 마음에 없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인데, 그 파란 꽃이 달린 모자가 앤에게 참 잘 어울리는군. 그 모자를 쓰니 머리도 그렇게 빨갛게 보이지도 않고. 이렇게 젊고 싱싱한 젊은 아가씨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폴린? 너도 다시 팔팔한 아가씨가 되고 싶다는 생각 안 들어, 폴린?”
폴린은 너무 행복하고 들떠 있어 지금 당장이야 자기 자신 외에 아무도 되고 싶지 않았다. 앤은 2층 방으로 함께 올라가 폴린이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오늘은 너무 기쁜 하루가 될 것 같아요. 그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 너무 즐거워요, 앤. 목이 아픈 것도 깨끗이 나았고 어머니는 저렇게 기분이 좋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요. 어머니가 비꼬는 말이라도 말을 한다는 건 기분이 좋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화가 나거나 신경질이 나면 부루퉁해져 말을 안 하거든요. 감자는 껍질을 벗겨두었고, 고기는 아이스박스에, 어머니의 블라망즈 과자21)는 지하실에 있어요. 저녁 식사에 쓸 통조림 닭고기와 스펀지케이크는 식품저장실에 있구요. 나는 어머니 마음이 변할까 봐 조마조마해요.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아마 미쳐버릴 거예요. 오, 앤, 이 은회색 옷을 입어도 정말 괜찮을까요?”
“당장 입어요!”
앤은 한껏 선생다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폴린은 그 말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회색 옷은 꼭 맞았다. 목깃이 없고 팔꿈치까지 오는 소매에는 우아한 레이스 장식이 달렸다. 앤이 머리를 손질해주자 폴린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흉한 검은 호박단 드레스로 이 아름다운 옷을 감싸버리기가 정말 싫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 호박단 드레스는 회색 드레스를 안전하게 꼭꼭 숨겨주었다. 그리고 그 헌 모자도 머리에 얹혀졌다. 이 모자 역시도 루이저 집에 도착하면 벗어버릴 것이다. 새 구두도 신었다. 깁슨 부인이 구두만큼은 새로 사도록 허락해주었다. 뒤꿈치가 남이 볼까 겁날 만큼 높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혼자서 기차를 타고 가면 모두들 깜짝 놀랄 거예요. 사람들이 누군가 죽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어요. 루이저의 은혼식을 죽음 같은 것과 연결해 생각하는 건 정말 싫거든요. 어머나, 향수잖아요, 앤! 사과꽃 향기군요! 어쩌면 이토록 좋은 냄새가 날까요! 살짝만 뿌려도 돼요. 난 항상 항수를 뿌리면 숙녀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는 향수 같은 걸 사도록 허락해주지 않았지만. 오, 앤, 우리 강아지 밥 주는 걸 잊지는 않겠죠? 식품 저장실 접시에 뼈다귀를 덮어두었어요. 저…… 있잖아요.”
폴린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저 개가 집 안에다 실례는 하지 않길 바랄게요.”
폴린은 집을 나서기 전 어머니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외출에 기대와 흥분 그리고 안에 감춰 입은 포플린 드레스에 죄책감이 뒤섞여 안색이 아주 묘했다. 깁슨 부인은 그런 폴린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바라보았다.
“세상에나, 얘 꼴이, 너 지금 런던으로 여왕이라도 알현하러 가는 거니, 그런 거야? 너무 화려해. 사람들이 너한테 색칠을 해놓은 줄알겠다. 색칠은 하지 않았겠지?”
“오, 아니에요, 어머니. 절대로.”
폴린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행동을 조신하게 하거라. 앉을 때도 발목을 얌전하게 포개고 앉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든지 말을 너무 많이 해서도 안 된다.”
“네, 조심할게요, 어머니.”
폴린이 불안하게 시계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약속했다.
“내 사르사파릴라22)과실주를 한 병 루이저에게 갖다주어라. 나는 루이저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애 어머니가 태커베리 집안 태생이니까. 병은 도로 가져와. 그리고 고양이 새끼를 주면 받아와서는 안 된다. 루이저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고양이 새끼를 나눠주잖아.”
“안 그럴게요, 어머니.”
“물속에 비누는 빠뜨려놓지 않았겠지?”
