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45

3학년2반 | 2021.12.04 07:21:08 댓글: 0 조회: 1069 추천: 0
분류무협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329933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과거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찬란한 제국인 조선과 고
구려를 막기 위해 건설했다. 그런데 일단 세우고 나니 기마민족(騎馬民族)이
라 기동력이 뛰어나 방어에 곤란을 겪었었는데 그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됨
을 보고 거기에 재미를 붙여 점차 서쪽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하북성(河北省)의 윗부분 동쪽 끝 바다에서 시작하여 산서성(山西省), 섬서성
(陝西省)의 북단(北端)을 지나 길쭉한 감숙성(甘肅省)의 서쪽 끝까지 이어져
거의 만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건설하게 된다.

티벳에 근거를 둔 서융족(西戎族)이나 여타 남만족(南蠻族)들은 기마민족이
아니었기에, 건설하는데 있어 엄청난 국고(國庫)를 낭비하는 장성을 더 이상
확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므로 만리장성은 감숙성을 지나 청해성 윗부분
에서 끝을 낸다. 대신 청해성, 사천성(四川省), 운남성(云南省)에는 만리장성
에 비해서는 강도가 많이 떨어지는 방어선(防禦線)을 가지고 있었고 이정도로
도 그들을 물리치는데는 충분했다.

감숙성(甘肅省)의 성도(省都)이자 최고의 군사도시 난주(蘭州)로 뻗어있는 잘
발달된 관도(官道)를 따라가다가 보면 난주로의 관문이라 부를만한 무산(武
山)이 나온다. 이것은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무산(巫山)과는 달리 산이 아니
라 서부 장성에 군수물자(軍需物資)를 공급하는 보급의 통로이자 거대한 상업
도시 이름이다. 무산 방향으로 흑풍단이 이동중이라는 것은 즉 그들이 감숙성
을 지나 청해성(靑海省)의 산골에 들어박힐 생각이던지 아니면 좀 더 나아가
북방의 이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운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없는 청해성을
지나 티벳쪽으로 이동할 생각임을 엿볼 수 있다.

티벳은 산이 많고 지형이 험준(險峻)하기에 아마도 그들이 자그마한 요새를
건설하고 새로이 정착하기에 알맞을 것이다. 괜히 몽고같은 평야에 정착하면
목초를 하기에는 비교적 유리할지 모르지만 흑풍단이 원체 이번에 해놓은 짓
거리가 있어서 몽고인들이 잘먹고 잘살라고 가만 놔둘 가능성이 없었다. 이정
도가 관도를 따라 말을 달려오며 묵향이 생각한 전부였다.

이제 시간도 적당히 점심시간을 넘어가고 있었고 때마침 작은 촌락이 나왔기
에 묵향은 주저않고 객점을 찾아들었다. 자그마한 마을치고는 꽤 많은 식당과
여관(旅館)이 있었기에 묵향은 그중 그런대로 큼지막한 곳에 들어갔다. 묵향
도 이제는 무림 초출이 아닌만큼 객점에 들어서자마자 암암리에 신경쓰고 싶
지 않아도 모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비록 챙이 깊은 죽립을 쓰고있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그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모든 분위기
가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당은 작지않은 규모인데도 꽤 붐비고 있었고 묵향은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하
고 않아 간소한 음식을 시킨다음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처음 들어설때부터 이 식당안에서 최고의
고수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앉은 자리일 것이다. 그 때문에 묵향이 그들을 정
면으로 보는 자리에 앉았으니까... 이때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묵향의 정신을
그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한 소녀의 음성이었는데 거기있는 한 단어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오빠는 왜 흑풍단이 있는곳에 가려는거죠?"

그러자 제법 위엄을 가장한 점잖은 듯한 목소리.

"그야 그들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이지. 나는 연(蓮)아가 생각하는 대로 멍청
하게 그들을 도와 싸우러 가는게 아냐. 그들에게 한가지 조언을 해주려고 할
뿐이야."

그러자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여자의 목소리는 처음것과는
달리 조금 더 차분하다는 점이 달랐다.

"뭘요? 지금 그들의 진로를 보면 아마 티벳으로 갈거 같던데요?"

"언니 말이 맞아요. 티벳은 산세가 험해서 숨어들기도 좋잖아요. 그렇다고 남
만쪽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면 사천성이나 운남성(云南省)쪽으로 갔을거 아니
에요?"

"바로 그거야. 그게 문제라는거지."

"뭐가요?"

"만약 그들이 산세가 험한 청해성이나 사천성에 그냥 숨어있다면 모르겠는데
티벳으로 도망가면 오히려 더 위험하게 되지."

그러자 좀 의아해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요. 국외로 도망치는게 더 안전하잖아요?"

"그게 아니야. 너는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고 있어. 그들이 국내에 숨는다면
이건 송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겠지?"

"예."

"지금 그들을 격파할 만큼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있냐?"

"무슨 말이에요? 오대원수부(五大元帥府)의 군사력은 최강이라구요."

그러자 거만한 목소리가 뽐내듯이 들려왔다.

"쯧쯧... 평상시는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지금 어림군(禦臨軍)의 군
사력은 거의 대부분 요와의 전쟁에 출동해있지. 그러니 남은 군사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돼. 지금 어림군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곳은 정북원수부와 정서원
수부 뿐인데... 정서원수부는 들리는 소문으로 남만족과의 사이도 안좋고...
또 산적토벌 등으로 병력을 뺄수 없어서 대요전쟁에도 참가안했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정북원수부 뿐인데 그 20만 정예군을 빼버린다면 만약의 사태에 요
와의 전쟁이 힘들어지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할거야? 그렇다고 향방군(鄕防軍)
을 동원하자니... 그들의 힘으로는 흑풍단을 막을 수 없지. 거기에 각 군영
(軍營)에 있는 장수들이 안그래도 대부분의 병력이 요와의 전쟁에 보내진 마
당에 몇 안남은 수하들을 잃고싶겠어? 그냥 쉬쉬하며 모른척 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티벳으로 도망치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구. 먼저 티벳쪽에 압력만
가하면 되는거야. 만약 그들의 목을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전쟁을 벌이겠다
고.... 그러면 티벳에서는 고수들을 모아서 그들을 토벌할거고... 오히려 국
내에 남은것만 못한 사태가 벌어진다 이말이야."

그러자 그 목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야유하는 듯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와... 오늘 오빠 너무 무리하는거 아냐?"

"와... 오빠가 그런생각까지 다하고... 다시봤어요."

"이녀석들이!"

아마도 남매들인 듯... 그들은 목소리를 낮춰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었지만 일
단 대화에 흥미를 느낀 묵향의 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묵향은 이들을 우연
히 만난 것이 하늘의 도움으로까지 느껴졌다. 우선 오빠라는 자의 말을 들어
보니 비교적 묵향보다는 정보에 밝은 것 같았고 또 제법 생각이 깊은 인물인
듯 했기 때문이다.

'좋았어! 저녀석만 따라가면 되겠군.'

묵향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조금 차분한 여자의 음성
이 이어졌다.


"그건 그렇고 아버님이 샛길로 샌걸 알면 오빨 가만두지 않을텐데 어쩔거에
요?"

"괜찮아. 그래봐야 한 며칠 면벽수련(面壁修練) 밖에 더 시키겠냐?"

"문제는 저희들이라구요. 참. 오빠 이렇게 하면 어떨까?"

"뭐 좋은 수라도 있냐?"

"이왕에 벌받는거. 오빠가 다 덮어쓰는거야."

"뭐시라? 이녀석이..."

그러자 일부러 애교스럽게 치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오빠가 우리를 대신해서 고생을 해야지... 안그래, 언니? 오빠 좋
다는게 뭔데.... 난 죽어도 벽만 보고는 못살아. 그러니까 오빠... 응?"

"너한테는 못당하겠군. 좋아. 내가 다 책임지지. 모든게 다 내탓이다. 에
구... 이것들을 데리고 오는게 아니었는데..."

"그건 그렇고 황화루(黃華樓)에는 언제 갈거에요?"

"얘는 누가 초출(初出) 아니랄까봐..."

"그건 볼일 끝난 다음에 가자."

그러자 짐짓 투정하는 투로..

"에이잉.... 오빠... 난 빨리 가보고 싶단 말야. 황화루의 절경은 얼마나 소
문이 나있는데.... 무림인이라면 안가본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구요."

"너 말은 꼭 거기 안가면 무림인이 아니라는 투로 들린다."

"안그래? 언니하고 오빠도 다 가봐놓고는.."

그러자 젊잖게 타이르는 목소리...

"아냐. 거기는 경치야 좋지만 아주 비싼곳이라 무림인 보다는 고관이나 부호
의 자제들이 많이 들리는 곳이지. 여기 경치도 이 부근에서는 아주 유명하다
구. 그래서 근처에 여관이나 식당들이 많잖아. 황하(黃河)의 절경이 많은 곳
은 청해성(靑海省)이지만 감숙성도 그에 못지않은 명소들이 많지. 여기도 그
중의 하나고..."

"그래도 난 이번에 청해호(靑海湖)를 보고싶다구요. 엄마도 정말..."

"글쎄 나중에 보여준다고 해도 그러네... 잔말말고 밥이나 먹어. 빨리 먹고
나가야지."

"흥!"

남매들은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대금을 지불한 뒤 말을 타고 식당을 떠났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자신들 뒤에 검은 혹이 하나 붙어있다는 것을 깨닳
았다. 힐끗 뒤를 쳐다본 엷은 홍의를 입은 여자가 그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
했다.

"오빠.. 뒤에 쫓아오는 사람이 있어요."

"알고 있다."

"알고 있었어요?"

"응.. 처음엔 몰랐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식당을 나선 다음부터 따라왔어."

그러자 매화문양이 수놓아져있는 옅은 청의를 입은 여자가 뒤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오빠. 저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말이야?"

"응."

홍의를 입은 여자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말했다.

"허리에 찬 도(刀)라든지... 뭐 낡은 흑의를 보니까 그렇게 대단한 인물 같지
는 않은데... 아마 우리들 말을 옅들은 관부의 밀정(密偵)이 아닐까요?"

"흠... 그럴지도.... 아무래도 훈련을 받은 밀정이라면 따돌리기는 힘들거야.
기회를 봐서 헤치우는게좋겠지."

그러자 청의를 입은 여자가 흥미가 있다는 듯 물었다.

"언제요?"

"내가 말했지. 기회를 봐서라고."

"피... 저런 밀정을 없애는데는 저혼자 해도 충분하다구요."

그러자 남자가 신중하게 말했다.

"아니야. 또 다른 밀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또 살인을 백주대낮에 할수도
없잖아. 인적이 드문곳에서 숲속으로 유인해서 없애야 돼."

* * *

그들은 뒤따라오는 밀정을 조심해서 힐끔거리며 도란도란 작전을 짠 다음 이
윽고 행동을 개시했다. 거의 인적이 없는 상태에서 왼쪽으로 자그마한 오솔길
이 나 있는 것을 본 그들은 태연하게 그리고 말을 몰아 들어갔다. 오솔길로
들어서서 2각정도 갔을까... 이때 남자는 말의 고삐를 청의를 입은 소녀에게
건네준 다음 몸을 날려 나무 가지를 밟고는 그 탄력을 이용해서 4장(12M)정도
떨어진 큼지막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로 다시금 몸을 날렸다. 그 모든
일을 순간적으로 해치우는 것으로 보아 그 남자는 대단히 오랜시간 고련(苦
練)을 했음을 알수 있게 해주었다.

남자가 나무위로 몸을 날린 상태에서 청의를 입은 소녀는 앞으로 나가면서 청
의 여자에게 말했다.

"오빠의 신법은 정말 완벽해. 난 언제쯤 저정도 경지에 오를수 있을까.."

