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13~14

나단비 | 2024.03.26 22:28:45 댓글: 0 조회: 63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727
13
죄인의 길





데이비와 도라는 주일 학교에 갈 준비를 마쳤다. 이번에는 둘만 가야 했다. 그동안은엔 린드 부인이 주일 학교에 데려다주어서 이렇게 둘만 교회에 가는 건 거의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린드 부인이 발목을 삐끗해 다리를 절게 되는 바람에 오늘 아침에는 어디든 나갈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쌍둥이는 커스버트 가족을 대표해 교회에 가게 되었다. 앤은 전날 저녁 카모디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고, 마릴라는 두통을 앓아 교회에 갈 수 없었다.
데이비는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도라는 아래층에서 린드 부인의 도움을 받아 교회 갈 준비를 마친 다음 얌전히 데이비를 기다렸다. 데이비는 혼자 준비를 했다. 데이비의 주머니에는 주일 학교에 낼 1센트, 교회에 낼 헌금 5센트가 들어 있었다. 한 손에는 성경, 다른 손에는 주일 학교 회보가 들렸다. 데이비는 오늘 배울 내용도 잘 알고 교리 문답서의 질문도 완벽하게 외웠다. 지난 일요일 오후 내내 린드 부인의 부엌에서 억지로라도 공부를 했으니까. 그러므로 데이비의 마음은 평온해야 옳았다. 하지만 아무리 교훈집과 교리 문답서를 공부해도 데이비의 마음속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늑대 같았다.
데이비가 도라에게 가는데 린드 부인이 부엌에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왔다.
“깨끗하게 씻었니?”
린드 부인이 다그쳤다.
“네, 보이는 부분은 다요.”
데이비는 얼굴을 찌푸리며 반항적으로 대답했다.
린드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비의 목과 귀가 의심스러웠지만 검사라도 하려 들면 분명 꽁무니를 내뺄 텐데, 오늘은 데이비를 쫓아다닐 수도 없었다.
“그럼 오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흙탕 속이나 헤집고 다니지 말고, 남의 집 현관 앞에 서서 애들하고 이야기만 하고 있어도 안 되고, 자리에서 꿈틀거리거나 몸부림을 쳐도 안 된다. 교훈집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고, 헌금도 꼭 내야 해. 기도 시간에 속삭이지 말고, 설교를 들을 때는 집중해서 들어라.”
린드 부인은 데이비에게 이런저런 주의를 주었다.
데이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길을 따라 내려갔고 그 뒤로 얌전하게 도라가따라 나갔다. 하지만 데이비의 마음속은 들끓었다. 데이비는 고통받고 있었다, 아니면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는 린드 부인이‘초록 지붕 집’에 온 뒤로는 많은 것들이 린드 부인의 손과 입에 달렸다는 생각을 했다. 린드 부인은 다른 누구와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같이 살 사람이 아홉 살이든 아흔 살이든. 린드 부인은 아이를 잘 키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날에는티머시코튼과 낚시하러 가도 좋다는 마릴라의 허락을 얻었는데도 린드 부인이 나서서 못 가게 말리는 바람에 갈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데이비의 속은 여전히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초록 지붕 집’오솔길에서 벗어나자마자 데이비는 갑자기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지금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얼굴이었다. 도라는 그런 오빠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찌푸린 얼굴을 다시는 반듯하게 펼 수 없을까 봐 더럭 겁이 났다.
“망할 놈의 아줌마!”
데이비가 드디어 감정을 폭발시켰다.
“데이비, 욕하면 안 돼.”
도라가 너무 놀라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망할이란 말은 욕이 아니야. 진짜 욕이 아니라고. 뭐 진짜라도 상관없지만.”
데이비는 될 대로 되란 듯 내뱉었다.
“주일엔 무서운 말이 하고 싶어도 참아야 돼.”
도라가 간청했다.
그러나 데이비의 태도는 뉘우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데이비도 자기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나만의 욕하는 말을 만들어낼 거야.”
데이비가 말했다.
“그럼 하느님이 벌주실 거야.”
도라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럼 하느님도 똑같이 못된 노인이야.”
데이비가 반박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기분을 표현하고 살아야 한다는 걸 하느님은 모르나?”
“데이비!”
도라는 데이비가 당장 그 자리에서 벼락에 맞아 죽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든 난 더 이상 린드 아줌마가 대장 노릇 하는 것 못 참겠어. 앤 누나나 마릴라 아줌마가 명령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린드 아줌마는 아냐. 지금부턴 아줌마가 하지 말라는 것만 다 할 거야. 잘 봐둬.”
데이비가 침을 튀기며 말했다.
도라가 공포에 사로잡혀 지켜보는 동안 데이비는 잔디를 벗어나 고운 먼지가 쌓인 길 가장자리로 발목 깊숙이 빠졌다. 그리고 한 달 동안이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마른 날씨가 계속되어 뿌연 먼지가 이는 모래 더미를 심술궂게 발을 질질 끌며 돌아다녔다.
“이게 시작이거든. 이제 아무 집 현관으로나 걸어 들어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있으면 계속 이야기할 거야. 몸부림치고 꿈틀거리고 아이들과 속삭일 거야, 교훈집은 나도 몰라. 헌금 낼 돈은 두 개 다 버려야지, 지금 당장.”
데이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데이비는 너무 재미있다는 듯 주머니를 뒤져 6센트를 꺼내 배리 씨네 담장 너머로 던져버렸다.
“악마가 데이비를 조종하고 있어.”
도라가 비난하듯 말했다.
“아니라니까. 그냥나 스스로생각해낸 거야. 그리고 다른 것도 생각해낸 게 있어. 난 주일 학교도 교회도 이제 안 갈 거야. 절대로. 코튼 씨네 애들과 놀아버릴 거야. 걔들이 어제 나한테 오늘 주일 학교 안 갈 거라고 했어. 엄마가 집에 없대. 그래서 주일 학교에 억지로 가게 할 사람이 없대. 가자, 도라. 정말 재미있을 거야.”
데이비는 화가 나서 울부짖었다.
“난 거기 가기 싫어.”
도라가 거절했다.
“아냐, 넌 가야 해. 안 가면 프랭크 벨이 지난주 월요일에 너한테 뽀뽀했다고 마릴라 아줌마한테 고자질한다.”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애가 나한테 그렇게 할 줄 난 몰랐다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도라가 소리쳤다.
“그래도 네가 프랭크를 때리거나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잖아. 네가 나랑 같이 안 가면, 그것도 마릴라 아줌마한테 다 말해야지. 우리 저 들판으로 질러가자.”
데이비가 윽박질렀다.
“난 저 소들이 무서워.”
가엾은 도라는 도망치고 싶었다.
“네가 저 소들이 무섭다고? 쟤들은 너보다 어린 놈들이야.”
데이비가 비웃었다.
“그래도 몸집이 크잖아.”

