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9~10

나단비 | 2024.03.26 13:34:59 댓글: 0 조회: 105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620
9
연인보다는 친구





레드먼드에서 맞은 두 번째 학기도 첫 학기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정말 눈 깜박할 사이였어!”
필리파의 말이었다. 앤은 모든 순간을 즐겼다. 숨 가쁘게 경쟁하고, 새로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돈독히 하며, 다양한 모임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흥미와 지평을 넓혀 나갔다. 영문학 성적 우수자에게 주어지는 토번 장학금을 타기로 결심한 앤은 공부도 열심히 했다. 이번 학기에 장학금을 받으면 그렇지 않아도 얼마 되지 않는 마릴라의 저축을 축내지 않고도 다음 학기에 레드먼드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앤은 다시는 마릴라의 저축을 축내지 않겠노라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길버트 역시 장학금을 받으려고 맹렬히 질주했다. 하지만 세인트 존 거리 38번지도 분주히 드나들었다. 모든 학교 행사에서 항상 앤의 에스코트 상대는 길버트였다. 앤도 두 사람이 레드먼드 가십난에 나란히 오르내림을 알았고,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몹시 화가 났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길버트와 같은 오랜 친구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요즘 들어 길버트는 빨간 머리 날씬한 몸매에 저녁별처럼 빛나는 잿빛 눈동자를 가진 앤의 옆자리를 다른 레드먼드 남학생들에게 내주지 않으려고 부쩍 현명해지고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1학년 내내 많은 남자들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필리파와는 달리 앤에게는 기꺼이 목숨까지 바치고자 주위를 서성이는 무리는 없었다. 다만 키가 크고 명석한 두뇌의 1학년생 한 명과, 작고 통통한 외모에 쾌활한 성격의 2학년생 한 명, 그리고 쿠션으로 가득 찬 앤의 하숙집 응접실에 앉아 다른 가벼운 주제들과 더불어 ‘주의’와 ‘이상’에 토론하기를 즐기는 키가 크고 아는 것도 많은 3학년 학생 하나가 앤을 자주 방문했다. 길버트는 그들 모두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앤을 향한 자기감정을 고백하는 실수를 저질러 그들에게 우위를 뺏기는 일이 없도록 극심하게 조심했다. 앤에게 길버트는 다시 에이번리의 옛 학창시절 친구로 돌아왔고, 이 점은 새로 나타난 연적들과 대항하는 데 있어 길버트에게 매우 유리한 점이었다. 친구로서 길버트만큼 좋은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앤도 잘 알고 있었다. 앤은 그 점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믿었다. 이제는 길버트가 지난날의 터무니없는 생각은 접은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해 겨울 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사건도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밤 에이다 하비가 가장 아끼는 쿠션 위에 앉아 있던 찰리 슬론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앤에게 언젠가 찰리 슬론 부인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했다. 빌리앤드루스의대리청혼사건을 겪은 후라 찰리 슬론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이 앤의 낭만적인 감수성에 커다란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그 사건은 분명 앤의 심정을 사납게 만든 환멸스러운 기억이었다. 앤은 무척 화가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찰리 슬론이 그런 생각을 가질 만하게 행동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린드 부인이 빈정거리며 말했던 것처럼, 도대체 찰리 슬론에게 무얼 더 바라겠는가? 찰리의 태도, 목소리, 분위기, 찰리가 하는 말에서는 슬론 집안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불쾌함이 그대로 풍겨 나왔다. 찰리는 언제나 앤을 숭배했다. 앤의 모든 점을 존경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앤은 찰리가 자기를 숭배하거나 말거나 될 수 있는 대로 사려 깊고 예의 바르게 대해주기는 하되 찰리의 말을 그냥 무관심하게 넘겨버리곤 했다. 아무리슬론 집안사람이라도 무턱대고 감정을 상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대해주었건만 슬론 집안 기질은 앤의 기대를 더욱 배신했다. 거기다 찰리는 상상 속에서 앤에게 구혼하다 거절당한 사람들처럼비통해하지도 않았다. 비통해하기는커녕 화를 내면서 두어 마디 불쾌한 말을 내뱉기조차 했다. 찰리의 이런 태도에 더욱 화가 난 앤은 찰리의 보호막인 슬론 집안 기질을 꿰뚫을 만큼 날카로운 말을 날려주었다. 그 효과는 즉시 나타나 찰리는 모자를 낚아채더니 몸을 내던지듯 집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앤도 화가 나 위층으로 달려 올라가다가 에이다 하비의 쿠션에 두 번이나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그러고는침대에 몸을 던지고 분노와 굴욕감으로 펑펑 울었다. 앤은 정말 찰리 슬론과 맞서려고 한 것일까? 찰리 슬론의 말이 앤의 화를 돋울 만큼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이 사건은 앤에게 있어서 일종의 불명예였다. 네티 블루엣의 경쟁자가 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 끔찍한 생물체를 다신 안 봤으면 좋겠어.”
