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전화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23)

개미남 | 2019.06.12 11:41:05 댓글: 0 조회: 49 추천: 1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com/fiction/3935476
유성의 인연/히가시노 게이고



1 - 23.

기치조지 역 옆의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거기서부터는 걸어가기로 했다. 팩스로 보내온 지도에 의지하여 역 앞에서 북쪽으로 향했다. 저녁 무렵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이쪽. 꽤 북적거리는데?" 양복 차림의 다이스케가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넥타이도 매고 있었다. "나, 기치조지에 오는 건 처음이야."
"나는 두 번째던가? 전에 회사 일로 이노카시라 공원을 촬영하러 왔었어." 고이치가 말했다.
개성적인 가게가 줄줄이 늘어선 거리를 화려한 패션의 젊은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신주쿠나 시부야 쪽의 젊은이들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지나치게 유행을 쫓는 일 없이. 제각각의 스타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도심과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아마도 그들에게 여유를 갖게 해주는 모양이라고 고이치는 분석했다.
서양식 분위기의 이자카야 (NAPAN)은 역에서 10분쯤의 거리에 있었다. 목제 문 앞에 작은 칠판을 세워놓고 거기에 오늘의 추천 메뉴를 적어놓았다. 오늘 저녁은 농어 향초 구이와 소프트셀 크랩이 추천 품목인 모양이었다.
문에는 아직 '준비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지만 고이치는 주저 없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어둑어둑했다. 들어가서 바로 앞에 있는 카운터를 젊은 여자가 닦고 있는 참이었다. 여자는 난처하다는 얼굴로 고이치 일행을 보았다.
"아, 가게는 5시 반부터 여는데요?"
"아뇨, 개점 전에 와달라고 하셨거든요." 다이스케가 양복 상의 호주머니에서 명함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간밤에 고이치가 급하게 만든 것이었다. 명함에는 '주식회사 KTS 디렉터 야마다카 노부히사'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KTS는 고이치, 다이스케, 시즈나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야마다카 노부히사라는 이름은 시즈나가 생각해냈다. 최근 사기 작전의 먹잇감이었던 다카야마 히사노부의 이름을 한 자씩 바꿔놓은 것이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더니 여점원은 명함을 들고 안으로 사라졌다.
고이치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카운터 외에 4인 테이블 다섯 개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네 명이 앉기는 비좁아 보이는 테이블이었다. 벽에는 서양화 포스터가 붙었고 선반에는 오래된 시계며 검정색 전화 등이 놓여 있었다. 실내 디자인에 새로운 면은 없지만 센스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이스케가 고이치를 향해 손을 쳐들더니 카메라로 찍는 흉내를 냈다. 고이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것을 사용하여 가게 안의 모습을 대충 촬영했다. 방송 제작사의 디렉트. 그리고 그와 동행한 카메라맨. 이라는 것이 오늘 그들의 역할인 것이다.
"어, 마음대로 찍어 가면 곤란한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흰 셔츠 위에 검은 베스트를 입은 남자가 안쪽에서 나오는 참이었다. 숱이 적은 머리를 짧게 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둥근 얼굴이 더욱 강조되는 것 같았다. 체형도 땅딸막했다. 나이가 제법 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직 사십 대일 터였다.
"노무라 씨세요? 바쁘신데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다이스케가 다시 명함을 내밀려고 했지만 노무라 다카오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까 종업원한테 받았어.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 간단하게 부탁해요." 노무라는 카운터의 스툴에 앉았다. "댁들도 적당히 앉으시지."
다이스케는 "그럼,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고 테이블 좌석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하지만 고이치는 선 채로 가게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는게 카메라맨답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음. 그러니까, 도가미 씨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고?"
다이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도가미 씨에 대한 것도 그렇고, <도가미 정>의 하야시라이스에 대해서도 여쭤보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어제도 전화로 말씀드렸듯이 이번에 만들 기획이 <명물 요리의 루트를 찾아라>라는 것이거든요. 그 명물 요리의 하나로 <도가미 정>의 하야시라이스도 후보에 오르게 된 겁니다."
흥, 하고 노무라는 코를 울렸다.
"그런 건 도가미 씨 본인에게 물어보면 될 거 아뇨?"
"물론 도가미 씨 본인도 인터뷰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송을 제작할 경우, 주위 분들의 말씀이 대단히 중요하거든요. 본인이 어떤 고생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주위에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양면을 조명했을 때에야 비로소 깊이 있는 방송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다이스케의 어조는 오늘도 매끄러웠다. 사실은 고이치가 직접 질문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지만, 그만한 연기를 해낼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하고는 요즘 왕래가 거의 없는데?" 노무라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노무라 씨. 3년 동안 <시로가네야>에서 도가미 씨와 함께 일하셨지요?"
