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도룡기 4-2

3학년2반 | 2022.03.04 07:00:45 댓글: 0 조회: 517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52810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제 2 장 괴짜들의 모임


장무기의 몸이 다시 허공을 날아오르는 순간 홀연 멀리서 낭랑
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설불득, 왜 이제서야 오는 거요?"

장무기를 포대에 짊어지고 있는 자가 대꾸했다.

"도중에서 사소한 일이 생겨 늦었소. 위일소는 벌써 와 있소?"

먼곳에 있는 자가 다시 말했다.

"아직 오지 않았소. 거참 이상하단 말야. 그가 이렇게 늦을 리
가 없는데..... 설불득, 혹시 오는 도중에 그를 보지 못했소?"

그 자는 물으면서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장무기는 내심 별일이 다 있다고 느껴졌다.

'이제 보니 이 사람의 이름이 정말 설불득(말못해)이구나. 그러
니 내가 이름을 물었을 때 말 못해(설불득)라고 대답했군. 세상
에 이런 이상한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니.....'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그는 이곳에서 위일소와 만나기로 약속한 모양이야. 주
아가 과연 무사할까? 그는 위일소와 친한 친구인 것 같은데 과연
날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설불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철관도형(鐵冠道兄), 우리 위형을 찾아봅시다. 아무래도 무슨
변고가 생긴 것 같소."

철관도인이란 자가 그의 말을 받았다.

"청익복왕은 누구보다도 꾀가 많고 무공도 탁월하니 별다른 사
고가 없을 것이오."

"이제까지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소."

이때 아랫쪽으로부터 제 삼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설불득, 땡중과 철관도사인지 돌팔이도사인지 몰라도 거기서
한가롭게 잔소리만 늘어놓지 말고 어서 이리 내려와 좀 도와 줘
야겠소! 큰일났소! 아주 큰일이 생겼소!"

설불득과 철관도인은 일제히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주전(周顚) 형이오? 대관절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소?"

이어 설불득이 혼자 중얼거리듯이 다시 말했다.

"음성에 힘이 없는 것을 보니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그는 철관도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곧장 장무기를 짊어진 채 아
랫쪽으로 뛰어내려갔다. 철관도인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어 철
관도인의 놀란 음성이 터졌다.

"앗! 주전이 업고 있는 자가 누구요? 아니..... 저건 위일소가
아니오?!"

설불득도 소리쳤다.

"주전, 당황하지 마시오. 우리가 도와 주겠소!"

주전이란 자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당황하긴 내가 왜 당황해! 곧 숨을 거둘 사람은 내
가 아니라 이 위일소인데!"

설불득이 그의 말을 받았다.

"위형이 어떻게 된 거요? 어디에 부상을 입었소?"

이렇게 물으며 걸음을 빨리 했다.

장무기는 포대안에서 흡사 구름을 타고 날으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나직이 한 마디 내 뱉었다.

"선배님, 일단 날 내려놓고 사람부터 구하는 게 시급하지 않겠
습니까?"

설불득은 갑자기 포대를 허공에서 세 바퀴 돌렸다. 장무기는 가
슴이 철렁했다. 만약 설불득이 포대를 휘두르다가 손을 놓는 날
엔 그 결과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설불득도 음성을 낮추어 말했다.

"이놈아,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나는 포대화상(布袋和尙) 설
불득이고, 뒤에 있는 자는 철관도인 장중(張中), 그리고 아래 있
는 자는 주전이다. 우리 세 사람에다가 냉면선생(冷面先生) 냉겸
(冷謙)과 팽영옥 화상을 합하면 바로 명교의 오산인(五散人)이
다. 넌 명교가 뭔지 아느냐?"

"압니다. 이제보니 당신도 명교의 사람이었군요."

"그렇다. 나하고 냉겸은 사람 죽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
만, 철관도인, 주전, 팽화상은 살인을 밥먹듯이한다. 그들이 만
약 네가 포대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 즉시 묵사발로 만들
것이다."

"난 그들에게 아무 잘못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맹랑한 녀석 봤나? 그들이 사람을 죽이는데 꼭 이유가 있
어야 하느냐? 죽고 싶지 않거든 그 속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라. 알겠느냐?"

장무기는 한 마디 쏘아붙였다.

"나더러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불득은 멍해지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런 고약한 녀석, 네가 알았다면 됐다.... 앗! 위
형은 어떻게 됐소?"

마지막 한 마디는 주전에게 묻는 것 같았다. 과연 주전의 꺼칠
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그는 끝장났소! 이젠 끝장이야!"

설불득의 음성이 이어졌다.

"음..... 위형의 심장이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군. 주전, 당신이
위형을 구해 줬소?"

"두말하면 잔소리지. 아니, 그럼 그가 날 구해 준 거라 생각했
소?"

이번엔 철관도인이 입을 열었다.

"주전, 그가 대관절 어딜 다친거요?"

주전의 대답은 간단했다.

"난 그가 송장처럼 빳빳하게 노변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
소. 그래서 모처럼 자비심을 베풀어 살려 주려고 몸을 만져 봤더
니 얼음장처럼 차가왔소. 그의 체내에 진기를 주입시켜도 소용이
없었소. 바로 그렇게 된 거요."

설불득이 말했다.

"주전, 자네의 말대로 정말 난생 처음으로 좋은 일을 했군."

"빌어먹을,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이고 간에 그를 살리려다가 한
독(寒毒)이 내 체내로 주입되어 오히려 나까지 목숨을 잃게 될
것 같소."

철관도인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체내에 스며든 한독이 그렇게도 심하단 말이오?"

주전은 코웃음을 쳤다.

"흥! 이 모든 게 인과응보가 아니겠소. 나하고 흡혈복쥐는 여지
껏 살아오면서 나쁜 일만 행하다가 모처럼 마음을 곧게 먹고 좋
은 일을 했는데 이런 꼴을 당했으니....."

설불득이 그에게 물었다.

"위형도 무슨 좋은 일을 했단 말이오?"

"그렇소. 그는 체내의 한독이 발작돼 사람의 피를 빨아먹어야만
했소. 당시 곁에 분명 계집애가 하나 있었는데도 피를 빨아먹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로 한 것이오."

장무기는 위일소가 주아의 피를 빨아 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
심 뛸 듯이 기뻐했다. 설불득은 포대를 툭 치고 나서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그 계집애는 도대체 누구요?"

주전이 대답했다.

"흡혈복쥐의 말에 의하면 백미 늙은이의 손녀라고 합디다. 그는
지금 우리 명교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절대 그녀의
피를 빨아먹을 수 없다고 했소."

설불득과 철관도인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건 정말 옳은 예기요. 백응(白鷹)과 청복(靑輻) 즉, 백독수
리와 청박쥐가 서로 아웅다웅하지 않고 손을 잡는다면 우리 명교
는 천하무적이 될 것이오!"

설불득은 위일소의 몸을 받았다.

"몸이 이렇게 차가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주전이 뜻밖의 제의를 했다.

"지금으로선 생사람의 피를 빨아먹게 하는 수밖에 없소. 한데
이 주위엔 잡아먹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설불득, 당신 포대 속에
있는 녀석을 위형에게 주는 게 어떻겠소?"

장무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보니 내가 포대속에 있다는 걸 벌써 알고 있었군.'

설불득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이 녀석은 본교에 대해 큰 은혜를 베푼 바
가 있소. 위형이 만약 그를 잡아먹는다면 오행기가 모두 목숨을
걸고 위형과 생사결단을 낼 것이오!"

철관도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럼 당신은 오행기를 굴복시키기 위해 그 녀석을 포대속에 넣
어왔단 말이오?"

설불득은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본교는 현재 사분오열되어 있소. 이런 어려운 판국에 천응교는
멀리서 도우러 왔다가 엉뚱하게도 오행기와 지난 일을 갖고 다시
맞붙게 되었소.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우린 자멸하고 말 것이오.
포대 속에 있는 자는 본교의 형제들이 다시 협심합력하는데 큰
공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위일소의 등 뒤 영대혈(靈坮穴)에 손바닥을
붙여 내력을 주입시켰다. 그것을 본 주전이 한숨을 내 쉬었다.

"설불득, 당신이 친구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것은 좋지만 자신
의 목숨이 달아나지 않도록 조심하구료."

철관도인도 앞으로 나섰다.

"나도 그를 돕겠소."

그는 설불득의 왼손을 잡았다. 설불득을 통해 자신의 내력을 역
시 위일소의 체내에 주입시켜 주었다.

밥 한 끼 먹는 시간이 경과되었을까? 위일소는 나직이 신음을
토하며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몸뚱아리는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
가왔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전, 철관도형, 도와줘서 고맙소."

그는 설불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생
사지교를 맺은 사이이므로 구태여 일부러 고맙다는 인사를 할 필
요가 없었다. 철관도인은 공력이 심후하지만 위일소의 체내에서
배출된 한독을 저항하느라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설불득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동쪽 산봉우리 쪽에서 홀연 금성(琴聲)이 쨍쨍 울리며 간
간이 맑은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주전은 이내 그 소리의 주인공
을 알아보았다.

"냉면선생과 팽화상이 온 모양이오."

그는 곧 음성을 높여 외쳤다.

"냉면선생, 팽화상,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있으니 빨리 오시오!"

금성이 다시 쨍쨍 울렸다. 알았다는 표시인 것 같았다.

팽화상이 묻는소리가 들려왔다.

"누..... 가..... 부..... 상을..... 입..... 었..... 소?"

그의 외침소리가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들려오며 산울림이 되
어 퍼져 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가까이 달려왔다.

"아니..... 위일소가 부상을 당했단 말이오?"

주전이 대답했다.

"그렇게 허둥대지 말고 우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시오. 냉면
형, 아무래도 당신이 수를 강구해 줘야겠소."

냉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자세한 경위도 묻지 않았다. 팽화상이 틀림없이 세세하게 물을
것이므로 자기는 구태여 기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과연 팽화상이 연방 질문을 내뱉고 주전은 뒤죽박죽 대꾸해 주
었다. 그간의 경위를 다 얘기해 주었을 무렵 철관도인과 설불득
도 운기조식을 마쳤다. 이번에는 팽화상과 냉겸이 내력으로 위일
소의 한독을 몸 밖으로 배출시켰다.

위일소와 주전의 원기가 약간 회복되자 팽화상이 말했다.

"나는 동북쪽에서 달려오는 도중, 소림의 장문인 공문이 사제와
공지, 공성 그리고 백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광명정(光明頂)으
로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소."

냉겸이 즉시 그의 말을 이었다.

"동쪽, 무당오협!"

그의 말은 매우 간략했다. 그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쓸데없는
말은 한 마디도 더하지 않는 성미였다. 그가 방금 내뱉은 여섯
글자는 '동쪽에선 무당오협이 공격해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당오협이 바로 송원교, 유연주, 장송계, 은이정, 막성곡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힘들여 입을 더 놀리지 않은 것이
다.

팽화상이 다시 말했다.

"육파가 합세하여 진격해 오며 차츰 포위망을 좁히고 있소. 오
행기가 몇 차례 접전을 했지만 상황이 매우 불리하오.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광명정으로 가야 할 것 같소."

주전이 버럭 화를 냈다.

"빌어먹을, 개 같은 소리 작작하시라고! 양소 그 녀석이 우리에
게 구원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오산인이 자발적으로 그를 도
우러 가란 말이오?!"

팽화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전, 만약 육파가 광명정을 공파하여 성화(聖火)를 꺼뜨린다
면 앞으로 우린 무슨 낯을 들고 살아가겠소? 양소가 우리 오산인
의 비위를 건드린 건 사실이오. 하지만 우리가 광명정을 지키자
는 것은 양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명교를 위한 일이 아니겠소?"

