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15~17

나단비 | 2024.03.31 14:01:30 댓글: 0 조회: 90 추천: 2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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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은 결혼식 전날인 금요일 밤에 보니뷰로 갔다. 넬슨 가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열차로 도착할 결혼식 손님들을 위해 만찬을 마련했다. 넬슨 의사의 여름 별장은 크고 널따란 저택으로 길고 좁게 바다 쪽으로 뻗어 있는 가문비나무 숲에 자리를 잡았다. 집 양쪽으로 가문비나무들이 둘러싸고 그 너머로는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황금빛 모래 언덕이었다.
앤은 이 집을 처음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오래된 돌집은 비도 바람도 인간의 흥망성쇠도 두렵지 않다는 듯 언제 보아도 평화롭고 위엄이 서렸다. 유월 저녁 무렵 이 집은 젊은 생명력과 생동감으로 넘쳤다. 아가씨들의 웃음소리와 오랜만에 만나 나누는 반가운 인사말들이 오갔고, 마차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왔으며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뛰놀았다. 여기저기서 선물들도 도착했으며 누구나 할 것 없이 결혼식의 유쾌한 흥분감에 휩싸였다. 바르나바스와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넬슨 의사의 두 검은 고양이는 베란다 난간에 의젓하게 앉아 이 떠들썩한 집안 풍경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이 꼭 두 개의 스핑크스 같았다.
샐리는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와 2층으로 앤을 데려갔다.
“앤의 방은박공 창이 난 북쪽 방이에요. 물론 다른 세 분과 함께 써야 해요. 집이 온통 사람들로 북적대잖아요. 아버지는 남자들을 위해 가문비나무 숲에 텐트를 치고 있어요. 그리고 밤이 되면 유리벽이 쳐진 뒤쪽 베란다에는 간이침대를 넣을 거예요. 아이들은 모두 건초 오두막에 집어넣을 거고. 오! 앤, 나는 너무 가슴이 두근거려요. 결혼은 너무 즐거운 일이에요. 오늘 몬트리올에서 내 웨딩드레스가 도착했어요. 크림 색깔 실크 리본에 레이스 장식깃이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진주알로 자수도 놓였죠. 멋진 선물도 많이 받았어요. 이게 앤이 잘 침대예요. 다른 침대는 마미 그레이와 도트 프레이저와 시스 팔머가 잘 거예요. 어머니는 에이미 스튜어트도 이 방에 묵게 하자고 했지만 내가 안 된다고 했어요. 에이미는 내 신부 들러리를 하고 싶었는데 앤이 차지해버렸다고 앤을 미워하거든요. 하지만 난 뚱뚱한 사람을 들러리로 세우고 싶지 않았어요. 거기다 에이미는 연한 녹색 드레스를 입으면 꼭뱃멀미를 한 사람 같거든요. 어머나, 앤, 고양이 할머니가 와요! 방금 전에 도착하셔서 우리 모두 떨고 있는데요. 고모할머니를 초대하지 않을 수는 없었죠. 하지만 오늘 오실지는 몰랐어요.”
“고양이 할머니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고모예요. 제임스 케네디 부인이죠. 오, 원래 고모 이름은 그레이스예요. 토미가 ‘고양이 할머니’란 별명을 붙였어요. 늘 눈을 번뜩이며 돌아다니다가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것들을 들추어내거든요. 고모할머니의 눈은 절대로 피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놓치는 일이 있을까 봐 아침 일찍 일어나고 잠자리에도 제일 늦게 들거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심하다고 생각되는 건요, 무슨 말이든 가리지 않고 다해버린다는 거예요. 경우에 따라서는 묻지 말고 덮어두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전혀 모르셔요. 아버지는 고모할머니의 말을 ‘고양이 할머니의 어록’이라고 불러요. 오늘 밤에도 고모할머니가 우리 저녁을 망쳐버릴 거예요. 어머, 저기 와요!”
문이 열렸고 고양이 할머니가 들어왔다. 작고 뚱뚱한 몸집에 갈색 눈은 튀어나와 보였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얼굴 표정으로 꼭 나방처럼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 모습이 꼭 장난감을 찾는 고양이 같기도 했다.
“그래, 아가씨가 바로 그 미스 셜리인 모양이군. 말은 아주 많이 들었어. 그런데 내가 아는 미스 셜리하고는 전혀 다르구먼. 그 미스 셜리는 아주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는데. 그래, 샐리, 드디어 네가 결혼을 하는구나. 이제 그 가여운 노라 혼자만 남게 되었네. 네 어머니도 딸 다섯을 치웠으니 다행이지 뭐냐. 8년 전에 내가 네 어머니에게 ‘제인, 저 많은 딸들을 언제 다 치울 거야?’ 그랬다. 내가 보기엔 남자란 것도 별거 아니더라, 그저 골칫거리야. 모든 불확실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불확실한 것이 바로 결혼이야. 그렇긴 하지만, 결혼도 하지 않으려거든 여자가 이 세상에 왜 필요해? 내가 그 가여운 노라에게도 그렇게 말했지. ‘내 말을 명심해라, 노라. 노처녀가 되는일은결코 유쾌하지 않아.’ 짐 윌콕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오, 그레이스 고모할머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짐과 노라는 지난 1월에 싸우고 나서 만나지 않는다고요.”
“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일은 말을 해야 제대로 되는 법이야. 그 싸움이야기라면 나도 들었어.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내가 노라에게 ‘짐이 엘리너 프링글을 데리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알아두는 편이 좋을 거야.’ 하고 말했더니 노라는 화가 났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뛰어나가 버리더라. 베러 존슨은 여기서 뭘 하고 있다니, 우리 친척도 아닌데.”
