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7~8

나단비 | 2024.03.25 07:09:28 댓글: 0 조회: 106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362
7
다시 추억의 집으로





레드먼드에서 보낸 첫 3주는 지루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시간이 바람의 날개를 단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레드먼드의 학생들은 부지불식간에 지겨운 크리스마스 시험에 돌입했고, 시험이 끝났을 때는 더욱 자신감을 얻은 학생들도 나왔다. 1학년 중에서는 앤과 길버트, 필리파가 일 등의 영예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고 프리실라도 꽤 잘했다. 찰리 슬론은 창피당하지 않을 정도로 겨우 시험을 통과했지만 자기가 모든 과목에서 일 등이나 한 것처럼 자기 만족감에 빠졌다.
“내일 이맘때쯤엔‘초록 지붕 집’에 가 있겠지.믿어지지 않아.하지만 내일이면 분명 난 집에 돌아가 있을 거야. 필, 넌 알렉과 알론조와 함께 볼링브로크에 가 있겠구나.”
떠나기 전날 밤 앤이 말했다.
“둘 다 정말 보고 싶어. 정말 사랑스러운 남자들이거든. 이번 방학엔 정말 즐겁게 보낼 생각이야. 날마다 춤추고, 드라이브도 나가고, 떠들썩한 모임도 많이 가질 거야. 앤 여왕님,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이번에 나랑 같이 고향에 가지 않겠다니 말이야.”
필리파가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너에게 ‘절대로’는 단 3일이지, 필. 함께 가자고 해줘서 정말 고맙긴 하지만, 그리고 나도 언젠간 볼링브로크에 가보고 싶지만 올해는 안 돼. 난 정말 집에 가야 하거든. 내가 얼마나 간절히 집에 가고 싶은지 넌 알지 못할 거야.”
“별로 즐거울 일도 없을걸, 뭐. 퀼트 모임에나 한두 번 참석할 테고, 사람들은 네 면전에서나 아니면 네 등 뒤에서 네 이야기들을 수군대겠지. 넌 아마 외로워서 죽을지도 몰라.”
“에이번리에서?”
말도 안 된다는 듯 앤이 되물었다.
“나랑 같이 볼링브로크에 가면 넌 정말 근사한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넌 완전히 볼링브로크에 빠지고 말 거라고, 앤 여왕님. 너의 머리, 너의 스타일, 너의 모든 것에 다! 앤, 넌 너무 달라. 확실히 인기를 끌게 될 거야. 나는 네 영광에서 반사되는 빛이나 받아야 하겠지. ‘진정한 장미가 아니라 장미 비슷한 것’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가자, 앤.”
“사교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너의 그림은 꽤 매력적이야, 필. 하지만 난 그 멋진 그림에 못지않은 다른 그림을 그릴 거야. 난 내 정다운 시골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한때는 푸르렀지만 이젠 가을 색으로 변한, 잎이 다 져버린 사과나무들이 있는 농장으로. 집 아래로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뒤쪽에는 12월의 전나무 숲이 있는 곳, 비와 바람이 뜯는하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지금쯤이면 회색빛으로 쓸쓸하게 변했을 연못도 하나 있단다. 집에는 나이 든 두 분의 부인이 계시지. 한 분은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이고, 또 한 분은 작은 키에 뚱뚱해. 그리고 쌍둥이도 있어. 모범생의 표본 같은 아이와 린드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끔찍한 악몽’인 또 다른 꼬맹이. 2층에 있는 내 작은 방에는 오랜 꿈들이 짙게 깔려 있지. 크고 폭신폭신한 새털 침대는 하숙집의 매트리스에 비하면 사치스럽다고 해야 해. 어때, 내 그림이? 마음에 드니?”
“따분한 그림인데.”
필리파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큰 그림 하나를 빼먹었구나.”
앤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곳에는 사랑이 있어. 서로를 믿는 포근하고 부드러운 사랑. 다른 어떤 걸작에서도 절대 찾을 수 없는 사랑 말이야. 나를 기다려주는 사랑이지. 그 사랑이 있어서, 비록 화려하지 않다 해도 내가 그린 그림이 걸작이 되는 것 아닐까?”
