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4권 7~8

나단비 | 2024.04.02 18:39:58 댓글: 0 조회: 69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8308
7





늦은 11월의 화요일은 날씨마저 우중충했다. 간간이 차디찬 바람을 동반한 소나기가 저 언덕배기에서 몰아쳐 와 음울한 빗줄기 속에 보이는 세상은 너무 오래되어 낡은 것처럼 황량했다.
‘가여운 도비의 결혼을 날씨마저도 축복해주지 않네.’
앤은 생각했다.
“어쩌면, 어쩌면…….”
앤은 갑자기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일이 잘못되면 그건 전부 내 탓이야. 내가 그렇게 하라고 조언하지 않았다면 도비는 절대로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고. 프랭클린 웨스트콧이 정말로 도비를 영원히 용서하지 않으면 어쩌지, 앤 셜리? 이런 암울한 생각은 그만두어! 단지 날씨 탓이야.’
밤이 되자 비는 그쳤지만 날은 여전히 춥고 으스스했으며 하늘도 낮고 음침했다. 앤은 자기 탑 방에서 학생들의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는 중이었고더스티 밀러는 난로 아래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현관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앤은 득달같이 달려 내려갔다. 레베카 듀가 자기 침실에서 놀란 눈으로 고개만 쏙 내밀었다. 앤은 뒤로 주춤했다.
“현관문에 누가 왔어요.”
레베카가 채근하듯 말했다.
“알아요, 레베카. 일이 잘못되어버렸으면 어쩌죠? 자비스 모로예요. 내가 탑 방 창문으로 오는 걸 봤어요. 나를 만나러 온 거예요.”
“자비스 모로요! 더 이상은 도저히 못 참아요.”
레베카가 얼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자비스, 무슨 일이에요?”
“도비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몇 시간이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목사님도 와 계시고, 내 친구들도 기다리는 중이에요. 줄리아는 저녁 식사도 다 준비해두었어요. 그런데 도비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나는 길 끝에서 도비를 기다리다 미치는 줄 알았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두려워서 집까지는 가볼 엄두도 내지 못하겠고. 그 늙은 악당 프랭클린 웨스트콧 씨가 돌아왔을지도 모르잖아요. 매기 고모님이 도비를 가두어버렸는지도 몰라요. 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에요. 앤, ‘느릅나무 저택’으로 가서 도비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좀 알아봐 줘요.”
“제가요?”
앤이 믿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다.
“그래요, 앤이 가줘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앤밖에 없어요. 그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도 없고요. 앤, 제발 내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요.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잖아요. 도비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는 앤뿐이라고 했어요. 시간이 너무 늦은 건 아니겠죠? 이제 겨우 9시밖에 안 되었어요. 제발 좀 가줘요.”
“그 불도그가 날 물어뜯으면 어쩌죠?”
앤이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따위개가요!”
자비스가 경멸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 개는 부랑자에게도 으르렁거리지 못해요. 내가 설마 개가 무서워 그런다고 생각지는 않겠죠? 그리고 그 개는 밤이면 가둬둔다고요. 나는 다만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발각이 되는 날이면 도비가 곤욕을 치를까 봐 그러는 거예요. 앤, 부탁해요.”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자비스는 앤을‘느릅나무 저택’으로 가는 길까지 태워다주었다. 앤은 자비스를 집 가까이까지는 오지 못하게 했다.
“도비 아버지가 돌아왔다면 자비스가 말한 대로 일이 난처해질 수 있어요.”
앤은 길 양옆으로 가로수가 늘어선 길을 급히 걸었다. 이따금 빠르게 흐르는 구름 사이에서 달이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길은 어두웠다. 그리고 그 개도 적잖이 걱정스러웠다.
‘느릅나무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오직 하나뿐이었고, 부엌 창문에서 반짝이는 듯했다. 매기 고모가 직접 옆문을 열어주었다. 매기 고모는 프랭클린 웨스트콧의 누나인데 나이가 많아 허리도 구부정하고 주름살이 무척 많은 할머니였다. 무슨 일이든 눈치 빠르게 한다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집안 살림만큼은 훌륭하게 했다.