“베러는 전부터 제 친한 친구예요, 그레이스 고모할머니. <결혼행진곡>을 쳐주기로 했어요.”
“뭐라고? 그 애가? 어이고, 실수로 장송곡이나 치지않을는지 모르겠다. 도라 베스트의 결혼식 때 톰 스콧 부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재수 없게 말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대체 어디다 다 재울 참이야. 빨랫줄에 매달려 자야 할 사람도 나오겠다.”
“모두들 잠잘 곳은 마련되어 있어요, 고모할머니.”
“그런데 샐리, 나는 네가 마지막에 가서 헬런 서머스가 그랬던 것처럼 변덕이나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리잖니. 네 아버지는 무척 신이 났구나. 내가 뭐 불행한 일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저러다 뇌졸중 발작이나 일으키지 않을는지. 내가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을 봤거든.”
“오, 아버지 걱정은 마세요, 고모할머니. 조금 흥분한 것뿐인데요, 뭘.”
“아니야, 너는 너무 어려서 몰라, 샐리.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거라고. 네 어머니가 결혼식은 내일 정오에 시작할 거라고 하던데. 다른 일처럼 결혼식을 올리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구나. 하지만 좋게만 변한 건 아니더라. 내가 결혼할 때는 저녁때 식을 올렸고 우리 아버지는 결혼식에 쓸 술을 스무 통이나 준비했지. 아, 세상이 옛날과는 참 많이 달라졌어. 머시 대니얼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아까 층계에서 마주쳤는데 그 애 안색이 굉장히 안 좋아 보이더라.”
“‘자비의 미덕을 억지로 쥐어짜낼 수는 없는 법’이죠.”23)
샐리가 야회복에 몸을 비비 틀어 넣으며 킥킥댔다.
“성경 이야기를 그렇게 경박스럽게 인용하지 말거라.”
고양이 할머니가 나무랐다.

“저 애를 용서하구려, 미스 셜리. 저 애가 결혼을 안 해봐서 그래. 어이구, 그나저나 신랑이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지 말아야 할 텐데. 신랑들이란 모두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거든. 내 생각에는 아무리 마음이 그렇더라도 얼굴에 드러내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신랑이 반지를 잊지도 말아야 할 텐데. 업톤 하디가 그랬잖아. 그 사람과 플로라는 커튼 고리를 하나 빼서 그걸로 결혼식을 올려야 했어. 어디, 그 결혼 선물들 좀 다시 한 번 보자. 좋은 선물들을 아주 많이 받았구나, 샐리.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선물을 받았으면 스푼 손잡이를 깨끗이 잘 닦았으면 하는 거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보더라.”
그날 밤 커다란 유리창이 달린 베란다에서 열린 만찬회는 정말 떠들썩하고 즐거웠다. 창가로 중국 등불이 죽 걸려 아가씨들의 아름다운 옷이며 윤기 도는 머리, 희고 미끈한 이마에 부드러운 빛을 던져주었다. 바르나바스와 사울은 넬슨 의사가 앉은 의자의 넓적한 팔걸이에 흑단(黑檀)조각상처럼 앉아 넬슨 의사가 던져주는 음식을 차례로 한 입씩 받아먹었다.
“파커 프링글만큼이나 몰상식한 짓이다. 파커는 개도 의자와 냅킨을 주어 식탁에 앉힌다더구나. 곧 하늘의 심판을 받게 될 거야.”
고양이 할머니가 말했다.
결혼한 넬슨 가 딸들이 모두 남편을 대동하고 참석했고 신랑과 신부 들러리들까지 합세해 파티에 모인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고양이 할머니가 뱉어내는 어록인데도 파티는 즐거웠다. 아니, 그 말 때문에 더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고양이 할머니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젊은이들은 오히려 고양이 할머니를 놀리기까지 했다. 고든 힐을 소개받자 고양이 할머니가 말했다.

“아니, 어쩌면 자네는 그렇게 내 예측을 빗나가나. 나는 샐리가 키가 큰 남자를 데려올 줄 알았어.”
그러자 베란다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웃음소리가 잔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고든 힐은 키도 작고 별 볼품이 없어 아주 허물없는 친구들로부터 겨우 ‘재밌는 얼굴’이라는 평밖에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도트 프레이저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거 만날 때마다 새 드레스를 입고 있군! 내가 바라는 건 네 아버지 지갑이 앞으로 2~3년만 더 버텨주었으면 하는 거야.”
도트는 할머니를 펄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다른 아가씨들은 그 말이 재미있어 죽을 지경이었다. 피로연 준비 이야기가 나오자 고양이 할머니가 한탄을 하며 한마디 했다.
“내가 바라는 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파티가 끝나면 티스푼을 도로 다 내놓고 가는 거야. 커티 폴의 결혼식이 끝났을 때 티스푼이 다섯 개나 없어졌거든. 그 후로 다시는 못 찾았지.”
그 말에 티스푼을 세 다스나 빌려온 넬슨 부인도 그것을 빌려준 올케도 모두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넬슨 의사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집을 나가기 전에 모든 사람 호주머니 검사를 하고 내보내면 돼요, 그레이스 고모.”
“자네는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무엘, 가족끼리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야. 누군가 분명 티스푼을 가져갈 거라고. 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누가 가져가나 지켜볼 거야. 난 어디서든 그런 사람은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어. 28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때 우리 가여운 노라는 아기였지. 제인, 자네가 노라에게 하얀색 자수가 놓인 드레스를 입혀 데려왔지? 28년이나 지났다니! 아, 노라, 너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하지만 오늘 등불 아래서는 나이가 별로 먹어 보이지 않는구나.”
