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29~30

나단비 | 2024.04.19 11:22:43 댓글: 0 조회: 90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2383
29
젬의 부상과 행방불명






수잔은 일을 하면서 월요일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격심한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란 표제를 몇 번이나 혼자 되뇌었다. 생캉탱 전투의 참패로 흐트러진 전열은 곧 회복되었지만 연합군은 1917년 오십만 명의 목숨을 희생하여 얻은 전선에서 계속해서 물러나야 했다. 수요일 신문에 실린 표제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막아냈다’였다. 하지만 후퇴는 계속되고 있다. 뒤로, 뒤로, 뒤로! 도대체 어디까지 뒤로 물러날 것인가? 또다시 전선이 허물어진다면 이번에야말로 참패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토요일 신문에는 ‘베를린에서도 공격이 저지된 것을 인정했다’라는 표제가 달려 있었다. 끔찍한 한 주일을 보내고 나서야 ‘잉글사이드’ 식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한 주를 넘겼군요. 다음 주일도 다시 한 번 넘겨보자고요.”
수잔은 굳건하게 말했다.
“나는 교수대에 매달린 죄수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래도 교수대에서 내려갈 수가 없어. 내려가도 곧 고문이 시작될 테니까.”
부활절 날 아침 교회를 향해 걸으며 미스 올리버는 릴라에게 말했다.
“지난 일요일에는 하느님을 의심했지만 오늘은 의심하지 않아요. 악은 우리를 이길 수 없어요. 우리에겐 굳센 정신이 있다구요. 정신은 육신을 이기게 되어 있어요.”
릴라는 말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그 암울한 봄날이 계속되는 동안 릴라는 몇 번이나 그 믿음이 흔들렸는지 모른다. 모두가 바라는 것처럼 아마겟돈은 며칠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몇 주일,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힌덴부르크는 계속해서 야만적인 공격을 감행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군사 비평가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소피아도 그들과 의견을 같이하며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또 내놓았다.
“연합군이 몇 킬로미터만 더 후퇴하면 전쟁에 지는 거야.”
소피아는 울부짖었다.
“그 몇 킬로미터 안에 영국 해군이 정박해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수잔은 몹시 경멸하듯 말했다.
“이건 이 방면에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들의 의견이라고.”
소피아가 정색을 하고 대꾸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 군사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단 한 가지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해. 나나 소피아보다 나을 것도 없는 족속들이야. 항상 틀린 말만 하고 있잖아. 어째서 그렇게 어두운 면만 보려고 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소피아 크로퍼드.”
수잔이 되받아쳤다.
“아, 밝은 면이 없잖아, 수잔 베이커.”
“아니, 왜 없어? 오늘은 4월 20일인데 힌덴부르크는 아직도 파리에 못 들어갔잖아. 그놈이 4월 1일까지는 들어가겠다고 그렇게 장담해놓고. 그것만도 밝은 면 아니야?”
“내 생각에는 독일군이 파리에 들어가는 날도 머지않았어. 어디 그뿐이야? 여기 캐나다에도 올 거야, 수잔 베이커.”
“여기만은 안 돼. 그 흉악무도한 독일 놈들이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발만 들여놓았다가는 내가 쇠스랑으로 처치해줄 테니까.”
수잔이 엄포를 놓았다. 독일군 전체를 자기 혼자서 다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인 모양이었다.
“그런 일은 없어, 소피아 크로퍼드.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소피아의 그 우울한 생각에 진절머리가 나. 나도 그동안 연합군이 실수를 좀 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아. 만일 캐나다군이 거기 남아 있었더라면 독일군이 파스샹달을 다시 점령해버리는 일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리스 강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을 너무 믿은 것도 실수였어. 그렇다고 소피아든 누구든 이 전쟁은 진 거라고 떠들고 다닐 이유는 없어. 나는 소피아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어. 특히 이렇게 상황이 어려운 때는. 사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내 심정을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게 우는 소리만 할 거면 차라리 여기 오지 말라고, 소피아 크로퍼드.”
소피아는 화가 나 자기 집으로 가버렸고, 몇 주 동안이나 수잔의 부엌에 나타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 후로 몇 주 동안이나 모두들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까. 독일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해왔다. 이번에는 여기, 다음에는 저기, 저들이 공격해올 때마다 중요한 지역은 다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5월 초 어느 날이었다. 바람과 햇빛은 ‘무지개 골짜기’에서 까불거리고 단풍나무 숲은 황금빛과 초록빛으로 빛났으며, 푸른 바다에서는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흰 파도 마루가 들썩였다.
그때 젬의 소식이 전해졌다.
캐나다 전선에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참호가 습격당했을 뿐 큰 싸움이 아니어서 전시상황 급보에도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모두 정리되고 난 다음에야 ‘제임스 블라이드 중위가 부상을 당한 채로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젬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보다 더 나빠.”
그날 밤 릴라는 창백해진 입술로 신음했다.
“아니, 아니야. 실종되었다면 희망은 있는 거잖아, 릴라.”
거트루드 올리버가 말했다.
“네. 고문당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희망이에요. 최악의 경우라면 단념이라도 할 수 있지요. 아, 올리버 선생님, 우린 젬 오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몇 주일이고 몇 달이고 지내야 하는 거예요. 아마 영원히 그런 상태로 끝날지도 몰라요. 저는 견딜 수 없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월터 오빠, 그리고 이제는 젬 오빠마저. 우리 엄마는 살아남지 못할 거예요. 엄마 얼굴을 좀 봐요. 모르겠어요? 그리고 페이스 언니도요, 가여운 페이스 언니가 이 일을 어떻게 견디겠어요?”
릴라가 울부짖었다.
거트루드 올리버는 고통으로 몸을 떨었다. 릴라의 책상 위에 걸린 언제나 미소 짓고 있는 모나리자의 얼굴이 갑자기 미웠다.
‘이런 소식을 듣고도 그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버리지 못하는 거야?’
미스 올리버는 순간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냥하게 릴라를 위로했다.
“아니야, 릴라. 그런 일로 릴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거나 하지는 않아. 그럴 분이 아니잖아. 그리고 젬이 죽었다고는 믿지도 않는다고. 어머니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어. 우리도 그래야 해. 릴라, 꼭 그래야 해, 알았어?”
“전 그럴 수 없어요. 젬 오빠가 부상을 당했다고요. 오빠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만일 독일군이 오빠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독일군이 부상당한 포로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잖아요. 저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올리버 선생님. 그럼 견딜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 안엔 더 이상 희망이 남아 있지 않아요. 희망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희망을 가져요?”
릴라는 신음했다.
미스 올리버가 자기 방으로 가자 릴라는 달빛 아래 침대 위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갖게 해달라고. 수잔이 으스스한 그림자처럼 방으로 들어와 릴라의 침대 위에 앉았다.