복수심에 찬 앤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그러나 슬론을 다시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찰리 슬론 역시도 앤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에이다 하비의 쿠션은 찰리 슬론의 약탈 행위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찰리 슬론은 레드먼드의 복도에서나 혹은 거리에서 앤을 마주쳐도 얼음같이 차갑게 짧은 목례만 할 뿐이었다. 옛 친구 두 사람의 냉랭한 관계는 그 이후 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후 찰리 슬론은 자신의 상처받은 애정을 둥근 장밋빛 얼굴에 푸른 눈을 가진작달막한2학년 여학생에게로 옮겨갔다. 그 여학생은 찰리의 애정을 당연한 일인 듯 받아들여주었다. 찰리는 앤을 용서하고 다시 겸손한 자세로 앤을 예의 바르게 대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다분히 앤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찰리의 의도가 담긴 행동이었다.
어느 날 앤이 잔뜩 흥분해 프리실라의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이거 읽어봐.”
앤이 소리치며 프리실라에게 편지를 넘겼다.
“스텔라에게서 온 거야. 내년에 레드먼드로 올 거래. 어떻게 생각해? 정말 멋진 일이야. 우리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야. 그럴 수 있을까, 프리실라?”
“무슨 일인지를 알아야 대답하지.”
프리실라가 그리스 어휘집을 한쪽으로 치우고 스텔라의 편지를집어 들며 말했다. 스텔라 메이너드는 퀸스 전문학교 친구다. 스텔라는 학교를 졸업한 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난 이제 그만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겠어, 앤. 그리고 내년엔 대학에 진학하려고 해. 퀸스에서 3학년까지 다녔으니 내년에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을 거야. 후미진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가르치는 데도이제 지쳤어. 난 언젠가는 ‘시골학교 여교사의 시련’에 논문을 쓸 거야. 그럼 사람들이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겠지. 모두들 우리가 편안하게 지낸다고 생각하잖아. 학교에서 월급이나 받지 아무 하는 일도 없다고 말이야. 내 논문에서 난 우리들의 현실을 논할 거야. 단일주일만이라도 내가 쉽게 일하고 많은 월급을 받아간다는 말을 듣지 않고 보낼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기쁘겠어. 어떤 사람들은 아주 공손하게 말하지. ‘당신들은 너무 쉽게 돈을 벌어요. 하는 일이라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잔소리나 하는 거잖아요.’ 그럼 난 그게 아니라고 반박하곤 했지만, 나도 이제 좀 현명해졌어. 사실도 다루기 힘들지만 어떤 사람이 현명하게 말했듯이 잘못된 믿음은 그보다 두 배는 더 다루기 힘들거든. 그래서 지금은 침묵을 지키며 고고하게 웃어주는 것으로 웅변을 대신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학년이 참으로 다양해. 아홉 개 학년이나 되거든. 그래서 난 거의 모든 것을 다 가르쳐야 해. 지렁이의 내장기관에서 태양계의 내용까지. 가장 나이가 어린 학생이 4살이야. 그 아이 어머닌 애가 ‘방해가 돼서’ 학교에 보내는 거래. 그리고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은 20살인데 온종일 쟁기를 잡느니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게 훨씬 쉽겠다는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들어서 학교에왔대. 그 다양한 학생들을 하루에 6시간씩이나 가르치려면 준비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아서 내가 꼭 사진이 나오는 기계를 들여다보면서 ‘앞 그림을 다 보지도 못했는데 다음 장으로 넘어가 버려요.’ 하고 불평하는 학생이 되어버린 것 같아.