모두들 웃었지만 노라는 웃지 않았다. 노라는 금방이라도 화를 폭발시킬 것 같은 얼굴이었다. 수선화 빛깔의 드레스를 입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걸었지만 앤의 눈에 노라는 꼭 검은 나방 같아 보였다. 멋진 모습에 눈부신 연한 금발 머리를 가진 샐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노라 넬슨은 아주 짙은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진한 검은 눈썹에 부드러운 붉은 볼을 가진 아가씨였다. 코는 좀 매부리코가 될 조짐이 보였다. 노라는 미인이라 할 수 없지만 앤은 그 뚱하고 어두운 표정에도 이상하게 노라에게 끌렸다. 인기 있는 샐리보다 노라와 더 친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다 들었다.
식사가 끝나자 모두들 춤을 추었다.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오랜 돌집의 넓고 낮은 창문을 울렸다. 10시 무렵이 되었을 때 노라는 보이지 않았고 앤은 떠들썩한 소란에 좀 피곤함을 느껴 홀을 빠져나와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뒷문으로 나갔다. 뾰족한 전나무 숲을 지나 해변을 걸어 바위가 겹겹이 쌓인 곳까지 나왔다. 무더운 저녁을 보낸 뒤라서 서늘한 바닷바람이 무척이나 상쾌하게 느껴졌다. 해변을 가득 메운 은빛 달그림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달빛 아래 바다를 떠다니다 항구로 돌아오는 배는 꼭 꿈속의 한 장면 같았다. 꼭 인어의 춤에 빠져 신비한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밤이었다.
물가 검은 바위 그늘에 새우처럼 등을 웅크리고 앉은 노라의 모습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폭발 직전의얼굴이었다.
“잠깐 함께 앉아도 되나요? 춤에는 싫증이 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름다운 밤을 놓치고 싶지 않아 나왔어요. 이 바다를 다 뒤뜰로 둔 집이라니 정말 부러워요.”
앤이 말했다.
“이럴 때 연인도 없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노라가 불쑥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한층 더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 생길 가능성도 없다는 기분요.”
“그건 노라가 못나서가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앤이 노라 곁에 앉으며 대꾸했다. 노라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고민을 앤에게 다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앤에게는 안심하고 고민을 털어놓아도 좋을 것 같은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예의상 그렇게 말하는 건 줄 알아요. 하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나는 남자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여자라는 걸 내 자신이 잘 안다고요. 사람들이 나를 볼품없는 미스 넬슨이라고 부르는 것도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내게 연인이 없는 이유는 내게 그럴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요. 그 떠들썩한 곳에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을 참고 있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기분을 좀 풀어보려고 여기로 나왔죠. 난 억지로 웃는 것도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것도 지겨워요. 결혼을 못 한다고 날 비꼬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 지쳤어요. 더 이상은 그런 척하기 싫어요. 못 하겠어요. 난 속이 상하거든요. 견딜 수 없이 화가 나요. 나만 남았어요. 넬슨네 딸들은 모두 결혼을 했는데, 나만 남았다고요. 다섯이 결혼을 했거나, 내일이면 하죠. 아까 저녁을 먹으면서도 고양이 할머니가 내 나이를 들먹이는 소리 들었죠? 저녁 전에도 내가 지난여름보다도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인다고 어머니에게 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물론 더 나이 들어보이겠죠. 난 스물여덟이나 되었으니까. 12년만 더 있으면 나이가 마흔 살이 되는데, 마흔 살이 되면 도대체 어떻게 견디고 살아야 할까요, 앤?그때도내가 의지할 것을 찾지 못하면.”
“나라면 그 할머니가 생각 없이 한 소리에는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오, 신경 쓰지 않는다고요? 앤은 나 같은 코를 갖지 않았으니까요. 10년만 지나면 내 코는 우리 아버지 코처럼 매부리코가 되어버릴 거예요. 그래도 신경 쓰지 않을 건가요? 몇 년이나 청혼해주기를 기다리는 남자가 청혼해주지 않아도요?”
“오, 그건 신경을 쓰겠죠.”
“그래요, 그게 바로 내 고민거리라고요. 앤도 짐 윌콕스와 내 얘기를 들었겠죠. 그 사람은 내 주변을 몇 년이나 맴돌았어요. 하지만 결혼 이야기는한마디도하지 않았죠.”
“그 사람을 좋아하나요?”
“물론 좋아하죠. 난 항상 안 그런 척했지만, 내가 말한 대로 이젠 그런 척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 사람은 지난 1월 이후로는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어요. 좀 싸웠거든요. 하지만 그런 싸움이라면 수도 없이 했어요. 전에는 그래도 항상 내게 돌아와 주었는데 이번에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돌아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달빛에 반짝이는 저 집을 보세요. 그 사람은 저 집에 살고 나는 이 집에 있어요. 우리 사이에는 저 바다가 가로놓여 있죠. 우리 사인 항상 그럴 거예요. 이건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요.”
“돌아와 달라는 말을 전하면 오지 않을까요?”

