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 - 불타는 여인 2-1

3학년2반 | 2022.02.03 08:00:07 댓글: 0 조회: 984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46395
불타는 여인 (하)

-김 성종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1. AIDS 환자
2. 迷路의 함정
3. 生 命
4. 추 적
5. 연쇄살인
6. 죽음의 그림자
7. 토막시체
8. 위조 전문가
9. 위조 여권
10. 두개의 얼굴


1. AIDS 환자

7월 25일 오후 7시20분 도쿄 나리타
공항.
노스웨스트 소속 보잉 747-300기의 나이
많은 기장은 예정보다 20분 늦게 그 거대한
기체를 나리타 공항 활주로에 내려놓았다.
그 비행기의 출발지는 뉴욕이었고 종착지는
서울 김포 공항이었다.
승객들 가운데 반 이상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실내는 공허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조용해졌다. 서울까지 가는
승객들은 밖으로 나가 대기실에서
대기하라는 아나운스먼트가 있자 긴 여행에
지친 승객들은 기지개를 켜면서 하나 둘씩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구겨지고 더럽혀진 자리를
정리하고 기내를 말끔히 청소한다.
기착지에서 새로 탑승하는 승객들을
위해서이다.
볼륨이 커보이는 금발의 스튜어디스 한
명이 그 승객을 발견한 것은 자리 정리를
하기 위해 창문 가리개를 위로 올렸을
때였다. 미국인인 그 남자 승객은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지는
해의 붉은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
승객의 얼굴을 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고,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욕에서부터 타고 온 손님이었다. 그녀는
잘생긴 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오는 도중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주면서
서울에서의 데이트를 은근히 암시하던 찰스
모겐도라는 GW자동차회사 간부사원이었다.
그녀 역시 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멋진 정사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모겐도씨, 어디 아프세요?"
그녀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잡아흔들었다. 서너 번 잡아흔들자
그제서야 비로서 그가 눈을 떴다. 초점이
풀려 있는 눈을 보고 그녀는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이마가 뜨거웠다.
"열이 많아요!"
그녀는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사라져버린
멋진 정사를 생각하고는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너 시간 전까지만해도
그는 그녀와 농을 주고받으면서 쾌활하게
웃어대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디가 아프세요?"
"물...... 물좀 줘요......."
그는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주방쪽으로 걸어가면서 환자를
돌봐야할 정도로 자신이 한가한 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새로운
데이트 상대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0분쯤 지나 의사가 달려왔다. 일본인
의사는 환자의 맥을 짚어보고 체온을
재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야겠는데요."
그 말을 받아 스튜어디스가 모겐도의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병원에 입원해야 된대요! 자,
일어나세요!"
둘러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여기가 어디지?"
"도쿄예요."
"안 돼...... 난 서울에 가야해요.......
서울에 가지 않으면......."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마지막 말은 들리지가 않았다.
"여기서 내릴 수 없다는데 어떡하죠?"
스튜어디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자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응급조치만 해드리죠. 두 시간만
참으면 서울에 도착할테니까 그때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서울쪽에 연락해서
앰뷸런스를 대기시켜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의사는 함께 온 간호원에게 왕진가방을
열게했다.

마형사와 남형사는 9시30분부터 김포
국제공항에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다.
10분쯤 지나자 모겐도의 동거녀인
박명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눈처럼 흰
원피스에 화장을 짙게 한 모습이었다.
남형사가 그녀를 손짓해서 불렀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조심스럽게 그들쪽으로
다가왔다.
"마중나왔나요?"
"네......."
"마중나온 건 좋은데 쓸데없는 말하지
말하요. 우리하고 약속한거 잊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모겐도를 태운 비행기는 예정보다
30분이나 늦은 10시30분에야 김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마형사와 남형사는 입국장에까지 들어가
모겐도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에도
모겐도라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탑승객 명단에는 분명히 찰스 모겐도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의아해 하고 있는데
이윽고 승객 한 명이 들것에 실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얼굴을 보니 사진에서 본 모겐도였다.
"환자가 발생했어요."
들것을 밀고온 승무원이 모겐도의
패스포트를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형사들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모겐도는 곧바로 밖에 대기하고 있는
앰뷸런스에 실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형사들도 박명희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사이렌을 울리며 멀리
사라지는 앰뷸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다가 병이 난 모양이지?"
"아마 그런 모양입니다. 지금 따라가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들이 차에 올라 막 출발하려는데
박명희가 급히 다가와 말했다.
"병원에 가실 거면 좀 태워줄 수
없어요?"
마형사가 뻔뻔스럽다고 생각하는데
남형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마형사는
비상등을 켜고 빠른 속도로 앰뷸런스를
뒤쫓았다. 앰뷸런스는 공항에서 가까운
어느 병원으로 들어갔다.
모겐도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응급실 앞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한참만에 젊은
당직 의사가 나왔다.
"미국인 환자 보호자되는 분 안
계십니까?"
박명희는 형사들의 눈치를 보면서
망설이다가 남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가 보호자 되십니까?"
"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의사는 금테안경 너머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실례지만 어떤 사이십니까?"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르며
형사들을 또 쳐다보았다. 형사들도 뭐라고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아가씨예요."
남형사가 참다 못해 대신 대답해주었다.
의사는 얼른 이해가 안가는지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를테면 애인 사이라는 말입니다."
남형사가 덧붙여 말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눈빛으로
박명희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 나더니
형사들을 향해
"실례지만 두 분은 어떻게
되십니까?"하고 물었다.
"아, 우리는 경찰에서 왔습니다.
환자한테 뭐좀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지금은 안 되겠죠?"
남형사가 신분증을 꺼내보이자 의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그는 형사들에게 무슨 일로 환자를
만나려고 하는지 굳이 묻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신분을 알고난 뒤부터는
그들을 완전히 묵살해 버리는 태도를
취했다.
"환자를 입원시켜야겠습니다."
그가 명희에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무슨 병인가요?"
명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좀 더 검사해 봐야겠지만......
장티푸스 증상이 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게
잘 안 걸리는데......."
젊은 의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제쯤 오면 환자하고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남형사가 물었다.
"글쎄요, 상태를 봐야겠지만 내일쯤
오시면 될 겁니다. 내일 오후쯤이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아플게 뭐람.
빌어먹을......."
병원 밖으로 나오면서 마형사가
투덜거렸다.

이튿날 아침에는 황개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것은 장례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초라한 것이었다. 장례식이 그렇게
늦은 것은 부검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탓도 있었지만 그의 유족이 나타날 때까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황개의 동거녀인
황석희가 미국으로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그의 누이는 며칠이 지나서야 올 수 없다는
전갈과 함께 장례비에 써달라고 미화
300달러만을 인편으로 달랑 보내왔을
뿐이었다. 결국 황개의 장례식에서 향불을
피우고 꽃 한 송이나마 놓아준 사람은
황석희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흐느끼거나 하지도 않았다. 충혈된 눈에
눈물만 조금 흘리다가 말았다. 그래도
그녀는 검은 원피스 차림에 예의를
갖추느라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마형사와 남형사는 유밀라의 장례식 ㄸ처럼
거기에 참석해서 줄곧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장지에까지 따라갔다. 황개의
누이가 화장을 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까맣게 그을린 그의 시신은
화장터의 화덕 속으로 들어가 한줌의 재로
변했다.
마형사가 운전하는 차에 편승했다. 그녀는
황개의 유골함을 안은 채 뒷자리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형사들도 별로 말이 없었다.
차가 강가에 이르자 마형사는 차를 세우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강에다 뿌리는 게 어떻습니까?"
그녀는 잠자코 차에서 내려 강쪽으로
걸어갔다. 형사들도 차에서 내렸지만
그들은 뒤따라가지 않고 거기에 서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흰 장갑을 낀 손으로 함 속에서
재를 한줌씩 떠내 강물 위에다 뿌렸다.
흰 가루가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먼지처럼 날리다가 강물위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빈 함을 강물
위에 띄웠다. 그리고 장갑마저 벗어 강물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녀는 형사들쪽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그녀는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오후2시.
마형사와 남형사는 모겐도가 입원해 있는
병원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밤 모겐도를 진찰했던 젊은 의사의
방에 들어가자 박명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지금 좀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남형사가 방정맞을 정도로 가볍게 묻자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의사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앞장서서 밖으로
나가면서
"잠깐...... 따라오십시오."하고 말했다.
형사들은 그를 따라 복도로 나서면서
그가 그들을 모겐도한테 안내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방에서 조금 벗어난 복도에서 멈춰서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그 미국인을 만나려고
하십니까?"
"살인사건 수사 때문입니다."
마형사가 불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의사는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 미국인이 살인범입니까?"
"아뇨, 아직 모릅니다. 수사단계이기
우리는 시간을 다투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그 미국인을 만나봤으면 합니다."
의사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다.
"그 미국인은 여기에 없습니다."
"벌써 퇴원했나요? 아니면......?"
그들은 모겐도가 위독해진 나머지 혹시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사의 다음 말이 그들의
그런 생각을 단번에 깔아뭉갰다.
"다른 데 수용됐습니다. 그 사람은
에이즈 환자로 판명됐습니다."
그렇게 말해놓고 나서 의사는 혹시 다른
사람이 듣지 않았나 해서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형사들은 그 의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두눈을
"이건 아주 극비상황입니다.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의사는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마형사는
담배를 피워물었고 남형사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 병원에서는 담배 피우는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마형사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재떨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불이
붙은 담배를 도로 담뱃갑 속에 집어넣고
나서 불이 붙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에이즈라고요?"
남형사가 물었다.
"네, 후천성면역결핍증 말입니다."
보이지 않자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뭔지 모르십니까?"
"아, 압니다. 소문으로 들어서 대강은
알고 있죠."
"현재로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일단 걸리면 거의
사망합니다."
형사들이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저
멍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을 뿐이었다.
구둣발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더니 흰
가운 차림의 남자 세 명이 나타났다.
앞장선 사람은 중년의 의사였고 뒤따라오는
건장하게 생긴 남자들은 간호원들 같았다.
그들은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한 마스크에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었고 손에는
경계하는 완전무장한 차림들었다. 중년의
의사가 젊은 의사의 귀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은 젊은 의사의 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조금 있자 여자의 앙탈하는
소리가 나더니 박명희가 남자 간호원들에게
끌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왜들 이러는 거예요?! 이거 놔요!
당신들 누구예요? 이거 놓으란 말이에요!"
그녀가 앙탈하면서 발버둥쳤지만 그들은
우악스럽게 그녀를 끌고갔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여기저기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정신병자인 모양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형사들은
밖에는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박명희가 필사적으로 저항하자 남자
간호원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쌍년! 빨리 타!"
박명희는 짐짝처럼 처넣어졌다.
"아니, 왜 이러는 겁니까?"
보다 못한 남형사가 젊은 의사에게
항의하듯 물었다. 그는 자못 흥분해
있었다. 젊은 의사는 팔짱을 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가만 계십시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이유가 뭡니까?"
앰뷸런스의 문이 쾅하고 닫히자 울부짖는
소리가 작아졌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차가 움직였다.
"뭐라구요?!"
남형사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때 이미
앰뷸런스는 빠른 속도로 병원 구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남형사는 영문을
몰라하는 마형사에게 귓속말로 재빨리
이야기해 주었다.
"의사 말이...... 박명희도 에이즈에
감염됐답니다."
"뭐가 어째?!"
경악과 공포의 빛이 마형사의 얼굴에
나타났다.
그들은 병원 안으로 사라진 그 젊은
의사를 급히 따라갔다.
내과전문의인 닥터 왕은 계속 따라붙는
형사들이 귀찮았다. 그의 방 앞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열 명 넘게 대기하고
신경까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그러나
형사들을 쫓아버릴 수는 없었다.
방으로까지 따라들어온 형사들을 그는
진찰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보시다시피 환자들이 밖에서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5분 여유를 드릴
테니까 알고 싶으신 것이 있으면 빨리
물어보십시오. 그 전에 제가 먼저
설명드리겠습니다."
냉엄할 정도로 지성미가 갖춰진 닥터
왕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미국인이 처음에는 장티푸스인줄
알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환자를 자세히 진찰해 보니까 전신에
비대해져 있었습니다. 혀에도 하얀 테가
끼어 있었고 마른 기침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의사들한테도 보인 다음
혈청검사를 해봤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병원에서 에이즈 감염자가 한 명
발견됐었는데 그 환자의 경우와 비슷했기
때문에 곧바로 에이즈 항체 검사방법에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에이즈 양성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에이즈 양성반응이란 뭡니까?"
"쉽게 말해서 에이즈 보균자라는
뜻입니다. 에이즈는 면역결핍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피나 정액, 주사바늘 등을 통해
몸 속으로 들어가 생기는 병입니다. 그와
같은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사람을 에이즈
감염자 또는 보균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바이러스를 분리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간접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혈청 속에
에이즈항체가 있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에이즈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항원에 해당하고 몸속에 들어가면
면역체계에서 대응하는 항체를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항체 검사방법에서
양성반응이 나타나면 그것은 곧 에이즈
보균자라고 할 수 있죠."
"항체 검사방법은 정확한 겁니까?"
"현재 에이즈 항체 검사방법으로
면역효소측정(ELISA) 방법이 주로 쓰이는데
99%가 정확합니다. 국립보건원은 ELISA
검사에서 양성으로 나타나면 여러 회사
제품을 써서 반복 분석해 보고 거기서도
대부분 양성으로 나타나면 마지막으로 가장
정확한 확인검사인 웨스턴 블럿법으로 최종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ELISA
검사방법에서 양성으로 나타나면 거의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양성반응자, 즉
에이즈보균자로 판정받았다고 해서 다
에이즈 환자는 아닙니다. 보균자와 환자는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보균자는 앞으로
환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균자라고 해서 다 환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짧게는 대개 4개월에서부터
시작해 길게는 5년까지의 잠복기간을 거쳐
환자로 발전하는데 보균자중 약 15%가
환자로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이즈
보균자로서 그 증상이 밖으로 나타나면
에이즈 환자로 판정됩니다."
"모겐도씨는 환자로 판정됐나요?"
"더 관찰을 해봐야겠지만 에이즈 환자가
거의 틀림없습니다."
"박명희는 어떻습니까?"
"그 아가씨는 아직 겉으로 나타난 증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보균자는 분명한데
환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에이즈 보균자는
자신은 앞으로 환자가 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한테 전염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환자와 똑같이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갑자기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에이즈라는 말이 주는 중압감이 그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것 같았다.
닥터 왕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약속했던 시간 5분은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미국인하고 동거생활을 하고
그 아가씨뿐만 아니라 그 미국인이
한국에서 관계한 여자들을 모두 검사해봐야
합니다. 어쩌면 가증스러울 정도의 결과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형사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그 미국인은
한국에서 여자 관계가 아주 복잡했습니다.
난잡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남형사의 얼굴에는 분노의
빛이 나타나 있었다.
"그 미국인이 관계한 여자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박양 외에 한 명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어느 정도까지 깊은 관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름과 주소 또는 연락처를 말씀해
의사가 메모지와 연필을 집어드는 바람에
형사들은 당황했다.
"글쎄, 그걸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요."
마형사가 중얼거리자 닥터 왕은 정색을
하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에이즈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일단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모두
검사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숨겨준다는 것은 본인은 물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에이즈
보균자들을 이잡듯이 찾아내지 않으면 우리
한국도 머지않아 에이즈 천국이 되고 말
겁니다."
형사들은 서로 마주 쳐다보았다.
마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형사가
말했다.
"이름은 오미애...... 명동 뒷골목에서
백가서림이라는 서점을 경영하고 있는
아가씨입니다. 전화번호는......."그는
수첩을 꺼내 백가서림의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노크소리와 함께 간호원이
고개를 디미는 바람에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 미국인하고 아가씨는 어디로
갔습니까?"
"시립병원으로 갔을 겁니다."
