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23~24

나단비 | 2024.04.19 11:20:43 댓글: 0 조회: 58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2380
23
이젠 안녕






혹독한 고통의 불길이 꺼지고 나니 회색 재가 온 세상을 덮었다. 신체적으로는 더 젊은 릴라의 몸이 어머니보다 빨리 회복되었다. 몇 주 동안이나 블라이드 부인은 비애와 충격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릴라는 아직 생존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상, 계속 살아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잔에게만 모두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낮이면 어머니를 위해서도 차분함과 인내심의 옷을 걸쳐 입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눈물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비통하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멈추고 난 자리에 참아 억누른 고통이 대신 들어섰고, 그 고통은 릴라가 죽는 날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릴라는 미스 올리버에게 매달렸다. 미스 올리버는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가릴 줄 알았고,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애도와 위로의 말을 전하러 온 친절하고 마음 착한 방문객들이 릴라에게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맛보게 하는 일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 잊을 거예요.”
윌리엄 리즈 부인이 명랑하게 말했다. 리즈 부인에게는 힘센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전쟁터에 나간 아들은 하나도 없었다.
“죽은 아이가 젬이 아니라 월터라서 다행이에요. 월터는 교회 회원 명부에 들어 있지만 젬은 아니잖아요. 내가 메러디스 목사님에게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거든요. 목사님은 젬이 떠나기 전에 그 문제로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해야겠다고 했어요.”
미스 세러 클로가 말했다
“가여운, 가여운 월터.”
리즈 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가여운 월터 소리나 하러 이 집에 올 필요는 없어요. 월터는 가엾지 않아요. 당신들 중 누구보다도 더 행복해요. 불쌍한 사람은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내지 않고 집에 둔 당신이라고요. 불쌍하고, 수치스럽고, 야비하고, 소견머리 좁은 사람이에요, 당신은. 당신 아들도 마찬가지고요. 농장은 번창하고 소들은 살이 쪄도 당신 영혼은 벼룩보다 작아요. 그것도 아주 크게 봐준 거예요.”
수잔이 부엌에서 나오며 분개해 소리쳤다. 릴라는 이제 더 이상은 참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차에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난 여기 마음 아픈 사람을 위로해주러 왔지 모욕당하러 온 게 아니에요.”
리즈 부인이 얼른 집을 나가버렸지만 아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잔도 분노가 수그러들어 부엌으로 물러갔다. 탁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 안고 한참 동안이나 심하게 흐느껴 울었다. 그런 다음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짐스의 놀이옷을 다렸다. 마침 짐스 옷을 다리러 부엌에 들어온 릴라는 그것을 보고 상냥하게 나무랐다.

“어떤 전쟁고아를 위한 일이라 해도 네가 과로로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수잔이 고집스럽게 말했다.
“난 쉬지 않고 일이나 했으면 좋겠는걸요, 아줌마.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어요. 잠이 들면 잠깐 잊고 있다가 잠이 깨면 고통스러운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너무 괴로워요. 이런 일에 익숙해질 수도 있을까요? 그리고 아줌마, 난 리즈 부인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월터 오빠가 고통에 몸부림쳤을까요? 오빠는 원래 고통에 몹시 예민하잖아요. 오, 아줌마, 오빠가 괴로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나도 기분이 좀 나아지고 힘도 날 것 같아요.”
릴라가 애처롭게 말했다.
자비로운 소식이 릴라에게 전해졌다. 월터의 부대장이 보낸 편지에 월터는 쿠르셀레트 전투에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바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바로 그날 월터가 릴라에게 보낸 편지도 도착했다.
릴라는 그 편지를 ‘무지개 골짜기’로 가져가 월터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자리에 앉아 읽고 또 읽었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가 쓴 편지를 읽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고통과 위안이 묘하게 뒤섞여 쓰면서도 달콤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 충격 이후로 릴라는 처음으로 슬픔 아닌 어떤 기분을 느꼈다. 조심스럽게 떨리는 희망과 어떤 믿음이었다. 월터는 빛나는 재능을 타고났으며 훌륭한 이상을 품었던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 재능과 이상은 그대로 살아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것이 소멸되거나 그 빛을 빼앗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쿠르셀레트 전투 전날 밤에 쓴 월터의 편지에는 월터의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었고, 독일군의 포탄도 그것을 뚫지 못했다. 지상의 것들과의 현세적인 인연은 끊어졌을지 모르지만 그 정신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월터의 편지는 이렇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내일 정상을 돌파할 거야, 릴라, 나의 릴라. 어머니와 다이에게는 어제 편지를 썼는데 웬일인지 네게는 오늘 밤에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오늘 밤에 뭘 쓸 생각은 없었는데 어쩐지 너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는구나. 항구 건넛마을에 사는 톰 크로퍼드 부인이 늘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하는데 마음에 걸린다고 했었지? 지금 내가 꼭 그런 기분이야. 내 동생이자 친구인 너에게 오늘 밤 편지를 써야지 하는 생각이 마음에 걸려 있어. 내일이 되기 전에 네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일 거야.