필리파가 조용히 일어나 초콜릿 상자를 한쪽으로 치우더니 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앤을 팔로 감싸 안았다.
“앤, 나도 너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필리파는 흐느끼듯 말했다.
다음 날 밤 다이애나는 카모디 역까지 앤을 마중 나와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인 조용한 밤하늘을 이고 마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초록 지붕 집’오솔길로 들어서자 축제의 흥겨움이 느껴지는‘초록 지붕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창마다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어두컴컴한‘유령의 숲’을 배경으로 빨간 불빛이 어둠을 뚫고 찬란한 광채를 발했다.
뒷마당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거기에 생기발랄한 두 물체가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마차가 미루나무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자 그중 한 생물체가 희한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데이비가 내는 저 소리는 인디언이 전투에 나갈 때 부르는노랫소리래. 해리슨 아저씨 집에서 일하는 아이가 가르쳐주었는데 너를 환영하는 뜻으로 불러준다고 이제껏 연습했단다. 린드 아주머니는 그노랫소리에 정신이 다 나가버렸다고 성화야. 린드 아주머니 등 뒤로 살금살금 다가와서는 저렇게 소리를 질러댄대. 데이비는 네가 오면 모닥불을 피워준다고 단단히 작정을 하고 거의 2주일이나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았단다.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기름도 부어달라고 조른 모양이야. 냄새로 보아선 마릴라 아주머니가 정말 그렇게 해준 것 같은데. 하지만 아까까지도 아주머니는 안 된다고 하셨어. 그랬다간 데이비가 모든 사람들을 다 태워버리고 말 거라면서.”
앤이 마차에서 내리자 데이비는 너무나 기쁜 듯 앤의 무릎을 감싸 안았다. 도라도 앤의 손에 매달렸다.
“이거 정말 멋진 모닥불이지, 누나? 내가 불을 들쑤셔볼 테니 불꽃 일어나는 것 좀 봐. 누나를 위해서 내가 모닥불을 피운 거라고. 누나가 집에 오니까 너무 좋아.”
부엌문이 열리면서 마릴라의 야윈 몸이 나왔지만 안쪽에서 새어 나온 불빛 때문에 검은 윤곽만 보였다. 마릴라는 차라리 어둠 속에서 앤을 만나길 원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꼿꼿이 서서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릴라는 속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배웠다. 마릴라 뒤에는 뚱뚱한 린드 부인이 친절하고 호기롭게 서 있었다. 앤이 필리파에게 말했던 사랑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그 사랑의 축복과 달콤함이 앤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 어디에도 이런 오랜 유대감, 오랜 친구, 오랜‘초록 지붕 집’을 대신할 것은 없을 것이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진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앤의 눈은 얼마나 초롱초롱 반짝였고, 볼은 얼마나 화사하게 빛났으며, 웃음소리는 또 얼마나 은빛으로 투명했는지 모른다.
앤과 다이애나는 그날 밤 내내 함께 있기로 했다. 장미꽃 무늬찻잔 세트가저녁 식탁을 더욱 멋지게 해주었다. 퉁명스러운 성격의 마릴라가 차렸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식탁이었다.
“다이애나와 밤새 이야기할 거냐?”
마릴라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앤과 다이애나는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마릴라는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려 들면 말과 행동이 항상 냉소적이 되곤 했다.
“네, 데이비 먼저 재워주고요. 데이비가 그렇게 해달래요.”
앤이 명랑하게 대답했다.
데이비가 앤을 따라 복도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내가 그랬어. 내 기도를 누가 들어줬으면 좋겠어. 혼자 기도하는 건 재미없어.”
“데이비, 넌 혼자 기도하는 게 아냐. 하느님이 항상 곁에서 네 기도를 듣고 계신단다.”
“근데 나에겐 안 보여. 난 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기도하고 싶어. 그래도 마릴라 아줌마나 린드 아줌마 앞에선 기도하고 싶지 않아.”
데이비는 회색 플란넬 잠옷으로 갈아입었지만 기도를 서두를 것 같진 않았다. 기도를 할 결심이 안 선 듯 한쪽 발을 다른 쪽 발등에 얹고 앤 앞에 마냥 서 있기만 했다.
