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6권 19~20

나단비 | 2024.04.11 18:37:46 댓글: 4 조회: 109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0212
19






글렌에서 돈을 벌기란 쉽지 않았지만 젬은 결연히 자기 결심을 이행했다. 헌 실패로 팽이를 만들어 학교로 가져가 남자아이들에게 하나당 2센트씩을 받고 팔았고, 소중하게 간직하던 젖니 세 개도 3센트를 받고 팔았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버티 셰익스피어 드류에게 애플 크런치 파이를 팔았다. 밤마다 젬은 그날 번 돈을 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조그만 놋쇠 돼지 저금통에 넣었다. 반짝반짝 멋지게 빛나는 돼지 저금통 등에는 동전을 집어넣는 구멍이 있었다. 동전 쉰 개를 다 넣고 꼬리를 비틀면 돼지는 저절로 척 열려서 모은 동전을 다시 다 내놓을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 8센트를 채우려고 젬은 새알 모은 것을 맥 리즈에게 팔았다. 글렌 마을에서는 제일 멋진 새알이라서 내놓기가 좀 아까웠지만 엄마 생일이 점점 다가와서 어쩔 수 없었다. 젬은 맥에게 돈을 받자마자 그 마지막 8센트를 돼지 저금통 안에 넣고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꼬리를 비틀어 봐. 돼지가 저절로 열리는지 보게.”
돼지가 저절로 열린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는 맥이 말했다. 하지만 젬은 싫다고 했다. 목걸이를 사러 갈 준비가 될 때까지는 절대로 이 저금통을 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다음 날 오후 부인 선교회 모임이 ‘잉글사이드’에서 열렸는데, 그날 참석했던 사람들은 절대로 잊지 못할 모임이 되었다. 노먼 테일러 부인의 기도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이 부인은 자기 기도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들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그만 남자아이가 미친 듯이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내 놋쇠 돼지 저금통이 없어졌어요, 엄마!”
앤은 얼른 젬을 방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노먼 부인은 자기 기도가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날 특히 기도로 목사님 부인을 감동시키자고 작정을 했는데 말이다. 그 일로 부인이 젬을 용서하고, 그 아이 아버지를 다시 자기 의사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부인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집 안을 구석구석 이 잡듯 뒤졌지만 놋쇠 돼지는 보이지 않았다. 젬은 기도 중에 뛰어들었다고 야단을 맞은 데다 저금통이 없어져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그것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어디인지도 기억을 못 했다. 맥 리즈에게 전화를 해보니 맥이 그 저금통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젬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고 했다.
“수잔, 설마 맥이......?”
“아니에요, 사모님. 그럴 리 없어요. 리즈 집안사람들이 돈을 좋아한다는 결점은 있지만 그래도 정직한 사람들이에요. 정직하게 손에 넣은 것이 아니면 갖지 않는 사람들이라고요. 그 돼지는 대체 어디 있을까요?”
“쥐가 먹어버렸나 봐.”
다이가 말했다.
젬은 웃기지 말라고 말은 했지만 정말 그랬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물론 쥐가 동전이 쉰 개나 든 놋쇠 돼지 저금통을 먹을 리는 없지만, 그럼 그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니, 아니야. 네 돼지는 곧 나타날 거야.”