오늘 밤에는 이상하게 너도 ‘잉글사이드’도 아주 가까이 느껴져. 여기 온 후로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언제나 집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이 끔찍한 오물과 피로 뒤엉킨 곳에서 너무나 멀리만 떨어져 있는 듯 여겨졌었지. 그러나 오늘 밤에는 몹시 가깝게 느껴져. 아주 가깝게. 네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네가 말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그리운 고향 언덕을 고요하고 하얗게 비추는 달빛도 보이는 것 같다. 여기 와서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고요하고 부드러운 밤이나 달빛은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오늘 밤에는 어쩐지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다시 아름답게 느끼는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기쁜 일이야. 나는 지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심오한 행복감에 휩싸여 있어. 지금 그곳은 가을이 한창이겠지? 항구는 꿈에 잠겨 있고 글렌의 언덕들은 푸른 안개가 덮고 있을 거야. ‘무지개 골짜기’에는 과꽃이 여기저기 피어 넘실댈 거고. 우리의 정겹던 ‘여름과의 작별’꽃 말이야. 난 언제나 과꽃이란 이름보다 그 이름이 더 시적이라 좋았어.
릴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전부터 앞일을 예감하고는 했었어.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일을 기억하고 있겠지? 아니,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너는 그때 어렸으니까. 오래전 어느 날 저녁 무렵 낸과 다이, 젬 형과 메러디스 아이들 그리고 나, 우리 모두 ‘무지개 골짜기’에 모여 있었어. 나는 이상한 환상인지 예감인지, 뭐라고 불러도 좋지만 그런 것을 봤어.
릴라,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그림자 같은 군단을 뒤에 거느리고 골짜기를 내려가는 것을 보았어. 다른 아이들은 내가 그 장면을 진짜로 본 것이 아니라 지어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난 한순간 피리 부는 사나이를 정말로 보았단다. 그런데 릴라야, 어젯밤에 그를 다시 보았어. 그가 우리 진지에서 나가 양진영의 완충 지역을 가로질러 독일군 진지 쪽으로 갔어. 여전히 키가 컸고 그림자 같은 모습으로 기분 나쁘게 피리를 불고 있었지. 그 뒤를 군복 입은 병사들이 따라갔어. 릴라, 나는 정말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보았어. 이것은 공상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야. 난 그가 부는 피리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그는 사라졌지. 하지만 난 그를 보았고, 난 그 의미를 알아. 나도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사람들 속에 끼어 있었던 거야.
릴라, 피리 부는 사나이는 내일 피리를 불어 나를 서쪽으로 가게 할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그렇지만 릴라, 난 두렵지 않아. 무슨 소식을 듣게 되면 그걸 기억해. 난 여기서 내 자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어.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어. 난 이제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죽음도 두렵지 않고, 삶도 두렵지 않아. 내가 계속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면 말이야.
지금은 죽음과 삶 중에 삶이 더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든다. 내게 삶은 두 번 다시 아름답지 못할 테니까. 언제나 끔찍한 기억이 날 따라다닐 거야. 그런 기억들이 내 삶을 추하고 고통스럽게 할 테지만 절대로 그 기억을 잊지도 못할 거라고. 그렇더라도 삶이거나 죽음이거나 나는 두렵지 않아, 릴라, 나의 릴라. 그리고 난 여기 온 것도 후회하지 않아. 난 그저 만족해. 난 이제 내가 예전에 꿈꾸었던 시를 쓸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미래의 시인, 미래의 일꾼을 위해 캐나다를 안전한 나라로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있어. 그리고 꿈꾸는 사람을 위해서도. 

꿈꾸는 사람들이 없다면 일꾼들이 미래에 완수할 꿈이 아무것도 없는 것 아니겠니. 캐나다뿐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그렇게 되겠지.