“안 그랬어요, 어머니.”
다시 한 번 불안스럽게 시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신발 끈은 묶었니?”
“그럼요, 어머니.”
“냄새가 얌전하지를 못하구나. 향수에 아주 폭 빠졌다 나왔어.”
“오, 아니에요, 어머니. 아주 조금, 아주 아주 조금만 발랐어요.”
“내가 흠뻑 발랐다고 하면 흠뻑 바른 거야. 옷 겨드랑이가 뜯어지지는 않았니?”
“오, 아니에요, 어머니.”
“어디 보자.”
거역해선 안 될 목소리였다.
폴린이 몸을 떨었다. 팔을 들어 올렸을 때 회색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보였다!
“그래, 가도 좋다. 네가 돌아왔을 때 내가 여기에 앉아 있지 않으면 내가 레이스 숄을 쓰고 검은색 공단 덧신을 신고 잠들고 싶어 했다는 걸 잊지 말아다오. 그리고 내 머리가 제대로 빗겨져 있는지도 살펴봐 주기 바란다.”
긴 한숨과 함께 나온 말이었다.
“기분이 언짢으세요, 어머니?”
속에 입은 포플린 드레스 때문에 폴린의 양심은 아주 예민해져 있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가는 것을 그만두고…….”
“그럼 그 구두에 헛돈을 썼단 말이냐? 어서 가거라. 계단 난간을 타고 내려가다 넘어지지나 말고.”
그 말에는 폴린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낸시 파커의 결혼식에 가서도 그랬잖아.”
“그건 35년 전의 일이에요! 정말 내가 지금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제 나가야지. 왜 아직도 여기서 꽥꽥 소리나 지르고 있어. 기차를 놓치고 싶으냐?”
폴린이 서둘러 나가버려서 앤은 후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앤은 저 늙은 깁슨 부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기차가 떠나버릴 때까지 폴린을 잡아두려는 악마 같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지나 않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자, 이제야 한숨 돌리겠군. 집이 너무나 너저분한 꼴이 되었어. 이 집이 언제나 이렇지는 않아. 폴린이 지난 며칠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어. 저 꽃병을 약간만 왼쪽으로 옮겨놓아 주겠어? 아니, 조금만 뒤로. 저 램프 덮개가 기울어졌구먼. 아니, 조금만 더 반듯하게. 저 블라인드 한쪽이 다른 쪽보다 조금 내려갔구먼. 똑바로 좀 맞추라고.”
깁슨 부인이 말했다.
운 나쁘게도 앤이 블라인드를 너무 힘주어 당겨버렸던지 끈이 손가락에서 빠져나가 쉭 소리를 내며 꼭대기까지 쑥 올라가 버렸다.
“저런, 저거 좀 보게.”
깁슨 부인이 말했다.
앤은 속으로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생각했지만 블라인드를 세심하게 다시 조정했다.
“깁슨 아주머니, 이제 제가 차 한 잔 만들어드릴까요?”
“뭘 좀 먹고 싶긴 한데. 이렇게 걱정하고 소란을 피우느라 위가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 같아. 그런데 차는 제대로 끓일 수 있어? 어떤 사람은 차라리 흙탕물을 먹는 게 나을 정도로 차를 끓여 내오거든.”
깁슨 부인이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 끓이는 법은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배웠어요. 기다려보세요. 그전에 먼저 아주머니를 베란다로 모셔다 드릴게요. 햇볕이 따뜻해서 기분이 아주 좋아질 거예요.”
“나는 몇 년이나 베란다에 나간 적이 없어.”
깁슨 부인은 반대했다.

“오늘은 날씨가 아주 화창해서 바깥 날씨도 몸에 해롭지 않아요. 사과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어요. 아주머니에게 꽃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볼 수 없잖아요. 그리고 오늘은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노먼 존슨 씨네 목장에서 클로버 향기도 실려와요. 차를 가져올 테니 우리 함께 마셔요. 차를 다 마시고 나면 저는 자수를 놓으면서 우리 둘이 여기 앉아 지나는 사람들 흉을 보자구요.”
깁슨 부인은 점잖은 척하며 말했다.
“남을 흉보는 건 점잖지 못해. 그런 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할 짓이 못 된다고, 앤. 그런데 그 머리는 모두 원래 그런 건가?”