그런데 앤, 또 내가 무슨 편지를 받았는지 아니? 토미의 어머니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토미의 산수 공부가 어머니가 기대한 만큼 나아지질 않는다는 거야. 토미는 이제 간단한 뺄셈을 배우고, 조니 존슨은 분수를 배우는 게 이상하대. 자기 생각에 조니는 토미의 반만큼도 똑똑하지 않은 아이인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거지. 수지 아버지는 왜 수지가 편지 한 통을 쓰려면 스펠링이 반 이상 틀리는지 이해할 수 없대. 그리고 딕의 숙모는 딕의 자리를 바꾸어주었으면 한대. 지미의 짝인 브라운 씨네 아이가 딕에게 나쁜 말을 가르친다는 게 이유야.
금전적인 문제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 그 말은 그만두겠어. 신은 아마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사람을 시골학교 선생님으로 만들었을 거야!
음, 이렇게 우는소리를 하고 나니기분이 좀 나아졌어. 어쨌든 난 지난 2년간 놀았으니까, 이젠 레드먼드로 가서 공부하겠어.
그리고 앤, 나에게 작은 계획이 있어. 내가 하숙집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너도 알지? 4년을 하숙하며 살았더니 이젠 지긋지긋해. 그래서 말인데, 너랑 프리실라랑 내가 같이 킹스포트 어디쯤에 작은 집을 하나 얻어서 살면 어떨까 싶어. 그게 돈이 덜 드는 방법이기도 하고. 물론 집을 돌봐줄 사람이 한 사람 필요하겠지. 이미 한 사람을 생각해두었어. 내가 우리 제임시나 아주머니 얘기했던 거 기억나니? 이름은 좀 그렇지만 세상에 우리 제임시나 아주머니처럼 다정한 분은 없을 거야. 이름이야 아주머니도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아주머니 아버지 이름이 제임스라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됐대. 아주머니 아버지는 아주머니가 태어나기 한 달 전에 바다에서 돌아가셨어. 난 우리 아주머니를 짐시라고 부른단다. 얼마 전에 아주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 결혼해서 외국으로 선교활동을 떠났어. 그래서 아주머니가 큰 집에 혼자 살게 되어 너무 외로워해. 아주머니는 우리만 원한다면 킹스포트로 오셔서 우리를 돌봐주고 싶으시대. 너희 둘도 제임시나 아주머니를 좋아하게 될 거야. 생각만 해도 신나는 일 아니니? 우리끼리 멋지게 살 수 있을 거야.
물론 너랑 프리실라만 동의한다면. 정말 멋진 생각 아니니? 이번 봄에 당장 적당한 집을 찾아보아야 할 거야. 가을까지 미루는 것보다 그게 나을 거야. 가구가 다 갖추어진 집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못 하면 주위 친구들이나 친지들에게, 쓰지 않고 다락에 보관하고 있는 가구들을 좀 보내달라고 하면 가구 몇 점은 변통할 수 있을 거야. 될 수 있는 한 빨리 결정해서 알려줘. 그래야 아주머니도 내년에 어찌하실지 계획을 세우실 테니까.

“괜찮은 생각인 것 같은데.”
프리실라가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우리가 사는 이 하숙집도 멋진 곳이긴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하숙집은 진정한 집이 아니잖아. 자, 그럼 당장 집을 구하러 나가볼까.시험 기간이 되기 전에.”
앤도 기꺼이 동의했다.

“우리에게 알맞은 집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앤, 너무 기대하지 마. 우리 형편에 좋은 동네에 좋은 집은 어림도 없을 테니까. 그저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낯선 동네에 겉은 초라하고 작아도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럭저럭 살 만한 집을 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거야.”
프리실라가 걱정을 했다.
두 사람은 즉시 집을 구하러 나섰지만 원하는 집을 찾기란 프리실라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가구가 갖춰져 있는 집, 갖춰지지 않은 집, 집은 많았다. 하지만 어떤 집은 너무 컸고, 어떤 집은 또 너무 작았다. 어떤 집은 너무 비쌌고, 어떤 집은 또 레드먼드에서 너무 멀었다.시험 기간이 다가왔고, 어느새 끝났다. 이번 학기 마지막 주가 되었건만 앤이 이름 붙인 ‘꿈속의 집’을 구하기란 여전히 허황된 꿈처럼만 느껴졌다.
“이제 포기하고 가을까지 기다려야 될까 봐.”
걱정에 잠긴 프리실라가 말했다. 두 사람은 4월의 아름다운 햇빛이 비치는 어느 날 공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항구는 자줏빛 안개 밑으로 흐릿하게 빛났다.