랑게마르크와 베르됭에 내린 ‘붉은 비’는 황금빛 수확을 가져다줄 거야. 어리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두 해 안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더라도 한 세대 뒤에는 그렇게 될 거야. 오늘 뿌린 씨앗이 싹트고 성장하려면 그 정도 시간은 걸리겠지. 그래, 난 여기 오게 되어 기뻐, 릴라.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작은 섬의 운명만이 아니야. 캐나다의 운명, 영국의 운명만도 아니지. 인류의 운명이 위험에 처해 있는 거야.
우리는 바로 인류의 운명을 위해 싸우고 있는 거라고. 우리는 승리할 거야. 난 한순간도 그걸 의심해본 적이 없어. 이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는 살아 있는 사람만이 아니기 때문이야. 죽은 사람들도 싸우고 있어. 그런 군대는 절대 패배하지 않아.
네 얼굴에 웃음이 남지 않았을까 봐 걱정이다, 릴라. 앞으로 몇 년은 이 세상에서 이제까지보다 더 많은 웃음과 용기가 필요할 거야. 나는 설교 같은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그런 말로 시간을 낭비할 때도 아니야. 하지만 내가 ‘서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최악의 시간을 네가 조금이라도 견디기 쉽게 해줄 수 있는 말을 해주고 싶어.
릴라야, 난 너에 관해서도 드는 예감이 있어. 케네스는 너한테 돌아갈 거야. 그리고 네 앞에 긴 행복의 시간이 찾아들 거야. 너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우다 죽었는지 우리가 품었던 이상을 가르칠 거야. 그 이상은 우리가 죽어서도 살아서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고 가르쳐줘.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 이상을 위해 치른 값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 릴라, 너와 고향의 아가씨들 모두가 그런 일들을 해준다면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너희가 우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오늘 밤 우나에게도 편지를 쓸 작정이었지만 이제 시간이 없구나. 이 편지를 우나에게 읽어주고, 이 편지는 너희 둘에게 쓴 것이라고 말해줘. 너희 두 착하고 훌륭한 동생들에게 보내는 거라고. 내일 우리가 고지에 서면 나는 너희 둘을 생각할 거야. 너의 웃음을, 릴라, 나의 릴라. 그리고 우나의 파란 눈에 깃든 확고부동한 믿음을. 오늘 밤엔 그 눈이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그래, 너희 둘은 약속을 지킬 거야. 난 확실히 믿어. 릴라 그리고 우나, 그럼 안녕. 우리는 새벽이면 고지에 설 거야.

릴라는 이 편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는 릴라의 창백한 얼굴에 새로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주위에는 월터가 사랑했던 과꽃이 피었고 가을 햇살이 퍼져 있었다. 적어도 그 한순간만큼은 고통과 쓸쓸함이 물러났다.
릴라는 월터의 편지를 신성한 보물로 간직해둘 작정이었다. 그러나 우나 메러디스가 편지를 읽고 돌려주기를 망설이는 표정이 얼굴에 떠오른 것을 보고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 릴라는 월터의 편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월터의 마지막 편지인데. 월터의 편지를 간직하려는 마음을 이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편지를 베낀 것에는 영혼이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우나 언니, 우나 언니는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그 눈은 가슴 저린 여자의 눈이었다. 하지만 울거나 동정을 구하지도 않았다.
“우나 언니, 이 편지 갖고 싶어?”
릴라는 천천히 물었다.
“물론, 네가 줄 수만 있다면.”
우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럼 언니가 가져.”

릴라는 얼른 말했다.
“고마워.”
우나가 말했다. 우나는 그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그 한 마디에는 릴라의 희생을 다 보상해주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릴라가 가자, 우나는 손에 든 편지를 입술에 대었다. 우나는 이 사랑이 이제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프게 느꼈다. 그것은 ‘프랑스 어딘가’ 피로 물든 땅 아래 영원히 묻혀버렸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기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릴라는 알지도,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나는 슬픔을 보일 권리마저 없다. 그 오랜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감추고 참아야만 한다. 하지만 우나도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24
짐스의 목숨을 구한 메리






잉글사이드 식구들에게 1916년 가을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블라이드 부인은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았고, 식구들 모두 슬픔과 외로움으로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내색하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들 밝고 쾌활하게 일상생활을 해나갔다.
