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17~18

나단비 | 2024.03.26 22:36:10 댓글: 0 조회: 52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6729
17
데이비의 편지





필리파가 11월 어느 저녁 집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눈이 내린다, 얘들아.”
“정말 예쁜 별 모양과 십자가 모양 눈꽃들이 정원 길을 온통 수놓았어. 눈송이가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지 예전엔 몰랐단다. 소박한 삶을 살더라도 아름다운 것들에 눈을 돌려볼 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해준 너희들에게 축복이 있기를!버터 값이 5센트나 더 올랐어. 이런 걱정을 할 수 있는 것도 기뻐.”
“정말이야?”
스텔라가 물었다. 스텔라는 이 집 회계를 맡고 있었다.
“그럼, 정말이지. 자, 버터. 난, 점점 장보기 선수가 돼가는 것 같아. 장보기가 남자들이랑 시시덕거리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네.”
필리파가 진지하게 말했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만 하는구나.”

스텔라가 한숨을 쉬었다.
“걱정 마라. 공기와 하느님의 구원은 여전히 공짜 아니니. 그게 얼마나 다행이야.”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웃음도 그렇지. 웃음에는 세금도 없어. 모두들 이제부터 웃어 봐요. 내가 데이비의 편지를 읽어줄 테니. 올해는 철자법이 놀랄 만큼 발전했네. 하지만 여전히 문장부호는 서툴러. 데이비는 편지를 재미있게 쓰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 자, 들어봐, 너무 우스워. 그리고 저녁에는 열심히 공부들 하자고.”
앤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앤 누나,

누나, 우리 모두 다 잘 있고, 누나도 그럴 거라고 믿는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펜을 들었어. 오늘은 눈이 좀 내렸어. 마릴라 아줌마 말로는 어떤 할머니가 하늘에서 깃털 침대를 털고 있는 거래. 그럼 하늘에 있는 그 할머니가 하느님의 부인인가? 궁금해, 누나.
린드 아줌마가 많이 아팠었는데 이제는 다 나았어. 지난주에 지하실 계단에서 미끄러졌거든. 넘어지면서우유 통과 국 냄비를 올려놓은 선반을 짚는 바람에 그게 다 아줌마 몸 위로 떨어져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지. 마릴라 아줌마는 처음에 지진이 난 줄 알았대. 국 냄비 하나가 정통으로 린드 아줌마 몸 위로 떨어져 아줌마 갈비뼈를 부러뜨렸어. 의사 선생님이 집에 와서 약을 주고 갈비뼈에 바르라고 했는데 아줌마가 그 말을 잘못 알아듣고 그걸 다 먹어버렸어. 의사 선생님은 그 약때문에 죽지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어. 하지만 아줌만 잘 살아 있고 오히려 갈비뼈는 다 나아버렸어. 린드 아줌마는 의사 선생님이 쥐뿔도 모르면서 그런다고 했어. 그런데 그 국 냄비는 고칠 수가 없게 망가져 버려서 마릴라 아줌마가 내다버렸지. 추수감사절이 바로 지난주였잖아. 우리는 학교도 안 갔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어. 난 다진 고기를 넣은 파이도 먹고, 칠면조 요리도 먹고 과일 케이크도 먹고 도넛도 먹고 치즈도 먹고 초콜릿 케이크도 먹었어. 마릴라 아줌마는 내가 너무 많이 먹어 죽을 거라고 했지만 난 안 죽었잖아. 도라는 귀가 아프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배가 아팠던 거래. 난 아무 데도 안 아팠어.
우리 학교에 남자 선생님이 새로 왔는데, 재미있는 얘길 많이 해줘. 지난주에는 우리 3학년 남학생들에게 작문을 짓게 했어. 어떤 부인을 맞고 싶은지를 쓰라고 했지. 또 여학생들한테는 어떤 남편을 갖고 싶은가로 글을 쓰라고 했어. 그 편지들을 우리에게 읽어주었는데 웃겨 죽는 줄 알았어. 내가 쓴 걸 읽어줄게. 앤 누나도 좋아할걸.

