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11~13

나단비 | 2024.04.01 17:17:03 댓글: 0 조회: 74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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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 중순의 어느 날 저녁 앤은 탑 방에서 아이들의 시험 답안과 씨름하다가 코를 풀려고 잠시 일손을 놓았다. 너무 자주 풀어서 온통 빨갛게 변해버린 코가 아프기까지 했다. 인정머리 없고 낭만적이지 못한 코감기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늘 푸른 집’ 가문비나무 뒤로 보이는 부드러운 초록빛 하늘도, ‘폭풍 왕’ 위로 걸려 있는 은빛 하얀 달도, 창문 아래 라일락꽃 나무에서 풍겨오는 숨 막히게 좋은 향기도, 책상에 놓인 흰 꽃잎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아이리스 꽃향기도 즐길 수 없었다. 이 코감기 하나가 앤의 모든 과거를 어둡게 하고 미래까지도 암울하게 했다.
“6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하지만 앞으로 2주만 지나면 정다운 ‘초록 지붕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 여기서 이렇게 다 틀린 시험 답안지와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고.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생각해 봐,더스티 밀러!”
앤은 또다시 코를 풀면서 창틀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더스티 밀러를 향해 말했다.
앤의 말대로더스티 밀러는 그 신나는 생각을 해보았고, 또 다른 생각도 했다. ‘도깨비 길’ 안으로 한 젊은 여자가 빠른 걸음새로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여러해살이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길을 걸어오는 여자의 발걸음이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었고,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것이 있는지 전혀 이 아름다운 유월과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전날 킹스포트에서 돌아온 헤이젤 마르였다. 얼마 안 있어 탑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얼마나 급한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홱 열어 젖혔다.
“어머나, 헤이젤, 에취! 킹스포트에서 벌써 돌아왔어요? 다음 주나 되어야 돌아올 줄 알았는데.”
“네, 그래요, 미스 셜리. 돌아왔어요. 그런데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요? 내가 없는 동안 테리를 내게서 뺏으려고 유혹했다더군요. 그리고 성공했고요.”
헤이젤은 비웃듯 말했다.
“헤이젤! 에취!”
“오, 나는 다 알아요. 내가 테리를 사랑하지도 않고 우리 약혼을 취소하고 싶어 한다고 테리에게 말했더군요. 우리의 신성한 약혼을요!”
“헤이젤, 이 아기 같으니라고. 에취!”
“오, 날 비웃는군요. 좋아요, 비웃으세요. 하지만 자기가 한 짓을 부정할 생각일랑 말아요. 미스 셜리는 분명히 고의로 그런 말을 했으니까요.”
“물론 내가 말했지요. 그런데 나한테 그렇게 말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부탁을…… 했다고요!”
“여기서, 이 방에서요. 헤이젤은 테리를 사랑하지 않으니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오, 그건 순간적인 기분이었죠. 난 미스 셜리가 내 말을 심각하게받아들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난 미스 셜리라면 내 예술적인 기질을 이해하리라고충동적인 앤이지만 이번에는 한껏 어머니 같은 표정을 지었다.
“테리, 당신들 두 사람은 어른 흉내를 내는 어린애들 같아요. 테리가 헤이젤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헤이젤도 테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마 두 사람 다 그날 밤 달빛에 어떻게 된 모양이에요. 헤이젤도 테리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테리의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되어 말을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헤이젤은 그저 무슨 일에든 쉽게 빠져버리는 낭만적인 아가씨이고 테리도 사랑에 빠지길 좋아하는 사람인 모양이에요. 언젠가는 둘이 모두 오늘을 돌아보며 웃게 될 거예요.”(내가 이 이야기를 꽤 괜찮게 했지. 앤은 속으로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테리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앤 덕분에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헤이젤은 물론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지만 몇 주가 지난 다음 곧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깨달았어요. 하지만 헤이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죠. 남자가 한 여인을 만나면, 그 여인은…… 아니, 벌써 가려고요, 앤? 이렇게 좋은 달빛을 내버려두시려고요? 달빛에서 보니 앤은 꼭 하얀 장미 같아요.”아니 알고 있었어요. 난 처음부터, 당신을 보자마자 좀 위험한 사람일 거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다고요. 그 빨간 머리와 그 초록색 눈에서요! 하지만 난 당신이 테리와 나 사이를 갈라놓을 만큼 그렇게 모진 짓을 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적어도 당신은 기독교인이잖아요. 난 기독교인이 그런 짓을 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당신은 내 가슴을 아프게 했어요. 이제 만족하나요?”