“매기 고모님, 도비는 집에 있나요?”
“도비는 자고 있다오.”
매기 고모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잔다고요? 어디 아픈가요?”
“글쎄, 어디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오늘 종일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더니만. 저녁을 먹은 후로는 피곤하다면서 제 방으로 갔어.”
“가서 잠깐만 도비를 만나야겠어요, 매기 고모님. 좀 긴히 할 얘기가 있거든요.”
“그럼 얼른 방으로 올라가 보구려. 올라가면 오른 쪽에 있는 방이니까.”
매기 고모가 계단 쪽을 가리켜 보이고는 부엌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앤이 급하게 방문을 두드린 후 경황없이 들어서자 도비가 일어나 앉았다. 조그만 촛불에 비친 도비는 울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앤의 화만 더 부추겼다.
“도비 웨스트콧, 자비스 모로와 오늘 밤 결혼하기로 한 것 잊었어요, 바로 오늘 밤예요?”
“아니,아니요. 오, 앤, 난 지금 몹시 불행해요. 오늘 종일 너무나 견딜 수 없이 힘들었어요. 내 마음이 어떤지 앤은 절대로, 절대로 상상하지도 못할 거예요.”

도비가 눈물 섞인 소리로 말했다.
“난 이 춥고 비까지 내리는 날씨에 길바닥에 서서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던 자비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알겠군요.”
앤이 인정사정없이 말을 뱉었다.
“그 사람, 그 사람 화가 많이 났나요, 앤?”
“당연하지 않아요?”
앤이 매섭게 말했다.
“오, 앤, 난 그저 무서웠어요. 어젯밤에도 한숨도 잘 수가 없었는걸요. 난 도저히 할 수 없었어요. 도저히요. 도망치는 일은 끔찍하게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닌가요, 앤? 난 결혼하면서 좋은 선물 하나도 받지 못할 거예요. 받더라도 많이는 못 받을 거라고요. 그리고 난 언제나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었어요.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쓰고, 은색 구두를 신고요.”
“도비 웨스트콧, 지금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요. 그리고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가요.”
“앤, 이제는 너무 늦었어요.”
“늦지 않았어요.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못 해요. 조금이라도 분별력을 갖고 있다면 그걸 모르겠어요?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면 자비스 모로는 도비와는 영원히 말도 하지 않을 거라고요.”
“오, 앤, 내가 왜 이래야만 했는지 안다면 그 사람도 나를 용서해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아는 자비스 모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평생 도비 멋대로 하게 내버려둘 사람이 아니에요. 도비, 내가 침대에서 억지로 끌어낼까요?”
도비는 몸을 떨며 한숨을 쉬었다.
“입고 갈 만한 드레스도 없는걸요.”
“예쁜 드레스라면 대여섯 벌은 되잖아요. 저 장밋빛 호박단 드레스를 입어요.”
“그리고 나는 혼수품도 전혀 준비하지 못했어요. 모로 집안에서는 이 일로 내내 내 발목을 잡을 거예요.”
“나중에 마련하면 돼요, 도비. 이 모든 일을 각오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전혀요. 그래서 이렇게 난처한 거예요. 어젯밤에야 생각해봤어요. 게다가 아버지도 마음에 걸리고, 앤은 아버지를 몰라요.”
“도비, 준비를 마치도록 딱 10분만 주겠어요!”
도비는 정해진 시간 안에 준비를 마쳤다.
“이 드레스는 내게 너무 끼어요. 내가 더 살이 찌면 자비스는 날 사랑해주지 않을 거예요. 나도 앤처럼 키가 크고 날씬하고 피부도 희다면 좋겠어요. 만일 매기 고모가 우리 소리를 들었으면 어쩌죠?”
앤이 옷 고리를 채워주는데 도비는 훌쩍훌쩍 울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고모는 부엌문을 닫아놓고 있어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게다가 약간 가는귀도 먹었잖아요. 여기 모자와 코트요. 내가 이 가방에 몇 가지 더 넣었어요.”