릴라도 많이 웃었다. 하지만 ‘잉글사이드’ 식구 중에 릴라의 웃음에 속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웃음은 그저 입술에서 나왔지 가슴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잉글사이드’ 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참 쉽게도 극복해.”
아이린 하워드는 릴라 블라이드가 얼마나 가벼운 사람인지 알고 놀랐다고 말했다.
“세상에, 어쩌면 릴라는 월터가 죽었어도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더라. 월터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처럼 했으면서 말이야. 릴라가 눈물을 흘리거나 월터 이야기 하는 걸 들은 사람 있어? 릴라는 벌써 월터를 잊어버린 거야. 월터만 가엾지, 뭐. 가족이라면 더 오래 슬퍼해야 되는 것 아냐? 내가 지난번 적십자 소녀단 모임에서 월터는 너무 멋지고,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했어. 월터가 죽어버린 지금 내 인생은 절대 예전 같지 않다고 하면서. 우린 정말 친한 사이였거든. 글쎄 월터가 군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맨 먼저 이야기해준 사람도 바로 나였단다. 내 얘기를 듣고 릴라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건성으로 아주 차갑게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훌륭한 젊은이가 어디 한둘이야?’ 하지 뭐야. 나도 그렇게 모든 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난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어. 난 아주 감정이 풍부하다고. 난 모든 것을 참으로 아프게 느껴. 난 상처를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성격이거든. 그리고 내가 릴라에게 왜 월터가 죽었는데 상복을 입지 않느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자기 엄마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사람들이 그 문제로 말들이 아주 많아.”
아이린의 말에 베티 미드가 항의했다.
“릴라는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아. 하얀 옷만 입어.”
“릴라에게는 흰색이 가장 잘 어울리거든. 그리고 검은색은 릴라의 피부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렇다고 해서 그게 릴라가 상복을 입지 않는 이유라는 말은 아니야. 그냥 좀 웃긴다는 거지. 만일 우리 오빠가 죽었다면 난 정식으로 상복을 입을 거라고. 다른 옷에는 눈도 돌리지 않을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나는 릴라 블라이드에게 정말 실망했어.”
아이린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난 아니야. 릴라는 무척 훌륭한 아이야. 2~3년 전에는 나도 릴라가 좀 허영심이 강하고 잘난 척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글렌 마을에서 릴라만큼 용기 있고 이기심 없이 남을 돕는 사람은 없어. 릴라만큼 철저하고 참을성 있게 자기 의무를 다하는 아이가 없다고. 우리 적십자 소녀단도 릴라가 열정과 인내심을 갖고 이끌지 않았다면 열두 번도 더 해체되고 말았을 거야.”
베티 미드가 릴라 편을 들고 말했다.
아이린이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어머나, 난 지금 릴라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내가 비난하는 것은 릴라가 감정이 없다는 점이야. 그건 뭐 릴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물론 릴라는 관리자로는 타고난 아이 같아. 그건 모두 인정하는 일이지. 그 애는 참견하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을 아주 좋아해. 그런 사람도 꼭 필요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해. 그러니까 내가 끔찍한 말을 했다는 듯이 나를 보지 말아줘, 베티. 나도 릴라 블라이드가 좋은 점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고. 그렇게 말을 해야 네가 만족한다면 말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무너져 버릴 일에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다는 것도 분명 장점이지.”
이런 아이린의 말 중 일부는 릴라의 귀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릴라는 그런 말을 듣고도 예전처럼 속상해하지 않았다. 아이린이 한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고 살기에는 삶이 너무 버거웠다. 릴라에게는 지켜내기로 한 약속이 있었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재앙과도 같았던 그 가을의 길고 괴로운 나날을 릴라는 자기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며 지냈다. 전쟁 소식은 계속해서 나쁜 소식뿐이었다. 독일군은 루마니아군과 전투를 벌일 때마다 연전연승이었다.
“외국인들, 외국인들.”
수잔이 중얼거렸다.
“러시아 사람이나 루마니아 사람이나 어느 나라 사람이 되었건 모두 외국인이잖아요. 외국인은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베르됭 전투 후로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데 사모님, 도브루자는 강인가요, 산맥인가요? 아니면 기후 조건을 말하는 건가요?”
11월에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수잔은 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사실 너무 흥분하고 다닌 탓에 사과의 말도 자주 해야 했다.
