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밤

비밀/히가시노 게이고 (2)

개미남 | 2019.06.19 16:18:35 댓글: 0 조회: 746 추천: 0
분류추리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3939864
비밀/히가시노 게이고


2.
익숙하지 않은 눈길을 운전하면서 나가노 시내에 있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6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회사에 연락하고 병원의 위치를 확인하느라 출발이 늦어진 것이다. 3월이라고는 하지만 주차장 한쪽 구석에는 잿빛으로 변한 눈이 녹지 않은 채 거무칙칙하게 남아 있었다. 헤이스케는 수북하게 쌓여 있는 그 눈더미에 범퍼를 조금 들이밀어 차를 세웠다.
"제부!"
병원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처형인 요코가 다급히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청바지에 스웨터를 걸쳐 입고, 화장은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요코는 남편과 함께 친정의 메밀국수 가게를 이어받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인사도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어때요?"
요코에게는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전화를 걸어두었다. 그녀도 사고 소식을 접하고 몇 번인가 전화를 걸었지만, 그가 귀가하지 않은 바람에 연락이 되지 않은 것이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 수술하고 있지만요."
여느 때는 목욕탕에서 막 나온 것처럼 혈색이 좋은 요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린 것을 그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요‥‥‥?"
기다란 의자가 늘어서 있는 대합실 쪽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장인인 사부로와 요코의 남편인 도미오였다.
사부로는 주름진 얼굴을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뜨리면서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보게.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이. 내가 장례식에 참석하란 말만 안 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모두 다 내 책임일세."
원래 체구가 작고 바싹 마른 사부로는 한층 더 위축되어 금방이라도 땅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30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즐겁게 메밀국수를 만드는 모습은 지금의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시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두 사람만 보낸 저에게도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죽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요. 아버지. 지금은 두 사람이 살아니기를 기도해요."
그때 헤이스케의 시야 끝에 새하얀 것이 들어왔다. 복도 모퉁이에서 의사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 선생님! 두 사람은 어때요?"
요코가 종종걸음으로 그 의사에게 뛰어갔다. 아무래도 그 의사가 아내와 딸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말씀이죠‥‥‥."
입을 뗀 의사의 시선이 헤이스케를 향했다.
"남편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긴장 때문인지 목소리가 칼칼하게 쉬어 있었다.
"잠시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의 온몸을 바늘 끝으로 찌르는 날카로운 긴장이 파고들었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의사의 뒤를 따라갔다. 의사가 안내한 곳은 두 사람이 치료를 받고 있는 병실이 아니라 작은 진찰실로, 뢴트겐 사진이 몇 장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 절반은 머리를 찍은 것이었다. 아내의 것인지 딸아이의 것인지, 두 사람의 것이 섞여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사람의 것인지, 헤이스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대단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의사는 팔짱을 끼고 입을 열었다. 말투에서 깊은 고뇌의 빛이 배어나왔다. 헤이스케는 의사에게 똑바로 시선을 고정한 채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죠? 아내입니까, 딸입니까?"
의사는 그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고 그에게서 눈길을 돌린 상태로 잠시 망설였다. 그는 그때서야 사태를 짐작했다.
"두 사람 다‥‥‥ 위험한가요?"
의사가 보일 듯 말 듯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외상은 아주 심합니다. 등에는 수도 없이 유리조각이 박혀 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심장까지 도달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피를 많이 흘려서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이제 남은 것은, 그 기적적인 체력이 언제까지 유지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회복하기를 바랍니다만."
"딸은 어떻습니까?"
의사는 혀로 입술을 핥고 나서 말을 꺼냈다.
"따님에게서는 거의 이렇다 할 만한 외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온몸에 압박을 받아 호흡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뇌가 영향을 받아‥‥‥."
"뇌‥‥‥."
벽 쪽에 늘어선 두개골의 뢴트겐 사진이 헤이스케의 눈을 파고들었다.
"결국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현재 인공호흡기를 부착해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대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의사는 애써 감정을 억제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곧, 식물인간이 된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온몸의 피가 갑자기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헤이스케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아교를 뿌린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져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은 바들바들 떨리고 어금니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다음 순간,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에게는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진정하십시오‥‥‥."
의사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자마자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선생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들은 살아야 합니다. 만약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습니다. 그 두 사람의 목숨과 바꿀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테니까‥‥‥. 제발 부탁합니다."
그는 리놀륨 바닥에 이마를 대고 간곡하게 호소했다.
"이러지 마시고 고개를 드세요."
"선생님! 안자이 선생님!"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헤이스케 옆에 있던 의사가 문쪽으로 걸어갔다.
"왜 그러는가?"
"두 사람 가운데, 아주머니 맥박이 갑자기 약해졌어요."