밖으로 허둥지둥 나온 형사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에이즈를 먼 나라의 남의 이야기로만
듣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차에 엔진을 걸면서 마형사가
중얼거렸다.
보균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해온 것
같은데요."
잠자코 차를 몰고가던 마형사가 갑자기
길 한쪽에 차를 세우고 남형사를
돌아보았다.
"에이즈 보균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해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보균자들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많은 자들을
상대해왔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선
피살자부터가 그렇지 않습니까. 유밀라는
1년 동안이나 모겐도와 동거생활을 했던
여자입니다. 그 여자는 누구보다도
에이즈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이 큰
여자였습니다. 모겐도와 동거생활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박명희도 에이즈에
있겠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남편인 배창기, 그리고
그녀가 낳은 동재, 그녀가 관계했던 황개
등 모두가 에이즈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가 배창기를 만났을 때.... 그 사람
병색이 완연했고 기침을 자주 했어. 그
사람 환자 아닌가?"
두 사람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차들이 질주하는 소리가
요란스러웠지만 그들은 한동안 적막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백가서림 주인 오미애도 모겐도와
관계가 있었다면 에이즈에 걸렸을 겁니다.
황개도 보균자였다면 그의 동거녀인 황석희
역시 전염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빌어먹을...... 안 걸린 사람이
없잖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데요.
잘못하다가는 우리까지 전염 되겠는데요."
"이러다가는 정말 에이즈 천국이
되겠어."
마형사는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무튼 모겐도를 만나봐야 할 거
아니야?"
"아이구, 그 에이즈 환자를
만나보시겠다구요? 맙소사! 전
빠지겠습니다. 반장님이나 만나보십시오."
"에이즈 환자라고 수사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잖아."
"그럼 반장님 혼자 만나보십시오. 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도 에이즈에 감염됐을지
모르겠는데요."
"쓸데없는 소리!"
마형사는 차를 오른쪽으로 홱 꺾었다.
"모겐도는 지금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겠는데요."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겠지.
망할 자식, 그동안 그 자식이 데리고 논
한국 아가씨들이 부지기수일 텐데 그
아가씨들은 어떻게 하지? 그 아가씨들을
전부 잡아들여야 할 텐데 어떡하지?"
"그건 우리 관할이 아닙니다. 보사부에서
알아서 할 일입니다. 모겐도를 거쳐간
아가씨들만 잡아들인들 뭐하겠습니까.
그동안 그 아가씨들은 또다른 남자들과
무수하게 접촉했을 거고 또 일부는
"그야말로 소리없이 쳐들어온 침략군
같군."
"소리없이 스며들어 눈에 띄지 않게
먹어들어가기 때문에 더욱 가공스러운
거죠."
"모겐도 같은 에이즈 환자가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맘대로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니 정말 한심한 일이야."
"우리나라는 외국인들한테는 관대하지
않습니까."
"빌어먹을!"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거기에는 모겐도를
만나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와 있었다.
미국 대사관 직원 두 명과 S자동차회사
직원 두 명, 모겐도와 함께 파견 근무중인
미국인 등이 정신병동 대기실에서
명은 안면이 있는 총무부장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알고 오신 겁니까?"
남형사의 물음에 총무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지는 않지만 확인은 해야겠기에
왔습니다."
그는 꺼리는 눈초리로 외국인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외국인들은 그 사람이 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 모양입니다."
"만나봤습니까?"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라고
해서 대기하고 있는 중입니다."
미국인들은 자기들끼리 둘러서서 작은
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조금 있자 중년의
의사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그는
영어로 뭐라고 설명했지만 그들은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그는 벌컥 화를
내면서 한국인들 쪽으로 다가왔다.
"건방진 자식들, 한국 의사를 뭘로 아는
거야."
그는 화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투덜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남형사가 물었다.
"아, 글쎄, 저치들이 미국인 에이즈
환자를 내놓으라지 뭡니까. 정신병동에
수용하지 말고 환자를 집에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그리고 한국 의사의 진단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환자를 일단 집으로
데려다놓고 나서 미국쪽 의사의 진단을
의사한테 보일 모양인데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립니까. 일단 에이즈 환자로
판명되면 격리조치키로 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될
수가 없어요. 그걸 알면서도 저치들은
미국인 환자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절대 내놓지 마십시오."
남형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그야 물론이죠.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법을 무시하고 내놓을 수는 없죠. 법이
아니더라도 에이즈 환자는 격리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외국인을 언제까지고 여기에다
격리시켜 놓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죠. 지금 확인검사에
들어갔으니까 확인이 끝나는 대로 국외로
"저 사람들은 환자를 만나봤어요?"
"조금 전에 만나봤습니다."
"박명희라는 아가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가씨 역시 격리해 놨습니다.
확인검사가 끝나면 별도 조처를 취할
겁니다."
"우리는 수사 때문에 온 사람들이니까
지금 바로 미국인 환자를 면회했으면
합니다."
"만나보는 건 좋은데 환자가 지금 극도로
흥분해 있으니까 조심해서 만나보십시오.
물론 환자 방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따로 수용시설이 없기 때문에 임시로
정신병동에 격리시킨 거니까 기분이
언짢더라도 그렇게 알고 만나보십시오."
의사는 그들을 육중한 철문 앞에까지만
남자 간호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경찰에서 오신 분들이니까 이분들을
미국인한테 안내해요."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철문이
쾅하고 닫혔다. 그 소리가 가라앉으면서
대신 짐승들이 울부짖는 것 같은 괴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대담한 형사들도
놀라서 목을 움츠릴 정도로 그것은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방안에는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쇠창살 밖으로 손을 내저으며 낯선
방문객들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복도 끝에는 또 하나의 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는 중환자실입니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철문을 두드려대면서
영어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투사
출신인 남형사는 그 소리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내보내줘! 이놈들아, 내보내달란
말이야! 난 미국인이야! 왜 나를 여기다
가둬두는 거야! 대사관 직원들은 어디
갔어?"
철문이 쿵쿵쿵하고 울리는 소리가 마치
북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맨 안쪽 오른쪽에 미국인 환자가
있습니다. 위에 있는 작은 문을 열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남자 간호원은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다.
"박명희라는 아가씨는 어디에 수용되어
"그 맞은편 방에 있습니다. 중환자실에는
현재 그 두 사람만 수용되어 있습니다.
정신질환자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나오실 때 문을 두드리면
열어드리겠습니다."
형사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의 뒤에서
육중한 철문이 다시 쾅하고 닫혔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강제로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기분이 별로 안 좋은데요."
남형사가 기분을 바꿔보려는 듯 담배를
피워물면서 말했다.
"귀청이 터질 것 같군."
철문을 두드려대는 소리에 마형사는
두손으로 귀를 막았다.
방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방 수는
모두 해서 8개쯤 되었다. 일반 환자실과
다른 점은 방문이 쇠창살로 되어 있지 않고
철문으로 막혀 있는 것이었다.
복도 끝에 이른 그들은 오른쪽 방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위에 붙어
있는 작은 문의 고리를 벗겨냈다. 그것은
안에서는 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문을
열자 그 공간만큼 쇠창살이 나타났고 그
창살 사이로 실내가 보였다. 실내 중간에
서 있던 모겐도가 문쪽으로 돌진해 오는
바람에 그들은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는
쇠창살을 움켜잡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물...... 물...... 물좀 달란 말이야!"
그의 노리끼한 두눈에서는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듯 했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마형사가
물었다.
"물좀 달랍니다. 몹시 목이 마른
모양입니다."
모겐도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온몸을 떨어대고 있었다. 그는 입은 옷
그대로 수용되었는지 양복 저고리는
방바닥에 내던져져 있었고, 와이셔츠는
땀에 절어 있었다.
실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룻바닥
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배설통으로 보이는
플래스틱통 한개와 휴지뿐이었다. 침상도
없는 것으로 보아 마룻바닥 위에서 그대로
누워서 자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병원측이 에이즈 환자를 얼마나 경원하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치료가 불가능하니 남에게 전염이나 되지
않게 가둬두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이즈 환자는 사람 대접을 못
받는군요."
"모두가 증오하고 있으니까. 물을 좀
달라고 해."
"왜 나를 가둬두는 거야? 난 에이즈
환자가 아니야! 한국놈들! 더러운
한국놈들이 뭘 안다고 나를 가둬두는 거야!
난 미국인이야! 너희들은 나를 가둬둘
자격이 없어! 난 미국인이야! 난 미국으로
갈 거야! 날 미국으로 보내줘! 이 원숭이
같은 놈들아!"
그는 거의 미쳐 있는 듯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쇠창살을 움켜잡고
흔들어댔지만 그것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걸 보십시오."
남형사가 찌그러진 주전자를 쳐들어
보였다. 물을 보자 모겐도는 두손을 창살
밖으로 내뻗으면서 물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남형사는 쉽게 물을
주지 않았다.
"미스터 모겐도, 우리는 경찰이야.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해 주면 이 물을 주겠어.
알겠어?"
그때 맞은편 철문이 울리면서 여자의
가냘픈 외침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문좀 열어줘요!
문좀 열어줘요!"
열어보았다. 문 앞에는 박명희가 서
있었다. 철딱서니없는 아가씨는 너무 운
탓으로 두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형사들을
알아본 그녀는 방구석으로 가더니 쭈그리고
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꼴 좋군. 외국인이라면 쓸개까지 빼주는
아가씨들이 이 꼴을 좀 봤으면
좋겠는데요."
남형사가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작은 문을 도로 닫자 안에서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좀 열어줘요! 경찰 아저씨 문좀
열어줘요!"
도로 문을 열자 바로 앞에 박명희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말했다.
"아저씨, 내보내줘요! 부탁이에요!
잡아가둘 수가 있어요? 내보내주세요!"
"무턱대고 잡아가둔 게 아니지. 아가씨는
왜 여기 왔는지 모르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엉터리
진단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보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녀는 갑자기 입고 있던 빨간색
티셔츠를 상체에서 뒤집어 뽑았다.
브래지어로만 가려진 희디흰 상체를
느닷없이 보게된 형사들은 당황했다.
"아, 됐어, 됐어. 옷 입어요."
그러나 그녀는 대담하게도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브래지어마저 벗어버렸다.
그것을 바닥에다 내동댕이치면서
"보란 말이에요! 에이즈는 무슨 말라빠진
에이즈예요! "
따위는 잊은 듯했다. 하긴 대학생인 몸으로
40대의 외국인 남자와 버젓이 동거생활을
했을 정도이니 처음부터 수치심 같은 것은
아예 없었는지도 모른다.
몸에 비해서 그녀의 젖가슴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너무 커보였다. 그것이 몸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일때마다 그것은 묵직하게 처진 채
덜렁거렸다.
"아가씨가 에이즈에 감염됐는지 어쨌는지
난 알 수 없어요. 그건 병원에서 판단할
일이니까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의사의 진단을 엉터리라고 하면 도대체
아가씨는 누구 말을 믿지? 저길 보라구."
남형사는 맞은편 방을 가리켰다.
쇠창살을 움켜쥐고 있는 모겐도의 모습이
있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듯했다. 박명희
역시 모겐도를 처음 본 것 같았다.
"미스터 모겐도, 어떻게 된 거예요?"
"오, 미스 박, 왜 거기에 갇혀 있는
거지?"
그들은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박명희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모겐도가 마침내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스 박, 한국 의사들은 엉터리야.
대사관에 이야기해 놨으니까 난 곧 나가게
될 거야. 내가 나가면 미스 박도 꺼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형사들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모겐도를 바라보았다. 남형사가 참지
"당신은 에이즈 환자야.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당신이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야. 에이즈균을 퍼뜨린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뻔뻔스럽게
떠드는 거야? 엉터리는 한국 의사가 아니고
바로 당신이야! 알았어?"
남형사가 격하게 쏘아붙이자 모겐도는
주춤하는 것 같았다. 남형사는 명희쪽을
돌아보았다.
"저 미국인은 에이즈 환자로 밝혀졌어요.
그러니까 박양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은
바로 저 사람 때문이야. 저 사람이 마구
퍼뜨린 거야. 이제야 알겠어?"
박명희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녀는
증오에 찬 눈으로 모겐도를 노려보다가
급기야 그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야, 이 새끼야! 이 더러운 자식아! 너
혼자 죽을 것이지 왜 나까지 끌고 가는
거야! 왜 나한테 그 더러운 병을 옮겼어.
난 어쩌란 말이야? 말해봐! 난 어쩌란
말이야? 이 더러운 새끼야!"
악에 받쳐 발버둥치는 그녀를 더 이상
두고볼 수가 없어 마형사는
"아가씨도 잘한 거 없어."하고
쏘아붙이면서 작은 철문을 닫아버렸다.
문 저쪽에서 한동안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다가 이윽고 그것은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명희는 한국말로 욕설을 퍼부어댔지만
모겐도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충분히 짐작한 것
같았다.
형사들이 다시 방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는 풀이 죽어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모겐도씨, 이리 와봐요."
남형사가 손짓하자 그는 흐릿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물좀...... 물좀 줘요."
그는 말라붙은 입으로 말했다.
"묻는 말에 사실대로 말해요. 그러면
물을 줄 테니까."
"당신들...... 경찰관이라고 그랬지?"
"그렇소. 우린 경찰 수사관이오."
"경찰 수사관이 왜 여기엔 왔지? 무슨
일이오?"
그는 두손으로 쇠창살을 움켜쥔 채 몸을
버티고 있었다.
만나러 온 거요."
살인사건이라는 말에 그는 별로 놀라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에이즈 환자로 판명된 지금 그를
놀래게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형사들은 생각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그가 그 밖에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살인사건? 그게 어쨌다는 거요?"
모겐도는 흥미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밀라...... 유밀라...... 몇년 전
당신과 동거생활했던 여자 말이오. 그 여자
생각나요?"
"그 여자가 어쨌다는 거요? 헤어진 지
오래 됐는데....... 제발 물좀......."
한 손을 창살 밖으로 내밀어 흔들었다.
남형사는 주전자를 든 채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에 닿으면 에이즈에라도 걸리는
듯이.
"묻는 대로 숨김없이 말해요. 그 여자가
호텔에서 살해됐어요. 지난 19일 당신이
미국으로 떠나던 날 말이오. 그 여자가
죽고 나서 수 시간 후에 당신은 미국으로
떠났어요. 우리가 조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그 말에도 모겐도는 별로 놀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밖에 내밀고 있던
손을 도로 거두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난 관심없어요. 그 여자하고는 오래
전에 헤어졌고...... 그동안 보지도
못했어요. 그 여자가 죽은 게 나하고 무슨
여자가 죽었다면...... 그건 자신을 불사른
거겠지?"
마지막 말은 중얼거리는 소리였기 때눈에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불사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요?"
미국인은 말하기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두눈이 잠시 허공을
더듬었다.
"유밀라...... 그 아가씨는 내가 만난
한국 아가씨들 가운데 가장 매력적이고
섹시한 여자였어요. 그 아가씨는 일단
침대에 올라가면...... 불덩이 같았어요.
마치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덩이
같았어요. 오로지 섹스를 위해서 태어난
여자......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불태우고
남형사는 모겐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마형사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그 아가씨를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그 열정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그 아가씨하고 1년 동안 함께
사는 동안...... 나는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이나 빠졌어요. 더 이상 함께
살다가는...... 나는 불에 타서 재가 될 것
같았어요."
미국인은 잠시 황홀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불타는 여인과 함께 지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서 두번 다시 결코
맛볼 수 없는 그 황홀했던 순간순간들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이 우람한 체격에 정력적으로 생긴
유밀라라고 하는 그 여인은 그것이 얼마나
강했다는 것인가. 그 정도로 그것이
강했으니 배창기 같은 병약한 사내한테
어떻게 만족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가
시누이의 약혼자인 황개 같은 인물과
놀아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남형사는 잠자코 모겐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국인은 생각에 잠겨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다시 문쪽으로 다가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아가씨를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헤어지기로
했어요. 하지만 난 그 아가씨를......
