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7권 23~24

나단비 | 2024.04.15 13:52:03 댓글: 0 조회: 59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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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 클럽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산사나무 꽃과 제비꽃이 곧 피어날 것이라고 속삭이는 아름답고 가느다란 봄비였다. 항구와 만 그리고 낮게 자리 잡은 해변에는 진주 빛깔 안개가 깔렸다. 하지만 저녁 무렵이 되자 비는 멈추었고 안개도 바다 쪽으로 밀려가 버렸다. 항구 위 하늘에는 장미꽃이 만발한 것 같은 구름 꽃이 피어났다. 저 너머 어둑한 언덕 위 하늘도 수선화 빛깔과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모래톱 위에서는 커다란 은빛 저녁별이 내려다보고 부산스러운 ‘무지개 골짜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춤이라도 추는 듯했다.
바람에 전나무 향내와 축축한 이끼 향이 실려왔다. 바람이 묘지 주변 가문비 숲에서 중얼대며 페이스의 아름다운 고수머리를 간질였다. 페이스는 지금 헤저키어 폴록의 묘석 위에 앉아 메리 밴스와 우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칼과 제리는 여자아이들 반대편 묘석 위에 앉아 있었다. 온종일 집에만 갇혀 지내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마음에 장난기가 들끓었다.
“오늘 저녁은 세상이 반짝반짝한다, 그렇지? 모든 것이 깨끗하게 씻겼어.”

페이스가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메리 밴스는 우울한 얼굴로 페이스를 바라보았다. 메리가 알기에는, 아니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저 아인 언제나 너무 들뜬 기분으로만 살았다. 메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엘리엇 부인이 목사관에 갓 낳은 달걀을 가져다주라고 심부름을 보내면서 30분 이상 있다 오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워서 곧 일어서야만 했다. 메리는 쪼그리고 앉아 있던 다리를 펴고 일어서며 말을 꺼냈다.
“세상은 내버려두고 내 말이나 들어봐. 너희 목사관 아이들은 행동을 좀 조심해야 해. 지금까지는 너무들 너희 멋대로였어. 난 그 말을 해주려고 오늘 저녁에 특별히 여기 온 거야. 사람들이 얼마나 너희들 흉을 보는지 알아? 정말 한심해.”
“이번에는 또 우리가 뭘 어쨌는데?”
페이스가 놀라 메리에게 두른 팔을 빼내며 외쳤다. 우나의 입술은 떨렸고 연약한 마음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메리는 언제나 그렇게 말을 너무 직설적으로 했다. 제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쓸데없는 얘기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시위였다. 메리는 우리 일과는 상관도 없었다. 도대체 메리에게 우리 일에 일일이 참견하고 설교할 권리가 있기나 한 건가?
“또 뭘 어쨌느냐고? 너희는 언제나 일을 만들잖아. 겨우 소문 하나가 잠잠해지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르고. 내 생각에는 너희 목사관 아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통 모르는 애들 같다고!”
메리가 면박을 주었다.
“그럼 네가 좀 가르쳐주지 그러냐.”