도라가 말했다.
“널 해치지 않아. 이리 와. 여기 정말 멋있다. 난 커서 어른이 되면 교회 가는 거 생각도 안 할 거다.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으니까.”
“안식일 안 지키면 딴 데로 갈 거야.”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데이비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도라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다.
하지만 데이비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지옥은 아주 멀리 있고 코튼 씨네 아이들과 낚시를 가는 기쁨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데이비는 도라가 좀 더 용기를 냈으면 하고 바랐다. 도라는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걸음걸음마다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그래서 기분을 망치고 있었다.
하여튼 여자들은 재미라곤 없어. 데이비는 이번에는 속으로라도 ‘망할’이란 말을 쓰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이 들어서가 아니라 아직 아무도 모르는 힘을 너무 많이 시험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코튼 씨네 아이들은 뒷마당에서 놀고 있다가 데이비가 나타나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피트, 토미, 아돌푸스, 그리고 미라벨만 있고 엄마도 큰누나도 집에 없었다. 도라는 적어도 미라벨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남자아이들 무리에여자아이혼자 끼어 있는 건 싫었다. 하지만 사실 미라벨은남자아이만큼 나빴다. 얌전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 다니면서 주변 상황은 전혀 개의치 않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래도 옷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우리 낚시 가자.”

데이비가 말했다.
“좋아!”
코튼네 아이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한걸음에 달려가 지렁이를 잡으려고 서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미라벨이 깡통을 들고 아이들을 지휘했다. 도라는 옆에 앉아서 울 수밖에 없었다. 미운 프랭크 벨이 뽀뽀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럼 데이비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 기분 좋은 주일 학교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아이들은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의 눈에 띌 염려가 있는 연못에서 낚시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대신 코튼네 집 뒤쪽 숲 속에 있는 작은 시냇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시내는 송어가 아주 많아서 코튼네 아이들은 그날 아침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적어도 코튼네 아이들은 그랬고, 데이비도 그렇게 보였다. 데이비도조심하느라신고 있던 부츠와 스타킹을 벗어놓고, 토미의 옷을 빌려 입었다. 놀이 복장을 갖춘 데이비에게 이제 큰 나무 밑의 덤불이나 늪지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도라는 너무 가여웠다. 성경과 주일 학교 회보를 손에 꽉 움켜쥔 채 이 웅덩이, 저 웅덩이로 옮겨 다니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느라 숨이 찼으며 주일 학교가 너무 그리웠다. 자기를 예뻐해주는 주일 학교 선생님 앞에 앉아 있는 자기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반쯤 정신 나간 코튼네 아이들과 숲 속을 돌아다니며 부츠와 예쁜 흰색 드레스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있어야 한다니. 미라벨이 앞치마를빌려주겠다고 했지만 도라는 경멸스럽다는 듯 거절해버렸다.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그날도 송어는 충분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작은 죄인들은 원하는 만큼의 송어를 잡아 다들 집으로 향했다. 도라도 조금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아이들은잡기 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도라는 뜰에 있는 닭 둥지 위에 점잖게 혼자 앉아 있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은 모두 우르르 돼지우리 지붕에 올라가 말안장처럼 생긴 지붕 덮개에 자기 이름 머리글자를 새기고 놀았다. 그새 또 데이비는 닭장의 평평한 지붕과 그 밑쪽으로 쌓인밀집 더미를 보더니 더 재미있는 놀이를 생각해냈다. 데이비의 제안대로 아이들은 모두 닭장 지붕으로 올라가 온갖 괴성을 지르며 밑에 쌓인밀집 더미위로 떨어지는 놀이를 30분 동안이나 계속했다.