내가 앞으로 맞고 싶은 아내
내 아내는 예의가 바른 사람이어야 되고 제시간에 내 밥을 딱딱 차려줘야 된다.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해야 되고 나한테 공손해야 된다. 그리고 나이는 15살이어야 한다. 불쌍한 사람들한테 잘해주어야 하고, 집은 항상 깨끗하게 치우고 성격도 좋아야 하며 교회도 잘 나가야 된다. 얼굴도 예뻐야 하고 머리는 곱슬머리여야 된다. 내가 바라는 대로의 아내를 맞는다면 나도 엄청 좋은 남편이 될 거다. 여자는 남편한테 정말 잘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불쌍한 여자들은 남편이 없다.
끝.

지난주에는 화이트 샌즈에 사는 이삭 라이트 부인의 장례식에 갔었어. 죽은 부인의 남편이 무척 슬퍼했어. 린드 아줌마가 그러는데, 라이트 부인의 할아버지가 양 한 마리를 훔친 적이 있대. 하지만 마릴라 아줌마는 죽은 사람을 나쁘게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 왜 그럼 안 되나? 궁금해. 죽었으니까 말해도 보복당할 일은 없을 거 아냐.
린드 아줌마는 며칠 전에 정말 화가 많이 났었어. 왜냐하면 내가 아줌마한테 노아의 방주 시대 때 살아 있었냐고 물었거든. 아줌마 기분을 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고 그냥 알고 싶었어. 아줌마는 그때 살아 있었나? 앤 누나가 알려줘.
해리슨 아저씨가 개를 없애고 싶어 했어. 그래서 한번은 목매달아놨는데 그 개는 안 죽었고, 아저씨가 무덤을 파는 동안 헛간으로 달아나 버렸어. 그래서 아저씨가 다시 목을 매달았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죽었대. 아저씨는 일하는 사람을 새로 고용했어. 아주 이상한 사람이야. 아저씨가 그러는데 왼손잡이에 왼발잡이래.
배리 아저씨네 일꾼은정말 게으르대. 배리 아줌마는 그렇게 말했는데 배리 아저씨는 그 사람이 게으른 게 아니래. 직접 일을 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일이 저절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니까 게으르다고 볼 수도 없는 거래.
하몬앤드루스아줌마가 상으로 돼지를 받았는데, 돼지 자랑을 너무 많이 해서 그 돼지가 경련을 일으키다 죽어버렸대. 린드 아주머니는 하몬 아줌마가 너무잘난 체한 데대한 당연한 심판이라고 했지만 난 돼지가 너무 안됐다고 생각해. 밀티 볼터도 아팠어. 그래서 의사가 약을 줬는데, 맛이 지독하다고 했어. 난 25센트만 주면 내가 대신 먹어주겠다고 했는데 밀티는 너무 야비해. 그냥 지가 먹고 돈을 아끼겠다잖아. 내가 볼터 아줌마한테 남자를 꼬시려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줌마가 막 화를 내면서 자기는 남자를 쫓아다닌 적이 없어서 그런 건 모른다고 했어.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가공회당을 다시 페인트칠한대. 파란색에 모두들 넌덜머리가 났대.
새로 온 목사님이 우리 집에차를 마시러 오셨었어. 그런데 파이를 세 조각이나 먹은 거 알아. 내가 만약 그랬다면 마릴라 아줌마가 나에게 돼지라 불렀을 거야. 목사님은 진짜 빨리 우걱우걱 씹어 먹었어. 마릴라 아줌마는 나한테 항상 그러면 안 된다고 했는데. 왜 목사님은 아이들은 하면 안 되는 일을 해도 되는 걸까? 궁금해.
이제 더 쓸 말이 없어. 여기 키스를 여섯 번 보내. XXXXXX.
도라가 한 번 더 보내달래. 여기. X

앤 누나의 사랑스러운 친구 데이비 키스

추신: 누나, 악마의 아버지는 누구야? 궁금해.