제리가 비꼬아 말했다.
메리에게는 비꼬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처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 내가 가르쳐주고말고. 장로회에서 회의를 열어 너희 아버지를 쫓아내고 말 거야. 이봐, 모르는 것이 없는 제리 박사,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엘리엇 아주머니께 그렇게 말했어. 난 알렉 데이비스 부인이 차 마시러 오면 언제나 귀를 쫑긋하고 듣거든. 데이비스 부인이 너희들 모두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해서 신도들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라고 했어.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아이들이니 당연한 결과라고. 그래서 당장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감리교인들이 모두 비웃어서 장로교인들 감정이 너무 상한대. 너희들에게 자작나무에서 뽑아낸 약을 한 바가지씩 먹여야 한다고도 했다고. 하지만 그걸로 사람을 착하게 할 수 있었다면 난 벌써 성인군자가 되었을 거야. 내가 지금 너희들 기분 상하게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야. 난 너희들이 정말 안됐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럴 때 보면 메리도 상당히 생색내는 재주가 좋았다.
“지금 분위기를 보면 너희들은 나쁜 평판을 회복할 기회도 없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여러 가지 사정을 생각해주지 않거든. 미스 드류는 지난 주일에 자기가 주일 학교 아이들을 가르칠 때 칼의 호주머니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왔다고 다시는 그 반을 맡지 않겠다고 했대. 칼, 너는 왜 그런 벌레를 집에 두고 다니지 않니?”
“내가 곧바로 다시 집어넣었거든. 그리고 개구리는 사람을 해치지 않아. 가여운 개구리! 그리고 난 그 늙은 제인 드류가 제발 우리 반을 가르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그 여자가 싫다고. 그 여자 조카는 호주머니에 씹는담배를 넣어갖고 다니면서 클로 장로님이 기도할 때면 우리더러 씹으라고 해. 그게 개구리보다 더 나쁜 거 아냐?”
칼이 외쳤다.
“아니야. 개구리가 사람을 더 놀라게 했어. 게다가 그 애는 걸리지 않았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지난주에 기도대회를 연 것은 엄청난 소문거리야. 모두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블라이드 아이들도 우리랑 함께 했거든. 맨 처음에 그걸 하자고 한 애는 낸 블라이드야. 상은 월터가 받았고.”
페이스가 억울하다는 듯 화가 나서 외쳤다.
“어쨌거나 그 일도 모두들 너희 짓으로 알고 있어. 너희가 기도대회를 묘지에서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
“난 묘지가 기도하기에는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어.”
제리가 대꾸했다.
“네가 기도할 때 데컨 해저드 씨가 묘지를 지나다가 널 봤대. 네가 기도하는 소리도 다 들었고. 넌 손을 배 위에 포개 올려놓고 한 문장을 끝낼 때마다 신음 소리를 내서 해저드 씨는 네가 하느님을 놀린다고 생각했대.”
메리가 말했다.
“내가 그러긴 했어. 물론 데컨 해저드 씨가 지나가는 것은 몰랐지만. 그건 순전히 사고야. 우리는 진짜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어. 그냥 상을 타려고 그런 거야. 그래서 난 아주 재미있게 하려고 했지. 월터 블라이드는 기도를 엄청 재밌게 하거든. 그 애는 어쩌면 그렇게 기도를 잘할까?”
제리는 얼굴 하나 안 붉히고 말했다.
“우리 중에 정말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우나밖에 없어.”
페이스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기도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야깃거리가 된다면 우린 더 이상 기도해서는 안 돼.”
우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게 아니야. 기도를 하고 싶으면 언제든 해도 돼. 묘지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거지. 기도로 게임 같은 것을 해서도 안 되는 거고. 그것이 나쁜 거야. 묘지에서 파티를 여는 것이나.”
“파티는 안 했어.”
“비누거품 파티 안 했어? 어쨌든 무슨 파티인가는 했잖아. 항구 너머 사람들은 너희들이 묘지에서 파티를 했다고 흉본다고. 하지만 난 너희들 말을 믿겠어. 그리고 너희들은 이 묘석을 탁자로 사용하잖아.”
“하지만 마사 이모할머니가 집에서는 비누거품을 불지 못하게 해. 그날도 할머니가 엄청 화를 냈다고. 그리고 이 옛날 묘석은 정말 좋은 탁자인데.”
제리가 설명했다.
“그 비눗방울들 정말로 예쁘지 않았니? 비눗방울에 나무며 언덕, 항구가 비치던 모습이 꼭 작은 요정들의 세상 같았어. 그리고 우리가 비눗방울을 후 불면 ‘무지개 골짜기’까지 날아갔지.”

페이스가 기억을 더듬느라 눈을 빛냈다.
“그중 하나는 감리교회 뾰족탑까지 올라가서는 터져버렸어.”
칼이 말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한번 해보아서 정말 다행이야.”
페이스가 말했다.
“잔디밭에서 비눗방울을 불었다면 잘못이 아니지. 너희들은 정말이지 분별력이라는 것이 없어. 나도 도저히 어떻게 못 해보겠다고. 묘지에서 놀면 안 된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듣지 않았니? 감리교인들이 그 문제로 무척이나 예민하게 굴고 있다고.”
메리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놀 때는 그런 게 생각나지 않아. 그리고 잔디밭은 너무 좁다고. 작은 나무들이랑 다른 것도 너무 많아서 우리가 놀 자리가 없어. 그렇다고 매일 ‘무지개 골짜기’로 나갈 수도 없고, 넌 도대체 우리가 어디서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묘지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라고. 너희들이 묘지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만 한다면 별로 문제 될 일도 없을 거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이제 일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워런 장로님이 그 문제로 너희 아빠와 얘기를 좀 해야겠다고 했다니까. 워런 장로님이 그 얘기를 너희 아빠에게 안 할 리가 없지. 데컨 해저드와 그분은 서로 사촌지간인걸.”
“난 우리 일로 사람들이 우리 아빠를 못살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나가 말했다.
“사람들은 너희 아빠도 신경을 좀 써야 한다고 생각해. 나도 너희 아빠를 이해 못 해. 아니, 난 이해해. 너희 아빠도 어떤 면에서는 좀 아이 같아. 너희 아빠는 그래. 그래서 누군가가 돌봐주어야 한다고. 너희에게 돌봐줄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글쎄, 소문이 사실이라면 머지않아 그럴 사람이 생길 것도 같은데 말이야.”
“그건 무슨 말이야?”
페이스가 물었다.
“정말로 몰라?”
메리가 다그쳤다.
“아니, 정말 몰라. 무슨 말이야?”
“너희들 정말 순진하구나. 모든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너희 아빠는 로즈마리 웨스트를 만나고 있어. 그 여자가 너희 계모가 될 거야.”
“믿을 수 없어.”
우나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난 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야.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잘된 일이야. 로즈마리 웨스트가 너희들을 꼼짝 못 하게 잡아놓을 거니까. 상냥한 얼굴로 웃음을 짓고 있지만 내가 장담해. 계모들이란 처음에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그렇지만 너희들은 누군가가 필요해. 너희들이 더 이상 너희 아빠를 수치스럽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난 너희 아빠가 가여워. 나에게 친절한 말을 해준 그날 밤 이후로 난 너희 아빠를 엄청 좋아하게 되었어. 그 이후로는 욕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거짓말도 한 번도 안 했어. 난 너희 아빠가 행복하고 편안했으면 좋겠고, 단추도 다 달린 옷을 입고, 음식다운 음식을 먹고, 너희들이 말을 안 들으면 흠씬 두들겨 패주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마사 할머니는 얌전히 구석에 처박혀 지내야 해. 내가 가져온 계란을 보고 꼭 ‘저 계란이 신선한 거야?’ 하는 표정이었다니까. 그 꼴을 보니까 계란이 다 썩은 거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마사 할머니가 너희들이랑 아빠에게 아침마다 계란을 하나씩 꼭 주는지 보라고. 만일 안 주면 달라고 막 야단을 피워. 그 계란은 너희들 먹으라고 가져온 것이니까. 마사 할머니가 그 계란으로 뭘 할지 알게 뭐야. 자기 고양이한테나 줘버릴지도 모르지.”
메리도 너무 지껄여대느라 지쳐서 모두 한동안 잠자코 앉아 있었다. 목사관 아이들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모두 방금 메리에게 들은 말을 소화시키느라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리와 칼은 좀 놀랐다. 그렇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인가? 그 말이 믿을 수 있는 말인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페이스는 기뻤다. 단지 우나만 걱정이었다. 우나는 어디든 가서 한바탕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면류관에 별이 빛날 것인가.’
감리교회 성가대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별이 세 개가 빛났으면 좋겠어. 머리 한가운데에 하나, 머리 양쪽에 하나씩.”
메리가 말했다. 메리는 엘리엇 부인 집에서 지낸 이후로 성경 지식이 놀랍게 발전했다.
“영혼의 크기도 다 다르니?”
칼이 물었다.