엄마는 안심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저금통은 다음 날 학교에 갈 때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저금통을 잃어버렸다는 소식은 젬보다도 먼저 학교에 당도해 친구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해주었지만 위안이 될 이야기는 없었다. 쉬는 시간에 시시 플래그가 젬에게 다가와 싹싹하게 말했다. 시시 플래그는 젬을 좋아했지만 젬은 시시가 숱이 많은 노란 고수머리와 커다란 갈색 눈을 갖고 있어도, 아니 그 때문인지 몰라도, 시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이가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어도 이성에 관한 문제는 있을 수 있었다.
“네 돼지를 누가 갖고 있는지 나는 알아.”
“누군데?”
“박수 치며 들어오고 나가기 놀이할 때 나를 뽑아줘, 그럼 말해줄게.”
그건 무척이나 싫은 일이었지만 젬은 참았다. 돼지를 찾을 수 있다는데 무슨 일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쉬는 시간에 박수 치며 들어오고 나가기 놀이를 할 때 젬은 승리감에 넘친 시시 곁에 얼굴이 빨개진 채 앉아 있어야 했으나 종이 울리자마자 그 대가를 내놓으라고 했다.
“프레드 엘리엇이 네 돼지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밥 러셀에게 말하는 걸 윌리 드류가 들었다고 앨리스 팔머가 내게 말했어. 그러니까 프레드에게 가서 물어봐.”
“거짓말, 너 나한테 거짓말했지?”
젬이 시시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시시는 아주 거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시는 상관하지 않았다. 젬 블라이드는 적어도 한 번은 자기 옆에 앉아야 했다.

젬은 맨 먼저 프레드 엘리엇에게 갔지만 프레드는 자기는 그 저금통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답했다. 젬은 절망스러운 기분에 빠졌다. 프레드 엘리엇은 젬보다 세 살이나 더 나이가 많았는데 약한 아이들 괴롭히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별안간 젬에게 좋은 수가 떠올랐다. 젬은 무서운 얼굴로 붉은 얼굴에 몸집이 큰 프레드에게 집게손가락을 내밀며 똑똑히 외쳤다.
“너는 트랜서브스텐시어셔널리스트야.11)”
젬은 뻐기며 말했다.
“요게, 어디서 욕을 하고 그래, 블라이드 꼬마.”
“이건 욕보다 더 엄청난 말이야. 굉장히 재수가 나쁜 말이라고. 내가 이 말을 다시 하면서 너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넌 일주일 내내 재수가 없을 거야. 아마 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버릴지도 모르지. 내가 열을 세는 동안 넌 사실을 말해야 돼. 만약 열을 셀 동안 말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재수 없게 만들어버리겠어.”
젬이 말했다.
프레드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날 밤에 스케이트 경기가 있어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발가락은 발가락이었다. 젬이 여섯까지 셌을 때 프레드는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좋아, 좋다고. 당장 주둥이 닥쳐. 맥이 네 돼지 저금통이 어디 있는지 알아. 맥이 안다고 말했어.”
맥은 학교에 오지 않았지만 앤이 젬의 이야기를 듣고는 맥의 엄마한테 전화를 해주었다. 조금 후에 리즈 부인이 얼굴을 붉히고 미안해하며 나타났다.
“맥은 그 돼지를 가져가지 않았어요, 블라이드 부인. 맥은 그것이 열리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래요. 그래서 젬이 방에서 나갔을 때 꼬리를 돌려보았대요. 그런데 그것이 둘로 갈라져 버려서 되돌릴 수가 없었대요. 그래서 두 쪽이 된 돼지와 돈을 벽장 안에 있는 젬의 일요일 날 신는 신발 안에 두었대요. 맥은 그걸 만지지도 않았다고 했어요. 그리고 맥은 아빠한테 이미 심하게 야단을 맞았어요. 어쨌건 맥은 그걸 훔치지는 않았다고요, 블라이드 부인.”
“너 프레드 엘리엇에게 뭐라고 했니, 젬?”
 두 조각이 난 돼지를 찾아내고 돈을 다 세본 다음 수잔이 물었다.
“트랜서브스텐시어셔널리스트라고 했어요. 월터가 지난주에 사전에서 찾아낸 말이에요. 월터는 원래 그렇게 어렵고 긴 단어를 좋아하잖아요, 아줌마. 그리고 우리 둘 다 그걸 어떻게 읽는지 공부했어요. 침대에 누워서 서로에게 그 말을 스무 번이나 해보면서 외워버렸거든요.”
젬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제 그 목걸이는 샀고, 수잔의 서랍장 가운데 서랍 맨 위에서 세 번째 상자에 감추어두었다. 수잔은 이 계획에 처음부터 다 관여하고 있었다. 젬은 엄마 생일날이 절대로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엄마를 보면 무척이나 흐뭇했다. 엄마는 수잔의 서랍장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도, 생일이 되면 어떤 선물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쌍둥이를 재우느라 노래를 부르면서도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항해중인 배 한 척을 보았죠, 바다 위를 항해하는.
그 배는 나를 위해 멋진 것들을 가득 싣고 있답니다!”