사랑했어요. 정말로 사랑했어요. 그
때문에...... 나는 그 아가씨가 언젠가는
그것 때문에 자신을 불살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아가씨는 충분히 그럴만한
여자였어요. 그 아가씨 자신도 언젠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자기는
섹스 때문에 죽을 거라고...... 그 불길
속에 자신을 태워버리고 싶다고......
자신을 그 불길 속에 태워버릴 수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고...... 자신을
태워버릴 수 있는 남자가 있다면
목숨이라도 던져서 그 사람을 붙잡겠다고
했어요....... 그 아가씨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까......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나서
말한 거요....... 그 아가씨는 결국 자기
말대로 자신을 그 불길 속에 태워죽인
거요....... 내말 알아 듣겠소, 경찰관
"우리는 모겐도 당신이 그 여자를 죽인
증거를 가지고 있어. 엉뚱한 수작부리지
말고 솔직히 말해요!"
남형사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모겐도는
멍하니 형사들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죽였다구? 내가 이 두손으로 그
여자를 죽였단 말이지?"
"그래! 그러고 나서 미국으로 내뺀거야!
그렇지 않아? 호텔 방안에서 당신 지문도
채취했어!"
그말에 모겐도는 자신의 큰 손을 펴들고
새삼스럽게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재미있다는 듯 열 손가락을 흔들어보다가
그는 배를 움켜잡으며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그렇게 정신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않았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내가 그 여자를
죽였지. 내가 그 여자를 죽였지. 내가
죽였어.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죽였어.
죽이지 않으면 그 여자를 차지할 수
없었어."
그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건장한
외국인이 나약하게 흐느끼는 모습이란 정말
보기 민망했다. 남형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마형사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놈이 자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유밀라를 죽였답니다."
"어떻게 죽였다는 거야?!"
마형사의 점 같은 조그만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모겐도쪽을 바라보았다.
남형사는 큰 소리로 흐느끼고 있는
"이봐, 미스터 모겐도! 어떻게 그 여자를
죽였지?"
모겐도는 진저리치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칼로 가슴을 찔렀어....... 그 아름다운
가슴을 찔렀지....... 그 아가씨는 더 깊이
찔러달라고 애걸했어......."
"이봐 빌어먹을! 이 봐! 누굴 놀리는
거야? 죽인 장소가 어디야?"
"뉴욕 맨해턴......."
모겐도는 눈물을 훔치면서 킬킬거렸다.
"망할 자식,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뭐라는 거야?"
마형사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칼로 가슴을 찔러 죽였답니다. 죽인
장소는 뉴욕 맨해턴이랍니다. 울다가
단단히 미친 것 같습니다."
남형사가 화가 잔뜩 나서 모겐도를
노려보았다.
"미스터 모겐도, 당신은 에이즈 환자이기
때문에 어차피 죽게 돼.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어. 얼마 안 있어 죽는단 말이야.
이왕 죽을 바에 솔직히 털어놓는 게 어때?
그렇다고 두번 죽는건 아니니까 말이야.
에이즈 환자라는 걸 명심하란 말이야.
당신이 아무리 미국인이라해도 소용없어.
에이즈가 미국인이라고 해서 봐줄지
알아?!"
"난 아니야!"
모겐도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난 아니란 말이야!"
모겐도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형사들을
타오르는 듯했다.
"난 에이즈 환자가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당신 때문에 저 아가씨도 감염됐어!"
남형사는 박명희가 갇혀 있는 방을
가리켰다.
"당신 때문에 몇 명이 감염됐는지 몰라.
당신은 책임을 져야해! 당신은 큰 죄를 진
거라구.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나? 한국
아가씨들을 그렇게 함부로 건드려도 되는
거야?!"
"난 에이즈 환자가 아니야! 잘못 진단한
거야!"
모겐도는 큰 소리로 항변했지만 목소리는
처음보다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당신은 에이즈 환자에다 살인자야! 이
사람이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당신은
어차피 죽기 마련이야."
남형사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잔인한 말들을 내뱉었다.
"아무리 거짓말쟁이라도 죽음을 앞두고는
사실대로 이야기한다는데 당신은 그럴
생각이 없나보지? 사실대로 자백하고
용서를 빌면 하느님께서 당신을 용서해줄
것이고 당신은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왜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거지?
당신은 크리스천이 아닌가?"
"난 크리스천이야. 하지만 난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어."
그는 허공을 향해 두팔을 벌려보였다.
그리고 신에게 무엇인가 갈구하듯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도로 팔을 떨어뜨렸다.
"당신은 그 여자를 잊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여자와 다시 맺어보려고 했지만
그 여자가 말을 듣지 않았어. 당신은 그
여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질투를
느꼈어. 그래서 결국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여자를 호텔로 유인해서 살해한 거야.
그렇지 않아?"
"한국 경찰관은 상상력이 뛰어나군요.
그런 식으로 사건을 꾸며서 두드려
맞추는가요? 당신은 차라리 코미디언이
되는 게 낫겠어. 난 별로 웃지 않는데 당신
말을 들으니까 웃음이 나온단 말이야.
당신은 충분히 코미디언이 될......."
"닥쳐!"
"이 애송아, 내가 살인범이라면 내
손목에다 수갑을 채울 것이지 왜 그러고
죽여보는게 소원이야. 하지만 아직
죽여보지도 않았는데 날 살인범이라고 하면
좀 곤란하잖아. 자,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 하고 물 좀 줘요. 약속대로 물을
줘야할 거 아니야."
남형사는 그를 노려보다가 주전자 꼭지를
창살 사이로 밀어넣었다. 창살 사이가 좁아
주전자가 통째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모겐도는 무릎을 꿇고 입을 벌렸다.
위풍당당하고 오만하던 미국인도 상황이
이렇게 되니 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남형사는 주전자를 앞으로 기울였다.
모겐도는 얼굴 위로 쏟아지는 물을
정신없이 받아마셨다. 그는 얼굴과 옷이
온통 젖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려고 필사적이었다.
주전자의 물을 모두 붓고 나서 남형사는
헐떡거리고 있는 모겐도를 향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미스터 모겐도, 당신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건드린 아가씨는 도대체 몇
명이나 되지? 그건 숨김없이 말할 수
있겠지?"
모겐도는 물에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수도 없이 많아요."
"대략 얼마나 돼요?"
"셀 수 없이 많아요. 아마 수백 명은 될
거요."
그는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했다.
"동거생활한 여자들 외에 말인가?"
"물론......."
미국인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내가 손을 벌리지 않아도 한국
아가씨들이 자진해서 몸을 주겠다고 덤비는
데야 어떡 하겠어. 예쁜 아가씨들이
덤벼드는데 물러날 바보가 어딨어. 그것도
고르고 골라서 상대한 아가씨가 수백
명이지 만일 원하는 대로 받아들였다면
수천 명은 됐을 거야. 내 책임이 아니야.
아가씨들 책임이지. 한국 아가씨들
귀여워요. 그리고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미국 아가씨들보다도
몸을 함부로 굴려요."
"그 수백 명의 아가씨들이 당신 때문에
에이즈에 걸렸을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그 결과를 생각이나 해봤어?"
"에이즈를 퍼뜨린 쪽이 어느 쪽인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 아가씨들 가운데
있잖아. 내가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어."
"당신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이군."
"나를 내보내줘. 한국인들이 무슨 권리로
나를 여기에다 가둬두는 거야? 빨리 나를
내보내줘."
"잠자코 있어. 여긴 한국이야!"
남형사는 박명희가 갇혀 있는 방의 작은
철문을 열었다. 박명희는 문 앞에 서서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는지 문이 열리자마자 모겐도를 향해
ㅁ설을 퍼부었다.
"더러운 놈! 더러운 자식!"
"그녀는 모겐도를 향해 침까지 뱉었다.
그러나 침은 모겐도한테까지 가지 못하고
복도 위에 떨어졌다."
"오, 미스 박, 오해하지 말아요! 난
사람이야! 곧 풀려날 테니까 기다려줘요!"
형사들이 긴 복도를 걸어나와 문을 닫을
때까지도 박명희의 욕설과 모겐도의 변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백가서림 안으로 세 명의 남자들이
들었섰다. 한명은 사복이었고 다른 두 명은
정복차림의 경찰관이었다. 유밀라 피살사건
때문에 형사들이 찾아온 적도 있어
오미애는 긴장해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벗어놓았던 안경을 도로 끼고
그들을 주시했다. 그들은 책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그녀가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오미애 씨가 누굽니까?"
점퍼 차림의 중년이 거칠게 물었다.
"전데요."
"보사부에서 나왔습니다."
사내가 증명을 얼른 꺼내보인 다음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그 말을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나오셨다구요?"
"보사부에서 나왔다니까요."
중년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보사부라구요?"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데요?"
책방이야말로 보건당국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업종이다. 글쎄, 정신건강을
이야기한다면 또 몰라도.
"잠깐 시간좀 내주셔야겠습니다. 조사할
게 있으니까 함께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건가요? 경찰이라면 또 몰라도......."
그는 말없이 서 있는 경찰관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가보면 알아요. 그래서 경찰관하고 함께
온 거니까....... 자, 갑시다."
중년은 따라오라고 손짓까지 해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과 영문을 알 수
없어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어디로 가자는 거예요? 이유도 말하지
않고 무턱대고 가자고 할 수 있나요?
이유를 말씀해 보세요."
"가보면 안다는데 왜 이래요. 빨리
나와요!"
중년이 고개짓을 하자 경찰관 두 명이
양쪽에서 그녀의 겨드랑이를 끼었다.
"이거 놔요! 왜 이러는 거예요?"
청했다. 남자 종업원이 달라들어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하자 중년은 눈을 부라렸다.
"공무집행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그 서슬에 종업원은 머쓱해서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경찰관들에게 끌려나오자
골목을 오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이웃 가게에서도 사람들이 나와 그녀가
끌려가는 것을 구경했다. 낯이 익은
암달러상들도 그 틈에 끼어들어 반항하는
오미애를 거들었다. 그러나
공무집행중이라는 말에 모두들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골목에는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앰뷸런스 뒤에는 흰 가운을 입은 두 명의
남자 간호원들이 문을 열어놓고 대기하고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오미애는 완전히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이거 놔요! 도대체 이유도 밝히지 않고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들 누구예요?"
"보면 몰라?!"
경찰로부터 그녀를 인계받은 남자
간호원들은 우악스럽게 그녀를 앰뷸런스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녀가 발버둥치자
그들 중의 한명의 그녀의 등을 팔꿈치로
찍었다.
"빨리 들어가! 얻어터지기 전에!"
그녀는 앰뷸런스 바닥에 짐짝처럼
처박혔다. 뒤에서 문이 쾅 하고 닫히자
캄캄한 어둠이 덮쳐왔다. 그것은 완전히
밀폐된 차였다. 앰뷸런스는 안에 불도 켜지
주먹으로 문을 두드려대면서 소리소리
질렀지만 그녀에게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끌려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악당들에게 끌려가는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자신을
연행해 간다면 이해가 되지만 경찰관들은
뒤로 빠진 채 앰뷸런스에 싣고 가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조용해졌다. 소리치고
발버둥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앰뷸런스는 응급환자를 싣고 가기나 하는
듯 계속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갔다. 바람
더웠다.
이윽고 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가 입고
있는 흰색 블라우스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때문에
브래지어의 끈이 고스란히 드러나보였다.
그녀는 어느 병동의 빈 방으로 들어섰다.
진찰대와 철재 의자 두개 그리고 철제 책상
한개만이 놓여 있는 을씨년스러운
방이었다. 그녀를 방안으로 밀어넣은 남자
간호원들은 돌아가지 않고 문 앞 복도에
그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반 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자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의사와 간호원이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수술실에 들어온 것처럼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손에는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그들은 차가운
가서 앉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여기가
어디예요? 제가 왜 이런데 와야 하나요?"
오미애가 겁에 질려 항의하자 의사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그는 안경 너머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여기에 왜 왔는지 몰라요?"하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강제로 끌려왔어요. 이유도
듣지 못하고 끌려왔어요. 민주국가에서
이러는 법이 어딨어요?"
"민주국가?"
의사와 간호원은 마주 쳐다보면서 다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묻는 말에 대답해요. 아가씨는 찰스
모겐도라는 미국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지요?"
이제 와서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리고
의사가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그녀가
당황해하고 있는데 의사가 다시 말했다.
"몰론 한두 번 관계를 맺은 건 아니겠지?
그렇죠? 그 미국인이 모두 털어놨어요. 그
사람 지금 이 병원에 수용되어 있어요.
에이즈 환자로 밝혀졌기 때문에 강제로
격리시켜 놨어요. 이제 이유를 알겠어요?"
오미애는 의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미국인과 접촉한 여자들은 모두
역학검사를 받아야해요. 에이즈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이건 법에 따라 강제
집행되는 거예요. 민주시민이라면 법에
따라야죠. 그렇지 않아요? 우선 웃옷을
브래지어까지 모두 벗어요!"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다가 그녀는 기계적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환각상태에 빠진
것처럼 움직였다.
이윽고 그녀가 진찰대 위에 가서 눕자
의사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입속까지 살펴보고 나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간호원을
돌아보았다. 간호원은 그녀의 팔뚝에
고무줄을 감고 나서 혈관을 찾아
주사바늘을 찔렀다. 검붉은 피가 주사기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오미애는 두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뒤에서 철문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닫혔을 때였다.
비로소 깨달았다.

형사들이 가고 나서 지쳐 잠들었던
박명희는 울부짖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것은 바로 옆방에서 나는 젊은 여자의
울부짖는 소리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이 문좀 열어줘요! 왜 생사람을
잡아가두는 거예요?! 난 아무 병도 없어요!
난 건강하다구요! 난 에이즈 같은 거 안
걸려요! 이 문 좀 열어줘요! 제발좀
열어줘요! 여보세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주위를 울리고
있었다. 박명희는 옆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익은 소리임을 알았다. 그녀는
"언니! 미애 언니! 미애 언니 아니에요?"
문을 두드리면서 큰 소리로 부르자
울부짖는 소리가 뚝 그쳤다. 그녀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오미애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모겐도의 말에 의하면 오미애는 그의
과거의 여인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가끔씩 모겐도의 집에 놀러오곤
했고, 밖에서 세 사람이 함께 만나는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들은 속으로는 적대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언니 동생하고
부르면서 지내고 있었다.
박명희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부르자
마침내 옆방에서 반응이 있었다.
"명희야!"
"언니!"
"어떻게 된 거야?!"
"강제로 끌려왔어요! 언니는 어떻게 된
거예요?!"
"나도 강제로 끌려왔어!"
"그럼 언니도 그것 때문에 끌려온
거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금 후
"그거라니, 그게 뭐야?!"하고 오미애가
물었다.
"에이즈 말이에요?"
박명희는 거침없이 말했다.
"너도 그것 때문에 끌려왔니?!"
"네, 그래요! 저보고 에이즈에 걸렸대요!
언니는 검사받았나요?"
그때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영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 모겐도 아니니?!"
때문이에요! 저 자식은 에이즈 환자예요!
저 자식이 우리한테 에이즈를 퍼뜨린
거예요! 그런줄도 모르고 우리는 저 자식이
좋다고 상대한 거예요! 저 자식 손에
놀아난 거예요! 저 자식은 그걸 숨기고
우리를 농락한 거예요! 저런 자식은 죽여야
해요! 언니, 어쩌면 좋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언니, 에이즈가 그렇게 무서운
병인가요?"
"치료가 불가능하다니까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다름없겠지."
"언니, 언니는 검사받았나요?"
"지금 받고 있는 중이야. 난 아닐 거야."
박명희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저는 양성반응이래요."
거지?!"
그때 작은 문이 열렸다. 밖에는 남자
간호원이 서 있었다.
