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8)

개미남 | 2019.06.11 18:48:31 댓글: 0 조회: 85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com/fiction/3935118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 - 18.

다카야마 히사노부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표정을 관리했다. 사실은 너무나 큰 충격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커피 잔에 손을 내밀었다. 우선은 냉정한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크게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시호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파는 다카야마가 자각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손끝에 힘이 주어지지 않아 커피 잔이 받침접시 위에서 다르륵 맞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는 잔을 놓고 이번에는 물이 든 컵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입가로 가져와 물을 목구멍에 흘려넣었다. 당황한 탓에 하마터면 물이 기도로 들어갈 뻔했다. 사레가 들려 물을 왈칵 뿜었다. 입 주위가 젖어버렸다.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렸지만, 사레는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눈물까지 났다.
목소리를 낼 수 있기까지 한참 그대로 자세를 유지했다. 흘끔 앞을 살펴보니 그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미나미다 시호가 걱정스러운 듯 슬그머니 눈을 치켜뜨며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다카야마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추태를 연출하는구나.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화가 났다.
시호에게서 문자가 들어온 것은 그 전날 저녁 무렵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시간을 좀 내달라는 것이었다. 다카야마는 뛸 듯이 기뻤다. 그녀와는 한참이나 만나지 못했다. 그 자신이 바빴던 탓도 있지만 그녀에게 전화를 해도 연결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문자를 보내도 좀체 답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대해 그녀는 "새 일을 맡게 되어서 휴대전화를 체크할 여유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의 조수 일을 하고 있었다.
다카야마는 당장, 언제라도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그러자 시호가 시간과 장소를 정해왔다. 긴자의 쥬오도오리가 내려다보이는 커피숍ㅡ. 전에 산쿄은행의 고미야를 소개받았을 때 이용했던 커피숍이었다.
오랜만에 시호를 만난다는 것 때문에 마냥 기쁘기만 했던 다카야마는, 그러나 점점 불안해졌다.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녀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은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약속 시각에 정확히 맞추어 나타난 시호는 음료를 주문한 뒤에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을 꺼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미안한데, 우리 만나는 거. 이번을 마지막으로 해줘."
그 한마디가 다카야마를 아득한 나락으로 처박았던 것이다.
흐트러진 호흡이 가까스로 안정되어왔다. 그는 입가에서 손수건을 내리고 그 참에 이마를 닦았다. 식은땀 같은 것이 흘렀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아?" 시호가 다시 한 번 물어왔다.
응. 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카야마는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새삼 컵의 물을, 이번에는 신중하게 입에 머금었다.
"미안해." 시호는 머리를 숙였다.
"무슨 말이야? 그건 그러니까. 역시 나하고 헤어진다는 뜻?" 뺨을 푸들푸들 떨면서 다카야마는 물었다.
시호는 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정만 내세우는 소리라는 건 잘 알아. 정말 미안해."
"그, 그런‥‥‥." 다카야마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왜?"
"실은, 미국에 가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들어왔어."
"미국?"
"지금 내가 모시는 디자이너 선생님이 뉴욕의 디자이너하고 친구 사이여서 내 작품을 그 사람에게 보여줬대. 그랬더니 그쪽으로 와서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고 한다나 봐. 우리 디자이너 선생님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니까 꼭 가야 한다고 하시고. 나도 이런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고 그래서‥‥‥." 고개를 숙인 채 시호는 말했다.
"뉴욕이라니‥‥‥, 하지만 전에는 계속 나와 함께하겠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디자이너가 되는 건 내 꿈이기도 하고 이런 좋은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거 같아." 자그마한 목소리로 시호는 말했다. 그 말투는 연약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이미 굳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그쪽에 가 있는 건 아니지? 간간이 일본에 돌아오기도 할 거잖아? 그렇다면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거 아냐?"
시호는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어. 어쩌면 그쪽에서 일을 시작할지도 모르고."
"아무리 그래도 영원히 안 오는 건 아니잖아? 시호도 부모님이나 가족이 있을 거고."
"내가 말 안 했던가?"
"뭘?"
"우리 아버지랑 엄마, 이혼했어.나는 아버지가 키워줬지만, 그 아버지도 2년 전에 돌아가셨어. 엄마는 재혼해버렸고. 그래서 나는 부모도 없어."
"그, 그래도‥‥‥."
"미안해." 시호는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내 꿈을 위해 히사노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려달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어. 히사노부는 좀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
그녀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다카야마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고민고민하던 끝에 쓰디쓴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는 기다릴 거야. 시호가 돌아올 때까지 몇 년이라도 기다릴게."
"자기‥‥‥."
