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2권 23~24

나단비 | 2024.03.06 07:27:06 댓글: 2 조회: 517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1950
23

라벤더의 사랑 이야기





어느 12월의 금요일 오후 앤이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메아리 집’에가야겠어요.”

“눈이 내릴 것 같은데.”

마릴라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눈이 내리기 전에 도착할 텐데요, 뭘. 오늘 밤에는 거기서 잘 생각이에요. 다이애나는 손님이 와서 갈 수 없대요. 라벤더 아주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거기 다녀온 지가 2주일이나 되었거든요.”

지난 10월 라벤더를 처음 만난 이후로 앤은‘메아리 집’에여러 번 방문했다. 다이애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큰길로 가기도 했고, 가끔씩은 숲 속 길을 걸어서 가기도 했다. 다이애나가 갈 수 없을때는 앤 혼자서 갔다. 앤과 라벤더 사이에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가슴속에 싱그러운 젊음을 간직한 중년의 여인과, 아직 어리지만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상상력과 직관력을 갖춘 젊은 여자 사이에나 가능한 깊은 우정이 싹텄다. 앤은 진정으로 영혼이 통하는 또 다른 친구를 찾았고, 외로운 삶을 살고 있던 이 작은 여인은 앤과 다이애나가 가져온 유쾌하고 건강한 즐거움을 얻었다. 둘은 세상을 잊어버리고 세상으로부터 잊힌 라벤더가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젊음과 현실감을 이 작은 돌집에 불러다 주었다. 샬로타 4세도 언제나 활짝 웃으며 둘을 기쁘게 맞아주었다. 샬로타 자신도 반가웠지만 숭배하는 주인이 기뻐할 일을 생각해 둘이 나타나면 입이 귀에 가 붙어버릴 만큼 환한 미소로 반겼다. 그해 가을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11월인데도 10월이 다시 왔나 싶게 좋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 작은 돌집에는 전에 없이 높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12월이 왔는데도 햇빛과 여름의 그림자가 물러갈 줄을 모르고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날은 때가 겨울이란 것이 갑자기 기억이라도 났는지 어느 순간 흐릿하고 음산한 날씨로 둔갑해버렸다. 바람도 없었고 곧 눈이라도 내릴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앤은 온통 회색의 미로처럼 변한 너도밤나무 숲 속을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갔다. 혼자 걷는 길이라도 상상으로 불러낸 유쾌한 길동무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길을 가고 있어서 쓸쓸하지 않았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원하는 얘기만 할 수 있어서 대화가 현실 세계의 대화보다 더 재미있고 더 풍요롭기조차 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숲을 지나 전나무 오솔길에 이르렀을 때 커다란 깃털 같은 눈송이가 조용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모퉁이 길에서 앤은 키가 크고 가지를 넓게 뻗고 있는 전나무 아래 서 있는 라벤더를 만났다. 따뜻해 보이는 선명한 붉은색 옷 위에 은빛이 감도는 회색 실크 숄을 걸치고 있었다.

“전나무 숲에 사는 여왕 요정 같아요.”

앤이 감탄의 말로 반갑게 인사했다.

“난 앤이오늘 밤꼭 올 줄 알았어.”

라벤더가 앞으로달려 나오며말했다.

“오늘은 앤이 와주어서 특히나 더 기뻐. 샬로타 4세도 없거든. 어머니가 병이 나서 집에 갔어. 앤이 와주지 않았으면 몹시 외로웠을 거야. 상상과 메아리만으로는 내 외로운 마음을 다 채울 수가 없을 것 같았거든. 오, 앤은 오늘 너무나 예뻐.”

크고 날씬한 몸매에 걷느라 얼굴이 장밋빛으로 상기된 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라벤더가 말했다.

“얼마나 젊고 얼마나 예쁜지 모르겠어! 열일곱 살은 너무나 좋은 나이야. 너무 부러워.”

라벤더가 자기감정을 솔직히 드러냈다.

“라벤더 아주머니도 마음은 열일곱 살이잖아요.”

앤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난 늙었어. 아니, 중년의 나이지. 그건 더 나빠.”