설불득도 한 마디 거들었다.

"팽화상의 말이 맞소. 양소는 비록 무례하고 건방지지만 그와의
사적인 원한보다도 명교를 수호하는 일을 앞세워야 할 것이오."

주전이 욕설을 터뜨렸다.

"개소리야, 개소리! 두 땡중이 한꺼번에 개소리를 하니 개소리
가 요란하군. 철관도인, 양소 그 녀석이 왕년에 어깨뼈를 으스러
뜨린 일을 벌써 잊었소?"

철관도인은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교를 수호하여 외적을 퇴치하는 일이 더 시급하오. 양소와의
빚은 외적을 물리친 후에 따져도 늦지 않소. 그 때 가서 우리 오
산인이 힘을 합친다면 양소도 굴복할 것이오."

주전은 흥! 하고 냉소를 날리며 이번엔 냉겸의 의사를 물었다.

"냉겸,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냉겸은 지체없이 한 마디 내뱉었다.

"같이 갑시다!"

주전은 대뜸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당신도 양소에게 굴복하겠다는 거요? 당시 우리 오산인은 어떠
한 상황이 닥친다 해도 교의 일을 관여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
는데, 그게 모두 개소리였단 말이오?"

냉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소리요!"

주전은 발끈하여 벌떡 일어났다.

"모두 개소리를 한 모양인데 난 짖은 일이 없소이다!"

철관도인이 그의 손을 잡았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우리에게 불리하오. 어서 광명정으로 갑시
다!"

팽화상도 주전을 달랬다.

"주전, 왕년에 교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물론 양소의 흉금이 좁았던 탓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
면 우리에게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외다."

주전이 다시 눈을 부라렸다.

"닥치시오! 우리 오산인 중에 어느 누구도 교주의 자리를 탐낸
자가 없거늘 무엇을 잘못했다는 거요?"

설불득이 나섰다.

"본교에서 일어난 과거지사에 대해 옳고 그릇됨을 따진다면 아
마 석달 열흘 동안 논쟁을 벌여도 결과가 나지 않을 것이오. 주
전, 내가 한 마디만 묻겠소! 당신은 명존화성(明尊火聖)의 제자
가 아니오?"

"누가 아니라고 했소? 왜 갑자기 그걸 묻는거요?"

"오늘 본교는 큰 어려움에 봉착해 있소. 그런데 우리가 수수방
관만 한다면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명존과 양교주(陽敎主)를
대할 수 있겠소? 당신이 만약 육파를 겁낸다면 가지 않아도 좋
소. 우리가 광명정에서 죽거든 나중에 유해라도 묻어 주시구료."

주전은 펄쩍 뛰며 냅다 설불득의 뺨을 후려쳤다.

"개소리!"

철썩 하는 소리가 들리며 설불득은 그에게 뺨을 맞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벌려 부러진 이빨 몇 개를 뱉어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뺨은 이내 불그죽죽하게 부어올랐다.

팽화상 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놀란 것은 주전 자신
이었다. 설불득의 무공은 주전과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으므로 충
분히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뺨은 맞은
것이다. 주전은 오히려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는 악을 쓰듯 소
리쳤다.

"설불득! 어서 내 뺨을 때리시오! 만약 때리지 않으면 당신은
사람도 아니오!"

설불득은 담담하게 웃었다.

"힘을 아껴 두었다가 적을 때려야지 왜 한집안 식구를 때리겠
소?"

주전은 대노하여 손을 들어올리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뺨을 때렸
다. 찰싹! 그도 곧 퉤! 하고 부러진 이빨 몇 개를 내 뱉었다.

팽화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주전, 이게 무슨 짓이오?"

"무슨 짓이냐고? 흥! 애당초 내가 설불득을 때린 게 잘못이었
소. 그래서 내 뺨을 때리라고 했는데, 출수를 하지 않으니 내 스
스로 자신의 뺨을 때려 속죄하는 도리밖에 더 있겠소!"

설불득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전, 당신과 나는 형제나 다를 바가 없소. 이제 우리 네 사람
은 광명정으로 달려가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까짓 뺨을
한 대 얻어맞은 게 뭐가 대수롭소?"

주전은 격한 감정이 북받쳐 그만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함께 가겠소! 양소와의 옛 일은 당분간 따지지 않겠소!"

팽화상은 매우 기뻐했다.

"정말 생각 잘 했소. 역시 우린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형제임에
틀림없구료!"

장무기는 포대 안에서 이들의 대화를 한 자도 빠짐없이 똑똑히
들었다. 그는 이 다섯 사람이 무공도 고강하지만 그보다 의리가
돈독한데 경의를 금치 못했다. 명교의 제자들이 한결같이 사악한
무리라는 강호의 일반 인식과는 다른 것 같았다. 아울러 명교에
이러한 고수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장무기가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포대가 위로 올려졌다.
아마 설불득 일행이 광명정으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주아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한 가지 걱정을 덜어낸 셈이다. 광명
정에 당도하면 어릴 적에 헤어졌던 양불회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
는데, 과연 그녀가 자기를 알아볼는지? 또한 육대문파가 광명정
을 공격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장무기는 결코 마
음이 편치 않았다.

설불득 일행은 이날 밤새도록 길을 재촉했다. 장무기는 포대 속
에서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다. 설불득은 가끔 포대의 끈을 풀어
그로 하여금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게 해 주었다. 다음날도 계속
길을 재촉했다. 오후쯤 되었을까, 장무기는 갑자기 포대가 땅에
질질 끌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으
나 나중에 우연히 고개를 쳐들다가 머리가 암석에 부딪치자 비로
소 낮은 동굴, 혹은 산중턱을 꿰뚫은 통로 안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통로 안은 한기가 대단하여 몸이 움츠러질 지
경이었다. 약 반 시간이 지나서야 통로를 빠져나와 다시 높은 지
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또 낮은 통로로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모두 다섯 군데 통로를 지났다.그제서야
주전의 냉랭한 외침이 들려왔다.

"양소! 흡혈복쥐와 오산인이 당신을 찾아왔소!"

잠시 후, 앞쪽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다.

"청익복왕과 오산인이 행차를 하셨는데, 이 양소가 미처 마중나
가지 못해 죄송하오."

주전이 다시 말했다.

"그 따위 마음에도 없는 말은 듣고 싶지 않소! 속으로는, 이 녀
석들이 다시는 광명정에 오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무엇 때문
에 제 발로 달려왔는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양소는 껄껄 웃었다.

"육파가 사면팔방에서 협공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청익복왕과 오산인이 대의(大義)
를 위해 나와의 사사로운 감정을 접어두고 이렇게 달려와 주신
것에 대해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주전이 냉소를 날렸다.

"그게 진심이라면 다행이군!"

양소는 곧 그들을 안내했고 나이 어린 동자를 시켜 향차와 술을
대접했다.

그러는 가운데 갑자기 동자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에 포대 속에 있는 장무기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
는 눈으로 볼 수 없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잠시 후 위일
소가 웃으며 말하는 게 들려왔다.

"양좌사(陽左使), 당신이 부리고 있는, 어린 동자를 상하게 한
데 대하여 나중에 필히 보답을 해 드리겠소."

그의 음성은 정기가 넘쳐 흘렀다. 장무기는 이내 깨달은 바가
있어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는 동자의 뜨거운 피를 빨아 먹어 체내의 한독을 억제시킨
거로구나.....'

양소가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에 보답은 무슨 보답이오? 청익복왕이 와 주신것만
해도 나로서는 더 없는 영광이라 생각하오."

이 일곱 사람은 모두 명교의 절정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한 자
리에 모이자 새로운 힘이 샘솟는 것 같았다. 술을 곁들여 식사를
마치자 이들은 적에 대항할 대책을 의논했다. 설불득은 포대를
한쪽에다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다. 장무기는 목이 마르고 허기
를 느꼈으나 설불득의 충고를 되새기며 감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일곱 명은 잠시 상의를 하고 나서 팽화상이 말했다.

"광명우사(光明右使)와 자삼용왕은 행방불명이고, 금모사왕 또
한 생사를 알 길이 없으니 그들을 제쳐놓고서라도, 현재로서 가
장 불행한 일은 오행기와 천응교의 마찰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는 사실이오. 며칠 전 정면 대결을 벌여 쌍방이 모두 큰 피해를
입었소. 만약 그들도 광명정으로 달려와 손을 잡고 적과 대항한
다면 육파가 아니라 십 이 파라 할지라도 우리 명교는 유리한 고
지를 선점할 텐데....."

설불득이 한쪽에 놓여 있는 포대를 발로 살짝 걷어차며 말했다.

"이 포대 속에 있는 녀석은 천응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한
편, 최근에 오행기에게도 은혜를 베푼 바가 있소. 나중에 어쩌면
이 녀석을 통하여 쌍방의 질분을 해결하게 될지도 모르오."

위일소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새로운 교주가 정해지기 전에는 본교의 분쟁이 그치지 않을 것
이오. 그러니 이 녀석이 제아무리 하늘을 날으는 재주가 있다 한
들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진 못할 것이오. 양좌사, 내가 한 마디
묻겠는데 허심탄회하게 대답해 주시오. 일단 강적을 퇴치한 후에
누구를 교주로 내세우겠소?"

양소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당연히 성화령(聖火令)을 갖고 있는 자를 교주로 추대할 것이
오. 그것이 바로 본교의 교칙이기 때문이오. 한데 왜 갑자기 그
것을 묻소?"

위일소가 즉시 그의 말을 받았다.

"성화령을 잃은 지 벌써 백 년이 가깝소. 그렇다면 성화령을 되
찾기 전에 명교는 교주를 내세울 수 없다는 뜻이 아니오? 육파가
감히 광명정으로 침공해 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본교에 통솔자가
없고 내부가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설불득이 나섰다.

"위형의 말이 맞소. 나는 어느 계파에도 소속돼 있지 않소. 누
가 교주가 되어도 좋으니 하루속히 교주를 정해야 하오. 설령 교
주가 아니더라도 좋소. 부교주 라도 있어 형제들을 호령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서 만족하오."

철관도인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나도 설불득의 말에 동감이오."

양소는 안색이 변했다.

"여러분들은 날 도와 외적을 퇴치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오,
아니면 날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온 것이오?"

주전이 대소를 터뜨렸다.

"하핫.....! 양소, 당신이 교주를 새로 추대하지 않으려는 속셈
이 뭔지 난 잘 알고 있소. 명교에 교주가 없는 한 광명좌사의 직
책이 가장 높기 때문이 아니오? 흥! 그러나 직위가 높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아무도 당신의 호령에 따르지 않으니 혼자의 힘
으로 오행기를 움직일 수 있나, 아니면 사대호교법왕(四大護敎法
王)을 지휘할 수가 있나? 우리 오산인만 하더라도 광명좌사 따위
는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소!"

양소는 대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 막강한 외적을 맞이해 나 양소는 여러분들과 이런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소. 그러니 명교의 존망에 대해 수수방관하겠다면
당장 하산을 하도록 하시오. 요행히 나 양소가 죽지 않는다면 나
중에 여러분들을 일일이 방문하겠소이다!"

팽화상이 얼른 나서서 만류했다.

"양좌사, 우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힙시다. 육파가 명교를 협
공하는 이 마당에 본교의 제자라면 누구나 교를 지켜야 할 책임
이 있소. 이건 당신 혼자만의 일이 아니외다."

양소는 냉소를 날렸다.

"본교 중엔 눈에 가시를 없애기 위해 이 양소가 육파의 손에 죽
길 바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을 것이오!"

주전이 즉시 따지고 들었다.

"방금 그 말은 누굴 겨냥해서 한 것이오?"

"당사자가 더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그럼 날 지칭해서 한 말이란 말이오?"

