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3권 35~36

나단비 | 2024.03.29 13:38:34 댓글: 0 조회: 65 추천: 1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57277
35
레드먼드에서의 마지막 해





필리파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옷 가방 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모두들 다시 모였구나. 보기 좋게 그을리고 달리기 대회에 나가도 될 만큼 튼튼해져서 돌아왔어. 이 아늑한‘패티네 집’을 다시 보니 너무 기쁘지 않니? 그리고 아주머니? 고양이도? 러스티는 귀가 더잘려나갔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니?”
“러스티에게 귀가 하나도 없었다 해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고양이가 되었을 텐데.”
앤이 자기 트렁크에 올라앉아 말했다. 러스티는 환영 인사로 앤의 무릎에 올라가 뒹굴어댔다.
“우리를 다시 만나니 반갑지 않으세요, 아주머니?”
필리파가 물었다.
“그래, 반갑다. 그런데 다들 먼저 물건 정리부터 했으면 좋겠구나.”
제멋대로 열려진 트렁크와 짐 꾸러미들이 늘어진 가운데 네 아가씨들이 깔깔대는 광경을 보며 제임시나아주머니가 말했다.
“얘기야 나중에도 할 수 있잖니. 나는 어릴 때 일부터 먼저하고 나중에 놀라고 배웠다.”
“아,우리 세대에는 그게 완전히 반대예요, 아주머니. 먼저 놀고, 열심히 일하는 게 순서예요. 우선 열심히 놀면 또 열심히 ‘들이파는’ 힘을 얻게 되는 거죠.”
“네가 목사 부인이 되려거든 ‘들이파는’이니 어쩌니 하는 표현은 아예 입에 올리지도 말아야 한다.”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조지프와 뜨개질감을 들고, 속으로는 정말정떨어진다싶었지만 이 집 여왕답게 우아한 자태로 말했다.
“왜요? 왜 목사의 부인은 점잔 빼는 말만 써야 하나요?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패터슨 거리 사람들은 속어를 써요. 은유적인 표현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다들 저를 잘난 체나 하는 거만한 사람인 줄 알 거예요.”
필리파가 불만을 토로했다.
“참, 그 소식, 집에는 알렸니?”
자기 점심 바구니에서 남은 음식을 꺼내 사라에게 주면서 프리실라가 물었다.
필리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들 하셔?”
“어머니는 미친 듯이 날뛰셨지. 하지만 나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맞섰어. 예전에는 어떤 일에도 고집이라곤 모르던 필리파 고든이 말이야. 아버지는 더 침착하게 받아들이셨어. 우리 할아버지도 목사님이셨거든. 그래서 아버지는 성직자라면 마음이 약해지셔. 어머니 마음이 가라앉고 난 다음에 조를 집으로 데려갔어. 두 분 다 조를 무척 좋아하셨어. 하지만 어머닌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무서운 가시를 담은 말을 했지. 어머니가 내게 어떤 기대를 품었는데 하면서. 그러니 난 방학 동안 장미꽃이 뿌려진 길만 걸었던 게 아니었다고. 그래도 얘들아, 난 이겼고, 조를 얻었어. 이제문제 될건 아무것도 없어.”
“너에겐 그렇겠지.”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암울하게 말했다.
“물론 조에게도 그래요. 왜 모두들 조를 불쌍하게 여기는 거죠? 사람들이 그 사람을 질투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똑똑하고, 아름다운 저를 얻었잖아요. 바로 제 마음을요.”
필리파가 반박했다.
“우리는 네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만, 제발 모르는 사람 앞에선 그렇게 말하지 마라.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니?”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차분하게 말했다.
“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 없어요. 제 모습을 다른 사람 생각대로 보고 싶지도 않구요. 그럼 정말 불편할 테니까요. 번스도 언제나 그렇게 솔직한 기도만 올리지는 않았을 거예요.”