“이리 와, 데이비. 무릎을 꿇어야지.”

데이비는 다가와서 머리를 앤의 무릎에 파묻었다. 하지만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누나, 난 기도하고 싶지 않아. 이번 주는 좀 그래. 어젯밤에도 그랬고, 그저께 밤에도 그랬어.”
“왜, 데이비?”
앤이 부드럽게 물었다.
“누나, 내가 얘기해도 화 안 내겠지?”
데이비가 애원하듯 말했다.
앤은 회색 플란넬 잠옷을 입은 작은 몸을 안아 무릎 위에 놓고 팔로 데이비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네가무슨 말 할때 내가 화낸적 있니?”
“아, 아니. 안 내지. 하지만 이번엔 화를 낼걸. 내가 이거 말하면 누나는 정말 화를 엄청 많이 낼 거야. 그리고 내가 싫어질 거야.”
“무슨 나쁜 짓이라도 저질렀니, 데이비? 그래서 기도도 하기 싫은 거야?”
“아니야. 나쁜 짓 한 거는 없어, 아직은. 근데 나쁜 짓이 하고 싶어.”
“왜 그런데, 데이비?”
“나, 나쁜 말이 하고 싶어, 누나.”
데이비는그 말을 하려고온몸의 힘을 죄다 짜내었다.
“지난주에 해리슨 아저씨 집에서 일하는 형이 그 말을 하는 걸 들었어. 그때부터 계속 그 말만 생각나고, 나도 그 말을 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해. 기도할 때도.”
“그럼 해버려, 데이비.”
데이비는 놀라 붉어진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누나, 이건 정말 나쁜 말인데?”
“해버려!”
데이비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앤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그 말을 내뱉었다.그러고는곧 앤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파묻어버렸다.
“누나,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절대로. 하고 싶단 생각도 안 할게. 그 말이 나쁜 건 알았지만, 이렇게 많이 나쁜 건지는 몰랐어. 정말.”
“그래, 다시는 그 말이 하고 싶지 않을 것 같구나. 생각도 안 하겠지? 내가 너라면 해리슨 아저씨네 일하는 아이하고는 어울리지 않겠다.”
“그 형이 아주 멋진 고함소리를 잘 내거든.”
다소 아쉬운 듯 데이비가 말했다.
“하지만 넌 마음이 온통 나쁜 말들로 가득 찼으면 좋겠니? 그런 나쁜 말은 너를 해롭게 하고, 너를 신사하고는 멀어지게 하는데도?”
“아니, 누나.”
데이비는 내심 뉘우친다는 듯 올빼미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그렇게 나쁜 말을 쓰는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지 마. 자, 이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니, 데이비?”
“오, 그럼. 그래, 이제는 기도할 수 있어. ‘내가 잠에서 깨기 전에 죽는다 해도’란 기도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거든. 내가 그 나쁜 말을 하고 싶었을 때는 도저히 그렇게 기도를 올릴 수 없었어.”
데이비는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그날 밤 앤과 다이애나는 서로의 가슴을 저 밑바닥까지 모두 보여주었지만, 두 사람이 털어놓은 비밀의 흔적은 전혀 남지 않았다. 밤새워 비밀을 털어놓고 그동안 쌓인 얘기를 했지만 마치 젊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아침 식사에 나타난 둘의 모습은 그렇게 싱그럽고 밝을 수가 없었다.
눈이 내릴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이애나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통나무 다리를 건널 때 하얀 눈발이 너풀거리며 여전히 꿈에 젖어 있는 회색과 적갈색 들판과 숲을 덮기 시작했다. 곧 멀리 뻗어간 비탈길과 언덕들이 얇은 눈의 장막에 가려 흐릿해졌다. 창백한 가을이 안개 같은 웨딩드레스의 베일을 늘어뜨리고 겨울이란 신랑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가을 신부와겨울 신랑은 결국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었다. 정말 기분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날 오후 라벤더와 폴이 보내온 선물과 편지가 도착했다. 활기로 가득 찬‘초록 지붕 집’부엌에서 앤은 편지를 읽고 선물을 펼쳐보았다. 데이비가 너무 기분이 좋아 코를 킁킁대며 말한 대로 ‘예쁜 향기’로 가득 찬 선물이었다.