"식사 시간이야. 떠들지 말고 얌전히들
있어요. 떠든다고 에이즈가 달아나는 건
아니니까."
남자 간호원은 우유봉지 한개와 카스텔라
하나를 창살 안으로 던져넣었다. 마치
개한테 먹이를 던지듯이.
이윽고 모겐도가 들어 있는 방의 작은
철문도 열리면서 모겐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모겐도를 보자 박명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이 더러운 새끼야! 날
살려내! 날 살려내란 말이야!"
초췌한 모습으로 울상을 지으면서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데리고 놀던
아가씨들을 보자 그는 감회가 새로워지는지
눈물을 글썽이다가 명희의 욕설이 갈수록
심해지자 이윽고 냉소적인 표정으로
변했다.
"난 너희들을 데리고 갈 거야.......
혼자 갈 수는 없어....... 혼자 가면 너무
외로워서 안 돼....... 이번 여행은 아주
기나긴 여행이 될거야....... 흐흐."
"저런 개자식......."
오미애의 입에서도 마침내 욕설이
튀어나왔다.
"닥쳐요! 뭐가 잘났다고들 큰
소리예요?!"
어느새 들어왔는지 의사가 그녀들을
"당신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당신들은 외국인이라면 간이라도 빼주는
아가씨들의 대표적인 전형이야! 결혼도
하지 않은 아가씨들이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몸을 함부로 주고......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당신들은
자진해서 에이즈를 산거야! 뭐가 잘났다고
큰 소리는 큰 소리야?! 우리 한국
아가씨들이 이렇게 타락한 걸 보고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난 아직
미혼이에요! 하지만 어떻게 믿고
아가씨하고 결혼할 수 있겠어요?! 당신들은
시침떼고 한국 총각들하고 결혼하겠지?
처녀라고 하면서 말이야?!"
젊은 의사는 격렬하게 그녀들을
나무랐다.

2. 迷路의 함정

실내는 무더웠다. 창문을 모두
열어두었지만 밖에서는 바람 한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한 대의 선풍기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더위만 더욱 부채질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더위에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나 더위 탓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수사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에이즈 검사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남형사의 느닷없는 말이 실내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안경 낀 염형사가 물었다.
에이즈에 감염됐거나 감염됐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거든요. 따라서 우리도
감염됐을지 모르니까 한번 검사를 받아보는
게 어떨까 싶군요."
마형사가 담배를 피워문 채 그를
흘겨보았다.
"검사받고 싶으면 혼자 가서 받아!"
다른 형사들이 킬킬거리고 웃었다.
남형사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에이즈에 감염돼서
갇혀 있는 사람들을 못 봐서 그러는데 한번
가서 구경좀 해보세요. 그게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 병인가를 알게 될 거예요.
우리는 살인사건을 수사하다 말고 갑자기
에이즈 바람에 휘말린 기분이에요.
에이즈에 걸린 게 확인되면 바로 그
울고불고 해봐야 소용없어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요. 하느님은 공평하게
벌을 내리시거든요."
"그 에이즈 소리좀 그만할 수 없어!"
마형사가 뭉툭한 코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남형사는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지껄여댔다.
"네, 그만하겠습니다. 그 미국인하고
재미봤다가 에이즈에 걸려 수용된
박명희라는 아가씨...... 정말 예쁘게
생겼다구요. 그애를 보면 모두 한번
안아주고 싶을 걸요. 하지만 이젠 다
소용없는 일이 돼버리고 말았죠. 그 아가씨
정신병동 중환자실에 갇혀서 내보내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은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울다가도 모겐도를 보면 욕을
퍼붓는 거예요. 모겐도가 이젠 원수나
다름없겠죠. 찢어죽이고 싶도록 미울
겁니다. 오미애는 어떻게 됐는지 한번
알아봐야겠는데요."
남형사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보고
나더니
"그렇다니까요."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떻게 됐어?"
유도선수 출신인 거한 조형사가 물었다.
"그 아가씨도 수용됐답니다. 에이즈
보균자로 확인됐답니다."
남형사는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그들의 얼굴에
경악하는 빛이 나타났다.
"그 미국인이 관계한 아가씨들은 거의가
에이즈에 걸린 모양이군."
관계한 한국 아가씨들은 일일이 셀 수 없이
많답니다. 아마 수백 명은 될 거라고
했습니다."
"맙소사."
형사들의 입에서 탄식조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수백 명이 모두 에이즈에 걸렸을 거
아냐?"
"그야 말할 필요 없겠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군. 그
자식 잡식성인 모양이지?"
"문제 한국 아가씨들한테 더 있어요.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함부로 몸을
주니까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거죠. 한국
아가씨들의 정조관념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정말 한심합니다."
남형사가 두눈을 굴리며 말했다.
"결혼 안하면 될 거 아냐!"
마형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렇다고 반장님은 결혼 안하실
겁니까?"
"난 안해."
마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수사기록을 들여다보았다.
"에이즈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지금까지의 결과를 검토해 보자구. 지금도
모겐도한테 미련이 있나?"
마형사는 남형사를 향해 물었다.
"글쎄요."
남형사는 단정을 못 내리고 머뭇거렸다.
"모겐도 수사에는 한계가 있어.
그를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유밀라가
피살되던 날 밤에 미국으로 떠났다는
점인데...... 그건 모겐도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옴으로써 문제가 안 된다고 봐. 그가
정말로 범인이라면 한국에 그렇게 빨리
돌아올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지 않나?"
"네, 그렇게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남형사는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유밀라와 황개의 죽음을 일단 별개의
것으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자구. 우선
유밀라의 경우를 보자구. 그 여자는 지난
7월 19일 오후 황개를 만나 S호텔
1924호실로 들어갔어. 당연히 두 사람은
정사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검사
결과 유밀라의 질 속에서는 남자의 정액이
안했을 수도 있고, 콘돔을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용된 콘돔은 그 방에서
발견되지 않았어. 그건 그렇고......
유밀라는 방에 들어간 후 세 시간쯤 지나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어. 살해 방법은 대충
청산염을 탄 맥주를 마시게 해서 죽인 것
같아. 살인을 보다 확실히 해두기 위해 그
여자를 물이 채워진 욕조속에다
집어넣기까지 했어. 범행에 성공한 범인은
밖으로 나와 유밀라의 차를 몰고 멀리
떨어진 잠실로 가서 어떤 여관의
주차장에다 갖다버렸어. 그 차 속에서
우리는 루주가 묻은 장미 담배꽁초를
발견했어. 거기에 묻어 있는 타액을 검사한
결과 AB형의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피운
것으로 밝혀졌어. 유밀라는 B형이고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 말해봐요."
마형사는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대강 들어맞을 것 같은데......."
염형사가 안경을 벗어 닦으며 말했다.
마형사는 담배연기를 허공에다 후하고
내뿜었다.
"황개가 유밀라를 죽였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 그러나 다른 누군가 그
여자를 살해했다고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돼.
범인이 두 사람이 있는 방안에 어떻게
침입해서 유밀라를 살해했는가 하는
점이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겨. 그
범인은 황개의 협조하에 유밀라를 죽였을까
들어가 유밀라를 살해했을까 하는 점이야.
이 의문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어떤
단정도 내릴 수가 없어. 분명한 것은 제3의
여인이 그 방에 있었다는 점이야. 보험회사
직원들의 증언과 피살자의 것이 아닌
음모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
"그런데 그 방안에는 그 음모 외에 제3의
여인이 남긴 증거물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하다못해 그 장미 꽁초라도
하나쯤 있다면 몰라도 말입니다."
조형사가 바위 같은 덩치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제3의 여인은 아주
치밀해서 지문 하나 남기지 않았어. 그
방안에는 던힐 꽁초와 말보로 꽁초가
있었는데 그건 황개와 유밀라가 피운
하나 남기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야.
제3자가 침입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유밀라를 살해한 범인이
황개라고 생각하게끔 만든 것 같아. 수사의
혼선을 노린 거지."
"그렇다면 유밀라의 차에 있는 장미
꽁초는 뭡니까?"
"그 점이 바로 범인의 영리함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나는 봐. 그것은 제2의
방어벽이라고 나는 생각해. 제1의 방어벽,
즉 유밀라를 죽인 범인이 황개가 아니고
다른 제3자라는 것이 밝혀질 경우에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함정이란 말이야.
제1의 방어벽이 무너질 경우에 대비해서
만들어놓은 두번째 벽이 바로 그
장미꽁초라고 나는 생각해. 사건 현장에
속에다 자기가 피운 담배꽁초를, 그것도
한개가 아닌 여러 개를 실수로
남겨두었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그것은
경찰의 수사 촉각을 유인하려고 만들어놓은
함정이 분명해. 그 꽁초에 루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그 담배를 피운 사람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단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AB형의 혈액형을 가진
여자를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건 함정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어."
"그 이발소 주인의 차에서 발견된 장미
꽁초도 같은 함정이란 말인가?"
가장 나이 많은 염형사가 물었다.
"그렇지. 유밀라의 차에서 발견된 것하고
같은 종류로 봐서 무리가 없을 거야. 같은
AB형이야.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
똑같단 말이야. 남형사가 황개에 대해서
설명해 보지 그래."
마형사는 남형사를 턱으로 가리켰다.
"네, 제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남형사는 잔기침을 하고 나서 형사수첩을
들여다보았다.
"12시경에 황개는 약혼녀인 배미화를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1시경에 M호텔
1510호에 투숙, 정사를 가진 다음
2시40분경에 그녀와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S호텔로 가서 유밀라를 만나
1924호실로 들어갔습니다. 피살된 유밀라의
질 속에서 비록 황개의 정액이 검출되지
않았다 해도 두 사람이 오래 전부터 불륜의
관계를 맺어왔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올케 사이의 여자들과 번갈아 가며 재미를
본 거죠. 놈은 여자를 유혹하는데 뛰어난
솜씨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누이와 올케를
번갈아가며 농락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방면에 아무리 탁월한 솜씨를 가졌다
해도 놈이 어떻게 유밀라에게 접근할 수
있었는지는 역시 미스터리로 남습니다."
"서론이 길군."하고 염형사가
빈정거렸다. 남형사는 그를 묵살한채
능청스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19일 밤 황개는 6시 반경에
S호텔 1924호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자기 차를 몰고 그곳을 떠나려다가 변을
당한 것입니다. 추정하건대 그가 그의 차
도난 차량인 베이지색의 소형 승용차를
황개의 차 곁에다 바싹 갖다댄 것
같습니다. 황개의 차는 벽과 다른 차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버린 셈이죠.
그래서 그는 문을 열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차를 앞으로 뺄 수도
없었습니다. 바퀴에 바람이 빠진데다 바퀴
밑에 대형 벽돌이 괴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았던
게 틀림없습니다. 도난 차량 속에서 망치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범인은 그것으로
황개의 차창을 부순 다음 휘발유 같은 것을
들어부은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황개는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을
겁니다. 문을 열수가 없으니 손을 쓸래야
쓸 수도 없었겠죠. 그래서 그는 그 안에서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소형차를 끌어낸
다음 물을 열어주긴 했습니다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 그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죽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게 복수극이라면 그야말로 통쾌한
복수극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철저한 복수는 아마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소형차
속에서 뛰어나와 사라진 사람은 여자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걸맞게 그 차 안에는
루주가 묻은 장미 꽁초가 몇개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혈액형 AB형인
사람이 피운 것이었습니다. 반장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범인은 거기에도 제2의
방어벽을 설치한 겁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 볼 때 범인은 AB형의 혈액형을
그것이 함정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시할 수밖에 없겠죠. 사실 제 생각에도
여자가 그런 범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대단한 담력과 힘이
있는 여자가 아니라면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나
죽인다는 것이 말입니다."
남형사는 자신의 설명에 스스로 만족한
듯이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목격자들이 말한 그 여자의 인상 착의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지."하고 염형사가
말했다. 남형사는 수첩을 들어다본 다음
입을 열었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청년들의 말은 서로
일치하지가 않았습니다. 한 친구는 그
한 친구는 40대 같았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옷차림도 한쪽은 파란 옷, 다른
쪽은 노란 옷이라고 증언했습니다. 한
여자를 놓고 서로 보는 눈이 이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경황중에 얼핏
봤다해도 증언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한
가지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형사가 기침을 했다.
"불빛이 침침한 지하 주차장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고 봐야해. 그
여자는 변장했을 가능성이 커. 여자로
말이야. 남자가 여자로 변장했기 때문에 그
어설픈 변장에 대해 목격자들의 증언이
그렇게 차이가 난다고 생각해."
"범인이 남자란 말입니까?"
모두가 마형사를 주시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거듭
생각해 보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생각이 들어."
"하긴 여자가 두 사람씩이나 그렇게
죽였다는 게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긴
했어."
염형사의 말이었다. 마형사는 튀어나온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아까도 말했지만 두 곳에다 같은
담배꽁초를 남겼다는 것이 첫번째로 내가
함정이라고 생각하는 점이야. 두번째로는
그 꽁초를 통해 범인은 자신이 여자임을
위해서 만든 담배야. 거기다 루주까지
묻혀놨고, 목격자들 역시 여자라고
증언했어. 유난히 여자라고 강조한 바로 그
점이 어쩌면 여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낳게 한 거야. 자연스럽지가 못하고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든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지 않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조형사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범인은 수사의 초점을 여자쪽으로
유도한 거야. 자기가 여자라면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럴 리가 없죠."
"이제부터 여자는 젖혀두고 남자쪽을
더듬어야겠군."하고 염형사가 중얼거렸다.
읽을 수가 없었다.
"마음에 짚이는 사람이라도 있어?"
마형사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마형사가 두 살 더 아래였지만
서열상으로는 염형사보다 위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고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염형사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짚이는 사람은 없지만...... 범인이
남자라면 유밀라와 깊은 관계에 있었던
자가 분명해. 유밀라는 남자 관계가
복잡했으니까 그 관계를 캐보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남자들이 또 있을 거야.
그중의 누군가가 유밀라를 살해했을 거야.
그러고나서 황개까지 살해했겠지. 그
여자의 복잡했던 남자 관계로 비추어볼 때
모두가 의외로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자기말이 별로 공감을 못 얻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머쓱해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민완 수사관과는 좀 거리가 먼
형사였다. 그에게는 문제를 너무 쉽게
해석해 버리려고 드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강아지처럼 선배 형사들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햇병아리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스물일곱 살 먹은
강인재(姜仁在)라는 형사였다. 일체 말이
없는 그가 입을 열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주시했다.
누명을 쓸 뻔했습니다. 우현히 재수가
없어서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습니다만
김영대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를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흔적이
뚜렷합니다. 그를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자가 바로 범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를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흔적이란
뭐지?"
염형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유춘지라는 있지도 않은 여인 이름으로
김영대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 말입니다.
편지 내용도 그에게 불리한 묘한 것이었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그는 범인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건 맞아."
남형사가 맞장구쳤다.
조형사가 말했다. 마형사가 몸을
움직였다.
그의 뭉툭코가 씰룩거렸다.
"범인은 유춘지라는 이름으로 김영대한테
그런 편지들을 보냄으로써 두 가지를
노렸던 것 같아. 첫째는 피살자를
유춘지라는 가공인물로 만듬으로써 그
신원을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뜨리려고
했고, 둘째는 강형사가 말한 것처럼
김영대를 자기대신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점이야. 그러나 결국 모두 실패하고
말았지. 강형사, 계속 말해봐."
"제 생각에는 범인은 김영대를 알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여러 통
보낸 것으로 봐서 상당기간 동안 그를
제물로 삼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온 건 맞아."하고
염형사가 말했다.
강형사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김영대를 만나서 그의 협조를 얻어
추적해 보면 그를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형사가 김영대를 만나서 그 관계를
한번 알아봐."
강형사의 눈이 빛났다. 선배 형사들의
뒤만 말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그가
처음으로 독자적인 수사를 맡게된 것이다.
"마음에 맞는 사람 한 명 데리고가도
좋아."