엄마는 배가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길버트는 3월 초 독감에 걸려서 거의 폐렴이 될 뻔했다. 이삼일 동안 ‘잉글사이드’는 걱정에 휩싸였다. 앤은 평상시처럼 일상생활을 꾸려 나갔다.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아이들을 위로해주고, 달빛을 받으며 침대에 몸을 구부리고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의 웃음소리를 그리워했다.
“만약에 아빠가 죽으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월터는 입술이 창백해져 속삭였다.
“아빠는 죽지 않아. 이제 위험한 고비는 다 넘기셨어.”
앤은 만일, 만일 길버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여기 이 작은 세상, 포 윈즈와 글렌 그리고 항구 어귀 마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했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길버트를 의지하고 산다. 윗마을 사람들은 특히 길버트가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지만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뿐이라 믿었다. 실제로 한 번 그런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무엘 휴이트가 죽은 듯 꼼짝도 않는 것을 블라이드 의사 선생님이 바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냈다고 아치볼드 맥그레거 노인이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수잔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친절한 밤색 눈동자를 가진 길버트가 침대 옆에 앉아 “아무 문제도 없어요. 괜찮아요!” 하고 기운차게 한 마디만 해주면 그 말을 믿고 털고 일어났다. 길버트란 이름으로 말을 하더라도 그렇다. 이 근방에는 길버트란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포 윈즈에는 어린 길버트가 아주 많았고, 심지어는 길버틴이란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빠도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고 엄마도 웃음을 되찾았다. 그날은 바로 엄마의 생일 전날이었다.
“오늘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면 내일이 좀 더 빨리 올 거야, 젬.” 수잔이 말했다.
젬은 일찍 자보려고 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월터는 곧장 잠이 들어버렸지만 젬은 몸을 뒤치다꺼리기만 했다. 잠을 자기가 두려웠다. 제때에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모두가 다 엄마에게 선물을 주어버리고 난 다음에.
젬은 자기가 제일 먼저 엄마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수잔에게 미리 자기를 깨워달라고 부탁해둘걸. 이제는 수잔이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면서 나가버리고 없는데. 수잔이 돌아오면 지금이라도 부탁을 해야겠다. 하지만 수잔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아래층으로 내려가 소파에서 자면 수잔이 들어오는 걸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젬은 살금살금 아래층으로 내려가 체스터필드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누었다. 창문으로 글렌이 내다보였다. 마법처럼 하얗게 눈이 쌓인 언덕 사이로 달빛이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밤의 신비에 쌓인 커다란 나무들이 ‘잉글사이드’로 팔을 내밀고 있었다.