“우리 몸뚱이를 누일 작은 오두막이라도 찾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면 우린 계속 하숙집에 살아야 해.”
“지금은 그런 걱정 안 할래. 이 아름다운 오후를 망칠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며 앤이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상큼한 바람에는 소나무 향이 살짝 배었고, 머리 위 하늘은 수정처럼 맑고 파랬다. 축복으로 넘치는 잔이 머리 위로 넘치고 있는 듯했다.

“오늘은 봄이 내 핏속까지 들어와 노래를 부르고 있어. 4월의 유혹은 공기를 타고 날아다니고, 난 지금 환영을 보고 꿈을 꾸고 있는 듯해, 프리실라. 이 모든 것이 다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야. 난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좋아.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바람이거든.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서글픈 비와 회색 해변으로 몰아치는 슬픈 파도만 생각나.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오면 류머티즘에 걸리고 말 거야.”
“처음으로 털옷과 겨울옷을벗어 던지고 이렇게 봄옷을 입고 가볍게 소풍을 나오면 즐겁지 않니? 내 몸까지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프리실라도 즐겁게 말했다.
“봄에는 모든 것이 새로워. 봄 자체가 항상 새로운 거니까. 어떤 봄도 지난봄과 똑같진 않아. 모든 봄이 그해 봄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지. 저 작은 연못 주변 잔디도 파랗고 버들가지 눈은 금방 싹을 틔울 것 같다.”
앤이 말했다.
“시험도 끝났으니 다음 주 수요일이면 종업식이네. 다음 주 오늘이면 우리는 집에 있는 거야.”
“나도 너무 기뻐.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거든. 집 뒤 베란다 계단에 앉아서 해리슨 아저씨네 밭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느껴보고 싶기도 하고,‘유령의 숲’에서 자라는 고사리들을 뜯고 싶기도 해. ‘제비꽃 골짜기’에 핀 제비꽃도 따고 싶어. 우리의 황금 같은 날 소풍을 기억하니, 프리실라? 개구리가 노래하고 미루나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싶어. 물론 킹스포트도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번 가을에 여기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 토번 장학금을 타지 못했다면 돌아올 수 없었을거야. 더 이상 마릴라 아주머니의 얼마 안 되는 저축을 축낼 수는 없는 일이거든.”
앤이 꿈을 꾸듯 이야기했다.
“집만 구할 수만 있다면! 킹스포트를 봐, 앤. 집, 집, 집. 온통 집이야. 그런데 우리를 위한 집은 없어.”
프리실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자, 프리실라. 고대 로마 사람들의 말처럼 ‘가장 좋은 것은 맨 뒤에 온다’고. 집은 찾을 수 있어. 아니면 아예 새로 지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니. 오늘처럼 멋진 날에는 밝은 말만 들어 있는 내 어휘사전에서 실패란 말은 찾을 수 없어.”
두 사람은 해가 저물 때까지 공원을 거닐면서 봄날이 펼치는 놀라운 기적과 영광과 경이로움을 즐겼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포퍼드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패티네 집’도 다시 볼 수 있었다.
“뭔가 신비스러운 일이 곧일어날것 같은 느낌이야. ‘엄지손가락이 따끔따끔 아프면서.’22)”
비탈길을 올라가면서 앤이 말했다.
“이건 정말 멋진 소설 같은 느낌이야. 어머나! 프리실라 그랜트, 저길 좀 봐. 그리고 내가 본 것이 진짜인지,아니면내가 헛것을 본 건지 말 좀 해줘!”
프리실라가 올려다보았다. 앤의 엄지손가락과 눈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패티네 집’의 둥근 대문 위에 작고 소박한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세놓음. 가구 완비.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와서 하세요.’
“프리실라, 우리가 저‘패티네 집’을 빌리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앤이 속삭이듯 물었다.
“아니, 불가능할걸. 그럼 너무 완벽해지니까. 요즘엔 그런 동화 같은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아. 난 아예희망도 품지않을래, 앤. 실망은 견디기 힘든 거야. 우리가 가진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할 거야. 명심해, 앤. 여긴 스포퍼드 가라고.”
프리실라가 단언했다.
“하지만 우린 집을 구해야 해.”
앤이 힘주어 말했다.