양소는 다른 곳에 시선을 준 채 그를 외면했다.

팽화상은 주전의 눈에서 이상한 광채가 발해지는 것을 발견하고
그가 어쩌면 양소에게 출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나섰다.

"옛말에 이웃과의 싸움 때문에 집안 싸움 사라진다는 말이 있지
않소? 자, 우선 외적에 대항할 대책을 상의합시다."

양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팽대사는 생각이 깊구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씨구! 그렇다면 팽땡중은 생각이 깊고 이 주전은 옹졸하다는
뜻이외까?!"

그는 황소고집이 발작돼 앞뒤 가리지 않고 소리쳤다.

"오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교주를 정해야겠소! 난 위일소를
교주로 추천하겠소. 흡혈복쥐는 무공도 높고 지모(智謀)도 뛰어
났으니 본교에서 그를 따를 인물이 없을 것이오!"

사실 주전은 평상시 위일소와 별로 교분이 두텁지 못했다. 오히
려 서로 좋은 감정보다 나쁜 감정이 더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일부러 양소의 심사를 긁어놓기 위해 위일소를 교주로 앞
세운 것이다.

양소는 즉시 광소를 날렸다.

"하핫..... 내가 보기엔 주전을 교주로 내세우는 게 더 좋겠소!
명교는 현재 사분오열되어 있으니 내친 김에 우리의 추대 교주를
내세워 아예 풍지박산을 면하면 만사가 깨끗이 해결될 게 아니겠
소!"

주전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튀어나왔다.

"개 주둥아리에서 상아가 나올 리 없다더니 이런 죽일 놈의...
....."

그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냅다 양소의 면상을 향해 쌍장을 뻗어
냈다. 양소는 설불득처럼 순순히 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도 지
체없이 우장(右掌)을 밀어내 주전이 뻗쳐낸 손을 맞이해 갔다.

위일소는 양소의 무공을 잘 알고 있었다. 주전은 비록 체내의
한독이 제거됐다고 하나 원기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 양소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위일소는 다급
한 나머지 잽싸게 일장을 뻗어 주전 대신 양소의 장풍을 맞받았
다. 순간, 두 사람의 손이 허공에서 맞닥뜨려졌다. 뜻밖에도 아
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양소는 비록 주전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으나 같은
명교의 형제라는 점을 감안하여 차마 살수를 전개할 수 없어 이
번에 전개한 일장에 전력을 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가 갑자
기 위일소로 바뀔 줄이야! 위일소의 한빙면장(寒氷綿掌)과 맞닥
드리는 순간, 양소는 오른팔에 심한 충격을 느끼며 한 갈래의 음
한지기(陰寒之氣)가 팔을 통해 체내로 뻗쳐 들어왔다.

이렇게 되자 양소의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주전등이
광명정에 나타난 것은 외적을 대항하는데 협력하기 위함이 아니
라 그것을 구실삼아 자기를 제거하려는 걸로 오해하게 되었다.
하여 즉각 내력을 끌어올려 정면으로 맞섰다. 이와 때를 같이하
여 주전이 상식 밖의 행동을 취했다.

"양가야! 내 장풍의 맛을 보아라!"

그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있었다. 그가 내 뻗은
두 번째 장풍이 곧장 양소의 가슴을 향해 휘몰아쳐 갔다. 그의
이러한 행동이 양소의 오해를 더욱 가중시켰다.

설불득이 황급히 소리쳤다.

"주전, 이게 무슨 짓이오!"

팽화상도 외쳤다.

"양좌사, 위복왕! 어서 손을 거두시오!"

그는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왼손을 쭉 밀어내 주전의
우장에 붙였다.

설불득이 다시 소리쳤다.

"주전, 둘이서 한 사람을 공격하는 법이 어디있소!"

그는 손을 뻗어서 주전의 어깨를 나꿔잡았다. 그를 뒤로 끌어내
기 위함이었다. 한데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주전의 몸이 희미하
게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내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설불득
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광명좌사의 공력이 대단하여 본
교의 절정 고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단 이장에 주전
에게 내상을 입힌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주전의 우장과 양소의
좌장이 계속 맞붙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소리쳤다.

"주전, 형제끼리 이렇게 목숨을 내걸고 싸울 필요가 있겠소?"

그는 상대방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이번에는 양소에게 말했다.

"양좌사, 속히 손을 거두시오!"

이 순간, 주전의 몸이 비틀거리며 한 갈래의 뼈를 에일 듯한 한
기가 손바닥을 통해 곧장 가슴으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흠
칫했다.

'이것은 위일소의 독특한 한빙면장인데, 어찌 양소가 주전에게
전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서둘러 공력을 끌어올려 한기에 저항했다. 그러나 한기가
갈수록 그 강도가 심해져 이내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철관도인과 팽화상도 일제히 출수하여, 한 사람은 주전을 돕고
한 사람은 설불득을 호위했다. 네 사람이 힘을 합치니 그런대로
한기를 견뎌낼 것 같았다. 그러나 양소의 장심(掌心)을 통해 뻗
쳐오는 힘줄기가 엄청나게 강해졌다가 다시 느슨해지며 시시각각
으로 변화를 일으켰다. 네 사람은 감히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장을 거두는 순간 양소의 손에서 뻗쳐오는 엄청난 힘줄기에 설령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중상을 입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팽화상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양좌사! 강적을 눈앞에 두고 우리끼리 이게 무슨....."

그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열어 말을 내뱉는 새에 무지막지한 한기가 체내로 스며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태가 차 한 잔 마시는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냉면선생
냉겸은 줄곧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한쪽에서 냉철한 표정으
로 지켜보았다. 그가 보기에 위일소와 사산인의 표정이 모두 긴
장으로 굳어 있는 반면, 양소는 태연자약했다. 이 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양소의 무공이 비록 높다 해도 위일소와 백중지세일 것이다.
한데, 설불득 등 넷까지 합세했으니 양소가 당해 내지 못해야 당
연하데 어째서 도리어 여유작작한 것일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
군.....'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해답을
얻지 못했다.

이때 주전이 소리쳤다.

"냉면귀(冷面龜)! 어서..... 녀석의 등을..... 공격....."

냉겸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섣불리 출수하지 않았
다. 이런 상태에서 설령 자기가 합세한다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품속에서 은으로 정
교하게 만들어진 다섯 자루의 작은 붓을 꺼내 손에 꼬나쥐었다.

"이 오필(五筆)로 곡지, 거골, 양곡, 오리, 중도 다섯 군데 혈
도를 노리겠소!"

그가 사전에 명시한 다섯 군데 혈도는 모두 손과 발 부위에 있
어 치명적인 요혈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전에 그것을 밝힘으로써
양소로 하여금 손을 거두게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미리 통지한
것이다.

양소는 빙긋이 웃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냉겸이 다시
외쳤다.

"그럼 실례해야겠소!"

말을 내뱉자마자 손을 살짝 떨치니 다섯 줄기의 은빛 광채가 양
소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양소는 뻗어냈던 왼팔
을 갑자기 가슴 안쪽으로 모으며 주전 등 네 사람을 끌어당겨 방
패로 삼았다. 순간, 주전과 팽화상의 나직한 신음이 터졌다. 다
섯 개의 소필 암기가 그들 두 사람의 몸에 꽂힌 것이다. 주전이
두 개, 팽화상이 세 개를 맞았다. 다행하게도 냉겸은 양소를 상
하게 하기 위해 암기를 발출한 것이 아니고 두 사람이 당한 부위
가 또한 혈도가 아니므로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 놀라운 일이 못 되었다.

진짜 놀란 일은 팽화상의 외침에서 비롯되었다.

"앗! 건곤이위신공이다!"

그의 외침에 냉겸 등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건곤이위신공!

그것은 명교 역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무공 중에 가장 무서운 무
공이었다. 그 근본적인 이치는, 자신의 잠재력을 우선 격발시켜
상대방의 힘을 흡수해 다시 제 삼의 적을 공격하는 것으로서 별
로 오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신기한 변화는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전임 교주였던 양정천(陽頂天)이 세상을 떠난 후로부터 명교에
서 이 신공을 구사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팽화상 등 여섯 명
은 양소에 의해 이 신공이 재현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확연히 알았다. 양소가 위일소의 장력을 흡
수해 사산인의 공력을 이용해 위일소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양소가 시종일관 태연자약할 수 있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
었다.

냉겸은 스스로 턱을 끄덕이며 말했다.

"축하! 무악의!"

그의 말은 간단했다. '축하'라는 말은 양소가 명교에서 실전된
지 오래 된 건곤이위신공을 터득했다는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며,
'무악의'는 피차 악의가 없으니 어서 손을 거두라는 간곡한 부탁
이었다.

양소는 그가 평소에 말수가 적은 반면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악의'라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곧 껄껄 웃으며 말했다.

"위형, 사산인, 내가 하나, 둘, 셋을 셀 테니 동시에 장력을 거
둡시다!"

위일소와 사산인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천천히 외쳤다.

"하나, 둘, 셋!"

셋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양소는 건곤이위신공을 거두었는데,
그 찰나 한 갈래의 비수처럼 예리한 지풍이 등심 신도혈을 파고
들었다.

양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악랄한 위복왕! 비겁하게 기습을....."

그는 반사적으로 장풍을 떨쳐내려 했는데 위일소도 비틀거리더
니 그 자리에 쓰러졌다. 누구에게 암수를 당한 게 분명했다.

양소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숱한 싸움을 치루어 왔으므로 창졸간
에 생긴 변화에도 당황하지 않고 앞으로 미끄러지며 일단 등 뒤
에서 다시 뻗쳐올 암습을 피하는 동시에 몸을 돌렸다. 순간, 주
전, 팽화상, 철관도인, 설불득도 모두 땅에 쓰러져 있고 냉겸이
회색 장포를 입은 자에게 장풍을 떨쳐내는 게 시야에 잡혔다.

회의인과 냉겸의 장풍이 맞닥뜨러지자 냉겸의 입에서 나직한 신
음이 새어나왔다.

양소는 냉겸을 돕기 위해 또 한 모금의 진기를 끌어올리며 앞으
로 몸을 솟구치려 했는데, 돌연 한 줄기의 빙백 같은 차가운 기
운이 신도혈로부터 급상승하여 삽시간에 신주, 도도, 풍부 등 전
신의 독맥(督脈) 각 혈도로 퍼지는 것을 의식했다.

양소는 내심 아뿔사를 토했다. 상대방의 무공은 그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고강하며, 수단 또한 악랄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적은
자기와 위일소, 사산인이 일제히 공력을 거두는 그 간발의 기회
를 노려 전광석화처럼 기습을 전개한 것이다. 양소는 얼른 진기
를 끌어모아 체내에서 유동되는 한기에 대항해야 했다.

그런데 이 한기는 위일소가 전개한 한빙면장의 장력과 판이하게
틀렸다. 한 갈래의 실처럼 가느다란 빙선(氷線)이 독맥을 따라
급속도로 유동되며 혈도를 지날 때마다 마비 현상이 왔다. 만약
정면으로 적을 맞이했다면 호신진기(護身眞氣)가 있어 절대 어떠
한 지풍도 침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기치 못한 상
황에서 암습을 당했으니 억지로 이를 악물고 버텨야만 했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우장을 떨쳐내려 했으나 돌연 온
몸에 극렬한 진동이 일며 끌어올렸던 장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졌
다. 이 무렵 냉겸은 이미 상대방과 이십여 초식을 겨루었다. 그
는 완전히 궁지에 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위태로왔다.
양소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냉겸이 오른쪽
발을 걷어차 내는 순간 상대방은 잽싸게 옆으로 미끄러지며 그의
팔에 지풍을 적중시켰다. 냉겸은 비틀거리더니 곧 뒤로 쓰러졌
다.양소는 놀라움과 분노가 겹쳐 체내에 남은 마지막 진력을 모
조리 끌어올려 상대방의 가슴팍을 강타해 갔다. 그러나 역부족이
었다. 회의인이 튕겨낸 지풍에 팔꿈치 부위 소해혈이 적중돼 이
내 전신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회의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광명좌사는 과연 명불허전이군. 나의 현음지(玄蔭指)를 두 번
씩이나 당하고도 스러지지 않으니 정말 대단하오."