“오, 그래. 나도 우리가 항상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위해서만 기도를 올린다고는 말하지 않으련다.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런 기도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 난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솔직히 그 여자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자, 기도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 사람을 용서하게 되더라.”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솔직하게 말했다.
“전 아주머니가 그렇게 오랫동안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게 상상이 안 되는데요.”
스텔라가 말했다.
“옛날엔 그랬지. 하지만 그런 마음을 품었다가도 정작 화가 풀리고 나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고 느끼게 돼.”
“그러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요.”
앤은 존과 재닛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이제 네가 편지에서 은근하게 내비쳤던 그 낭만적인 사건이 뭔지한 번 더말해줘.”
필리파가 졸랐다.
앤은 샘의 결혼 신청을 멋진 연기로 재연해 보였다. 아가씨들은 목청껏 소리 내어 웃었고 제임시나 아주머니도 빙긋 웃었다.
“너를 좋아한 남자를 그렇게 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좋은 취미라고 할 수 없지.”
제임시나 아주머니의 말은 매섭게 들렸다. 하지만 조용히 덧붙였다.
“물론 나도 항상 그랬지만 말이다.”
“아주머니의 남자들 얘기 좀 해주세요. 틀림없이 꽤 여러 명 있었을 거야.”
필리파가 졸랐다.
“그 사람들은 과거형이 아닌데? 아직도 그 사람들과 연락하고 있다. 고향에 세 명의 늙은 홀아비들이 있는데 모두 얼마간 나에게 추파를 던진 사람들이야. 너희 젊은 사람들은 세상의 로맨스를 너희들이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말했다.
“홀아비, 추파라니, 낭만적으로 들리지 않아요, 아주머니.”
“그래, 낭만적이지 않아. 하지만 젊은이들도 항상 낭만적인 것은 아니니까. 날 따라다닌 남자들 중 몇 명도 낭만하곤 거리가 멀었지.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을 놀려주곤 했다. 불쌍한 남자들. 짐 엘우드라고 하는 남자가 있었어. 항상 백일몽에 빠져 살아 자기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아채지 못하던 사람이었지. 내가 ‘싫어요’ 하고 얘기한 지 1년이 지나도록 그 말을 못 알아듣고 있었으니까. 그 남자가 결혼한 뒤, 어느 날 밤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썰매 위에서 떨어졌는데도 아내가 없어진 사실도 몰랐단다. 댄윈스턴이란 남자도 있었어. 그 남자는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이었지. 이 세상의 모든 것, 그리고 이다음 세상에도 훤한 사람이었다. 어떤 질문을 해도 척척 답해주는 사람이었어. 최후의 날은 언제냐고 물어도 답해줬을 거야. 밀턴 에드워드라는 남자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고 나도 그 남자를 좋아했어. 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내가 한 농담을 이해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고, 또 다른 이유는 그 사람이 내게 청혼을 하지 않았지. 호레이쇼 리브라는 사람은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재미있는 남자였어. 하지만 그가 이야기를 할 때는 너무 장식적인 얘기가 많아서 골자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 그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상상의 나래를 펴서 되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니까.
“그럼 다른 남자들은 어땠어요, 아주머니?”

“가서 짐이나 풀어라.”
그렇게 말하며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뜨개바늘로 착각하고 조지프를 들어 처녀들 쪽으로 손짓했다.
“다른 남자들은 장난처럼 말하기에는 너무 좋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기억은 존중해줘야 해. 참, 한 시간 전에 네 방에 꽃이 배달되어왔다, 앤.”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자‘패티네 집’여학생들은 다시 열심히 공부에 몰입했다. 이제 레드먼드에서의 마지막 학년이 시작되었고, 최고 졸업의 영예를 위해 열심히 싸워야 했다. 앤은 영어에, 프리실라는 고전문학에, 필리파는 수학에 온 힘을 쏟았다. 점점 지친 여학생들은 낙담하기도 했으며 때때로 이런 힘든 투쟁에 보상이 부질없어 보일 때도 있었다. 11월의 어느 비 오는 저녁, 우울한 기분에 빠진 스텔라는 집안을 배회하다 앤의 파란 방까지 올라왔다. 앤은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 침대 옆에 세워둔 램프에서 나온 빛이 앤 주변으로 둥글게 퍼져 있었고 구겨진 원고지가 흰 눈처럼 쌓였다.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니?”