젬은 집을 감싸고 있는 밤의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마룻바닥이 삐거덕거리고, 누군가가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 벽난로에서 석탄이 타오르는 소리, 도자기를 넣어둔 벽장에서 작은 쥐 한 마리가 종종걸음 치는 소리. 눈사태가 일어난 소리일까? 아니다, 지붕에서 눈덩이가 미끄러져 내리는 소리다.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왜 아직까지 수잔은 돌아오지 않는 거지?
지프가 옆에 있기만 하다면, 보고 싶은 내 강아지. 젬은 지프를 잊고 있었던가? 아니다.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프를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프 생각에만 잠겨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잘 자거라, 우리 귀여운 강아지. 아마도 이제 곧 다른 개를 가져도 좋을 때가 온 것 같다. 지금 당장 개가 한 마리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슈림프라도. 하지만 슈림프는 지금 곁에 없다. 이기적인 늙은 고양이 같으니라고! 항상 제 생각만 하지 다른 건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낮에는 익숙한 곳이지만 지금 글렌은 하얀 달빛을 받아 무척 낯선 모습으로 변했다. 아직도 수잔은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오고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시간을 보내려고 공상이나 해야겠다. 언젠가는 배핀 랜드로 가서 에스키모와 함께 살아볼 거야. 언젠가는 먼 바다로 나가 짐 선장님처럼 크리스마스 정찬으로 상어 요리를 해야지. 고릴라를 찾으러 콩고로 탐험을 떠날 거야. 잠수부가 되어 바다 아래 눈부신 수정 홀을 걸어보기도 할 거야.
다음에 에이번리에 가면 데이비 삼촌더러 고양이한테 우유 먹이는 방법을 가르쳐달래야지. 데이비 삼촌은 고양이에게 우유를 정말 잘 먹이니까.
해적이 되어볼까. 수잔 아줌마는 내게 목사가 되라고 한다. 목사는 가장 좋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지만 해적은 가장 재밌는 일을 하면서 살잖아. 저 꼬마 나무 병정이 벽난로 선반에서 뛰어내려와 총을 쏘아대면 어쩌지? 의자가 방 안을 서성거린다면! 저 호랑이깔개가 살아나 버리면 어쩌지? 월터와 둘이 아주 어렸을 때 상상했던 대로 집 안 여기저기에 꽥꽥거리는 곰이 있다면!
젬은 갑자기 몸이 오싹해졌다. 낮에는 공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일이야 없었지만 밤에는 이야기가 좀 달라졌다. 시계는 재깍재깍 가고 있었다. 재깍재깍, 시계가 재깍거릴 때마다 계단 층계에 앉아 있는 곰도 꽥꽥거렸다. 층계는 금방 꽥꽥거리는 곰들로 새카맣게 메워졌다. 저 곰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저기 앉아 꽥꽥거릴 것이다.
하느님이 깜박하고 아침 해가 떠오르게 하지 않으면 어쩌지! 그 생각에 젬은 몸이 오싹해져 담요에 얼굴을 묻고 그 생각을 쫓아내려 애썼다. 젬은 그렇게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버렸다. 수잔은 겨울 아침 해가 오렌지 빛깔로 떠오를 무렵 집으로 돌아왔고 소파에서 잠이 든 젬을 보았다.
“젬!”
젬은 웅크렸던 몸을 펴고 일어나 하품을 했다. 은 세공사 서리가 바쁜 밤을 보내고 난 아침이었고, 숲도 요정 나라처럼 변해 있었다. 저 멀리 언덕도 선홍빛으로 물들었고, 글렌 건너편 하얀 목장도 아름다운 장밋빛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의 생일날 아침이었다.
“나는 아줌마를 기다리고 있었어. 깨워달라고 부탁하려고. 그런데 아줌마는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존 워런을 만나러 갔었어. 존의 숙모가 돌아가셨거든. 같이 밤을 지새우면서 시신을 지켜달라고 해서 다녀왔지. 너 폐렴에 걸릴 작정으로 여기 나와 잔 것은 아니겠지. 얼른 침대로 돌아가. 엄마가 일어나면 깨워줄 테니까.”
수잔은 명랑하게 대답했다.
“아줌마, 상어를 어떻게 찌르지?”