“그 사람에게 말을 전해요? 내가 그런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겠어요. 그 사람이 오고 싶었으면 그 마음을 막을 것이 무엇이겠어요. 그 사람은 오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나도 원하지 않는다고요. 아니, 난 원해요. 원해요! 난 짐을 사랑해요. 나도 결혼하고 싶어요. 나도 내 집을 갖고 싶고 부인이란 호칭을 듣고 싶어요. 고양이 할머니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고요. 오, 잠시만 바르나바스와 사울이 되어서 고모할머니 욕을 실컷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다시 한 번만 나를 가여운 노라라고 부르면 난 석탄 통을 던져버릴 거예요. 하지만 고양이 할머니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생각을 말로 했을 뿐인걸요. 어머니도 내가 언젠가는 결혼하게 되리란 희망을 버린 지 오래예요. 나를 되는 대로 내버려둔다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를 들들 볶아대죠. 나는 샐리도 미워요. 물론 내 처지가 처량 맞기도 하지만 난 샐리가 미워요. 샐리는 좋은 남편을 만나 아름다운 자기 집을 갖게 되었잖아요. 누구는 부족한 것 없이 모두 가졌는데 나는 아무것도 갖지 못하다니, 공평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샐리가 나보다 더 착하다거나 더 영리하거나 더 예쁜 것도 아니잖아요. 단지 운이 더 좋을 뿐인 거죠. 앤은 내가 못됐다고 생각하겠죠?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난 노라가 그냥 많이 지친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몇 주 동안이나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힘들어서 그런 거예요. 피곤하고 긴장해 있으면 괴로운 일이 더욱 견디기가 힘들어지거든요.”
“나를 이해해주는군요. 난 앤이 날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했어요. 난 앤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난 앤이 웃는 모습이 좋아요. 나도 그렇게 웃고 싶어요. 나도 겉모습처럼 항상 그렇게 뚱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이건 다 내 눈썹 때문이라고요. 내 이 눈썹이 내게서 남자들을 전부 쫓아내 버려요. 난 지금까지 진정한 친구를 가져본 적도 없어요. 항상 짐이 내 곁에 있었죠. 우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으니까요. 짐을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고 싶으면 나는 다락방 작은 창문에서 불빛을 비추었어요. 그럼 당장 짐이 달려왔죠. 우리는 어디든 함께 다녔어요. 다른남자아이들이 내 곁에 올 기회도 없었죠. 내 곁에 오고 싶어 하던남자아이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끝나 버렸어요. 그 사람이 내게 싫증을 내고는 싸움을 핑계로 잘됐다면서 가버린 거라고요. 오, 내가 이런 말을 앤에게 털어놓았다고 내일 앤을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요!”
“왜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비밀을 털어놓아 버리고는 꼭 그 사람을 미워하잖아요. 결혼식이란 건 사람 마음을 참 이상하게 했어요. 하지만 난 그것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요. 오, 앤 셜리, 난 너무 비참해요. 내가 앤의 품에서 좀 울도록 해줘요. 내일은 온종일 웃으면서 행복한 척해야 하잖아요. 샐리는 내가 미신을 믿어서 자기 들러리가 돼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예요. ‘신부 들러리를 세 번 하면 절대로 신부가 되지 못한다.’는 말을 믿어서요. 하지만 그게 아니에요. 난 그냥 거기 서 있는 것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내가 어떻게 거기 서서 샐리가 ‘네.’하고 대답하는 소리를 듣겠어요. 난 짐에게 그렇게 대답할 기회도 영원히 잃어버렸는데. 나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젖히고 꽥꽥 소리를 지르고 말 거예요. ‘나도 신부가 되고 싶어요!’ 하고요. 나도 혼수품을 장만하고 싶고 여러 가지 머리글자들을 수놓은 이불보며 장식용 덮개들을 만들고 싶고 멋진 선물들도 받고 싶다고요. 고양이 할머니가 주는 은으로 된 버터 그릇이라도 받겠어요. 성 베드로 성당의 돔 지붕 같은 뚜껑이 달린 우스운 그릇이죠. 아침 식탁에 그걸 놓고 짐과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겠죠. 앤, 나 이러다 미쳐버릴 것 같아요.”
노라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앤과 노라가 서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춤도 다 끝나 있었다. 사람들은 밤이 늦어 각자 잠잘 자리로 찾아들었다. 토미 넬슨은 바르나바스와 사울을 헛간으로 데려갔다. 고양이 할머니는 아직도 소파에 앉아 내일 일어나지 말아야 할 끔찍한 일들을 끝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 일어나서 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한다고 하지 말아야 할 텐데. 틸리 해트필드의 결혼식 때 그런 일이 일어났거든.”
“고든에게는 그런 행운이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신랑 들러리가 말했다. 고양이 할머니가 갈색 눈을 무섭게 치떴다.
“젊은이, 결혼이 무슨 장난인가?”
“분명 아니죠.”
그 젊은이는 뉘우침이라고는 전혀 없는 기색으로 말했다.
“어이, 노라, 국수는 언제 먹여줄 거예요?”
노라는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더니 그에게 다가가서는 따귀를 철썩 갈겨버렸다. 처음에는 이쪽 얼굴을 다음에는 다른 쪽을. 다시는 척하지 않겠다더니, 따귀도 정말로 때려버렸다. 그런 다음 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저 애가 너무 예민해져 있구먼.”
고양이 할머니는 그렇게만 말했다.
23.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에서 변호사 포시아가 한 말이 인용된 부분이나 머시 대니얼즈의 이름에서 머시가 자비를 의미하므로 나온 농담이다.​



16





토요일 오전은 마지막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눈이 핑핑 돌아가도록 분주했다. 앤은 넬슨 부인의 앞치마를 걸치고 부엌에서 노라를 도와 샐러드를 만들었다. 노라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자기가 미리 예상했듯이 어젯밤 비밀을 털어놓은 걸 몹시 후회하는 듯했다.