“그냥 옛날 이야기 클럽 시절에 쓴 글들을 읽고 있었어. 난 지금 뭔가 재미있고 기운이 나게 해줄 게 필요하거든. 세상이 온통 파래질 때까지 공부만 했잖아. 그래서 트렁크에서 이 원고들을 꺼낸 거야. 근데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비극적이고 눈물을 짜내는 것들이라 배꼽을 잡고 데굴데굴 구를 만큼 정말 웃겨.”
“나도 우울하고 자신이 없어.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내 생각 자체가 늙어버렸어. 전에도 이렇게 우울한 기분에 빠진 적은 있지만. 도대체 우리는 왜 사는 걸까?”

스텔라가 소파 위로 몸을 던지며 푸념했다.
“오, 스텔라.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그저 머리에 낀 안개 때문이야. 날씨도 그렇고. 하루를 온전히 공부에 바쳤는데 이렇게 오늘처럼 비가 퍼붓는 밤을 맞으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거야. 물론 마크 태플리38)같은 사람은 예외지만. 산다는 건 가치 있는 일이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삶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나 자신을 설득할 수가 없어.”
“그냥 이 세상을 살다 간 모든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생각해봐. 그들을 따르고 그들이 준 가르침과 그들이 남긴 업적을 후대에 전달하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일 아닐까? 그들의 야망을 우리도 같이 나누는 건 의미 있는 일이잖아. 그리고 앞으로 이 세상에 올 위대한 사람들을 생각해봐. 그들에게 우리의 미약한 힘을 더하고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준비해주는 것, 그 길을 좀 더 쉽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치 있는 일 아닐까?”
“내 마음도 너랑 같아, 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서글프고 기운이 없구나. 난 비 오는 밤엔 항상 기분이 거무죽죽해져.”
“난 비 오는 밤이 좋은 때도 있어. 그저 침대에 누워서 빗방울이 지붕 위로 탁탁 떨어지는 소리나 소나무 가지로 빗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아.”
“난 빗방울이 지붕 위에 그대로 있어줬으면 좋겠더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그 때문에 작년 여름 낡은 시골 농장 집에서 끔찍한 여름밤을 보내야 했어. 지붕이 새서 내 침대로 빗물이 떨어졌거든. 전혀 시적이지 않은 광경이었지. 난 음침한 한밤중에 일어나 빗방울을 피해 침대를 이리저리 옮겨야 했다고. 그 낡은 구식 침대는 얼마나 단단하고 무거웠게. 결국에는 밤새도록 똑똑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잠은커녕 완전히 신경 쇠약에 빠져버렸단다. 밤에 맨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니? 사람 등골을 다 오싹하게 했어.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꼭 유령발소리같다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웃니, 앤?”
스텔라가 말했다.
“이 이야기들. 필 말마따나 정말 죽인다. 여러 면에서 말이야. 이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다 죽어. 여주인공은 모두들 눈부시게 아름답지. 그리고 우리가 이 여주인공들한테 얼마나 아름다운 옷들을 입혀놨는지. 실크니, 공단이니, 벨벳, 보석, 레이스. 다른 건 절대 입지 않아. 여기 제인앤드루스의 소설도 있다. 여주인공이 가장자리를 진주로 수놓은 하얀 공단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대.”
“계속 읽어줘 봐. 웃을 수만 있다면 인생이 아직 살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스텔라가 말했다.
“여기, 내가 쓴 것이 있어. 내 여주인공은 무도회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어. 커다란 최상급 다이아몬드를 달아 머리에서 발끝까지 번쩍인대. 장화 신은 미인이나 부유한 옷차림은 또 뭐니? ‘영광의 길은 오직 무덤으로 향하노니’ 그들은 살해되거나 실연의 상처 때문에 죽음에 이르지. 절대로 살아남지 못해.”