양소가 이를 갈아부쳤다.

"너의 탄지공(彈指功)은 소림의 수법임에 분명하지만, 이 현음
지는..... 흠! 소림파엔 이런 음독한 무공이 있을 리 만무하다.
너의 정체가 대관절 무엇이냐?"

회의인은 껄껄 웃어제쳤다.

"빈승은 원진(圓眞)이라 하외다. 빈승의 스승은 법명이 공견(空
見)이시니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이번에 육대문파
가 손을 잡고 소탕군마에 나섰으니 여러분들이 소림제자 손에 죽
음을 당하는 건 당연지사가 아니외까?"

양소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육대문파라면 정정당당하게 한 판 승부를 걸어야 할 게 아니
냐? 공견신승은 협의지심으로 천하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
는데, 너같이 비겁한 제자가 있을 줄이야....."

여기까지 말한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 앉았
다.

원진은 다시 광소를 터뜨렸다.

"하핫..... 기습을 노리는 것도 병법 중에 하나이거늘. 나 혼자
의 힘으로 명교의 칠대고수(七大高手)를 쓰러뜨렸는데 뭐가 억울
하단 말이오?'

양소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어떻게 이곳 광명정까지 잠입해 들어왔느냐? 이 비밀 통
로를 어떻게 알았는지 솔직하게 얘기를 해 준다면 나 양소는 죽
어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양소로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광명정까지 올라
오는 비도(秘道)에는 수십 군데 관문이 있어 관문마다 명교 제자
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무사히 이곳까지
올라와 기습을 전개한 것일까?

원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당신네 마교에선 광명정을 난공불락의 절지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 소림승이 보는 견지에선 탄탄대로에 불과하오.
당신네들은 모두 나의 현음지를 당했으니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이승으로 가지 못하고 저승으로 가게 될 것이오. 빈승은 곧 좌망
봉으로 달려가 수십 근의 화약을 매복시킨 후 다시 마교의 마화
(魔火)를 종식시킬 작정이오. 그러면 그 무슨 천응교니 오행기가
허겁지겁 달려올 것이고, 빈승은 때맞추어 화약을 터뜨리면 한때
나마 세상을 주름잡던 마교도 영원히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오."

양소 등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대방의 행
동거지로 보아 방금 한 말을 필히 행동에 옮길 것이다. 그의 흉
계가 성공을 거둔다면 삼십 삼 대(代)를 면면히 이어온 명교의
오랜 명맥이 이 소림승에 의해 멸하게 될 것이다.

원진은 갈수록 득의양양해졌다.

"명교에는 비록 고수가 많지만 서로 아웅다웅하며 내분이 그칠
날이 없으니 자멸을 당하는 게 필연적인 귀결이 아니겠소? 오늘
일만 해도 만약 당신네 일곱이 서로 다투지 않았다면, 내가 제아
무리 광명정까지 무사히 잠입해 들어온들 일격에 당신네들을 전
부 굴복시킬 수야 있었겠소?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니 과히 날 원
망하지 마시오."

양소, 주전 등은 자신들의 죽음과 명교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이러한 말을 듣자, 지난 이십 년간의 일을 생각하며 모두 후회막
급했다. 솔직히 말해 원진의 말도 전혀 일리가 없는 게 아니었
다.

주전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양소! 내가 죽일 놈이오. 내가 잘못했소! 당신은 비록 내 맘에
안 들지만 교주로 추대하였다면 오늘과 같이 교주가 없이 명교가
멸망하는 것보다야 나았을 것이오!"

양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슨 덕을 쌓았다고 감히 교주의 자리를 탐하겠소? 잘못
은 모든 사람에게 있소. 우린 이제 구천에 가더라도 역대 교주를
뵐 면목이 없을 거요!"

원진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왕년에 양정천이 마교
의 우두머리를 하면서 그 얼마나 기고만장했소이까? 그가 살아서
오늘 명교가 멸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 하는 건
데..... 으악!"

여기까지 말한 그는 별안간 짤막한 비명을 내질렀다. 실로 뜻밖
의 변화였다. 원진은 위일소가 난데없이 전개한 일장에 등줄기를
강타당한 것이다.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위일소도 원진이 반
사적으로 전개한 지풍에 가슴 부위 당중혈이 찍혔다. 두 사람은
모두 비칠비칠 뒤로 몇 걸음씩 물러났다.

위일소는 앞서 원진의 지풍을 맞아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내력이
남보다 한 수 위인지라 그 즉시 반항할 힘을 완전히 상실한게
아니었다. 단지 기절한 척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원진이
득의양양해 있는 틈을 타서 결정적인 기습을 가한 것이다. 그는
은천정, 사손 등과 함께 명교의 사대호교법왕 중에 한 사람이니
만치 공력이 대단했다. 게다가 명교의 존망이 달려 있으므로 자
신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한 채 사력을 다해 일장을 전개한 것이
다.

한빙면장의 장력이 체내로 스며들자 원진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비릿한 기혈이 가슴팍으로부터 목구멍으로 용솟음쳐 올라 심한
구역질을 느꼈다. 그는 진력을 끌어올려 몸을 고정 시키려 했으
나 천지간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주
저앉아 운기하며 한빙면장의 한독에 저항했다.

한편, 위일소는 거듭 현음지를 당하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뒤로 벌렁 나자빠져 움직이지 않았다. 삽시간에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여덟 명의 고수들은 모두 중상을 입어 꼼
짝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제각기 운기료상하며 한
순간이라도 먼저 회복되길 바랐다. 그래야지만 상대방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양소 등으로서는 명
교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명교의 제자가 나타난다면 설령 무공을 모른다
해도 몽둥이로 간단히 원진을 때려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는 자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양소
는 위일소 등과 조용히 대책을 세우기 위해 부름이 있기 전엔 아
무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분부를 해 두었다. 게다가 양소의 시
중을 들어온 유일한 동자를 위일소가 잡아먹었으니 나머지 사람
들은 혼비백산하여 멀찌감치 달아났기 때문에 설령 부름이 있어
도 선뜻 달려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 제 4 권 2 장 끝 -----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제 4 권


제 3 장 벗겨지는 비사(秘事)


장무기는 포대 안에서 비록 바깥에서 일어난 일은 보지 못했지
만 모든 경위를 똑똑히 들었다. 지금 주위가 쥐죽은 듯이 조용하
지만 짙은 살기가 감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갑자
기 설불득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봐, 포대 안에 있는 친구! 우릴 좀 도와줘야겠다!"

장무기는 멍해서 물었다.

"어떻게 도우라는 겁니까?"

원진은 단전의 진기가 차츰 모아지고 있는 차에 포대안에서 사
람의 음성이 들리자 소스라치게 놀라 진기가 즉시 역류하며 온몸
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위일소 등을 상대하는데만 신경을 집
중시켰을 뿐 한쪽에 놓여 있는 포대 속에 사람이 들어 있으리라
곤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 역시 중상을 입어 꼼짝할 수 없는 형
편이다. 이젠 끝장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설불득이 다시 소리쳤다.

"그 포대를 천사백결(天絲百結)로 묶었으니 나를 제외하고 아무
도 풀 수 없다. 하지만 넌 일어설 수 있겠지?"

장무기가 대답하며 포대 속에서 일어났다.

설불득이 다시 말했다.

"네가 의협심을 앞세워 예금기 형제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듯이
우리의 목숨도 네 손에 달려 있다. 이쪽으로 걸어와 악승(惡僧)
을 때려 죽여라!"

장무기는 망설이며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설불득은 재촉했
다.

"이 악승이 우리에게 저지른 비겁한 행위를 넌 전부 들어서 알
고 있을 것이다. 네가 만약 주저한다면 명교의 수만 명이나 되는
인명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를 죽이는
것만이 공덕을 쌓는 일이며, 지용(智勇)을 겸비한 협의도의 본분
이다."

장무기는 그래도 엉거주춤하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원진이 소리쳤다.

"소형제, 자네도 이들에게 붙잡혀 온 모양이군. 게다가 난 자네
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떻게 날 죽일 수 있겠나? 이번 기회
에 이들 마교의 무리들을 모두 처치해 준다면 자네야말로 무림의
겁난(劫亂)을 구한 소년 영웅이 될 걸세."

쌍방은 모두 숨을 헐떡이며 장무기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장무기는 입장이 매우 난처했다. 그가 판단하기로는 원진 화상
이 기습을 가한 행위는 비겁했다. 그렇다고 해서 반항할 힘을 잃
은 그를 무턱대고 죽일 수도 없었다. 만약 자기가 원진에게 일장
을 내리친다면 영원히 명교 편에 서서 육대문파와 적대시하게 될
것이며, 태사부와 무당육협, 주지약과도 등을 돌려야 할 입장이
된다.

설불득이 다시 재촉을 하자 장무기는 가부간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설불득 대사, 솔직히 말씀드려 저의 입장은 난처합니다. 이 소
림의 대화상을 상해하지 않고 여러분들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 방법에 따르겠습니다."

설불득이 내심 투덜거렸다.

'지금의 형국은 상대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할 판이데 어
떻게 쌍방을 다 보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팽화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형제, 자네의 인의지심(仁義之心)에 대해 경의를 표하네. 그
럼 우선 원진 가슴의 옥당혈(玉堂穴)을 찍게. 그러면 단지 몇 시
진 동안 자력을 사용할 수 없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네. 우리
사람을 시켜 그를 광명정 아래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하겠네.
옥당혈이 어딘지 알고 있겠지?"

장무기는 의술에 능통하므로 옥당혈을 찍으면 단전의 진기를 끌
어올리는데 얼마 동안 지장을 줄 뿐 그 이상 신체에 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곧 대답을 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원진이 소리쳤다.

"소시주, 절대 저들에게 속지 말게. 저들이 약속을 지킬 것 같
나? 일단 내력이 회복되면 즉시 날 죽일 걸세."

주전이 대뜸 욕설을 터뜨렸다.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우리가 널 살려 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찌 그 약속을 어길 수 있겠느냐? 명교의 오산인을
장터의 잡배로 취급하느냐?!"

장무기는 양소와 오산인이 한 번 한 약속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
라 믿었다. 단지 위일소가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 선배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위일소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나도 이번만은 그를 살려 보내겠다. 다음에 만나 다시 생사결
단을....."

그의 음성은 차츰 미약해졌다. 장무기는 그에게 다짐을 받았으
니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좋습니다. 여러 선배님들은 모두 당세의 영웅호걸이니 약속을
어기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원진대사, 그럼 후배가 실례를 범해
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원진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포대 속에 들어 있
기 때문에 굼벵이처럼 걸음이 느렸다. 그러나 원진 앞에 이를 수
는 있었다. 포대를 뒤집어 쓰고 천천히 옮겨오는 모습은 우스꽝
스러웠으나 아무도 웃는 자가 없었다. 장무기는 원진의 호흡소리
를 듣고 두 자의 간격을 유지한 채 걸음을 멈추었다.

"원진대사, 후배는 쌍방 어느 쪽이 상해를 입는 것도 원치 않기
때문에 부득이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원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난 꼼짝달싹도 할 수 없으니 마음대로 해 보아라!"