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기쁨에는 항상 그 끝이 오게 마련이다. 연못 위 다리를 건너는 마차 바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데이비는 자기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토미의 바지를벗어 던지고 자기 옷으로 갈아입고는 한숨을 지으며 한 줄로 꿴송어 다발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아무리 송어를 집으로 가져가고 싶어 해봤자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정말 재미있지 않았냐?”
데이비가 의기충천해서 물었다. 둘은 언덕 위 들판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아니.”
도라가 딱 잘라 말했다.
“너도 재미있게 보낸 것 같진 않은데.”
갑자기 전혀 생각지 않았던 말이 도라 입에서 불쑥튀어나왔다.
“난 재미있었어.”
데이비가 아니라고 외치기는 했지만 목소리에 어쩐지 과장이 섞였다. “하긴 넌 재미도 없이 보냈으니깐. 그냥 늙은 노새처럼 앉아만 있었잖아.”
“난 이제 코튼 집 아이들과는 절대 안 놀 거야.”
도라가 오만하게 말했다.
“그 애들은 아무 문제도 없어. 우리보다 훨씬 재미있게 잘 놀았을 거야. 걔네들은 하고 싶은 건 뭐든지 다 하고, 또 사람들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잖아. 나도 이제부턴 그렇게 할 거야.”
데이비가 반박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없는 말들도 많아, 데이비.”
도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냐, 그런 건 없어.”
“있어. 너는 목사님 앞에서 ‘톰캣’23)이란 말을 할 수 있어?”
도라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 말에 데이비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유롭게 말하는 것에 이렇게 구체적인 예까지 듣고 보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라의 생각에 고분고분 따를 수도 없었다.
“물론 그럴 수야 없지. ‘톰캣’이란 말은 성스러운 단어가 아니잖아. 목사님 앞에서 그렇게 동물적인 말을 할 수는 없어.”
데이비는 샐쭉해져서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한다면?”

도라가 끈질기게 물었다.
“그럼 ‘고양이 토머스’라고 하지, 뭐.”
“내 생각엔 ‘신사 고양이’라고 하는 게 더 예의 바른 말일 것 같은데.”
도라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너도 생각이란 걸 하는구나!”
데이비가 도라의 기를 죽이려고 경멸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데이비는 기분이 나빴다. 물론 그것을 도라 앞에서 인정하기보단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지만 말이다. 주일 학교를 빼먹은 기쁨도 사라지고 양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니 가슴을 아프게 찌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다 따져보면 주일 학교와 교회에 가는 것이 훨씬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린드 부인이 두목 행세를 하긴 해도 부엌 찬장에는 여전히 쿠키가 가득 든 상자를 마련해둘 것이며 그 과자에 인색하게 굴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지난주에 새로 마련한 학교 갈 때 입는 바지를 찢었을 때도 린드 아줌마가 바지를 수선해주고 마릴라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도 하필이면 지금처럼 곤란한 순간에 생각났다.
하지만 데이비의 부정의 잔은 아직 덜 채워졌다. 데이비는 하나의 잘못은 또 다른 잘못을 부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데이비와 도라가 린드 부인과 함께 점심을 먹을 때 린드 부인이 물었다.
“주일 학교에 애들이 모두 왔더냐?”
“예, 아줌마. 한 사람만 빼고.”
데이비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교리 문답 질문에는 대답도 다 잘했고?”
“예, 아줌마.”
“헌금은 잘 냈니?”
“예.”
“맬컴맥퍼슨 부인은 교회에 나오셨든?”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은 사실이잖아.’ 불쌍한 데이비는 생각했다.
“다음 주에 부인회 모임이 있다고 하더냐?”
“예.”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기도회는?”
“잘 모르겠어요.”
“알고 있어야지. 어떤 광고 말씀을 하시는지 잘 들어야지. 하비 부인은 교훈집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던?”
데이비는 급하게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지막으로 양심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그러고는입심 좋게 이미 몇 주 전에 배운 교훈을 암송했다. 다행히도 린드 부인은 더 이상 데이비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데이비는 점심을 맛나게 먹을 수 없었다. 푸딩만 조금 먹고 수저를 놓아야 했다.
“왜 그러니?”
당연히 의아하게 생각한 린드 부인이 물었다.