앤은 웃었다.
“한 가닥 남김없이요”
“머리카락이 그렇게 빨개서 참 안됐군. 요즘은 빨간 머리도 좋아들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나는 앤이 웃는 모습이 좋더군. 우리 폴린처럼 몰래 킥킥거리면서 웃으면 짜증이 나거든. 글쎄, 밖에 나가야만 한다면 나가지, 뭐. 감기에 걸려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책임은 앤이 져야 해. 내 나이가 여든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하루도 모자라지 않아. 데이비 오킴 노인네가 내 나이가 아직 일흔 아홉이라고 온 서머사이드에 말을 했다는 얘기는 내 들었지만. 그 노인네 어머니는 워트 집안사람이야. 워트 집안사람들은 본디 샘이 많거든.”
앤은 요령 있게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와 베개도 편안하게 바로 잡아주었다. 그러고는 곧 차를 끓여왔는데, 깁슨 부인은 차 맛에 만족했다.

 “마실 만하군. 아, 내가 1년 동안이나 죽밖에는 먹지 못한 적이 있었어. 모두들 내가 병을 이겨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그때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났더라면 좋았으리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 앤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했던 야생 사과나무가 저건가?”
“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난 하얀 꽃들이 너무 예쁘지 않은가요?”
“별로 시적이지는 않네.”
깁슨 부인의 감상은 이것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두 잔 마신 뒤에는 기분이 나아졌고 어느새 오전이 지나고 점심 생각이 날 때가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 작은 탁자에 점심을 차려내 오겠어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난 그런 요란스럽고 우스운 장난 같은 건 사양이야. 우리가 여기 밖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걸 남들이 보면 뭐라고 하겠어. 클로버 향기를 맡으면 항상 속이 좀 메스꺼워지긴 해도 여기 나와 있는 게 나도 좋기는 하구먼. 오전이 다른 날보다 후딱 지나가버렸어. 그래도 내가 점심을 문밖에 나와 먹는 일은 없을 거야. 난 집시가 아니라고. 점심을 준비하기 전에 손은 꼭 씻어야 해. 손님방 요들을 전부 내 널은 걸 보니 스토레이 부인 집에 손님이 오는 모양이네. 저건 진정으로 우러나온 환대가 아니라고. 그저 남의 이목을 끌려는 거지. 그 부인 어머니는 캐리 집안사람이거든.”
앤이 차린 점심에 깁슨 부인도 기뻐했다.
“논문이나 쓰던 사람이 요리를 할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하긴 마릴라 커스버트가 길렀으니. 마릴라 어머니는 존슨 집안사람이었어. 폴린이 그 은혼식에 가서 탈이 날만큼 너무 많이 먹지나 않는지 모르겠구먼. 그 애는 적당한 때를 몰라. 꼭 제 아비 같지. 제 아비도 곧 배가 아파 뒹굴 걸 알면서도 딸기를 욕심 사납게 먹어댔거든. 내가 우리 집 양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던가, 앤? 그렇다면 손님방으로 가서 사진을 가져와 봐. 침대 밑에 있어. 손님방에 들어가서 서랍장 같은 델 뒤지거나 그러진 말라고. 하지만 옷장 밑에 먼지가 앉지 않았는지 살펴봐 줘. 난 폴린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아, 그래, 바로 그 사진이야. 이 사람 어머니는 워커 집안사람이지. 요즘엔 이 사람 같은 사람은 아무 데도 없어. 요즘은 모든 것이 퇴폐적이라고, 앤.”
“호메로스도 기원전8백 년에같은 말을 했죠.”
앤이 웃으며 말했다
“구약 성경을 지은 사람도 항상 그렇게 볼멘소리를 했다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놀라겠지만 우리 남편은 마음이 아주 넓은 사람이었어. 난 앤이 의과 대학에다니는 사람과 약혼했다고 들었는데, 의과 대학 학생은 술들을 많이 마셔. 그 해부학 실습실에서 견디려면 안 그럴 수가 있겠어. 술을 마시는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말라고, 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좋은 남편이 될 수 없어. 엉겅퀴니 달빛이니 하는 걸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저 싱크대를 좀 깨끗이 닦고 행주도 좀 헹구어주겠어. 난 행주에 기름기가 절어 있는 꼴은 절대로 못 보거든. 그리고 저 개밥도 줘야 할 거야. 저 개는 너무 뚱뚱해. 폴린이 밥을 너무 많이 주거든. 가끔씩은 저 개를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깁슨 부인이 말했다.