“오늘 저녁엔 방문하기 너무 늦었어. 내일 다시 와보자. 오, 프리실라, 만약 우리가 이렇게 멋진 집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이곳을 본 이후 내 운명은 여기 ‘패티네 집’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
22.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4막 1장 44-45: “뭔가 사악한 것은 엄지가 따끔따끔 아프면서 다가오지.”에서 인용.



10
패티네 집





다음 날 저녁, 앤과 프리실라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청어 가시 모양의 보도를 따라 아담한 정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나무들은 4월의 바람에 흔들리며 노랫소리를 내고, 정원에는 예쁘고 포동포동한 울새들이 좁은 길을 뽐내듯 걸어 다녀 생기가 넘쳤다. 두 아가씨가 머뭇머뭇 벨을 누르자 딱딱한 표정의 나이 먹은 하녀가 나왔다. 열린 문 안쪽으로 바로 큰 거실이 보였으며 작지만 밝게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두 부인이 앉아 있었다. 노부인들은 나이가 많아 보였고 엄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 부인은 거의 70세가 다 되어 보였고, 다른 부인은 50세 정도 되어 보인다는 것 외에 두 사람 사이에 별 차이점은 없어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금속 안경테 뒤로 보이는 눈은 커다랗고 눈동자는 옅은 파란색이었다. 둘이 똑같이 모자를 썼고 회색 숄을 둘렀으며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편안하게 흔들의자를 흔들거리며 아무 말 없이 앤과 프리실라를 바라보았다. 뒤쪽으로는 커다란 도자기 개 인형이 한 마리씩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온몸에 둥근 녹색 점이 뒤덮인 개들이었다. 코도 귀도 모두 녹색이었다. 앤은 그 개들을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마치 ‘패티네 집’의 쌍둥이 수호천사 같았다.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두 아가씨는 너무 긴장해서 할 말을 찾지 못했고, 두 부인과 도자기 개들은 말하기가 귀찮은 듯했다. 앤은 방을 흘끔 돌아보았다. 얼마나 멋진 곳인가! 또 다른 문 하나는 소나무 숲을 향해 열려 있었는데 울새 한 마리가 대담하게 베란다 계단까지 날아와 앉은 것이 보였다. 바닥은 둥글게 꼬아 만든 매트가 깔렸는데, 마릴라가‘초록 지붕 집’에 깔아놓은 깔개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집 안 구석구석에 놓인 것들은 죄다, 심지어 에이번리에서조차 구식으로 취급받을 것들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여기 스포퍼드 가에서 발견하다니! 할아버지가 썼을 법한 거대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시계가 구석에서 크지만 엄숙한 소리로 째깍거렸다. 벽난로 선반 위에는 아름답고 작은 찬장이 놓였는데 유리로 된 창문을 통해 도자기들이 옅고 기묘한 빛을 발했다. 벽에는 무늬와 윤곽을 살린 오래된 장식 천이 걸려 있었다. 한쪽 구석으로 계단이 나 있었는데 첫 번째 계단참에 난 창문 곁에는 앉을 자리도 예쁘게 마련되어 있었다. 앤의 상상 속의 집 바로 그대로였다.
침묵이 너무 오래된다 싶어지자 프리실라가 앤을 팔꿈치로 슬쩍 찔러 무슨 말이든 시작하라는 신호를 했다.
“저, 저, 저희들은 이 집 문에 물어볼 말이 있으면 들어오라는 표지가 붙어 있어 왔습니다.”
앤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부인에게 가까스로 말을 걸었다. 미스 패티 스포퍼드가 분명했다.
“아, 그래요. 오늘 그 표지를 떼어버리려고 했었는데.”
미스 패티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너무 늦은 건가요? 다른 사람에게빌려주기로 하신 모양이군요.”

앤이 아쉬운 듯 물었다.
“아니에요. 이 집을 세놓지 않기로 했어요.”
“어머, 너무 안타깝네요. 우리는 이 집을 사랑해요. 그래서 우리가 빌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답니다.”
앤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패티가 뜨개질 도구를 내려놓고 안경을 벗어 닦더니 다시 안경을 꼈다. 처음으로 앤을 사람 대하듯 쳐다봐 준 것이다. 다른 부인도 패티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했다.
“이 집을 사랑한다고요. 그 말은 이 집을 정말 사랑한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이 집이 그냥 보기 좋다는 말인가요? 요즘 아가씨들은 너무 과장된 말을 잘 써서 진짜 속내가 무언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젊을 땐 안 그랬는데. 우리 땐 어머니나 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와 똑같은 어조로 순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패티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앤은 양심에 거리낄 게 없었다.