“내가 양키들 선거에 이렇게 관심을 쏟고 살 날이 올 줄 몰랐어요, 사모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지요. 그러니 자만심을 갖고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11일 밤 수잔은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앉아 있었다. 표면상의 이유는 짜던 양말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속셈은 그것이 아니었다. 수잔은 수시로 카터 플래그네 가게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 휴즈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2층 블라이드 부인 방으로 동동거리며 달려가 침대 발치께 서서 흥분을 누른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주무시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궁금해하실 것 같아 알려주는데요. 앞으로는 사정이 나아질 거예요, 사모님. 그 사람도 성명서나 내는 일에 빠져버리고 말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게 되었어요. 난 구레나룻은 좋아하지 않지만 전부 좋은 점만 가진 사람은 없지요.”
아침이 되어 결국 윌슨이 재당선되었다는 소식이 다시 들어오자 수잔은 다른 종류의 낙관론을 펼쳤다.
“글쎄, 같은 바보라도 우리가 잘 아는 바보가 잘 모르는 바보보다는 낫겠지요. 뭐 그런 비슷한 속담도 있잖아요. 내가 절대로 우드로 윌슨을 바보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에요. 하기야 그 사람이 분별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요. 그래도 우드로 윌슨은 글을 잘 쓰니까. 그 휴즈인지 뭔지 하는 남자는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도 모르잖아요.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면 양키들도 괜찮아요. 그 사람들은 지각이 있거든요. 난 그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소피아는 루즈벨트가 당선되어야 하는데 그 사람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더군요. 나도 그 사람이 제일 낫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서도 주님이 하시는 일을 믿어야 해요.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요. 그렇긴 해도 루마니아 문제에서는 하느님이 뭘 원하시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오리무중이에요.”
수잔은 쾌활하게 말했다.
수잔은 애스퀴스 내각이 물러나고 로이드 조지가 새 총리가 되었을 때에야 하느님의 의도를 알았다. 아니, 알았다고 생각했다.
“사모님, 마침내 로이드 조지가 총리가 되었어요. 난 이렇게 되길 몇 날 며칠을 기도했어요. 이제 곧 변할 거예요. 이렇게 된 것이 다 루마니아의 재앙 덕분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었다고요. 그런데 그걸 전에는 보질 못한 거죠. 더 이상 우물쭈물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이 전쟁은 승리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내 장담하지요. 부쿠레슈티30)가 점령당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어요.”
부쿠레슈티는 결국 함락당했다. 독일은 평화협상을 제의해왔다. 그렇지만 수잔은 그런 제안을 코웃음을 치듯 무시해버리고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윌슨 대통령이 그 유명한 12월 평화 성명서를 냈을 때에도 수잔은 험상궂게 비꼬기만 했다.
“우드로 윌슨이 평화를 만들어낼 거래요. 처음에는 헨리 포드가 평화주의니 어쩌니 하더니 이제는 윌슨이 나서네요. 하지만 평화란 것이 잉크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윌슨. 내 장담해요. 로이드 조지의 연설이 카이저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가르칠 테니 당신은 당신나라에서 평화 신조를 지키며 우표 값이나 절약하라고요.”
수잔은 미국 쪽으로 난 부엌 창문으로 불운한 대통령을 향해 삿대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윌슨 대통령이 그 말을 꼭 들어야 하는데 어쩌지요, 아줌마?”
릴라가 놀렸다.
“그러게 말이야, 릴라. 그 사람 곁에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민주당이건 보수당이건 그럴 사람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그 두 당의 차이를 나는 모르겠지만. 양키들의 정치는 아무리 연구를 해도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야.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둘이 다 같은 것 같은데 말이야.”
수잔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험악한 날씨가 계속되던 12월 마지막 주 릴라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혔다.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한시름 놓았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오는 것이 무서웠다. 쿠르셀레트 전투 후로 처음 맞은 크리스마스였다. 메러디스 목사님 가족을 초대했지만 아무도 억지로 유쾌한 듯 행동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모두들 조용히, 그렇지만 서로의 마음을 배려하고 위로하며 보냈다. 난 짐스의 병이 나아진 것에 감사했다. 너무 감사해 기쁜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거의 기뻤다는 것이지 정말로 기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다시 어떤 일로 기쁨을 느끼게 되는 일이 있을까 싶다. 내 마음속에서 기쁨은 모두 죽어버린 것 같다.