"그건 그래. 나는 다른 식당에서 일했었는데 그쪽이 망해버리는 바람에 <시로가네야>의 수석 주방장에게 좀 써달라고 부탁했지. 근데 그 <시로가네야>도 망해버렸으니. 나는 어딜 가나 운이 없는 사람이지 뭐야." 노무라는 자학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 <시로가네야>는 8년 전에 문을 닫았다. 수석 주방장의 급사(急死)가 원인이었다. 고이치는 그것을 인터넷으로 알았다. '기치조지'와 '시로가네야'로 검색해봤더니 그런 내용의 글이 떴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은 또 다른 정보도 그에게 제공해주었다. <시로가네야>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기치조지에서 서양식 이자카야를 시작했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NAPAN)이고, 그 요리사가 바로 노무라였던 것이다.
"도가미 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이스케가 물었다.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으니 난처하네. 같은 식당에서 일은 했지만 그리 친한 시이도 아니었거든. 하지만 뭐, 늘 연구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기는 했어. 그래서 사장도 마음에 들어 했지. 독립한다고 했을 때도 그러니 기분 좋게 내보내줬어. 장소가 요코하마니까 경쟁 상대가 될 일도 없었고."
"도가미 씨는 당시부터 그 하야시라이스 요리를 잘하셨습니까?" 다이스케의 질문이 핵심으로 다가갔다.
노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시로가네야>의 하야시라이스는 사장이 옛날부터 만들던 거야. 도가미 씨도 <시로가네야>에 있을 때는 그 사장 레시피대로 만들었어. 근데 독립한 뒤에 자기만의 맛이라는 걸 만들려고 노력한 것 같더라고."
다이스케가 옆 눈으로 흘끔 고이치 쪽을 보았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지만, 흥분하고 있다는 눈치가 전해져왔다.
드디어 <도가미 정> 하야시라이스의 출발점을 발견한 셈이었다. 도가미 마사유키가 자신의 하야시라이스를 만든 건 독립한 뒤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 당시 일 중에 뭔가 기억나시는 건 없습니까? 하야시라이스에 관련된 것이라면 어떤 이야기라도 좋습니다만."
다이스케의 질문에 노무라는 팔짱을 끼는 것으로 응해왔다.
"그렇게 말해봤자 그 사람이 독립한 뒤에는 제대로 만난 적도 없는데, 뭘. 사장에게 간간이 가게 경영에 관한 상담을 하러 오는 것 같기는 하더라고. 나도 그랬지만 그 사람도 처음에는 고생깨나 하는 눈치였어."
"네. 그 이야기는 우리도 들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식당이 잘 안 되었다면서요?"
"잘 되네 마네 할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파리만 날리고 있다고 들었어. 너무 손님이 안 오니까 배달 같은 것까지 나간다고 했거든. 따로 종업원을 쓸 수가 없어서 부인이 나르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그 사람이 직접 배달을 나간 적도 있었던 모양이야. 생각해보라고, 요리사가 배달을 나가는 거야. 얼마나 장사가 안 됐는지, 상상이 되지?" 노무라의 혀가 약간 매끄러워진 듯했다. 남의 가게가 잘 안 된다는 화제에는 은근히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노무라는 문득 먼 곳을 응시했다.
"배달이라니까 생각나는데, 나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어. 어느 날 밤인가, 도가미 씨가 <시로가네야>에 왔었어. 근데 억병으로 술에 취했더라고.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흐트러진 건 처음 봤지."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그게 아무래도 손님하고 싸움을 한 모양이더라고. 싸움이라고 해봐야 누구를 두들겨 패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잠깐 말다툼을 한 정도일 거야. 게다가 그 상대가 자기 식당에 찾아온 손님이 아니고 배달을 나갔던 곳의 손님이었다나 봐."
"싸운 이유는요?"
"음식이 영 맛없다는 소리를 들었대."
에엣. 하고 다이스케는 소리를 흘렸다. "음식이 맛이 없다고요?"
"그래. 무슨 요리였는지는 못 들었지만 상당히 심한 소리를 들었던가 봐. 그런 곳에 드나드는 손님이라면 어차피 말을 곱게 할 사람이 아닐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사장이 달래주더라고."
"그런 곳이라면?" 고이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끼워넣었다. "어디였는데요?"
"다방이야." 노무라는 선뜻 말했다.
"다방?" 다이스케가 물었다. "다방 손님이 식당에 배달을 시켰다는 건가요?"
"응. 그 다방에 큼직한 텔레비전이 있어서 일요일 같은 때는 무슨 건달 집합소 같았던 모양이야. 그런 다방은 변변한 식사거리를 내놓지 못하니까 가까운 양식당에서 배달을 시킨 거야."
아, 예예. 하고 다이스케는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치도 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도가미 씨는 어떻게 하셨지요?" 다이스케가 물었다.
"어떻게 했더라‥‥‥." 노무라는 고개를 외로 꼬았다. "오래된 일이라서 생각이 안 나. 그때는 술에 취해서 잠깐 그랬던 거고 술 깬 다음에는 그 사람도 마음을 추슬렀겠지, 뭐."