“이제 보니 아주 못됐군요.”
“이제는 당신과는 말도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다 망쳐버리기 전에 테리와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고요. 난 아주 행복했어요. 내 친구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약혼을 한 행복한 여자였어요. 난 결혼식도 다 계획해두었다고요. 네 명의 들러리에게는 층층 치맛단마다 검은색 벨벳 리본을 두른 아름다운 옅은파란색실크 드레스를 입히려고 했어요. 얼마나 세련된 드레스인데! 오, 난 당신을 가장 증오하는지 당신을 가장 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군요. 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가 있담!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데. 당신을 그렇게 믿었는데, 난 당신을 철석같이 믿었다고!”
헤이젤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오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으며 몸은 흔들의자로 무너져 버렸다.
‘단어마다 하도 강조를 많이 해서 더 이상은 강조할 말도 없겠네.’
앤은 생각했다.
“이건 우리 가여운 엄마도 죽이는 일이에요. 엄마가 얼마나 기뻐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한 일이었는데. 모든 사람이 우리를 아주 이상적인 한 쌍이라고 여겼는데. 오, 이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어.”헤이젤이 흐느꼈다.
“다음 번 달이 뜨는 밤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 번 해보지 그래요.” 앤이 부드럽게 말했다.
“오, 그래요, 미스 셜리. 내 고통을 비웃어요. 난 이 일로 당신이 아주 즐거워하리란 걸 알았어요. 아주 재미있겠지요! 당신은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지요! 이건 끔찍하다고요. 끔찍한 일이라고요!”
앤은 시계를 한 번 흘끗 보고 재채기를 했다.
“그럼 고통스러워하지 말아요.”
앤이 인정머리 없이 쏘아주었다.
“나는 고통스러워요. 내 감정은 아주 깊거든요. 물론 감정이 얕은 사람이야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리 속이 얕지 않은 사람인 것에 감사해요.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나 알아요, 미스 셜리? 진정으로, 아주 깊이, 진정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요? 그리고 누군가를 믿는다거나 속임을 당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나요? 난 너무나 행복한 기분으로 킹스포트로 갔어요. 그때는 온 세상을 다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죠. 난 테리에게 내가 가고 난 후 당신에게 잘해주라고 부탁까지 하고 갔어요. 당신을 외롭게 혼자 두지 말라고요. 어젯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너무 행복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이 모든 것이 실수, 실수였다고 말했어요. 이게 다 당신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에요. 내가 자유를 찾고 싶어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요.”
“난 불순한 의도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유머감각이 헤이젤만 아니라 앤을 구제해주려고 돌아믿었단 말이에요. 물론 나보다 나이야 더 많지만 소녀들이 얼마나 자기 기분에 빠져 말하고 감정도 시시때때로 잘 변하는지 다 잊었단 말이에요? 내 친구인 척만 했던 거예요?”
‘이건 악몽이야.’
앤은 생각했다.
‘헤이젤, 좀 앉아 봐요.’
코를 풀며 말했다.
“앉으라고요! 내가 어떻게 앉을 수 있어요. 인생이 엉망이 되어버릴 참에 누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어요? 오, 나이가 들어서 미스 셜리가 그렇게 되었나요? 자기보다 어린 사람의 행복을 질투나 하면서 그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자고 작정한 사람이 되었냐고요? 난 절대로 미스 셜리처럼 늙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려야겠어요.”
헤이젤은 거칠게 방 안을 오락가락하며 아무 말이나 막 내뱉었다.
헤이젤의 귀뺨을 때려주고 싶다는 원시적인 충동이 일어 갑자기 앤의 손이 간질거렸다. 즉각 그 생각은 접어버려 그 뒤에는 정말 그런 충동이 생겼었는지도 믿을 수 없었지만. 하지만 이 철부지에게 약간의 응징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말을 좀 가려서 하든지, 아니면 당장 나가도록 해요, 헤이젤.(몹시 심하게 에취!)난 할 일이 있거든.(에이취, 에이취, 킁!)”