“이러다가 우리 모두 한 달은 피로로 꼼짝도 못 하게 될 거예요. 아버지는 사실 이렇게 화려한 결혼식을 치를 능력도 없어요. 순전히 샐리가 화려하게 하겠다고 떼를 써서 이런 난리법석을 치르는 거라고요. 아버지는 언제나 샐리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었어요.”
“저 심술, 시샘하고는.”
고양이 할머니가 난데없이 식품저장실에서 머리를 쑥 내밀고 말했다. 고양이 할머니는 거기서 오늘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을 끝도 없이 늘어놓으며 넬슨 부인을 미칠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는 중이었다.
노라는 불평하듯 말했다.
“네, 할머니 말이 맞아요. 정말로 맞는 말이에요. 나는 심술궂고 샘이나 내는 사람이에요. 난 지금 행복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꼴도 보기 싫으니까요. 어젯밤 주드 테일러의 뺨을 때려준 것도 전혀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다만 코를 비틀어 쥐고 또다시 그럴 거냐고 따지지 않은 게 유감이지. 자, 이제 샐러드는 다 됐어요. 예쁘네요.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은 때는 나도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해요. 그리고 나도 샐리를 위해 모든 일이 다 잘되기를 바라죠. 나도 마음 깊이는 샐리를 좋아하지요. 다만 지금 기분은 모든 사람이 다 밉다는 거죠. 그중에서도 짐 윌콕스가 가장 밉고.”
“그럼 이제는 결혼식 직전에 신랑이 사라지는 일만 없으면 된다. 오스틴 크리드가 그랬잖아. 오스틴은 그날이 자기 결혼식인 걸 깜박 했다더구나. 크리드 집안사람들이 원래 잊기를 잘한다지만, 그건 해도 너무 했어.”
식품저장실에서 고양이 할머니의 슬픔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앤과 노라 두 아가씨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다 보니 노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밝은 빛이 일어나 얼굴 전체에 잔잔하게 퍼졌다. 그때 누군가가 와서 바르나바스가 층계에 토했다고 알렸다. 닭 간을 너무 많이 먹은 모양이었다. 노라가 치우러 뛰어나갔고, 고양이 할머니는 식품저장실에서 나와 10년 전 알마 클라크 결혼식 때처럼 케이크가 사라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걱정을 했다.
정오까지는 모든 준비가 빈틈없이 끝났다. 식탁이 차려지고 방마다 아름답게 장식되었으며 여기저기에 꽃바구니가 놓였다. 2층 커다란 북쪽 방에서는 샐리와 세 명의 신부 들러리가 눈부신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연한 녹색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쓴 앤은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며 지금의 자기 모습을 길버트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멋져요!”
노라가 부러운 얼굴로 칭찬했다.

“노라야말로 멋져요. 회색빛이 도는 푸른 시폰24)드레스와 타조 깃이 달린 챙 넓은 모자는 윤기 나는 머리 색깔과 파란 눈을 더욱 돋보이게 했어요.”
“내가 예쁜지 예쁘지 않은지는 아무도 관심 없어요. 내 웃는 얼굴 어때요, 앤. 이런 좋은 날에 죽을상을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내가 결혼행진곡을 연주할 거예요. 베라는 두통이 있대요. 고양이 할머니가 걱정한 대로 난 지금 장송곡을 치고 싶은 심정이지만요.”
노라가 쓰디쓴 얼굴로 말했다.
고양이 할머니는 아침 내내 보기 흉한, 낡은 가운과 찌그러진 실내모자 차림으로 두리번두리번 온갖 참견을 다하고 다니더니 지금은 적갈색 비단 드레스를 화려하게 차려입고 샐리에게 드레스 한쪽 팔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한마디 했다. 거기다 애니 크루슨의 결혼식 때처럼 드레스 밑으로 속옷이 보이는 사람이 없기만 바란다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방으로 들어온 넬슨 부인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샐리 모습이 너무 예쁘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감상적으로 굴지 마라, 제인.”
고양이 할머니가 타일렀다.
“아직 딸이 하나 남았잖아. 아무래도 평생을 끼고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눈물은 결혼식에 불길해. 나는 다만 갑자기 죽어버리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만 바랄뿐이야. 로버타 프링글 결혼식에서 크롬웰 씨가 결혼식이 진행되는 한중간에 갑자기 쓰러져 죽어버렸잖아. 신부는 너무 놀라서 2주일이나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지.”
이 감동적인 격려를 뒤로 하고 신부와 들러리들은 노라가 연주하는 좀 거친 결혼행진곡에 맞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샐리와 고든은 아무도 난데없이 죽거나 반지를 잊어버리는 일 없이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다. 분명 화려한 결혼식이었으며, 고양이 할머니조차 잠시 동안은 온갖 세상만사 근심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고양이 할머니는 결혼식이 끝난 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듯이 샐리에게 말했다. “결국에는 말이야, 그리 행복한 결혼은 아니라 해도 더 불행해질 일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노라는 눈에서 불길을 뿜어내며 여전히 혼자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다가 샐리에게 달려들어 베일과 함께 와락 끌어안았다.
“이제야 겨우 끝났군.”
피로연도 끝나고 손님들이 모두 떠나자 노라는 방을 한번 휘 둘러보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떠들썩한 모임 뒤에는 언제나 그렇듯 쓸쓸함이 감돌았고 방 여기저기가 무척이나 심란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옷에 달았던 시든 꽃 한 송이가 짓밟힌 채 뒹굴고, 의자도 여기저기 흩어졌으며, 찢겨진 레이스 조각이며 손수건도 두어 장 떨어졌고, 아이들이 떨어뜨린 과자 부스러기도 여기저기 널렸다. 고양이 할머니가 손님방에서 쓰러뜨린 항아리의 물이 스며들어 천장에는 검은 얼룩이 생겼다.