접곡의선 호청우가 죽은 후로부터 혈도를 분별하는 기술에 있어
서는 장무기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는 비록 포대 속에 들어 있
었지만 정확하게 원진의 옥당혈을 향해 찍어갔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느닷없이 양소 등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앗! 어서 손을 거둬라!"

그러나 장무기는 이미 손가락에 충격을 느끼며 한 갈래의 냉기
가 손가락 끝을 통해 뻗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흡사 감전된
듯 이내 몸이 움츠러들었다. 주전, 철관도인 등이 일제히 욕설을
터뜨렸다.

"이런 죽일 놈의 땡중아! 끝까지 비겁한 수를 쓰다니.....!"

장무기는 전신이 오들오들 떨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원진은 비록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안간힘을
다해 손가락을 자기의 옥당혈 앞에 세워놓은 것이다. 장무기는
포대 속에서 그것을 알 리가 만무하여 결국 쌍방의 손가락 끝이
맞부딪치는 순간 원진이 현음지력이 포대를 사이에 두고 그의 체
내로 뻗쳐온 것이다. 이번에 원진은 체내에 남은 모든 진력을 손
가락에 집결시켰으므로 쌍방의 손가락 끝이 맞부딪치자 이내 온
몸이 측 늘어지며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해 송장과 같았다.

대청 안에 본디 여덟 명이 중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었는데 이
제 장무기 하나가 더 늘어났다.

주전은 성질이 급해 숨을 제대로 쉬기도 곤란한 상태인데도 계
속 원진에게 욕을 퍼부었다.

원진은 이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탈진했지만,
속으로는 양양해 했다. 포대 속에 있는 녀석은 자기의 현음지를
맞아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는 한
시진 후면 흩어진 진기를 다시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역시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대청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반 시진쯤 지나자 네 자루의 촛불
마저 꺼졌다. 주위는 이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양소 등은
원진의 호흡이 차차 정상을 되찾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네들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운공을 시도할
때마다 현음지의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단전으로 침투해 몸을
심하게 떨어야만 했다. 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자꾸 흐름에 따라 실망은 절망으로 변했다. 이젠 오히려 원진이
좀더 빨리 회복되어 자기들을 속시원히 죽여 주길 바라는 마음이
었다.

오랜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설불득이 처연하게 한숨을 내쉬
며 입을 열었다.

"팽화상, 우린 몽고 오랑캐를 중원에서 쫓아내기 위해 노심초사
해 왔지만 결국 이 모양이 되었구료. 보아하니 한족(漢族)의 겁
난이 얼마 동안 더 지속되어야 할 모양이오."

장무기는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한 가닥의 열기로서 현음지의 한
기를 저항하며 설불득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절로 이상하
게 느껴졌다.

'몽고 오랑캐를 몰아내기 위해 분주해 왔다니? 그럼, 악명이 높
은 마교가 천하의 백성들을 위해 이바지해 왔단 말인가?'

팽화상의 입에서도 한숨섞인 말이 내뱉어졌다.

"설불득, 내 일찌기 뭐라고 했소? 몰아낼 수 없으니 천하의 영
웅호걸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당신의 사형 노성
구(盧聖求)와 구로파(九老波)의 임창식(林昌植), 종우산인(鐘佑
散人), 석부거사(錫父居士) 등 칠불도옹(七不倒翁)이 왕년에 의
거를 일으켜 실패한 것도 외부의 세력을 흡수하지 못한 탓이 아
니었겠소?"

주전이 우악스럽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도 두 땡중이 입방아를 찧고
있군. 내가 듣기엔 다 개소리야! 우리 명교는 집안 식구끼리 대
가리가 터져라 싸움질하는데 무슨 수로 오랑캐를 몰아낼 것이며,
팽화상은 다른 문파와 손을 잡아야 된다고 했는데 제기랄, 손을
잡지 않아도 우리를 몰살시키려는데 아예 호랑이를 집안으로 끌
어들이라는 말이오? 그 모든 게 개나발이 아니고 뭐겠소?"

철관도인도 끼어들었다.

"만약 양교주만 살아 있었다면, 육대문파를 벌써 굴복시켜 우리
휘하에 예속시켰을 것이외다!"

주전이 광소를 터뜨렸다.

"하핫..... 호랑말코 같은 철관도사의 개나발은 더욱 못 들어
주겠군. 제기랄, 양교주만 살아 있었다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
로..... 으윽.....!"

현음지의 한기가 다시 폐부 깊숙이 뚫고 들어갔는지 주전은 갑
자기 신음을 토했다. 때맞추어 냉겸이 소리쳤다.

"닥쳐!"

이 한 마디를 내뱉자 찬물을 끼얹은 듯 모두 조용해졌다. 장무
기의 뇌리에 여러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어우려졌다.

'보아하니 명교가 항간에 마교로 낙인 찍힌 것은 그릇된 것인지
도 모른다.....'

그는 확실한 것이 알고 싶어졌다.

"설불득 대사, 귀교의 교리(敎理)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설불득은 다소 의아해 했다.

"응? 자네 아직 죽지 않았군. 따지고 보면 자넨 명교 때문에 공
연히 목숨을 잃게 된 셈이니 미안하게 생각되네. 어쨌든 자네는
얼마 살지 못할 테니 본교의 비밀을 털어놓아도 상관없겠지. 냉
면선생, 그렇지 않소?"

냉겸은 침묵을 지켰다. 그의 침묵은 이런 경우에서 묵인으로 해
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설불득이 다시 말했다.

"소형제, 우리 명교의 뿌리는 파사국(波斯國:페르시아)에서 비
롯된 것으로 당대(唐代)에 중원으로 전해져 왔네. 당시만 하더라
도 도처에 대운공명사(大雲光明寺)가 세워졌는데, 그게 바로 우
리 명교의 사원(寺院)이라네. 우리 명교의 근본 취지는 행선제악
(行善除惡)으로 중생의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 금은재물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육식과 술을 멀리하며 명존(明尊)을 숭
배하네. 명존은 바로 화신(火神)이며, 또한 선신(善神)이지. 그
러나 역대 왕조에 거쳐 탐관오리들이 본교를 핍박하였기에 형제
들이 왕왕 분연히 거사를 일으켜 북송(北宋) 방랍(方臘) 방교주
이래 그러한 예가 부지기수였네."

장무기도 방랍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방랍은 북송 선
화(宣和) 연대 사대구(四大寇) 중에 하나로서, 송강(宋江), 왕경
(王慶), 전호(田虎)등과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제보니 방랍이 귀교의 교주였군요."

설불득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네. 본교의 형제들이 조정관부와 대립해 왔기 때문에 조
정에선 우리를 마교로 몰아 모든 행동을 엄히 금지시켰네. 우린
관부의 이목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일거일동에 은밀을 기해야 했
네. 그러한 과정에서 각 문파와도 원한이 누적되어 물불과 같은
사이가 형성된 걸세. 물론 본교 형제들중에 자신의 무공을 믿고
살인, 방화, 간음 등의 비행을 일삼아 온 자도 있었기에 본교의
명예가 갈수록 나빠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설불득은 말끝을 흐렸다. 이때 장무기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앗? 어째 내 몸에 한기가 사라졌지.....?'

그가 처음 원진의 현음지를 당했을 때는 오한을 견디기가 어려
웠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 그 한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물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열 살
때 현명패천장을 맞아 열 일곱 살이 되어서야 그 음독이 제거되
었다. 그 칠 년 동안 밤낮으로 한독과 씨름해 왔기 때문에 호흡
서부터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한독을 대항하는 일과 결부되었다.
하여 구태여 의식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한을 퇴치할 수 있었
다. 더군다나 그가 수련한 구양신공이 비록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했지만 체내의 양기(陽氣)가 팽배되어 있어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되자 음독이 스스로 말끔히 제거된 것이다.

설불득의 말이 계속되었다.

"송조(宋朝)가 몽고 오랑캐 손에 멸망한 후 명교는 더욱 조정과
맞서게 되어 오랑캐를 중원에서 몰아내는 것을 과업으로 삼게 되
었네. 그런데 전임 교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교내의
고수들이 교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암투를 벌여 기강이
일락천장된 걸세. 아울러 각 문파와 원한도 더욱 깊어졌고. 원진
화상, 내가 여지껏 한 말이 사실임을 인정하겠지?"

원진은 냉소를 날렸다.

"물론 인정하고 말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가 구태여 거
짓말을 할 필요가 있겠소?"

이렇게 말하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양소와 오산인 등은 모두 크게 놀랐다. 그들은 원진이 자기네들
보다 먼저 회복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빨리
닥쳐오리라곤 뜻밖이었다. 원진의 공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후한 게 분명했다.

양소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공견신승의 제자답게 과연 대단하군. 자, 이젠 죽을 준비가 되
어 있으니 앞서 내가 궁금하게 여긴 일을 솔직히 얘기해 주겠느
냐?"

원진은 징그럽게 웃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말투는
부상을 당하기 전보다 거칠어졌다.

"죽어서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하니 얘기해 주겠다. 내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너희들의
교주였던 양정천과 그의 부인이 친히 날 이곳으로 데려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양소는 이내 낯빛이 변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원진은 거짓말
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진의 말을 받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주전이 이미 욕설을 터뜨렸다.

"이런 낮도깨비가 물어갈 놈 같으니라고! 그 무슨 당치도 않은
개소리냐? 이 비밀 통로는 본교의 성역으로 양교주가 살아계셨을
때는 양좌사와 사대호교법왕도 와본 적이 없다. 단지 교주만이
이 비밀 통로를 이용했는데 어떻게 너 같은 놈을 이곳으로 데려
올 수 있겠느냐?"

원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침묵을 지키고 나서 울적하
게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도 꼬치꼬치 캐묻겠다면 이십 오 년 전의 비사(秘
事)를 털어놓으마. 어쨌든 너희들은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
할 테니..... 주전, 너의 말대로 이곳은 명교의 성지로써 역대
교주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설령 교주라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들어올 수가 없었지. 그러나 양정천은 스스로 교율을 어
기고 그의 부인을 몰래 비도(秘道)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기까지 들은 주전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고, 팽화상
은 그더러 조용히 하라고 호통쳤다.

원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양부인이 다시 날 데리고 들어왔다....."

철관도인이 심각하게 물었다.

"양부인이 무엇 때문에 너를 비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느냐?"

원진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것을 말하자면 사연이 길어진다. 난 올해 고희를 넘긴
늙은이지만 젊었을 때는..... 좋다. 모든 것을 얘기해 주마. 너
희들은 내가 누군지 아느냐? 양부인은 바로 나의 사매였고, 난
불문에 귀의하기 전에 속세에서 사용하던 이름이 성곤(成崑)이며
외호가 혼원벽력수였다."

그의 입에서 이러한 말이 내뱉어지자 양소는 물론 모두가 자지
러지게 놀랐지만 더욱 놀란 것은 포대 속에 들어 있는 장무기였
다. 빙화도에서 그날 밤 의부께서 들려준 얘기가 뚜렷하게 뇌리
에 떠올랐다. 의부의 스승이었던 성곤이 어떻게 해서 부모와 처
자식을 살해했으며, 그로 인해 의부가 성곤을 끌어내기 위해 온
갖 살검을 자행한 일 등등..... 장무기는 청천 벼락을 맞은 듯
충격이 컸다. 아울러 새롭게 깨달은 게 있었다.

'이제 보니 그 당시 저 악랄한 성곤은 이미 공견신승을 사부로
모셨구나. 공견신승은 그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의부를 감화하기
위해 강호로 나서 결국 애매하게 목숨을 잃었으니, 이 또한 성곤
이 저지른 엄청난 죄악이 아니겠는가!'