“이곳을 정말 사랑해요. 작년 가을 이곳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을 빼앗겼답니다. 학교 친구 두 명과 제가 하숙집 대신 내년에는 집을 얻어 살고 싶어서 마땅한 집을 찾아다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집을 세놓는다는 표지를 보고 너무나 기뻤어요.”
“이 집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마리아와 내가 오늘 이 집을 세놓지 않기로 마음먹긴 했지만요. 이 집을 빌리고 싶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우린 이 집을 꼭 세놓지 않아도 돼요. 세를 놓지않더라도 유럽 여행을 갈 정도는 된다고요. 물론 세를 놓으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단순히 돈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 집을 맡기고 싶진 않았어요. 그런데 아가씨는 좀 다르군요. 아가씨는 이 집을 사랑하고 또 잘 보살펴줄 거라는 믿음이 가요. 이 집에서 사세요.”
미스 패티가 말했다.
“하지만 두 분이 원하시는 금액을 지불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앤이 머뭇거렸다.
미스 패티는 필요한 액수를 말했다. 앤과 프리실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프리실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한 돈을 지불한 능력은 없어요. 우린 모두 학생들이고 또 가난하답니다.”
실망감으로 목이 메어 앤이 대답했다.
“얼마면 가능하겠어요?”
뜨개질을 멈추지 않은 채 미스 패티가 물었다.
앤은 가능한 액수를 말했다. 미스 패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됐어요. 내가 말했듯이 우리가 꼭 돈 때문에 세를 놓으려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 우리가 부자는 아니지만 유럽에 갈 정도는 돼요. 난 지금까지 유럽에 가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는데, 우리 조카딸 마리아 스포퍼드가 유럽에 꼭 가보고 싶어 해서요. 마리아 같은 어린 사람이 혼자 세계여행을 다닐 수는 없지 않겠어요.”
미스 패티의 엄숙한 말은 진심이었다.

“그럼요, 힘들죠.”
앤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마리아를 돌보려면 같이 가야만 해요. 물론 즐거울 거예요. 지금 난 70살이지만 아직도 하루하루 사는 게 즐거워요. 만약 유럽에 가고 싶은 마음이 일찍 들었더라면 벌써 갔다 왔을 거예요. 2년, 아마 3년 정도 나가 있게 될 것 같네요. 6월에 배로 떠나요. 그때 아가씨에게 열쇠를 보내줄게요. 세간은 다 놔두고 갈게요. 원하면 그걸 쓰세요. 특별히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몇 개만 가져갈 거예요. 나머지는 그대로 놔두려고 해요.”
“그럼 저 도자기 개도 놔두실 건가요?”
앤이 머뭇거렸다.
“그러길 원해요?”
“오, 네. 진심으로. 저 개들은 너무 재미있어요.”
기쁜 표정이 미스 패티의 얼굴에 번져왔다.
“저 개들은 나한테 아주 소중한 거예요. 백 년도 더 된 개들이거든요. 우리 오빠 아론이 런던에서 50년 전에 가지고 온 후부터 쭉 저렇게 벽난로 양쪽에 하나씩 세워두었죠. 스포퍼드 가란 이름은 우리 오빠 아론의 성을 따서 지어졌지.”
미스 패티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아론 삼촌은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요즘은 아론 삼촌 같은 사람은 만나보기도 힘들죠.”
마리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특히 너한테 아주 좋은 삼촌이었지, 마리아. 그 점을 잊어버리면 안 돼.”
감정이 격해진 미스 패티가 말했다.
“그럼요, 전 항상 기억해요. 지금도 저기 벽난로 앞에서 이렇게 뒷짐을 지고 싱긋 웃어 보이는 것 같은걸요.”
마리아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하지만 미스 패티는 단호하게 감상에서 벗어나 집을 세놓는 문제로 돌아왔다.
“그럼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놔둘게요. 저놈들을 잘 돌봐주기로 약속만 해준다면 말이죠. 저 애들의 이름은 고그와 매고그예요. 고그는 오른쪽, 매고그는 왼쪽에 있는 놈이죠. 아, 한 가지 더. 이 집을‘패티네 집’이라고부르는 데반대하지 않겠죠?”
“아니요, 절대 반대 안 해요. 이 집에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가 그 이름인데요.”
“분별력이 있군요.”