“난 이제 이 난장판을 정리해야 해요. 대부분은 열차를 타고 떠날 테지만, 일요일까지 여기 남는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바닷가로 나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달빛 아래서 춤을 출 거래요. 나도 얼마나 달빛 아래서 춤을 추고 싶은지 몰라! 하지만 침대 속에 기어들어가 울기나 할 테야.”
노라는 심정이 사나운 듯 말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는 어디건 쓸쓸한 법이잖아요. 나도 청소하는 걸 도와줄게요. 그런 다음에 우리 둘이 차를 마셔요.”
앤이 말했다.
“앤 셜리, 차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내가 아니라 앤이야말로 노처녀가 되어야 마땅해. 미안해요.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난 천성적으로 못된 사람으로 태어났나 봐요. 결혼식보다도 이 바닷가의 춤이 더 생각하기도 싫어요. 짐은 언제나 우리의 바닷가 댄스파티에 오고는 했어요. 앤, 나는 간호사 교육을 받기로 했어요. 간호사 같은 건 되고 싶지도 않지만, 오, 내게 맡겨질 내 미래의 환자들을 구원하소서! 하지만 더 이상 서머사이드에서 지낼 수 없을 것 같아서요. 팔리지 않고 남은 물건이라고 놀림감이 되는 건 싫어요. 자, 이제 이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접시들을 닦아보죠. 아주 즐거운 일이라도 하듯 해보자고요.”
“나는 이 일을 정말로 좋아하는걸요. 접시 닦기는 내가 전부터 좋아하던 일이에요. 더러운 접시들이 다시 깨끗해지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걸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요.”
“어머나, 앤은 박물관에나 어울릴 사람이에요!”
노라가 덤비듯 말했다.
달이 뜰 무렵이 되자 댄스파티를 벌일 준비는 모두 끝났다. 젊은이들이 유목(流木)을 모아 피운 커다란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고 항구의 바닷물은 달빛을 받아크림빛으로 반짝였다. 앤은 자기도 마음껏 즐길 참이었으나 샌드위치 바구니를 들고 층계를 내려가는 노라의 너무나 슬픈 얼굴을 보고는 마음이 안타까웠다.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문득 앤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앤은 옛날부터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보는 게 특기 아니던가! 부엌으로 달려 들어가 켜져 있는 조그만 손 등불을 가지고 뒤 층계를 빠르게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층계를 하나 더 올라가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앤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지붕 창에 그 등불을 놓았다. 등불은 나무에 가려져 춤추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이걸 보고 짐이 올지도 몰라. 노라가 죽이기라도 할 듯이 화를 내겠지만, 짐만 와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제 레베카 듀에게 줄 선물로 결혼 케이크를 한 조각 싸가야지.”
짐 윌콕스는 오지 않았다. 잠시 동안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앤도 그만 단념해버렸고 떠들썩한 밤을 보내는 동안 짐의 일은 잊어버렸다. 노라는 모습을 감추었고, 무슨 일인지 고양이 할머니도 벌써 잠자리에 들었다. 소란스러운 파티가 끝난 것은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달빛을 즐기던 젊은이들이 하품을 삼키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앤은 너무나 졸려 다락방 등불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새벽 2시쯤 고양이 할머니가 발소리를 죽이며 방으로 들어와 아가씨들 얼굴에 촛불을 들이댔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죠!”
도트 프레이저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쉿!”
고양이 할머니는 입을 열지 못하게 했다. 눈이 거의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이 집에 누군가가 있어. 뭔가가 침입해 들어왔다고, 저 소리는 뭐지?”
“고양이가 야옹하고 개가 멍멍 짖는 소리요.”
도트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런 소리가 아니야. 헛간에서 개가 짖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잠을 깬 건 아니야. 쿵 하는 소리가 들렸어. 아주 크고 분명하게 쿵 하는 소리가 났다고.”
고양이 할머니가 심각하게 말했다.
“귀신 딱지랑 시체를 파먹는 마귀 딱지, 그리고 긴 다리의 야수와 밤중에 쿵쿵거리고 다니는 악귀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앤이 중얼거렸다.
“미스 셜리, 이건 농담이나 하면서 웃을 일이 아니야. 이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가서 사무엘을 불러야겠어.”
고양이 할머니는 사라졌고 아가씨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결혼 선물이 모두 아래층 서재에 있을 텐데.”
앤이 말했다.
“어쨌든 일어나야겠어요. 앤, 고양이 할머니가 촛불을 나지막이 들었을 때 얼굴 봤어요?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에 머리카락이 그림자 위로 너울거리던 모습이 꼭 엔돌의 여인25)을 떠올리게 했어요.”
잠옷 가운을 걸친 아가씨 넷은 가만히 복도로 나왔다. 고양이 할머니가 실내복에 슬리퍼를 신은 넬슨 의사를 데리고 나왔다. 넬슨 부인은 잠옷 가운을 찾지 못해 방문으로 겁먹은 얼굴만 내밀었다.
“오, 사무엘, 위험한 일은 하지 말아요. 도둑이라면 권총을 쏠지도 모른다구요!”
“바보 같은 소리! 아무 일도 아닐 거야.”

넬슨 의사는 말했다.
“틀림없이 쿵 하는 소리가 났다니까.”
고양이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이 둘도 합세하여 모두들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넬슨 의사가 맨 앞장을 섰고, 한 손에는 촛불을 다른 한 손에는 부젓가락을 든 고양이 할머니가 맨 끝을 맡았다.