선배들로 그에게는 하나같이 어려운
상대들이었다.
"우선 저 혼자 가보겠습니다. 인원이
필요하면 그때 가서 요청 하겠습니다."
"알아서 해."
마형사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강형사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더욱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밀라가 시체로 발견된 S호텔
1924호실을 예약했던 사람 말입니다. 이미
2년 전에 사망한 서창배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을 도용한 사람은 황개로 추정됩니다.
어떻게 해서 황개가 그 이름을 도용하게
생각합니다. 황개는 서씨의 주민등록증까지
가지고 있었다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서씨는 2년 전에 뺑소니차에 치여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아직도 그 뺑소니차
운전사를 붙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저런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
실타래 풀리듯 풀려야만......."
그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 문제도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겠지."
마인은 조형사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관계는 조형사가 끝을 내지. 다시
한번 부산에 내려가서라도 말이야."
거한은 가슴을 쭉 펴보였다.
"알겠습니다. 끝을 내겠습니다."
"한 사람 데려가라구."
"밤차로 내려가겠습니다."
있었지만 그 대신 모든 일에 아주
열성적이었다.
마형사는 둘러앉아 있는 형사들을 한
사람씩 눈여겨보았다. 그의 표정이
심각했기 때문에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저돌적으로 생긴 그의
앞이마가 더욱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정리해보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황개가 유밀라를 살해한 다음 조금
후에 그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볼 수는
없어. 범인이 연달아 유밀라와 황개를
살해했다고 보는 게 옳을 거야. 그런데 그
범인이 혼자인가 아니면 두 명 이상인가
그것이 분명치가 않아.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분명히 황개가 범인이
제3의 여인이 범인일 가능성이 큰데 그
여자가 유밀라를 살해한 후 곧바로 아래로
내려와 황개를 살해했겠느냐 이거야. 다시
말해 1924호실에 있었던 제3의 여인이
증권회사 직원들이 지하 주차장에서
목격했던 그 여인과 동일인물이냐 이거야.
1924호실에서 제3의 여인을 목격했던
보험회사 직원들은 그 여인이 검정 옷 또는
빨간 옷을 입고 있었다고 증언했어.
증권회사 직원들은 지하 주차장에서 봤던
여인이 파란 옷 또는 노란 옷을 입고
있었다고 증언했어. 옷 색깔이 일정하지가
않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양쪽에서 말하는 옷 색깔이라는
것이 아주 다른 것으로 봐서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봐."
말을 이었다.
"또 하나는 시간상의 문제인데......
유밀라와 황개는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살해되었어. 황개는 목격자가 있으니까
6시30분경에 불에 타죽은 게 틀림없는데
유밀라는 6시30분 전후이기 때문에 그전에
죽었는지 그후에 죽었는지 정확하지가
않아. 아무튼 두 사람이 비슷한 시간대에
살해된 것만은 분명한데 과연 한 사람이
그들을 연달아 죽일 수 있었을까 하는 데
대해서는 나는 선뜻 수긍할 수가 없어.
같은 장소도 아니고 한곳은 19층에 있는
방이고 다른 한 곳은 지하에 있는
주차장이야.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정확한 시간대에 맞춰
실행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다 알고
오르내리면서 같은 시간대에 두 사람을
연달아 죽일 수가 있겠어?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어렵다고 봐. 혼자서 두
사람을 죽이려면 먼저 한 명을 죽이고 나서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은
당연하단 말이야. 황개가 6시30분경에 지하
주차장에 내려 올 것이라고 어떻게 범인이
단정할 수 있었겠어? 그보다 30분전에
내려올 수도 있고 30분 늦게 내려올 수도
있단 말이야. 따라서 내가 보기에는 범인은
6시30분 훨씬 이전부터, 적어도 두어 시간
전부터 지하 주차장에서 황개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생각돼. 그래야만
살인이 가능하단 말이야. 이렇게 볼때
범인은 한 명이 아닌 두 명 이상이라고
보는 게 온당할 것 같아. 목격자의
가능성이 많아. 두 명이 공모해서 두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한 명은 유밀라를 맡고 다른 한 명은
황개를 맡는다는 식으로 말이야. 하지만
이건 가능성일 뿐이야. 가장 큰
가능성이지만...... 얼마든지 뒤집힐
가능성도 있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란 항상 빈약하기 이를데 없으니까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그는 점 같은 눈을 더욱 작게 뜨고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범인이 두 명이라면 한 명은 여자이고
다른 한 명은 남자가 아닐까요?"
남형사가 조심스럽게 마형사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보험회사 직원들이 목격한 제3의 여인은
여자로 위장한 게 아닌 진짜 여자가
틀림없다고 봅니다. 침대에서 채취한 여자
음모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제1의 범인입니다. 그리고 지하
주차장에서 황개를 살해한 범인은 반장님의
말마따나 여자로 위장한 남자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볼 때 범인은 남녀 두
명인 셈입니다. 남녀 한쌍이 공모해서
그들을 해치운 겁니다."
"그럴 듯하군."
염형사가 중얼거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아직까지는 거기에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 후
침묵을 깨고 마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드러날 사람들은 모두 드러났고
지금쯤은 사건을 정리할 단계라고 나는
생각해. 하지만 우리 사정은 그렇지가
못하다는 걸 잘 알거야. 범인은 우리의
움직임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범인에
대해서 아직 윤곽조차 파악치 못하고 있어.
지금 범인은 우리들의 어리석은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
몰라.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그 범인한테
반격을 개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 범인은
가까운 데 있을 수도 있고 우리가 생각도
못했던 의외의 인물일 수도 있어. 드러난
모든 인물들을 새로 점검하고 그들을
범인이라 생각하고 샅샅이 조사해 봐요.
지금까지의 수확이라면 수사망에 걸린
인물들 거의 모두가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었다는 것, 두 건의 살인사건은 공범의
많다는 것 정도였어. 이 정도의 수확이라면
나는 범인을 체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은
굉장한 수확일 수도 있어. 지금부터 일대
반격을 개시하면 범인은 의의로 쉽게
밝혀질지도 몰라. 자, 모두들 밖으로
나가요. 여기에 죽치고 앉아 있다고 해서
범인이 제 발로 걸어들어오지는 않으니까.
가서 그자의 멱살을 잡아끌고 오라구."
"밖에 비가 오는데......."
염형사가 중얼거리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고 비가
퍼붓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형사들은 어둠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마형사는 맨 마지막으로

유춘지는 누구일까? 왜 그 여자는 나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 나를 곤경에 빠뜨렸을까?
왜 나는 지난 7월19일 오후의 알리바이가
없을까?
김영대는 거나하게 취했으면서도 머리
속은 더욱 맑아지기만 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의문은 경찰로부터
풀려났을때부터 줄곧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부산집에도 내려가지 않은 채 서울에서
어정쩡하게 머물고 있었다. 그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 한 부산에는 당분간 못 내려갈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전기 스탠드의 스위치를
올렸다. 사이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더운
밤이었기 때문에 시트 같은 것은 아예
덮지도 않고 알몸인 채로 잠들어 있었다.
어제 저녁 술집에서 데리고온 아가씨였는데
접촉감이 좋아 정말 오랜만에 몸에 쌓인
찌꺼기를 남김없이 쏟아버릴 수가 있었다.
지칠대로 지친 그녀가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물러났는데 그
즉시 그녀는 땀에 젖은 몸을 씻지도 않은
채 잠에 떨어졌다. 그녀는 벽쪽으로
돌아누워 자고 있었다. 허리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선이 새로운 욕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창가에 놓여 있는 테이블 위에는 빈
양주병과 빈 잔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다가갔다. 그 역시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육체는 여자들이 좋아
할 만큼 허우대가 크고 든든해 보였다.
호텔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밤거리는 텅
빈 도시처럼 적막해 보이기만 했다. 비가
내리는 거리에는 행인도, 굴러가는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지난 7월18일
아침이었다. 비행기편으로 상경했었다.
그리고 20일 저녁 부산집에 내려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것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석달 전에 사귄 그 여자는
양방희라고 했다. 농익을대로 익은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나이는
서른 안팎이었고 물 쓰듯이 돈을 쓰는 것을
그동안 서너 번 관계를 맺었었다.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눈이 맞아 함께 춤
한번 춘 것이 계기가 되어 깊은 관계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떤 돈많은
남자의 후처쯤 되는 것 같았지만 정확한
것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가 7월18일에 양방희를 만난 것은 그날
아침 그녀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그녀가
직접 집으로 전화를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남자가 양의 부탁을 받고 대신 전화를
거는 것이라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을까봐 대신 남자를 시켜
전화를 건 것임이 분명했다. 그는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로 즉시 그녀한테 전화를
걸어보았다. 늙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는데
전에도 그는 방희의 연락처에 몇번 전화를
걸어보았었는데 그때마다 전화를 받지
않던가 그 늙은 목소리의 여인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없어요"또는"몰라요"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방희는 거의 집에 있지 않았다. 밤늦게
전화를 걸어보면 지금 자고 있기 때문에
바꿔줄 수 없다고 하면서 또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몇번
그렇게 당한 그는 기분이 잡쳐 더 이상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방희한테 도대체 그 늙은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 어머니라고 하면서
남자한테서 전화가 걸려오면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한다고 하면서 생글생글
7월18일 아침 비행기로 상경한 그는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나가보았다.
그곳은 어느 호텔 커피숍이었는데 약속
시간이 10분쯤 지났을 때 그를 찾는 전화가
있었다. 방희의 전화였다. 그녀는 아주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니 미안하지만 내일
만나자고 했다. 화가 치민 그가 누굴
놀리는 거냐고 하면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그녀는 오빠가 지금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와 있는데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면서 제발좀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애걸하듯 말했다. 그 말을 듣고보니 영대는
치민 화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걱정하지 말고 오빠 간호나 잘하라고 말한
뒤 내일 만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그러니까 7월19일 오후
커피숍으로 나갔다.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15분 늦게 나갔는데 그녀는 나와 있지
않았다. 1시20분쯤 되었을 때 그를 찾는
전화가 있었다. 방희가 걸어온 전화였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호텔 방에 있으니
올라오라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그녀가 알려준 방으로 올라가보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고,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침대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달려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오빠는 어떻게 됐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다행히 위기는 넘겼다고 말하면서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날 그녀는 유난히도 열정적으로 굴었고
다른 때보다도 훨씬 상냥한 태도를 보였다.
헤어지기 마련이었는데 그날만은 웬지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영화보러 가자고 그를 졸랐다.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꿍꿍이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하자는
대로 따라나섰다.
꿍꿍이속이란 적당히 기회를 봐서 돈을
울궈내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점잖게
언질을 준 다음 반응을 기다려보는 것이다.
상대가 알아서 자진해서 돈을 내놓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태도를
고쳐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에는 주먹을 쓰는
수밖에 없다. 잘만 구슬리면 몇 천은 울궈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호텔을 나선 것이 3시30분경. 그리고
음악을 주제로 한 외국영화였는데 그는
그것이 끝날 때까지 내내 졸기만 했다.
그가 고개를 떨어뜨릴 때마다 그녀는 그의
허벅지를 꼬집곤 했기 때문에 그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영화관을 나선 것이 6시경. 그녀는
느닷없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지만 그는 별도 반대하지 않고
그녀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그녀는 운전을 아주 잘하는 편이었다.
차도 고급 신형이었다. 그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때까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신상에
대해서 물으면 그녀는 웃기만 할뿐 "그런
건 알아서 뭘 하느냐. 차차 알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녀
"육체만이 순수한 거예요. 남녀 사이에
중요한 건 그것밖에 없어요. 다른 건 아무
필요도 없어요. 제 육체를 남김없이
봤잖아요. 그럼 됐지 뭘 또 알려고 하는
거예요. 시시하게."
그녀가 깊이 잠들었을 때 백을
뒤져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는
주민등록증도 자동차운전면허증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가용을 몰고
다녔다. 그렇다고 면허증도 없이 어떻게
차를 운전하고 다니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차는 계속 북쪽으로 달렸다. 그들이 탄
차는 다른 차들을 제치고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영대는 은근히 겁이 났다.
운전대를 잡은 지 얼마나 됐기에 그렇게
빨리 달리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10년
가까이 된다고 대답했다. 영대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면허증을 좀 보자고
요구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런
거 없어요."하고 말했다. 아니, 면허증도
없이 운전하고 다니나? 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거기에 대해
그녀는 면허증이 있기는 있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능청스럽게
얼버무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그들은 차도를
벗어나 숲속의 오솔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의 지리에 익숙한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면서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는 석양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호숫가로 뛰어가 수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이 아름답고 선정적으로
보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블라우스
앞은 모두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흰
젖가슴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그는 그녀가 왜 이곳으로 차를 몰고 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욕구에 기가 질렸다. 그는 아까
호텔에서 너무 힘을 쏟았기 때문에 조금도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골적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녀를 실망시킬 수는 없다고
그녀의 블라우스 자락이 날리면서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것을
보자 그는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역시 유혹에는 약하다고
생각하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없이 그를 따라왔다.
그가 그녀를 안았을때 그녀는 자기는
원시적인 인간이 좋다고 말했다.
V자형의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녀는 그 사이로 목을 디밀면서 하는 말이
마치 기요틴 같다고 했다. 그녀가
킬킬거리고 웃는 바람에 온몸이 흔들렸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행위 때와는 전혀
다른 쾌감이 곧 그들을 침묵시켰다. 그
침묵을 깨고 그녀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는 둥지를 찾아온
그들이 일을 치르고 난 뒤에도 그녀는
얼른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팔에 매달려 숲속을 거닐면서 그녀는
감상에 젖어 시를 읊기도 하고 여고시절에
겪었던 첫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도
했다. 그녀의 첫 남자관계는 여고 2학년
때에 있었다고 했다. 그것도 유부남과의
관계였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은 헤어 질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부터는 닥치는 대로
남자들을 사귀었다고 말했다. 모두가 그럴
듯한 이야기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구름잡는 이야기들 같았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쯤에야 그들은
숲속을 벗어나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했을 때에는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그녀는 특급호텔로 가서
그들은 나이트클럽으로 갔다.
그녀가 그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자신에게 빠졌다고 생각했다. 함께
블루스를 출때 그는 그녀에게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거침없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의 입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가 흠뻑 취해서 그에게 깊이
빠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는 마침내
그때까지 벼르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헤어지면 방희를 당분간 만나지
휘둥그래졌다. 기대했던 대로 그녀의
반응은 심각했다. 그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사업 때문에 당좌수표를
발행했는데 그것을 이삼일 내에 메우지
못하면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고.
형사처벌을 받게되면 적어도 6개월 이상은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능청스럽게 그렇다고 법망을 피해
언제까지고 도망다닐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그녀가 도대체 무슨 사업
때문에 그렇게 됐느냐고 물을 줄 알고
거기에 대한 답변도 준비해 놓았는데
그녀는 그런 것은 묻지도 않았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물어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를테면 몇
무엇이냐 하는 것 등 알고 싶은 것들이
많을 텐데 이상하게도 어느 것 하나
물어보지를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얼마면 급한 것을 메울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는 급한 대로 5백만
원 정도만 있으면 급한 불은 끌 수 있다고
대답했다.
돈 5백만 원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해서
되겠느냐고 그녀가 측은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을 때, 그는 하는 수 없지
않느냐, 법치국가에서는 법을 당연히
준수해야 하지 않느냐, 모든 게 내
잘못이니까 형사처벌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처벌받는 건 문제가 아니고
그것 때문에 방희와 한동안 만날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프다, 우리는 어쩌면 영영 만날
표정까지 지어가며 이야기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어쩌면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펄쩍
뛰었다. 그런 말이 어딨어요. 돈 몇푼
때문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저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미워요. 그는 당황하는 척하면서 아무리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발끈해서 자기가 그 돈을 마련해볼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말 한 마디로 돈을 버는구나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그는 그녀를
따라 나이트클럽을 나왔다. 그때가 자정도
지난 7월20일 1시경이었다. 여자란 섹스만
충족시켜주면 간이라도 빼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간을 빼주기 위해
나서고 있었다.