“내가 미스 셜리를 어찌 생각하는지 다 말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어요. 오, 나도 내 스스로를 원망해야 한다는 걸 알아요. 내가 미리 알아보았어야 했다고요.와서 앤은 웃으며 말했다.
“오, 내가 어젯밤 어떻게 견뎠는지 알아요? 밤새도록 마루를 걸어 다녔어요.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내가 오늘 하루를 어찌 보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해요. 난 앉아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야 했어요. 테리가 당신에게 반했단 얘기를요. 오, 사람들이 당신을 지켜보았대요. 사람들은 당신 둘이 무슨 짓을 하는지 다 보았다고 했어요. 왜, 왜 그랬어요? 난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이미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왜 내 연인을 가로채려는 거죠? 도대체 왜 내게 그런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뭘 어떻게 했다고?”
헤이젤이 거칠게 따지고 들었다.
“내 생각에는 헤이젤이나 테리나 엉덩이를 좀 두들겨 맞아야겠어요. 그렇게 화만 내면서 다른 사람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다니.”
앤이 완전히 지쳐버려 말했다.
“난 단순히 화가 난 게 아니에요, 미스 셜리. 난 상심해 있어요. 끔찍하게 마음을 다쳤다고요. 모든 것이 다 날 배신한 것 같아요. 난 사랑도 우정도 다 잃었어요. 누군가는 한 번 가슴이 터져버리면 더 이상 고통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거예요. 하지만 나는 그럴 것 같지가 않아요.”
헤이젤의 눈에서 넘치는 눈물로 목소리까지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헤이젤이 품었던 야망은 다 어디로 갔죠? 그 백만장자 환자와 푸른 지중해에 있는 별장으로 가려던 신행여행은 어떻게 됐어요?”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미스 셜리. 내게는 야망이란 건 조금도 없어요. 난 그렇게 끔찍한 신여성이 아니라고요. 내 최고의 야망은 행복한 아내가 되어서 내 남편을 위해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거였어요. 이제는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다 끝나버렸다고요! 아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난 그것을 배웠어요. 아주 쓰디쓴 교훈이네요!”
헤이젤은 눈물을 닦았고 앤은 코를 닦았다. 그리고더스티 밀러는 염세주의자의 눈빛으로 저녁별을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헤이젤. 난 정말로 바쁘고 이런 말을 계속해봐야 더 얻을 것도 없을 것 같네요.”
헤이젤은 발코니 끝으로 향하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같은 걸음걸이로 문으로 가더니 극적으로 획 돌아보았다.
“안녕히, 미스 셜리. 난 모든 것을 당신 양심에 맡기겠어요.”
앤은 혼자 남아 펜 대신 자기 양심을 붙들고 세 번이나 재채기를 한 다음 혼잣말을 했다.
“학사 학위를 받았을지언정 아직 몇 가지 더 배워야겠어. 앤 셜리. 레베카 듀라도 해줄 수 있는 말들이지. 아니, 이미 레베카가 내게 해준 말들이기도 하고. 자신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용감한 숙녀답게 약을 잘 먹자고. 난 누가 기분 좋은 말을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빠져버리지. 헤이젤이 찬사를 늘어놓았을 때 정말로 기분이 우쭐했잖아. 숭배를 받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도 인정하자고. 자기가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41)쯤 되는지 안다는 것도 인정하시지. 어리석음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해준다고 착각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전혀 구제를 원하지도 않는데. 자, 이 일로 더현명해지고, 더 슬프고, 몇천 년이나 더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란 것도 인정하고, 이제 펜을 들고 시험지 채점이나 계속하시지. 미라 프링글은 치품천사(熾品天使)를 ‘아프리카에 많은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있군.”