틀림없이 서재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넬슨 의사가 문을 열자 바르나바스가 큰 소파 위에 올라 앉아 아주 재미있다는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사울을 헛간으로 데려갈 때 사람들 눈을 피해 서재로 숨어들었던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흔들거리는 촛불이 희미하게 비추는 방 한가운데 노라가 젊은 남자와 함께 있었다. 남자는 노라를 안고 커다란 하얀 손수건을 노라의 얼굴에 대고 있었다.
“저놈이 클로로포름으로 노라를 마취시키고 있어!”
고양이 할머니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젊은 남자가 깜짝 놀라 손수건을 떨어뜨렸다. 멋쩍은 표정으로 뒤돌아본 젊은이의 얼굴은 꽤나 잘생겼고 놀라 크게 뜬 적갈색 눈에 고불고불한 적갈색 머리와 턱도 근사했다.
노라가 손수건을 집어 들어 얼굴을 가렸다.
“짐 윌콕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의사는 아주 엄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어찌 된 까닭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거라고는 노라가 저에게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는 거예요. 서머사이드의 프리메이슨 연회에 갔다가 새벽 1시에 집에 돌아왔는데 불빛이 보여 곧 배를 저어왔습니다.”
짐 윌콕스는 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난 신호를 보낸 적 없어요. 세상에, 일이 그렇게 된 게 아니라고요. 나는 잠이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창가에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이에요. 잠옷도 갈아입지 않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해변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았어요. 집 가까이 오자 그 사람이 짐이란 걸 알아보았죠. 그래서 달려 내려갔는데 그만 서재 문에 부딪혀서 코피가 났어요. 그래서 짐이 내 코피를 멈추어주려 했던 거예요.”
노라가 강하게 항변했다.
“제가 창문으로 넘어 들어오다가 저 의자에 걸려 넘어졌거든요.”
“내가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어.”
고양이 할머니가 말했다.
“하지만 노라가 제게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아무도 반기지 않는 저는 이제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사죄드립니다.”
“밤잠도 설치고 바다를 노 저어 왔는데, 쓸데없는 헛수고여서 정말 안 됐군.”
노라가 짐의 손수건에서 피가 묻지 않을 곳을 찾으며 더 이상 차가울 수 없으리만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쓸데없는 헛수고가 맞나 보군.”

의사가 말했다.
“저 뒷문을 열고 들어오지 그랬어.”
고양이 할머니가 말했다.
“창가에 등불을 둔 건 저였어요. 그리고 깜박 잊어버렸어요.”
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그런 짓을! 난 절대로 앤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노라가 울부짖었다.
“모두들 정신이 나갔어? 도대체 왜 이렇게 난리들이야. 제발 저 창문이나 좀 내려라, 짐. 바람이 저렇게 몰아쳐 들어오는데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구만. 노라, 머리를 뒤로 좀 젖혀, 코는 곧 괜찮아질 거야.”
의사가 야단을 쳤다.
노라는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눈물을 쏟았고 얼굴은 눈물과 피가 합해져 두고 볼 수 없는 꼴이었다. 짐 윌콕스는 바닥에 구멍이라도 뻥 뚫려 친절하게 자기를 지하실로 떨어뜨려주면 고마울 텐데 하는 얼굴이었다.
“짐 윌콕스, 자네는 이제 이 아이와 결혼을 해야 해. 여자가 새벽 2시에 이런 곳에서 남자와 단둘이 있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누가 그 처녀를 데려간다고 하겠어.”
고양이 할머니가 덤비듯 윽박질렀다.
“결혼을 하라고요! 전 제 평생 노라와 결혼할 수 있기만을 바라왔어요.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았다고요!”

짐은 성난 듯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진작 그 말을 안 했어?”
노라가 짐 앞으로 다가서서 캐물었다.
“왜 말을 안 했느냐고? 언제나 나를 깔보고 놀리며 내 마음을 얼어붙게 했잖아. 나를 얼마나 경멸하는지를 일부러 보여주려고 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어. 내가 청혼을 해야 아무 소용도 없다고 믿게 하고서. 그리고 지난 1월에도 내게 그런 말을 했잖아!”
“짐이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도록 했잖아!”
“내가 그렇게 했었다고? 노라야말로 나를 쫓으려고 항상 싸움을 걸어왔어.”
“난 안 그랬어. 난…….”
“그런데도 난 바보처럼 노라가 우리가 예전에 하던 대로 내게 신호를 보낸 거라고, 나를 원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이 밤중에 여기로 온 거라고. 노라한테 청혼을 하라고요? 좋아요. 지금 당장 청혼하겠어요. 나를 거절해 이 사람들 앞에서 날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려도 좋아. 노라 이디스 넬슨, 나와 결혼해주겠어?”
“네, 좋아요. 왜 안 하겠어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노라가 소리쳐서 고양이 바르나바스가 대신 얼굴을 붉혔다.
짐은 한동안 멍하니 노라를 보고 있더니 노라에게 바싹 다가갔다. 노라의 코피는 멎은 모양이었다. 아니, 아직 멈추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오늘이 안식일 아침이라는 걸 잊은 모양이군. 누가 차를 만들어준다면 차라도 한잔 마시고 싶어. 난 이런 법석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서. 내가 바라는 건 다만 우리 가여운 노라가 정말로 저 사람과 맺어지는 일이야. 적어도 증인은 있으니까.”
이제 막 정신이 돌아온 고양이 할머니가 말했다.