“아니에요.”
데이비는 중얼거릴 뿐이었다.
“안색이 안 좋구나. 오늘 오후에는 햇볕을 쐬지 않는 게 좋겠어.”
린드 부인이 말했다.
“데이비, 아까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했는지 알아?”
점심을 마치기가 무섭게 도라가다그치듯물었다. 좌절감으로 궁지에 몰린 데이비가 갑자기 맹렬한 기세로 돌변했다.
“몰라, 그리고 상관 안 해. 그냥 입 닥쳐, 도라 키스.”
가여운 데이비는 나무장작 더미 뒤의 은신처에 숨어 죄인의 길이 어떤 길인가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앤이 집에 도착했을 때‘초록 지붕 집’은 어둠과 침묵으로 뒤덮여 있었다. 앤은 너무 피곤하고 졸린 탓에 집에 오자마자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지난주에는 에이번리에서 즐거운 모임이 여러 차례 있어 저녁 늦게 거기 참석하느라 피곤했다. 앤은 베개에 머리가 닿기 무섭게 선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때 앤의 침실 문이 조용하게 열리더니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앤은 졸린 채로 다시 일어나 앉았다.
“데이비, 너니? 무슨 일이야?”
하얀 옷을 입은 물체가 방을 가로질러 침대로뛰어 들어왔다.

“누나, 누나가 집에 있으니까 정말 좋아. 누구한테 이야기하지 않으면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팔을 앤의 목에 두르면서 데이비가 흐느꼈다.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지금 내가 얼마나 비참한 기분인지 말해야 돼.”
“왜 비참한데, 데이비?”
“내가 오늘 아주 나빴거든, 누나. 정말 나빴어. 지금까지 최고로 나빴어.”
“무슨 짓을 했는데 그래?”
“말하기가 무서워, 누나. 누나가 다시는 날 좋아하지 않을까 봐 무서워.오늘 밤에는 기도도 못 하겠어. 내가 한 일에 대해 하느님께 말하기가 무서워. 하느님이 아실까 봐 정말 부끄러워.”
“그래도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신단다. 데이비.”
“도라도 그렇게 말했어. 하지만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 어쨌든 누나에게 먼저 고백하려고.”
“왜 무슨 일을 했니?”
한번 말이 터져 나오자 모든 것을 술술 다 고백하게 되었다.
“나, 주일 학교를 가지 않았어. 그리고 코튼네 아이들과 낚시 갔어.그러고는린드 아줌마한테 너무 많은 거짓말을 했어. 한 여섯 개쯤. 그리고 나, 나, 욕도 했어, 누나. 거의 욕에 가까운 말이야. 하느님 욕도 했어.”

침묵이 흘렀다. 데이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앤이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다시는 말도 걸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누나, 나한테 어떻게 할 거야?”
데이비가 속삭였다.
“아무것도. 넌 이미 벌 받았어.”
“아니야, 벌 받은 거 없어. 나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났는걸.”
“네가 잘못을 저지른 다음에 계속 기분이 안 좋았을 거야, 그렇지 않니?”
“맞아.”
데이비는 힘주어 말했다.
“그건 바로 네 양심이 너를 벌주고 있어서야, 데이비.”
“양심이 뭐야? 궁금해.”
“그건 네 속에 있는 거야. 네가 잘못하면 너에게 잘못했다고 말을 해주고, 또 네가 나쁜 일을 계속하면 네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거야. 어때, 그런 것 같니?”
“맞아, 근데 난 그게 무엇인지 몰랐어. 그냥 그게 없었으면 하고 바랐거든. 그럼 훨씬 더 재미있었을 거야. 근데 누나, 내 양심은 어디 있는데? 궁금해. 내배 속에 있어?”
“아니, 그건 네 영혼 속에 있어.”