라벤더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가끔씩은 나도 내가 그렇게 늙지 않은 척할 수 있어. 하지만 곧 현실을 깨닫고 말지. 난 이런 현실과나 자신이 타협할 수 없을 때가 많아. 처음으로 내 머리에서 흰 머리칼을 발견했을 때는 저항을 해보기도 했지. 오, 앤, 나를 이해할 수 있다는 눈빛으로 보지 마. 열일곱 살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지금은 나도 열일곱이라고 생각할 거야. 앤은 항상 선물처럼 젊음을 들고 오니까. 함께 즐거운 저녁을 보내자고. 우선 차를 마셔야지. 무얼 먹고 싶어? 뭐든 먹고 싶은 걸 먹자고. 뭐가 맛있고 소화가 잘될까?”

그날 저녁 이 작은 돌집에는 유쾌하고 떠들썩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요리를 하고 캔디를 만들며, 먹고 웃고 떠들며, 공상을 진짜인 척, 마흔다섯 살이나 먹은 독신녀인 라벤더와 얌전한 학교 선생님인 앤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일일지 모르지만 둘은 그렇게 신나게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둘 다 지쳐버렸을 때는 응접실 벽난로 앞에 깔린 깔개 위에 앉아 쉬었다. 방 안에는 벽난로 불빛이 은은하게 퍼져 있고 벽난로 위에 둔 장미꽃 꽃병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밖에서는 강한 바람이 소리 내며 휘몰아쳤고 무수한 눈보라의 요정들이 집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문을 두드리듯 눈이 창문에 와 부딪혔다.

“앤이 있어 너무 좋아.”

라벤더가 사탕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앤이 여기 없었다면 난 우울했을 거야. 너무 우울해서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공상도 낮에 햇빛이 반짝일 때나 효과가 있는 거지, 어두워지고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아무 소용이 없거든. 그때면 진짜가 간절히 필요해. 앤은 이런 심정을 모를 거야. 열일곱이면 알 수 없지. 열일곱에는 꿈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거든. 게다가 꿈이 이루어지도록 서두를 필요도 없고. 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는 앤, 내가 마흔다섯이 되리라고 생각도 못 했어. 내 인생을 채울 일이라고는 꿈밖에 없는 백발의 노처녀가 될 줄은.

“하지만 라벤더 아주머니는 노처녀가 아니에요. 노처녀는 태어나는 거지……. 노처녀가 되어가는 게 아니라고요.”

앤이 라벤더의 생각에 잠긴 나무 색깔 눈을 보며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노처녀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애써 노처녀 자리를 얻었고, 어떤 사람들은 또 저절로 노처녀가 되어버렸겠지.”

라벤더가 앤의 말을 재치 있게 받았다.

“그럼 아주머니는 애써서 노처녀 자리를 얻은 사람이에요. 너무 아름답게 노처녀가 되어 노처녀들이 모두 따라하겠다고 나설 것 같은걸요.”

앤이 웃었다.

“난 모든 일을 기왕이면 최선을 다해서 잘하려고 해. 그래서 노처녀로 살아야만 된다면 괜찮은 노처녀가 되자고 작정했지. 사람들은 내가 별나다고 하지만 그건 내가 노처녀로서 나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지. 앤, 누가 스티븐 어빙과 나에 관해 얘기를 해주지 않던가?”

라벤더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네, 어빙 씨와 약혼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앤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랬지, 25년 전에. 아주 오래전 일이야. 그때 우리는 다음 해 봄에 결혼하기로 약속했었지. 내 웨딩드레스까지 만들어두었었지. 어머니와 스티븐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우리는 평생 약혼해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였어. 우리가 어렸을 때 스티븐 어머니가 스티븐을 데리고 우리 어머니를 만나러 왔었어. 우리가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스티븐이 아홉 살이고 나는 여섯 살이었지. 스티븐이 정원에서 내게 자기는 크면 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어. 난 ‘고마워.’ 하고 말했지. 그리고 그 애가 가고 나서 난 우리 어머니한테 아주 진지하게 내 마음의 걱정거리가 없어졌다고 말했어. 노처녀가 될까 봐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내 말을 듣고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웃었는지!”

“그런데 왜 잘못된 거죠?”

앤이 거의 숨을 멈춘 채 물었다.