그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의부께서 가끔 광성이 발작돼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과 각
문파가 무당으로 달려와 나의 부모님을 죽음의 궁지로 몰아넣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이 성곤의 농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순, 장무기는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온몸이 불덩어리 처럼
달아올랐다. 설불득이 이 포대는 바람이 통하지 않아 장무기는
벌써부터 숨이 막힐 정도로 갑갑한 것을 억지로 참아왔다. 심후
한 내력과 구식지법(龜息之法)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지금 심신이 흐트러지자 단전에 축적돼
있는 구양진기도 제어를 잃어 이내 온몸이 불덩어리로 변한 것이
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신음을 토했다.

그러자 주전이 호통을 치듯 외쳤다.

"소형제, 조금만 견디면 우린 모두 숨이 끊어져 편안해질 테니
대장부답게 이를 악물고 신음 따위는 내지 말게나!"

장무기는 '네'하고 대답하며 곧 구양진경의 운공지법으로 마음
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러나 납득이 가지 않는 사실이 있었
다. 그가 공력을 운용할수록 사지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엄
습해 오고 전신의 각 혈도를 흡사 빨갛게 달군 바늘로 찌르는 듯
했다.

그것은 언젠가는 그에게 닥칠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는 몇 년
간 구양신공을 연마했지만 스승의 가르침이 없어 스스로 일깨운
것이므로, 비록 체내에 축적된 구양진기는 갈수록 많아지지만 그
것을 정석대로 운용하여 마지막 생사현관(生死玄關)을 뚫는데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물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러한 상태로 오래 머물수도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원진의 음독한 현음지를 맞은 것이
다. 그 한독에 대항하기 위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구양신공
이 격발되었고, 더욱 공교롭게도 그의 몸이 밀봉된 건곤일기대
속에 들어 있어 격발된 구양진기가 발산될 곳이 없어 다시 그의
몸에 충격을 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우연이 겹친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짧은 시간 동
안 그는 수도연기(修道練氣)하는 사람들이 일생을 두고 가장 험
난하고 위해한 순간을 졸지에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반 무림인
의 입장에서 볼 때는 꿈에도 갈망하는 생사현관이 뚫리는 순간이
었다. 이 순간에 생사성패(生死成敗)가 결정될 것이다.

주전 등은 그가 이런 죽음의 갈림길에서 또 하나의 생사투(生死
鬪)를 겪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해 단지 그가 현음지를 당
한 고통으로 인해 신음을 내뱉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는 견디기 어려운 극양(極陽)이 열기와 싸우며 원진의 말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나와 사매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친교를 맺어온 터라, 둘은 어
려서부터 혼인지약이 있었다. 그런데 양정천도 나의 사매를 짝사
랑해 오다가 명교의 교주가 되어 천하에 명성을 떨치자, 내 사매
의 부모는 익속이 밝은 위인인데다가 사매 역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결국 그에게 시집가고 말았다. 그러나 혼인을 한 후에
그녀는 생활이 원만하지 않아 가끔 나하고 만나게 되었으며 그
횟수가 잦아질수록 우리에겐 은밀한 장소가 필요했다. 양정천은
내 사매의 요구라면 무조건 따라 주었기 때문에 적당한 기회를
틈타 그녀가 이 비밀 통로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자 양정천은 비
록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끝내 그녀의 청을 들어 주게 되었다.
그 후로 이 광명정의 비도, 명교가 수백 년간 신성불가침으로 생
각해 온 성벽이 우리의 밀회 장소로 변했다. 그 동안 나는 수십
차례에 걸쳐 이곳을 무상 출입해 왔으니, 이번에 손쉽게 올라온
것도 당연지사가 아니겠느냐?"

주전, 양소 등은 그의 말을 듣고 모두 아연실색을 할 수밖에 없
었다. 그들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수치로 인해 단지 눈에서 원독
의 불길이 뿜어질 뿐 할 말을 잃었다.

원진은 그들의 일그러진 표정에 매우 만족해 했다.

"너희들이 흥분해 할 것은 없다. 근원을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
양정천이 나의 정인(情人)을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난 양정천과
사매가 혼례를 올리는 날 하객으로 나타나 희주(喜酒)를 마시며
내심 맹세를 한 바가 있다. 양정천을 죽이고 명교를 멸망시키겠
다고! 그 맹세가 사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루어진 것이다.
하핫..... 이제 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양소는 눈앞에 닥친 죽음과는 상관없이 말투가 냉랭했다.

"내가 여지껏 마음 속으로 풀지 못한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주어서 고맙다. 양교주가 갑작스레 죽음을 당한 것이 이제보니
너의 소행이었구나!"

원진의 음성은 표정만큼이나 차가왔다.

"지금이라 할지라도 물론이거나와 왕년에도 난 도저히 양정천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의 사매는 내가 행여나 암암리
에 독수를 전개할까봐 부단히 나에게 경고를 했다. 내가 만약 양
정천을 죽인다면 그 자신은 결코 살아남지 않겠다고! 그녀는 비
록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했지만 양정천을 유일한 남편으로 생
각하는 마음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양정천,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뭐라고!?"

"그럴 리가....."

양소, 팽화상 등은 모두 놀란 외침을 토했다.

원진은 그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든 자기가 할 말을 계속해 나
갔다.

"만약 양정천이 내 손에 죽었다면 명교를 용서할지도 모르
지....."

그의 음성은 차츰 낮아졌다. 그는 이십 오 년 전의 일을 회상하
듯 눈을 가늘게 집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날 밤에도 나는 사매와 비도 안에서 만났는데, 갑자기 가까
운 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소스라치게 놀라 조심스럽
게 다가가 보니 양정천이 어느 작은 석실에서 손에 양피지를 쥐
고 얼굴이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는 순간 코웃음
을 치며 얼굴이 다시 푸르스름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재차 핏빛으
로 바뀌었는데, 순식간에 세 번이나 변했다. 양좌사, 넌 그게 무
슨 무공인지 알고 있겠지?"

양소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것은 본교의 건곤이위신공이다."

주전이 즉시 물었다.

"양소, 당신도 그 신공을 터득했소?"

양소의 입가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터득했다고는 할 수 없소. 왕년에 양교주는 나를 잘 봤는지 그
신공의 기초적인 구결(口訣)을 일러주었소. 난 그 동안 꾸준히
연마해 왔지만 겨우 제 이단계밖에 터득하지 못했소. 더 연마하
고 싶었지만 체내의 진기가 역류하여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찢어
질 것만 같아 중단했던 것이오. 양교주가 순식간에 얼굴색이 세
번 변했다면 그건 제 사단계까지 터득했다는 증거요. 그의 말에
의하면 본교 역대 교주 중에 제 팔 대 종(鐘)교주만 건곤이위신
공을 오단계까지 연성했다는 거요. 그러나 연성한 날 그만 주화
입마되어 목숨을 잃었소. 그후로 아무도 제 사단계까지 이룩한
사람이 없다는데....."

주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도 연마하기가 어렵단 말이오?"

철관도인이 불쑥 나섰다.

"만약 그렇게 어렵지 않다면 본교의 호교신공(護敎神功)이라고
할 수 있겠소?"

이들 명교의 무학고수들은 건곤이위신공에 대해 오래 전부터 흠
모해 왔기 때문에, 일단 그 신공이 거론되자 비록 위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팽화상은 시간을 끌 속셈으로 원진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리의 양교주께서 어떻게 목숨을 잃게 됐다는 거냐?"

원진은 냉소를 날렸다. 그도 팽화상 등의 속셈을 모르는 바 아
니었다. 하지만 숨쉬는 걸 보아 한 두 시진 이내에 절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었다.

"당시 사매와 나는 양정천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사
매는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내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애
원했다. 그러자 양정천은 단지 눈을 부릅뜬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며 몸이 빳빳하게 굳어갔
다....."

양소 등은 그게 바로 주화입마의 현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
다. 양교주는 건곤이위신공을 연마하다가 긴급한 순간에 아내와
성곤이 밀회를 하는 것을 발견해 그 엄청난 충격으로 그만 주화
입마된 게 분명했다. 당시 성곤이 양교주를 죽인 것은 아니지만
양교주는 그로 인해 죽음을 당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원진의 말은 계속되었다.

"사매는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별안간 뒤쪽을 향해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 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사매는 이미 자신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
다. 흐흣....."

여기까지 말한 원진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울음
이라 해야 더 어울릴 웃음이었다.

"양정천은 그녀의 육신을 소유했지만 마음을 소유하진 못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마음을 얻었지만 결국 그녀를 차지하진 못했
다. 나는 사매의 시신 앞에서 통곡을 했다. 동시에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명교를 멸망시키겠다고 스스로 맹세를 했다. 여지껏 살
아오면서 난 한시도 그 맹세를 잊은 적이 없다. 따지고 보면 나
성곤도 불행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남한테 빼앗기고 하나
뿐인 제자마저 날 불공대천의 원수로 생각하고 있으니....."

장무기는 그가 사손을 거론하자 더욱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
다. 이때, 체내의 구양진기가 더욱 팽배되어 사지백해가 터져나
갈 것 같고 머리카락마저 배로 팽창되는 것 같았다.

원진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광명정을 떠나 중원으로 돌아가 오랫 동안 보지 못한 제
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마교의 사대호교법
왕 중에 한 사람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에 난 비록 사매
와 자주 만났지만 마교 내부의 일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고
사매 역시 교내의 일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만약 사손이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면 그가 마교에서 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전혀몰랐을 것이다. 생각 같아선 당장 사손을 죽이고
싶었지만 난 내색을 하지 않고 그를 이용하기로 작심했다. 뿌리
가 깊은 명교를 송두리채 멸망시키려면 아무래도 장기적인 계획
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원진은 양양하게 웃었다.

"며칠 후 난 일부러 술에 취한 척하며 사손의 아내를 겁탈하고,
그의 부모 형제 온 집안 식구를 살해했다. 난 그 결과에 대해 손
금보듯 잘 알고 있었다. 사손은 틀림없이 복수를 하기 위해 길길
이 날뛸 것이고, 날 찾아 내지 못하면 갖은 짓을 다 저지를 게
번했다. 하하..... 이 세상에서 나보다 그 녀석을 더 잘 아는 사
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문무를 겸비했지만 쉽게 흥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게 흠이지....."

여기까지 들은 장무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다.

'이제보니 의부께서 당하신 모든 불행이 전부 성곤 노적의 계획
적인 음모였구나.....'

원진은 득의양양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손은 내가 바라는 대로 도처에서 살생을 저지르고 내 이름을
남겨 내가 나서기를 바랐지만, 하하..... 내가 쉽사리 나설 것
같느냐? 결국 모든 살겁이 사손의 소행이라는 게 밝혀졌고, 그에
게 당한 그 숱한 희생자들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자연히 명교
를 적대시하게 되었다. 때로는 그가 일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위
기를 맞게 되면 내가 암암리에 도와주곤 했다. 나의 유능한 살인
도구가 파괴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 어쨌든 마교
는 갈수록 적을 많이 만들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교주 자리를
놓고 내분이 그칠 날이 없었으니, 모든 것이 내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었다. 사손이 송원교를 죽이지 못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지만 소림의 공견신승, 공동오로 등 각 문파의 고수들을 고루 죽
였으니 그보다 더 기특한 제자가 또 어디 있겠나?"

양소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심지어 너의 스승인 공견신승마저도 너의 독계에 걸
려 목숨을 잃은 것이란 말이냐?"

"내가 공견을 스승으로 모신 게 진심일 리가 있겠느냐? 그는 비
록 나 때문에 죽었지만 죽음으로써 더욱 명성이 알려졌으니 오히
려 나에게 감사를 해야 될 것이다. 하핫.....!"