41. deus ex machina: 급할 때 나타나 사태를 해결해주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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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 후, 앤에게 옅은 파란색에 가장자리가 은색인 종이에 쓰인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미스 셜리에게,

테리와 나 사이의 모든 오해가 풀려 우리는 서로를 더 깊고 열렬하게 사랑하게 되었으며, 지금 이 큰 행복감에 미스 셜리를 용서해주기로 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이 편지를 씁니다. 테리는 어쩌다 달빛의 유혹에 빠져 당신을 유혹해보려고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를 향한 사랑이 조금도 흔들린 적이 없다고 하네요. 테리는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귀엽고 순진한 아가씨라 하며, 그 점은 모든 남자가 다 마찬가지일 거라고 해요. 속을 알 수 없고 술수나 쓰는 사람에게는 볼일이 없다나요. 우리는 미스 셜리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앞으로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겠죠. 아마도 소설에 쓸 소재가 필요했거나, 자기가 한 여자의 달콤하고 무한한 첫 사랑을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여겼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우리는 미스 셜리에게 감사해요. 우리 본연의 모습을 일깨워주었으니까요. 테리는 전에는 인생의 보다 깊은 의미를 몰랐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도리어 좋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에요.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어서로의 생각을 느낌으로 알아채죠. 나 아닌 그 누구도 테리를 이해하지 못해요. 나는 테리에게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기를 바라요. 나는 미스 셜리처럼 머리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것만은 할 수 있다고 믿어요.
우리는 하늘이 내려준 천생연분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많은 사람과 거짓 친구가 우리를 시샘하며 갈라놓으려 해도 우린 서로 영원히 변치 않고 우리의 사랑을 지켜가자고 맹세했어요.
내 신부 혼수품이 준비되는 대로 결혼식을 올릴 거예요. 서머사이드에는 쓸 만한 것이 없어서 혼수품은 보스턴에 가서 사오기로 했어요. 내 웨딩드레스는 흰색 물결무늬 드레스이고 신혼 여행복은 비둘기 색깔이에요. 물론 모자와 장갑이 딸렸고 델피니움 꽃처럼 파란색 블라우스를 입을 거예요. 나는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가장 한창인 나이에 결혼하고 싶어요.
테리는 어떤 상상력을 동원한다 해도 다 그려내지 못할 만큼 멋진 사람이고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생각도 오직 테리뿐이에요. 나는 우리 둘이 꿈결처럼 행복하리란 걸 알고 있어요. 한때는 내 행복에 내 모든 친구들도 기뻐해줄 것으로 믿었지만 그 일 뒤로 난 세속적인 지혜도 필요하다는 쓰디쓴 교훈을 얻었군요.
그럼 이만
헤이젤 마르

추신 1: 미스 셜리는 테리가 굉장히 성질이 급하다고 했지만 그 말은 당치 않아요. 테리는 아기 양처럼 순하다고 테리의 누이동생이 말했어요.

헤이젤 마르추신 2: 레몬주스는 주근깨를 옅어지게 한다고 들었어요. 그걸 코에 한번 써보지 그래요.

헤이젤 마르

“레베카 듀의 말을 빌면 두 번째 추신은 ‘이제 더 이상은 도저히 못 참아!’야.”
앤이 더스티 밀러를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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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사이드 학교에서 두 번째 방학을 맞은 앤은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지만 한편으론 허전한 마음이기도 했다. 그해 여름에는 길버트가 에이번리에 오지 않고 서부 철로 건설 현장으로 일을 하러 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록 지붕 집’은 여전히 ‘초록 지붕 집’이었고 에이번리도 여전히 에이번리였다. ‘반짝이는 호수’는 그 옛날처럼 여전히 눈이 부셨다. ‘드리아드의 샘’ 주변으로는 고사리들도 여전히 무성하게 자랐다. 통나무 다리는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 낡고 이끼는 더욱 많이 끼었으며, 그림자가 길게 드러누운 ‘유령의 숲’에는 여전히 침묵과 바람의 노래가 가득했다.
앤은 딱 2주일 동안만 엘리자베스와 같이 지내게 해달라고 캠벨 부인을 설득했다. 엘리자베스는 2주일을 온전히 셜리 선생님과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에 더 이상은 바라는 게 없다는 기분이었다.
“전 오늘은 미스 엘리자베스가 된 기분이에요.”
아이는 앤과 함께 ‘윈디 포플러’를 나서며 기쁨에 넘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초록 지붕 집’ 식구들에게 소개할 때 미스 엘리자베스라고 소개해줄래요? 그럼 내가 아주 어른이 된 기분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럴게.”
앤은 한때 코델리아라고 불러달라고 사정하던 빨간 머리 소녀를 떠올리며 진지하게 약속해주었다.