미스 패티가 아주 만족한 듯 대답했다.
“세상에, 여기 와서 우리 집을 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네가 살 동안은 그 이름을 떼어버리겠다고 했어요. 나는 이 집에는 반드시 그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죠. 우리 아론 오빠의 유언대로 내가 이 집을 물려받았을 때부터 계속 이 집 이름은‘패티네 집’이었어요. 나와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이 집은 계속‘패티네 집’으로 남을 거예요. 그 후에야 이 집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무슨 바보 같은 이름을 붙이건 그건 자기 좋을 대로 하라죠.”

미스 패티가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그 후에야 큰 홍수가 난들 알게 뭐냐’는 식으로 말을 끝맺었다.
“계약을 하기 전에 집을 한번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요?”
집을 둘러보면 볼수록 둘의 마음은 더욱 들떴다. 아래층에는 큰 거실 곁에 부엌과 작은 침실도 있었다. 2층에는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두 개가 있었다. 앤은 특히 작은 방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큰소나무 쪽으로 난 창이 있어서였다. 앤은 그 방이 자기 방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 방은 희미한 파란색 벽지가 발라져 있으며 작고 오래된 화장대가 놓였고 그 위에는 여러 개의 초가 꽂힌 촛대가 놓였다. 다이아몬드 모양 창문에는 주름 잡힌 모슬린 커튼이 걸렸고 창 아래로는 의자가 놓여 공부하거나 꿈꾸기에 좋아 보였다.
“너무 안락한 곳이라서 깨어나면 밤의 환영까지 볼 수 있겠다.”
방을 나가면서 프리실라가 말했다.
“미스 패티와 미스 마리아는 꿈 속 사람들 같아. 저분들이 저런 숄을 두르고 모자를 쓰고 세계 여행을 하는 모습이 그려지니?”
앤이 웃으며 말했다.
“여행을 떠날 때는 다 벗어버리겠지. 하지만 저 뜨개질거리는 어디든지 들고 다닐 것 같아. 저분들은 뜨개질을 하지 않고서는 못살 것 같거든.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걸어 다니면서도 뜨개질을 할걸. 그동안 우리는‘패티네 집’에서 살게 될 거고. 바로 여기 스포퍼드 가에서 말이야. 난 벌써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야.”
“난 새벽하늘의 별 하나가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것 같아.”
앤이 말했다.
그날 밤 필리파 고든이 세인트 존 거리 38번지로 슬그머니 들어와서는 앤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얘들아, 나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 조국을 잃은 남자처럼, 아니, 그림자 잃은 남자였던가? 몰라, 까먹었어. 하여튼 난 오늘 종일 짐을 쌌어.”
“그러다 진이 다 빠진 거야, 그렇지? 무엇을 먼저 싸야 할지, 어디다 넣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거든.”
프리실라가 웃었다.
“정확해. 내가 짐을 몽땅 어떻게든 가방에 모두 쑤셔 넣었고, 우리 집주인과 하녀가 가방에 올라앉아 꾹꾹 눌러서 겨우 자물쇠를 채웠거든. 그런데 내가 종업식 때 필요한 것들을 가방 제일 밑바닥에 넣었다는 생각이 났어. 그래서 그 가방을 다시 열어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가방 속을 쑤셔댔지. 매번 바로 이거구나 하면서 꺼내보면 다른 물건이 나오고, 또 다른 물건이 나오고, 아무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래도 나, 욕은 안 했다.”
“난 네가 욕했다고는 말 안 했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잖아. 물론 내 생각이 거의신성 모독수준이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나, 코감기에 걸려버렸나 봐.한숨 쉬고코를 훌쩍거리고재채기하는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가 기운을 낼 수 있는 말 좀 해줘.”
“다음 주 목요일 밤이면 넌 알렉과 알론조가 있는 곳으로 가게 돼.”
앤이 넌지시 말했다.

필리파는 서글픈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내가 이렇게 감기로 고생할 때는, 알렉과 알론조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그런데 앤, 프리실라, 너희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가까이서 지켜보니 너희 둘 모두 반짝반짝해. 마음이 뭔가 무지갯빛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분명해. 얼굴이 환해! 무슨 일이야?”
“우리, 다음 겨울에‘패티네 집’으로 이사 가.”
앤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잘 들어. 우린 거기서 사는 거야. 하숙을 하는 게 아니고. 그리고 스텔라 메이너드도 올 거야. 스텔라의 아주머니가 집을 돌봐주시기로 했어.”