“라벤더 아주머니와 어빙 씨가 이제새집에 자리를 잡았대요. 아주 행복하게들 지내는 모양이에요. 편지를 보면 금방 알아요. 그런데 샬로타 4세가 전한 말도 있네요. 샬로타는 보스턴이 영 맘에 들지 않는대요. 무서울 정도로 향수병에 시달린다는군요. 라벤더 아주머니가 저에게 집에 있는 동안‘메아리 집’에 가서 불 좀 지피고 쿠션들이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봐달라고 부탁했어요. 다음 주에 다이애나랑 같이 한번 가봐야겠어요. 그리고 오후에는시어도라딕스를 만나야겠어요. 갑자기 보고 싶어졌어요. 그런데 루도빅 스피드와시어도라는 여전히 만나고 있나요?”
앤이 편지를 읽으면서 말했다.
“그렇다고들 하더구나. 루도빅 스피드는시어도라를 계속 만날 생각이래. 하지만 이제 사람들도 그 둘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점쳐보는 건 포기했단다.”
마릴라가 대답했다.
“내가시어도라였으면 루도빅을 재촉했을 텐데, 그럼.”
린드 부인이 거들었다. 당연히 린드 부인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필리파에게 온 편지도 있었는데, 온통 알렉과 알론조의 이야기뿐이었다. 알렉과 알론조가 뭐라고 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자기를 본 두 사람의 표정이 어땠는지가 필리파 특유의 흘려 쓴 글씨체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난 누구랑 결혼해야 할지 아직 못 정했어. 네가 나랑 같이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나 대신결정을 내려줬더라면. 누군가나 대신결정을 내려줘야 해. 알렉을 만났을 때 내 심장이 너무 요동쳐서 난 ‘그래, 이 사람이야.’ 하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알론조를 만나도 내 심장은 여전히 요동치더라. 그러니 내가 어찌 알겠어. 누군가 있어야 해. 내가 읽은 모든 소설책을 봐도 그렇다고. 앤, 너의 심장은 진정한 너의 왕자님 앞이 아니면 요동치지 않겠지? 내 심장은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요즘 난 정말 멋진 날들을 보내고 있어. 너도 여기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있잖아, 오늘은 눈이 내려. 정말 황홀해. 녹색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어 크리스마스가 싫어질까 봐 걱정이었거든. 백 년 전에 내버려진 채 습기를 잔뜩 머금어 칙칙한 잿빛과갈색빛이 나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그걸 ‘녹색 크리스마스’라고 불러. 왜 그런지 이유는 묻지 마. 던드리어리21)경도 ‘세상에는 누구도 이해 못 할 것이 있노라.’라고 했잖아.
앤, 시내 전차를탔는데 차비가 없었던 적 있어? 내가 며칠 전에 그런 일을 당했어. 정말 당황스럽더라. 차에 오를 때 분명히 5센트가 있었거든. 코트 왼쪽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편안하게 앉아서 주머니를 더듬어봤지. 그런데 없는 거야. 정말 등골이 오싹해지던데. 또 다른 주머니를 찾아봤는데 역시 없었어. 한 번 더 등골이 오싹해졌어. 작은 안주머니를 만져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어. 이번엔 소름이 두 번이나 동시에 쫙 끼치더군.
그래서 일단 장갑을 의자 위에 벗어놓고 주머니를 샅샅이 다 뒤졌어. 돈은 없었어. 벌떡 일어나서 온몸을 흔들었지.그러곤바닥에 떨어진 게 없나 살펴봤어. 차 안엔 오페라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어. 모두들 나를 쳐다보는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고.
계속 더 찾아봤지만 난 내 전차 요금을 찾을 수 없었어. 그래서 내가 그것을 입 안에 넣고는 무심결에 삼켜버렸다고 생각했지.