18
조제핀 할머니의 유언





크리스마스 방학이 되자 ‘패티네 집’ 식구들도 모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여기 남겠다고 했다.
“오라는 곳이 있어도 고양이 세 마리를 함께 데리고 갈 순 없잖니. 그렇다고 거의 3주를 이 불쌍한 것들만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고. 우리가 없는 동안 이 고양이들을 잘 보살펴줄 만한 좋은 이웃이 있다면야 모르지만 이 거리에는 저 담배회사 사장 말고는 아무도 없잖니. 그러니 내가 여기 남아서 너희들이 돌아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으마.”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앤은 언제나처럼 즐거운 기대를 품고 집으로 향했지만 이번에는 기대만큼 즐겁지가 않았다. 앤이 도착해보니 에이번리는 이 마을에 가장 오래 살았던 토박이들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혹한으로 온 마을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초록 지붕 집’주위에도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이실어다 놓은쓰레기들이 쌓여 있었다. 안타깝게도 크리스마스 방학 거의 내내 큰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심지어 맑은 날에도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도로는 고치기가 무섭게 금세 또 무너졌고 바로 가까운 이웃에 나가기도 어려웠다. 에이번리 마을 개선회는 대학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을 환영하려고 파티를 세 번이나 시도했지만, 비바람이 너무 심해 아무도 참석할 수가 없어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초록 지붕 집’을 너무 사랑하고‘초록 지붕 집’밖에 모르는 앤이라 해도‘패티네 집’이 그리웠다. 따뜻하고 안락한 벽난로, 제임시나 아주머니의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오는 눈매, 세 마리 고양이들, 여학생들의 명랑한 수다, 금요일 밤마다 집으로 찾아오는 친구들과 학교생활의 음울함과 즐거움을 토로하던 즐거운 한때가 너무나 그리웠다.
앤은 외로웠다. 다이애나는 휴가 내내 기관지염의 습격을 받아 집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당연히‘초록 지붕 집’을 방문할 수도 없었다. 앤이‘비탈길 과수원집’으로 가기도 거의 불가능했다.‘유령의 숲’으로 난 길도 바람이날라다 놓은쓰레기들이 쌓여 통행이 불가능했으며‘반짝이는 호수’의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건너가는 것도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제인앤드루스는 서부 평원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여전히 앤만을 생각하는 길버트는 길이 허락하는 한 매일 웅덩이를 뛰어넘어‘초록 지붕 집’을 찾았다. 하지만 길버트의 방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앤은 길버트의 방문이 두렵기조차 했다. 갑자기 침묵이 찾아오는 순간 고개를 들어 길버트의 얼굴을 보면 그 깊은 갈색 눈동자가 몹시 진지하게 자기를 바라보고 있어 당황스러웠다. 길버트의 시선에 얼굴이 붉어지고 불편함을 느끼는 자신을 보는 일은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마치, 마치…… 하여튼 이런 일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앤은 몹시도‘패티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곳에는 이런 미묘한 순간에도 어색함을 감춰줄 누군가가 항상 옆에 있어주었다.‘초록 지붕 집’에서는 길버트가 집에 오기라도 하면, 마릴라는 항상 린드 부인 방으로 가버렸고 쌍둥이들도 억지로 끌고 나가버렸다. 이런 길버트의 방문은 즐겁지 못했고 그런 사실에 앤은 더욱 화가 났다.