“네 이야기를 좀 읽어봐, 앤.”
“여기 내 걸작이 있어. 제목이 거창하기도 하다, ‘나의 무덤들’이야.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게. 내가 이걸 읽어주는 동안 다른 애들도 눈물을 한 동이는 흘렸지. 그 주에 제인앤드루스는 엄마한테 잔소리깨나 들었어. 손수건 빨래를 너무 많이 내놓는다고. 한 감리교 목사의 아내가 여기저기 방황하며 겪는 비참한 이야기였거든. 감리교도라고 해야만 여주인공을 방황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주인공은 가는 곳마다 자기 아기를 묻었는데 모두 아홉이나 되고 위치도 뉴펀들랜드에서 밴쿠버까지 여러 군데 흩어져 있어. 아이들을 일일이 설명하고 아이들이 묻힌 묘지며 묘비, 비명까지 자세하게도 묘사했어. 난 아홉 명 전체를 땅에 묻을 작정이었는데, 여덟 명까지 땅에 묻고 나니까 공포감을 일으킬 공상의 씨가 다 말라버려 마지막 아홉 번째는 비참한 불구자로 살게 했어.”
스텔라가 ‘나의 무덤들’을 읽고 가장 극적인 부분에서 킥킥거리며 대미를 장식하는 동안, 밤새 나가 놀다 들어온 러스티는 마치 제인앤드루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나병 수용소에서 일하는 예쁜 열다섯 살 소녀의 무릎에서 잠든 고양이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다. 이야기 속 아름다운 그 소녀도 결국 외롭게 죽을 운명인 나병에 걸렸다. 앤은 이야기 원고들을 보며 에이번리 학교의 옛 시절을 떠올렸다. 이야기 클럽 회원들은 시냇가 근처 가문비나무 아래나 고사리 사이에 앉아 이야기들을 썼다. 그땐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이야기를 읽으면서 앤은 그 옛날 여름날의 태양과 환희의 햇살을 그대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스의 영광과 로마제국의 위대함도 이야기 클럽의 재미와 눈물처럼 마법을 부리지는 못하리라. 이야기 원고들 속에서 앤은 포장지에 써진 글도 발견했다. 그 글이 언제 어떻게 쓰인 것인지 회상하면서 앤의 잿빛 눈가에 웃음이 퍼졌다. 그 글은 토리 길에 있는 코프 자매네오리 집지붕 위에서 썼던 것이었다.
그 글을 물끄러미 보던 앤이 갑자기 열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라일락 나무에 앉은 카나리아와 스위트피, 과꽃, 그리고 정원을 지키는 요정이 나누는 대화였다. 글을 다 읽은 후 앤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스텔라가 방에서 나간 후 앤은 오래되어 꾸깃꾸깃한 원고들을 반듯하게 다시 정리했다.

“난 할 수 있어.”
앤은 뭔가 굳은 결심을 한 얼굴이었다.
38. 찰스 디킨스의 소설 《마틴 처즐위트(Martin Chuzzlewit)》에 나오는 매우 쾌활한 성격의 인물.





36
가드너 일가의 방문





필리파가 말했다.
“제임시나 아주머니, 여기 인도에서 편지가 왔어요. 스텔라에게 세 통, 프리실라에게 두 통, 그리고 조가 나한테 보내온 두꺼운 편지 한 통. 그런데 너한테 온 건 없어, 앤. 회보밖엔.”
하지만 필리파가 툭 건네준 얇은 봉투를 받고 앤의 얼굴에는 홍조가 번졌다. 얼마 후 필리파가 고개를 들어보니 앤의 얼굴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젊은이의 친구>에서 2주 전에 내가 보낸 단편을 받아줬어.”