노무라로서는 조금 전까지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옛날 일이다.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생각해내라고 해도 무리일 터였다.
그래도 다이스케는 <도가미 정>의 하야시라이스에 대해 노무라가 뭔가 기억해내주기를 기대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하지만 고이치가 내심 기다리던 종류의 대답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시로가네야>에서 함께 일할 때부터 도가미 마사유키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었다.
다이스케가 손목시계를 보는 척하며 고이치에게 눈짓을 보내왔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고이치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바쁘신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늘 해주신 말씀을 저희 방송에서 사용하게 되면 다시 취재를 위해 찾아뵙겠습니다."
다이스케의 말에 "엥?"하며 노무라는 불만스러운 듯 입이 튀어나왔다.
"우리 이자카야를 내주는 게 아니었어?"
"물론 사용할 때는 그렇게 해드리지요."
"아직 결정된 게 아니야?"
"아, 아직은 사전 준비 단계여서 취재한 것들 중에 어떤 것을 방송에서 사용할지 앞으로 상의해서 결정하는 겁니다."
"아차, 그런 거라면 도가미 씨의 인품이라든가, 좀 더 이야기해줄 걸 그랬네‥‥‥." 노무라는 혼자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별로 쓸 만한 이야기를 못했다는 자각이 그에게도 있는 모양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다뤄주는 건 이미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대충대충 얘기한 것이리라.
"뭔가 결정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다이스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게를 나와 잠시 걸음을 옮긴 다음에 다이스케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가미가 독립한 뒤에 하야시라이스를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대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용두사미,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아저씨네."
"뭐, 별수 없지. 다른 쪽으로 알아봐야겠다."
"다른 쪽이라니? 어디 기대해볼 만한 데가 있어?"
다이스케가 물었지만 고이치는 그저 입술을 깨무슨 수밖에 없었다.
도가미 마사유키와 <아리아케>의 관련은 그리 쉽게 찾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도가미가 범인이라면 그런 흔적만은 절대로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없애버렸을 터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걸어갔다. 길 쪽으로 가전제품점이 있었다. 가게 쇼윈도에 놓인 액정 텔레비전에서 골프 중계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고이치는 발을 멈추었다. 왜 그래? 하고 다이스케가 물어왔다.
"텔레비전을 봤다고 했지?"
"뭐가?"
"도가미가 배달을 나갔다는 다방 말이야. 텔레비전이 있어서 건달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지ㅡ."
"응. 그랬지. 그게 어쨌다는 거야?"
"텔레비전으로 뭘 봤을 거라고 생각해?"
"뭐?" 다이스케는 입을 헤벌렸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알아." 고이치는 다이스케의 어깨를 쳤다. "서두르자. 다시 한 번 드라이브야."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사쿠라기초였다. 오오카가와 강의 다리 근처에 차를 세우고 고이치는 한 커피숍으로 다가갔다. 로우하우스를 연상시키는 찻집. <우마노키>였다.
그가 들어가자 카운터에 있던 흰 수염의 마스터가 얼굴을 들고 환하게 웃었다.
"아, 지난번에 왔던?"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고이치는 인사를 건넸다.
"그 뒤로 <도가미 정>에는 가봤어?"
"아뇨, 아직 못 갔어요. 근데 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아참, 그 전에 커피 두 잔." 고이치는 손가락 두 개를 세우며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다이스케도 곁에 앉았지만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고이치는 이곳에 오는 도중에도 그에게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에 이 근처에 <썬라이즈>라고, 다방이 있었지요?" 고이치가 물었다.
커피를 내리며 마스터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이윽고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어. 그래, <썬라이즈> 다방. 요 앞 빌딩에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없어." 의미심장하게 입가를 헤실헤실 풀었다.
"바로 그 사건으로 망해버린 거죠?" 고이치는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렇지. 그 사건 때문에 망했지. 잘 아는데? 그때는 우리도 여간 힘들었던 게 아냐. 우리 가게에서도 그런 짓을 한 거 아니냐고 자꾸 다그치는 통에."
다이스케가 고이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뭐야. 그 사건이라는 게?"
"나중에 알려줄게."
내준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며 고이치는 복잡한 마음에 쫓기고 있었다. 마침내 도가미 마사유키와 <아리아케>의 접점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씁쓸한 추억과도 이어져 있었다.
4년 전, 요코하마에서 사설 도박단이 적발되었다. 그 고객 리스트에는 아리아케 유키히로라는 이름도 있었다.
그 사설 도박단이 사용했던 곳은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는 다방이었다. 그 텔레비전으로 손님에게 경마 중계를 보여주면서 도박판 주인은 마권을 팔아먹었던 것이다. 그 다방의 이름이 <썬라이즈>였다는 건 당시의 신문기사에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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