“오, 저라면 그러지 않겠어요, 깁슨 아주머니. 언제 도둑이 들지도 모르잖아요. 더군다나 이 집은 외져 있어서 집을 지켜줄 게 필요하다고요.”

“아, 마음대로 해. 난 사람들과입씨름하는게 싫어. 이렇게 기분 나쁘게 뒷골이 당길 때는 더 그래. 이건 뇌졸중이 찾아올 전조라고.”
“낮잠을 좀 주무세요. 한숨 주무시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예요. 의자 뒷부분을 낮추고 이불을 덮어드릴게요. 베란다로 나가서 낮잠을 주무시겠어요?”
“남들 앞에서 잠을 자라고? 그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식사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빠. 앤은 이상한 생각을 많이도 하는구먼. 이 거실에서 잘 수 있게 준비를 해줘. 블라인드를 내리고 파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은 꼭 닫으라고. 앤도 좀 조용히 있고 싶겠지. 그 혀가 잠시도 쉴 틈이 없었으니까.”
깁슨 부인은 낮잠을 아주 오래 푹 잘 자고 났는데도 기분은 나빠져 다시는 베란다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밤바람을 쐬어 내가 오늘 밤에 감기라도 걸려 죽게 하고 싶은 거지?”
아직 5시인데 깁슨 부인은 무엇을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앤이 가져온 음료수가 너무 차다고 불평했고, 그다음에 가져온 것은 충분히 식히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인들 이 부인 마음에 맞으랴. 개는 어디 있지? 틀림없이 실수를 했을 테지. 등이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가슴뼈가 아프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동정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의자가 너무 높다. 아니, 너무 낮다. 숄을 둘러 달라. 무릎에 담요를 씌워주면 좋겠다. 발에는 쿠션을 대주면 좋겠다. 아, 심한 샛바람이 어디서 들어오는지 앤이 살펴봐 주지 않겠느냐. 차 한 잔 끓여다주면 고맙겠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편하게 묘지에 누워 있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모두 잘됐다고 하겠지. 깁슨 부인은그렇게 끝도 없이 투덜댔다.
“해는 짧아도 길어도, 마침내 날은 저물고 저녁 노랫소리는 들려온다.”
앤에게는 오늘 하루가 결코 저물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날은 저물었고 해는 떨어졌다. 이제 깁슨 부인은 폴린이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지 안달하기 시작했다. 황혼이 내렸는데도 폴린은 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 달이 높이 솟아도 폴린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깁슨 부인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그레거 씨가 올 때까지는 폴린도 돌아올 수 없잖아요. 그레거 씨는 어떤 모임에서나 제일 마지막까지 꾸물대는 사람이에요. 그냥 잠자리에 드시겠어요, 깁슨 아주머니? 피곤하시죠. 익숙한 사람이 아니고 남이 옆에 있었으니 아무래도 불편하셨을 거예요.”
앤이 깁슨 부인을 위로했다.
깁슨 부인 입가에 조글조글한 주름이 고집스럽게 깊어졌다.
“그 애가 돌아올 때까지 나는 못 자. 앤은 돌아가고 싶으면 가라고. 내가 혼자 기다릴 테니까. 아니면 혼자 죽든지.”
9시 30분이 되자 깁슨 부인은 짐 그레거가 월요일 아침이나 되어야 돌아올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레거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 마음은 변하지 않고 단 하루를 못 넘긴다고. 거기에 일요일은 안식일이니까 집에 돌아오려면 여행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 그 사람은 앤네 학교 이사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이 교육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지?”
앤의 마음이 갑자기 심술궂게 돌아갔다. 오늘 종일 자기밖에 모르는 깁슨 부인의 손아귀에 잡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분은 시대에 뒤진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앤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깁슨 부인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잠든 척하고 있었다.
18. 여자나 어린아이들이 쓰는 모자의 하나. 턱밑에서 끈을 매게 되어 있다.
19. 전도서 2장 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20. 욥기 5장 7절.