밖에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많이 취한 것을 보고 그가 대신해서
운전대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하면서 그를 옆자리로
밀어붙였다.
차가 출발했을 때 그는 "여자한테 신세를
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사내로서 좀
부끄럽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빌리는
것이니까 조만간 곧 갚도록 하겠다. 아무튼
고맙다"라고 능청을 떨었다. 거기에 대해
그녀는 돈이란 서로 나눠가져야 그 진정한
가치가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차가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가
대구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 대구까지 간다는 거야? 네,
거기 가야 돈이 생기거든요. 아빠가 거기
계셔요. 부친이 거기서 뭘 하시는데?
섬유회사를 경영하고 계셔요. 우리 아빠는
늙으셨어요. 평생 섬유회사에서만
일하셨어요.
대구쪽에는 큼직한 섬유회사들이 있다는
것을 그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하,
그러고보니까 이 아가씨 섬유회사 사장
딸이구나. 글쎄, 부잣집 딸 같더라니까.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년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운전했다.
취해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혀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어 주었다. 때때로 그들은 고속도로
나누곤 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안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전 같으면 미소로서 대답을 회피했던
그녀가 그때만은 묻는 대로 술술
털어놓았다. 아리송하던 그녀의 정체가
비로서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섬유회사의 이름은
한우섬유주식회사였고, 그녀는 5남매의
막내딸이었다. 그녀가 돈많은 늙은이의
정부쯤 될 것이라고 여겼던 그의 생각은
빗나갔다. 그녀는 현재 스물 아홉이었는데
6개월 전에 결혼한 남편과 별거중이라고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미국에 살고 있는
오빠네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그녀의 전공분야는 장식미술이었고 국내
학기부터 맡게될 것 같다고 말했다. 신혼의
남편과 별거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그녀는
잘 말하려들지 않았다. 그가 거듭해서
캐묻자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
남자는 도대체 사랑할 줄을 모른다고
말했다. 현재 모대학의 이공계 교수인 그
젊은 박사는 사랑을 추한 행위로 여기는 것
같았고 그녀가 그것을 요구하면 그저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응하다가
물러나버리곤 한다는 것이었다. 제가
요구하지 않으면 언제까지 안하는 거예요.
남자가 먼저 손을 뻗어와야지 여자가
언제나 먼저 요구하는 법이 어딨어요.
거기에 대해 그녀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수재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멋대가리 없는 남자예요. 난 그런
좋아요. 남자는 역시 남자다워야 하지
않아요? 그녀의 손이 그의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이혼해야겠군. 그의 말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남자쪽에서 들어주지를 않아요. 전 솔직히
말해 줬어요. 당신 같은 남자는 혼자 사는
게 나을 거라고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난 영대는 그녀에게 자신의
남자다움을 다시 한번 과시하고 싶었다.
보다 자극적이고 스릴 넘치는 섹스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 역시 정상적인
것보다는 그런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추풍령 조금 지나 내리막길에서 그는
마침내 고속도로 한켠에 차를 세우게 한
다음 그녀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퍼붓고 있는데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깊은
밤의 고속도로 위였지만 그런 곳에 차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카섹스를 벌인다는
것은 강심장이거나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가끔씩 지나치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순간적으로 차 안을 비치긴 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뜨겁게 엉겨붙어 서로
떨어질줄을 몰랐다. 의자를 뒤로 젖혀
침대처럼 만들어놓고 그 위에서 일을
벌이고 있었지만 자리가 워낙 비좁았기
때문에 때때로 머리와 다리 또는 팔꿈치
같은 것이 실내 여기저기에 부딪쳐 쿵쿵
소리를 내곤했다. 의자는 계속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실내에는 "슬픈 로라"
"안개낀 밤의 데이트"에 이어 애절한
열기 때문에 차창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고속도로 위에 세워둔 차 속에서 자신의
남자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난 영대는
자리에 퍼져 있는 여자를 대신해서
운전대를 잡았다. 그때만은 그녀도 자기가
운전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그들은 여행을 좀더 즐겁게 하기 위해 날이
샐 때까지는 아랫도리를 입지 않기로 했다.
아랫도리를 벌거벗은 채 고속도로 위를
달려가는 짓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묘하고 신선한 자극을 그들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여자는 윗도리까지 아예
벗어버리고 싶어했지만 그가 순찰차에
걸리면 곤란하다고 말하는 바람에 그것만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들은 계속 킬킬거렸다.
나체란 역시 기막히게 편안하고 좋은
것 같아요. 옷으로 겹겹이 에워싼 인간들의
위선이 역겨워요. 패션이다 뭐다해서 비싼
돈 들여가면서 몸에 휘감고 다니는 옷,
얼마나 웃겨요. 그건 사기예요!
그녀는 쉴새없이 계속 지껄여댔다. 날이
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들은
그 자극적인 아슬아슬한 기분을 버리고
싶지 않아 옷을 입지 않고 그대로
달려갔다. 그러다가 날이 완전히 밝아온
다음에야 차를 세우고 옷을 입었다. 아이,
답답해 미치겠어! 옷을 입고 난 그녀는
투덜거렸다.
별짓을 다하며 굼벵이처럼 갔기 때문에
대구 시내에 도착한 것은 아침 8시가
가까워서였다. 그들은 해장국집에 가서
선짓국밥으로 아침을 때웠다. 그리고 나서
러시아워의 혼잡으로 부산스러워 보였지만
그들은 더없이 한가로워 보이는 한쌍으로서
나른한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양방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선 것은
9시가 좀 지나서였다. 아빠한테 가서 돈을
가져올 테니까 이따가 만나요. 푼돈이라면
금방 얻어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늦어도 11시까지는
돌아올 테니까 11시에 여기서 다시 만나요.
알겠죠? 그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고 나자 그는 비로소 극심한
피로감을 느꼇다. 눈꺼풀이 자꾸만
밀려내려와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11시까지는 아직 세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이럴 때 시간을 보내기는
사우나탕이 제일 좋다. 그는 그 호텔 내에
사이를 두어 번 왔다갔다한 다음 대충 몸을
씻고 나자 피로가 좀 풀리는 것 같았다.
휴게실로 가서 의자를 뒤로 젖히고 몸을
눕힌 그는 금방 잠이 들었다. 11시에는
커피솝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는 도중에 한번 깨어났다.
시간을 확인한 다음 그는 다시 눈을
붙였다. 한 시간 후면 5백만 원이 굴러
들어온다. 돈벌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그건
바보같이 우직한 놈들이나 하는 소리이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가늘게 코를 골았다.
그가 눈을 뜬 것은 11시가 막
지나서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급히 옷을
입고 아래층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시계를
보니 11시5분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늦겠지. 그는 당연하게
자리에서는 길가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였다. 그는 여자들의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방희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자 그는 혼자서
커피를 시켜 마셨다. 그는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5백이 굴러들어오면 뭘
할까? 우선 옷이나 두어 벌 맞춰입고 나서
차를 바꿔야지. 여편네한테는 30이나 40만
원 정도 떼어줘야지.
12시가 지나자 그는 마침내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전화라도 걸어줄
것이지. 1시가 가까워졌을 때 그는 비로소
공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는 그녀가
틀림없이 나타날 것이라고 철석같이
오후 2시가 되었을 대 그의 표정은
똥물을 뒤집어쓰기나 한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커피숍 밖으로 나왔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그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며 커피숍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서성거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망할년 같으니!
만나기만 해봐라. 오다가 자동차 사고가 난
게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그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하기만 했다.
마침내 그가 그곳으로부터 발길을 돌린
것은 3시가 지나서였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무려 4시간이나 지나서였다. 호텔 문을
전화번호부를 뒤적여보았다. 방희는 그녀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의 이름이
한우섬유주식회사라고 말했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녀 아버지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낸 다음 다시 그곳으로 전화를 걸어
양방희를 찾을 생각이었다. 분통이 터져
그대로 돌아갈 수는 도저히 없었다.
전화번호부에는 한우섬유주식회사의
이름이 분명히 나와 있었다. 그는 동전을
집어넣고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한우섬유입니다."
교환아가씨로 생각되는 여자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굵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성함하고 댁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럴 줄 알고 그는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다.
"경찰입니다. 특별수사부인데 사장님
사모님한테 뭐좀 확인할게 있어서 그래요.
사장님 이름이 두개이죠? 공식적으로 쓰는
이름 외에 또 뭐가 있어요?"
"전 잘 모르겠는데요. 잠깐 기다리세요.
비서실로 돌려......."
"아아, 그럴 필요 없어. 이건 은밀히
조사해야 하니까 소문나면 좋지 않아요.
아는 대로 말해 봐요. 빨리!"
"저기...... 제가 알고 있는 사장님
성함은...... 양갑식이고...... 집
전화번호는......."
정신을 못 차리게 윽박지르는 바람에
교환아가씨는 엉겹결에 묻는 대로
대답했다.
"더듬거리기는 왜 더듬거려!"
영대는 한 마디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다시 동전을 집어넣고 나서
이번에는 양갑식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 신호가 떨어지더니 쌀쌀맞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방희 씨 계십니까?"
"누구요?"
"양방희 씨 말입니다."
"그런 사람 없어요."
퉁명스럽게 말하고 나서 이쪽에서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영대는 화가 나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조금 전의 그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지만 거기 양갑식 사장님
댁인가요?"
"양방희 씨 계십니까?"
"그런 사람 없다니까요! 전화 똑똑히
거세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영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다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조금 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합니까?"하고
거칠게 쏘아붙였다.
"아니, 뭐라구요? 그런 사람 없다고
하잖았어요. 그럼 됐지 또 뭐예요?"
"있는데 왜 없다고 거짓말하는 겁니까?"
"참, 기가 막혀서...... 여보세요,
사람을 찾을려거든 똑똑히 알고
"양사장님 따님 가운데 양방희라는
여자가 있는 걸로 아는데 왜 거짓말하는
겁니까? 여긴 경찰이니까 사실대로
이야기해요. 오늘 서울서 내려왔지요?"
"사장님한테는 딸이 없어요. 아들만
셋이에요. 아시겠어요?"
"전화받는 당신은 누구죠?"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가정부예요?"
"네, 그래요."
"가정부 주제에 건방지게! 전화좀 친절히
받아. 알았어?"
영대는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고 다시
커피숍으로 가보았다. 커피숍을 한번
둘러본 다음 호텔 밖으로 나왔다. 개 같은
년! 만나기만 해봐라. 이게 나한테
거짓말이라면 그도 사기 전과가 있을
정도로 그 방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여자한테 멋지게 당한
것이다. 그는 참담한 패배감을 맛보면서
호텔 앞에 한동안 멍하니 서서 비오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여자일까? 그동안 그
계집에 대해서 알아보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것이 영 후회가 되었다.
돈을 주겠다고 대구까지 끌고와서는
사람을 기다리게 해놓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생각할수록 그는 울화통이
터지고 어이가 없었다. 양사장의 딸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양방희라는 이름
자체도 거짓말일지 모른다.

때문에 알리바이를 댈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러나
그녀한테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경찰에
연행된 후 증인으로 그녀를 내세웠지만
그녀라는 존재는 이미 증발되고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경찰은 있지도
않은 사람을 증인이라고 내세웠다고 오히려
더 그를 의심했고, 그래서 그는 더욱 심한
곤욕을 당해야 했었다.
경찰에 구속된 상태에서 수사관 입회
하에 그는 몇 번이나 양방희한테 전화를
걸어보았었다. 그러나 전화를 걸 때마다
통화중임을 알리는 신호음만 들릴
뿐이었다. 수사관들은 그것을 보고 있지도
않은 전화번호에다 전화를 건다고 그의
결국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는
양방희라는 여인한테 끌려다니는 바람에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대구까지
끌고내려가 골탕을 먹인 다음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것이다. 왜 나를 골탕먹이고
사라져 버렸을까? 처음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한테 접근했던 게 아닐까? 그
어떤 목적이란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게
아니었을까? 그녀는 내가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나를 끌고
다녔고 그런 다음 증발해 버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왜 하필 나를 그 살인사건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을까? 왜 내가 그
판에 선정되었을까? 그러고 보니 유춘지의
편지라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것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리게 한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하마터면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던가 아니면 감옥에서 평생
썩을 뻔했다고 생각하자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양방희에 대해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대로 덮어둘 수는 없다.
기어코 찾아내서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
여자야말로 어쩌면 그 살인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는
스릴까지 느꼈다. 자신이 어쩌면 살인범을
체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몸이
근질거렸다.
침대 위의 아가씨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침대로 다가간 그는 잠들어
다리를 벌렸다. 그녀가 음음하면서 몸을
뒤틀었다.
"이봐 무슨 잠을 그렇게 자는 거야?"
그가 그녀의 빰을 찰싹찰싹 때리자
그녀가 가늘게 눈을 떴다.
"아이, 왜 그래요? 졸려서 죽겠어요."
술집 아가씨는 피곤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아직도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가 다리를 더욱
벌리자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아파요. 그만하면 됐잖아요. 또
하려구요?"
"그래."
그는 그녀에게 팁을 많이 줬기 때문에
본전을 뽑을 생각이었다. 이미 본전은
뽑고도 남았지만.
그녀가 눈을 흘기면서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를 받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나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려."
"정말 그러겠어요. 아저씨 같은 남자는
처음이에요."
그는 그 술집 아가씨를 양방희로
생각하고 격렬하게 밀어붙였다. 어떻게
하면 그 계집년을 찾을 수가 있을까.
어디로 가면 만날 수가 있을까. 그는
행위를 하면서도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술집 아가씨는 눈을 감은 채 하품만 해대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적극성을 보이지 않은
바람에 마지막 게임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그는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없애버린 것 같았다. 교활한 년이다. 어디
두고 보자. 제깐년이 도망치면 어디까지
가겠는가. 좁게는 서울바닥, 넓게는 한국
내에 있겠지. 나를 함정에 빠뜨렸지만 나는
곧 그 함정에서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네
년이 함정에 빠질 차례다.
영대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수화기를 집어들고 양방희의
전화번호에다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보았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신호가
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한참 후에
신호가 떨어지면서 잠에 취한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밤 늦게 미안합니다. 거기...... 양방희
씨 댁입니까?"
"그런 사람 없어요."
영대는 전화번호를 말해 보았다.
"네, 번호는 맞는데 그런 사람 없어요.
전화가 바뀌었어요."
"언제 바뀌었습니까?"
상대방은 귀찮다는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3. 生命

"큰일났어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창기는 신경이 곤두섰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동재가 많이 아파요. 열이 펄펄 끓어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요!"
미화의 목소리는 송곳처럼 그의 귓속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금 가까운 소아과병원으로
데려가보려고 해요."
"그러지 말고 K병원으로 가! 나도
그쪽으로 갈 테니까."
"거긴 너무 멀잖아요."
그는 소리치고 전화를 끊었다. 잠시 그는
기침을 했다.
"차를 대기시켜요."
그는 인터폰으로 비서에게 지시했다.
"네, 알겠습니다."
여비서가 재빨리 대답했다.
한여름인데도 그는 소매가 긴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고 검정색 넥타이로 목을
조여놓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핏기 하나
없는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는 감색
저고리를 입었다.
호텔 로미오와 쥴리엣 정문 앞에는
코발트색의 볼보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운전사가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는 볼보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배미화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동재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아기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아기는 감고 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기의 입에서는 아주 가느다랗게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불쌍한 애기"하고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전보다 더 아기에게 애정을 쏟고
있었다. 충격적인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
탓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외출도 삼간
채 아기한테만 매달려 있었다. 아기는
아빠를 닮아 너무 작고 연약했다. 그
모습이 측은해서 그녀는 아기 곁을 잠시도
떠날 수가 없었다.