앤은 마치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해졌다는 투로 말하려 애썼으나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앤 셜리! 정말 영광이다! 어떤 이야기였는데? 언제 출판된대? 출판사에서 돈은 보내왔니?”
“응, 10달러를 보내왔어. 편집장이 내 작품을 더 보고 싶대. 정말이야. 그때 상자에서 찾아낸 걸 다시 고쳐써서 보냈었는데. 하지만 그 이야긴 구성이 엉망이라서 출판사에서 받아주리라고 생각도 못 했어.”
앤은 씁쓸했던 ‘에이버릴의 속죄’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그 10달러로는 뭘 할 거야? 우리 시내로 가서 술이나 마실까?”
필리파가 말했다.
“이 돈은 아무 생각도 없이 흥청망청 써버리고 싶어.”
앤이 명랑하게 대답했다.
“오염된 돈도 아니잖아. 지난번 그 끔찍한 <릴라이어블 베이킹파우더> 사에서 받은 원고료하고는 다르다고. 난 그 돈을 아주 값지게 쓴다고 옷을 샀는데, 입을 때마다 옷이 혐오스럽게 느껴졌어.”
“‘패티네 집’에 진짜 작가가 산다고 생각해봐!”
프리실라가 말했다.
“엄청난 책임이 따라야 할 일이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리실라도 제임시나 아주머니만큼이나 짐짓 진지하게 대꾸했다.
“정말 그래요. 작가들은 날뛰는 황소처럼 다루기 힘든 사람들이죠.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니까. 앤도 우리를 작품 속에 그대로 써먹을지도 모른다고요.”
“내 말은 신문에 글을 쓴다는 건 커다란 책임감이 따라야 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엄하게 말했다.
“그러니 앤도 그걸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외국으로 선교 일을 떠나기 전에 우리 딸도 글을 썼었다. 이제 한 차원 더 높은 일에 관심을 쏟고 있지. 그 애가 글을 쓸 때늘하던 얘기가 있다. ‘장례식 날 읽어서 부끄러울 글은 한 줄도 쓰지 말자.’였어. 앤도 그 말을 명심해라. 문학 분야에서 계속 일을 해보고자 한다면 말이다.”
말을 마친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할 때마다 항상 웃음을 터뜨렸어. 그 애는 언제나 너무 웃어대서 도대체 어떻게 외국으로 선교활동을 하러 나갈 결심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하지만 결국엔 자기 뜻을 실천에 옮겼으니 난 우리 딸이 자랑스럽다. 난 우리 딸이 선교활동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는 했었지만 사실은 선교활동을 하지 않기를 바랐거든.”
말을 마친 제임시나 아주머니는 저 장난꾸러기 처녀들도 왜 저렇게 웃어대는지 영문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앤은 문학적 야망을 싹 틔우고봉오리를 맺는 상상을 하느라 온종일 눈이 반짝였다. 이 기쁨은 제시 쿠퍼가 연 산책 모임에 가서도 계속되었다. 자기와 로이 바로 앞에서 함께 걷고 있는 길버트와 크리스틴의 모습을 보고도 앤의 휘황찬란한 희망은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앤의 마음이 크리스틴의 걸음걸이가 우아하지 못한 것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길버트는 크리스틴의 얼굴만 보나 봐. 남자들은 다 그렇지 뭐.’
앤은 속으로 길버트를 경멸했다.
“토요일 오후에 집에 있을 건가요?”
로이가 물었다.
“네.”
“우리 어머니와 누이들이 앤을 방문하고 싶다고 해요.”
로이가 조용하게 말했다.
전율 비슷한 어떤 것이 앤을 덮쳤다. 하지만 기쁨의 전율은 아니었다. 앤은 로이 가족 중 그 누구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로이가 한 말의 의미도 잘 알았다. 앤을 더 오싹하게 만든 것은 어쨌든 그 약속을 번복할 수는 없으리란 생각이었다.