“릴라야, 걱정하지 마라. 우리 젬은 죽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줌마?”
“난 안다. 내 말을 잘 들어봐. 오늘 아침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먼데이였어. 그래서 아까 저녁 설거지를 마친 후에 빵을 오븐에 넣고 곧장 역으로 가보았단다. 그랬더니 먼데이는 보통 때처럼 참을성 있게 밤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어. 참호가 습격당한 날이 나흘 전인 지난 월요일이었지? 그래서 내가 역장에게 지난 월요일 밤에 먼데이가 울거나 짖어대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단다. 역장은 잠깐 생각을 해보더니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확실하냐고 다시 물어봤어. 그랬더니 그 역장은 ‘아, 확실하다니까요. 내가 분명히 기억해요. 지난 월요일 밤에는 우리 암말이 병이 나서 내가 밤을 꼬박 새웠거든요. 그 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어요. 안 그랬으면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을 거라고요. 마구간 문은 언제나 열어두니까요. 먼데이 집은 바로 마구간 앞이잖아요.’ 역장이 그렇게 말했다. 쿠르셀레트 전투가 있었던 날 밤 먼데이가 얼마나 울부짖었는지 알지? 먼데이는 월터보다는 젬을 더 좋아하잖아. 그런데도 월터를 위해 그렇게 슬퍼했는데 젬이 죽은 날 밤에 먼데이가 그렇게 조용히 잘 수 있었겠니? 아니야, 릴라. 젬은 죽지 않았어. 내가 장담해. 만일 젬이 죽었으면 먼데이가 알았을 거야. 아직까지 기차를 기다리고 앉아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어처구니없고, 비이성적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릴라는 그 말을 다 믿었다. 블라이드 부인도 믿었고, 블라이드 의사도 믿었다. 말이 되는 소리냐고 희미하게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짓기는 했지만 처음의 절망이 이상한 자신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바보 같은 소리건 아니건 모두들 마음을 다잡고 계속 살아갈 용기를 냈다. 글렌 역에 있는 충직한 작은 개가 신념을 잃지 않고 주인이 집에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도 기다린다.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으면 비웃고도 남았을 것이다. ‘단순한 미신’이라고 치부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잉글사이드’ 식구들은 ‘먼데이는 알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30
전세가 역전되다