“물론이지. 어린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작은 영혼을 가져야 하잖아. 점점 어두워진다. 엘리엇 아주머니는 날이 저물 때까지 밖에 나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전에 와일리 부인 집에 살았을 때에는 차라리 어두운 것이 나한테는 빛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 그 일이 백 년은 지난 일로 느껴져. 이제 너희들은 내가 한 말을 잘 생각해보고 행동을 조심하도록 해. 너희 아빠를 위해서 말이야. 난 언제나 너희들 편에 서서 너희들을 위해 나서줄 거야. 내 말을 믿어도 좋다고. 엘리엇 아주머니는 나처럼 친구를 위하는 아이는 처음 봤다고 했어. 너희들 일로 알렉 데이비스 부인에게 말대꾸하다가 엘리엇 아주머니에게 혼나기까지 했다고. 그래도 속으로는 좋아하셨을 거야. 아주머니가 언제나 바른 말만 하려고 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아서 그렇지. 또 알렉 데이비스 부인을 몹시 싫어하고 너희들을 아주 좋아하니까. 나는 사람 마음을 잘 알아.”
메리는 그런 충고를 남기고 크게 만족해 의기양양해서 돌아갔지만 뒤에 남은 아이들은 풀이 죽을 대로 죽었다. 우나가 화가 나서 말했다.
“메리 밴스는 여기 올 때마다 내 기분을 상하게 했어.”
“메리를 그 헛간에서 굶어 죽게 내버려둘 걸 그랬어.”
제리도 성이 나서 말했다.
“오, 그것 악한 짓이야, 제리 오빠.”
우나가 나무랐다.
“그럼 우리,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해주자. 우리가 나쁜 아이라고 한다면 그 말대로 나쁜 아이가 되어주면 돼.”

제리는 뉘우치기는커녕 반항했다.
“하지만 그건 아빠한테 해를 끼치는 일이야.”
페이스가 말했다.
제리가 무안한 듯 입을 다물었다. 제리는 아버지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가려진 것이 없는 창문을 통해서 메러디스 씨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빠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리를 양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 지쳐 보이고 무엇인가 절망스러운 일이 있는 듯 보였다. 아이들도 모두 그것을 느꼈다.
“오늘도 누가 와서 우리들 문제로 아빠를 괴롭혔을 거야. 우리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어머나, 젬 블라이드! 놀랐잖아!”
젬 블라이드가 살그머니 묘지로 와서 여자아이들 곁에 앉았다. 젬은 엄마에게 가져다줄 처음 피어난 산사나무 꽃을 찾으려고 ‘무지개 골짜기’를 쏘다니다 하얀 꽃이 옹기종기 달린 작은 별 모양의 꽃을 찾아내었다. 젬이 오고 나서부터는 목사관 아이들도 입을 다물었다. 젬은 올봄부터 아이들과 다소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퀸스 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 학교가 끝난 뒤에도 남아서 상급반 학생들과 따로 공부했다.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공부할 게 많아서 요즘은 통 ‘무지개 골짜기’로 와서 놀 수 없었다. 이제 젬은 어린 시절의 놀이터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오늘 밤엔 다들 무슨 일 있어? 신이 안 나 보인다.”
젬이 물었다.
“응, 그래. 젬 오빠도 아빠를 수치스럽게 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행동만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나면 마찬가지일 거야.”
페이스가 시무룩해서 말했다.
“이젠 또 누가 너희들 말을 하는데?”
“모든 사람이 그런대. 메리 밴스가 그랬어. 우리를 가르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우리가 말썽만 부리고 다니는 거래. 사람들이 우리가 나쁜 아이들이라고 생각한대.”
페이스가 동정심 많은 젬에게 괴로운 심정을 하소연했다.
“그럼 너희들 스스로 가르치면 되잖아. 내가 어떻게 할지 가르쳐줄게. ‘선행 클럽’을 만들어서 너희들이 나쁜 짓을 할 때마다 스스로 벌을 주는 거야.”
젬이 제안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일을 사람들은 무척 끔찍한 잘못으로 여기던걸. 우리가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 문제로 언제나 아빠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아빠는 집에 계시는 날도 얼마 없어.”
페이스가 말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우선 생각을 해보고 사람들이 이 일로 뭐라고 할 것인지 너희들 자신에게 물어보면 대부분은 알 수 있어. 문제는 너희들이 모두 너무 충동적이라는 거야. 우리 엄마도 어렸을 적에는 너희들과 똑같았다고 했어. 잠시 멈추어서 생각을 해보려면 ‘선행 클럽’이 도움이 될 것 같아. 규칙을 어기면 정직하고 공평하게 벌을 주면 되는 거야. 벌은 뭔가 정말로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이나 아니면 잘못을 고치는 데 정말 효과가 있는 벌이어야 해.”