앤이 답했다. 침실의 어둠이 감사했다. 엄숙하게 말하려면 심각한 분위기가 필요했으니까.
“내 생각엔 이번 일은 절대 잊어버리지 못할 것 같아. 마릴라 아줌마랑 린드 아줌마한테 말할 거야, 누나?”
데이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네가 한 나쁜 행동에 대해 너도 후회하고 있잖아, 그렇지?”
“응.”
“그럼 다신 그렇게 나쁜 행동은 하지 않겠지?”
“절대. 하지만…… 다른 식으로 나쁜 행동을 할지도 몰라.”
데이비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넌 욕도 안 할 거고 주일 학교를 빼먹지도 않을 거고, 너의 잘못을 덮으려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을 거잖아.”
“그럼, 절대로 안 하지. 그럴 가치가 없어.”
“그럼 데이비, 하느님께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고 용서해달라고 빌어.”
“그럼 하느님이 날 용서해주실까, 누나?”
“그럼, 그렇고말고.”
“그럼 하느님이 용서해주시든 안 해주시든 상관 안 할래.”
데이비가 기쁘다는 듯 말했다.

“데이비!”
“아, 그래, 빌게, 빈다고.”
데이비는 앤의 엄한 목소리에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갔다.
“하느님께 부탁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누나. 제발 하느님, 오늘 전 정말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이제 주일에는 항상 착해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자. 이제 됐어?”
“그래, 이제 착한 아이답게 자야지.”
“알았어, 누나. 이제는 끔찍스러운 생각도 안 들고 기분이 좋아. 잘 자, 누나.”
“잘 자.”
앤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누나!”
데이비가 앤의 침대 옆에서 다시 앤을 깨웠다. 앤은 억지로 눈을 떠야만 했다.
“왜 그러니, 데이비?”
목소리에 짜증이 섞이지 않게 애쓰면서 물었다.
“누나, 해리슨 아저씨가 어떻게 침 뱉는지 봤어? 나도 열심히 연습하면 아저씨처럼 침을 뱉을 수 있을까?”
앤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데이비 키스, 당장 침대로 가.오늘 밤에는 다시 나한테 뭐라고 말 걸지 말고, 어서!”
명령을 받은 데이비는 찍소리도 못 하고 곧장 침대로 돌아갔다.
23. 톰캣(tomcat):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사나이, 호색꾼.​



14
하늘의 부름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 앤은 루비 길리스와 함께 루비네 정원에 앉아 있었다. 덥고 흐린 여름날 저녁이었지만 세상은 흐드러지게 핀 꽃들로 화려하게 빛났다. 한적한 계곡에는 아지랑이가 하늘거리고 숲길은 온통 나무그늘이 드리웠으며 들판에는 자주색 과꽃이 가득 피었다.
앤은 루비와 함께 화이트 샌즈 해변으로 나가 저녁을 보내려고 했으나 그곳까지의 달빛 산책은 그만두었다. 이미 여러 번 달빛을 받으며 산책을 나가기도 했지만 때때로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여름이 끝나가면서 루비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져 갔다. 화이트 샌즈 학교도 포기했다. 루비의 아버지도 새해가 될 때까진 루비가 가르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했다. 루비가 평소 즐기던 뜨개질이나 자수조차도 점점 하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루비는 항상 명랑했고 희망적이었으며 끝없이 남자친구 얘기와 자기를 차지하지 못한 다른 경쟁자들이 얼마나 좌절했는지 하는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앤이 루비를 방문하기 힘겨운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때는 바보 같고 또 즐거웠던 일들이 이제 무시무시한 일이 되었다. 억지로 생명이라는 가면을 쓴 루비를 바라보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루비는 앤에게 매달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앤을 놓아주었다. 린드 부인은 앤이 루비를 너무 자주 방문한다고 걱정하면서 저러다간 앤도 결핵에 걸리고 말 테니 두고 보라고 했다. 마릴라도 걱정이긴 마찬가지였다.
“루비를 보러 갈 때마다 항상 지쳐서 돌아오는구나.”
마릴라가 말했다.
“너무 슬프고 또 무서워요. 루비는 지금 자기 상태가 어떤지 조금도 모르는 것 같아요. 루비에겐 도움이 필요하고, 루비도 도움을 간절히 원하고 있어요. 저도 도움을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루비와 같이 있을 때면 제가 마치 보이지 않는 적처럼 루비의 고통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집에 오면 기진맥진해버려요.”
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그런 느낌도 별로 들지 않았다. 루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파티나 드라이브, 드레스나 남자들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느다란 어깨에 흰 숄을 두른 채뜨개질거리도 내버려두고 멍하니 그물침대에 누워 있었다. 양 갈래로 땋은 루비의 긴 금발 머리는 어깨에 얌전하게 얹혀 있었다. 오래전 앤은 루비의 저 탐스러운 머리를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다. 루비는 핀이 머리를 아프게 한다면서 머리에 꽂은 핀도 뽑아버렸다. 얼굴에서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창백한 아이 얼굴 같았다.
은빛 하늘에 달이 떠올라 주변 구름을진줏빛으로 물들였고, 그 아래 연못에 흐릿한 달그림자가 비쳤다. 길리스네 집 바로 뒤쪽은 교회였고 그 옆은 마을 묘지였다.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비석들이 어두운 나무를 배경으로 더욱 또렷해 보였다.