하지만 데이비는 행복하기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활기차게 우물과 닭장까지 삽으로 길을 냈다. 마릴라와 린드 부인이 앤을 위해 준비하는 크리스마스 음식에도 신이 났다. 요즘 데이비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영웅 이야기책에 빠져 지냈다. 그 영웅은 지진이나 화산 폭발로 온몸이 긁히고 상처투성이가 되지만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역경을 이겨냈다. 물론 고난을 이기고 부를 거머쥐는 것으로 그 결말도 화려했다.
“있잖아, 이건 엄청 재미있는 얘기야, 앤 누나. 난 성경보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거야.”
데이비는 신이 나서 말했다.
“정말 그럴 거니?”
앤이 웃었다. 데이비는 앤을 흘끔 쳐다보았다.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네, 누나.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린드 아줌마는 엄청 놀라던데.”
“아니, 난 놀라지 않았어, 데이비. 아홉 살짜리 소년이 성경보다 모험 이야기를 읽겠다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나이를 좀 더 먹어서는 성경이 얼마나 놀라운 책인지 알게 되길 바란다.”
“물론 성경도 어떤 부분은 재미있어. 요셉 이야기 같은 거는 아주 재미있어, 누나. 하지만 내가 요셉이었다면 형제들을 용서 안 했을 거야. 절대로. 난 그놈들의 목을 전부 베어버렸을 거야. 린드 아줌마한테 이런 말을 했더니 진짜 화를 많이 내셨어.그러고는성경책을 탁 덮어버리더니, 계속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이제 나한테는 절대 성경 안 읽어준다고 했어. 그래서 주일 오후에 아줌마가 성경 읽으실 땐 난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어.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두었다가 학교에 가서 밀티 볼터에게 얘기해줘.엘리자와 곰 이야기를 해줬더니 겁을 먹었나 봐. 그때부터 해리슨 아저씨더러 대머리라고 놀리지도 않아. 근데 프린스에드워드 섬에도 곰이 살아? 궁금해.”
“요즘은 아니란다, 데이비.”
바람이 한차례 세차게 창문을 때리고 지나가는 것을 보며 앤이 멍하니 대답했다.
“비바람은 언제나 멎으려나.”
“하느님은 알고 있지.”
데이비가 쾌활하게 말하며 읽던 책을 다시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데이비!”
앤이 책망하듯 소리를 높였다.
“린드 아줌마가 그렇게 말했어. 지난주 어느 날 밤에 마릴라 아줌마가 ‘루도빅 스피드와시어도라딕스가 결혼을 할까요?’ 하니까 린드 아줌마가 ‘하느님은 알고 있지.’ 하고 말했다고.”
“그래, 아주머니가 적절하지 않은 말씀을 하신 것 같구나.”
앤은 이런곤란 지경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곧장 알았다.
“누구라도 하느님 이름을 아무 곳에나 갖다 대거나 가볍게 들먹여서는 안 되는 거야, 데이비. 앞으로는 절대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천천히 진지하게 말하는 것도 안 돼? 목사님처럼.”