“오, 내 심장이 무섭게 뛰어요. 내 얼굴이 끔찍하지 않아요, 앤?”
“아니요, 아주 아름다워요.”
앤은 진심으로 말했다.
도비의 공단 같은 피부는 장밋빛과크림빛을 섞어놓은 듯 아름다웠으며, 그렇게 울었는데도 눈도 붓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자비스의 눈에는 도비의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이 아름다운 연인에게 짜증이 나 시내로 마차를 모는 동안 아주 냉정하게 대했다.
“세상에, 제발 부탁이니 도비, 나와 결혼하는 데 그렇게 겁이 잔뜩 난 표정은 좀 짓지 말아요. 그리고 울지 좀 말아요. 코가 붓잖아요. 거의 10시가 다 되었어요. 우리는 11시 열차는 타야 해요.”
자비스는 스티븐스 부인 집 층계를 내려가는 도비를 잡고 짜증스럽게 말했다.
도비는 마침내 자비스와 결혼식을 올리고 나자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포기한 듯 상당히 안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앤이 길버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좀 음흉하게 표현한 대로 도비의 얼굴에는 이미 ‘신혼여행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모두 앤 덕분이에요. 우리는 이 일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어요. 그렇지요, 자비스? 그리고 앤, 나를 위해 한 가지만 더 해주겠어요? 이 소식을 우리 아버지에게 좀 전해주세요. 내일 오후 일찍 도착하실 거예요. 누군가 이 소식을 전해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앤이라면 이 일을 아버지가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씀드릴 수 있을 거예요. 제발 우리 아버지가 나를 용서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세요.”

앤은 자기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도록 꾸민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엄청나게 화를 내겠지만, 굉장히요. 하지만 설마 잡아 먹지야 않겠죠. 오, 앤, 앤은 모를 거예요. 자비스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일에 마음이 놓여요.”
도비가 편안하게 말했다.
앤이 집에 도착했을 때 레베카 듀는 당장 궁금증을 만족시키든지, 아니면 미쳐버리든지 양단간에 결론을 내야 할 한계점에 달해 있었다. 잠옷 차림에 머리는 네모난 플란넬 천으로 감고 앤의 탑 방까지 따라 들어와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글쎄,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거겠죠. 프랭클린 웨스트콧도 마침내 보복을 당했으니 고소하군요. 맥콤버 선장 부인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그 소식을 프랭클린에게 전해야 하는 미스 셜리의 입장은 참으로 안됐네요. 미친 듯 날뛰면서 온갖 헛소리들을 지껄여댈 텐데. 내가 미스 셜리 입장이라면 오늘 밤 한숨도 못 잘 거예요.”
레베카 듀가 말했다.
“나도 즐거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앤도 서글프게 동의했다.




8





다음 날 오후 앤은 11월 안개가 꿈결처럼 어린 아련한 길을 걸어 ‘느릅나무 저택’으로 찾아갔다. 온몸이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도비가 말한 대로 프랭클린 웨스트콧이 자기를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앤은 신체적인 위협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부 사실이라면 뭔가를 던질지도 모른다.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기만 할까? 앤은 분노로 덜덜 떨며 말까지 더듬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지만 불쾌한 광경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 타고난 재주를 발휘하여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야유를 퍼부어 댈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빈정대는 말은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고 앤은 그런 야유를 당할 것이 끔찍이도 두려웠다. 마음을 상하게 하고 영혼에 생채기를 내 몇 달이고 쿡쿡 쑤셔댈 것이기 때문이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될 수 있으면 나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절대로 되지 마라.”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언제나 참 현명하기도 하시지. 하지만 지금 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고풍스러운‘느릅나무 저택’은 지붕 네 귀퉁이에 탑이 서 있고 둥근지붕 창도 한 개 나 있었다. 그리고 그 개는 현관 계단에 매어져 있었다.