"자, 아가야, 병원에 가야지. 옷
그녀는 땀에 젖은 아기의 옷을 벗겼다.
"어머나, 이게 뭐지?"
그녀는 아기의 몸에 솟아난 자줏빛
반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열꽃이에요. 열이 많이 나면 아이들은
흔히 이래요."
가정부가 곁에서 거들면서 아는 체를
했다.
"누가 열꽃을 모를까 봐서 그래. 이건
열꽃 같지가 않아."
옷을 갈아입히고 난 그녀는 아기를
안아올려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
주차장에는 세 대의 승용차가 세워져
있었다. 한 대는 빨간 차였고 또 한 대는
벤츠, 그리고 나머지 한 대는 녹색차였다.
창기는 두 대의 외제 차를 가지고 있는데
이용하고 있었다. 녹색차는 경찰이
발견해서 연락을 취해 주었기 때문에
끌어다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저주받은
물건처럼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려져
있었다.
주인을 잃은 그것은 갖다버려지거나
중고차 시장에 내다팔지도 않은 채 여전히
주차장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미화가
한번 창기한테 그 차의 처분에 대해서
물어보았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은 거기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대로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기를 자기 차의 뒷좌석에 눕힌
다음 옆에 세워져 있는 녹색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차 안에는 차 주인의 손이 닿았던
운전석 옆자리에 놓여 있는 세 권의 책들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그것들은 어린이
잡지인 "천사들의 집"과 일본 패션잡지인
"논노"그리고 미국 사진잡지인
"라이프"지였다.
"천사들의 집"은 8월호였고 "논노"와
"라이프"지는 7월호였다.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아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 안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천사들의 집"은 글보다는 그림
위주로 꾸며진 잡지이기 때문에 동재
또래의 아이들이 보기에는 좋은 책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것을 꺼내려고 하지
않았다. 마치 불결한 것이라도 되는 듯
아무도 거기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차를 몰고 집을 빠져나오면서 미화는
창기가 못마땅한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소아과병원이 있었다. 그런데 굳이 창기는
K병원을 고집하고 있었다. K병원은 창기의
친구가 병원장이기는 하지만 너무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K병원 원장실.
두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K병원 원장 민우철과 창기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민우철은 깡마른 얼굴에 금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꽤나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는 창기보다는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로 키가 큰
사내였다.
민원장이 말했다.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는게
좋겠어."
원장은 아주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창기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슬픈
빛이 담겨 있었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창기쪽이었다.
그는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린 채 두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자처럼 섬세해
보이는 손등과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의
관자놀이께에는 파란 혈관이 솟아나와
있었다.
실내에 깔려 있는 무거운 침묵은 마치
거대한 벽처럼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과 그것을
받은 사람 사이에는 절친하다는 것만으로는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말은
안했지만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분명의 돈의 위력이
절대적이지만 그 돈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 바로 에이즈라는 병이었다. 그 병에는
돈도 현대 의술도 무력하기만 했다.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
쓸데 없는 말인 줄은 알면서도 창기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원장은 목에 걸고 있던
청진기를 벗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질문은 그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그는 거기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친구도 대답은 바라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가슴이 메어지는
배창기--그는 에이즈 환자였다.
환자로서의 증상이 차츰 나타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양성반응자였었다. 그가 에이즈 보균자로
밝혀졌을 때 민원장은 제발 그가 환자가
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었다. 보균자가
환자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15%
정도였다. 그 점을 주지시키면서 그는
창기를 안심시켰었다. 창기의 아들인
동재도 에이즈 양성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 같은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창기와 그의 어린 아들이 에이즈
보균자였다는 사실은 그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의사는 자신이 진찰한 사람이 에이즈
신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창기와 그의 어린 자식이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하게 되면 그 즉시 격리 수용된다는
사실을 말해주자 창기는 제발 신고하지
말고 비밀로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고,
그래서 그는 친구와의 정분을 생각해서
지금까지 그 비밀을 지켜왔던 것이다. 다만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달라는
주의 말만은 분명히 해두었다.
배창기가 에이즈 보균자로 밝혀진 것은
1년쯤 전이었다. 본래가 병약한 몸이라
감기만 들어도 K병원을 찾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우연히 보균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놀란 민원장은 창기의 가족들을
질린 창기는 한 살 밖에 안 된 아기를
병원으로 데리고 와서 검사를 시켜보았다.
그 결과 아기 역시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음이 밝혀졌던 것이다.
창기의 충격은 컸다. 충격이 큰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마치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민원장은 그의 부인도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창기는 펄쩍
뛰었다. 아, 그건 안 돼! 집사람한테는
비밀로 해야 돼! 그는 그렇게 소리쳤었다.
만일 아내마저 감염이 되어 있다면 그녀가
나를 얼마나 원망하겠느냐. 그것이
두려워서 아내를 데려올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앞뒤 가릴 생각도 해보지
못한 채 자기가 가족들한테 병균을 옮긴
감염의 주범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감염됐는데 제 엄마가 감염되지
않았을라구. 우리 집사람만은 건드리지
말고 제발 그대로 둬. 그가 하도 완강히
반대하는 바람에 민원장은 더 이상
유밀라를 검진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도대체 넌 누구한테 그런 걸 선물받았지?
넌 여자관계도 복잡하지 않잖아. 콜걸하고
상대한 적 있어? 아니면 술집 아가씨하고
관계했나? 잘 생각해 봐. 틀림없이 그것을
옮겨준 여자가 있을 거야. 민원장은 친구를
노려보면서 추궁해 들어갔다. 창기는
온몸의 피가 말라붙는 것만 같았다. 그는
여자에 대해서만은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깨끗한 여자만을 원했다. 콜걸이나 술집
아가씨는 여자 취급도 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은 여자라 할지라도 조금 야하거나
더구나 몸이 쇠약했기 때문에 다른
남자들처럼 게걸이 들린 듯 닥치는 대로
여자를 탐한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특히 죽은 아내에 대해서는 그녀의 불
같은 성욕에 짓눌려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건드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가 아내가 그에게 다가와
관계를 요구하면 하는 수 없이 응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런 경우는 한두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했다. 아내가 그에게 어쩌다가
관계를 요구하는 것도 최근에는 다분히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내이기 때문에 봉사해 주어야 한다는
형식적인 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그의
별로 찾으려고 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서 차츰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그 역시 아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그 자신이 자진해서 아내에게
다가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결혼 초기만해도 그들은 한 침대에서
몸을 꼭 붙인 채 자곤 했었다. 그것이
어느새 두개의 침대로 분리되었고, 그
두개의 침대는 처음에는 사이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여 있다가 나중에는
ㄱ자형으로 자리를 바꾸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물론 같은 방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거의 별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 멀어지기만 하는 아내의 얼굴 위로
아름답고 다소곳한 모습의 미치코였다.
미치코, 바로 너였구나. 나한테 에이즈를
옮겨준 여자가 바로 너였구나. 이럴
수가.......
그의 일본인 애인인 미치코의 모습이
머리에 확연하게 떠오르는 순간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져왔다.
그것을 보고 민원장은 한층 더 집요하게
그를 추궁해 들어왔다. 하는 수없이 창기는
자기 혼자만 알고 있던 미치코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 아가씨를 한 명 알고 있어. 알게된
지는 한 3년쯤 됐는데 대학생이야. 내
마음에 드는 아가씨야. 그 아가씨한테
옮았을 가능성이 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민원장은 혀를
보라구. 그렇다니까. 일본 아가씨들은
정조관념이 희박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기만
하면 아무하고나 몸을 섞는다구. 특히
서양사람들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구. 그
아가씨도 아마 그래서 에이즈를 갖게
되었을 거야. 민원장은 마치 미치코를
검진이나 한 것처럼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아가씨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창기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눌러참았다. 미치코를 변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에이즈를 옮긴
여자라면 그의 생각에 미치코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도저히 변호를 받을 수
없는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변호는 커녕
비난받아 마땅할 아주 못되고 더러운
청순한 모습 속에 그 더럽고 무서운
에이즈균이 자라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것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었다.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그에게
에이즈를 옮긴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치코에 대해서 증오심이
솟는다거나 그녀가 원망스럽다거나 하는
마음이 조금도 일지 않았다. 그녀에게
속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일부러 그를 속였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기가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와 관계했을 것이다. 불쌍한
미치코....... 그는 그녀가 가엾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철기가 가정해놓고 있는 그
들었고 그녀의 행위를 이해하고 싶었다.
탁자 위에는 주스가 담긴 두개의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반쯤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입도 대지 않는 상태로
놓여 있었다. 주스가 처음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은 창기의 것이었다. 민원장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간호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의 앞에도 주스잔을 갖다놓았지만
그는 그것을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유는 잔을 통해서 에이즈균이
다른 사람한테 감염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민원장은 그런 그를
보고 에이즈는 그런 것을 통해 전염되는
것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시라고
말했지만 그는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었다.
간호원이 들어와 동재가 왔다고
일러주었다.
들어왔다. 창기는 벌떡 일어나 미화로부터
아기를 안아서 품에 꼭 안았다. 아기의
몸은 뜨거웠다. 건강하게 자라준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가엾게도
아기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아기가 그렇게 된 것은 순전히
못된 어른들 탓이었다.
아기는 의식을 잃은 채 가는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민원장은 문을 안으로
걸어잠그고 나서 창기에게 아기를 진찰대
위에 눕히게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미화를 바라보았다. 창기가 동생이라고
그녀를 소개하자 그는 놀란 듯이
"아, 그래? 난 부인인 줄 알았지."하고
말했다.
"배미화예요.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민원장은 그녀를 찬찬히 쳐다보고 나서
시선을 돌렸다.
민원장이 아기를 진찰하는 동안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미화는
고무장갑을 끼고 아기를 진찰하는 민원장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의 태도는 마치 몹쓸
전염병에 걸린 환자한테서 병이 전염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비록
친구이기 때문에 다른 의사들보다는
정성들여 봐주겠지만 소아과 의사도 아닌
사람한테 아기를 데려온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집에서 가까운
소아과 의사한테 데려가는 게 더 좋았을 걸
잘못했어. 참 이상하단 말이야. 아무리
친구라고는 하지만 굳이 아기를 여기까지
데려오게 할 게 뭐람.
피어오른 붉은 반점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열이 아주 심해요. 열이 심해서 생긴
건가요? 열꽃 같지는 않은데......."
미화가 볼멘 소리로 말하자 민원장은
그녀를 경계어린 눈으로 힐끗 쳐다보고
나서 아기의 입 속을 들여다보았다. 창기는
창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입원시켜야겠어."
민원장이 마침내 진찰대에서 물러나면서
말했다. 창기는 그의 어조에서 절망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표정을
살피면서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입원시켜야 한다구요? 무슨 병인데
입원시켜야 하나요?"
미화가 놀란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면서
민원장도 창기도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폐렴 같아."
민원장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폐렴이라구요?"
미화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왠지
그녀의 시선을 슬슬 피하기만 했다. 미화는
울상이 되어 창기의 팔을 잡아흔들었다.
"어떡 해요?"
"할 수 없지 뭐. 입원시키라면
입원시켜야지."
별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은 그의 태도와
맥빠진 듯한 중얼거림이 미화는 몹시
못마땅했다. 어쩌면 남자들은 이럴 수가
있을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기
어쩌면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폐렴이라는 것이 무슨 병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이 몹시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왜 그런 병에 걸렸죠? 폐렴에 걸리면
몸에 이런 붉은 반점이 생기나요?"
그년 진찰대 곁에 다가앉아 아기의 몸을
만지면서 물었다.
"입원시킨 다음 경과를 더
두고봐야겠어요. 폐렴 증상인데 아직
확실하게 단정을 내릴 수는 없어요."
"저기......."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소아과에 한번 데리고 가면
어떨까요?"
"그건 안 돼!"
날카롭게 소리쳤다. 민원장한테 의사를
물었던 미화는 창기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가
그렇게 반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친구에 대한 의리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이건 그런 것을 떠나 아기의 생명에
관계되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구원을
청하듯 민원장을 바라보았다.
민원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꼭 그렇게 하고 싶다면......."
"아니에요. 오빠가 반대하시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요. 전 너무
놀라서 그런 생각을 해본 것뿐이에요."
미화는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내 친구 가운데
보고 여기 와서 아기를 좀 봐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굳이 아픈 아기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닐 필요 없이......."
"네, 그게 좋겠군요."
미화로서는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민원장은 그 친구라는 소아과
의사를 당장 부르지 않았다.
"바쁜 친구니까 지금은 안 되고 이따가
점심 시간에 좀 와달라고 해야겠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 있어요."
그 말에 그녀는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전 여기에 있겠어요. 아기
혼자 두고 어떻게 집에 돌아가요. 제가
옆에 없으면 아기가 막 울 거예요."
민원장은 골치아픈 아가씨를 쫓아버릴 수
그렇다고 그녀를 에이즈 환자와 함께 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눈치를 채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걱정하기 말고 돌아가 있어요. 혹시
전염성이 있는 병일지도 모르니까요. 아기
곁에서 간호한다는 것은 위험해요. 정성껏
도와줄 간호원들이 있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 있어요. 가족이 곁에
있는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건 사실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그러나 미화는 아기를 떼어놓고 갈 수는
없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보다못한
창기가 정색을 하고 그녀를 나무랐다.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 자꾸 그러면
서로 피곤하잖아. 빨리 돌아가란 말이야!"
그가 그렇게 정색을 하고 신경질적인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아기를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문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언제까지 입원하고 있어야 하죠?"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있어요."
"잘 부탁하겠어요."
그년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창기를
바라보았다.
"더 계실 거예요?"
"음, 난 좀 있다가 가겠어. 할 이야기도
있고......."
미화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사라지자
남자들은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민원장이 간호원을
"아기를 입원시켜. 특실에 입원시키고
아무도 접근시키지 마."
그는 처방전을 급히 작성하여 간호원에게
넘긴 다음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간호원들이 아기를 데리고 나갈 때까지
그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없이 서
있었다. 이윽고 아기를 태운 스트레처카를
간호원이 밀고 나가자 민원장은 문을
닫았다.
"정말 폐렴이야?"
창기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그의
표정에는 긴박감이 흐르고 있었다.
민원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면역기능이 떨어져서 생긴 거야."
"소아과 의사한테 보일 거야?"
"그럴 필요 없어. 면역기능이 떨어져서
민원장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자신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창기가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담배 한 대 줘."
그는 평소에 피우지 않던 담배까지 다
찾았다. 실내는 금방 두 사람이 피우는
담배연기로 가득 찼다.
"면역기능이 떨어지고 있다는 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말이야. 다시
말해서...... 아기는 양성반응 단계를
지나서 이제 환자가 된 거야. 너처럼
말이야."
창기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창가로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 밖에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기는 저항력이 아주 약해서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성인이라면 어느 정도
시달리다가 죽겠지만 아이들은 그렇지가
못해."
"위독하다는 말이야?"
창기는 창 밖을 바라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민원장은 그의 뒤에서
창기의 뒤통수를 쏘아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위독해."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떻게 좀 안 될까?"
침묵을 깨고 창기가 물었다. 민원장은
팔짱을 낀 치 가만히 서 있었다.
돼......."
창기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스며드는
것처럼 아주 작게 들렸다. 그가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민원장의 귀에는 잘
들리지가 않았다.
그는 에이즈 환자로 밝혀진 사람들을 더
이상 자신의 보호 하에 숨겨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짓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역시 에이즈 감염자로 밝혀졌던
유밀라는 이미 죽었고 이제 어린 아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그 다음에는
배창기의 차례이다. 배창기 다음에
배미화일까. 그는 배미화를 유밀라로
착각할 뻔했었다. 그만큼 두 여자는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에 유밀라를 한번 본
친한 친구의 일가족이 어쩌면 에이즈
때문에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잠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렇다고 친한 친구를 당국에 고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발 당한 즉시
창기는 격리 수용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죽어가겠지. 그가
가지고 있는 그 엄청난 부가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느 병실에 입원시켰지?"