브라이트 리버에서 ‘초록 지붕 집’까지 가는 길은 유월의 프린스에드워드 섬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잔뜩 흥분해 있는 엘리자베스는 오래전 봄날 저녁의 자기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목장의 푸른 풀은 바람에 흔들거리고 길모퉁이를 돌때마다 멋진 것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셜리 선생님과 함께 있었다. 2주일 동안이나 그 여자를 보지 않아도 된다. 엘리자베스는 분홍색 새 드레스를 입고 새 갈색 부츠를 신었다. 내일이 이미 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내일이 열네 개나 이어질 것이다. 분홍 들장미가 핀 ‘초록 지붕 집’으로 방향을 잡자 엘리자베스의 눈은 꿈으로 빛났다.
엘리자베스가 ‘초록 지붕 집’에 도착한 순간 모든 것이 마술처럼 바뀌어버렸다. 그 후로부터 2주 동안은 꿈속 세상에서 살았다. 문밖으로 한 발짝만 내딛어도 세상은 낭만적인 것으로 넘쳤다. 에이번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 모든 꿈이 오늘이 아니면 내일에라도 이루어질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기가 아직은 내일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일이 멀지 않았다고 느꼈다.
‘초록 지붕 집’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오래전부터 익숙한 일 같았다. 마릴라 아주머니의 분홍빛 장미 봉우리 찻잔 세트마저도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방도 항상 살던 그리고 사랑하던 방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풀들은 다른 어느 곳에 난 풀들보다도 더 푸르고 ‘초록 지붕 집’에 사는 사람들은 내일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이 집 사람들을 사랑했고 여기 사람들도 엘리자베스를 사랑했다.
데이비와 도라는 엘리자베스를 숭배했고 버릇을 망쳐놓았다. 마릴라 아주머니와 린드 아주머니도 엘리자베스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다 받아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단정하다거나 숙녀답다거나 어른들에게 항상 예의 바르게 대한다는 칭찬이 이어졌다. 모두 앤이 캠벨 부인 아이의 양육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 부인이 증손녀 교육을 잘 시킨 것은 명백했다.
“오, 전 자고 싶지 않아요, 셜리 선생님. 이렇게 좋은 시간을 단 한 순간도 버리고 싶지 않다고요.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잠자지 않고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신나는 하루를 보내고 작은 동쪽 방에서 앤과 같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엘리자베스가 속삭였다.
한참 동안을 엘리자베스는 잠들지 못했다. 셜리 선생님이 바다 소리라고 말해주었던 낮게 철썩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동쪽 방에 누워 있으니 꼭 천국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바다 소리도 처마 밑을 스치는 바람의 한숨 소리도모두 좋았다. 엘리자베스는 밤을 무서워했었다. 어둠 속에서 이상한 것이 불쑥 나와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밤이 두렵지 않았다. 처음으로 밤이 친구처럼 느껴졌다. 내일은 모두들 해변으로 나가기로 했다. 셜리 선생님이 약속했으니 그 은빛 파도 속에 발을 깊이 담가볼 수 있을 것이다. 언덕을 넘어 마차를 몰아 에이번리로 오는 길에 푸른 언덕 너머로 파도가 부서지던 광경을 보았다. 내일 바다로 나가면 파도가 차례차례로 몰아쳐오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그중 하나는 잠이라는 이름의 어두컴컴한 파도였다. 그 파도가 덮쳐와 엘리자베스는 달콤하게 한숨지으며 항복하고 말았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도 너무나 쉬워.’

엘리자베스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초록 지붕 집’에 있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매일 밤마다 셜리 선생님이 잠든 지 한참 후까지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 잠들지 못했다. 왜 ‘늘 푸른 집’에서의 생활은 ‘초록 지붕 집’에서의 생활 같을 수 없을까?
엘리자베스는 아무리 소리를 내고 싶어도 절대로 소리를 내서는 안 되었다. ‘늘 푸른 집’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였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생각도 참 조용히 한다고 느꼈다. 한때는 엘리자베스가 크게 꽥 소리를 질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적도 있었다.
“여기서는 소리 내고 싶으면 마음껏 소리를 내도 돼.”