필리파는 벌떡 일어나 코를 쓱 닦더니 앤 앞에 털썩 무릎을 꿇으면 주저앉았다.
“오, 얘들아, 나도 끼워줘. 나 정말 잘할게. 만약 방이 모자라면, 난 그 마당에 있는 개집에서라도 잘 수 있어. 개집 있는 거 봐뒀거든. 그냥 나도 같이 살게만 해줘.”
“바보같이, 일어나.”
“나도 같이 살 수 있다고 말할 때까진 꿈쩍도 안 할 거야.”
앤과 프리실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앤이 천천히 입을 뗐다.
“필, 우리도 너랑 함께 살고 싶어. 하지만 분명히 밝혀둘 게 있어. 난 가난해. 프리실라도. 스텔라 메이너드도 마찬가지야. 집안일도, 먹는 것도 그저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거야. 그럼 너도 우리처럼 살아야 해. 하지만 넌 부자잖아. 네가 있는 곳 하숙비만 봐도 알 수 있어.”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 혼자 외롭게 하숙집에서 먹는 소고기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먹는채소 반찬이 훨씬 좋아. 난 빵과 버터만으로도 너끈히 살 수 있어. 약간의 잼만 있다면 말이지. 그러니 나도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줘.”
필리파의 간청은 비장했다.
“그렇다면, 생각해야 할일이 많아질 것 같은데. 스텔라의 아주머니가 혼자 다 하실 수 있을까? 각자 일은 각자가 해야 하는데. 필, 어때?”
“허드렛일도 바느질도 난 하지 못하지. 하지만 이제 배울게. 앤, 프리실라, 어떻게 하는지 한 번만 보여주면침대 정리부터 잘할 수 있어. 그리고 이 점을 알아줘. 내가 음식은 못 하지만 그래도 성질 안 부리고 착하게 굴 거라는 건 약속할게. 그거 대단한 일 아니니? 그리고 날씨가 어떻다고 투덜거리지도 않을게. 그건 정말 착한 일이야. 그러니 제발, 제발! 지금까지 이렇게 무엇을 간절하게 바란 적이 없었어. 그런데 이 방바닥은 정말 딱딱하구나.”
“그럼 한 가지 더 있는데.”
프리실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레드먼드 학교에 소문이 났듯이, 필, 넌 거의매일 밤집에 사람들이 찾아와 놀잖아.‘패티네 집’에서는 그럴 수 없어. 딱 금요일 밤에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려고 해. 그래서 만약 네가 우리와 함께 살려면 이 규율을 지켜야만 해.”
“내가 그런 거에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잘됐다. 나도 규칙이 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떤 규칙을 정할지 결정하지 못했을 뿐이야. 네가 그런 결정을 내려주면 나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야. 만약 나를 끼워주지 않으면 난 실망 때문에 죽은 귀신이 되어 너희들을 따라다닐 거야.‘패티네 집’현관에 진을 치고 앉아 있을걸. 그럼 문을드나들 때마다나 때문에 놀라 기절하게 될 거야.”
앤과 프리실라는 다시 뭔가 모종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물론 스텔라와 상의하기 전까진 너를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은 못 하지만 스텔라도 반대하진 않을 거야. 우리야 너를 환영해.”
“만약 소박한 생활이싫증 나면언제든지 떠나도 돼. 물어볼 필요도 없이.”
프리실라가 덧붙였다.
필리파가 벌떡 뛰어올라 환호성을 지르면서 두 사람을 꽉 껴안고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그러고는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일이 잘돼야 할 텐데 말이야.”
프리실라가 진지하게 얘기했다.
“우리가 잘되도록 해야지. 필도 잘 적응해서 분명히 행복한 우리만의 작은 집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앤이 말했다.
“필은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야. 같이 뛰어놀고 싶은 동무. 그리고 같이 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얇은 주머니 사정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니? 하지만 필이 우리랑 어떻게 살 수 있을지 몰라? 그 사람이 같이 살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려면 여름과 겨울을 함께 나봐야 한대.”

“그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 그 시험을 받아봐야겠네. 그냥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자. 그냥 멋대로 살자고. 필은 이기적인 아이가 아니야, 물론 약간 경솔하긴 하지만. 어쨌건 난 우리 모두 ‘패티네 집’에서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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