한참만에 창기가 고개를 돌려 민원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눈은 젖어 있었다.
안경 밑으로 눈물이 흘러 내려와 있었다.
민원장은 그를 데리고 5층으로 올라갔다.
5층 복도의 맨끝까지 걸어가자 철문이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버저를
누르자 안에서 간호원이 밖을 내다본 다음
문을 열어주었다.
내부는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었다. 유리벽 저쪽은 병실이었고 이쪽은
간호원이 대기하고 있는 곳 같았다. 책상
위에는 간호원이 손대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뜨개질감이 놓여 있었다. 간호원은
나이들어 보였다. 그들은 유리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민원장을 찾는 구내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간호원이
급한 환자가 생겨 원장님을 찾는다고 하자
그는 창기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한 다음
급히 밖으로 사라졌다.
창기는 접근하기 두려워하는 눈으로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아기의 얼굴에는
바늘이 꽂혀 있었다. 주사 바늘에 이어진
긴 줄을 타고 묽은 액체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창기는 무릎을 꿇고 침대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두손으로 아기의
조그만 손을 가만히 감싸쥐었다. 아기의
손은 차가웠다. 그는 아기의 손에다 얼굴을
비비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다오...... 부모
잘못 만나 넌 피어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안 돼....... 동재야, 안
돼...... 가면 안 돼...... 모두 가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는 속으로 웅얼거리면서 흐느껴
아기의 맥박은 가냘프게 뛰고 있었다.
맥박을 짚어보고 있는 창기는 그것이
금방이라도 멎어버릴까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죽으면...... 이 아빠도 죽을
거야....... 다른 세상에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괜찮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크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간호원이 들어와 뭐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친다기보다는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빌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환자한테 영향이
있으니까 밖으로 나가 주세요."
간호원이 어깨를 건드렸지만 창기는
민원장은 수상기 앞에 앉아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흔들거리다가 이윽고
정지하면서 배동재가 입원하고 있는 특실
내부가 나타났다. 화면은 컬러로 나오고
있었다. 침대 위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는
창기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안경 밑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보아 몹시 비통하게
울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민원장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의사로서 친한 친구한테 자신이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심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사가 된 이후 그가 그렇게 심한
무력감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무력감과
함께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회의까지
1년 전 창기와 그의 아들이 에이즈
보균자로 밝혀졌을 ㄸ 창기는 그들한테
에이즈균을 감염시킨 사람은 바로 일본인
애인인 미치코가 틀림없다고 주장했었다.
그의 말을 들어본 민원장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그 여자를 검사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창기에게 미치코를 서울로 데리고 올 수
없느냐고 넌지시 물어보았었다. 물론
그녀를 서울로 데리고 올 때에는 에이즈
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 같은 것은 접어둔
채 아주 자연스럽게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초대해야 할 것이라는 말까지 곁들여
해주었다. 창기는 곰곰 생각해 보더니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다.
한 달쯤 지나 창기는 정말로 미치코를
순간 민원장은 그 아름다움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처음 인사를 나눈 곳은 어느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민원장은 일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미치코와 대화를 할 때에는
주로 영어를 사용했다. 미치코도
서투르나마 어느 정도 영어는 지껄일 줄을
알고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그는 자신의 병원에 종합검진을 위한
최신기계가 도입되었는데 그 기계는
단시간내에 검진을 끝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확도가 90% 이상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종합검진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그런 것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오셨는데 내가 특별히 해드릴것은 없고
종합검진이나 해드리지요. 이건 어디까지나
서비스로 해주는 것이니까 부담갖지 말고
귀국하기 전에 병원에 한번 들려줘요.
아무리 건강해도 검진을 받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웃으면서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고,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창기는 이런 기회에 종합검진을 받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은근히 부추겼다.
다음날 창기는 미치코를 데리고 병원으로
민원장을 찾아왔다. 병원시설을 둘러본
미치코의 얼굴은 어느새 신뢰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종합검진은 별
어려움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혈관에서
혈액을 뽑을 때에도 그녀는 검진에
있어 주었다. 그녀가 검진을 받는 동안
민원장은 창기에게 "넌 무슨 재주가 있어
저런 미녀를, 그것도 일본 아가씨를
애인으로 두었느냐."고 농담삼아
말하기까지 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물론
미치코한테는 그 즉시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이 통보되지 않았다. 그 문제는
전적으로 창기한테 맡겨졌다. 에이즈 보균
사실을 빼고는 미치코는 모든 면에서
정상적이고 양호한 편이었다. 종합검진
결과가 아무 이상없이 A급 판정으로
나왔다고 하자 그녀는 속도 모르고 아주
기뻐했다.
한편 창기는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결과가 나오자 새로운 고민에 휩싸였다.
예상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별로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저주스럽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른 채 종합검진 결과에
기뻐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한없이
불쌍한 생각만 들었다. 그를 괴롭힌 것은
그 사실을 미치코한테 알려야 하느냐
아니면 비밀에 부쳐두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것의 처리를 놓고 그는 며칠동안
괴로워했지만 결국 미치코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녀는 한국에 일 주일 동안
머무르다 돌아갔다. 창기는 그 한 주일
내내 미치코의 곁에 있어 주었다. 한국에
처음 왔던 그녀는 모든 것에 신기해 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의 절에 완전히 매료되어
마지막 날 밤은 절에서 방을 하나 빌려
지냈는데 그녀는 평생 잊지 못할
밤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절은 일본의
절과는 달리 자연의 품속에 안겨 더없이
포근하고 안정된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절
자체로 하여 그 주위의 자연미가 더욱
돋보인다고 그녀는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기까지 했다.
그녀가 떠난 후 창기는 고민 끝에 그녀가
에이즈 보균자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편지를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물론 거기에는
그녀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그녀 모르게
에이즈 검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상세히 적어보냈다.
"......미치코, 사랑하는 미치코, 나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 그 무서운 병에
원망하지 않아요.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도 후회하지 않아요. 그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했었다는 증표라면 나는 그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간직한 채 죽어갈 수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미치코가 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생각하면 내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만 같아요. 미치코, 너무
절망하지 말아요. 에이즈 보균자라고 해서
다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15퍼센트만
환자가 된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굳세게 살도록 해요. 물론 다른 사람들한테
전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까? 과연 앞으로
다시 만날 수가 있을까? 사랑하는 미치코,
보고 싶어. 미치도록 보고 싶어. 미치코를
알아주겠지."
그는 편지를 이렇게 끝맺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예감하는
비통어린 편지였다.
미치코로부터는 얼른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며칠
후 그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서울에 와 있다는 놀라운 전화였다. 창기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호텔로 달려갔다.
그녀는 호텔 방에서 혼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없이 서로
껴안았다. 미치코는 그의 품에 안겨서
울음을 터뜨렸다.
"편지를 쓸 수가 없었어요! 편지에 모든
것을 담을 수가 없었어요! 몇번이나 썼다가
그녀의 흐느낌과 몸부림은 전류처럼
창기의 몸에 와 닿았다.
"미안해. 편지를 보내놓고 후회했어."
"아니에요! 그런 편지가 없었다면 우리의
사랑은 위선적인 것이 됐을 거예요! 전
당신을 만날 거예요! 죽을 때까지 만날
거예요! 에이즈가 왜 우리를 갈라놓아야
하나요?! 그게 뭔데...... 도대체 그게
뭔데......."
그녀의 입을 덮어누르는 창기의 입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실내는 미치코의 흐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기는 그녀를 껴안은 채
소파로 가서 앉은 다음 그녀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고친 다음 그의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녀의 얼굴빛은 납처럼 무겁고 창백해
보였다.
"저를 원망하고 계시죠?"
그녀가 그를 외면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조금도 그렇지
않아."
그가 다시 그녀를 안으려고 하자 그녀는
어깨를 돌려 그를 피했다.
"편지를 받고 나서 저는 왜 제가 그런
병에 감염됐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저는 선생님이 두번째였어요."
그녀는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는
것이 몹시 괴로운지 두손을 마구
귀를 기울였다.
"첫번째 남자는......
사촌동생이었어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고등학교 2학년때 한 살
아래인 사촌동생과 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어요...... 단 한번이었어요......
그때 너무 부끄럽고 충격이 컸기 때문에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남자들과
만나는 것이 두렵고 싫었어요......그러고
나서 두번째로 선생님을 만났던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은 저한테
최초로 사랑을 가르쳐주신
분이었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분이었어요...... 선생님과 만나면 저는
그렇게 행복 할 수가 없었어요......."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창기는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나서 저는
저한테 에이즈를 전염시킨 사람이 저와
첫관계를 가졌던 그 사촌동생이라고
생각했어요...... 만일 에이즈가
육체관계를 통해서만 전염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은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었고...... 어린
사촌동생이 에이즈를 전염시켰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어요...... 그
동생은 저와 관계를 맺고 난 얼마 후에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결국 저는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사촌동생한테 전염된 것이 아니라 다른
주사기 같은 것을 통해서 전염된 것이라고
말이에요......."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소리로 나직이
말하는 그녀의 태도는 마치 죄인처럼 잔뜩
주눅이 들어 죄를 고백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주장을 그녀는 매우
완곡한 표현을 빌려 아주 공손하게 하고
있었다. 결코 자신의 죄를 부인하지는
않는다는 식으로.
창기는 그녀가 차라리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저는 아무 죄가 없어요. 당신과
관계하기 전까지는 저는 에이즈 같은 건
걸리지 않았어요. 저한테 에이즈를
유부남인 당신이야말로 에이즈에 걸렸을
가능성이 저보다 훨씬 더 높잖아요. 왜
저한테 그 책임을 덮어씌우는 거예요. 그런
오해를 받다니 저는 정말 억울해요."
아무튼 창기는 미치코로부터 그런 변명
아닌 변명을 듣고 나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녀가 서울에까지 날아와 이렇게 처절한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결코
거짓말일 리가 없었다. 그녀의 어느
구석에서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녀가 거짓말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면 굳이 서울에까지
날아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두번 다시
그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녀한테 그런 편지를 보낸 것으로 해서
그들 사이는 끝장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를 듣고보니 그는 자신이 그녀를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와 미치코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과 진실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결국 그는
"미치코는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미치코가 나한테 그 몹쓸 병균을 옮겨준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그녀한테 옮겨준
것이다. 그렇다면 나한테 그것을 옮겨준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미치코, 미안해. 용서해 줘. 이야기를
듣고 보니까 내가 오해를 하고 있었어.
미치코는 나 때문에 에이즈에 걸린 거야.
미치코의 깨끗한 몸 속에 그 더러운 병균을
모르고 나는 오해하고 있었어."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을
망친 사람은 바로 저에요!"
그녀는 다시 창기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전 누구의 책임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져서
뭐해요...... 저한테 필요한 건 선생님의
사랑뿐이에요......."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여자가 또 어디 있을까? 여느 여자 같으면
자기를 살려내라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다. 에이즈를 감염시켰다고 악을
써대며 몸부림칠 것이고 두고두고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미치코의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구나. 진정한 사랑이란
것인가. 놀라운 일이다. 이 아가씨는 나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그는 일본 아가씨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내가 바보였어...... 정말 미안해......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바보가 됐지......
미치코,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용서해 줘......."
그는 울고 싶었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런
말씀하시면 싫어요...... 에이즈 같은 게
무슨 문제예요...... 전 에이즈보다도 그
때문에 우리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게 더
무서워요...... 헤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미치코가 그렇게 말할수록 그는 고개를
쳐들 수가 없었다.
미치코한테서 에이즈균이 감염되지
않았다면 이제 그 전염원은 자명해진
셈이었다. 그러나 창기는 두번 다시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해
거기에 접근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확인하기 두려운
상대였다. 마치 자신이 지키고 싶은 마지막
보루를 그 스스로가 까뭉개는 것 같은 그런
두려움이 계속 그를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마침 유밀라는 간염 예방접종을 맞은 후
1년이 지나도록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그때까지 확인검사를 못 받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창기는 그것을
후 처음으로 혼이 난 그녀는 그 즉시
민원장에게 달려가 확인검사를 받았다.
간호원이 혈관에다 주사바늘을 꽂고 혈액을
채취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에이즈 검사를
하기 위해 그러는 것인 줄 그녀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확인검사 결과 간염 항체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몹시 기뻐했고 그 사실을
전화로 창기에게 알려주기까지 했었다.
"항체가 생겼대요. 이젠 안심해도 되죠?"
"음, 다행이군."
"아침에 호되게 야단맞고 눈물이 다
났어요. 점심 사줘요."
"안 돼, 약속이 있어."
그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
민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민원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민원장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이윽고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A가 맞아."
A는 에이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수고했어. 고마워."
창기는 중얼거리면서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로써 일가족 세 명이 모두
에이즈 보균자로 확인된 셈이었다. 그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그것이 점점 어두운 색깔로 보이고 있었다.
어두운 색깔 저편에서 모든 것들이 하나
둘씩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에게 에이즈를 전염시킨 사람이 바로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내는 또
누구한테서 그것을 옮겨받았을까? 아내한테
그것을 전해준 사람은 물론 남자이겠지.
과거에 아내를 거쳐간 남자...... 한
명일까 두 명일까. 아니면 세 명일까.
화려한 미모를 갖추고 있으니까 항상 그
주위에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겠지.
아내의 과거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내가
정말 나에게 에이즈를 전염시켰을까?
에이즈는 성관계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전염된다고 했다. 이를테면 수혈,
주사기, 면도기 등등.......
벌써 1년쯤 전의 일들이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그는 딱딱한
나무의자에 조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간호원이 들어와 나가달라고
그는 멍하니 침대 위의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원장이 몇번씩 나타나 유리벽 너머로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는 차마
친구를 데리고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왔다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발길을 돌리곤
했던 것이다.
어둠이 밀려와 실내에 불이 켜졌을
때까지도 창기는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는 화장실에 갈 때에만 몸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보다못한 간호원이 민원장에게 가서 어떻게
좀 해보라고 간청했지만 민원장 자신도
얼이 빠진 듯 그저 앉아 있기만 했다.
사람은 병실에서, 또 한 사람은 원장실에
앉아서 밤을 꼬박 지샜다.
새벽이 민원장이 간호원의 연락을 받고
병실로 달려갔을 때 창기의 모습은 더욱
작아보였다.
병실 안으로 들어간 민원장은 먼저
침대쪽으로 가서 아기의 맥박을 짚어본
다음 창기한테 다가갔다.
창기의 초점 없는 두눈은 침대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얼이 빠진
모습으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서 밤을 새운 그의 모습은
너무도 초췌하고 조그마해 보였다.
민원장은 한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어깨를 가만히
"아기는 엄마 곁으로 갔어."라고 말했다.
그 말 한 마디를 하고 난 그는 목이 몹시
아픈 것을 느꼈다.
창기는 사랑하는 아들이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기의 한쪽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천사였다.
"안 돼! 아니야!"
그가 중얼거리면서 벌떡 일어서는 바람에
간호원이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출구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어디 가는 거야? 아기한테 마지막
인사를 해야지."
그 말에 창기는 멈칫하다가 그대로
뒤를 따라나갔다. 그는 친구의 팔을
움켜잡았다.
"이거 봐! 어디 가는 거야? 동재가 엄마
곁으로 갔단 말이야. 작별 인사를 해야지."
"아니야."
창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민원장의
팔을 뿌리쳤다.
"아들 눈을 감겨줘야 할 거 아니야!"
다시 걸어가는 창기의 뒤에다 대고
민원장이 말했다. 그러나 창기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어제 내리던 비는 그치지 않고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창기는 병원 건물을 나서서
빗속을 걸어갔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위태롭게 걸음을
옮겼다.
"그건 말도 안 돼......."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우주선을 타고
천사를 쫓아가 동재를 빼앗아오고 싶었다.
차들이 그의 앞을 스쳐가고 있었다. 그는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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