“달빛을 받으면 저 공동묘지가 무서워 보여!”
갑자기 루비가 말했다.
“너무 무서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나도 저기 묻히겠지. 너와 다이애나와 모든 사람들은 살아서 활기차게 돌아다닐 텐데 나만 저기 묻히겠지. 저 오래된 묘지에, 죽은 몸으로 말이야.”
루비가 온몸을 떨었다.
갑작스러운 루비의 말에 앤은 당황했다.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겠지. 안 그래, 앤?”
루비가 집요하게 물었다.
“그래. 그래, 루비.”
앤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나도 알고 있어. 여름 내내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굴복하지 않았어. 오, 앤.”
루비가 갑작스럽게 손을 뻗어 애처롭게 앤의 손을 잡았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죽는 게 무서워.”
루비가 씁쓸하게 말했다.
“왜 무서워해야 할까?”
앤이 조용히 물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난 천국에 갈 거야.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난 교회에다니니까. 하지만 천국은 여기와 다르잖아.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무서워. 그리고 여기, 이 세상이 무척 그리울 것 같아. 천국도 물론 아름답겠지. 성경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하지만 내가 익숙하게 지냈던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잖아.”
앤은 갑자기 필리파 고든이 해준 우스운 얘기가 떠올랐다. 어떤 노인이 앞으로 가게 될 천국의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는 재미있다고 프리실라와 함께 깔깔거리며 들었던 그 이야기가 지금은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라도 루비의 창백하고 떨리는 입술을 통해 듣고 보니 전혀 달랐다. 슬프고 비극적이며 현실적인 이야기일 뿐이었다. 천국이라도 루비에게 익숙한 곳은 아니다. 루비가 이 세상에서 누렸던 즐겁고 활기찬 생활이나 루비가 가졌던 가벼운 이상이나 열망과는 다르며, 무엇보다 루비는 이 큰 변화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리 천국이라도 낯선 곳일 뿐이며 받아들이기 쉽지도 지금 당장 가고 싶은 곳도 아니었다. 앤은 루비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지 그저 자신에게 무기력하게 묻고만 있었다.
“내 생각엔, 루비.”
앤은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본 문제이거나 처음 생각해본 문제이거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든 그 이후의 삶이건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루비 길리스 같은 사람에게는 어렸을 때 품었던 미숙한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여야 할 이 얘기가 더더욱 어려웠다.
“내 생각엔, 우리 모두가 천국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천국이 무엇인지, 또 우리에게 천국은 어떤 의미인지 말이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천국의 삶과 이 세상에서의 삶이 많이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 우리의 삶은 천국에서도 계속되는 걸 거야. 이 세상에서 사는 것과 별로 다르지도 않게. 그리고 우리 모습 그대로. 난 천국에서 사는 것도 여기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단지 선량하게 사는 일이나 또 하느님을 따르는 일이 더 쉬워지는 것뿐 아닐까. 이 세상에서 살면서 부딪히는 고난이나 복잡함이 모두 거두어지고 대신 우리는 모든 걸 아주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겠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루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쩔 수가 없어. 네가 말한 것이 전부 사실이라 해도 그래. 그리고 그건 너도 확신할 수 없는 거잖아. 오직 너의 상상일 뿐이니까. 절대 여기와 같지 않을 거야. 그럴 리가 없어. 난 그냥 여기서 계속 살고 싶어. 난 아직 젊어, 앤. 난 충분히 살지 못했다고. 살아보려고 몸부림쳐 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어. 난 내가 아끼던 모든 것을 여기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해.”
루비는 너무 가엾게 말했다.
앤은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앉아 있었다. 위로한답시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루비가 얘기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루비는 아끼던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자기 보물들을 이 땅에 그대로 두고 가야 한다.
루비는 오로지 스쳐 지나면 그뿐일 아무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았다. 영원을 향한 위대한 삶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삶과 죽음이란 두 세상 간의 차이를 좁히는 일이나 죽음이 단순히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황혼에서 맑은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천국에서 하느님이 루비를 돌봐주실 것이다. 앤은 그렇게 믿었다. 루비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루비의 영혼은 자기에게 익숙한 사랑하는 것들을 놓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루비는 몸을 일으켜 달빛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살고 싶어.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결혼도 하고 싶어, 앤. 그리고, 그리고 작은 아이들도 가져봤으면 좋겠어. 내가 아이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앤? 앤, 너 아니면 이런 얘기 아무에게도 할 수 없어. 넌 날 이해해줄거라 믿으니까. 불쌍한 허브, 허브는 날 사랑해.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지만, 허브는 달라. 내가 살 수만 있다면 그의 아내가 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앤, 나 너무 견디기 힘들어.”
루비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온몸에 경련이라도 일으킬 듯 흐느꼈다. 앤은 연민의 고통 속에 조용히 루비의 손을 잡아주었다.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불완전하고 어설픈 말 몇 마디보다 루비에게 훨씬 더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잠시 후 루비는 안정을 되찾았다. 온몸의 흐느낌도 약해졌다.
“이런 마음을 너에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위로가 됐어.”
루비가 속삭였다.
“속에 담은 모든 말을 꺼낼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마워. 여름 내내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앤, 네가 여기 올 때마다 이 문제를 얘기하고 싶었지만 난 그러지 못했어. 내가 죽는다고 말하면 죽음이 사실이 될까 봐, 아니면 다른 사람이 모두 그렇게 믿어버릴까 봐. 그래서 말은커녕 생각도 할 수 없었어. 낮 동안에는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모든 것이 유쾌하고 기분이 좋아서 죽음도 잠시 잊을 수 있었지만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았어. 너무 끔찍했어, 앤. 죽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으니까. 죽음이 슬며시 다가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그러면 난 너무 무서워서 결국에는 비명을 지르게 돼.”
“이제 더 이상 겁먹지 않을 거지, 루비? 씩씩해져야 해. 그리고 네가 모든 일을 다 잘 받아들이게 될 거라고 믿어야 해.”