그러자 돌아오는건 비웃는 듯한 목소리...

"꿈깨거라... 얘야.."

"언니는.... 나도 언젠가는 할수 있단 말이에요. 사람을 어떻게 보고..."

"후훗... 토끼 머리에 뿔날 때?"

"흥! 하여튼 미워 죽겠다니까.."

"여기서 기다릴까?"

"응"

두 여자는 각자 말에서 내린 다음 말들을 끌어다가 도망 못가게 나뭇가지에
묶었다. 그런다음 말안장에 끼워뒀던검을 검집 채로 꺼내어 손에 들고는 조
심스레 수풀 사이에 숨어서 멀직이서 조심스레 따라오는 밀정을 기다렸다.

청의를 입은 소녀가 자신이 가진 검을 힐끗 바라보더니 나즈막히 힘없이 말했
다.

"사람을 죽이는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녀의 손은 흥분때문인지 아니면 살인(殺人)이라는 미지(未知)의 행위(行爲)
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홍의 소녀는 약간
놀리는 투로 속삭였다.

"오빠가 힘쓰면 너차례는 오지도 않아. 괜히 맘 조리지 마. 괜히 흥분해서 함
부로 날뛰다가 오빠한테 상처입히지 말고."

"언니는? 그러는 언니도 살인은 처음이잖아."

두 여자가 이상하게도 나타나지 않는 밀정을 기다리다 지쳐 서로를 헐뜯고 있
는 사이 그녀들의 오빠도 황당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흑의를 입은 밀정은 식
당을 떠난 다음 언제나 30장(90M)거리에서 느긋하게 따라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 자신은 나무에 남아 밀정의 퇴로를 차단한 후 자신이 직접 해치우던
지 최악의 경우 합공까지 고려하여 매복을 한건데 이놈의 밀정이 어떻게 알았
는지 자신에게서 30장 거리에서 멈춰 서더니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대단한 놈이군. 고수같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추격술에 대단히 능한 놈인
모양이군. 잘못 걸렸는데... 어떻게 한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남자는 이윽고 생각을 정했는지 몸을 날려 3장쯤 아랫쪽에
위치한 가지를 밟더니 그 탄력을 이용해 몸을 날리더니 거의 10장을 날아가
재차 다른 가지를 밟고 튀어오르는 수법으로 삽시간에 흑의인의 뒤쪽에 떨어
졌다. 정말이지 놀라운 신법(身法)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뒤로 돌아서는 밀정을 향해 칼을 뽑아들었다.

챙~~

경쾌한 쇳소리를내며 뽑힌 검은 즉시 밀정의 목줄기를 겨누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반항하지 않는 자를 도살(屠殺)할 수 없다는 얄
팍한 정파인으로서의 자부심(自負心)이었다.

"칼을 뽑아랏!"

"왜그러시오?"

"왜그러는지는 네놈이 더 잘 알게 아니냐?"

그런데도 상대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있자 다시금 말했다.

"우리 뒤를 미행(尾行)한 이유가 뭐냐?"

"흑풍단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소?"

"바로 그거야. 가긴 가겠지만 꼬리를 달고 갈수는 없지."

"내가 따라가서 안될 일이라도 있소?"

"그들은 쫓기는 몸. 밀정을 달고 가면.."

"나는 밀정이 아니오."

"그러면 왜 미행하는 거냐?"

"난 흑풍단과 꽤 인연이 있기에 그들을 도와주러 가는 길이오. 그런데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니... 그대들이 잘 아는거 같아 따라가면 될거 같아서 뒤쫓던
길이오. 사실 내가 밀정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미행하겠소?"

"하긴.. 그 말도 일리는 있군."

이때 두명의 여자들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오빠가 나무위에
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매복한 위치에서 뛰쳐나
온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싸우고 있을거라 생각한 오빠가 검을 뽑은 상태기는
했지만 밀정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해서 물었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남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밀정인 듯한 인물에게 말했다.

"하지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증표라도 있나?"

"증표 같은건 없소."

"그렇다면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한참 생각하던 밀정인 듯한 남자가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되니까... 당신들이 나를 정
못믿겠다면 점혈(占穴)을 하던지 해서 함께 가면 되지 않겠소?"

"흠... 그게 좋겠군. 대신 도착해서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목숨이
없어진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정도는 각오하고 있소."

"좋다."

그와 동시에 남자는 몸을 날려 흑의인(黑衣人)의 혈도를 찍었다. 상대가 점혈
하란 듯이 자세를 바로하고 있었으므로 점혈은 손쉽게 이뤄졌다. 그래도 남자
는 못믿겠는지 몸을 날려 숲속으로 들어가서 말들을 끌고왔다. 그런다음 자신
의 말안장에 있던 수갑(手匣)을 꺼내서 채웠다. 그 남자는 무림을 돌아다니면
서 정파의 후기지수 답게나쁜짓을 행하는 놈들을 잡아다가 관가에 넘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수갑 몇개를 언제나 말안장에 가지고 다녔는데 이걸 이 상황
에서 사용하게 될줄은 자신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수갑을 채우면서
말했다.

"이 수갑은 그냥 강철이 아니라 오철(烏鐵;검은 빛이 나는 합금의 일종으로
현철보다는 강도가 많이 떨어짐.)로 된 것이니 행여 풀 생각도 하지마라."

"나도 풀 생각은 없소."

남자는 젊은 나이에 비해 강호 경험이 풍부한지 흑의인의 말안장이나 품속을
뒤져서 행여나 어떤 연락에 사용될 만한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품속
에 있는 지갑에는 25냥의 은자와 엽전 40냥이 달랑 들어있었고 비수(匕首)라
고 부르기에는 좀 긴 수수한 단검(短劍) 한자루, 괴이한 문자가 써진 자그마
한 천 1장과 용(龍)이 살아있는 듯 잘 조각된 작은 옥패(玉牌)하나, 그리고
소금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없었다.

'왠만큼 무림에 자신있는 자들도 이렇게 홀가분하게해서 다니지는 않는데 하
다못해 그 흔한 표창( 槍) 하나 없다니.... 이상하군?!'

남자는 상대의 옷 소매까지 뒤적이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가진 것이 모두 이것 뿐이오?"

"그건 왜 묻소?"

"혹시 빨리 만나지 못한다면 꽤 멀리까지 가야하는데 근처 여관(旅館)에 짐을
맏겨놓은게 아닌가 해서 묻는거요."

"짐은 이게 다요. 그리고 혹시나 무기를 가지고 있는것도 못마땅하다면 일단
그대가 보관하다가 도착해서 돌려줘도 무관(無關)하오."

혹시나 해서 검집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가 살펴보는 중에 그런 말이 나왔
으므로 그 남자로서는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을 저질렀다. 더
이상 살펴보지 않고 그냥 물러선 것이다. 만약 그가 집 속의 검이나 비수를
꺼내봤다면 상대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철(玄鐵)이란 물건은 아주 귀하고 값지기에 왠만큼 좋은 검들도 날부분을
보강(補强)하기 위해 조금씩 쓸뿐... 아예 검 전체를 현철로 하지는 않기 때
문이다. 그 대신 그는 만일을 대비해서 비수는 흑의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
신의 안장에 찔러넣었다.

일단 몸수색부터 시작해서 모든 일이 종료되자 이제 통성명(通姓名)을 했다.

"이렇게 번잡하게 해서 죄송하오. 하지만 이 일은 꽤나 기밀을 요하는 것이
고, 또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것도 있어서 초면에 실례를 한거니 용서하시오."

"별로... 상관 없소이다."

"저는 무림에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일진검(一鎭劍) 초우(礎雨)라 하고
이 아이들은 초연(礎蓮), 초희(礎曦)라 하오."

"저는 묵향(墨香)이라 하오. 별호따위는 없으니 그냥 그렇게 부르시오."

"초면에 실례인 것은 알지만 이상한 이름이군요."

"하하하... 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니 성따위는 없고... 그냥 묵향이외
다. 얼마 전까지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국광(菊狂)이란 웃기는 이름으로 불렸
었으니... 참. 흑풍단에서는 국광이란 이름만 알고있으니 혹시나 그대가 먼저
만난다면 그렇게 말하면 알거요."

'이름이 두개라... 좀 수상한 인물이군. 아무래도 좀 더 주의해야겠어.'

* * *

초희(礎曦)는 근래들어 새로이 길동무가 된 인간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왜 마음이 편치 못하냐고? 그녀의 나이도 이제 스물하고도 두 살이 되어버린
노처녀에 가까운데다 무림 초출이라 은근히 이번 기회에 근사한 남자들을 많
이 사귀고 싶었고 또 그 중에서 기회만 된다면 장래의 반려자(伴侶者) 감도
물색하고 싶었다. 원래가 둥지 안에서 고이고이 길러진 금지옥엽(金枝玉葉)이
었으니 타인들과 왕래나 교류도 거의 없었고 자신의 집안 자체가 이름난 무가
(武家)였기에 그 잘난 남자라고는 오빠 말고는 거의 접해보지 못한 가련한 신
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길동무로 꽤 재미있는 남자라는 동물
이 하나 생겼으니...

"그럼 대협께선 그렇게 고수(高手)란 말이에요?"

그러자 상대의 자랑스런 대답.

"그럼.. 나보다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관하지."

'말도 안돼!'

"그렇게 대단한 대협께선 사문(師門)이 어떻게 되세요?"

"내 사문은 별로 중요한게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구. 요즘들어 그녀석들 이름
만 나와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해서 가급적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가 않아."

상대가 어물쩡 넘어가려 들자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사문과 별로 사이가 안좋은 모양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나만 보면 죽이려고 드니까.."

"파문(破門) 당하셨어요?"

"아니. 가만히 생각해보니 파문은 안당했군."

"당신 사부님은 누구신데요?"

"유백이란 분이지. 지금 살아계신지도 모르겠어."

'유백이란 이름도 처음 듣는군. 그럼 확인 해볼건 한가지 뿐이지...'

"그렇다면 대협의 절기(絶技)는 뭐에요?"

"음... 절기라고 한다면 무상검법(無上劍法)이 특기지."

'들어본 적도 없는 허무맹랑한 검법 이름이군.'

"그 외에는 어떤 무공들을 익혔어요?"

"그 외에? 엄청나게 많이 익혔지."

"얼마나요?"

"한... 만(萬) 종류 정도 되나? 기억도 안나는군."

'점점... 더...'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강한게 있을거 아니에요? 예를 들어 몇가지.."

"음... 수라월강도법(修羅月剛刀法),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 소수마공
(素手魔功), 혈수마공(血手魔功), 회풍무류검법(廻風舞柳劍法), 육합검법(六
合劍法), 태청검법(太淸劍法), 태허도룡검법(太虛渡龍劍法)"

'어쭈... 이거 완전히 정파와 사파의 유명한 검법이란 검법은 다 말해대는군.
기가 막혀서...'

"그만... 됐어요. 저희 아버님께서 곤륜파(崑崙派)와는 아주 친분이 깊으셔서
우연한 기회에 태허도룡검법(太虛渡龍劍法)을 조금 배웠었는데... 잘 아신다
니 한번 구결(口訣)을 말해보세요."

"구결? 가만있자.... 구결이 뭐더라... 허허... 잊어버렸어. 너무 많이 외우
다 보니 잊을수도 있지. 사실 중요한건 구결이 아니니까."

상대가 어물쩡 넘어가자 다시금 꼬치꼬치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럼 자신있게 구결을 외울 수 있는 무공이 있어요?"

"가만있자........ 이건 아니고..... 응.... 음... 이것도 아니군.....끄
응... 글쎄... 원체 오래전 일이라 하나도 제대로 기억이 나는게 없는데..."

'끄응... 저러면서 날 더러 믿으라고? 웃겨서'

"그럼 대협께선 글은 좀 읽으셨어요?"