“저도 그분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그러고 싶은지 생각에 잠겼다. 물론 당연히 그러고 싶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앤을 사로잡고 있는 이 느낌은 앞으로 닥쳐올 시련의 예감 같은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드너 집안에서는 아들과 오빠인 로이가 앤에게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는 소문이 앤의 귀에도 들려왔다. 이번 방문도 그것과 관련해 로이가 어떤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리라. 앤은 자기가 이리저리 저울질당할 거라는 걸 알았다. 가드너 부인과 그 집 딸들이 앤을 방문하려는 의도는 싫든 좋든 앤을 자기 집안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어떨지 보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난 그저 평소의 내 모습 그대로 보여주면 돼.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진 않을 거야.’

앤은 덤덤하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에 어떤 드레스가 적당할지, 머리는 요즘 유행하는 모양으로 높이 올릴 것인지 그냥 옛날식으로 할 것인지 등 금세 이런저런 고민에 빠졌다. 금방 머릿속이 어지러워진 이날 산책 모임 기분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밤이 되자 앤은 토요일에 갈색 시폰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예전처럼 낮게 올리기로 마음을 정했다.
‘패티네 집’여학생들 모두 금요일 오후에는 수업이 없었다. 스텔라는 학회에 제출할 글을 쓰려고 거실 한쪽 구석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주위 바닥에는 쪽지와 원고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스텔라는 글을 쓰고 나면 다 쓴 원고지를 바닥에 어질러놓아야 글이 잘 써진다고 했다. 앤은 그날 플란넬 블라우스와 모직 치마 차림이었고 방금 외출에서 돌아와 약간 흐트러진 머리 그대로 거실 한가운데 앉아 위시본39)으로 고양이 사라를 간질이고 있었다. 조지프와 러스티는 앤의 무릎 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프리실라는 부엌에서 요리에 한창이어서 집 안에는 향긋한 자두향이 넘쳐흘렀다.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코에 밀가루 한 덩이까지 붙인 프리실라는 마지막 장식까지 끝낸 초콜릿 케이크를 제임시나 아주머니에게 막 자랑할 찰나였다.
이 기분 좋은 순간에 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필리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침에 주문한 모자를 든 소년이 온 것이라 여기며 필리파가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현관에는 가드너 부인과 딸들이 서 있었다.
앤은 화가 난 두 마리의 고양이를 무릎에서 내려놓고 얼른 일어났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위시본을 왼손에 바꿔 쥐었다. 부엌문으로 가려면 거실을 가로질러야 했던 프리실라는 아무 경황없이 벽난로 옆 소파 위 쿠션 밑에 초콜릿 케이크를 던지듯 넣어두고 그 길로 위층으로 달아나 버렸다. 스텔라는 어지럽게 펼쳐놓은 원고들을 정신없이 주워 모았다. 제임시나 아주머니와 필리파만이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덕분에 모든 사람이 심지어 앤까지도 다시 편안하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프리실라는 앞치마를 벗고 얼굴의 밀가루 딱지도 떼어내고 다시 내려왔고, 스텔라는 얌전하게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필리파는 이미 준비라도 해둔 듯 사소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해나가면서 분위기를 이끌었다.
가드너 부인은 키가 크고 말랐으며 인물이 좋은 사람이었다. 입은 옷도 기품이 있었고 상냥하긴 했지만 다소 억지로 짜낸 듯 여겨지는 상냥함이었다.
딸인 앨린 가드너는 어머니의 상냥함만 빼고는 가드너 부인의 작은 복사판 같았다. 물론 상냥하게 굴려고 노력이야 했겠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더 도도해 보이고 일부러 선심을 쓰려는 것 같은 인상을 줄 뿐이었다.
도로시 가드너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명랑하고 다소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었다. 로이가 사랑하는 여동생이 도로시란 것을 단번에 알아본 앤은 도로시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도로시의 눈이 옅은 갈색의 장난꾸러기 같은 눈이 아닌 꿈꾸는 듯한 짙은 색이었다면 영락없는 오빠의 판박이였을 것이다.