데이비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니, 그것도 안 돼.”
“그럼 안 그럴게. 린드 아줌마가 미들 그래프턴에 사는 루도빅 스피드와시어도라딕스 얘길 해줬는데, 그 아저씨가 백 년 동안 그 아줌마에게 사랑한다고 했대. 그럼 결혼하기 너무 늙어버리는 건 아닐까, 누나? 길버트 형이 그렇게 오래 누나를 쫓아다니지 않아야 할 텐데. 누나는 언제 결혼할 거야? 린드 아줌마가 누나는 꼭 결혼한다고 했어.”
“린드 아주머니는 그저…….”
앤은 말하려다 화가 나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냥 늙은 수다쟁이지.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부르잖아. 근데 누나, 그거 확실한 거야? 궁금해.”
데이비가 침착하게 앤의 말을 대신해주었다.
“요런 바보 같으니라고.”
앤은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부엌은 적막했다. 빠르게 저물어가는 겨울 석양을 바라보며 앤은 창가에 앉았다. 해는 저물었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창백하고 싸늘한 달이 서쪽의 자줏빛 구름층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서쪽 수평선을 따라 보이는노란 빛줄기는 점점 더 밝아지고 선명해졌다. 마치 떠돌던 빛줄기가 모두 한 곳으로 모인 것 같았다. 저 멀리 언덕에는 거뭇한 전나무들이 성직자 같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앤은 저 멀리 쓸쓸하고 황량한석양빛아래 차갑고 활기 없어 보이는 하얀 들판을 바라보면서 한숨지었다. 앤은 몹시 외로웠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슬픔을 느꼈다. 내년에 레드먼드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도무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2학년이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릴라의 돈에는 손대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여름 동안 학비를 벌 만한 일을 찾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내년에는 학교를 쉬어야겠다. 학비가 모아질 때까지 아이들을 가르쳐야겠어. 하지만 그때가 되면 친구들은 모두 졸업하고,‘패티네 집’에서도 살 수 없게 되겠지. 그래도 난풀 죽어있진 않을 거야.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 내 힘으로 학비를 벌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저기, 해리슨 아저씨가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어.”
데이비가 소리치며뛰어나갔다.
“아저씨가 편지 가져왔으면 좋겠다! 우리 편지 받은 지 3일이나 지났잖아. 저 못된 그리트당 사람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궁금해. 난 보수당이거든. 그러니 그리트당 사람들을 잘 감시해야 해, 누나.”
해리슨 씨는 정말 편지를 가져왔다. 스텔라, 프리실라, 필리파가 보낸 즐거운 편지였다. 앤의 우울함도 사라졌다. 제임시나 아주머니 역시 편지를 보내왔다. 벽난로를 항상 따뜻하게 지피고 고양이들도 잘 지내며 화초들도 모두 잘 자란다는 내용이었다.

날씨가 정말 추워졌다. 그래서 고양이들을 집 안에서 재운다. 조지프와 러스티는 거실 소파에서, 사라는 내 침대 발치에서 자게 했다. 한밤중에 일어나 외국에 나가 있는 딸애 생각이 날 때면 사라의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정말 위안이 된다. 인도가 아니라면 걱정하지 않겠다만, 인도의 뱀들은 끔찍하다고 하지 않니. 사라의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뱀 생각을 떨쳐내려 해. 난 다른 모든 것에는 신의 섭리를 믿지만 뱀은 도대체 왜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가끔은 하느님이 뱀을 만든 게 아니라 악마 올드 해리가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해버린다.

앤은 타자기로 친 얇은 메모는 읽지 않고 그냥 두었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메모 같았다. 그러다가 정작 그 메모를 펼쳤을 때 앤은 앉은 자리에 얼어붙어 버린 듯 꼼짝을 못 했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얘야, 무슨 일이냐?”
마릴라가 물었다.
“조제핀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대요.”
앤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일 년 넘게 아팠으니. 배리 집안사람들은 언제고 닥칠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고통당한 것을 생각하면 돌아가신 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참 친절하게 대해주었는데.”
마릴라가 말했다.
“마릴라 아주머니,조제핀할머니는 끝까지 우리에게 친절했어요. 이 편지는조제핀할머니의 변호사가 보낸 것인데, 저에게 천 달러를 남겨주셨어요.”
“우와, 그거 진짜 큰돈 아니야? 앤 누나랑 다이애나 누나가 손님방 침대 위로 뛰어올랐을 때 그 방에서 자고 있었던 그 할머니 맞지? 다이애나 누나가 얘기해줬어. 그런데 그랬다고 그렇게 많은 돈을 줬을까?”
“쉿, 데이비.”

앤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마릴라와 린드 부인이 이 새로운 소식을 마음껏 이야기하도록 앤은 동쪽 방으로 조용히 올라갔다.
“이제 앤 누나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할지도 몰라.”
데이비는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도카스 슬론이 작년 여름에 결혼할 때, 돈만 충분히 있으면 남자랑 살 생각은 안 할 거라고 했어. 자식이 여덟 명이나 되는 과부가 되는 것이 시누이랑 단둘이 사는 것보단 낫다고도 했지만.”
“데이비 키스, 입 좀 다물어라. 그런 얘기들은 어린애가 할 소리가 아니야, 그럼.”
린드 부인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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