"글? 천자문(千字文) 같은거 말인가?"

"아뇨. 소학(小學)이나 대학(大學) 같은거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에 소학은 읽은 적이 있지. 그리고 몇권 더 읽었었는데.... 책
제목은 원체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나는군. 무인(武人)으로서 이정도 읽었으면
많이 읽은거야."

'아예 무식한 놈이라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해!'

여기서 초희가 소학이나 대학이라고 물은 이유는 소학은 어릴 때 천자문(千字
文)이란 낱말책을 뗀 아동들이 처음에 접하게 되는 문장(文章)으로 된 아동용
도서가 소학(小學)이다. 소학은 쉬운 문장들을 사용했지만 그 문체가 뛰어나
아주 잘 지어진 책으로서 문장을 익히는 입문 단계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는
교과서 적인 책이라고 봐야한다. 그런데 하는 상대의 말이 그정도나 겨우 읽
었다니... 기가 막힐 수 밖에.

'이자의 말이 원체 오래전... 오래전... 하는걸 보면 혹시나 반노환동(反老還
童)의 고수? 설마... 하지만... 아직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실례가 되
지 않게 재삼 확인을..'

"대협"

"왜?"

"이~~~ 한번 해보세요."

초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이~~ 하는 소리를 낸 후 말했다.

"이~~~~"

그 말에 묵향은 그녀가 뭘 확인하려 하는지 눈치채고는 한껏 입술을 벌려 자
신의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사랑스러운 누런 이빨을 보여줬다. 자신과 같은
영감탱이 반노환동의 고수인 경우 딴건 다 젊게 보이게 만들 수 있지만 이빨
만은 어떻게 되지 않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젊은 애숭이들과 확연한 차이가 드
러나는 것이고.... 그런데 묵향도 실수한 부분이 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 그러니까 기억이 없을 때 자신의 이빨이 몽땅 바뀌었다는 건 아직 확인
해보지 않아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이빨이 하얗잖아. 이런 사기꾼 같으니... 그럼 그렇지... 무림인들은
원래가 자부심(自負心)과 자존심(自尊心), 아집(我執)으로 뭉쳐진 인간들...
그렇게 대단한 고수라면 우리를 닥달해서 끌고가면 갔지 오빠가 혈도를 점하
고 수갑을 채우도록 놔뒀을 리가 없지.... 근사한 남자를 만나고 싶었는데 근
사한 남자는 모두 굶어 죽었는지 한놈도 보이지 않고 거기다 이런 놈팽이하고
같이 다녀야 하다니.... 휴~~~ 내 인생이 너무 한심해...'

대화가 이런 식이었으니 이제 산통 다깨진 허풍꾼을 얌전히 대해줄 필요가 없
었다. 하지만 조금 무례하게 대해도 상대는 그런 예의에 있어 무관심한 듯이
행동했기에 같이 지내기에는 별로 무리가 없었다. 초희가 보기에 묵향이란 인
간의 얼굴은 그런대로 후하게 봐주면 매끈한 편이지만 무지무지하게 허풍이
세고... 또 거의 안하무인인 것 처럼 무공에 있어서는 거드름을 피워대는 이
놈팽이는 초희처럼 명가(名家)에서 자란 자제가 봤을때는 몇푼 되지도 않는
돈을 가지고 허름한 도(刀)를 하나 대장간에서 몇푼 주고 구해서 허리에 차고
는 무림을 돌아다니며 무식하고 가련한 무사들에게 사기나 치는 진짜 바닥인
생이 틀림이 없었다.

초반 대화에서 초연이나 초우 같은 경우 상대의 허풍에 질려버려 아예 말도
안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희의 성격도 성격인지라 자신이 상대해주지 않
으면 완전히 외톨이로 떨어지는 상대가 불쌍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말상대를
해주기 시작했다. 상대가 눈에 빤히 보이는 허풍을 자기딴에는 잔머리를 굴려
서 곱배기로 쳐대는 것을 보는게 재미있어 이것저것 물어댔고 상대의 관심에
안그래도 심심하던 차에 흥이 난 묵향이 더욱 자화자찬(自畵自讚)을 해대면
초희는 그 얄팍한 거짓말에 배꼽이 빠지게 웃어대며 재미있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자칭(自稱) 최고(最高)의 고수(高手)이자 금(琴)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는 희대(稀代)의 허풍선이를 동반한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
다.

* * *
원래 묵향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고, 또 아무도 없는 곳에 몇 달씩 박혀있
어도 외로움을 탈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러 사람이 갈 때 자기들만 얘
기하고 혼자 외톨이로 떼어놓는건 별로 유쾌하지 못하다. 그러던 차에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귀여운 얼굴을 한 초희란 묘령(妙齡)의 아가씨가 말상대를
해주니 자기가 생각해도 꽤나 유쾌한 여행이었다.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나 아
니면 전에 있었던 싸움 등을 얘기해주면 이상하게 심각한 장면에서도 까르르
웃는게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이 귀여웠기에 참아준 것
이다.

묵향은 초우란 청년과 같이 지내면서 처음에는 애숭이라고 얕잡아 보는 경향
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나이에 비해 상당히 무림 경험이 있었
고 매사에 철저함을 좋아했다. 점혈(占穴)을 할 때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났다.
점혈 수법은 그냥 힘으로 때린다고 되는게 아니다. 상대의 혈도에 자신의 내
공을 불어넣어 일시적으로 진기(臻氣)의 유통(流通)을 방해하는 수법이다. 그
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 진기가 진신내력(眞身內功)이 아닌 한 공력의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정 시간이 지나면 소멸(消滅)한다는데 있다. 그리
고 상대가 대단한 고수라면 스스로 진기를 움직여 혈도를 막고있는 타인의 진
기를 소멸시키는 수법도 있다.

그렇기에 초우란 녀석은 매일 아침이 되면 묵향의 혈도를 재차 점혈 하는데
이때 세심하게도 자신의 내력(內力)을 이용해서 묵향의 혈도에 자신의 내력
(內力)이 남아있는지 확인해본 다음 내력이 남아있는 그 위치에 다시 내공을
보탠다는 사실이다. 이건 언뜻 듣기에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만에
하나 상대가 진짜 고수라고 가정했을 때 자력(自力)으로 막힌 혈도를 뚫었을
수도 있고 또 아주 드물게 특이한 무공을 익혀 혈도를 이동시킬 수도 있기 때
문이다. 그러니까 점혈을 했던 혈도와 해혈을 하는 혈도를 서로 뒤바꿔 놓으
면 다음날 자신은 점혈을 한다고 때린것인데 사실은 해혈을 한게 되는 이치
다.

그런 사소한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주의에 주의를 하는 것을 보고 묵향은 그
를 다시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지 않아 역시 당사자는 눈치
채지도 못한채 애숭이로 평가절하(評價切下)가 된 사건이 있었으니...

희대의 허풍선이를 동반한지 4일째 되던 날 저녘, 그날도 평상시와 같이 객점
에 들었다. 오는 도중에 수소문을 한 결과 무산(武山) 남쪽의 탕창(宕昌) 쪽
으로 흑색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이동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탕창 부근을 통과하여 백수강
(白水江)을 건너 사천성(四川省)으로 들어갈 예정인 모양이었다. 일단 모두들
그런대로 실마리는 잡았기에 푸근한 기분에 마을로 들어가 먼저 여관을 잡고
몸을 대강 씻은 다음 식사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크지는 않은 식당이었지만 몇 명이 식탁에 앉아 식사 중이었는데 그들
은 빈 탁자에 널찍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아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묵향
은 거의 잡식성이라 할 만큼 음식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의 음식까지 몽땅 초
희가 점소이에게 주문을 한 다음 객점 안을 둘러봤다. 혹시나 근사한 남자가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 였다. 초희는 조금 자아도취(自我陶醉)
증세가 있는 평가기는 했지만 뛰어난 가문(家門)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미모
(美貌)와 말솜씨라면 안보여서 그렇지 일단 멋진 남자가 보이기만 하면 자신
의 곁에 잡아둘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식당 안에 초희가 꿈에도 그리던 멋진 남자가 그곳에 있었
던 것이다. 창가에 위치한 자리에 고상한 무늬의 청의(靑衣)를 입은 잘생긴
청년이 간소한 안주를 두고 죽엽청(竹葉淸)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앉은 옆
의자에 화려한 문양의 검집을 가진 검이 놓여있는 것을 보면 제법 형편이 좋
은 무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눈에 시원하게 뻗은 콧날, 검은 콧수염을 짧게 다듬은 멋쟁이였
다. 거기에 많은 수련을 쌓았는지 간혹 술병을 잡기위해 팔을 뻗을 때 드러나
는 팔목은 근육이 잘 발달해 있었다. 잠시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던 초희가 묵
향에게 살며시 말했다.

"대협, 저사람 정말 멋있죠?"

"누구?"

"저 청의를 입은 사람 말이에요."

"으음... 글쎄.... 제딴에는 있는대로 멋을 낸 바람둥이군."

그러자 초희가 새침한 표정으로 나무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어떻해요?"

"글쎄... 나는 원체 사람을 못믿어서 말이야..."

"그건 병이라구요. 챙피한 줄을.."

그녀의 말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이쪽을 힐끗 바라본 그 멋쟁이 청년
이 살며시 일어나 자신들이 있는 탁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멋쟁이 청년은
탁자옆에 다가온 다음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십니까? 소생은 절검문( 劍門)의 말학(末學) 진소추(振召秋)라 합니
다. 보아하니 무림인이신것 같아서 무례를 무릎쓰고 왔습니다. 서로 통성명이
나 하시는게 어떠하올는지요?"

상대가 이렇듯 정중히 나오니 잡배(雜輩)라 해도 거절하기 힘든데, 절검문이
라면 섬서성(陝西省) 남쪽에 위치한 작기는 하지만 검의 명문인데다 거기에
혼기(婚期)가 꽉 차있는 여자 두명이 있으니 어쩌면 이자와 인연이 닿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여러 가지 정보도 얻을 겸 해서 모두들 그를 환영했다. 초우
도 그에게 마주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아, 진소추 대협이시군요. 저는 초우라 합니다. 이 아이들은 제 여동생들로
초연, 초희라 하고 저쪽에 계신분은 묵향이란 분이오."

진소추란 남자는 처음부터 묵향이 그들과는 달리 낡은 옷을 입고 있는데다 그
옷도 그렇게 고급이 아니었기에 그냥 간단히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음식을
먹기위해 손을 올렸을 때 묵색(墨色) 수갑이 손목에 채워져 있는 것을 본 다
음에는 아마 묵향이 범죄자 쯤으로 인식된 모양인지 아예 상대도 안했다.

"하하.. 대협은 아니올시다. 절검문의 말학 주제에 대협이란 말을 들으면 모
두들 욕합니다. 하하..."

"원.. 겸손 하시기도. 그래 진형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예, 저는 이번에 수행(修行)도 좀 쌓을겸, 눈요기도 할겸 해서 무산(巫山)쪽
으로 가는 길입니다. 무산의 절경(絶景)은 소문이 자자 하니까요."

"그럼 이번이 초출이십니까?"

"아닙니다. 사천쪽으로는 초행입니다."

진소추란 사람이 자신들과 거의 유사한 방향으로 가는데다 이쪽으로는 초행이
라니 처음부터 흑풍단에 대해서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여러 가지 검학이나 세
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소추는 얼굴도 잘생겼지만 명문의 자
제답게 차분하고 진중(珍重)한 말투기는 했으나 성격이 호방(豪放)한데다 아
주 말을 재미있게 했고 묵향을 제외한 모두는 진소추의 매력에 빠져들며 호탕
하게 술판을 벌였다.