“그 개는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다고.”
앤은 그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프랭클린 웨스트콧이 창문으로 자기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가 개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그 사람에게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앤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더 높이 꼿꼿하게 든 채 계단을 올라갔다. 개를 지나쳐 벨을 눌렀다. 그 개는 움직이지도 않았다. 앤이 어깨너머로 슬쩍 살펴보았는데 잠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프랭클린 웨스트콧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샬럿타운에서 오는 기차가 도착하면 곧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다. 매기 고모는 앤을 서재로 데려가 거기서 기다리게 했다. 개가 일어나더니 서재로 따라 들어와 앤의 발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앤은 그 서재가 마음에 들었다. 아늑하고 소박한 방으로 벽난로에서는 난롯불이 기분 좋게 타올랐고 마루에는 닳아빠진 빨간 카펫 위에 곰 가죽이 깔려 있었다. 프랭클린 웨스트콧은 책과 파이프에 관한 한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웨스트콧 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모자와 코트를 복도에 걸고 이마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채로 서재 문가에 섰다. 앤은 맨 처음으로 이 사람을 봤을 때 꼭 해적 신사 같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지금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미스 셜리가 아니신가요. 그래, 무슨 일이죠?”프랭클린 웨스트콧이 다소 무뚝뚝하게 물었다.
악수조차도 청하지 않았다. 개 쪽이 더 예의를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트콧 씨, 힘드시겠지만 제발 제 말이 다 끝날 때까지 참고 들어주시겠습니까?”
“난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오. 무슨 말인지 해보시지요.”
앤은 프랭클린 웨스트콧 같은 사람에게는 말을 빙빙 돌려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저는 도비가 자비스 모로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리러 왔습니다.” 앤은 떨지도 않고 말했다.
그런 다음 지진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프랭클린 웨스트콧의 홀쭉한 갈색 얼굴에서 근육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서재로 들어와 앤 맞은편에 놓인 다리가 구부러진 의자에 앉아 입을 열었다.
“언제요?”
“어젯밤이에요. 자비스의 누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죠.”
앤이 말했다.
프랭클린은 백발이 섞인 무성한 눈썹 밑에 깊이 파인 황갈색 눈으로 잠시 동안 앤을 가만히 보았다. 한순간 앤은 이 사람이 어린아이였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했다. 그런 다음 프랭클린이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몸을 흔들며 소리도 나지 않게 껄껄 웃었다.“도비를 탓하시면 안 돼요. 도비 잘못이 아니거든요.”
무서운 폭로가 끝난 지금 앤은 말할 힘을 되찾아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프랭클린 웨스트콧이 말했다.
프랭클린이 지금 비웃고 있는 것일까?
“이건 모두 제 탓이에요. 제가 도비에게 달아나 결혼하도록 권했어요. 내가 도비를 그렇게 만든 것이니, 부디 도비를 용서해주세요, 웨스트콧 씨.”
앤은 거짓 없이 용감하게 자백했다.
프랭클린은 유유히 파이프를 집어 들고 담배를 재기 시작했다.
“정말로 시빌이 자비스 모로와 달아나도록 했었다면, 셜리 선생은 내가 아무도 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일을 해낸 거요. 난 도비가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 용기가 없어서 걱정이었소. 그렇게 되면 이쪽에서 숙이는 꼴을 보여야 하는데 우리 웨스트콧 사람들은 누구한테 숙이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댁이 내 체면을 세워주었소, 셜리 선생. 내 그 점을 깊이 감사해야겠소.”
프랭클린 웨스트콧이 담배를 쟁이며 한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앤을 바라보았다. 앤은 그 뜻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 셜리 선생은 두려움에 덜덜 떨며 그 끔찍한 소식을 내게 전하겠다고 왔지요?”그가 말했다.
“네.”
앤이 얼른 대답했다.