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 차장이 차를 멈추고 수치스럽게도 나를 내려놔 버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었어. 내가 거짓말을 둘러대 차를 공짜로 얻어 타려는 못된 사람이 아니라 단지 건망증의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라는 걸 차장이 믿게 할 수 있을까? 알렉과 알론조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하지만 내가 두 사람을 몹시도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 그 둘은 내 곁에 없었지. 내가 싫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아마 그 둘은 거기에 있었을 거야. 차장이 내 옆으로 오는데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어. 할 말이 떠올라도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란 생각에 또 다른 말을 지어내야 했지. 오로지 신의 뜻을 믿어볼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안락하게지냈든지 간에그때 나는 거친 폭풍우 속에서 전능하신 신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선장의 말에 ‘선장님, 그 정도로 상황이 나쁜가요?’ 하고 외쳤던 할머니와 같은 심정이었어.
하지만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현실로 돌아와 차장이 바로 내 옆자리 승객에게 상자를 내밀었을 때 난 동전을 어디에 두었는지 번쩍 기억이 났단다. 결국 난 그 동전을 삼키지 않았던 거지. 장갑의 두 번째 손가락에서 동전을 빼서 상자에 집어넣을 수 있었어.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 세상이 정말 아름답게 보이던걸.

‘메아리 집’에 갔던 일도 방학 중에 나섰던 많은 다른 재미있는 나들이처럼 유쾌했다. 앤과 다이애나는 점심 바구니를 들고 예전에 걷던 너도밤나무 숲길을 따라‘메아리 집’으로 갔다. 라벤더 루이스가 결혼해 떠난 이후로 줄곧 닫혀 있는‘메아리 집’은 바람과 햇살을 향해 다시 문을열어젖혔고 그 작은 방의 벽난로도 다시 타올랐다. 라벤더가 벽난로에 올려두었던 장미 바구니에서 나온 향이 집 안 가득 퍼져 있었다. 라벤더가 별빛 같은 갈색 눈에 잔뜩 환영의 빛을 담고 종종거리며 걸어 나올 것 같았고, 파란 리본을 달고 함박웃음을 띤 샬로타 4세가 저 문으로 불쑥 들어올 것만 같았으며, 폴도 여전히 요정을 상상하며 집 주위를 서성이는 것 같았다.
“내가 마치 오래전 빛나던 달빛을 다시 찾아온 유령 같은 느낌이 든다. 자, 나가서 메아리가 여전히 있는지 알아보자. 그 호른을 가져와 봐. 지금도 부엌문 뒤에 걸려있을 거야.”
앤이 웃으면서 말했다.
메아리는 예전 그대로였다. 여느 때보다 더욱 빛나는 하얀 강 건너편에서 은방울처럼 맑게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메아리가 답을 하지 않자 두 사람은 다시 ‘메아리 집’ 문을 잠갔다. 그리고 겨울 석양에 장밋빛과 샤프란 빛으로 물든 시간 속을 헤집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21. 연극 <우리의 미국인 사촌(Our American Cousin)>의 주인공 인물.





8
처음으로 청혼을 받다





묵은 해가 분홍빛과 노란빛 노을과 함께 녹색의 황혼 속으로 슬며시 사라져 간 것은 아니었다. 대신에 사납게 휘몰아치는 흰 눈보라와 함께 지나갔다. 폭풍우가 얼어붙은 목장과 검은 골짜기를 때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바람은 길 잃은 짐승처럼 처마 밑에서 울부짖었고, 눈보라는 세차게 창문을 흔들어댔다.
“오늘 저녁 같은 때는 누구나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신의 은총을 바라게 돼.”
앤이 제인앤드루스에게 말했다. 제인은 오후를 앤과 함께 보내려고 왔다가 밤새 머물기로 했다. 하지만 앤의 작은 방에서 담요 속으로 파고들며 제인은 신의 은총이 아닌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앤, 나 할 말이 있어. 말해도 돼?”