월터 오빠의 심장을 꿰뚫은 그 총알에 내 기쁨도 같이 죽어버렸다. 언젠가는 다른 종류의 기쁨이 생겨날지는 모르지만, 옛날에 느끼던 기쁨은 이제 없다.
올해는 겨울이 무척 빨리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열흘 전에 이미 우리는 심한 눈보라를 겪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엄청나게 심한 눈보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전조에 불과한 것이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쳤던 그 다음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고 ‘잉글사이드’와 ‘무지개 골짜기’는 나무마다 눈을 뒤집어쓴 채 반짝반짝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났다. 건물이며 나무에 쌓였던 눈발이 여기저기로 흩날리면서 북풍이 솜씨를 발휘해 조각을 깎듯 환상적인 모양으로 꾸며놓았다.
엄마와 아빠는 에이번리에 가셨다. 아빠는 엄마에게 기분전환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두 분 다 가여운 다이애나 아주머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주머니의 아들 잭이 얼마 전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잔 아줌마와 내가 집을 보게 되었다. 아빠는 다음 날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일주일이나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날 밤 눈보라가 다시 휘몰아쳐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4일을 쉴 새 없이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몇 년 동안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그렇게 심한 눈보라는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길은 완전히 눈으로 덮여버렸고, 기차도 다니지 못하게 되었으며, 전화선도 완전히 끊겨버렸다.
그리고 짐스가 아팠다.
두 분이 떠날 때부터 짐스는 가벼운 감기 증세를 보였고, 증상은 이삼일 동안 점점 더 심해졌다. 하지만 난 짐스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체온을 재보아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그 일을 생각하면 내가 부주의해서 짐스가 그런 심각한 지경에 빠진 것 같아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사실 난 그 주에 무기력증을 앓았다. 엄마가 집을 떠나자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용감하고 유쾌한 척하기가 진력이 났다. 며칠 동안 모든 것을 내팽개쳐 두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 울면서 지냈다. 난 짐스도 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난 비겁하게도 월터 오빠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만일 짐스가 목숨을 건지지 못했더라면 난 내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지 3일째 되던 날 밤에 짐스의 상태는 갑자기 악화되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아주 심각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집에는 아줌마와 나뿐이었다. 올리버 선생님은 폭풍우가 시작되었을 때 로브리지에 가 있어서 돌아오지 못했다. 처음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짐스는 전에 후두염을 몇 번이나 앓았고 별로 어려움 없이 아줌마와 모건 그리고 내가 짐스를 회복시켜놓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는 짐스의 상태가 무척 심각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난 이렇게 심한 후두염을 본 적이 없어.”
아줌마는 말했다.
나도 짐스가 심각한 종류의 후두염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의사들이 가성 후두염이라고 부르는 진짜 후두염으로 보통 후두염과는 달랐다. 난 이 병이 몹시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다. 아빠는 안 계시고, 의사에게 보이려면 가장 가까운 곳이라 해도 로브리지까지는 가야 한다. 거기다 전화는 불통이고, 말이건 사람이건 그 세찬 눈보라 속을 뚫고 갈 방법은 없었다.
우리 씩씩한 짐스는 생명을 지키려고 잘 싸우고 있었다. 아줌마와 나는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그리고 아빠의 의학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취해보았다. 하지만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만 갔다. 짐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가슴이 다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짐스는 숨이 가빠 고통스러워했다. 그 가여운 어린것은 얼굴이 완전히 푸른빛으로 변해버렸고, 괴로움에 못 이겨 살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는 듯이 그 작은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전쟁터에서 가스 공격을 당한 병사들의 모습이 꼭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는 짐스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짐스의 작은 목에 낀 치명적인 막이 점점 더 자라면서 두꺼워지고 있었지만, 짐스는 그것을 밖으로 뱉어내지 못했다.
난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순간까지 난 짐스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아줌마마저 포기하는 말을 했다.
“우리 힘으로 짐스를 구할 방법은 없어. 네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얼마나 좋겠니. 저 가여운 것을 좀 봐! 난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나는 죽어가고 있는 짐스를 바라보았다. 아줌마는 짐스가 조금이라도 쉽게 숨을 쉴 수 있도록 안아 올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호흡이 더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 전쟁고아 아기, 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얼굴은 바로 내 눈앞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었다. 난 아이를 살릴 수 없다. 난 뜨거운 물수건을 집어던지고 완전히 절망에 빠져버렸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짐스는 죽어가고 있는데. 모두 내 탓이다. 내가 세심하게 잘 돌봐주지 않은 탓이다.