프랭클린 웨스트콧이 소리도 없이 쿡쿡 웃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소. 나한테는 더 이상 기쁠 수 없는 소식을 가져온 것이니까. 나는 그 애들이 아주 어렸을 때 이미 자비스 모로를 시빌 짝으로 점찍었어. 다른 녀석들이 시빌에게 눈독을 들이면 난 얼른 그런 애들을 쫓아버렸지. 내가 그렇게 하니까 자비스도 시빌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요. 그 아비를 혼내주겠다고 말이오! 자비스는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은 젊은인데 우리 시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걸 알고 더할 수 없이 기뻤소. 그래서 곧 전략을 짰지.
나는 모로 집안일이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알고 있으니까. 선생은 모르오. 그 집안사람이 나쁜 사람들이란 게 아니라 남자들이란 원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라야 반드시 얻겠다고 마음을 먹는 법이야. 언제나 예상과는 반대로 간다고.
자비스의 아버지는 여자를 셋이나 걷어찼소. 여자들 집안에서 딸을 내줄 뜻을 너무 쉽게 내비쳤기 때문이었지. 자비스라고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난 알고 있었어. 시빌은 자비스에게 완전히 빠져버려서 어느 때고 우리 시빌에게 싫증을 낼 거라고. 시빌도 얻기 쉬운 상대라면 절대로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게 내 계산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 녀석도 우리 집에 얼씬하지 못하도록 했고 시빌도 그 녀석과 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지. 아주 철저하게 계산해서 엄한 부모노릇을 했다오. 손에 넣을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아오? 가질 수 없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없단 말이오! 모두 계획대로 되어갔지만, 시빌이 너무 소심하게 굴어 차질이 생겼지. 그 애는 착하기만 하지 배짱이 없거든. 그 애에게는 나를 거역하고서까지 자비스와 결혼할 만한 용기가 없으리라 생각했소. 자, 이제 좀 정신을 차렸으면, 고마운숙녀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모두 설명을 좀 해주겠소?”
앤의 유머감각이 다시 한 번 앤을 구해주었고, 한바탕 웃어볼 수 있는 일이라면 앤은 절대로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설사 그게 자기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될지라도. 앤은 갑자기 자기가 프랭클린 웨스트콧과 잘 아는 사이인 것처럼 느꼈다.
프랭클린 웨스트콧은 파이프 담배를 즐기면서 조용히 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앤이 이야기를 마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애를 많이 썼군요. 셜리 선생이 아니었으면 시빌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요. 그리고 자비스 모로도 웃음거리가 될 짓을 두 번이나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을 거요. 그 집안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휴, 간신히 일이 성사되었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소. 남들이 하는 소리를 다 믿었으면서도 여길 찾아오다니 정말 용감한 사람이오. 아주 많은 말들을 들었을 텐데. 그렇지 않소?”
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도그 개는 앤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기분 좋게 코까지 골았다.
“모든 사람들이 웨스트콧 씨를 괴팍하고 심술 사납고 까다롭다고들 말해요.”
앤은 솔직하게 말했다.“거기다 내가 폭군이고, 아내를 비참한 일생을 보내다 가게 만들었고, 가족 다루기를 사자에게 채찍을 휘두르듯 한다고 했겠지.”
“네, 그래요. 하지만 전 그 말을 다 믿지는 않았어요. 웨스트콧 씨가 정말로 그렇게 끔찍한 분이라면 도비가 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역시 현명한 분이구만. 내 아내는 행복한 사람이었소, 셜리 선생. 그러니 맥콤버 선장 부인이 내가 아내를 못살게 괴롭혀 죽게 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면 내 대신 좀 따져주구료. 아, 내 이런 품위 없는 말을 이해해요. 몰리는 미인이었소. 시빌보다도 예뻤지. 피부는 희면서도 분홍빛이 나고 머리는 황갈색에 눈은 이슬은 머금은 듯한 파란색이었다오.
서머사이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안 그러면 안 되지. 난 내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아내를 데리고 교회로 들어가는 남자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가장으로서 당연히 우리 집안사람들을 다스린 거지 그렇게 강압적이지는 않았소.