헤이스케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아주머니라는 말은, 아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알았어. 지금 곧 가지."
의사는 그렇게 말한 다음 그를 돌아보았다.
"가족들이 있는 곳에 가 계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선생님."
그는 의사의 등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대합실로 돌아가자 요코가 즉시 옆으로 달려왔다.
"제부. 의사 선생님께서 뭐라고 그러세요?"
그는 이런 때일수록 다부진 면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게‥‥‥ 별로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아!"
요코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부로와 도미오도 고개를 떨구었다.
"헤이스케 씨. 헤이스케 씨!"
간호사가 황급히 뛰어오며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께서 찾고 있어요.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아내가요?"
"어서요!"
그는 간호사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간호사는 집중치료실 앞에 멈추어 서서 문을 열었다.
"남편 분께서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시라고 해요."
병실 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어두운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는 간호사의 재촉을 받고 병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은 것은 두 개의 침대였다. 오른쪽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사랑스런 딸 모나미였다. 잠을 자는 듯한 그 아이의 얼굴은 집에서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눈을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부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딸아이의 몸에 부착되어 있는 싸늘한 느낌의 의료장비들이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게다가 왼쪽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는 첫눈에 절망적인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과 머리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의사들이 그에게 길을 비켜주는 것처럼 살며시 침대에서 떨어졌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내는 몸과는 달리 눈을 감고 있는 얼굴에는 뜻밖에도 아무 상처가 없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오코! 이름을 부르려고 입을 연 순간, 아내의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올려졌다. 그 움직임도 연약하게 느껴졌다. 이어서 입술이 보일락 말락 움직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헤이스케는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모나미의 생사를 알고 싶은 것이다.
"괜찮아. 모나미는 걱정 말아."
그는 아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의 표정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아내의 입술이 다시 떨리는 것처럼 파르르 움직였다. 보고 싶어요‥‥‥.
"그래. 지금 만나게 해줄게."
몸을 숙여 침대 다리에 이동용 바퀴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침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사 한 사람이 말리려고 하는 간호사를 제지했다.
그는 아내의 침대를 움직여 딸아이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딸의 오른손을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여보. 모나미야."
그는 마주 쥐어준 두 사람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쌌다. 아내의 입술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성모 마리아의 따뜻한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모나미의 손을 잡고 있는 아내의 손에서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아내의 손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이 빠져 스르르 미끄러졌다. 그는 깜짝 놀라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나와 뺨을 타고 떨어졌다. 그런 다음 마지막 일을 끝낸 사람처럼 천천히 눈을 감았다. 헤이스케는 마치 짐승처럼 처절하게 소리쳤다.
"여보! 여보!"
의사가 나오코의 맥박을 확인하고 동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계를 쳐다보며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책을 읽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임종하셨습니다. 오후 6시 45분입니다."
"아‥‥‥ 아아아."
그는 다만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갑자기 무거운 것이 어깨를 짓누르기라도 하듯 무릎을 꺾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싸늘하게 식어가는 아내의 손을 잡은 채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마치 밑도 끝도 없는 우물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의사나 간호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매단 듯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그는 엉거주춤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용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한탄할 때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달랬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보다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헤이스케는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고 조금 전까지 아내에게 잡혀 있던 모나미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모나미를 지켜야만 한다. 설사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여보. 반드시 살려내겠어. 모나미는 내가 지킬 테니까 걱정 말고 편히 잠들어.'
그는 마법의 주문을 외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면 모든 슬픔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딸아이가 깨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손으로 곱디고운 딸아이의 손을 감쌌다. 손에 힘을 주고 싶었지만, 열한 살인 딸아이의 손은 부스러질 것처럼 연약하고 가냘팠다. 가만히 눈을 감자 수많은 영상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모두 즐거운 추억뿐이었다. 기억 속에서는 아내도 딸아이도 환한 웃음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몇 방울인가 자신가 딸아이의 손에도 떨어졌다.
바로 그때!
그는 자신의 손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 눈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안에서 무엇인가 움직인 듯한 느낌이 듯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딸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인형처럼 잠들어 있던 모나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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