묵향도 술이라면 무조건 마시고 보자는 인물이었기에 대화에는 끼어들지 않았
지만 그들의 옆에서 아예 죽엽청을 독채로 가져다 놓고 퍼마시기 시작했다.
묵향은 술을 잘 마시지는 않지만 일단 마시면 뿌리를 뽑는 성격인데다 수소문
을 시작한 다음부터 한방울의 술도 마시지 못했으니 거의 술을 마시는게 아니
라 목구멍에 들이 붓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묵향은 혼자서 한 독을 깨끗하게
비운 후 담소를 나누는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여태껏 여관을 잡으면 언제나 나란히 위치한 방을 두개를 빌려 한쪽은 초연과
초희가 사용하고 또 하나는 묵향과 초우가 썼다. 이러는 것이 돈도 절약될뿐
더러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불의(不意)의 사태에 대처하기도 편하기 때문이
다.

초우가 술자리를 파하고 거나하게 취해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묵향은 문 근처
에 자리를 잡고는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아직도 초우가 이상하게 생각하
는 점 중의 하나가 묵향이란 인물은 침대에 누워 자는 꼴을 못봤다는 것이다.
언제나 벽에 기대고 조금 졸 듯이 자거나 밤 늦게까지 운공조식(運功調息)을
하는지 명상(冥想)을 하는지 그렇게 앉아있다가 다음날일어나면 이미 일어나
있던지 아니면 명상을 하고 있었다.

'저자는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바뀐게 하나도 없군.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편히 누워서 잠을 못잘꼬...'

초우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귀찮아 쓰러지듯 침상에 누워 그대로 잠이 들었
다.

초우가 방에 들어온지 1시간 후 묵향은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설마 하고 있
었는데 창문쪽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리더니 약한 들릴 듯 말듯한 슈우우
우하는 바람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독(毒)인가?'

하지만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침상에 누운 초우의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가 계
속 들리는 것으로 보아 독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미혼분(迷混粉)이나 미혼향(迷混香)이겠군. 일단 약속을 해놔서 임
의로 해혈을 하기는 내 자존심이 허락을 안하고.... 뭐 되는대로 놔두자..'

하지만 공력을 거의 사용할 수 없는 관계로 1각쯤 지나자 숨이 턱에 차기 시
작했다. 그래서 묵향은 기척없이 슬며시 움직여 문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런다음 살짝 문을 열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신 후 기척을 살폈다. 그런데
요상한 점은 상대가 금품을 털 목적이라면계집들이 묵고있는 방 보다는 이쪽
을 뒤질 것이 분명한데 아직도 들어올 생각을 안하고 있었고 설상가상(雪上加
霜)으로 문앞에서 느껴지던 기척조차 없어졌다는 것이 수상했다.

'금품(金品)이 목적이 아니라면 뭐가.... 그럼 혹시 인신매매(人身賣買)하는
놈들인가? 하기야 같이 동행(同行)하던 초연이란 계집애는 잡혀가서 곤욕을
치뤄도 상관없어. 선배 대접도 안해주는 못된 계집은.... 아니지.... 그놈이
초연이만 가져간다는 보장이 없잖아. 할 수 없군... 일단 몰래 살펴 보고 초
연이만 가져가면 놔두고 초희까지 손대면 이몸이 나설 수 밖에...'

여자들이 묵는 방은 바로 옆방이었기에 찾아가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
았다. 슬며시 움직여 여자들이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한 다음 기척을 살피니 뭔
가가 방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살며시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이런 빌어먹을... 안에서 잠겼군. 할 수 없이 창문으로 갈까.... 아냐. 이
나이에 내가 창문을 넘어 돌아다니리?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 자부(自負)하
는 이몸이? 여관 문이야 별로 강하게 만든게 아니니 한 대 차면 경첩이 뽑혀
나갈거야. 차고 들어갈까... 그냥 놔둘까... 지들도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
데.... 참! 그런데 계집들이 잡혀가면 초우란 놈도 계집들 구한답시고 헤멜테
니 흑풍단을 손쉽게 만나려면 하는 수 없이 구해줘야겠군.'

* * *
쾅~~~ 콰지직!

발길질 한번에 문짝은 부숴져 나갔고 그 안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품
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술에취해 잠들어있는 여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떤
행동을 하려는 찰나에 문짝이 떨어져 나가자 놀라서 묵향쪽을쳐다봤다. 놀랍
게도 그 남자는 절검문( 劍門)의 진소추(振召秋)라는 놈이었다. 진소추는 침
입자(侵入者)를 보고 하던 일을 중단한 후 손에 든 것을 침상 위에 놓고는 번
개같이 몸을 날려 침상 옆에 세워둔 자신의 호화로운 검을 뽑아들었다. 그걸
보며 묵향이 이죽거렸다.

"이봐, 자네 친구들은 어디있어? 왜 혼자 뿐이지?"

"왠놈이냐? 다치기 싫으면 꺼져라."

"인신매매면 그래도 먹고 살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놈이니 봐줄테니까 해약이
나 내놓고 꺼져라."

"미친놈!"

그와 동시에 진소추는 수갑을 찬 채 검도 뽑지않고 있는 묵향을 향해 몸을 날
렸다. 식은 죽 먹기의 상대로 생각하고 처음부터 과감한 공격을 퍼부었다. 일
검에 작살을 내려는 듯 공력을 끌어모아 직검단천(直劍斷天)의 기세로 내리찍
었으나 묵향은 수갑의 사슬을 이용해 간단히 검을 막으면서 즉시 왼발을 날려
낭심(囊心)을 가격했다. 놀랍도록 빠르지만 자로잰 듯한 움직임이었다. 급소
를 가격당한 격심한 통증에 진소추가 인상을 찌그리는 찰나 가격(加擊)의 반
동(反動)을 이용해 왼발을 뒤로 빼며 오른발이 사내의 낭심을 다시금 가격했
다.사내가 주춤거리며 내려앉기 직전 뒤로 돌아온 왼발로 땅을 박차고 오르
며 이 사내의 턱 아랫부분을 오른발로 차면서 뛰어오른 왼발의 힘을 교묘히
조절하며 왼발로 오른쪽 두개골을 가격했다.

챙~하는 청아한 쇳소리와 거의 동시에 퍽퍽거리는 둔탁한 소리가 거의 4번 동
시에 들리면서 누구의 목소린지 처절한 비명성이 들리며 두 사내가 중심을 잃
고 쓰러졌다. 하지만 묵향은 곧이어 일어난 반면 진소추는 완전히 뻗어서 일
어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묵향은 아직도 낭심을 감싸쥐고 신음하는 진소추
에게 다가가 힘껏 오른쪽 두개골을 차버렸다.

퍽!

"끄윽!"

그 다음 진소추의 움직임은 정지했다. 하지만 묵향도 공력(功力) 없이 순전히
근육만을 이용한 숙련된 몸놀림으로 상대를 제압했기에 내력(內力)을 쌓은 상
대가 그렇게 심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란 걸 잘 알았다. 그렇다고 내공
을 끌어올리기가 힘들기에 평상시처럼 점혈을 해둘수도 없었다.

'이런녀석을 밧줄을 구해 묶는다고 해도 힘한번 쓰면 끊어질지도 모르는
데.... 그렇다고 초우 녀석 말(馬)에 가서 수갑을 들고 오기도 그렇고... 또
열쇠도 없잖아. 또 그사이에 도망치면 무슨 개망신이냐... 이따위 혈도 푸는
건 순식간이지만 생명(生命)의 위협(威脅)이 오는것도 아닌데 풀자니 자존심
(自尊心)이 허락하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막힌 혈도를 우회(迂廻)해서
진기(臻氣)를 모아보자. 정파놈들이야 불가능 하겠지만 나는 역혈(逆穴)의 내
공을 쌓았으니 길이 있겠지.'

진소추가 정신을 대강 수습했을 때 그가 처음 바라본 것은 자신을 비웃듯 내
려다 보고있는 묵향이란 사내였다.

'제기랄, 수갑을 차고있어서 별로 주의를 안했는데....'

묵향은 진소추가 정신을 차리자 마자 미소를 짓고는 위에서 내려다 보며 부드
럽게 말했다.

"오호... 이제 깨어나신 모양이군. 자네를 위해 발 바닥에 진기 좀 모아뒀지.
그렇다고 이거 점혈(占穴)을 할 정도는 안되고 조금씩 모으자니 감질나서 못
하겠더라구. 그래도 자네를 잡아둘 정도는 되니 걱정 말게나. 우선 그 귀한
뼈다구가 부러지는데... 자네에게 사전(事前)에 양해(諒解)도 구하지 않고 기
절한 상태에서 하기는 뭣 해서 말이야."

퍽!

"크아악!"

설마하니 정신을 차리자마자 오른쪽 종아리뼈가 생으로 부러질지는 꿈에도 생
각하지 못한 진소추가 무참한 비명을 질렀지만 묵향은 비명이 끝나기를 기다
려 한소리 했다.

"역시 무릎 밑에다 나무조각을 받쳐뒀더니 잘 부러지는군... 흐흐..좀 아픈
가? 미안허이... 공력이 모자르는게 죄지... 흐흐... 평상시 같으면 그양 서
로 편하게 혈도를 점한 후 분근착골(粉筋鑿骨)만 사용하면 술술 부는데 말이
야... 흐흐.. 자.. 이제 말해보실까? 네놈 패거리는 지금 어디있어?"

그러자 사내는 터져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크아....패거리는 없다."

"뭐라구? 이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나?"

그러면서 묵향이 부러진 발을 툭툭 차자 뼛조각이 근육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사내는 지독한 통증에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비명을 질러대며 발악했
다.

"크악! 날 죽여라. 악!"

"패거리는 어디있어?"

"으악! 모두 말할테니 제발.... 크으아악!"

진소추가 식은땀을 흘리며 애원하자 묵향은 발길질을 멈췄다. 그런다음 상대
가 정신을 어느정도 찾도록 시간여유를 준 다음 재차(再次) 부드럽게 물었다.

"패거리는 어디있어?"

"패거리는 없습니다. 소인 단독 범행입니다."

"힘도 좋군.. 여자를 둘이나 업고 어디로 갈 생각이었냐?"

"업고 가려는게 아니라......"

진소추가 머뭇거리는 걸 보고 묵향의 뇌리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으응? 설마..."

묵향은 약간의 진기를 손 끝에 힘들게 끌어모아 상대의 단전(丹田)을 탐색했
다.

"역시.... 이종(異種)의 진기(臻氣)가 들어있군. 더러운 녀석! 사내녀석이 할
짓이 없어서 채음보양(採陰補陽)이나 하다니...."

그러자 진소추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살려 주십시오, 대협."

사정하는 진소추를 향해 묵향은 의외로 부드럽게 말했다.

"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채음보양따위 수법을 써서 남의 진신내력(眞
身內力)을 갈취(喝取)해 봤자 나중에 이종의 진기를 화합(和合)시키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야. 왜 채화음적은 엄청난 숫자의 계집들을 통해 내력을 흡수할텐
데도 그 중에 초고수(超高手)가 한명도 나오지 못했겠냐? 다 이유가 있다구.
네놈의 기(氣)를 보아하니 지금은 그런대로 상관없지만 더 이상 흡수(吸收)하
면 공력 증대(增大)는 고사하고 목숨까지 내놔야 할거다. 알겠냐?"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내놔."

"예?"

"해약(解藥) 내놓으라구."

그자는 침상위에 놓여있는 작은 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저기 떨어져 있는게 해약입니다."

"저건 저 아이들에게 사용하려는 음약(淫藥) 같은게 아니고? 바른대로 말해,
안그럼 이번엔 왼쪽 팔뼈마저 부숴주겠다. 난 아주 인자한 사람이라서 목발은
짚을 수 있게 해주니 걱정마."