21. 우유로 갈(葛粉) 또는 우무로 굳힌 과자.
22.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덩굴 식물.







14





밤 10시가 되자 드디어 폴린이 나타났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들어선 폴린은 다시 그 호박단 드레스를 입고 낡은 모자를 쓰고 있긴 했지만 열 살은 더 젊어 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아름다운 꽃다발을 얼른 휠체어에 앉은 심술궂은 표정의 노부인에게 내밀었다.
“신부가 이 꽃다발을 어머니에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예쁘지 않아요? 스물다섯 송이의 하얀 장미예요.”
“쓸데없는 물건이야! 나한테는 누가 결혼식 케이크 한 조각 보내주는 사람도 없었나 보구나. 요즘 사람들은 가족 간에 혈육의 정이란 것도 없나 보더라. 아, 좋은 시절은 다 지났어.”
“아니에요. 다들 어머니를 생각해요. 여기 어머니 드리려고 커다란 케이크 조각을 가져왔잖아요. 그리고 모두들 어머니 안부를 물었다구요.”
“즐겁게 보냈어요?”
앤이 물었다.
폴린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부드러운 의자에 앉으면 어머니가 화를 냈으니까.
“아주 즐거웠어요. 피로연도 아주 근사했구요. 갈매기 만의 목사님인 프리먼 씨가 와서 루이저와 모리스가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렸죠.”
폴린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짓을 하다니, 그건 신성모독이야.”
“그리고 사진사가 와서 모두들 사진을 찍었어요. 꽃이 굉장히 많아 응접실은 마치 꽃에 파묻힌 정자 같았죠.”
“꼭 장례식 같았겠구먼.”
“오, 어머니, 메리 러클리가 서부에서 왔어요. 지금은 플레밍 부인이죠. 생각나세요, 메리와 난 아주 사이가 좋았잖아요. 우린 서로를 폴리와 몰리라고 불렀어요.”
“정말 바보 같은 이름이야.”
“다시 친구를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우린 옛날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죠. 몰리의 여동생 엠마도 왔는데 정말 깨물고 싶을 정도로 통통하고 귀여운 아기를 데리고 왔어요.”
“음식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구나. 아기야 뭐 다 그게 그거지.”
부인은 투덜거렸다.
“아뇨, 어떤 아기도 똑같지 않아요. 어느 아기나 다 기적 같은 존재라구요.”
깁슨 부인의 장미를 담을 물을 가져오며 앤이 말했다.
“글쎄, 나는 아이를 열이나 낳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도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아기는 없더구먼. 폴린, 제발 가만히 좀 있지 못하겠니? 너 때문에 내가 불안해 죽을 지경이야. 너는 내가 오늘 종일 어떻게 지냈는지도 묻지않는구나. 그런 일을 기대하는 내가 어리석지.”
“묻지 않아도 알겠는걸요. 혈색이 아주 좋고 기운도 펄펄 나 보여요. 어머니랑 앤이 아주 즐겁게 지낸 모양이에요.”
그날의 즐거움을 아직 떨치지 못해 여전히 들떠 있는 폴린이 어머니에게조차 얼마쯤 장난스럽게 굴었다.
“잘 있기는 했다. 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두었어. 정말 오랜만에 누구와 재미있게 대화란 걸 해보았구나. 내가 남들이 알고 있는 만큼 그렇게 저세상과 가까이 있지는 않다고. 고맙게도 나는 아직 귀도 먹지 않았고, 노망도 나지 않았으니까. 다음에는 달나라에 갈래? 그나저나 내가 보낸 사르사파릴라 과실주는 좋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모양이구나.”
“아니요, 모두들 좋아했어요. 아주 맛이 좋다고 칭찬들이 자자했는걸요.”
“그러면 그렇다고 진즉 이야기를 할 것이지. 병은 도로 가져왔니? 아니면 그런 것을 기대한 내가 무리한 주문을 한 거냐?”
“저, 그 병은 깨져버렸어요. 누가 부엌에서 그 병을 쓰러뜨렸어요. 하지만 루이저가 그것과 똑같은 병을 하나 줬어요, 어머니.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폴린은 더듬거렸다.