젬이 말했다.
“서로를 회초리로 때려야 해?”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 각자에게 적당한 벌이 다 다를 테니까 무슨 벌을 줄 것인지도 잘 생각해봐야 해. 서로에게 벌을 주기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벌주는 것이 좋아. 난 이런 클럽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는데 너희들도 한번 해보면 효과가 나타날 거야.”
“그래, 우리 한번 해보자.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우리 스스로 바로 잡아 나가자고.”
페이스가 말했다. 젬이 가자 아이들도 모두 한번 해보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젬이 말한 대로 우리는 공정하고 단호하게 해나가야 해. 이 클럽은 우리 스스로를 가르치려는 거야. 우리에게는 그런 일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규칙이 많아도 소용없어. 규칙은 단 하나만 정해서 우리가 그 규칙을 어기면 단단히 벌을 받는 걸로 하자.”
제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나가면서 차차 생각해보면 돼. 매일 밤 여기 묘지에서 클럽 회의를 열고 그날 우리가 한 일을 이야기하는 거야. 옳지 않은 일을 했다거나 아빠를 수치스럽게 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그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 벌을 받아야 해. 이것이 규칙이지. 어떤 벌을 받을지는 우리 모두 함께 정하기로 하자. 지은 죄에 합당한 것이어야 하니까. 플래그 씨가 말한 대로 죄를 지은 사람은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고 그런 것에 아무런 불평도 해서는 안 돼. 무척 재미있을 거야.”