짐짓 인자한척 미소를 띄우며 부드럽게 말하는 묵향을 보고 이상하게도 온 몸
에 소름이 쭉쭉 끼치며 진소추가 말했다.

"예. 대협... 저건 미혼약(迷混藥)의 해약(解藥) 하고 음약(淫藥)을 섞어놓은
것입죠. 그편이 일하기가 편해서요..."

"그럼 음약이 들어가지 않은 해독제는 없냐?"

"없습니다. 그냥 놔두시면 내일 아침쯤 되면 상쾌하게 일어날겁니다."

"그래? 추호도 거짓이 없겠지?"

"어느 안전(眼前)이라고 감히 제가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흐음.... 좋아. 사실이라고 믿어주지. 자네 절검문 문하라고 했는데 사실이
냐?"

"아닙니다요. 소인이 어찌 그런 명문에 있겠습니까... 그냥 절검문의 이름만
팔고있습죠."

그러자 묵향은 웃음을 터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하... 좋아... 진짜 절검문의 제자(弟子)라면 살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는
데... 사파(邪派)라니 살려주지. 참...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자네 참 잘생겼
군."

"감사합니다...헤헤..."

"난 그게 별로 마음에 안들어."

"예?!"

그와 동시에 묵향의 발이 상대의 머리로 날아왔다.

퍽!

"크윽!"

묵향이 차고난 다음에도 지근지근 문지르던 발을 떼자 코뼈가 내려앉은 뭉개
진 코가 비참한 형상(形狀)으로 나타났다. 묵향은 그 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한결 보기에 좋군. 그래. 이왕에 시작했으니 좀 더 손을 봐주지."

팍!

"크아악!"

사내가 부러진 앞니 6개 정도를 ㅂ어내는 걸 보며 빙긋이 웃으며 부드럽게 말
했다.

"아주 좋아. 이정도면 내 취향(趣向)에 딱 맞군. 앞으로 내 근처에 얼씬거리
면 수족(手足)의 뼈다귀를 몽땅 다 부숴놓고 남은 이빨도 몽땅 뽑아버릴테니
까... 빨리 챙겨서 꺼져."

"예...예...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사내가 검을 허리에 차고는 벽을 짚고 헐레벌떡 사라지는 뒤모습을 미소띈 얼
굴로 바라보며 묵향이 나직히 말했다.

"꽤 재미있는 밤이군.... 저따위 놈에게 속아 술을 그렇게 퍼마시고 일찍이
잠에 떨어지는 걸 보면 아직도 모두 애숭이 신세를 면하지 못하지..."

그렇게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그만큼 울렸으니 사람들이
나올만도 하건만 한명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묵향이 하는 수 없이 밑에 내려
가 보니 점소이가 숨어서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묵향은 점소이의 뒷통수를 퍽
하고 때린 다음 젊잖게 말했다.

"방 문짝에 경첩이 떨어져 나가고 바닥에 피가 좀 묻어있으니 빨리 올라가서
깨끗하게 원상태로 만들어 놔. 알겠냐?"

"예... 예..."

점소이가 부리나케 2층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묵향이 나즈막히 혀를
차며 말했다.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군.... 그렇게 소란을 떨었는데... 아무도 콧배기도 안
비치니... 쯧쯧... 이만 올라가서 잠이나 조금 더 잘까... 아니면 명상이나
할까..."

다음날 아침 느즈막한 시간이 되어서야 남매들은 부시시 일어났다. 간밤에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숙취(宿醉) 때문에 다들 늦잠을 잔 것으
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묵향도 멍청한 3류 잡배 하나 때려잡은걸 가지고 자랑
스레 말할 사람도 아니었기에 일은 그렇게 넘어갔고 모두들 세면(洗面)을 한
다음 1층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도착하자 초희가 식당안을 두리번
거리는 것을 본 묵향이 물었다.

"왜그러냐?"

"진 대협이 혹시 계신가 하고요.."

"아. 그 친구라면 아침 일찍 떠났지. 너희들이 자고있을 때 일이 생겨서 먼저
가니 나중에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

묵향의 얼굴가죽 두꺼운 상세한 설명을 들은 초희는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말
했다.

"그래요?"

식탁에 모두들 앉았는데도 점소이가 콧배기도 안비치자 묵향이 버럭 소리질렀
다.

"이봐. 주문 받아라."

"예. 나으리."

점소이가 묵향의 외침에 어디서 나왔는지 쏜살같이 달려와 섰는데... 그 서있
는 모양새가 뭔가에 겁을 집어먹는지 부들부들 떨고있는지라 초희가 물었다.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나으리."

"그럼 숙취에 좋은 음식 좀 있으면 내 오거라."

"예."

주문을 듣자마자 점소이는 바람처럼 사라졌고 어제와는 달리 왜 저 아이의 태
도가 이상한지 당사자가 말을 안하니 모두들 제멋대로 상상할 뿐이었다.


늦은 식사를 한 다음 흑풍단이 있을듯한 위치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 포고문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잠시 길을 멈췄다.

<찬황흑풍단(찬황흑풍단)의 옥영진(옥영진)은 그 지휘관(指揮官)이라는 자리
를 이용해 막대한 재물(財物)을 횡령(橫領)했고 그것도 모자라 황권(皇權)을
넘보는 가증스러운 모반(謀叛)을 획책(劃策)한 바, 그 물증(物證)을 확보한
금의위에 의해 자택(自宅)에서 처형(處刑)되었다. 하지만 그의 잔당(殘黨)들
의 일부가 숨어있으니 흑색 갑주(鉀 )를 입은 무리를 보면 관(官)에 필히 연
락하라. 그 정보가 사실임이 확인되면 후사(厚賜)하겠다.
금의위 대영반 이세번>

그 글을 읽고 세상 모르는 촌민(村民)들이 한마디씩 했다.

"말세로군. 저렇게 높은 양반이 어쩌자고... 쯧쯧.."

"저런 녀석까지 썩어있으니 나라가 안되는 거야."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가증스러운 녀석이로군."

그걸 본 초우가 한심하다는 듯이 촌민들을 훑어 본 다음 말했다.

"자 빨리 출발하자. 내일 점심때까지는 백수강을 건너야 한다구."

"예."

* * *
애숭이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수소문(搜所聞)해서 쫓아가는 추격술(追
擊術)이나 정보(情報)의 분석력(分析力)에서 초우는 묵향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솔직히 그에게 묶여 개처럼 끌려가는 단 하나의 이유가 좀 더 빨리
흑풍단을 찾는데는 이 방법이 좋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으니까...

초우는 일행들을 몰아서 백수강을 건너 재빨리 이동한 결과 8일 후 흑풍단에
거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초우는 마지막으로 촌민
(村民)들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본 다음 일행들에게 돌아와서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했다.

"그들은 저기 보이는 와우산(臥牛山)에 숨어있는게 틀림없소. 이미 일단의 관
군들이 이 근처를 기점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다 와우산에서 천태산(天態山)쪽
으로 이동하면 청해성(靑海省)이 나오는데 아마도 그들은 아직 온전한 병력을
보유(保有)하고 있는 정서원수부의 관할지역 중에서 비교적 병력이 적은 청해
성쪽으로 이동할 생각인 모양이오."

"이 일대에 퍼진 관군(官軍)은 얼마나 된다고 하던가?"

"여태껏 촌민들이 알려준 복색(服色)이나 인원(人員)을 분석(分析)해보면 정
서원수부 관할 병력이 2만 정도... 그리고 정북원수부 소속이 3만 정도인 것
같소. 그런데 가까운 정서원수부에서 보낸 병력이 더 작은거 보면 아무래도
정서원수부에서는 흑풍단과 싸울 생각이 애시당초 없는거 같고.... 정북원수
부만 조심하면 될거 같소."

"참. 그런데 그들이 와우산에 있는게 확실한가?"

"그럴 가능성이 9할 이상이오. 그쪽으로 이동한 흔적은 미미하게 보이고 또
저 촌민의 말이 어제 나무하러 가면서 못 본 말발자국이 어지럽게 나있는 것
을 봤다고 하니...."

"하지만 말발자국만 보고 그들이 흑풍단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걸?"

"그렇긴 하오만 그 말발자국이 밤새 생긴것이니... 관군이 왜 위험을 무릎쓰
고 야행을 하겠소? 잘못해서 무공까지 강한 흑풍단에게 매복이라도 당하면 전
멸을 면치 못할텐데..."

"그도 그렇군. 하지만 와우산을 넘어 다른곳에 박혔을지도 모르잖아?"

"아니오. 와우산은 산세가 거칠어 이동하기 힘드는데 우회하지 않고 와우산
위로 올라간 것으로 미루어 험하긴 하지만 산길을 택해서 몰래 이동할 심산인
모양인데... 잘 갔다 하더라도 와우산 옆에 있는 우미산(牛尾山)이나 장천산
(長川山)쯤까지 밖에 못갔을거요."

여기까지 물어본 묵향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좋아좋아... 이제부터는 산길 이동이니 자네들의 도움은 필요 없
겠군. 본인도 그런대로 추적술은 자신이 있으니까... 발자국만 따라가면 될테
니... 자 이제부터는 나는 나대로 행동할테니 이 수갑이나 풀어주게나."

"그건 안되오. 그대가 첩자인지 그들에게 확인해 본 다음에...."

"할 수 없군."

뚝...

묵향은 손을 벌리자 썩은 밧줄처럼 간단히 수갑의 사슬이 끊겨버렸다.

"그... 그대는 혈도를..."

"네녀석이 잡은 혈도따위 푸는데 별로 시간도 안걸려. 자 내놔."

묵향이 손바닥을 내밀자 아연한 표정으로 초우가 물었다.

"예?"

"내 비수 내놓으란 말이다."

얼떨결에 내놓는 비수를 받은 후 쓱하고 비수를 꺼내는데 싸구려 검집과는 달
리 안에서 나오는 비수는 놀랍게도 묵빛 광택이 나는 것이 보통 비수가 아님
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모두들 묵향이 비수를 꺼내자 일순 긴장하여 모두들 묵향과의 거리를 재며 발
검(拔劍)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정작 놀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묵빛
비수가 갑자기 청색 화염이 올라오는 듯 강렬한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억!"

비록 말로는 꺼내지 않았지만 말로만 들어오던 어검술(御劍術)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들의 마음에서 투지(鬪志)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도저히
이길 상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묵향은 그 비수를 이용해서 썩
은 무우 자르듯 간단히 손목에 걸린 오철로 만든 수갑을 잘라낸 다음 비수를
품속에 집어넣은며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고있는 세명을 휙 둘러본 다음 말했
다.

"생각 같아서는 수갑을 채운 네 연놈들을 몽땅 죽여 없애고 싶지만 그래도 여
태껏 정이 든데다 빨리 흑풍단을 찾아준 성의(誠意)를 생각해 살려둔다. 만약
다음에 누구한테 내 혈도를 잡고 손목에 수갑채웠다는 말을 하기만 하면 혓바
닥을 뽑아버릴테니 자나 깨나 명심하도록."

그와 동시에 묵향의 신형은 말 위에 앉은 채로 튕겨 오르더니 무시무시한 속
도로 와우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순식간에 하나의 점이 되어가는 묵향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있던 초희가 말
했다.

"저거 어검술 맞죠?"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나도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라 뭐라 말할 수가 없구
나."

"무슨 경공술이 저렇게 빠르죠?"

"글쎄... 태산을 몰라보고 있었구나.... 아마 여태껏 그가 떠들어댄 말이 모
두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무림은 넓구나. 아버님의 말씀이 무림에는 지
금 드러나 있는 2황 5제 4천왕이 강하다고 하지만 산골짜기에 그보다 더 강한
자들이 은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었지. 나는 말씀을 믿지 않았었는데
사실이었구나...."