수잔은 올봄에 보기 좋던 ‘잉글사이드’ 뜰을 파헤쳐버리고 대신 감자를 심어놓은 것을 보면서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자기가 손수 가꾼 작약꽃밭이 희생되었다고 해서 싫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부가 일광 시간37)절약법을 통과시켰을 때는 하소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잔이 마땅히 충성을 바칠 대상은 연방 정부가 아닌 더 높은 곳에 있는 더 권위를 가진 존재였다.
수잔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블라이드 의사에게 항의했다.
“하느님이 정해놓은 법칙을 갖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블라이드 의사는 태연자약하니 법률은 지켜야만 한다고 대답하고 ‘잉글사이드’의 시계를 한 시간 빨리 가도록 맞추었다. 그러나 수잔의 작은 자명종까지 건드릴 수는 없었다.
“이 시계는 내가 내 돈 주고 산 거예요, 사모님. 이 시계는 누가 뭐래도 하느님의 시간에 따라 움직일 거라고요. 보돈의 시간이 아니고요.”
수잔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수잔은 하느님의 시간에 맞추어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되면 침대로 갔다. 자기 일이야 그 시간에 맞추어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가족의 식사 시간은 보든의 시간을 따라야 했고, 교회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수잔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불만이었다. 어떻게 교회를 하느님 시간이 아니라 보든의 시간에 맞추어간단 말인가! 수잔은 기도만큼은 하느님 시간에 따르겠다고 했고, 닭 모이도 하느님 시간에 따라주었다. 그렇게 하면서 은근히 자기가 이겼다는 눈빛으로 블라이드 의사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이 일에서는 의사보다 자기가 더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때 수잔이 말했다.
“구레나룻 난 보름달은 일광 시간 절약법이 시행되어 무척 좋아한다더군요. 물론 그 사람이야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죠. 그 법이 독일 놈들 머리에서 나왔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사람이 자기 밀밭을 다 망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요? 지난주에 워런 미드 씨네 소들이 그 집 밭에 들어가 밀을 온통 다 짓밟아놓았대요. 우연이었는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날은 마침 독일군이 슈맹데담을 점령한 날이었어요. 딕 클로 부인이 다락방 창문으로 그 광경을 우연히 보았대요. 처음에는 그 일을 구레나룻한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소들이 그 집 밀을 다 먹어치우는 것을 보니까 아주 고소하더래요. 그 사람은 그런 꼴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지금 밀 수확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고, ‘절약과 봉사’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소를 쫓아내기로 마음을 돌려먹었대요. 그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구레나룻 난 보름달에게 그 사실을 전화로 알렸다는군요. 그런데 글쎄 클로 부인이 답례로 받은 것이 뭐였는지 아세요? 아주 묘한 말뿐이었대요. 욕이라고까진 말하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그 부인도 자기 의견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나도 그래요. 하지만 내가 그 말을 여기서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겠네요.메러디스 목사님도 이 자리에 계시고, 구레나룻은 목사님 교회의 장로니까 우리도 말조심을 해야지요.”
“새로운 별이라도 찾나요?”
한창 새싹을 피워 올리고 있는 감자밭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미스 올리버와 릴라의 곁으로 메러디스 목사가 다가오며 물었다.
“네, 우리가 찾았어요. 보세요. 저기 가장 큰 소나무 고목 바로 위요.”
“3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을 지금 우리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천문학자들은 별들이 충돌하면 새로운 별이 생긴다고 했어요.”
릴라가 말을 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별들을 보고 있으니까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요.”
“독일군이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파리에 닿을 곳에 있다니 별을 바라보면서도 좋은 생각을 하기 어렵네요.”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나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메러디스 목사가 아득히 먼 별을 바라보며 꿈을 꾸듯 말했다.
“그럼 신비로운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 거예요. 천상의 기쁨 같은 거요. 이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저도 천문학자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군요.”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천사군(天使軍)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어요.”
릴라가 웃으며 말했다.
“천문학자들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어. 화성의 운하 같은 걸 연구하는 사람은 서부전선에서 진지를 얼마나 뺏고 빼앗겼느니 하는 문제엔 그다지 관심이 없겠지.”
블라이드 의사는 말했다.
“내가 어디서 읽었는데 에르네스트 르낭38)은 1870년 파리가 포위되어 있을 때도 책을 썼다고 하더군요. 무척 즐겁게 책을 썼다고 했어요. 그런 사람이야말로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메러디스 목사가 말했다.
“난 이런 것도 읽었어요. 르낭이 죽기 직전에 자기가 죽게 되어 단 하나 유감스럽게 여기는 일은 ‘저 극도로 흥미로운 독일 황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끝까지 확인하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거라고 했대요. 에르네스트 르낭이 오늘날 살아 있어서 그 흥미로운 젊은이가 세계, 아니 그가 사랑하던 프랑스에 한 짓을 보았다면 그때처럼 초연할 수 있었을까요?”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젬 오빠는 오늘 밤 어디에 있을까요?”
릴라에게 괴로운 기억이 갑자기 밀려왔다.