젬은 2층으로 가기 전에 알고 싶었다.
“나는 상어를 찔러보지 않아서 몰라.”
수잔이 대답했다.
젬이 엄마 방으로 들어갔을 때 엄마는 일어나 앉아 거울 앞에서 윤기 흐르는 긴 머리를 빗고 있었다. 목걸이를 보았을 때 엄마의 눈이라니!
“젬! 이것을 나에게 주려고…….”
“이젠 엄마 아빠, 배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젬이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말했다. 엄마의 손에서 초록빛으로 빛나는 저것은? 반지, 아빠의 선물이다. 그래, 좋아. 하지만 반지는 흔한 거잖아. 시시 플래그조차도 반지를 가졌어. 하지만 진주 목걸이는 없다고!
“목걸이라니, 정말 멋진 생일 선물이야!”
엄마가 말했다.

11. transubstantiationalist. 실체변화론자. 성체 성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설을 믿는 사람. 여기서는 단어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아이로서는 절대 알 리 없는 긴 단어를 댄 것뿐임.




20






어느 늦은 3월 저녁, 길버트와 앤은 샬럿타운의 친구들과 만찬 모임에 가게 되었다. 앤은 목과 팔에 은장식이 박힌 새 녹색 드레스를 입고 길버트가 준 에메랄드 반지를 끼었으며 목에는 젬이 준 목걸이를 걸었다.
“아빠 부인 아름답지 않니, 젬?”
아빠가 자랑스럽게 물었다.
젬은 엄마가 아주 아름답고 드레스도 무척이나 멋지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하얀 목에서 빛나는 진주 목걸이는 또 얼마나 예쁜가! 젬은 엄마가 멋지게 차려입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래도 멋진 옷을 벗어버렸을 때가 훨씬 더 좋았다. 그렇게 차려입고 나면 엄마가 변한 것 같고 정말 자기 엄마 같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 젬은 수잔 심부름으로 마을로 내려갔다. 플래그 상점에서 볼일을 보는 동안 가끔씩 시시를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시시가 너무 친근하게 굴어서 젬은 시시가 가게로 들어올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젬은 그만 가게에서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일을 당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당하고 젬은 너무나도 끔찍한 기분에 빠져버렸다.
두 여자아이가 카터 플래그 씨가 목걸이며 팔찌며 머리장식을 진열해놓은 유리관 앞에 서 있었다.
“저 진주 목걸이 예쁘지 않니?”
애비 러셀이 말했다.
“정말 거의 진짜 같다.”
레오나 리즈가 말했다.
그러고는 둘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작은 못 통에 앉아 있는 소년을 지나쳤다. 젬은 얼마 동안 더 그러고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왜 그러고 있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플래그 씨가 물었다.
젬은 비극적인 눈으로 플래그 씨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입술도 바짝 말라 있었다.
“제발 말씀해주세요, 플래그 아저씨. 저 목걸이는, 저것은 진짜 진주죠, 네?”
플래그 씨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젬. 50센트에 어떻게 진짜 진주를 사니, 응? 저런 게 진짜 진주 목걸이라면 수백 달러는 주어야 할 거다. 저건 진주 구슬이야. 그래도 저 가격이면 아주 좋은 물건이지. 내가 점포 정리 세일 때 산 것들이야. 그래서 그렇게 싸게 팔 수 있는 거라고. 보통은 1달러는 주어야 살 수 있는 물건이란다.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다. 아주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지.”
젬은 못 통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수잔의 심부름도 잊어버리고 가게를 나왔다. 젬은 얼어붙은 길을 멍한 마음으로 걸었다. 머리 위로는 음울한 겨울 하늘이 드리워졌고 공기 중에는 수잔의 말에 따르면 눈이 올 ‘조짐’이 보였으며 물웅덩이에는 살얼음이 엷게 얼어붙었다. 항구는 헐벗은 둑 사이로 검고 무뚝뚝하게 누워 있었다. 젬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해안을 하얗게 만들었다. 젬은 눈이 자꾸자꾸 내려 자기도 다른 사람도 모두 깊이깊이 묻혀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선 정의를 찾아볼 수 없으니까.
젬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자기 가슴이 아픈 것을 사람들이 마음껏 경멸하고 비웃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젬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젬은 자기도 엄마도 진짜 진주 목걸이라고 여긴 것을 엄마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게 가짜라니! 엄마가 알면 뭐라고 할까? 엄마가 이 사실을 알아버리면 어떤 마음이 들까? 물론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만 된다. 엄마에게 그 사실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엄마를 ‘속여서’는 안 된다. 엄마는 그 진주 목걸이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가여운 엄마! 그 목걸이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데. 목걸이를 받고서 젬에게 입을 맞추어주면서 고맙다고 말할 때 엄마 눈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빛났는데…….
젬은 곁문으로 몰래 들어가 곧장 침대로 향했다. 월터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지만 젬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엄마가 집에 돌아와 월터와 젬이 잘 자고 있는지 보러 왔을 때도 젬은 깨어 있었다.
“젬, 너 아직까지도 깨어 있었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니, 하지만 여기가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엄마.”
젬이 손을 배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젬은 자기 심장이 배 위에 있다고 믿었다.