바로 그때, 밤 11시쯤 된 시각에 현관 벨이 울렸다. 그 벨 소리는 폭풍우 소리를 제치고 온 집 안으로 울려 퍼졌다. 아줌마는 짐스를 침대에 내려놓을 수 없어 내려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난 복도에서 멈춰 서버렸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압도당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올리버 선생님이 전에 해주었던 이야기였다. 어느 날 밤 올리버 선생님의 숙모는 병든 남편과 함께 집에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숙모가 나가서 문을 열었는데 밖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적어도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을 열었을 때 몹시 찬바람이 불어닥쳐 숙모를 지나 곧바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고 했다. 그날 밤 밖은 고요하고 더운 여름밤이었다. 그 순간 숙모는 외침 소리를 들었고 곧장 2층으로 뛰어올라가 보니 남편이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올리버 선생님은 숙모가 문을 열었을 때 죽음의 사자가 들어왔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런 걸 무서워하다니 말도 안 돼. 하지만 난 지금 정신이 없고 너무 지쳤어. 그냥 한순간 문을 열기가 겁이 났던 것뿐이야. 죽음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봐. 그러자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게 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얼른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당연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 들어와 금방 복도를 눈보라로 채워버렸다. 하지만 문턱에는 분명 육체가 있고 피가 도는 형체가 서 있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눈을 뒤집어쓴 메리 밴스였다. 메리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난 그저 메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메리가 문을 닫고 들어오며 씩 웃었다.
“내가 쫓겨나서 여기 온 건 아니야. 이틀 전에 카터 플래그네 가게에 왔다가 눈보라가 몰아쳐 오도 가도 못 하고 갇혀버린 거야. 그런데 애비 플래그 할머니가 어찌나 내 신경을 건드리는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오늘 밤에는 여기로라도 피해야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눈발을 헤치고 오기가 장난이 아니었어. 하지만 난 일단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날씨 한번 정말 지독하다.”
나는 번쩍 제정신으로 돌아왔고, 빨리 2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에게 얼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 설명하고는 눈을 털고 있는 메리를 내버려둔 채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짐스는 발작을 겨우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또다시 발작이 일어났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음하고 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내가 무얼 어떻게 할 수 있었으랴. 우리는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해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에서 메리 밴스의 커다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저 아이가 죽어가고 있잖아!”
나는 몸을 홱 돌렸다. 누가 그걸 모르는 줄 아나, 내 소중한 짐스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나는 메리 밴스를 들어 문이든 창문이든 밖으로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메리는 아주 태연자약하게 서서 마치 숨이 꺼져가는 새끼 고양이라도 보듯 그 하얀 눈으로 짐스를 내려다보았다. 난 언제나 메리 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메리를 증오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다. 이건 보통 후두염이 아니야.”
아줌마가 아무 힘도 없이 말했다.
메리가 재빨리 앞치마를 걸치며 말했다.
“그래요. 이건 디프테리아성 후두염이에요.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요. 내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어요. 항구 건넛마을 와일리 부인 집에 살 때 윌 크로퍼드네 아이가 디프테리아성 후두염에 걸려 죽었어요. 의사 둘이 살려보려고 했지만 살리지 못했지요. 그런데 크리스티너 매컬리스터 할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한 말이 있어요. 내가 폐렴에 걸려 죽어갈 때도 나를 살려낸 할머니지요. 그 할머니는 기적을 일으켜요. 어떤 의사도 그 할머니를 따라가지는 못한다고요. 요즘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 그 할머니가 자기가 거기 있었다면 자기 할머니 처방을 써서 그 아이를 살려냈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 할머니가 와일리 부인에게 말하는 소리를 나도 들어서 그 처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난 기억력이 정말 좋거든요. 내 머릿속에 들어 있던 것들은 때가 되면 쓸 수 있도록 팍팍 튀어나온다니까요. 자, 이 집에 유황 있어요, 아줌마?”
“그래, 집에 유황은 있지.”
수잔 아줌마가 메리와 함께 유황을 가지러 내려간 동안 나는 짐스를 안고 있었다. 나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도. 메리 밴스는 언제나 자랑하고 허풍 떨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떤 할머니의 처방도 지금 짐스를 구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윽고 메리가 돌아왔다. 두꺼운 플란넬 헝겊으로 입과 코를 싸매고 수잔의 낡고 일그러진 양은냄비에 불타는 석탄을 반쯤 담아 들고 왔다.