제리가 유쾌한 듯이 말했다.
“비누풍선 날리는 놀이를 하자고 한 건 오빠야.”
폐이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 클럽을 만들기 전의 일이야.”
제리가 얼른 말했다.
“모든 것은 오늘 밤부터 시작이야.”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 나쁜 일인지, 그리고 어떤 벌을 주어야 좋은지 결정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우리 넷 중 두 사람은 의견이 같고, 또 두 사람은 다른 의견을 가질 수도 있잖아. 이런 클럽에는 다섯 사람이 있어야 해.”
“젬 블라이드에게 판결을 내려달라고 하면 돼. 글렌 세인트 메리에서 제일 공정한 아이니까. 그렇지만 우리 문제는 우리끼리 판단을 내려야 해. 이 클럽은 가능하면 비밀로 해두자. 메리 밴스에게는 한 마디도 해선 안 돼. 분명히 자기도 클럽에 들어오겠다고 하고, 벌도 자기가 정하려고 할 거야.”
“내 생각엔 매일매일 벌을 받아서 날을 다 망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냥 벌 받는 날을 정하자.”
페이스가 말했다.
“그럼 벌 받는 날을 토요일로 정하는 게 좋겠어.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니까.”
우나가 제안했다.
“그건 휴일을 망치는 일이야. 그럴 수는 없다고. 차라리 금요일로 하자. 그날은 생선을 먹는 날이고, 우리는 다 생선을 싫어하잖아. 싫은 일은 하루에 다 끝내버리는 게 좋아. 그리고 다른 날은 신나게 놀자고.”
페이스가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잔꾀를 쓰면 안 된다고. 우리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벌을 주고 깨끗한 상태로 지내자는 거잖아. 자, 이제 내 말을 알아들었어? 이것은 ‘선행 클럽’이야. 우리들 자신을 가르치려는 거라고.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하면 스스로 벌을 주기로 약속했어. 우리는 무슨 일을 하건 우선 먼저 멈추어서 생각을 해야 해. 이런 일을 하면 혹시나 우리 아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닌지 먼저 생각을 해야 한다고. 누구든 이런 규칙에 반항하는 애는 우리 클럽에서 쫓겨나서 다시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무지개 골짜기’에서 놀지 못하게 돼. 만일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면 젬 블라이드를 재판관으로 불러서 판결하게 할 거야. 칼, 너 앞으로 벌레 같은 걸 주일 학교에 가져가서는 안 돼. 그리고 페이스, 너도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서 송진 같은 것을 씹어선 안 돼.”
“앞으로는 장로님들의 기도를 흉내 내거나, 감리교회 기도회 같은 곳에도 가지 않기로 해.”
페이스가 반격했다.
“어째서? 감리교회 기도회에 간다고 해 될 건 없잖아.”
제리가 항의했다.
“엘리엇 아주머니가 목사관 아이들은 장로교회 기도회에만 나가야 된대.”
“제기랄! 나는 절대 감리교회 기도회에 가는 것을 그만두지 않겠어. 우리 기도회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고.”
제리가 소리쳤다.
“오빠는 나쁜 말을 썼어. 이제 오빠는 스스로 벌을 받아야 해.”
페이스가 큰 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을 글씨로 써서 서명을 할 때까지는 괜찮아. 지금은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만 하는 거라고. 제대로 규칙을 다 만들어 글로 쓰고 우리가 다 서명해야 효력이 있는 거야. 그리고 기도회 같은 데는 얼마든지 가도 전혀 나쁘지 않다는 걸 너도 알아둬.”
“하지만 나쁜 일을 했을 때만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아빠에게 해가 될 일을 했을 때도 벌을 받는 거라고.”
“그건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아. 엘리엇 아주머니가 감리교인을 싫어해서 가지 말라고 하는 것뿐이라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내가 거기 간다고 야단법석 떠는 사람도 없잖아. 나는 언제나 행동도 조심했어. 젬이나 블라이드 아주머니에게 물어봐. 나도 그 두 사람이 안 된다면 따를게. 내가 가서 종이와 초롱불을 가져올 테니까 모두 서명하자.”
15분 뒤 아이들은 모두 헤저키어 폴록의 묘석에서 시커멓게 그을린 목사관 초롱불을 가운데 놓고 엄숙하게 서명했다. 마침 클로 장로 부인이 그곳을 지나다 그 장면을 보았고, 다음 날 글렌 마을에는 목사관 아이들이 또 묘지에서 기도대회를 했을 뿐 아니라 등불까지 들고 술래잡기를 하며 온 묘지를 뛰어다니더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 좀 과장된 소문은 아마 아이들이 서명을 마치고 봉인을 한 다음 칼이 초롱불을 들고 자기 개미집을 살펴보려고 조심스럽게 오목한 분지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나온 말일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조용히 목사관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아빠가 로즈마리 웨스트와 결혼한다는 게 정말일까?”
기도가 끝나자 우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페이스에게 물었다.
“잘 모르지만, 난 그렇게 되면 좋겠어.”
페이스가 대답했다.
“난 아니야. 미스 웨스트는 좋은 사람이지만, 메리 밴스는 계모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고 했어. 무섭게 화를 내고, 심술궂게 굴고, 아이들을 미워한대. 그리고 아빠가 우리를 미워하게 될 거랬어. 메리는 그걸 확실히 안댔어. 자기는 안 그런 계모를 단 한 사람도 못 봤대.”
우나가 목이 메어 말했다.
“미스 웨스트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야.”
페이스가 외쳤다.
“하지만 모두 그렇게 된다고 메리가 그랬어. 메리는 계모를 많이 알지만 언니는 한 사람도 모르잖아. 메리가 어떤 계모 이야기를 해줬는데 피가 얼어붙을 것처럼 무서웠어. 그 계모가 어린 딸들의 맨 어깨를 피가 날 때까지 회초리로 때리고 또 때렸대. 그리고 그 아이들을 밤새 춥고 어두운 지하실에 가두어두었대. 메리는 계모들아 모두 그런다고 했단 말이야.”
“난 미스 웨스트가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절대 믿지 않아. 너는 나만큼 그분을 잘 몰라, 우나. 나한테 저렇게 예쁜 새를 보내준 걸 봐. 애덤보다도 훨씬 더 사랑스러워.”

“그런 게 아니라 계모가 되면 달라지는 거래. 메리 말로는 계모들도 어쩔 수가 없대. 나는 회초리로 맞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아빠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이 세상에 아빠가 우리를 미워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바보처럼 굴지 마, 우나. 걱정할 거 없다고. 아무것도. 우리가 선행 클럽을 제대로 해나간다면 우리 스스로를 잘 가르칠 것이고, 그럼 아빠도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야. 또 만일 결혼한다 해도 미스 웨스트는 우리를 사랑해줄 거라고.”
하지만 우나는 페이스처럼 확신할 수 없어서 울면서 잠이 들었다.