도로시와 필리파 덕분에 가드너 집안사람들의 방문은 순조롭게 지나갔다. 물론 약간의 긴장감은 여전히 감돌았고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 하나는 사람들과 동떨어져 앉아 있던 러스티와 조지프가 서로 잡기 놀이를 시작하더니 갑자기 가드너 부인의 실크 드레스 위로 뛰어올랐다가 거친 동작으로 다시 뛰어내렸다.
가드너 부인은 손 안경을 집어 들더니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것을 처음 본 사람처럼 안경을 눈에 대고날 듯이뛰어오르는 고양이들을 살폈다. 긴장감으로 목이 멘 앤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나 보죠?”
이 갑작스러운 수선도 다 이해한다는 투로 가드너 부인이 물었다.
앤은 물론 러스티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원래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드너 부인의 말투에 괜히 심기가 사나워졌다. 그 순간 존 블라이드 부인은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서 남편이 허락하는 한 고양이를 아주 많이 키우고 싶어 한다는 생각도 났다.
“정말 사랑스러운 동물이에요. 그렇지요?”
앤의 목소리는 심술궂었다.
“난 고양이를 좋아해본적이 없어서.”
가드너 부인이 쌀쌀맞게 답했다.
“저는 좋아해요. 고양이는 참 착하지만 이기적인 동물이기도 하죠. 개들은 너무 다정하고 또 이기적이지도 않아요. 그래서 오히려 더 불편한 것 같아요. 고양이가 더 인간적이에요.”
도로시가 말했다.
“어머, 저기 멋진 도자기 개가 두 마리나 있네. 좀 가까이 가서 봐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며 앨린이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자기가 무슨 사고를 칠지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채였다. 매고그를 집어든 앨린은 물론 쿠션 위에 앉아버렸다. 아까 프리실라가 초콜릿 케이크를 감추어두었던 그 쿠션에 말이다. 프리실라와 앤은 괴로운 시선을 서로 주고받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앨린은 거만하게 앉아서 일어날 줄 모르고 집을 나설 때까지 내내 그 도자기 인형 개의 얘기를그렇지지 않았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도 도로시는 아쉬운 듯 자리에서 선뜻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앤의 손을 꽉 잡더니 감정을 담아 속삭였다.
“우린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아요. 오빠가 앤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오빠가 그런 얘기를 할 상대는 우리 집에서 오직 나뿐이에요. 가여운 오빠. 엄마나 앨린 언니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죠. 오늘 오후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어요. 종종 찾아와도 되죠?”
“그럼요. 언제나 환영이에요.”
앤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로이가 아끼는 여동생이 다정한 성품이어서 기뻤다. 도로시는 앨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앨린이 앤을 좋아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드너 부인은 앤을 좋아하게 될 것도 같았다. 어쨌든 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고통의 시간은 끝이 나서.

“‘혀와 펜에서 나오는 온갖 슬픈 말 중에 제일 슬픈 건 이렇게 안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것이라네!’”40)
프리실라는 쿠션을 들어 올리며 비극적으로 읊조렸다.
“이 케이크는 이제 납작한 실패작이 되었군. 쿠션도 같이 엉망이 됐고. 이래도 금요일이 운 나쁜 날이 아니라고?”
“토요일 날 온다고 했으면 토요일에 와야지.”
제임시나 아주머니가 중얼거렸다.

“전 그게 다 로이의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그 남자는 앤에게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앤은 어디 있죠?”
필리파가 물었다.
앤은 이미 위층으로 올라와 있었다. 앤은 이상하게도 자꾸 울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았다. 러스티와 조지프는 오늘 지나치게 장난이 심했다. 하지만 도로시는 너무 다정했다.
39. 칠면조의 갈비뼈. 추수감사절에 두 사람이 한쪽씩 잡고 소원을 빌면서 부러뜨리는 풍습이 있다. 이때 크게 부러진 쪽을 잡은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40. 미국의 시인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 1807~1892)의 <모드 밀러(Maude Muller)>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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