아, 물론 때로는 화를 낸 적도 있지만 몰리는 내 그런 성격에 익숙해진 뒤로 마음 쓰지 않았죠. 남자가 자기 아내와 말다툼도 못 한단 말이요. 여자란 언제나 한결 같은 남편에게는 쉬이 싫증내는 법이오. 게다가 난 화가 풀리고 나면 언제나 반지니 목걸이니 하는 것들을 선물했지. 서머사이드에서 내 아내만큼 좋은 보석을 많이 가진 여자는 없었소. 그걸 모두 꺼내 시빌에게 주어야겠소.”
“《밀턴 시집》은 어떻게 된 건가요?”
앤에게 장난기가 발동했다.“《밀턴 시집》이라고요? 오, 그거요! 그건 《밀턴 시집》이 아니었소. 《테니슨 시집》이었지. 난 밀턴을 존경하지만 알프레드 테니슨은 아니거든. 너무 병적으로 감상적이야. 어느 날엔가는 <이녹 아든>의 마지막 두 줄이 날 아주 화나게 했었어. 그래서 내가 그 책을 창밖으로 내던져버렸지. 하지만 그다음 날 <불어라 나팔아> 때문에 그 책을 다시 집어왔지. 그 시를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되거든. 그 책은 조지 클러크네 연못으로 떨어지지 않았소. 다 그 프라우티 할머니가 지어낸 말이야. 돌아가려는 거요? 좀 더 머물면서 하나뿐인 딸아이를 뺏긴 쓸쓸한 노인과 저녁이라도 함께 먹어주지 않을 테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웨스트콧 씨, 오늘 밤에 직원회의가 있어서요.”
“그럼 시빌이 돌아오고 나면 다시 봅시다. 그 두 아이에게 파티라도 열어주어야 할 테니. 아, 고맙소, 이젠 마음 푹 놓고 잘 수 있게 되었소. 무릎을 꿇고 ‘내 딸을 데려가 주게.’ 하고 말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거든. 이제 일이 다 해결되었으니 남은 일은 내가 비탄에 젖어 단념한 척하는 거요. 죽은 어머니를 보아 하는 수없이 그 애를 용서하는 척하는 거지. 나는 잘 해치울 수 있다오. 자비스도 절대로눈치채지 못할 거요. 선생도 비밀을 털어놓아서는 안 되오.”
“털어놓지 않겠어요.”
앤은 약속했다.
프랭클린 웨스트콧 씨는 정중하게 문까지 앤을 바래다주었다. 개는 뒷다리로 앉아 앤이 가버리자 울음소리를 냈다.
문가에서 프랭클린 웨스트콧 씨는 입에서 파이프를 빼내어 그걸로 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잊어서는 안 돼요. 고양이의 가죽을 벗기는 방법이 꼭 한 가지만은 아니라는걸. 고양이가 자기 가죽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잃었는지조차 모르게 처리할 수도 있어요. 레베카 듀에게 안부를 전해주오. 제대로 쓰다듬어주기만 하면 아주 좋은 할머니 고양이에요. 고맙소, 정말 고마워요.”
앤은 고요하고 온화한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안개가 걷히고 바람은 바뀌었으며 연한 녹색 하늘은 곧 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모두들 내게 프랭클린 웨스트콧을 모른다고 하더니, 결국은 그 말이 맞는 셈이야.’
앤은 생각했다.
“프랭클린이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앤이 그 집에 가 있는 동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레베카 듀가 물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던걸요. 곧 도비를 용서할 거예요.”
앤은 자신감 있게 말해주었다.
“미스 셜리처럼 사람을 잘 요리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무슨 묘책을 가진 모양이에요.”
레베카 듀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또 그 일을 끝냈으니 하룻밤의 휴식을 얻었다.’”42)
앤이 그날 밤 침대로 오르려고 세 발짝 이동 계단 발판을오르며 읊조렸다.
“그렇지만 다음에 또 누가 사랑의 도피 행각에 관해 조언을 구한다면…….”
42.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의 시 <마을의 대장간(The Village Blacksmith)>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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