메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두고 봐,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이것이 저 아이를 살리든 죽이든 하겠지. 어차피 저 아이는 죽어가고 있으니까.”
메리는 불타는 석탄 속으로 유황 한 숟갈을 뿌렸다. 그러고는 눈을 못 뜨게 만들고 숨이 막히게 만드는 연기를 향해 짐스를 거꾸로 들었다. 나도 왜 내가 얼른 달려들어 짐스를 빼앗아버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줌마는 뭔가 신령한 것이 나를 막았다고 했고, 나도 아줌마의 말이 맞는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었다. 아줌마는 발이 땅바닥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문가에서 메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짐스는 메리의 크고 힘 있는 팔에 붙들려 버둥거렸다. 오, 정말이었다. 메리는 힘이 있었다. 짐스는 쌕쌕하는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내 눈에는 짐스가 꼭 죽도록 고문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갑자기 짐스는 숨을 못 쉬게 기도를 가로막고 있던 막을, 기침과 함께 뱉어냈다. 내게는 그 시간이 한 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았지만 사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는 않았다. 메리는 짐스를 똑바로 일으켜 침대에 눕혔다. 짐스의 얼굴은 대리석처럼 하얗게 질렸고 갈색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얼굴의 그 무서운 납빛이 사라지고 호흡도 완전히 편안해져 있었다.
“놀라운 방법이지. 나도 그것으로 효험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어. 하지만 효험이 있든 없든 운을 하늘에 맡기고 해본 거야. 밤에 한두 번 더 이 아이의 목에 연기를 먹일 거야. 균을 다 죽여버려야 하거든. 너도 이젠 그래도 문제없다는 걸 알았지?”
메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짐스는 곧 잠들었다. 정말 잠이 든 것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혹시 혼수상태는 아닌지 걱정되었다. 메리는 그날 밤 자기가 말한 대로 두 번 더 짐스에게 연기를 먹였다. 그리고 날이 밝아올 무렵이 되자 짐스의 목은 완전히 깨끗해졌다. 체온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 사실을 확인하자 나는 돌아서 메리 쪽을 보았다. 메리는 침대 의자에 앉아 수잔이 자기보다 40배는 더 잘 알고 있는 일로 아는 체하며 지껄여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메리가 아무리 아는 체를 하고 허풍을 떨어도 밉지 않았다. 메리에게는 아는 체할 권리가 있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을 과감하게 해내어 짐스를 무서운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내었지 않은가. 이제는 그 옛날 말린 대구를 들고 내 뒤를 쫓아온 일도 상관없었고, 등대에서 춤추던 날 밤 내 낭만적인 꿈에 온통 거위 기름을 칠해주었던 일도 아무렇지 않았다. 메리가 자기 자신을 다른 누구보다도 훌륭한 척척박사로 여기고 언제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해도 괜찮다. 나는 다시는 메리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메리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무슨 일이야?”
메리가 놀라 물었다.
“아무 일도 아니야. 난 그냥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는 거야, 메리 밴스.”
“그래, 넌 당연히 내게 감사해야 해. 그건 틀림없지. 만일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너는 아줌마와 함께 그 아이를 죽이고 말았을 테니까.”
메리가 만족감에 들떠 말했다.
메리는 아줌마와 내게 최고의 아침을 만들어주고 먹게 했으며 다시 길이 뚫려 다닐 수 있게 되기까지 이틀 동안 우리 생활을 전부 간섭하고 나섰다. 아빠가 돌아왔을 때 짐스는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아빠는 우리말을 들으면서 별 말씀이 없었다. 아빠는 보통 그 ‘할머니 처방’이란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아빠는 좀 웃으며 말했다.
“이 일로 이제 메리 밴스가 나더러 심각한 병을 만나면 자기와 상의하라고 하게 생겼구나.”
그래서 내가 걱정한 것만큼 크리스마스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이제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전쟁을 끝내버릴 대공세가 펼쳐지길 기대하고 있다. 우리 먼데이는 추위 속에서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느라 다리가 굳어지고 류머티즘에 걸렸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고, 셜리 오빠는 여전히 하늘을 나는 에이스들이 얼마나 적기를 많이 떨어뜨렸는지에 관한 기사에 빠져 있었다. 아, 이제 다가오는 1917년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30. 루마니아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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