원진의 광소가 들리는 가운데 장무기는 극도의 분노로 인해 그
만 까무라치고 말았다. 그러나 곧 깨어났다. 그는 여지껏 살아오
면서 겪은 온갖 능욕에 초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부가 성곤의
음모로 인해 부모와 처자식을 잃고 무림의 공적으로 몰려 이젠
눈까지 실명된 채 외딴 섬에서 외롭게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심구대한(深仇大恨)을 어찌 갚지 않을 수 있단 말
인가!

그는 노기(怒氣)가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자 전신에 퍼진 구
양진기가 더욱 격탕하며 질주하였다. 그 진기가 바깥으로 발산될
수 없자 건곤일기대가 점점 바람을 넣은 공처럼 팽창하기 시작했
다. 그러나 양소 등은 원진의 말에 정신이 집중돼 아무도 그것을
유의하지 않았다.

원진은 이제 모종의 행동을 취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양소, 위일소, 팽화상, 주전.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있느냐?"

양소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원진, 내 딸만큼은
살려줄 수 있겠느냐? 그의 어머니는 아미파의 기효부이니 반은
명문 출신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아직 정식으로 우리 명교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원진은 야멸차게 대꾸했다.

"호랑이 새끼를 살려두면 후환을 자초하게 된다. 잡초는 뿌리째
뽑아야 하는 법!"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뎌 양소의 머리를 향해 천천
히 손을 뻗어냈다.

장무기는 포대안에서도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을 알고,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는 것도 무시한 채 소리로서 위치를 간파
해 대뜸 몸을 솟구쳐 원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왼손을 뻗
어내 포대를 사이에 두고 원진의 손을 노렸다.

원진은 이때 간신히 행동을 취할 수 있을 뿐 원기가 정상적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흠칫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외쳤다.

"이놈! 네가..... 네가 감히!"

그는 포대를 향해 냅다 일장을 떨쳐냈다. 그런데 불룩하게 팽창
한 포대에 장풍이 닿는 순간 더욱 강한 힘이 튕겨져 와서 원진을
두 걸음 뒤로 밀어냈다. 원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장무기는 이 무렵 목이 바싹바싹 마르고 입술이 갈라지면서 정
신이 어질어질했다. 체내의 구양진기가 이미 최고봉으로 팽창되
어 건곤일기대가 터져나간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을 경우 강렬무
비한 진기로 인해 살갗이 갈라지며 온몸이 숯덩어리처럼 타 버릴
것이다.

원진은 이 포대가 해괴하다고 느끼면서 다시 장풍을 격출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원진은 다시 반탄지력에 의해 뒤로 두 걸
음 밀려났다. 이 즈음 장무기는 커다란 가죽공처럼 팽창된 포대
속에서 마구 뒹굴었다.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이제는
숨을 내쉬기조차 곤란했다. 원진은 거듭하여 출수를 했지만 그
때마다 힘줄기가 반탄되어 왔다. 포대 속에 있는 장무기는 그러
한 사실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양소 등은 이런 해괴한 현상을 보자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설불득조차 자기의 건곤일기대가 왜 갑자기 공처럼 부풀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순간, 원진은 허리춤에서 비수 한 자루를 뽑아 힘껏 포대를 찔
러갔다. 그러나 비수의 끝부분만 포대 속으로 약간 오목하게 패
어 들어갈 뿐 뚫리지가않았다. 연거푸 찔러 보았지만 역시 헛수
고였다.

원진은 장력과 비수로도 포대를 어떻게 할 수 없자 생각을 달리
했다.

'이 녀석과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으니.....'

그는 냅다 포대를 걷어찼다. 공처럼 팽창된 포대는 데구루루 문
쪽으로 굴러갔다. 한데, 문지방에 부딪친 포대는 즉시 튕겨져 질
풍 같은 속도로 원진을 향해 날아왔다. 원진은 몸을 피할 새도
없이 필사의 힘을 다해 쌍장을 떨쳐냈다. 그러자,

펑!

청천벽력과 같은 굉음이 터지는 가운데 포대가 산산조각으로 찢
겨져 흩날렸다. 원진, 양소, 위일소 등은 모두 한 갈래의 불기둥
같은 기류가 뻗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들 앞에 남루한
차림새의 젊은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알고 보니, 끝없는 고통이 이어지는 사이에 장무기가 연마했던
구양신공이 드디어 생사현관을 뚫고 완성 단계로 돌입한 것이다.
앞서 팽창된 포대 속은 진기로 넘실거려 흡사 수십 명의 고수가
내력을 발출해 동시에 그의 전신에 수백 군데의 혈도를 안마해
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제 생사현관이 뚫리자 전신 경맥(經
脈)속에 수은(水銀)이 굴러가듯 상쾌하기 이를데 없었다. 자고로
이러한 기연(奇緣)을 얻은 사람이 없었다. 이제 건곤일기대가 과
열됐으니 앞으로도 이러한 기연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원진은 이 포대 속에서 나온 젊은이가 얼빠진 모습으로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자, 즉시 현음지의 내력을 끌어올려 그의 가슴팍
담중혈을 찍어갔다.

장무기는 얼떨결에 손을 떨쳐 그의 공격을 막았다. 그는 비록
구양신공을 터득했지만 무공 초식이 극히 평범하여 도저히 원진
같은 정정고수의 맞수가 될 수 없었다. 순간, 그의 손목 부위 양
지혈(陽池穴)이 원진에 의해 찍히고 말았다. 그 즉시 몸을 한 차
례 오싹 떨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그와 때를 같이하
여 그의 체내에 넘쳐 흐르는 진기가 원진의 손가락으로 전해졌
다.

쌍방의 힘은 음과 양으로서 마침 서로 상극되었다. 게다가 장무
기의 내력은 구양신공에서 비롯된 것이니 만치 웅후하기 이를데
없었다.

원진은 손가락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워지는 것을 의식하며 전신
의 경력(經力)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중상을 입은 데다가
공력이 평상시에 비해 일성(成)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눈앞에 전개돼 있는 상황이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장무기는 이내 뒤쫓아가며 소리쳤다.

"성곤! 이 천하의 악적아, 목숨을 내놔라!"

성곤의 뒷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잽싸게 옆문으로
달려들어갔다. 장무기는 다급해져 걸음을 재촉하자 갑자기 쿵 하
는 소리가 들리며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천정에 머리를 박고 말
았다.

'왜 갑자기 몸이 이렇게 가벼워진 것일까?'

그 자신은 어리둥절했다. 사실은 구양신공이 연성되어 일거수
일투족할 때마다 전에 비해 열 배가 넘는 힘이 발휘된다는 걸 모
르고 있었다. 그는 얼른 옆문으로 들어가 보니 작은 석실이 펼쳐
져 있을 뿐 원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의부를 위해 복
수를 하겠다는 일념에 곧장 석실 뒷문으로 쫓아갔다.

석실 밖은 제법 넓은 뜨락이었다. 뜨락 한복판에는 화단이 만들
어져 있고 서쪽 어귀에 자리한 아담한 누각에 창문을 통해 불빛
이 새어나왔다. 장무기는 지체하지 않고 누각 앞으로 달려가 문
을 밀고 들어갔다. 그 순간 회색 그림자가 번뜩이며 원진이 앞쪽
에 드리워져 있는 휘장을 젖히며 뛰쳐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장무기도 뒤따라가 휘장을 젖히고 들어가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장무기는 멍해지며 주위를 두리번 살폈다. 그러자 비로
소 자기가 어느 여염집 아가씨의 규방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문 쪽에 화장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붉은 촛불이
밝혀져 주위를 환하게 비춰 주었다. 모든 것이 휘황찬란하게 꾸
며져 있어 주구진의 집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다른 한
쪽에는 자단목으로 짠 침상이 있고 봉황이 수놓아진 휘장이 드리
워져 있었다. 침상 앞에 분홍색 꽃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으
로 미루어 여인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이 규방은 문이
하나뿐이며 창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규방
안으로 들어온 원진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귀신이 곡
할 노릇이었다.

장무기가 납득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속세를 떠난 원진이
여인의 침상으로 뛰어들었다는 것뿐이었다. 과연 침상의 휘장을
젖혀 확인을 해보아야 할지, 장무기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
고 망설이는 사이에 홀연 가벼운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장무기
는 자세히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서쪽 벽에 세워놓은 병풍 뒤
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장무기
는 병풍 뒤에서 슬그머니 엿보니, 두 사람 모두 묘령의 소녀였
다. 한 사람은 연분홍빛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또 한 사람은 나
이가 다소 어리며 청색 무명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녀인
것 같았다. 비녀는 째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밤이 깊었으니 편히 쉬세요."

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찰싹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라
고 불리우는 소녀가 난데없이 비녀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비녀
는 비칠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아가
씨라는 소녀는 고개를 살짝 돌렸고 장무기는 촛불을 빌려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유난히 큰 눈에 둥그스름한 얼굴,
바로 자기가 불원천리 중원에서 서역까지 호송해 준 양불회였다.

그 동안 세월이 흘러 그녀는 늘씬한 몸매의 성숙한 처녀로 성장
해 있었다. 그녀의 앙칼진 음성이 들려왔다.

"나더러 자라고? 흥! 육대문파가 광명정을 공격해 오는 통에 나
의 아버님은 여러 사람들과 밤을 세워가며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데, 나 혼자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느냐? 넌 나의 아버지와 내가
하루속히 죽길 바라고 있겠지만 어림도 없다!"

비녀는 아무 변명도 못하고 그녀를 부축해 침상에 앉혔다. 그러
자 양불회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서 내 검을 갖고 와!"

비녀는 벽 쪽으로 걸어가 그곳에 걸려 있는 한 자루의 장검을
내렸다. 이때 장무기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비녀의
양쪽 발목과 손목에 가느다란 사슬이 묶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
는 한쪽 다리를 절며 등이 곱추처럼 굽었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한쪽 눈은 크고 한쪽 눈은 작은데다가 코와 입이 모두 일그러져
괴물처럼 생겼다.

장무기는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저 소녀의 용모는 주아보다도 추하게 생겼구나. 주아는 중독되
어 얼굴이 부었기 때문에 치료될 수가 있겠지만 저 소녀는.....'

그가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양불회는 장검을 받아 쥐었다.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르니 난 순찰을 돌아야겠다."

비녀가 얼른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저도 아가씨를 따라가겠어요. 만약 적을 만나게 되면 아가씨를
도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음성은 모래를 씹은 듯 듣기가 거북했다. 양불회는 대뜸
냉소를 날렸다.

"흥! 또 무슨 엉큼한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그녀는 왼손으로 다짜고짜 비녀의 오른쪽 손목을 나꿔쥐었다.
비녀는 그 즉시 꼼짝 못하게 되었다. 비녀는 겁먹은 표정을 한
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가씨..... 저는....."

"닥쳐라! 적이 대거 진격해 오면 우리 부녀는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 네년은 틀림없이 적이 이곳으로 보낸 첩자일 것이다. 너
에게 당하기 전에 아무래도 내 손으로 널 죽여야겠다!"

이렇게 야멸차게 말하며 대뜸 비녀의 목을 향해 장검을 들이댔
다. 그렇지 않아도 비녀에게 측은한 생각을 갖고 있던 장무기는
생각을 굴릴 겨를도 없이 앞으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불회누이!"

양불회는 흠칫 놀라 얼른 검을 거두더니 몸을 돌리기도 전에 격
동되는 음성으로 외쳤다.

"무기 오빠예요?"

뜻밖에도 그녀는 장무기의 음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장무기는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부인할 순 없었다.

"그래 나야. 불회 누이, 그 동안 잘 있었나?"

양불회는 비로소 천천히 몸을 돌렸다. 순간 남루한 차림에다 얼
굴에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장무기를 보자 멍해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당신이 정말 무기 오빠예요? 어떻게..... 어떻게 이곳
에 오게 됐죠?"