24
충동적인 자선






2주일 동안 ‘선행 클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도 놀라웠다. 젬 블라이드를 재판관으로 불러야 했던 일도 딱 한 번뿐이었고, 목사관 아이들이 글렌의 소문거리가 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집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동에도 서로서로 단호하게 제재를 가했고, 자기 스스로 벌을 주기도 했다. 그 벌은 금요일 밤에 모두들 ‘무지개 골짜기’로 나가 뛰어노는 데 끼지 않는다거나,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봄날 저녁에도 꾹 참고 침대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페이스는 주일 학교에서 옆 친구와 귓속말을 한 잘못으로 꼭 필요한 때 말고는 온종일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벌을 받기로 스스로 정하고 그대로 실행했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그날 저녁 항구 건넛마을에 사는 베이커 씨가 목사관을 찾아왔다. 문을 열어주러 나간 페이스를 보고 베이커 씨가 반갑게 인사를 해왔지만 페이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아빠를 부르러 갔다. 베이커 씨는 약간 기분이 상해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메러디스 목사의 큰 딸은 새침데기에다가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도 하지 않는 버릇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일이 더 이상 큰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아이들의 속죄 행위는 아이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성숙해져 가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확신까지 갖게 되었다.
 “우리도 다른 사람처럼 바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걸 마을 사람들도 곧 알게 될 거야. 우리도 마음만 먹는다면 할 수 있다고.”
페이스는 기쁨에 넘쳐 말했다.
페이스와 우나는 폴록의 묘석 위에 앉아 있었다. 봄 폭풍우가 지나간 춥고 젖은 날씨라서 여자아이들이 ‘무지개 골짜기’까지 나가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목사관 남자아이들과 ‘잉글사이드’ 남자아이들은 낚시를 하러 갔다. 비는 멈추었지만 바다에서 동풍이 사정없이 몰아쳐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봄기운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봄이 아직 멀었다는 듯 묘지 북쪽 구석에 겨울 내내 쌓인 눈이 휘날렸다.
항구 어귀 어촌 마을에 사는 리다 마시가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며 들어왔다. 목사관에 청어를 가져다주려고 온 것이다. 리다의 아버지는 30년 동안 봄철이면 맨 처음 잡히는 청어를 목사관에 보내오는 일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교회에 다니기는커녕 교회 문턱 한 번 밟아본 적이 없었고 술고래에다 책임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기 아버지가 하던 대로 매해 봄마다 목사관으로 청어를 보내왔다. 그렇게 하면 세상을 다스리는 신을 달래 그해 1년은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수확한 것을 바치지 않으면 절대로 고등어 풍어를 바라지도 못한다고 믿었다.
리다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꼬마이긴 했지만 키가 작고 빼빼 말라서 제 나이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리다는 대담하게 목사관 여자아이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리다는 태어난 뒤로 지금까지 한 번도 따뜻하게 지내본 적이 없는 아이처럼 온통 새파래진 얼굴에 눈만 붉고 물기에 어려 있었다. 옷도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역시 누더기가 다 된 숄을 가녀린 어깨 위로 걸치고 있었다. 거기다 항구 어귀에서 여기까지, 여전히 눈이 남아 있어 질척거리는 그 먼 길을 맨발로 걸어온 모양이었다. 발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자줏빛이었다. 그러나 리다는 그런 일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겨울철이면 당연히 추운 것이고, 맨발로 다닌 것도 벌써 한 달이나 되었다. 리다뿐 아니라 가난한 어촌 아이들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리다의 마음에는 자기연민 같은 것이 없었다. 페이스와 우나 옆에 앉으며 쾌활하게 싱긋 웃어 보였다. 페이스와 우나도 마주 웃어 주었다. 리다는 작년 여름에 블라이드 아이들과 함께 항구에 갔을 때 한두 번 본 일이 있었다.
“안녕! 오늘 저녁은 정말 춥다. 개나 돌아다녀야지 사람은 못 다닐 날씨야, 그렇지?”
리다가 말했다.
“그런데 넌 왜 돌아다니니?”
페이스가 물었다.
“아빠가 너희 집에 청어를 가져다주라고 했거든.”
리다는 부들부들 떨며 대답한 다음 기침을 하면서 맨발을 내밀었다. 리다는 자기 모습이 어떤지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맨발을 내밀어 동정을 받으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본능적으로 묘석 주변의 젖은 풀을 피하려고 발을 치운 것뿐이었다. 하지만 페이스와 우나는 그 아이가 가여운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리다는 너무 추워 보였고 너무 비참해 보였다.
“이렇게 추운 날 왜 양말도 신고 다니지 않니? 네 발이 얼어버렸겠어.”
페이스가 물었다.

“응, 거의 얼었을 거야. 항구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리다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양말을 신고 다니지 그래?”
우나가 물었다.
“신을 양말이 하나도 없어. 내가 가진 양말은 겨울이 지나자마자 다 떨어져 버렸거든.”
리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페이스는 너무 놀라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저 어린아이가, 내 이웃에 사는 아이가 이런 추운 날씨에 양말도 신발도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다니. 충동적인 페이스에게 든 생각은 저 아이가 너무나 가혹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페이스는 얼른 신고 있던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여기, 이걸 네가 신어. 어서 신어. 너 감기에 걸려서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난 다른 양말이랑 신발이 있으니까 괜찮아. 당장 신어.”
페이스가 리다의 손에 벗은 양말과 신발을 들려주며 재촉했다.
페이스가 내민 것을 리다가 얼른 잡아챘다. 몽롱해 보이던 눈에는 생기마저 돌면서 누가 나타나 양말과 신발을 빼앗아 가기 전에 얼른 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하지만 너 어른들에게 야단맞지 않겠니?”
리다가 그 마른 다리에 긴 양말을 신어 올리고 신발도 신은 다음 물었다.