제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전날 밤에 루비 길리스의 파티에 다녀와서 앤은 졸음이 몰려오던 참이었다. 제인의 속내를 듣기보다는 잠자리에 들고 싶은 생각이 더 간절했다. 제인도 지금 앤에게 하려는 이야기가 앤이 흥미 있어 할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앤은 제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제인도 설마 약혼했다는 말은 아니겠지. 루비 길리스가 스펜서베일 학교 선생님과 약혼했다는 소문이 들렸고, 마을 처녀들이 모두 그 소식에 시끄러웠다.
‘난 아마 우리 마을에 유일하게 혼자 남은 낭만이라곤 없는 노처녀가 되고말 거야.’
졸음에 겨운 앤이 생각했다.
“그렇게 되고 말 거야.”
이번에는 소리가 밖으로까지 새어나왔다.
“앤, 우리 오빠 빌리를 어떻게 생각하니?”
제인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전혀 예기치 못한 질문에 앤은 소스라치게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나, 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니. 앤은 빌리앤드루스를 어떤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둥그런 얼굴에 바보처럼 언제나 실실 웃기만 하는 사람을. 빌리앤드루스를 진지하게 생각해본사람이 있기나 할까?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제인. 그게 정확하게 무슨 뜻이니?”
앤은 더듬거렸다.
“앤, 빌리 오빠를 좋아하니?”
제인이 솔직하게 물었다.
“그래, 그래. 좋아해. 좋은 사람이지, 물론.”
앤은 숨이 막혔다. 자기가 문자 그대로 사람이 좋은 거라는 뜻을 잘 전하고 있는지 걱정스러웠다. 물론 앤은 빌리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빌리가 곁에 있어도 참아줄 수 있는 정도가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를 살 만큼 지나친 감정이었을까? 제인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혹시 빌리 오빠를 남편감으로 좋아하는 거니?”
제인이 조용하게 물었다.
“남편감!”
앤은 침대 위에 앉아 빌리앤드루스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를 정리하다가 그만 베개 위로 툭 넘어져 버렸고, 숨이 완전히 멎는 것 같았다.
“누구의 남편?”
“물론 네 남편감이지. 빌리 오빠는 너와 결혼하고 싶어 해. 그동안 너를 무척 좋아해왔어. 아버지가 빌리 오빠 이름으로 위쪽 농장을 물려주셨거든. 이제 빌리 오빠의 결혼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빌리 오빠가 너무 수줍음을 많이 타서 너한테 자기를 사랑하는지 물어보지 못하겠대. 그래서 나한테 대신 물어봐 달라고 부탁한 거야. 난 싫다고 했지만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날 성가시게 할 것 같아서. 빌리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니, 앤?”
이것이 꿈인가?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싫어하기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약혼을 하거나 결혼을 해야 하는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다. 앤 셜리는 자기 침대 위에 말짱한 정신으로 누워 있었고, 제인앤드루스는 앤 옆에서 침착하게 자기 오빠 빌리를 대신해 청혼하고 있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할지 아니면 그냥 웃어버려야 할지. 하지만 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인의 감정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나, 나, 빌리 오빠랑 결혼 못 해. 너도 알잖아, 제인? 난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고. 절대로!”
앤은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나도 네가 그럴 줄 알았어.”
제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앤, 빌리 오빠가 청혼 같은 걸 하기엔 너무 부끄럼을 많이 타긴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순 없을까. 빌리 오빠는 괜찮은 남자야. 우리 오빠라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래. 나쁜 습관도 없고, 성실하고. 그러니 넌 우리 오빠를 믿고 의지해도 돼. ‘내 손에 쥔 떡 하나가 남의 손에 쥔 떡 둘보다 낫다’는 말도 있잖니. 빌리 오빠는 네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고 했어. 만약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사실 빌리 오빠는 이번 봄파종 시기전에 결혼했으면 해. 빌리 오빠는 언제나 너한테 잘해줬잖아. 그렇지 않니, 앤? 난 네가 우리 집 식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난 빌리 오빠와 결혼할 수 없어.”
앤은 단호하게 말했다. 앤은 다시 제정신을 찾았다. 기분이 조금 상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단지 우스꽝스러운 일일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야, 제인. 난 빌리 오빠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 그러니 그렇게 전해줘.”
“물론 나도 네가 빌리 오빠의 청혼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어.”