“별일도 아닌 걸로 좀 다투었을 뿐이야.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짓이었지. 너무 흔한 다툼이어서, 못 믿겠지만 지금은 그 다툼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 기억도 안 나. 누구 잘못인지도 잘 모르겠어. 아마 스티븐이 시작을 했고, 난 바보스럽게 스티븐을 더 화나게 했었던 것 같아. 경쟁자가 한둘 있었거든. 나는 아주 허영심이 많았고 그 사람 애를 태워주고 싶었어. 그 사람은 아주 흥분을 잘하고 예민한 사람이었지. 우리는 그렇게 둘 모두 화를 내며 헤어지고 말았어. 하지만 난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라고 믿었어. 그리고 스티븐이 그렇게 빨리 내게 돌아오지만 않았다면 별일 없었을지도 몰라. 그런데 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너무나 안타까워.”

라벤더가 살인죄를 고백하려는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난 정말이지 끔찍하게 골을 잘 내는 사람이었거든. 어머, 그렇게 웃지 마, 정말이니까. 난 정말 잘 삐친다고. 스티븐은 내가 아직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골을 내고 있을 때 돌아왔어. 난 그 사람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용서하지도 않았어. 그래서 그 사람을 영원히 가버리게 만든 거지. 다시 돌아오기에는 그 사람은 자존심이 너무 강했어. 그리고 그때 난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골을 냈지.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소식을 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그 사람처럼 나도 역시 자존심이 강했거든. 그 자존심과 골을 잘 내는 성질이 합해져 이런 결과를 만들어버린 거지. 앤, 하지만 난 다른 사람에겐 관심이 없었어.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스티븐 어빙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할 바에야 천 년이라도 노처녀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모든 것이 이제는 꿈처럼만 느껴져. 앤, 그렇게 동정하는 눈길로 보지 마. 열일곱이니까 그렇게 안됐다는 표정을 할 수도 있는 거지만. 그렇지만 너무 지나치게 마음 쓸 건 없어. 사랑의 상처는 있지만 나도 나름대로 행복하고 만족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스티븐 어빙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정말로 가슴이 아팠어. 하지만 앤, 현실 속에서의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은 소설에서처럼 그렇게 무서운 것이 아니야. 그리 낭만적인 비유는 못 되지만 이가 쑤시고 아픈 것 같은 거지. 통증이 계속될 때는 잠을 못 이루는 날도 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안한 날도 있어. 즐겁게 생활해나가고 꿈도 꾸고 메아리와 땅콩사탕도 즐기지. 이제 실망했다는 표정을 짓는군. 5분 전만 해도 내가 슬픈 추억을 가슴에 안은 채 겉으로만 미소를 짓고 있는 비극의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절반도 재미가 없다는 표정이야.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인생의 잔인한 면인 동시에 좋은 점이기도 해, 앤. 삶은 우리를 언제나 비참하게 내버려두지만은 않는다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고, 그렇게 살 수 있어. 내가 아무리 불행하고 낭만적인 기분에 젖어 있으려고 해도 소용없어. 이 사탕은 참 맛있지?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지만 그래도 더 먹어, 우리.”

잠깐 침묵을 지킨 후 라벤더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앤이 처음 여기 왔던 날 스티븐의 아들 이야기를 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어. 그 뒤 한 번도 그 아이를 물어볼 수 없었지만 사실은 그 애가 어떤 아인지 궁금해. 어떤 아이지?”

“제가 본 아이 중에 가장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예요, 라벤더 아주머니. 그 애는 우리처럼 상상하기를 좋아하고 상상한 것을 진짜처럼 생각하죠.”

“만나보고 싶어, 앤. 여기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내 꿈속의 아이들과 닮았는지 궁금해.”

라벤더가 혼잣말처럼 나직이 중얼거렸다.

“폴을 보고 싶다면 제가 한번 데리고 올게요.”

앤이 말했다.

“응, 그랬으면 좋겠어. 하지만 너무 빨리는 말고. 우선은 생각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에. 스티븐을 꼭 빼닮았어도, 전혀 닮지 않았어도 기쁨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느낄 것 같아. 한 달쯤 후에 데려와 줘.”

그 말에 따라 한 달 후에 앤과 폴은 숲길을 걸어 돌집으로 향했고 오솔길 중간에서 라벤더를 만났다. 전혀 예기치 못하고 있다가 폴을 본 라벤더는 그만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아이가 스티븐의 아들이군.”

라벤더는 폴의 손을 잡고 멋진 털가죽 외투와 모자를 쓴 귀여운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빠를 많이 닮았구나!”

“모두들 제가 아빠를 쏙 빼닮았대요.”