“노력해볼게. 앤, 네가 말한 것을 더 생각해볼게. 그리고 믿도록 노력할게. 가능한 한 자주놀러 와줄 거지, 앤?”
“그럼, 당연하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 다른누구보다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학교 친구들 중에선 앤 너를 가장 좋아했어. 다른여자아이들처럼 나를 시기하거나 못되게 굴지도 않았고. 어제 엠 화이트가 나를 보러 왔었어. 너도 기억하지? 학교 다닐 때 엠이랑 나는 3년 동안이나 단짝이었잖아. 그런데 발표회 때 한 번 싸운 뒤론 말을 안 했지. 정말 바보 같은 일이야. 지금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고 생각해. 어제야 화해를 했어. 엠은 몇 년 전에 나한테 말을 걸고 싶었지만 내가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를 오해할 수 있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그렇지 않니?”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되는 이유는 대부분 오해 때문인 것 같아. 이젠 가봐야 해. 너무 늦었어. 이제 혼자 낙심해 있지 마.”
앤이 말했다.
“곧 또 와줄 거지?”
“그럼, 곧 다시 올게. 내가 무슨 도움이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고마워.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이 되었는걸. 이제 죽음이 예전처럼 그렇게 끔찍하게느껴지지는않을 것 같아. 잘 가, 앤.”
“그래, 안녕,”

