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기억속의 연변] "중형땅크"로 불리웠던 리광수

합마하물결 | 2019.10.16 10:02:50 댓글: 0 조회: 838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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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월, 룡정시 조양향 덕신촌에서 출생한 리광수는 어릴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특히 축구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1950년, 국가의 부름에 응해 고중을 졸업하지 못한채 입대한 리광수는 중국인민지원군 38군 114사단에서 통역을 맡으며 항미원조 등 여러차례의 전투에 참가하였고 총 3차례 3등공을 세웠었다.

휴전후 리광수는 지원군축구팀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귀국 후 8.1체공축구팀에 입선하게 되였으며 1955년 길림성축구팀이 성립되면서 리광수는 길림팀으로 이적하였다. 당시 리광수는 체력이 출중하고 스피드가 뛰여나며 힘이 넘치고 패스도 훌륭했기에 그라운드에서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그때 길림팀은 주로 공격축구를 구사하는 팀이였는데 선수들의 움직임이 적극적이고 경기가 치렬했기에 많은 관중들이 길림팀의 경기를 관람하기 좋아했다. 그때부터 이 새로운 축구팀은 그 누구도 감히 얕볼 수 없는 강팀으로 부상했다.

1955년 가을, 웽그리아에서 1년 반 가량 훈련을 마치고 귀국한 청소년국가팀의 성과를 검증하기 위해 국가체육위원회에서 길림축구팀을 상경시켜 이들과 대결을 펼치게 하였는데 최종 길림팀이 청소년국가팀을 2-1로 제압했다. 당시 류학을 다녀온 선수들 중에는 유사(维泗), 진성달(陈成达), 장홍근(张宏根), 방인추(方纫秋), 증설린(曾雪麟) 등이 포함되였는데 나중에 이들 모두 국가팀의 감독을 맡았다.

경기가 끝난후 국무원 부총리이자 국가체육위원회 주임을 맡았던 림학룡이 량팀 선수들을 만나 "앞으로 길림팀은 청소년국가팀의 선진적인 기술을 많이 배우고 청소년국가팀은 길림팀의 완강한 풍격을 많이 배우라"고 하면서 "길림팀의 9호 선수 리광수가 특히 인상이 깊다. 그가 경기장에서 달리는 모습이 마치 '중형땅크'와도 같다"고 평가했다. 그때부터 리광수 선수는 중형땅크로 불리우게 되였다. 그후 1957년 12월, 중국에서 처음으로 22명의 뛰여난 축구운동선수를 뽑았는데 리광수도 포함되였다.

1959년 9월, 새 중국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경기가 열렸다. 이번 대회서 길림팀은 조별 리그에서 강력한 상대 하북팀을 만나게 되였고 그 팀에도 폭팔력이 막강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3호 유니폼을 입고 있어 "흑3"으로 불리우던 선수였는데 경기가 20여분이 진행되였을 때 그 두 선수가 뽈 경합에서 동시에 뽈을 차게 되였고 "펑"하는 소리와 함께 소가죽으로 만든 축구공이 터지고 말았다. 중국축구 경기장에서 이런 장면이 연출된 것은 처음이였고 이 장면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은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인해 경기는 잠시 중지되였고 관중석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지난 세기 60년대, 길림축구팀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1963년에 을급리그로 강등되였다. 당시 성체육위원회에서는 길림축구팀을 연변주체육위원회에 위탁관리시켰고 연변주체육원회에서 각 방면의 의견을 청취한 후 관리체계를 조절, 리광수를 연변체육훈련반(후에 연변체공팀으로 불림) 주임으로 임명해 축구팀을 건설하게 했다. 당시 리광수와 박만복 감독은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길림팀의 전통인 "나를 위주로, 스피드를 위주로, 공격을 위주로"하는 풍격을 주입시켰는데 1964년에 을급리그에서 2위를 차지하며 다시 갑급리그로 복귀하게 되였다.

그뒤, 1965년 전국축구 갑급리그가 시작하면서 길림팀도 승승장구 하였었고 용맹하고 억센풍격을 지닌 그들은 당시 8.1팀, 하북청년팀, 료녕로동자팀, 상해로동자팀 등 7개 강팀을 모두 제압하며 우승을 거머쥐게 되였다. 이는 새 중국이 창건된 후 3대 구기종목에서 길림성이 처음으로 전국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되였다.

길림축구팀이 우승할 당시 이미 지도간부였던 "중형땅크" 리광수는 장외에서 선수들에게 응원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새 중국 제1대 선수가 력사적 사명을 완성하는 순간이였다.

그후 리광수는 1972년에 훈춘현 체육위원회 주임으로, 1973년 길림성 축구팀 총감독으로, 1975년 연변대학 체육계 주임으로, 1990년대 연변대학 교육공회 주석에서 퇴직해 2002년 6월에 별세하였다. 2015년 12월, 연변축구팀이 갑급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슈퍼리그로 진출할 당시 연변체육계와 언론계에서 연변(길림)축구 60년 공훈인물 평선 활동을 개최하였는데 리광수는 10명의 공훈인물과 5명의 최우수 운동원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출처: 연변뉴스넷

편역: 리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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