폴이 처음 본 사람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숨을 죽이고 이 장면을 지켜보던 앤은 라벤더와 폴이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된 분위기도 아니었고 서로불편해하지도 않았다. 꿈과 낭만에 젖어 산다 해도 라벤더는 지각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좀 감정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지만 곧 명랑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폴을 대했다. 셋이서 함께 즐거운 오후를 보냈고 저녁 식사로는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어 어빙 부인이 보았더라면 폴의 위장 걱정을 하며 비명을 질러댔을 것이다.

“또 놀러 오너라.”

라벤더가 폴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저한테 입을 맞추어도 돼요.”
폴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라벤더가 몸을 숙이고 폴에게 입을 맞추었다.

“내가 너한테 입을 맞추고 싶은지 어떻게 알았지?”

라벤더가 속삭이듯 물었다.

“우리 엄마가 저한테 입 맞추고 싶어 할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아줌마가 절 쳐다봤잖아요. 보통은 누가 저한테 입을 맞추면 싫지만,남자아이들은 다 그래요. 하지만 아줌마는 저한테 입을 맞추어도 돼요. 그리고 물론 다시 놀러 올게요. 아줌마도 제 특별한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아줌마가 싫지 않다면요.”

“싫다니, 난 물론 좋단다.”

라벤더가 그렇게 말을 한 다음 몸을 돌려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순간 창문으로 밝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라벤더 아줌마가 맘에 들어요. 저를 바라볼 때 눈빛도 좋았고 그 돌집과 샬로타 4세도 좋아요. 우리 할머니에게도 메리 조 누나 대신 샬로타 4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샬로타 4세라면 제 생각을 말해줘도 제 머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저녁 식사도 정말 맛있지 않았나요? 할머니는남자아이가 먹을 거나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굉장히 배가 고플 때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있잖아요, 선생님, 라벤더 아줌마라면 싫다는데도 억지로 아이에게 죽을 먹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이가 먹고 싶다는 것을 만들어주지요. 물론 아이를 위해 썩 좋은 일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따금씩은 괜찮겠죠?”

폴이 너도밤나무 숲을 걸어가며 말했다. 폴은 참 영리한 아이였다.



24

일기 예보가 에이브 씨





5월의 어느 날 샬럿타운의 <데일리 엔터프라이즈> 신문에 실린 필자가 ‘관찰자’로 되어 있는 ‘에이번리 소식’을 보고 에이번리 사람들은 찰리 슬론이 이 기사를 쓴 게 틀림없다고들 수군댔다. 그 이유로 찰리 슬론이 전에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는데다 그 기사 속에 길버트 블라이드를 은근히 비웃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었다. 에이번리의 젊은이들은 길버트 블라이드와 찰리 슬론이 어느 잿빛 눈을 가진 상상력이 풍부한 아가씨를 사이에 두고 경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문이란 것이 으레 그렇듯이, 이 소문 역시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 기사는 앤의 부추김과 도움을 받아 길버트가 쓴 것이었으니까. 길버트 블라이드는 몇 편의 기사를 썼는데 그중 하나에 자신을 맹목적인 인물로 그렸다. 길버트가 낸 ‘에이번리 소식’ 기사 중에서 이 장과 관련된 것은 다음의 두 기사이다.

소문에 따르면, 데이지가 피기 전에 우리 마을에 결혼식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마을로 새로 이사 온 존경받는 한 신사가 우리 마을의 친애하는 숙녀 한 분과 화촉을 밝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유명한 날씨 예언가 에이브 씨는 5월 23일 저녁 정각 7시부터천둥 번개와 함께 우레 같은 소나기가 쏟아질 거라고 예고했다. 이 폭풍우는 프린스에드워드 섬 전역으로 퍼질 것이니 그날 저녁 외출할 사람은 필히 우산과 비옷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에이브 아저씨는 봄에 폭풍우가 올 거라고 정말로 예언을 했어. 근데 해리슨 아저씨가 정말로이사벨라앤드루스와 사귀는 걸까?”

길버트가 앤에게 말했다.

“아니야. 해리슨 아저씨는 앤드루스 아저씨와 체스를 하러 가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린드 아주머니는이사벨라앤드루스가 올봄에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걸 보면 결혼을 할 모양인 게 분명하다고 말씀하셔.”