“괜찮아. 야단맞아도 괜찮아. 추위로 얼어 죽게 생긴 사람을 보고 내가 도울 수 있는데도 돕지 않을 사람으로 보이니?
“이걸 돌려주어야 하니? 항구 어귀는 몹시 추워. 여기는 따뜻해져도 거긴 한참 후까지도 몹시 춥다고.”
리다가 좀 뻔뻔스럽지만 시치미 뚝 뗀 얼굴로 말했다.
“아니야. 네가 가져도 돼. 처음부터 아예 너한테 주려고 생각했어. 난 신발도 또 하나 있고 양말은 아주 많이 있단다.”
리다는 거기 좀 더 머물며 페이스와 우나랑 놀 생각이었지만 누가 와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뜨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다는 춥디추운 황혼녘 살며시 어둠이 내린 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목사관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오자 신었던 신발과 양말을 벗어 청어 광주리 속에 넣었다. 그걸 신고 더러운 항구 길을 걸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특별한 때 신도록 간직해둘 생각이었다. 항구 어귀에 사는 여자아이 중에 이런 고급 검정 캐시미어 양말이나 새것과 진배없는 이런 멋진 구두를 가진 아이는 없었다. 이 구두는 여름에 신을 생각이었다. 리다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리다는 목사관 사람들은 다 부자라고 생각해서 분명 신발이며 양말을 더 많이 갖고 있으리라 믿었다.
리다는 글렌 마을로 달려가 플래그 씨네 상점 앞에서 남자아이들과 흙탕물을 철벅거리며 한 시간가량 놀았다. 너무 요란하게 떠들며 놀아서 지나가던 엘리엇 부인에게 빨리 집으로 가라는 성화를 들었다.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해, 페이스 언니? 이제는 날마다 제일 좋은 구두를 신어야 해. 그럼 신발이 금방 닳아버릴 거야.”
​​리다가 돌아간 뒤 우나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난 신발이 두 켤레인데 그 불쌍한 리다 마시는 한 켤레도 없다는 건 공평하지 않아. 이젠 우리 둘 다 한 켤레씩 가졌으니까 공평한 거야. 너도 잘 알겠지만, 지난 일요일에 아빠가 하신 설교 말씀에도 무엇인가를 얻거나 갖는 데서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다고 했어. 주는 데 행복이 있다고 하셨다고. 그 말은 정말로 맞는 말이야.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한 기분이거든. 지금 리다가 따뜻하고 편안한 발로 집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봐.”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좋기만 한 페이스가 외쳤다.
“언니는 이제 검정 캐시미어 양말이 하나도 없어. 지난번에 양말 하나를 구멍이 너무 많이 나서 난로 닦이로 만들어버렸잖아. 남아 있는 건 언니가 가장 싫어하는 줄무늬 양말 두 켤레뿐이야.”
우나가 말했다.
좋을 일을 했다는 만족감으로 잔뜩 부풀었던 페이스의 마음이 마치 풍선을 바늘로 콕 찌른 듯 푹 꺼져버렸다. 현실을 깨달은 페이스는 말도 잇지 못하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제 자기의 성급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오, 우나야, 난 그것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어. 난 왜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지를 못할까?”
페이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마사 할머니가 겨울 동안 신으라고 짜준 빨간색과 파랑색 줄무늬 양말은 너무 두껍고 무겁고 거칠어서 신으면 무척이나 불편했다. 보기도 몹시 이상스러웠다. 페이스는 그 양말만큼 싫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절대로 그 양말은 신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서랍에 한 번도 신지 않은 채로 고이 모셔져 있었다.
“앞으로는 그 줄무늬 양말을 신고 다녀야 해. 학교 남자아이들이 전부 언니를 놀릴 거야. 전에 메이미 워런이 줄무늬 양말을 신고 왔을 때도 몹시 놀림을 받았잖아. 꼭 이발소 네온사인 같다고. 언니 양말은 메이미 양말보다 훨씬 더 심해.”
우나가 말했다.
“난 그 양말을 신지 않을 거야. 아무리 추워도 그냥 맨발로 다닐 거라고.”
페이스가 말했다.
“내일 교회에도 맨발로 갈 수는 없어.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생각해봐.”
“그럼 난 집에 있을래.”
“그럴 수 없어. 마사 이모할머니가 반드시 교회에 가게 할 거야. 언니도 잘 알잖아.”
페이스도 물론 잘 알았다. 마사 이모할머니가 아는 것이라고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회는 반드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옷을 어떻게 입었건, 홀랑 벗었건 입었건 그런 것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반드시 가야 했다. 그것이 70년 전에 마사 이모할머니가 키워진 방식이었고, 마사 할머니가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이기도 했다.