앤은 달빛 속을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앤은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었다. 인생에는 다른 의미, 더 심오한 목적이 있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변화가 일었다. 삶이 가여운 나비 같은 루비의 삶 같아서는 안 된다. 인생의 끝에 다다랐을 때 다음 세상이 지금 세상에서 가졌던 익숙한 생각, 이상, 야망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여기고 공포감으로 맞이해서는 안 된다. 작은 것을 위해, 순간적인 달콤함과 즐거움을 위해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 숭고하고 높은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한다. 여기 바로 이 땅 위에서 천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날 밤 정원에서의 일은 앤의 가슴속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앤은 그날 밤 이후로 루비를 다시 볼 수 없었다. 다음 날 밤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는 서부로 떠나는 제인앤드루스를 위해 송별파티를 열어주었다. 모두의 가벼운 발은 즐겁게 춤을 추었고, 빛나는 눈들은 웃음을 지었으며, 즐거운 입들이 유쾌하게 떠들어대는 동안 에이번리의 한 영혼은 절대 무시할 수도 또 피할 수도 없는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다음 날 루비 길리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집집마다 퍼졌다. 아무 고통 없이 조용하게 잠을 자다가 죽었다는 루비 길리스는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었다. 마치 죽음이 루비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유령이 아니라 문지방에서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주는 친구라도 되었던 것처럼.
장례식이 끝난 후 린드 부인은 루비의 죽음이 자기가 지금껏 보아온 주검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노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에이번리 사람들은 루비의 아름다움과 하얀 옷을 입고 앤이 장식해준 꽃들 사이에 누워 있던 루비 이야기를 했다. 루비는 항상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 것이었다. 지극히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은 오만한 것으로 자기의 아름다움을 과시했다. 루비의 아름다움에 영혼이란 없었다. 현명한 깨달음 같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손길이 닿은 루비의 아름다움에는 신성함이 더해졌다. 살아 있는 동안 볼 수 없었던 미묘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루비가 살았던 인생과 사랑, 여자로서의 즐거움과 루비가 겪었던 크나큰 슬픔이 모두 죽음으로 완성된 것이다.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로 옛 친구를 바라보면서 앤은 신이 루비에게 바랐던 얼굴을 보고 있다고 여겼고, 영원히 지금의 루비 얼굴을 기억하겠다고 생각했다.
장례 행렬이 집을 나서기 전 길리스 부인은 앤을 빈방으로 불러 작은 꾸러미 하나를 건넸다.
“이걸 네가 간직했으면 좋겠구나. 그러면 루비도 좋아할 거야. 루비가 만들던 테이블보야. 완성하지는 못했지. 그 작은 손이 마지막으로 닿았던 곳에 아직도 바늘이 꽂혀 있다. 루비가 죽던 날 오후까지도 들고 있던 것이지.”
루비의 어머니가 흐느꼈다.
“항상 미처 끝내지 못한 것이 남는 법인가 보다. 그리고 또 그것을 마저 끝내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고.”
린드 부인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우리가 알고 있던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은 쉬이 실감되지 않아. 친구들 중에 세상을 뜬 건 루비가 처음이지. 그리고 이제 한 사람 한 사람씩 결국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거야.”
다이애나와 집으로 걸어오면서 앤이 말했다.
“그렇겠지.”
다이애나는 불편한 어조로 말했다. 다이애나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장례식모습이 어땠는지 하는 얘기가 더 좋았다. 길리스 씨가 루비에게 고집스레 씌워놓은 하얀 벨벳 모자 같은 것 말이다.
“길리스네 가족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조차 허영을 부리는 것 같더구나.”
린드 부인의 말이었다. 허브 스펜서의 슬픈 얼굴, 곧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슬퍼하던 루비의 여동생 이야기가 더 나았다. 하지만 앤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앤은 공상에 빠져 있었다. 다이애나는 자기가함께할수도 또모른 체할수도 없는 앤의 모습 때문에 소외감을 느꼈다.
“루비 누나는 정말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하늘에서도 에이번리에 있을 때처럼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궁금해.”
불쑥 데이비가 말했다.
“그럼, 분명히 그럴 거야.”
앤이 답해주었다.
“글쎄, 그건.”
다이애나는 다소 놀란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아니라고? 하늘에서 우리는 웃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 설마?”
앤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아니, 난 모르지. 그냥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아서 그래. 교회에서도 큰 소리로 웃는 건 좀 불경스러운 일이잖니.”

다이애나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하지만 천국은 교회와 달라. 완전히 다른 거라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만약 교회랑 똑같다면, 난 정말 안 가고 싶어. 교회는 너무너무 따분해. 물론 영원히 안 가겠다는 건 아니고. 화이트 샌즈의 토머스 블루엣 아저씨처럼 한 백 살까지 살다가 갈 거야. 그 아저씨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세균이 다 죽어버려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대. 그럼 나도 얼른 담배를 피워야 할까, 앤 누나?”
데이비가 진지하게 물었다.
“안 돼, 데이비. 넌 담배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어.”
앤이 대답했다.
“그럼 세균이 나를 죽이면 어쩌게, 누나?”
데이비가 따지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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