앤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가여운 에이브 씨는 이 기사를 보고 분개했다. ‘관찰자’가 자기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는 폭풍우가 올 특정한 날짜를 댄 적은 없다고 화가 나서 사람들에게 변명하고 다녔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에이번리의 생활은 특별한 일 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개선회에서는 식목일을 정해나무 심기를 실행에 옮겼다. 개선회원 한 사람이 다섯 그루씩 관상용 나무를 심기로 하고 이 일을 시작했으니 40명이나 되는 회원이 심은 나무를 모두 합하면 이백 그루나 되었다.

황토밭에는 이른 귀리가 파릇파릇하게 자라기 시작했고, 농장 집 근처 사과 과수원에는 사과꽃이 만발했으며 동쪽 방 창밖의 눈꽃 여왕도 흐드러지게 핀 꽃으로 몸단장을 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새색시 같았다.

앤은 밤새도록 창문을 열어놓은 채 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벚꽃 향기를 맡으며 잠을 잤다. 앤은 이렇게 잠을 자는 것이 시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마릴라는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성화를해댔다.

“추수감사절은 봄에 있어야 해요.”

어느 날 밤 마릴라와 함께 문가 돌층계에 앉아 달콤한 개구리 합창 소리를 들으며 앤이 말했다.

“모든 것이 시들어가고 잠자는 11월보다 5월이 훨씬 나아요. 11월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잊기 쉽지만 5월에는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잖아요. 모든 것이 싱싱하게 살아 있으니까요.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덴동산에 살던 이브도 지금 제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요? 저 분지에 자라고 있는 저 풀은 초록색일까요, 황금색일까요? 온통 꽃으로 가득하고 바람도 정말 기분 좋게 불어오는 아름다운 날이에요. 천국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요?”

앤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마릴라가 쌍둥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자 걱정스러운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데이비와 도라가 집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나는 밤이지?”

데이비가 즐거운 듯 코를 킁킁거리고 더러운 손으로 괭이를 휘두르며 말했다. 데이비는 지금까지 자기 정원에서 일을 하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데이비가 흙장난을 너무 좋아해서 지난봄에 마릴라가 뜰한구석을 쌍둥이에게 조금씩 떼어주었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유익한 방향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하려고 둘이 자기 정원을 가꾸어보도록 한 것이다. 두 아이는 자기들 성격대로 열심히 정원을 가꾸었다. 도라는 차분하게 씨를 뿌리고 잡풀을 뽑고 물을 주면서 정성스럽고 체계적으로 일을 했다. 그 결과, 도라의 정원은 이미 채소와 일년생 화초가 단정하고 보기 좋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는 열성적으로 뜰을 가꾸는 것 같기는 했지만 영 계획성이 없었다. 괭이로 갈고 흙을 파고 물을 주고 이리저리 옮겨 심으며, 너무 열심히 일을 해 오히려 씨앗이 싹을 틔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네 정원은 어떻게 돼가고 있니, 데이비?”

앤이 물었다.

“잘 자라질 않아. 왜 나아지질 않는 건지 모르겠어. 밀티 볼터 말로는 내가 달 뒤쪽에서 씨를 뿌려서 그렇대. 씨를 뿌리거나 돼지를 잡거나 머리를 깎는 것처럼 중요한 일을 할 때는 달을 잘 살펴서 해야 한다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궁금해.”

데이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얼마나 자랐는지 본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잡아 뽑지만 않으면 식물들도 잘 자랄 거야.”

마릴라가 데이비 탓을 했다.

“난 여섯 개만 뽑아보았단 말이에요.”

데이비가 항의했다.

“뿌리에 벌레가 붙어 있나 보려고요. 밀티 볼터가 달 때문이 아니라면 벌레 때문이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벌레는 한 마리밖에 없었어요. 굉장히 크고 통통한 벌레가 둥글게 몸을 말고 있었어요. 돌 위에 놓고 다른 돌로 납작해질 때까지 짓이겨줬죠. 그놈을 짓이기는 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요. 더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도라 것도 나랑 같은 날에 심었는데 잘 자라는 것을 보면 달때문은 아닌 것 같아요.”

데이비가 생각을 좀 해보더니 그렇게 결론을 냈다.

“아주머니, 저 사과나무 좀 보세요. 꼭 사람 같아 보여요. 기다란 팔을 뻗어 분홍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에요. 예쁜 자기 모습을 칭찬해주길 기다리면서요.”