“왜 무슨 일인데, 아가야?”
“엄마에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엄마가 몹시 실망할 거예요. 하지만 내가 엄마를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에요. 난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나도 안단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걱정하지 말고 말해보렴.”
“오, 엄마. 그 진주는 진짜가 아니래요. 난 진짜 진주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래요.”
젬의 눈은 눈물로 그렁그렁해졌다.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앤은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날 셜리는 머리를 부딪혔고, 낸은 발목을 삐었으며, 다이는 심한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앤은 입을 맞추어주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이 일은 달랐다. 지혜가 필요했다.
“젬, 엄마는 네가 그것을 진짜 진주로 알고 있는 줄 몰랐구나. 나는 그게 진짜가 아닌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진짜 진주가 아니라 해도 내게는 진짜 진주보다도 더 값지단다. 왜냐하면 그 진주 목걸이에는 너의 사랑과 노력과 희생정신이 담겨 있으니까. 그래서 엄마한테는 그것이 잠수부들이 여왕님께 바치려고 바다에서 찾아내온 온갖 보석보다 더 귀중해. 젬, 나는 네가 준 예쁜 구슬로 만든 목걸이를 그 어떤 보석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거야. 어젯밤 신문 기사에 나온 어느 백만장자가 자기 신부에게 주었다는 50만 달러나 하는 목걸이하고도. 너의 선물은 엄마에게 그만큼이나 가치 있는 거였어, 사랑하는 엄마 아들, 이제 기분이 좀 괜찮아졌니?”

젬은 너무 행복했지만 좀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다. 이렇게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것이 아기 같은 일이나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아, 이제 산다는 게 좀 견딜 만해졌어요.”
젬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젬의 반짝이는 눈에서 눈물은 사라졌고, 모든 일이 다 잘되었다. 엄마가 젬을 안아주었고, 엄마는 가짜지만 그 목걸이를 좋아한다. 이제 다른 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언젠가는 내가 엄마에게 50만 달러가 아닌, 백만 달러나 하는 목걸이를 사줄 테다. 그나저나 젬은 지쳐 있었다. 침대는 아주 따뜻하고 아늑했다. 엄마의 손에서는 장미 냄새가 났다. 이제는 레오나 리즈도 밉지 않았다.
“엄마, 그 드레스를 입으니까 너무 예뻐요. 예쁘고 깨끗하고, 엡스 코코아처럼 깨끗해 보여요.”
앤은 젬을 꼭 끌어안고 웃어주었다. 그날 의학 잡지에서 읽은 V. Z. 토머코스키 박사가 쓴 말도 안 되는 논문이 생각났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심어주지 않기 위해 어린 아들에게는 입을 맞추어주어서는 안 된다.’ 앤은 그 논문을 읽으며 비웃었다. 화까지 났지만 지금은 그 저자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물론 V. Z. 토머코스키란 사람은 남자였다. 여자라면 절대로 그런 어리석고 사악한 논문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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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4/12 02:21:55

젖니를 사는사람도 잇군요.수잔아줌마는 목사가 되라고 하지만 젬은 해적이되여 재밋는
일을 하면서 살고싶다네요.젬도 어릴때의 앤처럼 상상력이 풍부하군요.진주목걸이는 가
짜라도 넘나 예쁜데.

나단비 (♡.62.♡.158) - 2024/04/12 06:33:11

앤의 아이들이니 그런가봐요. 정성이 기특하죠.

뉘썬2뉘썬2 (♡.169.♡.51) - 2024/04/12 07:06:30

앤의 어린시절부터 앤의아이까지 여자의일생을 그렷고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며 표현이
시적이여서 장편서사시같은 이런방대한 소설은 첨이예요.

나단비 (♡.62.♡.158) - 2024/04/12 11:30:23

저도 이렇게 긴 고전소설 처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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