“그 병은 내가 살림을 시작할 때부터 쓰던 물건이야. 루이저가 준 병이 어떻게 그 병과 같아. 이제는 그런 병은 만들 수도 없는 물건이다. 숄을 한 장 더 갖다 다오. 재채기가 나와서 말이야. 독한 감기에 걸린 게 틀림없어. 두 사람 다 내게는 밤바람이 나쁘다는 걸 잊은 모양이구나. 이러다 신경통이 다시 도지겠어.”

이때 길 위쪽에 사는 이웃이 들르자 폴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앤을 바래다주러 나왔다.
“살펴가라고, 앤.”
깁슨 부인은 꽤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 앤 덕분에 잘 보냈어. 이 동네에 앤 같은 사람이 더 있다면 훨씬 더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거야. 사람들이 앤을 보고 뭐라고 하건 나는 앤이 아주 보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깁슨 부인이 악의 없이 앤을 자기 몸으로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폴린과 앤은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든 시원한 밤길을 따라 걸었다. 폴린은 자기 어머니 앞이라면 감히 하지 못할 말을 했다.
“오, 앤, 마치 천국에 있는 것 같았어요!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될까요. 이처럼 멋진 날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어요. 앞으로 오랫동안 오늘을 추억하며 지내게 될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신부의 들러리가 돼 보는 게 얼마나 유쾌하던지. 신랑 들러리는 아이작 켄트 선장이었어요. 그 사람은 옛날 내 연인이었죠. 아니,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몰라요. 그 정도는 아니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우린 마차로 멀리까지 드라이브를 간 적도 있어요. 그 사람이 내게 두 번이나 찬사의 말을 했어요. ‘루이저 결혼식 때 당신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소. 아름다운 포도주 색깔 드레스를 입었던 것도 난 기억하오.’ 하고 말했다구요. 그 사람이 내가 입었던 옷을 기억하고 있다니 멋진 일이잖아요. 그리고 또 이렇게도 말했어요. ‘당신 머리는 예전과 다름없이 당밀 엿 색깔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그런 말이 예의에 벗어난 것은 아니겠죠, 앤?”

“아니요, 전혀요.”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에 루이저와 메리, 나, 우리 셋은 즐겁게 저녁 식사를 했어요. 나는 몹시 배가 고팠거든요. 그처럼 배가 고파본 지도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고, 음식이 위에 나쁘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으니 어찌나 즐겁던지. 저녁 식사 뒤에는 메리와 둘이 예전에 메리가 살던 집으로 가서 뜰을 거닐었어요. 옛날이야기를 하면서요. 우리가 아주 오래전에 심었던 라일락 꽃 나무들도 그대로 있더군요. 어렸을 때 우리는 아주 즐거운 여름을 보내고는 했죠. 여름이면 해 질 녘마다 바닷가로 나가 바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어요. 항구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물 위에서 파르르 떠는 별빛을 보는 일은 정말 멋졌죠. 나는 세인트로렌스 만의 밤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걸 그동안 잊고 지냈어요. 상당히 어두워져서야 집으로 돌아왔고, 그레거 씨가 떠날 준비가 되어서, 이렇게 돌아왔죠. ‘그 늙은 여자는 그날 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죠!’”
폴린은 웃으며 소설책 제목을 인용해 말을 맺었다.
“저는, 저는 폴린이 집에서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 앤, 난 지금은 아무래도 괜찮아요. 우리 가여운 어머니가 나를 필요로 하는걸요.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만도 얼마나 좋은 일인데요.”
폴린이 얼른 그렇게 말했다.
그래,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앤은 자기 방으로 돌아와 생각했다.더스티 밀러가 레베카 듀와 미망인의 눈을 피해 들어와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앤은 자기의 굴레로 걸어 들어가는 폴린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오늘 맛본 영원한 행복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나도 누군가가 항상 나를 필요로 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단다.”
앤이더스티 밀러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행복을 선물했다는 것도 아주 기분 좋은 일이야,더스티 밀러. 폴린에게 오늘 하루 자유를 선물하고 나니 내가 아주 부자가 된 것 같아. 하지만 오,더스티 밀러, 나도 언젠가는 아도니람 깁슨 부인 같은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여든 살까지 산다 하더라도 내가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더스티 밀러?”
더스티 밀러는 목 저 깊숙이에서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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