“우나, 나한테 빌려줄 양말 없니?”
페이스가 처량하게 물었다.
“없어. 난 검은 양말이 한 켤레밖에 없다는 걸 알잖아. 게다가 그건 너무 끼어서 나한테도 겨우 들어가. 언니한테는 맞지 않는다고. 회색 양말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다리가 온통 기운 자국투성이야.”
우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절대로 그 줄무늬 양말을 신지 않을 거야.”
페이스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 양말은 보기도 끔찍하지만 신었을 때 느낌은 더 끔찍해. 내 다리가 드럼통보다 더 큰 것 같고 다리가 쿡쿡 쑤신단 말이야.”
“도대체 나도 언니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아빠가 집에 계신다면 가게 문을 닫기 전에 가서 새 양말을 사다달라고 할 텐데. 하지만 아빠는 아주 늦게야 돌아오실 거야. 아빠에게 월요일에 양말을 사달라고 해야겠어. 그리고 내일은 교회에 가지 않을 거야. 난 아픈 척할 거야. 그럼 마사 이모할머니도 날 집에 있게 해줄 거야.”
“그건 거짓말을 하는 거잖아, 언니.”
우나가 외쳤다.
“그럼 안 돼. 그건 못된 짓이라고. 아빠가 알면 뭐라고 하시겠어?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 아빠가 한 말 기억 안 나? 무슨 일을 당해도 항상 진실해야 한다고 하셨잖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고, 거짓된 행동을 해서도 안 된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고 하셨다고. 그러니까 그런 짓은 하면 안 돼, 언니. 그냥 그 줄무늬 양말을 신어. 딱 한 번만 신으면 되잖아. 교회에서는 줄무늬 양말을 신었다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을 거야. 학교 같지는 않을 거라고. 그리고 언니의 새 갈색 옷이 너무 길어서 줄무늬 양말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는 않을 거야. 마사 할머니가 몸이 자라도 입을 수 있도록 옷을 아주 크게 만들어서 다행이야. 언니는 그 옷을 보고 싫다고 했지만, 그렇지?”
“난 그 양말을 신지 않을 거야.”
페이스는 그 말만 반복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신지 않은 하얀 맨 다리를 묘석에서 내려놓더니 일부러 눈이 쌓인 차가운 풀 위를 걸었다. 이를 악물고 그 위에 서서 내려오지 않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페이스 언니.”
우나가 놀라 외쳤다.
“난 지금 감기에 걸리려고 하는 거야. 독한 감기에 걸려서 내일 아파버릴 거라고. 그럼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고 교회에 안 가도 되잖아. 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여기 서 있을 거야.”
페이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언니, 그러다가 정말 죽으면 어쩌려고? 폐렴에 걸려버릴지도 몰라. 제발 그러지 마, 언니. 집으로 가자. 가서 뭐 신을 것이 없나 찾아보자고. 어머, 저기 제리 오빠가 온다. 너무 다행이야. 제리 오빠, 페이스 언니를 저 눈 위에서 내려오게 해줘. 언니 발을 좀 보라고.”
“세상에! 페이스, 너 지금 뭐 해? 미쳤니?”

제리가 다그쳤다.
“아니, 안 미쳤어. 그러니까 상관하지 마.”
페이스가 외쳤다.
“그럼, 너 뭐 잘못해서 벌 받고 있는 거니? 그렇더라도 이건 옳지 않아. 그런 짓을 하면 병에 걸리잖아.”
“난 아프고 싶어. 난 벌주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날 내버려둬.”
“페이스의 구두와 양말은 어디 있지?”
제리가 우나에게 물었다.
“리다 마시에게 줘버렸어.”
“리다 마시에게? 왜?”
“리다는 신발도 양말도 신지 않았어. 리다 발이 꽁꽁 얼어붙었다고. 이제 언니는 신을 양말이 줄무늬 양말밖에 없는데 그걸 신기 싫어서 내일 교회에 가지 않으려고 아프겠다는 거야. 하지만 제리 오빠, 언니는 저러다가 죽을지도 몰라.”
“페이스, 당장 그 눈덩이에서 내려와. 아니면 내가 끌어내린다.”
제리가 명령했다.
“끌어내려 보시지.”
페이스도 지지 않고 외쳤다.
제리는 페이스에게 달려들어 팔을 붙들었다. 그런 다음 둘이 서로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우나도 페이스 뒤로 가서 밀었다. 페이스는 제리에게 자기를 가만 내버려두라고 소리를 질렀다. 제리도 지지 않고 페이스에게 바보짓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고, 우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쉬지 않고 서로 소리를 지르며 밀고 당기다 길 쪽 울타리까지 밀려갔다. 마침 헨리 워런 부부가 그곳을 지나다 아이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다 듣고 보았다. 당장 목사관 아이들이 묘지에서 듣기 거북한 욕설을 해대면서 심하게 싸우더라는 소문이 온 글렌 마을에 퍼졌다. 페이스는 발이 끊어질 듯 아파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자 봐주는 척하고 내려왔다. 셋은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페이스는 천사처럼 곤히 잠을 잤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감기 기운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그래도 전에 아빠와 오랫동안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나 차마 꾀병을 부리거나 거짓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보기 싫은 양말을 신고 교회에 가는 일만은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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