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0. 죽음

chillax | 2024.05.07 10:11:11 댓글: 0 조회: 96 추천: 0
분류교양서적 https://life.moyiza.kr/fiction/4566715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10



고통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죽음]






“자살이란 비참한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구원을 받는것이 아니라 단지 엉터리 구원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도덕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배치된다.”

많은 사람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많은 종교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연구했으며 사후 세계를 지공과 천국으로 나누기도 했다.

현실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면 죽음을 통해서 구원이나 해방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쇼펜하우어는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죽음을 통해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자살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삶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증가한다. 죽음을 통해 삶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이렇다 해도 살아가면서 가장 큰 고통으로 생각되는 상황에서 벗아날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은 죽음이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두뇌와 육신이 노화로 쇠퇴하는 것을 피할수 없고, 모든 현자를 기다리는 운명은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의 유혹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와 상관없이

세상은 잘 돌아간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인 자살이 얼핏 살려는 맹목적인 의지를 꺾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착각일 뿐이다.

개인이 몇 명 사라진다 해도 이 세계를 이루는 의지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개인의 고통이 사라졌다고 해도 세계의 고통의 총량에는 변함이 없다. 이 세계는 누군가의 생명이 사라져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는 후손으로 끊임없이 다시 채워진다. 따라서 자발적 파괴이자 자신의 고통만을 제거하려는 자살은 어리석은 짓이다.

마치 무지개를 구성한 하나의 물방울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무지개 자체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한결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비유한 무지개와 물방울은 자연 전체가 한 개체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우주를 가득 채운 삶에의 의지는 개인의 죽음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다. 자연은 개인이 아니라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무수한 꽃씨를 뿌리고 수천 개의 알을 뿌리면서 애쓴다.

물방울이 사라져도 무지개가 변하지 않듯이 나의 죽음으로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우주 전체로 보면 개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인은 언제나 희생될 수 있고 운명에 의해서 파멸될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우주 전체와 종족은 영원하지만 개인은 무상하다. 자연에서 그런 존재인 인간에게 죽음이란 개체성을 잊어버리는 잠이다. 이 세상은 인간 개개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정하다.



죽음은 고통을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그 당시 유럽에 유입된 인도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애견을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아트만은 힌두교의 기본 교의 중의 하나이며, 원래 숨쉰다는 뜻이다. 숨쉬는 생명인 아트만은 를 말하는데, 개인에 내재하는 원리를 뜻한다. 반면 브라만은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를 지칭한다. 따라서 아트만과 브라만은 각각 소우주와 대우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에 불과하며 그런 소우주를 포괄하는 브라만(대우주)이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실레노스의 이야기와 지혜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잘 나타나 있다. 숲속의 신 셀레노스는 가장 좋은 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최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없다: 태어나지 않는것, 존재하지 않는 것, ()가 가장 좋은 것이므로. 하지만 차선의 것은 네가 얻을 수 있다---당장 죽는 것이므로.”

인간은 죽음보다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더 고통을 느낀다. 현재를 긍정하는 사람은 삶이 끝이 없기를 기대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현재를 몰아내 마치 현재가 없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살아간다.

살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자살을 하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을 힘들어하며 죽음 이후 고통이 엇는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신을 믿고 종교를 믿는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는 종교를 통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라며 인생을 한탄하고 부정하지만 그 결과의 답이 빠른 죽음은 아니다. 단지 믿는 것만으로 종교는 답을 주지 않다.

사람은 자살, 열반, ‘무의지의 평정을 통해 해탈에 도달하려고 한다. 죽음에 대해 많은 종교와 과학이 설명하려 시도하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아직 없다. 삶에의 의지를 제약하는 죽음의 공포는 철학의 발단이자 종교의 단초다. 불사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죽음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두려움 때문이다.

자발적 죽음이 40대만의 일은 아니다. 세상이 힘들수록, 각박할수록 죽음으로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세계에는 아무것도 엇으며 종교를 통해 그런 현실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 세상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잘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의 깨달음에 일체개고가 있다. (일체개고: 一切皆苦 사람이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영생에 집착하여 온갖 고통에 빠져 있음을 이르는 말). 인도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고통에 대한 해법은 해탈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하는 생각을 지니면서 견디는 것이다.




고통 총량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겪을지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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