"하지만 오빠, 아무리 그래도 명문의 무공이 가장 강하다고 배웠었고... 또
후기지수(後期之手)들 중에서도 명문(名門)의 자제(子弟)들이 가장 강하잖아
요. 그런데 어째서 초야(草野)에 묻힌 사람이 더 강할 수가 있죠?"

"당연히... 되지도 않은 무공을 숨어서 수십년 익힌다고 될게 아니지. 아버님
말씀으로는 천운(天運)을 만나 기연(奇緣)을 얻는 수도 있다고 하셨지만...."

"기연이라면 어떤?"

"말대로 기이한 인연이지. 어쩌면 우연히 은거기인(隱居奇人)을 만나 그의 제
자가 될 수도 있고... 또 기인의 무공 비급을 얻을수도 있겠지. 또 영약을 얻
을수도 있고... 그렇지만 첫째가 가장 현실성이 있고 나머지는 아냐. 보통 비
급이라면 정상적으로 기록한 경우는 없고.. 대부분이 암호(暗號)나 뭐... 말
뜻을 축약(縮約)하거나 빙빙 돌려놔서 그 오의(悟意)를 깨닫기가 무척 힘들거
든. 그렇기에 일정한 바탕이 되기 전에는 비급을 얻어도 그건 그냥 종이조각
에 불과한거야. 또 보통 사람이 영약따위 먹어봐야 보신(補身)이나 될까...
무공과는 상관없으니... 첫 번째가 가장 현실성이 있겠지."

"과연 은거기인의 눈에 띄어 그에게 무공을 전수(傳受)받는게 가장 현실성이
있겠군요. 하지만 그렇게 강한 사람이 은거(隱居)를 할 리가 거의 없잖아요.
안그래요?"

"아니야. 여태껏 무림에는 수많은 명문 거파들이 나타나고 또 사라졌지. 아마
사라진 문파들의 후손일지도 모르고... 또 일부 명문에서 파문당한 고수들도
있고, 심한 경우... 무림공적(武林共敵)으로 몰려 숨은 자도 있잖냐? 아마 묵
향이란 사람도 사문이 있다고 했으니... 어떤 명가에서 쫓겨난 반도 정도겠
지. 아마도 사문에서 쫓겨난 다음 어디 산골짜기에 숨어서 죽자고 무공을 익
혔는지도 모르고...."

"글쎄요... 그의 말로는 파문은 아니라던데...?!"

* * *


자그마한 산속에 세워진 정사(靜舍). 얼핏 보면 근방의 유려(流麗)한 경치(景
致)를 구경하기 위해 대갓집에서 세운 듯 제법 운치를 가진 자그마한 집이다.
그 정사의 앞쪽으로는 수려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자연 경관이 펼쳐져있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그 낭만과 운치를 간직한 정사를 감싸고 있는 기운이 예사롭
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사의 30장(90M) 밖에는 10인 정도의 인물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살벌한 안광(眼光)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무
형(無形)의 기운만으로도 아무리 무공에 문외한이라도 무시무시한 고수임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극강(極强)의 기운을 뿜어내는 인물들이다.

이런식으로 자신의 기를 밖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그들이 암습 따위의 얄팍한
술수를 익힌 자들이 아닌 정면대결(正面對決)을 위해 그 무공을 익힘에 있어
정도(正道)를 걸어온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가
장 손쉬운 자리는 아마도 비무대(比武垈) 위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아마도 누군가의 호위(護衛)를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이런 무식
할 정도로 정직한 무예(武藝)를 익힌 자들을 써먹을 곳은 거의 없기 때문이
다. 그런데 누군가의 호위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극강한 기운을 뿜는다는게 문
제라면 문제라고 할까....

하지만 더욱 큰 의문점은 그들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거의 절반에 가까
운 수는 숨이 막힐 정도의 마기(魔氣)를 내뿜는 반면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정파의 고수들도 지니기 어려울 정도로 정순(靜純)한
기운을 갈무리한 것을 보면 더욱 아리송해진다. 왜 이렇게 물과 불처럼 어울
릴 수 없는 자들이 한자리에서... 그것도 한채의 정사를 호위하며 눈에 불을
켜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정사 내부를 보면 대단히 소박하지만 소유주(所有主)의 품격(品格)을 나타
내는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거의 장식물이 없을 정도
로 텅 빈 실내지만 몇가지 준비된 필수품... 예를 들어 탁자라든지.. 의자 따
위 같은 것은 얼핏 보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하지만 자세히 감정을 해보면
뛰어난 장인의 화려한 솜씨가 돋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그마한 탁자에는 찻잔이 놓여져 있었고 2명의 젊은이가 차를 들면서 담
소를 나누고 있었다.

"껄껄... 처음에 만날때는 몰랐었는데.... 5년동안 한번씩 얘기를 나누다 보
니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참 서로가 많은 부분이 통하는 점이 있구려."

그러자 그 청년의 앞쪽에 앉은 청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청년
의 피부 색은 기괴하게도 자색을 띄고 있었고 은은한 마기를 자연스럽게 흘리
는 것이 아마도 촌민들이 봤다면 귀신이라도 만난 줄 알것이다.

"벌써 그렇게 되었소? 그 사건이 있은 후 사후(事後) 처리를 위해 만난 것이
발단이 되었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흐른지는 몰랐구려. 그리고 이번에 본교
(本敎)에서 처리하기에는 껄끄러웠던 놈들을 공적(共敵)으로 몰아 없애줘서
고맙소이다."

"뭘요... 그대도 껄끄러운 애숭이들 처리에 도움을 줬으니 당연한 것이지요.
요즘 본맹(本盟)을 우습게 보는 것들을 귀교(貴敎)처럼 공개적으로 없앨수도
없으니 난처한 노릇이지요. 그렇다고 몰래 암살을 하자니... 본맹이 의심을
받을게 당연하고... 난감(難堪)했었소이다. 참. 그런데 내 보고받은 바로는
묵향이 살아있다던데..."

그러자 마기를 풍기는 젊은이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려울테지만 사실이오."

"흐음... 그때 완전히 없애버린줄 알았건만... 안타까운 일이오."

"그러게 말이오. 이거 완전히 잠자는 호랑이의 수염을 뽑은 꼴이 되었으니...
딱한 노릇이외다."

"악독한 놈의 손에 두 손녀가 죽은것만 해도 억울한데... 그런놈이 살아서 돌
아다닌다니.... 하여튼 전율(戰慄)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놈이오. 그놈을 이
번에는 완전히 없애버려서 후환(後患)을 제거해야 하오."

"글쎄 말이오. 하지만 예전에는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쯧쯧..."

"왜 그러시오? 일단 없애기로 한다면 믿을만한 수하(手下)를 시켜 살인(殺
人), 강간(强姦) 등을 시킨 다음 모두 그놈에게 뒤집어 씌워 무림공적(武林共
敵)으로 선포(宣布)하고 그녀석을 주살(誅殺)하면 간단할텐데?"

"예전이라면 그게 통하겠지만 지금은 너무 커버렸소."

"왜요? 그는 언제나 혼자서 행동할텐데.... 예전에도 그랬잖소? 그덕분에 전
에도..."

그러자 마기를 풍기는 젊은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휴... 그전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오. 본좌가 멍청하게도 기억을 잃은 그녀
석을 끝장 내겠다고 천랑대와 염왕대를 보냈는데.... 그녀석들이 묵향편에 붙
어버렸소."

"그럴수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결과외다. 그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면 몰라도... 기억을
찾았다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지니 말이오. 그는 아직도 본교의 인물이고...
또 그의 직위(職位)도 살아있소. 그러니 그 자신이 본교의 율법(律法)을 들고
나온다면 이것은 문파간의 투쟁이나 반도(叛徒) 처리의 문제가 아니오. 다만
교내의 권력(權力)다툼이 된다 이말이외다. 그러니 수하들은 모두들 각자 그
권력암투의 도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고 십중팔구 그들
은 강자(强者)의 편에 붙을 수밖에 없소이다. 본교 내의 모든 권력은 약육강
식(弱肉强食)의 율법을 따르기 때문이오. 만약에 그가 예전의 장인걸처럼 새
로운 문파라도 만든다면 오히려 간단한 일이지만 그가 본교의 부교주란 점을
계속 내세운다면 본교에서 고수들을 투입(投入) 할수 없소. 고수들을 보내봐
야 그자가 나보다 강하다는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에... 그가 그점을 내
세운다면 모두들 그의 편에 설 수밖에 없소."

"흐음.... 극강을 자랑하는 마교도 여태껏 그 강함을 지탱해준 율법 때문에
곤란을 겪는 일이 생기는군요. 그럼 본좌가 나서서 그 일을 처리해야 한단 말
이오?"

"그래 주실 수 있겠소? 하지만 그놈이 거느린 세력은 왠만한 문파쯤은 한시진
도 안되어 가루로 만들 정도로 강하오. 그정도 힘을 겨우 맹내(盟內)의 힘만
으로 처리하긴 힘들거외다."

"흠..... 그건 본좌도 알고 있소. 어떤 뚜렷한 명목이 있어야 그 멍청이들을
설득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참! 문제는 그놈 하나니 살수를 고용하면
안되겠소?"

"하지만 그정도의 고수를 처리할 만한 살수가 있겠소?"

"요즘 맹위를 떨치는 살수집단(殺手集團)이 하나 있소이다. 그들에게 청부(請
負)를 해볼까 하오. 일단 공통의 적이니 그 비용은 서로 반씩 부담함이 어떻
겠소?"

"좋소이다. 그런데 그 살수집단이라면?"

"아마 그대의 짐작대로일거요. 요즘은 살수집단 중에서 흑월회(黑月會)의 솜
씨가 제일 좋다고 들었소."

"과연.... 하지만 소문대로 그들의 실력이...."

"클클...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살수들의 생명은 정보(情報)라고 봐야 하오.
개방( 幇)과 무영문(無影門)의 할망구한테 의뢰를 해놨으니 그의 겨드랑이
털 수까지 알려줄거요. 그만한 정보를 가지고도 어쩔 수 없다면.... 비밀리에
처리하긴 힘들거외다."

"흠... 그렇다면 본좌도 삼비대에 연락해서 쓸만한 정보가 있으면 그대에게
넘겨주겠소. 하지만 그놈의 행태(行態)가 희한해서 아마도... 외부에서 포착
해서 암습(暗襲)하기는 힘들거외다."

"행태라뇨?"

"보통 느지렁거리면서 다니다가 한번씩 경공술을 써서 이동하는데... 그 속도
가 정말이지 무식할 정도로 빨라서, 완전히 몸을 드러내고 뒤쫓아도 못따라가
는데 어찌 숨어서 미행을 하겠소?"

"쯧쯧... 그런 문제가 있구료."

"거기다 예전에 그의 수하로 있었던 놈들의 말을 들어보면 밖에 나가면 거의
잠도 안 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본거지에 있을때는 한 서너시간은 자는 모
양이오. 그러니 그놈을 덮칠 곳은 본거지 뿐이다 이말이오."

"그렇다면 참고로 알아둘 만한 그놈의 약점 같은 것은 없소?"

"글쎄요... 그놈의 특기는 강기(剛氣) 종류지만 공력이 비교적 적게 드는 어
검술 종류를 더욱 좋아한다는 사실... 그렇기에 떼거리로 덤벼드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을거요. 그리고 아마도 그놈은 본교가 자랑하는 흑미륵신공(黑彌勒
身功)을 익혔을 테니 왠만한 공격으로 결정적인 타격은 줄 수 없소. 하지만
흑미륵신공 자체가 금강불괴(金剛不壞)처럼 외부에서 타격을 막는게 아니라
내부에서 충격을 분산(分散)시켜 흩어버리는 것이니... 아마도 장법이나 권법
같은 것 보다는 무기를 이용한 공격이 타격이 클거요. 하지만 흑미륵신공 자
체가 혈관(血管)과 혈도(穴道), 뼈를 무쇠처럼 단단하게 해주니... 그도 장담
은 하기 어렵소이다. 아마도 선택된 살수는 무쇠도 손쉽게 자를 수 있는 신병
이기(神兵異器)를 사용해야 할거요."