“저 노란 사과나무는 늘 열매를 잘 맺어주지. 올해도 잔뜩 달릴 거야. 고마운 일이지. 파이를 만들 수 있으니까.”
마릴라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마릴라도 앤도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도 그해에는 노란 사과로 파이를 만들지 못할 운명에 처했다.

5월 23일이 되었다. 때 아닌 더위로 앤과 에이번리 학교 교실에 모여 앉은 학생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분수를 풀고 문법과 씨름하느라 여느 사람들보다 더위를 더 심하게 느꼈다. 오전 중에는 내내 후텁지근해도 그나마 바람이 불었으나 오후가 되자 바람은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3시 30분쯤 앤은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들었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얼른 공부를 끝냈다. 모두들 운동장으로 나가자 아직 해가 밝게 빛나는데도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애너터벨이 불안한 듯 앤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 저 무서운 구름 좀 봐요!”

앤은 저도 모르게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서북쪽에서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구름 덩어리가 엄청난 속도로 몰려오고 있었다. 끝이 말려 올라간 듯 가장자리만이 흰색이었고 온통 섬뜩할 정도로 시커먼 구름이었다. 맑은 하늘을 검게 뒤덮은 구름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심이 일었다. 이따금씩 검은 구름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였고, 이어서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렸다. 구름이 너무 낮게 걸려 있어 언덕 꼭대기 나무에 금세 닿을 것만 같았다.

하먼 앤드루스 씨가 덜커덩거리는짐마차를 전속력으로 몰고 언덕을 달려 올라와 학교 앞에서 말을 세웠다.

“앤, 에이브 아저씨가 평생 단 한 번 일기예보를 맞춘 모양이야. 폭풍우가 조금 이르게 다가오고 있어. 저런 구름 본 적 있어? 자, 얘들아, 나랑 같은 방향으로 가는 애들은 모두 마차에 올라타라. 집이 먼 아이들은 모두 우체국으로 달려가서 소나기가 멎을 때까지 기다리고.”

앤은 데이비와 도라의 손을 잡고 언덕을 달려 내려가‘자작나무 길’을 지나고‘제비꽃 골짜기’와‘버드나무 연못’을 지나, 두 아이의 작은 다리로 달릴 수 있는 한 힘껏 달렸다. 이들이‘초록 지붕 집’에 도착했을 때 마릴라는 문가에서 오리와 닭을 우리로몰아넣는중이었다. 모두들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 마치 거인이 나타나 입김을 후 불어 불을 꺼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에서 빛이 사라져 버렸다. 두꺼운 구름이 해를 덮어 온 세상이 갑자기 깜깜해져 버린 것이다. 이어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지게 번갯불이번쩍하더니엄청난 천둥소리와 함께 세찬 우박이 쏟아져 내려 세상을 곧 흰색으로 뒤덮어버렸다.

미친 듯 쏟아지는 폭풍우로 끊어진 나뭇가지가 창문에 와 철썩부딪히면서쨍그랑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단 3분 만에 북쪽과 서쪽 유리가 한 장도 남김없이 모조리 깨져버렸다. 그 통에 쏟아져 들어온 우박이 마룻바닥을 온통 뒤덮어버렸다. 가장 작은 우박이 달걀만큼이나 컸다. 폭풍은 한 시간쯤 휘몰아쳤고 그 기세는 누구도 평생 잊지 못할 만큼 무서웠다. 마릴라마저도 태어나 처음으로 이성을 잃고 무서워서 덜덜 떨며 부엌 한구석에 놓인 흔들의자 옆에꿇어앉아귀청이 터질 듯한 천둥소리에 울음을 터트렸다. 앤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지만 그래도 소파를 창가에서 안쪽으로 당겨와 양팔에 쌍둥이를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첫 번째로 와장창 창문 깨지는 소리에 데이비가 소리를 질렀다.

“누나, 누나, 오늘이 최후의 심판 날인 거야? 누나, 누나, 난 절대로 일부러 말썽을 부리는 게 아냐.”

그러고는앤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버린 채 몸을 덜덜 떨었다. 도라도 얼굴이 창백해지긴 했지만 앤의 손을 꼭 쥐고 그래도 차분하게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대도 도라의 마음을 흔들어놓지는 못하리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보였다.