그렇게 말하며 시호가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의 등 뒤 계단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산쿄은행의 고미야였다. 그는 다카야마를 알아보더니 상냥한 얼굴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난번에는 정말 고마웠어요."
고미야가 왜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인지, 다카야마는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하고 있으려니 시호가 고미야 쪽을 돌아보았다.
"고미야 선배. 일부러 나오라고 해서 미안해."
"아, 그건 괜찮은데, 볼일이라는 게 뭐지?" 고미야는 시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실은 지난번에 계약했던 달러 계약채권 말인데, 일부 해약이라는 거, 할 수 있어?"
"일부 해약? 아니, 왜?" 고미야는 시호와 다카야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돈이 좀 필요해서 그래. 지난번에 내가 맡겼던 50만 엔만이라도 돌려받을 수 없을까?"
"아, 자, 잠깐." 다카야마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런 이야기, 나한테는 안 했잖아?"
"그 문제도 사과할 생각이었어. 내 저금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그쪽에 가는 여비니 뭐니, 이래저래 돈이 필요해. 지금 당장 가진 돈만으로는 도저히 맞출 수가 없어." 시호가 말했다.
"그쪽에서라니?" 고미야가 물었다. "무슨 소린지 나는 도통 모르겠네?"
실은요. 라고 시호는 미국에 가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미야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몇 번이고 다카야마 쪽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뉴욕이라‥‥‥."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고미야는 침울한 얼굴이었다.
"내일까지 꼭 불입해야 할 돈이 있어. 그래서 선배를 불러내게 된 거야. 바쁠 텐데 정말 미안해."
"그건 괜찮아. 하지만 부분적인 해약은 불가능한데. 이걸 어쩌지? 해약하려면 전액을 다 해야 돼. 더구나 지금 전부 해약하면 큰 손해를 볼 거야.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쪽의 상품은 중도에서 해약하면 크게 불리한 거야."
"그래요? 아, 큰일이네." 시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그보다 미나미다가 지금 하는 일, 너무 이기적인 거 아냐?" 고미야는 못마땅한 듯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내 책임량에 협조해준 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자기 입장만 앞세워서 해약을 하겠다는 건 다카야마 씨한테 큰 실례야. 나는 이런 건 좋게 생각할 수가 없는데?"
고미야의 그 말은 은행원으로서가 아니라 후배를 나무라는 선배로서의 말투였다. 시호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맞는 말이에요. 라고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뉴욕이든 어디든 가는 것도 좋지만, 남에게 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게다가 다카야마 씨는 연인이잖아? 미나미다, 지금 생각이 있는 거야?"
"아니, 나는 괜찮아요." 다카야마는 당황해서 고미야를 달래고 나섰다. "시호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내가 바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다카야마 씨.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걸 그렇게 다 받아줘서는 안 돼요."
"아뇨, 됐습니다. 이건 우리 문제니까 고미야 씨까지 걱정하시게 할 수는 없죠."
"‥‥‥다카야마 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고미야는 한숨을 내쉬며 시호를 보았다. "해약 건은 어떻게 할 거지?"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봐야지."
"정말 괜찮은 거지?"
"응."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는데, 연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만은 하지 마."
죄송해요. 라고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시호는 말했다.
고미야가 성큼성큼 나가는 것을 지켜본 뒤, 다카야마는 새삼 시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하고 미리 상의를 했어야지. 여비에 대해서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그래도‥‥‥. 이건 자기하고 상의할 일도 아니고, 자기와는 헤어져야 한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나는 헤어지고 싶지 않아. 언제까지든 기다릴 거야. 시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게."
"자기야‥‥‥."
"여비는 얼마나 필요하지?" 다카야마는 말했다.

긴자센을 타고 니혼바시까지 나와 도자이센 홈으로 이동한 참에 다이스케는 걸음을 좀 더 빠르게 했다. 앞에 가는 시즈나를 뒤따라가 그 옆에 나란히 서자, 다이스케를 알아본 그녀가 멈춰 섰다.
"얼마나 받았어?" 다이스케는 레일을 내려다본 채로 물었다.
"50." 시즈나가 대답했다. "100이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형이 50만 하라고 했잖아."
"알아, 그래서 꾹 참았어. 다카야마한테서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빼낼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뭐."
"미나미다 시호 씨는 언제 미국으로 떠나시나?"
"다카야마에게 목요일이라고 말했어. 당연히 그는 나리타까지 배웅을 나갈 생각이겠지?"
"하지만 수요일에 그에게 한 통의 문자가 날아온다. 자기, 나, 지금 비행기 타러 가. 자기가 배웅을 나오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내가 거짓말을 했어ㅡ."