* * *

"그렇지... 그때 한번 보니 그놈의 무공(武功)은 상당히 특이했었소. 보통 귀
교의 무공은 강대(强大)한 공력(功力)을 바탕으로 하는 장력(掌力)이나 강기
류(剛氣類)가 주무기인데 반해 그자는 검을 이용해서... 그것도 최소한의 공
력만을 이용해서 적을 없애는 아주 실용적인 검법을 구사하는 것 같더군."

"그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거외다. 보통 강한 위력에만 의존하는 놈들인 경우
떼거리로 덤비면 나중에는 공력이 고갈(枯渴)되어 제풀에 뻗게 되어있는데...
아마 그놈을 제풀에 뻗게 만들려면... 본교 세력의 절반을 잃을 각오까지 해
야 할 판이오."

"그렇게까지나..."

"아마 그게 맞을거외다. 그놈은 아주 실리적인 놈이라... 거기다 우리와 정면
으로 싸워야 할만한 약점 따위도 없소. 그러니 치고 빠지는 식을 계속한다면
그놈의 경공술은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니... 어디포위(包圍)가 되겠소? 그냥
계속 쫓으면서 놈의 공력이 고갈되기를 기다려야 할텐데?"

"흐음.. 그렇군. 그럼 예전과 같은 방법을 한번 더 써보는 것은 어떻소?"

"예전과 같은 이라면?"

"혹시 그놈이 아끼는 사람은 없소?"

그제서야 감잡은 상대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오.. 맞소. 그놈이 아끼는 양녀(養女)가 하나 있소. 그 아이를 인질(人質)
로..."

"아니오. 인질만으로 해서는 큰 효과를 보기 힘들거요. 귀교에는 사람의 마음
을 조종하는 술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흐흐흐... 거 참 모르시는게없구려. 마령섭혼심법(魔靈攝魂沁法)이 있소이
다. 그걸 아주 교묘히 이용하면 될지도 모르겠군."

"껄껄껄... 초고수에게 사용할 것도 아니고 그냥 어린 계집아이만 사술(邪術)
에 거는거니 아마 손쉬울거요. 그놈이 아이를 구한답시고 쳐들어오면 치열한
접전의 와중에 그 아이를 이용해서 암습을 하게 만든다면..... 하하하...그땐
우리가 원하는 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거요."

"하지만 그놈이 들은척도 안한다면? 어쩌면 능히 그럴수도 있는 놈이니 하는
말이오."

"그러면 할 수 없이 계획대로 살수를 보내는 것으로 합시다. 쓸데없이 먼저
살수를 보내어 경각심(警覺心)을 일깨울 필요는 없으니 말이오."

"좋소이다."

* * *

"이상한 일이군."

"뭐가요?"

"왜 말들을 다 버리고 갔지?"

"관군들이 지키고 있으니.... 저건 관군들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어.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까지 이어지던 흑풍단의 말발자국
이 없어졌다. 이건 그들이 말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경공술을 쓴거야. 그리고
저기에 쌓여있는 흑색갑주들을 봐라. 일부러 갑주까지 다 벗어렸다는 것은 이
제부터는 정면대결 보다는 도망치는 것에 더욱 주력하겠다는 뜻이지. 왜...
그렇게 작전을 바꾼거지?"

"혹시 그때 만났던 묵향이란 선배를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맞아요. 그 선배의 무공수준으로 보아... 잡배는 절대 아닐꺼고 어떤 단체의
수장(首長) 정도라면 그의 단체에 포섭(包攝)되었을 수도 있지요. 그러면 목
적지가 생겼으니 쓸데없는 전투를 벌이기 보다는 조용히 도망치려고 들겠죠."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조심해라. 관군들 외에도 제법 고수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으니까."

"예."

초우 일행은 마을에서 말을 다 팔아버린 후 경공술을 이용했다. 산길을 달리
는데는 말을 이용하는 것 보다 경공술을 사용하는게 더 낫기 때문이다. 때문
에 조용히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아직 무공이 떨어지는 여동생들 때문에 골치
였다. 아마도 이걸 염려한 묵향이 혼자서 앞서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속이 터
졌지만 그래도 여동생들이라 버려놓고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누이
동생들을 독촉하며 길을 재촉한 결과 묵향과 헤어진 그날 저녘때 흑풍단이 버
리고 간 말들을 호위하고 있는 관군들을 만난 것이다. 관군들의 행동이 예상
외로 빠름을 감지한 초우는 아무래도 추격의 전문가 쯤 되는 무림인들이 관군
들을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기에 그 누이동생들에게 주
의를 준 것이다.

이들은 밤을 무릎쓰고 3시간 정도 산길을 달리다가 더 이상 어둠 때문에 흔적
을 쫓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야숙(野宿)을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추
격을 시작했다. 추격을 시작한 후 4시간 정도 되었을까 희한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8마리의 개(犬).... 아마도 관군에서 기르는 군견인 모양인데... 그들의 입에
거품이 물려 있었고 모두들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있었다. 아직 4마리의 개가
살아있기에 그들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들 또한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은 광기(狂氣)에 가득찬 채 사람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아마도 미친 개들한테 물렸는지 여러명의 부상자들이 있었다. 일부 병사들은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고 일부는 미친 개들을 공포어린 눈으로 죽인다고 난리
를 치고 있었다.

이때 유독 그중에 3명의 인물들이 초우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각기 관
군들과는 달리 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난리통에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관군들에게 협조하는 무림인들인 모양이었다. 보통 돈이 궁한 무림인
들 중의 일부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다행이라면 그런 인물들 중에는 아주 뛰어난 고수는 없다는 점인데...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 조심은 해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저 들개들은 뭐죠?"

"들개들이 아니다. 목에 끈이 묶여 있잖아. 관군들이 사용하는 군견(軍犬)이
다. 아마도 흑풍단이 어떤 약물을 길에 뿌린 모양이야."

"약물을 뿌린다고 개가 미쳐요?"

"그건 모르지. 이럴게 아니라 빨리 가자. 흔적 남기지 않도록 조심해라. 저
난리가 나는 걸 봐서 아마도 저들이 제일 앞서서 추격하는 놈들인 모양이니
까."

"예."

초희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초연은 그래도 약간의 무림 경험은 있는지라 자신
이 생각하는 우려할 만한 점을 말했다.

"오빠. 그러지 말고 저들 뒤로 따라가는건 어때요? 함정이라도 있다면..."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럼 조용히 그들을 따라간다."

과연 그 세명은 추격의 전문가들이었다. 개들이 죽어버린 후에도 그들이 앞장
서서 아주 미세한 흔적들을 더듬으며 300여명의 관군들을 인도했다. 그러면
관군들은 뒤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10장(30M)간격으로 하면서 그들
의 뒤를 따라갔다. 아마도 그 뒤에는 관군의 주력부대(主力部隊)가 따라올지
도 모른다. 초우는 일부러 그 뒤를 따라가며 그들이 묶어놓은 빨간 천을 풀어
다른 샛길쪽으로 연결해뒀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6개 정도만 연결한 후 다
시 돌아와 그 샛길을 즈음해서 나 있는 관군의 발자국도 모두 없애버린후 뒤
따르면서 모든 표시들을 없애버렸다.

이렇게 4시간 정도 갔을까.... 갑자기 앞에서 화살 10대가 동시에 날아와 추
격하던 무림인들 3명과 뒤따르던 군사들의 몸통에 맞았다. 그들은 그 즉시 고
꾸라졌고 모든 화살의 앞부분이 등뒤까지 튀어나온 것이 그것을 쏜 사람의 공
력(功力)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화살이 날아오자 마자 모두들 나무나 바위
등의 뒤에 숨었지만 더 이상의 행동은 없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쓰러진 사람
들을 살펴보기 위해 조심조심 일어섰다. 아마도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화살을
맞은 모든 사람들은 즉사(卽死)한 모양이었다. 이때 숲속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더이상 추격하면 모두 다 죽여버릴테니 알아서 해라. 모두 다 꺼져!"

희망을 가졌었던 무림인들도 다 죽어버렸고... 상대는 얼마 전까지 관에서 최
강을 가랑하던 찬황흑풍단이다. 거기에 상대는 이쪽을 알지만 이쪽은 상대가
어디에 숨었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병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명이 뒤로 도망치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며 모두들 뒤를 향해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관군들이 사라지자 초우는 이때라고 생각했다. 그는 경공술을 이용해 앞으로
쏘아가가 시체들이 있는 곳에 당도한 다음 신형을 멈추고 말했다.

"저는 초씨세가의 초우란 사람입니다. 그대들이 죄도없이 쫓기는 것을 알기에
도와드리려고 먼길을 달려왔으니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자 의외로 상대의 답은 손쉽게 떨어졌다.

"좋소. 그대의 동생들과 함께 오시오."

'동생들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초우는 동생들을 불러 앞으로 나갔고 그 앞에는 10명의 전포(戰袍)를 입은 무
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각기 활을 휴대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이들이
방금 활을 쏜 인물들인 모양이었다.

"그대가 초우인가? 나는 임충이라고 한다네. 대장한테서 자네 얘기 들었어.
젊은 나이에도 꽤나 유능하다던데... 참. 관지 대장이 있는 곳으로 가세나."

초우는 경공술을 이용해 따라가며 임충에게 물었다.

"지금 흑풍단을 이끄는 분이 관지 대장이란 분입니까?"

"그렇지. 나중에 자네도 만나보면 알겠지만 대단한 분이야. 지금까지 우리들
이 버텨온 것도 그분의 덕이지."

"묵향이란 선배는 여기 계십니까?"

"아니. 일이 있다면서 먼저 떠났어. 제길... 예전에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아
예 저 먼 하늘이더군. 그때는 꼭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었는
데..."

"그렇게 대단한 분인가요?"

"그렇지. 내가 이상형으로 삼는 분이라고 할까... 무공도 고강하지만 유식하
고... 또 마음씀씀이는 얼마나 인자하고 부드러운데... 예전에는 술도 자주
마셨었는데..."

'인자하고 부드러워? 유식하다고? 전혀 아니던데...'

"저... 그분 책은 많이 보셨나요?"

"응. 관지대장의 말로는 황궁무고에 있는 책이란책은 몽땅 다 읽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단장이 예전에 그에게 뛰어난 선생들 몇 명을 붙
여줬었는데... 글공부도 아주 폭넓게 한 모양이야."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떨떠름한 얼굴로 초우가 되물었다.

"그래요?"

"자네도 만나 봤었다니 알거아냐? 무식한 무림인들 하고는 뭔가 분위기가 틀
리지 않던가?"

"저는 안목이 짧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대장이 바빠서 그런지 나도 얼마 얘기를 못나눴거든."

3시간 정도 달려가자 흑풍단의 본대가 있었다. 모두들 나무기둥에 의지해 쉬
던지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무리들도 있었다. 임충은 그들을 데리고
한 인물 앞으로 다가갔다. 그 인물은 청색 전포를 입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젊은 무사였는데 오랜시간 쫓긴 탓인지 다듬지도 못한
수염이 숭숭 돋아있었다. 그리고 다부진 턱선과 피로한 듯한 안색(顔色), 시
원하게 솟은 콧날....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강인한
정신력을 드러낸 강렬한 안광(眼光)을 내뿜는 두 눈... 한마디로 패기(覇氣)
가 넘치는 뛰어난 무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예상외로 상대가 아주 뛰어난 인물임을 자각하며 초우는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인사를 하면서도 누이동생들이 이 근사한 상대를 앞에 두고 정
신을 못차리는 것을 눈치채고는 정신을 차리게 옆구리를 찔렀다. 서로간의 인
사가 끝난 후....