모두들 부엌으로 갔다. 넬슨 부인이 모두를 위해 차를 준비했다. 짐과 노라만 빼고. 두 사람은 바르나바스를 감시자로 하여 서재에 그대로 남았다.
앤은 아침에 노라를 만났다. 노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볼이 상기되어 10년은 젊어 보였다.
“모든 게 앤 덕분이에요. 만일 등불을 거기 두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난 어젯밤 2분 30초쯤은 앤의 귀를 물어뜯고 싶을 만큼 화가 났었지만!”
“그런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내내 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너무 아쉽군!”
토미 넬슨이 비통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고양이 할머니가 한 마지막 말이 가관이었다.
“글쎄, 다만 내가 바라는 일은 너무 서둘러 결혼해 오랫동안 후회하는 일이 없기만 바랄 뿐이야.”
24. 가볍고 얇은 견직물.
25. 사무엘 전서 제28장.






17
(길버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발췌)





오늘부터는 방학이야. 앞으로 두 달 동안은 ‘초록 지붕 집’과 개울을 따라 발목까지 푹 빠지게 나 있는 이슬 젖은 향긋한 고사리와 ‘연인의 오솔길’에 흔들리는 나른한 나무 그림자와 벨 씨네 목장에 열린 산딸기, ‘유령의 숲’ 울창한 전나무와 함께 지낼 수 있어! 그런 생각으로 내 마음엔 날개가 돋았어.
젠 프링글이 은방울 꽃다발을 주면서 방학을 즐겁게 보내라고 했어. 주말에 한번 찾아오겠다고 했고. 이런 걸 바로 기적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어!
하지만 꼬마 엘리자베스는 슬픔에 젖어 있어. 난 엘리자베스도 ‘초록 지붕 집’에 놀러오게 하고 싶었지만, 캠벌 부인은 그렇게 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대. 다행히 엘리자베스에게 아직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더 큰 실망에 빠져 있진 않아.
“셜리 선생님이 떠나고 나면 저는 리지가 되어버릴 거예요. 리지가 된 기분이 들 거라고요.”
엘리자베스가 말했어.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가 얼마나 즐겁게 지낼지를 생각해. 그럼 리지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너한테는 리지 같은 사람은 들어 있지 않아. 그리고 내가 매주 편지를 보내줄게, 엘리자베스.”

내가 이렇게 위로해주었지.
“오, 셜리 선생님! 정말이죠? 전 편지란 걸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어요. 편지를 받으면 무척 기쁘겠죠? 저한테 우표가 생긴다면 저도 편지를 쓸게요. 우표가 없어 편지를 쓰지 못하더라도 제가 선생님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알아주세요. 전 우리 집 뒤뜰에 사는 다람쥐에게 셜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그래도 괜찮죠, 셜리 선생님? 처음에는 앤 셜리라고 지었다가 아무래도 그건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앤이라고 하면 어쩐지 다람쥐 같지도 않아서요. 또 다람쥐가 남자 다람쥐인지도 모르잖아요. 다람쥐는 너무 귀여워요. 하지만 그 여자는 다람쥐가 장미나무 뿌리를 먹는대요.”
“아니야.”
내가 말했지.
난 캐서린 브룩에게 어디서 여름을 보낼 생각이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캐서린은 쌀쌀맞게 대꾸하지 않겠어.
“여기서요. 여기가 아니면 내가 어디서 방학을 보내리라고 생각했죠?”
나는 캐서린도 ‘초록 지붕 집’에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어. 어차피 오지도 않을 텐데 뭐. 여하튼 캐서린은 즐거움을 망치는 데는 선수니까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 거야. 그래도 여름 내내 그 싸구려 하숙집에서 혼자 지낼 캐서린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아파.
지난번에는더스티 밀러가 살아 있는 뱀을 물고 와서 부엌바닥에 떨어뜨려 놓았어. 만일 레베카 듀가 창백하게 질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렇게 되었을 거야. 레베카는 “이제 더 이상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하고 말했어. 레베카 듀는 요즘 화를 잘 내. 틈이 날 때마다 장미나무에서 회색과 녹색이 섞인 딱정벌레를 잡아내야 하거든. 벌레를 잡아서는 석유 등불에 넣어버려. 세상에 벌레가 너무도 많다고 불평이야. “이러다간 온 세상이 벌레천지가 되어버릴 거야.” 하고 암담한 예언도 했어.
노라 넬슨과 짐 윌콕스는 9월에 결혼하기로 했어. 아주 조용히 결혼식을 올릴 거래. 손님도 초대하지 않고 들러리도 없이 떠들썩한 일은 다 피하려고 한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양이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자기 결혼식만은 어떻게든 고양이 할머니 눈에 띄지 않게 할 거래. 그래도 난 결혼식에 참석해. 말하자면 난 비공식적으로 참석하는 거지. 노라는 내가 창문에 등불을 켜두지 않았더라면 짐이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거든. 짐은 자기 가게를 정리하고 서부로 갈 거래. 글쎄, 내가 성사시켰다고 생각하는 결혼을 모두 생각해보면…….
샐리는 노라와 짐은 늘 싸우면서 살 거라고 해. 상냥하게 서로를 대하는 것보다 싸우면서 지내는 걸 두 사람이 더 행복하게 여긴다나. 하지만 난 두 사람이 싸우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세상의 모든 불협화음은 오해에서 나오는 거니까. 우리도 오랫동안 그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편안히 주무시길. 당신 사람인 나의 소망이 거기까지 닿는다면 당신의 잠은 틀림없이 달콤하고 편안할 겁니다.

추신: 위 문장은 채티 아주머니 할머니 편지에서 그대로 인용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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