"후훗, 바로 그거야."
전차가 도착해서 나란히 올라탔다.
"이제 남은 건 중학교 교사 가와노 다케오인가? 어떤 식으로 떼어낼 생각이지?" 다이스케는 시즈나에게 물었다.
"기본적으로는 똑같은 방법을 쓸 생각이야. 그 사람, 끈덕진 데가 있으니까 간단히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무리하게 떼어내려고 했다가는 틀림없이 보험회사에 문의를 해볼 거라구."
"저런, 그건 안 되지. 별수 없군. 내가 힘을 좀 써볼까?"
도가미 유키나리에 대한 다이아몬드 사기 작전을 끝으로 이런 일에서는 발을 뺄 거라고 고이치가 선언한 이래, 다이스케와 시즈나는 잔무 처리에 쫓기고 있었다. 돈을 우려낼 수 있는 곳에서는 우려내고 잽싸게 관련을 끊자는 것이었다.
몬젠나카초의 맨션에 돌아오자 맛있는 냄새가 감돌았다. 고이치는 부엌에서 한창 요리 중이었다. 여행 가방이 침대 위에 던져져 있었다.
"형, 언제 왔어?" 다이스케가 물었다.
"3시간쯤 전인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당장 만들어보기로 했어."
"어디 좀 볼까?" 다이스케는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냄새나 모양새로는 이전 것과 별로 다른 게 없는 거 같은데?"
"아, 판단은 먹어보고 나서 내려. 그보다 다카야마 건은 어떻게 됐어?"
"50만. 시즈나가 보기 좋게 바가지를 씌웠어."
"역시 시즈나구나."
고이치의 칭찬에 만족스러운 얼굴로 시즈나는 침대에 앉았다.
"큰오빠. 나고야에는 뭐하러 갔다 왔어?"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아버지의 하야시라이스를 복원하는 데는 비밀병기가 필요하다고."
"그게 나고야에 있었다는 말?"
"그래. 가까스로 입수했어."
"정말 궁금하네. 뭐야. 그 비밀병기라는 게?"
다이스케가 물었지만 고이치는 다답하지 않았다.
며칠 전, <도가미 정>의 하야시라이스가 정확한 <아리아케>의 맛이라는 시즈나의 말을 듣고 고이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얼굴을 번쩍 쳐들더니 나고야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나고야의 어떤 장소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한 것이다. 수수께끼 같은 소리였지만, 고이치는 그 진의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다 됐다!" 한참 뒤에 고이치가 말했다. "시즈나, 한번 먹어 봐."
테이블에 놓인 하야시라이스를 마주하고 시즈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긴장할 거 없어." 고이치가 웃었다. "편안하게 맛을 보면 돼."
"그래도 책임이 중대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시즈나는 하야시라이스를 먹기 시작했다. 한 입 먹은 시점에 눈을 깜빡거리고 다시 몇 스푼인가를 먹은 뒤, 고이치 쪽을 보았다. 그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때? 하고 고이치가 물었다.
"완벽해!" 시즈나가 말했다. "독특한 향기가 있어. 아버지의 하야시라이스야!"
"그날, <도가미 정>에서 먹은 것도 이거였어?"
고이치의 질문에 시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형, 대체 무슨 소리야? 괜히 뜸들이지 말고 제발 속 시원히 내막을 밝혀 봐."
그러자 고이치는 싱크대 밑의 문을 열고 간장병 하나를 꺼내왔다. 다이스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나고야 노포(老鋪)의 간장이야. 하야시라이스에 풍미를 내기 위해 간장을 사용하는 요리사들은 많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이 간장만을 고집했어. 그게 여기에도 적혀 있었어." 고이치는 싱크대에 있던 낡은 노트를 집어 들었다.
다이스케도 눈에 익은 노트였다. 아버지가 요리 레시피를 적어 놓은 것이었다.
"오늘 내가 나고야에 이 간장을 구하러 갔다 온 거야." 고이치는 말했다. "그리고 그 노포에서 중요한 이야기도 듣고 왔어."
"중요한 이야기?" 다이스케는 시즈나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 간장을 <도가미 정>에서도 구입해간다는 거야. 게다가 맨 처음 사갔던 게 14년 전이래."
14년, 이라는 말을 듣고 다이스케는 온몸에 전기가 달리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옆에서 시즈나도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건 우연한 일이 아냐." 고이치가 말했다. "도가미 마사유키는 <아리아케>의 맛을 훔쳐간 거였어. ㅡ다이스케."
"응?"
"그날 밤. 네가 목격했던 사람은 도가미 마사유키였어. 네 눈이 정확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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