"초씨세가의 초우라 합니다. 직접 보니 더욱 뛰어난 분이시군요."

"허허.. 과찬의 말씀을.. 그대의 말은 묵향 부교주에게 들었소."

"예? 부교주라니요?"

"그는 얼마 전까지 본단(本團)의 백인대장으로 있었던 대단히 뛰어난 무인이
오. 하지만 그때 그를 알게 되었을때도 화경(化境)에 준하는 무공을 소유한
인물이 겨우 백인대장 노릇이나 하는게 이상하게 생각되었었소."

"방금 화경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화경이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 이전의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소. 그러니 자신이 익혔던 모든 무공 또한 잊었었지요. 그래서 단장님
이 그를 황궁무고에 들여 무공을 익히게 한 것이었는데.... 그의 무공을 직접
몽고 전투때 봤었지만 정말 대단했었소. 그런데 이번에 어떤 계기로 기억을
되찾았다고 하더군요. 그의 본래 위치는 무림의 마교란 단체의 부교주라고 했
소. 자기가 몇가지 일을 벌이는데 날 보고 도와달라고 하더군. 사실 우리들도
갈곳이 없던 차고 해서... 그의 일에 동참(同參)하기로 했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저.. 마교란 단체를 들어보셨습니까?"

"난 잘 모르오. 난 관부에서 자라나 그곳에서 무공을 익혔고... 또 들리는 소
문만으로 상대를 평가할 정도로 속좁은 인간도 아니오. 사실 내가 직접 본 묵
향이란 인물은 정파라 자처하던 인물들에 비해 뒤질게 없었기 때문이오. 그리
고 그는 지금 마교하고 좀 껄끄러운 관계인 모양이고 별로 좋지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다음에 만나면 괜히 먼저 마교에 관계된 말을 꺼내지
마시오. 어쩌면 그대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니까..."

"예?"

"이번에 만나보니... 기억을 되찾은 다음 사람이 조금 변했더군요. 하지만 솔
직담백(率直淡白)한 것은 여전하기에 그를 믿기로 했소. 그의 무공은 지금 현
경(玄境)의 수준이라 했소. 그러니 그의 신경을 건드려 좋을게 없다는 말이
오."

"그럴 리가...."

초우는 경악했다. 내심 묵향이 마음껏 어검술을 쓸때부터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놀라움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었다. 현경이란 위치가
그냥 말로 한다고 올라가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어려운 위치기
에 기나긴 무림 역사에도 단 한명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묵향 선배도 없는데... 그럼 어디로 갑니까?"

"섬서성(陝西省)에 위치한 중경(中京=지금의 서안시;西安市) 서남쪽에 태백산
(太白山)이란 산이 있는데, 그곳에 세워진 흑룡문(黑龍門)이란 문파가 있다고
했소. 그리로 오라고 했으니... 조심해서 가봐야지요."

"참. 오다가 미친 개들을 봤는데... 그건 어떻게 한겁니까?"

"그건 묵향 부교주가 주고 간 광견분(狂犬粉)이란 독을 사용한 것인데 그걸
땅에다 뿌려놓으면 개가 냄새를 맡는다고 킁킁거리다가 콧속으로 들어가면 콧
속의 습기에 녹으면서 발작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지요. 아마도 사람한테도 효
과는 있겠지만 사람이 어디 땅바닥에 킁킁거릴 일이 있겠소? 다만 물에 잘 녹
기 때문에 비만 오면 끝난다는 단점(短點)이 있다고 써져 있더군요."

* * *


묵향은 지금 별로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길을 갈 때 누군가
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좋은 기분이 될 리가 없을 것이다.

'어찌한다... 기분도 꿀꿀한데... 재미삼아 한번 족쳐봐?'

누군가가 뒤쫓는 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흑풍단과 헤어진 다음 홍원(紅原)이
라는 도시에 들어선 다음부터다. 홍원은 사천성(四川省) 북쪽에 있는 제법 큰
상업도시로 감숙성(甘肅省)으로 들어서는 관도(官道)상에 위치한 사천성과 감
숙성간의 물류유통(物類流通)의 중심(中心)이었다.

묵향은 일부러 조금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선 다음 다시 오른쪽에 나있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런다음 먹이가 걸려들기를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은 별
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먹음직한 먹이감이 바로 거미줄을 향해 돌진해왔기
때문이다. 묵향은 골목안으로 뒤따라온 거지 2명의 혈도(穴道)를 재빨리 점혈
(占穴)한 다음 음흉한 미소를 띄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시작했다.

"호... 개방( 幇)의 나으리들이 왜 나를 따라다니지?"

그러자 점혈당해 쓰러진 두명은 익히 상대의 무서움에 대해 들었는지라 식은
땀을 흘리며 변명해댔다.

"오해십니다요.. 나으리. 저희들은 동냥을 받기위해 이리 들어온 것 뿐입니다
요."

"쯧쯧... 아니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좋게 말로 할 때 털어놔. 응?"

"사실입니다요. 저희들은 그냥 동냥을 받기위해 이리 들어온 것 뿐입니다요."

"그으래에..? 난 오늘 내 평생 본것보다 더 많은 거지들을 봤다구. 그게 결코
우연(偶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묵향이 그들의 품속을 뒤지자 곧이어 품속에서 세밀히 그려진 묵향의 초상화
가 나왔다. 그 초상화에는 몇마디 말이 써져 있었다.

< 마교(魔敎) 부교주(副敎主) 묵향(墨香)
단독행동(單獨行動)을 좋아하며 검은색의 아무 장식(裝飾)이 없고 칼날받이
조차 없는 특이한 모양의 기형검(奇形劍)을 사용함.
이 자의 무공은 화경을 넘어선 상태로 대단히 사악(邪惡)한 위험인물(危險
人物)이니 절대 충돌은 피할 것.
이 자의 위치가 발견되는 대로 총타에 최우선적으로 보고할 것.>

묵향은 그 초상화를 쓰러져있는 거지들의 눈앞에 들이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건 내 얘기 같은데...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안들을 것 같군."

묵향은 우선 놈들이 자살하지 못하도록 아혈을 제압해버린 다음 말했다.

"말할 생각이 있으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라구. 먼저 뭘 해볼까... 분근착골
(粉筋鑿骨)은 별로 재미가 없고... 흠... 맞아."

한 거지의 윗도리를 벗긴 다음 때가 잔뜩 묻어있는 가슴을 부드럽게 만지면서
말했다.

"아주 예쁜 갈비뼈를 가지고 있군. 이걸 하나씩 뽑으면 아주 재미있을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면서 제일 밑에 위치한 갈비뼈로 손가락을 박아넣어 갈비뼈를 쥐었다. 그
런다음 아주 천천히 힘을 가해가자 공포에 질린 눈으로 거지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도 생으로 갈비뼈를 뽑겠다는데야 항복할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초상화에 써진 것 보다도 더욱 사악한 놈이군. 제기랄... 잘못걸렸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그놈의 아혈만 풀어주면서 속삭이듯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가 혀를 깨물고 자살한다면 저기 남은 친구는 더욱 처참하게 당할테니
잘 생각하라구.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하나뿐이야. 홍원 분타가 어디있지?
뭐 싫다면 대답 안해도 상관없어. 여기 거지들이 아주 많은 것 같으니까 하나
하나 잡아다 주리를 틀어보면 누군가는 실토를 하겠지."

"홍원 동남쪽에 보면 관제묘가 있는데... 그곳입니다요."

"흠... 좋아좋아. 안내해. 길찾기는 성가시니까."

두 거지는 그 즉시 묵향이 혈도를 완전히 풀어줬으므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묵향을 처다봤다.

"끌끌... 딴 생각 하지마. 전 무림을 뒤져봐도 나보다 경공술이 빠른 놈을 찾
기는 어려울테니까. 일단 도망치다 잡히면 다리뼈를 부순다음 길안내를 시킬
거야. 그것도 재미있겠지?"

사색이 된 두 거지가 묵향을 안내해서 개방의 홍원분타에 나타난 것은 1시간
후였다. 그들이 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고참 거지가 으르렁거렸다.

"정보수집은 안하고 왜 돌아오냐? 헉!"

모두들 거지들을 뒤따라 들어오는 묵향을 발견하고 경악했지만 정작 묵향은
평안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와서는 그들이 굽고있는 멧돼지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흐흐흐.. 배고프던 차에 잘 되었군. 역시 나는 먹을 복이 있단 말이야."

"네... 네놈은 누구냐?"

"다 알고 왔으니 나를 모르는 척 할 필요는 없어. 이봐, 여기 분타주가 누구
냐?"

"........"

"좋게 말할 때 나와. 나도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식사하고 싶지는 않으니
까..."

초상화에 써진대로 진짜 화경의 고수라면 여기 모여있는 10여명이 조금 넘는
수로는 그야말로 변변한 대항조차 못해보고 도살당할것이 분명하다. 개방은
30만이 넘는 인원을 가진 거대방파지만 다만 한가지 고수라고 부를만한 인물
들이 극소수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 많은 인원을 가지고도 무림의 패
권에 도전한 적이 한번도 없이 정보만을 취급하는 소식통으로 존재하는 이유
가 여기 있었다. 그리고 개개인의 무공이 뛰어나지 못하기에 고급정보를 획득
하는데도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는 뛰어난 첩보능력과 잠입술을
가진 많은 고수를 거느린 무영문에 뒤지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묵향이 품속에서 시커먼 비수를 하나 꺼내 익은 부분을 잘라서 씹어먹기 시작
하는데 뒤에서 주춤주춤 한 거지가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본인이 홍원분타주입니다."

"흠. 그래? 쩝쩝.. 고기가 질기군... 나를 감시하라는 명령은 총타에서 내려
온 거냐?"

"예."

"그럼 네놈이 총타에 연락해라. 감시를 하는건 좋은데... 내 눈에 안띄게 하
라고 해."

"예? 무슨 말씀이신지..."

"쩝쩝... 거지들이 내 뒤를 따라다니는 것은 별로 기분 좋은게 못되지. 나는
네놈들에게 동냥 줄 돈도 없다구. 감시를 하고싶으면 멀리서... 내 눈에 안띄
는 곳에서 하란 말이야. 감시를 하는 것을 두고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은
데... 만약 앞으로 내 눈에 띄는 개방 거지가 보이면 뼈다구를 분질러 버릴거
야. 알겠어?"

"예. 예."

"여기 술은 없냐? 쩝쩝.."

"여기 있습니다요."
옆에 있던 거지가 술이 든 호로병을 내밀자 그 거지의 머리를 딱 소리가 나게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역시 멧돼지에는 술이 있어야... 빨리 따뤄. 이녀석아. 네놈이 입을 가져다
댔던 건데 거기다 나를 보고 입을 대란 말이야?"

묵향은 멧돼지 고기와 술을 배터지게 먹은 다음 관제묘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명심해. 눈에 안띄게 감시하라구. 어쨋든 오늘 잘 먹었다. 그리고 이 하고
빈대, 벼룩 같은 것 좀 잡아라. 이 더러운 놈들아."

묵향은 공력을 운용하여 몸속에 숨어든 못된 벌레들을 태워 죽여버린 다음 경
공술을 이용해 쏜살처럼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버린 묵향을
바라보며 한 거지가 말했다.

"참 내. 더러워서... 거지것도 뺏아먹는 놈이 있군."
그러자 분타주가 말했다.
"아서라. 저 경공술만 봐도 그의 무공이 어느정도인지 알겠다.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건 그렇고 저렇게 위험한 인물을 왜 감시하라는 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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