마침내 처음 일기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폭풍우가 그쳤다. 우박이 멎고 천둥도 동쪽으로 물러났으며 태양이 밝고 찬란하게 세상 위로 작열했다.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마릴라는 아직도 몸을 덜덜 떨며 가까스로 일어나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얼굴이 해쓱하니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모두들 무사하니?”

마릴라가 태연한 척 말했다.

“그럼요, 무사하지요. 너무 갑자기 몰아쳤으니 처음에는 조금 놀랐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아까는 월요일에 테디 슬론과 결투하기로 약속한 것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역시 해야겠어요. 도라, 너는 무서웠니?”

다시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데이비가 활기차게 말했다.

“그럼, 나도 좀 무서웠어. 하지만 앤 언니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계속했더니 괜찮았어.”

도라가 새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기도 생각이 났더라면 했을 텐데. 나는 기도도 하지 않았지만 너랑 똑같이 무사하잖아.”

데이비가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앤은 마릴라에게 효능이 강력한 과실주를 한 잔 가득 따라 갖다 주었다. 효과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어릴 적 실수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그러고는모두 문 앞으로 나가 전혀 딴 세상이 되어버린 바깥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온통 무릎까지 잠길 정도의 우박으로 새하얗게 뒤덮여버렸고, 추녀 밑이며 층계에도 우박이 산처럼 쌓였다. 하지만 우박이 녹은 3~4일 뒤에야 그 참담한 피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밭이며 뜰에서 자라던 작물과 식물이 남김없이 전멸당했고 사과나무는 꽃이 다사라졌을뿐더러큰 가지 작은 가지 할 것 없이 모조리 꺾여버렸다. 개선회원들이 심은 이백 그루의어린나무들도 대부분 뿌리째 뽑혀버렸거나 갈기갈기 찢겨버렸다.

“이게 한 시간 전과 같은 세상이야? 겨우 한 시간 만에 이렇게 황폐해질 수 있는 거야?”
앤이 황망히 말했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이런 일은 없었어, 한 번도. 내가 어렸을 때도 심한 폭풍우가 치긴 했지만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 피해 소식이 어마어마할 거 같다.”
마릴라가 말했다.

“아이들이 폭풍우를 만나지 않았어야 할 텐데.”

앤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나중에 안 바로는 집이 먼 아이들은 앤드루스 씨의 현명한 충고대로 모두 우체국으로 몸을 피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난 아이는 없었다.

“저기, 존 헨리 카터가 오는구나.”

마릴라가 말했다.

존 헨리는 좀 겁이 난 얼굴이긴 했지만 이가 드러나게 웃으며 우박을 헤치고 걸어왔다.

“아이고, 정말이지 굉장했지요, 커스버트 아주머니? 해리슨 아저씨가 이 집 사람들이 모두 무사한지 보고 오라고 해서 왔어요.”

“우리는 모두 무사해. 부서진 건물도 없고. 거기도 다 무사한가?”

마릴라가 얼굴을 펴지 못한 채 물었다.

“무사하지 못해요. 벼락을 맞았거든요. 벼락이 굴뚝을 타고 똑바로 마루 한가운데로 떨어졌어요. 진저의 새장을 때리고 바닥에 구멍을 뚫어 지하실로 쏙 들어가 버렸죠.”
“진저가 다쳤어요?”

앤이 물었다.

“그럼요. 굉장히 심하게 다쳐서 그만 죽어버렸는걸요.”
앤이 곧 해리슨 씨를 위로하려고 가보니 해리슨 씨는 탁자 앞에서 죽은 진저의 몸을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여운 진저가 이젠 앤의 흉을 볼 수도 없게 되었어.”
해리슨 씨가 슬프게 말했다.

앤은 자신이 진저를 위해 울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눈에서 눈물이흘러나왔다.

“나한테는 이놈밖에 없었는데. 앤, 이제 이놈이 죽어버렸어. 이런 일로 이렇게 슬퍼하다니 내가 늙긴 늙었어. 슬퍼하지 말아야 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안됐다느니 하는 말로 나를 위로할 생각일랑 말아. 그런 말을 들으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르니까. 이건 정말 엄청난 폭풍우였지? 이제 아무도 에이브 씨의 예언을 비웃지 못할 거야. 평생 예언했던 폭풍우가 한꺼번에 몰려온 모양이야. 그나저나 어떻게 날짜까지 맞췄지? 여기 이 꼴 좀 보라고. 판자를 찾아다가 이 바닥에 난 구멍을 막아야겠어.”