젬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온 지 한 달도 더 지났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젬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진지가 습격받기 전에 젬이 쓴 편지가 두세 통 왔을 뿐 그 뒤로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독일군은 다시 마른 강에 이르렀고, 점점 더 파리로 다가서며 위협하고 있었다. 거기다 피아베 강에서 또다시 오스트리아군이 공격에 나섰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릴라는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별에서 얼굴을 돌렸다. 희망도 용기도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이런 때엔 하루도 더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기분이 들고 만다.
젬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있으면 어떻게 대처할지 방법이나 찾아볼 수 있으련만. 걱정과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다 보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가 힘들다. 젬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소식이 왔을 텐데 죽은 것이 분명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먼데이는 늙어 죽을 때까지 젬이 타고 올 기차를 기다릴 것이다. 가엾고 충직한 류머티즘에 걸린 개 먼데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 주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릴라는 그날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밤을 하얗게 새우고 말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거트루드 올리버도 신비로운 은빛 새벽을 맞이하려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앉아 있었다. 동쪽 하늘의 희미한 황금빛을 배경으로 빛나는 검은 머리는 무척 탐스러웠고, 얼굴은 총명해 보이면서 잊지 못할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릴라는 미스 올리버의 이마와 턱 선의 아름다움에 젬이 감탄하던 일이 떠올라 몸이 떨렸다. 젬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든 일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일으켰다.

월터의 죽음은 릴라의 가슴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새겨놓았다. 하지만 염증 없이 깨끗한 상처가 그렇듯 그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흉터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젬의 실종으로 생긴 고문과도 같은 아픔은 그것과는 다른 고통이었다. 그 고통에는 상처의 치유를 막는 독이 있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날마다 편지를 기다리는 일이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신문에 실린 가공할 전쟁 포로 학대 기사를 읽으며 젬이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걱정은 점점 더 참기 어려워져만 갔다.
거트루드 올리버가 릴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이 이상한 빛을 발했다.
“릴라, 나 또 꿈을 꾸었어.”
“어머나, 싫어요! 싫어요!”
릴라가 자지러지며 소리쳤다. 미스 올리버의 꿈은 언제나 불길한 일만 알려주었다.
“이번에는 좋은 꿈이었어. 들어봐. 4년 전과 똑같은 꿈이었어. 나는 베란다 계단에 서서 글렌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어. 내 발아래서는 아직도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지. 하지만 파도는 물러나기 시작했어. 파도가 4년 전에 들어왔던 것과 똑같이 재빠르게 물러났어. 내 눈앞에 글렌 마을이 드러났지. 아름다운 초록빛으로. ‘무지개 골짜기’에는 무지개가 걸쳐 있었어. 무지개 빛깔이 얼마나 고운지 눈이 다 부시고 어지러울 지경이었어. 그때 눈이 번쩍 뜨였어, 릴라 블라이드. 전세가 바뀌고 있는 거야.”
“그 말이 사실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릴라가 한숨을 지었다.