장무기는 자세한 것을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누이의 아버님이 부상을 입었으니 어서 보살펴 줘야겠어!"

양불회는 이내 안색이 크게 변했다.

"아버님이 부상을 당했다고요? 무기 오빠, 여기서 기다려주세
요. 내가 곧 갔다 올 께요. 그 동안 별고 없었죠? 난 가끔 오빠
를 생각했어요....."

이렇게 외쳐 대며 그녀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무기는 비녀에게 물었다.

"낭자, 화상 한 명이 이곳으로 도망쳐 왔는데 감쪽같이 사라졌
소. 혹시 여기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소?"

"그 화상이 어떤 사람이죠? 그를 꼭 쫓아가야 하나요?"

"그 화상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소. 난 무
슨 일이 있어도 그를 쫓아가야 하오!"

비녀는 잠시 생각을 굴리는 듯하더니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좋아요! 당신은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 도와드리겠어요."

그녀는 곧 촛불을 끄고 장무기의 손을 잡더니 앞으로 걸어나갔
다.

장무기는 그녀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침상 앞에 이르
렀다. 비녀는 주저없이 휘장을 젖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
전히 장무기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장무기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 추하게 생긴 비녀가 자기를 침상으로 끌어들이
는 걸로 생각했다. 그로서는 도저히 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무기는 비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비녀가 나직하게 말했
다.

"통로가 바로 침상에 있어요."

장무기는 그 말에 오히려 자신의 경솔함을 쑥스러워했다. 비녀
는 다시 그의 손을 잡더니 이불을 젖히고 침상에 누었다. 장무기
도 남녀유별을 따질 상황이 아닌지라 그녀와 나란히 침상에 누웠
다. 비녀가 어느 곳을 건드렸는지 알 수 없지만 침상이 갑자기
뒤집어지며 두 사람이 일제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곧장 수장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하게도 바닥에 푹신한
보료가 두껍게 갈려 있어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 윗쪽에서
팍 하는 소리가 들리며 침상 바닥의 열렸던 부분이 원상 복귀되
었다. 장무기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절묘한 장치군. 비밀 통로의 입구가 바로 여인의 규방 침
상에 있을 줄이야 누가 생각이냐 하겠는가?'

비녀는 그의 손을 잡고 앞으로 달려갔다. 어디서 광선이 스며들
어오는지 몰라도 주위가 어슴프레했다. 장무기는 그녀의 발목에
묶여 있는 사슬이 땅에 끌리는 소리를 듣고 문득 이상하게 느껴
지는 게 있었다.

'아니..... 이 낭자는 다리를 저는데다가 양쪽 발목이 사슬에
얽매여 있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빨리 달리는 것일까?'

그는 곧 걸음을 멈추었다. 비녀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빙
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다리를 저는 것은 주인 어르신네와 아가씨를 속이기 위해
위장한 거예요."

장무기는 원진을 쫓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세한 연유를 묻지 못
했다. 꼬불꼬불한 통로를 따라 수십 장 가량 따라 나가자 막바지
에 이르렀다. 그래도 원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녀가 입을 열었다.

"이 통로는 여기가 끝이예요. 틀림없이 앞쪽으로 연결된 다른
통로가 있을 텐데 찾아 내지 못했어요."

장무기는 어두침침한 주위를 살펴보았다. 알고보니 통로 천장에
작은 야명주가 박혀 있어 희미한 광채를 비춰 주고 있었다. 장무
기는 앞쪽을 가로막은 석벽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보았다. 간혹
울퉁불퉁한 부분이 있긴 해도 틈새라곤 찾아 낼 수 없었다.

비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전에도 횃불을 갖고 들어와 수십 차례나 시도해 보았지
만, 바위문을 작동하는 단추를 찾아 내지 못했어요. 당신이 말한
화상이 분명 이곳으로 들어왔다면 바위문을 통해 다른 곳으로 빠
져 나갔을 거예요."

장무기는 한 모금의 진기를 끌어올려 두 손으로 석벽 좌측부터
힘껏 밀어보았다. 전혀 반응이 없자 다시 우측을 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석벽이 약간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장무기는 속으로
옳거니 하며 다시 두 모금의 진기를 끌어올려 힘차게 밀자 석벽
이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두꺼운 석벽은 또한 육중한 석문(石
門)이기도 했다.

이곳 비밀 통로의 구조는 정교하여 때로는 기관 장치가 설치돼
있기도 하지만 이러한 석문에는 아무런 장치도 돼 있지 않았다.
그대신 엄청난 실력(實力)을 가졌거나 상승무공을 지니지 않으면
석문을 열 수 없었다.

석문이 석 자 가량 열리자 장무기는 바깥쪽을 향해 느닷없이 일
장을 뻗어냈다. 행여나 원진이 석문 뒤에 숨어 기습을 가할까 봐
신중을 기한 것이다.

석문 밖은 다시 긴 통로와 연결돼 있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
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통로는 갈수록 아래로 경사졌다. 약 오십
여 장 걸어나가자 뜻밖에도 홀연 왼쪽으로 뻗친 통로 안에서 기
침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지만 주위가 워낙 조용해 뚜렷하게 들
려왔다.

장무기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쪽이다!'

그는 앞장서 왼쪽 통로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이 통로는 지세
가 갑자기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하며 지면 역시 울퉁불퉁했다.
얼마쯤 달리자 지세가 나선형으로 계속 아래로 향했다. 게다가
폭이 갈수록 좁아져 한 사람이 간신히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였다. 갑자기 우르르 꽝! 하는 소리가 들리며
방금 장무기와 비녀가 지나왔던 천장 쪽에서 육중한 석문이 와르
르 떨어져내려 통로를 완전히 봉쇄시켜 버렸다. 졸지에 일어난
변화에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통로가 봉쇄된 곳은 그들로
부터 약 열 자 가량 떨어진 지점이므로 얼른 몸을 돌려 간신히
비녀의 곁을 비집고 가까이 다가가 석문을 밀어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체내의 진력을 모두 발휘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
다.

이때 석벽 맞은편에서 원진의 음성이 미약하게 들려왔다.

"이놈아, 그곳은 죽음의 절지다. 이쪽에서 기관 장치를 작동하
기 전엔 절대 빠져나올 수가 없다. 물론 이 통로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넌 영락없이 죽게 될 것이다. 계집과 함께 죽는 것을 복
으로 생각해라!"

장무기는 그와 입씨름을 벌여 보았자 하등의 소용이 없다는 것
을 알고 몸을 돌려 다시 좁은 통로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갔다.
이젠 야명주의 광채도 없어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웠다. 손으로
더듬으며 삼 장 가량 뚫고 나가자 통로의 끝이 되었다. 그곳은
또 하나의 작은 석실인 듯 싶었다.

"낭자, 혹시 부싯돌이 있소?"

비녀가 있다고 대답하자 장무기는 나무통을 부서뜨렸다. 통 속
에서 많은 분말이 쏟아졌다. 그것은 석회인지 밀가루인지 알 수
없었다. 장무기는 나무 조각 하나를 집었다.

"이제 불을 밝히시오."

비녀는 부싯돌을 꺼내 불을 당겨 나무 조각에 갖다 대었다. 순
간 부지직! 소리가 나며 나무 조각에 이내 불이 붙었다. 동시에
불꽃이 튀며 짙은 유황냄새가 풍겼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비녀가 소리쳤다.

"화약이예요."

불이 붙은 나무 조각으로 자세히 살펴보니 통 속에서 쏟아진 가
루는 모두 시꺼먼 화약이었다. 비녀가 나직이 웃었다.

"만약 저 화약에 불이 붙었다면 우린 죽었을 거예요."

이때 장무기는 그녀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만면에 경악의 빛이
역력했다. 비녀가 생긋이 웃었다.

"왜 그러죠?"

장무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보니 낭자는..... 매우 아름답구료."

비녀는 입을 삐쭉거리며 웃었다.

"놀란 나머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을 깜박 잊었군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몸을 똑바로 폈다. 장무기는 비로소 그녀
가 곱추도 아니며 다리도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이
목구비도 빼어났다. 장무기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소?"

비녀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대꾸했다.

"아가씨는 저를 몹시 미워했어요. 그러니 제가 추한 모습을 하
고 있어야 그나마 그녀의 환심을 살 수 있었어요. 만약 제가 추
한 모습으로 위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벌써 저를 죽였을 거예요."

장무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낭자를 죽이려 한단 말이오?"

"아가씨는 제가 주인 어르신네와 자기를 죽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어요."

장무기는 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그것 참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장무기는 필시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 비
녀의 신분에 대해 새삼 흥미를 느꼈다. 그녀가 일부러 추한 모습
을 하여 양소와 양불회의 눈을 속여왔다는 게 결코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비녀는 그 사연을 밝히려 하지 않으려 하니 장무
기도 꼬치꼬치 캐물을 수가 없었다.

비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당..... 아니 공자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을 알면 아가씨
께선 더욱 의심을 할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니 우린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겠죠."

이렇게 말하며 불이 붙은 나무를 들고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지금 그들이 몸담고 있는 석실에는 녹슬은 무기가 잔뜩 쌓여 있
었다. 이곳은 왕년에 명교가 무기를 저장하는 장소로 이용했던
모양이다. 사면의 벽을 유심히 살폈지만 틈새를 찾아 내지 못했
다. 원진은 이곳이 사지(死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
부러 기침을 하여 두 사람을 유인한 게 분명했다.

비녀는 맥이 풀리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자, 저는 소조(小조)라고 해요. 아가씨가 공자를 무기 오빠
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성함이 무기라고 하나 보죠?"

"그렇소. 나의 성은 장이라....."

여기까지 말한 그는 다시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여기 있는 많은 화약을 이용해 막힌 석문을 파괴할 수 있을지
도 모르겠소!"

소조는 즉시 손뼉을 치며 표정을 활짝 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그녀가 손뼉을 치자 양쪽 손목에 묶여 있는 사슬이 찰랑거렸다.
그러자 장무기가 입을 열었다.

"낭자, 그 사슬 때문에 행동이 불편할 테니 내가 끊어 드리겠
소."

소조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내둘렀다.

"안 돼요! 어르신네께서 아시면 날벼락아 떨어질 거예요. 더군
다나 이 사슬은 그 어떤 보검이기(寶劍利器)로서도 절단시킬 수
가 없어요. 열쇠로 열어야만 하는데, 아가씨가 그 열쇠를 갖고
있어요."

장무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을 빠져나가는 즉시 그녀에게 말해 사슬을 풀어 주도
록 하겠소."

"아마 아가씨는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녀와 보통 교분이 아니니 부탁을 하면 들어줄 것이오."

그는 곧 바닥에서 긴 창 한 자루를 집어 석문이 닫힌 곳으로 걸
어갔다. 잠시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석문 저편에서는 아
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원진은 이미 멀리 떠나간 모양이다.

장무기는 곁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소조에게 말했다.

"한 번으로는 폭파시키지 못할 테니 여러 차례 나누어 시도해
봐야겠소."

그는 곧 예리한 창끝으로 석문 밑 부분을 뚫었다. 곧 이어 소조
가 화약을 갖고 왔고, 장무기는 그 화약을 석문 아래 패인 부분
에 쑤셔넣었다. 이어 옷자락을 찢어 화약가루를 묻혀 도화선을
만들어 석실까지 연결했다. 그들은 계획대로 곧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도화선이 타 들어감에 따라 잠시 후 요란한 굉음이 터지
며 한 갈래의 거센 열기가 몰아쳐 왔다. 석실이 무너질 듯 요동
하였다. 소조는 놀라 바닥에 바싹 엎드렸다. 장무기는 본능적으
로 그녀의 몸 위에 엎어졌다. 그녀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였다.


----- 제 4 권 3 장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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