다음 날까지도 에이번리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서로를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피해를 비교하고 다녔다. 길은 우박 때문에 마차가 지나다닐 수 없어서 걷거나 말을 타고 다녀야 했다. 그날 저녁 늦게 안 좋은 소식들이 섬 전체에서 들려왔다. 집이 벼락에 맞았다느니,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느니,일상 업무가모두 마비될 정도였다. 목장에 나와 있던 어린 가축들도 모두 몰살을 당했다.

그날 아침 일찍 에이브 씨는 우박을 헤치며 대장간으로 가서 온종일 거기 있었다. 에이브 씨에게는 승리의 시간이었고, 마음껏 이 승리를 즐겼다. 폭풍우가 몰아쳐 에이브 씨가 기뻐했다고 말한다면 에이브 씨에게 공정치 못한 일이 되겠지만 자기가 폭풍우를 날짜까지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사실이 매우 기뻤다. 에이브 씨는 자기가 날짜는 지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잊어버렸다. 시간이야 약간 차이가 났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녁에 마릴라와 앤이 깨진 창에 기름종이를 두르고 못을 박고 있을 때 길버트가‘초록 지붕 집’에 찾아왔다.

“언제쯤 유리를 살 수 있게 될지 모르겠어. 배리 씨가 오늘 오후 카모디에 갔었는데 돈으로든 정으로든 유리는 한 장도 살 수 없었대. 로슨 상점도 블레어 상점도 10시쯤에 카모디 사람들이 모두 유리를 사가 버리고 남은 게 한 장도 없더라는 거야. 화이트 샌즈는 어땠니, 길버트?”
마릴라가 말했다.

“굉장했죠, 뭐. 저도 학교에 아이들과 함께 갇혀 있었어요. 아이들이 너무 겁에 질려서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걱정했다니까요. 세 아이나 기절했고 히스테리를 일으킨 아이도 둘이나 있었어요. 토미 블루엣은 내내 어찌나 소리를 질러 대든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난 한 번밖에 소리를 안 질렀어.”

데이비가 자랑스럽게 말을 한 다음 슬픈 표정으로 덧붙였다.

“내 밭은 완전히 작살이 나버렸지만 도라의 밭도 마찬가지야.”

뒷말은 그래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는 투였다.

앤이 동쪽 방에서뛰어내려왔다.

“오, 길버트, 너 그 소식 들었니? 레비 볼터 씨의 낡은 집이 벼락에 맞아서 몽땅 타버렸대.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기쁘다니 나도 아주 나쁜 앤가 봐. 볼터 씨는 마을 개선회가 마술을 부려 일부러 그 폭풍우를 일으켰다고 한대.”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관찰자’가 일기 예보 예언자로서 에이브 아저씨의 명성을 올려줬다는 것. 아마 에이브 아저씨의 폭풍우는 이 지방 역사에 길이 남을걸. 우리가 고른 날짜와 딱 들어맞다니, 정말 놀라운 우연의 일치였지? 내가 정말로 마술을 부린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니까. 애써 심은 묘목도 다 뽑혀버렸으니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일은 그 흉가가 없어진 것뿐이야. 나무가 열 그루도 채 남지 않았을 거야.”
길버트가 말했다.

“내년에 또 심지 뭐. 봄은 언제나 또다시 찾아온다고! 이 세상이 좋은 건 바로 그 점 아니겠니?”

앤이 철학자나 되는 양 말했다.

추천 (1)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3/06 23:30:04

사고뭉치 앤이 벌써 열일곱살이돼서 선생님이 됏네요.소설이 기니까 한편의 드라마
같아요.

오늘 노트북 첨켯을때 바탕화면에 라벤더가 꽉차잇엇어요.며칠전 티비에서 호주여행
라벤더에 대해 나오더라구요.라벤더 마을이 너무 아름다운듯.아이스크림도 라벤더 아
이스크림이엿어요.

나단비 (♡.252.♡.103) - 2024/03/07 09:19:00

라벤더 향기가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라벤더 사세를 산적이 있었어요. 라벤더 차도 있죠. 향기로 많이 접하고 나니 먹을 생각은 안 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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