제인은 괜히 얘기를 꺼냈다 싶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자기는 할 만큼 했다고 위로했다.
“너에게 청혼해도 소용없다고 빌리 오빠에게 말했는데 빌리 오빠가 고집을 피워서 나도 하는 수 없었어. 그래, 앤. 네 마음이 그렇다니 후회하는 일만 없길 바랄게.”
제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제인도 아무리 빌리가 앤을 연모해도 앤과 결혼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더라도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아 주제인 앤이 에이번리에 뿌리를 내린앤드루스집안의 빌리를, 자기 오빠를 거절하다니. 제인은 앤에게 화가 났다. 제인은 자부심이 무너지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앤은 어둠 속에서 빌리앤드루스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후회나 하지 말라는 제인의 말을 떠올리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빌리 오빠가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앤이 상냥하게 말했다.
이 말에 제인은 베개에서 머리를 휙 젖히는 소리를 냈다.
“아니, 그렇게 심하게 상처받진 않을 거야. 빌리 오빠는 결혼 문제에는 이성적이니까. 네티 블루엣도 꽤 좋아하고 있거든. 그리고 우리 엄만 빌리 오빠가 다른 누구보다도 네티랑 결혼했으면 하고 바라셔. 네티는 일도 야무지게 잘하고 또 절약할 줄도 아는 사람이니까. 빌리 오빠도 네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네티를 선택할 거야. 하지만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줘. 부탁해, 앤.”
“그럼, 절대로 안 하지.”
빌리가 자기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것도 네티 블루엣보다 자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네티 블루엣이라니!
“이제 자는 게 좋겠어.”

제인이 말했다.
제인은 눕자마자 빠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이 장면이 어떻게 봐도 《맥베스》의 한 장면 같진 않았지만 제인은 앤의 잠을 망치고 말았다. 청혼을 받은 앤은 새벽녘까지 베개를 베고도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도 낭만적인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앤은 이 모든 사건을 한바탕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앤이앤드루스집안과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무정하고 단호하게 거절한 것에 반감을 품은 제인은 여전히 냉랭한 태도로 집으로 돌아갔다. 앤은 동쪽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크게 한바탕 웃어버렸다.
‘이 재미있는 일을 다른 사람도 알아야 하는데!’ 하지만 그럴 수 없지. 내가 유일하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다이애나지만, 말할 순 없어. 프레드에게 모든 걸 다 얘기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래도 내가 첫 번째 청혼을 받은 건데. 언젠가는 나에게도청혼할사람이 나타날 줄은 알았지만, 누군가가 청혼을 대신할 줄은 정말 몰랐는걸. 정말 우스워. 마음이 약간 아프기도 하고.’
앤은 생각했다.
앤은 그렇게 마음이 아픈 이유도 알 것 같았지만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앤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처음으로 청혼해올 순간을 고대했었다. 비밀스레 그토록 위대한 청혼을 해올 시간을 꿈꿔왔었다. 꿈속에서 그 모습은 언제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그 ‘누군가’는 검은 눈동자에 표정이 풍부하며 눈에 띄는 멋진 외모였다. ‘결혼할게요!’란 대답에 황홀해하는 백마 탄 왕자이거나 후회스럽지만 아름다운 말로 거절할 수밖에 없는 남자이건 모두 멋진 사람들이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고상한 말로 거절하는 앤의 뜻에 따르는 것이 최선임을 깨달은 남자가 앤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자기 사랑은 영원하리라 고백한 후 멀리 떠나갔다. 그리고 그 사랑의 고백은 영원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가슴 아프지만 자랑하고 싶을 만큼 달콤한 기억으로.
하지만 가슴 떨리는 경험이 되어야 할 그 순간이 그저 기괴한 사건으로 변해버렸다. 빌리 앤드루스는 아버지가 농장을 물려주자 동생을 시켜 대리청혼을 했다. 그리고 앤이 그 청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네티가 받아줄 것이다. 그것이 빌리에겐 낭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복수도 곁들인! 앤은 웃다가 또 한숨을 지었다. 처녀의 꿈 위로 한바탕 싸늘한 바람이 쌩하고 불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해질 때까지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은 계속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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