“두려운 일에 내 예언도 참이었으나
기쁜 일이 일어날 것이란 예언 또한 믿어라.”39)

거트루드 올리버가 거의 들뜬 목소리로 읊조리고는 말했다.
“난 내 꿈을 믿어.”
이탈리아군이 피아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며칠 후에 들어왔지만, 그다음 달에도 고통스러운 소식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조차 믿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7월 중순, 독일군이 마른 강을 건너자 다시 한 번 절망으로 온몸이 오므라들었다. 모두 ‘마른의 기적’이 다시 한 번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현실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14년에 일어났던 기적은 또다시 일어났다. 전세는 마른에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과 미국군이 적의 허술한 측면을 급습하자 전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역전되었다.
7월 20일에 블라이드 의사는 말했다.
“두 번이나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어.”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런 생각이 든다고.”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수잔이 말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돌아오질 않는군요.”
그러면서도 수잔은 밖으로 나가 국기를 달았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로 처음이었다. 국기는 수잔의 머리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힘차게 펄럭였다. 수잔은 셜리가 하던 대로 한 손을 들어 국기에 경례했다.
“이 국기가 펄럭이게 하려고 우리는 소중한 것을 바쳤습니다. 사십만 명이나 되는 우리 젊은이가 전선으로 나갔고, 그중 5만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이었지요!”
수잔이 중얼거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수잔의 흰머리가 얼굴에서 어지러이 흩날렸고, 무명 앞치마도 휘날렸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 이 앞치마는 미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절약정신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수잔의 모습은 위엄에 차 있었다. 수잔은 용감하고, 꿋꿋하며, 참을성 있고, 영웅적인 여인이었다. 승리를 가능하게 만든 여인. 모두들 소중한 국가의 상징을 향해 경례했다. 현관 문가에서 그 광경을 보던 블라이드 의사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다.
“수잔, 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끝날 때까지 수잔은 아주 용감했어요.”
수잔이 안으로 들어오자 블라이드 의사가 말했다.


37. 여름에 긴 낮 시간을 유효하게 이용하려고 보통 시각을 한 시간 빠르게 짠 시각. 일광 절약 시간. 서머타임.
38. Ernest Renan: 1823~1892.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종교가, 언어학자.
39.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의 <호숫가의 여인(The Lady of the Lake)>의 일부.







추천 (0) 선물 (0명)
IP: ♡.62.♡.203
23,522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더좋은래일
2024-05-02
0
9
더좋은래일
2024-05-01
0
20
더좋은래일
2024-04-30
1
37
chillax
2024-04-30
0
41
더좋은래일
2024-04-29
1
58
더좋은래일
2024-04-29
1
45
chillax
2024-04-29
0
47
chillax
2024-04-29
0
40
chillax
2024-04-29
0
31
더좋은래일
2024-04-28
1
53
더좋은래일
2024-04-27
4
110
더좋은래일
2024-04-26
4
85
더좋은래일
2024-04-25
3
117
chillax
2024-04-25
1
66
더좋은래일
2024-04-24
3
98
더좋은래일
2024-04-24
3
77
더좋은래일
2024-04-24
3
93
chillax
2024-04-24
1
55
더좋은래일
2024-04-23
3
98
chillax
2024-04-23
1
117
더좋은래일
2024-04-22
3
303
chillax
2024-04-22
1
221
더좋은래일
2024-04-21
3
357
나단비
2024-04-20
1
861
chillax
2024-04-19
2
793
나단비
2024-04-19
0
744
나단비
2024-04-19
0
90
나단비
2024-04-19
0
66
나단비
2024-04-19
0
74
나단비
2024-04-19
0
62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