셜리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제 그 일을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더 이상 소리를 지르고 싶지도 않았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랑스러운 것들 사이에서 발걸음도 살살 조용히 걷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초록 지붕 집’에 머물면서 웃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즐거운 기억을 안고 서머사이드로 돌아갈 수 있었고 또 그만큼 즐거운 기억을 뒤에 남겼다. ‘초록 지붕 집’ 사람들은 몇 달 동안이나 ‘초록 지붕 집’이 그 작은 엘리자베스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꼈다. 앤이 아주 진지하게 미스 엘리자베스라고 소개했는데도 그들에게는 꼬마 엘리자베스였다. 아주 작고, 너무 빛나고, 너무 요정 같아서 꼬마 엘리자베스 외에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이 꼬마 아이를 생각할 수 없었다. 땅거미가 내린 정원의 하얀 백합꽃들 사이에서 춤을 추던 꼬마 엘리자베스, 아무도 나무라거나 방해하는 사람 없이 커다란 사과나무 가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올라 앉아 요정 이야기를 읽던 꼬마 엘리자베스, 미나리아재비 무리에 폭 빠져 있어 금발 머리가 꼭 큰 미나리아재비 꽃처럼 보이던 꼬마 엘리자베스, 은색과 녹색이 섞인 나방을 뒤쫓고, ‘연인의 오솔길’에서 반짝이던 반딧불을 세기도 하던, 풍경초 속을 드나들던 호박벌의 윙윙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던, 부엌에서 도라에게 크림을 얹은 딸기를 받아먹고 뜰에서 함께 빨간 까치밥나무 열매를 먹던 꼬마 엘리자베스를 말이다.
“빨간 까치밥나무 열매는 너무 예뻐, 그렇지 도라 언니? 꼭 보석을 먹고 있는 것 같아.”
그 꼬마 엘리자베스는 어둠이 내린 전나무들 사이에서 노래를 불렀고, 커다랗고 탐스럽게 핀 장미를 꺾던 손가락에서는 향기가 났으며, 골짜기 시냇가 위에 걸린 커다란 달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린드 아주머니, 왜 저 달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어요?”
데이비가 보던 잡지에서 주인공이 곤경에 처한 이야기를 읽고 몹시 슬프게 울기도 했다.
“오, 셜리 선생님, 이 주인공은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요!”
꼬마 엘리자베스는 들장미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인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제 곁에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도라의 아기고양이들과 함께 부엌 소파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위엄 있는 늙은 암탉의 꽁지가 바람에 날려 등 쪽에 가 붙었다고 꽥꽥 웃어대던 그 아이가 정말로 그 꼬마 엘리자베스가 맞는가?
앤이 만든 컵케이크에 당의를 입히고, 린드 아주머니가 더블 아이리시 체인 무늬의 퀼트 담요를 만들려고 조각 천 자르는 것을 돕고, 도라를 도와 오래된 놋쇠촛대를 자기 얼굴이 비칠 때까지 박박 문질러 닦고, 마릴라의 감독 아래 작은 비스킷들을 모양내어 찍어내던 아이. 왜 ‘초록 지붕 집’ 사람들은 그 꼬마 엘리자베스를 떠올리지 않고는 어떤 장소든 물건이든 보지를 못하는가?
‘여기서 보냈던 2주일처럼 즐거운 시간은 이제 없을 거야.’
‘초록 지붕 집’을 떠나며 꼬마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역까지 가는 길은 2주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아름다웠지만 꼬마 엘리자베스는 눈물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내가 어린아이를 그리워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린드 부인은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가고 나자 남은 여름 동안 지내려고 캐서린 브룩이 자기가 기르는 개와 함께 찾아왔다. 캐서린은 이번 학기 말에 서머사이드 중등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 가을에는 레드먼드 대학교에 가서 비서 과정을 공부할 것이다. 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이 캐서린에게 더 나을 거예요.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어느 날 저녁 무렵 클로버로 덮인 들판, 고사리가 가득 돋아난 구석지에 앉아 앤이 말했다. 둘은 석양이 장관을 이룬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삶이 내게 허락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얻어낼거예요. 이제는 밖으로 나가 내가 찾을 거라고요.”
캐서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작년보다 훨씬 더 젊어진 것 같아요.”
그렇게 덧붙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캐서린을 위해서는 잘됐어요. 하지만 앞으로 서머사이드에서 캐서린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섭섭해요. 내년에는 내 탑 방에서 웃고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겠군요.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농담 삼아서 바보스럽게 놀고는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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