查拉图斯特拉如是说 3部 세 가지 악에 대하여

단밤이 | 2024.01.04 19:36:17 댓글: 0 조회: 223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3728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세 가지 악에 대하여
1
꿈속에서, 오늘 아침의 꿈에서 나는 어떤 곶(串)에 서 있었다. 세계 저편에서 나는 저울을 들고 세계의 무게를 재고 있었다.
오, 아침놀이 너무 너무 일찍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벌겋게 달아오르며 나를 깨웠다. 질투심이 많은 아침놀! 그것은 언제나 내 아침의 꿈이 타오르는 것을 질투한다.
시간이 있는 자에게는 잴 수 있는 것, 유능하게 저울질하는 자에게는 달 수 있는 것, 날개가 억센 자에게는 미루어 알 수 있는 것, 내 꿈의 세계는 이렇다.
내 꿈은 대담한 항해자이자, 반은 배고 반은 선풍이며, 나비처럼 과묵하고 매처럼 성미가 급하다. 이 꿈은 오늘은 무슨 일로 세계를 (저울에) 달아볼 인내심과 여유를 갖게 되었을까!
모든 '무한한' 세계를 비웃는 나의 지혜, 웃으면서 깨어 있는 낮의 지혜가 은밀히 내 꿈에게 말한 것일까? 지혜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힘이 있으면 수(數)도 여주인이 되고, 그 수는 보다 큰 힘을 지닌다."
나의 꿈은 얼마나 확신을 갖고 이 유한한 세계를 바라보는가? 새것과 옛것에 대한 호기심도 없이, 두려워하지도 않고 애원하지도 않으며.
마치 동그란 사과가, 벨벳처럼 부드럽고 시원한 껍질을 가진 황금사과가 내 손에 쥐여 있는 것처럼, 세계는 그렇게 나에게 주어졌다.
마치 나를 향해 휘어진 나무가, 여행에 지친 길손이 몸을 기대고 발을 얹을 수 있도록 휘어진 것처럼, 가지가 벌어지고 의지가 강한 나무가 나에게 눈짓하는 것처럼, 세계는 그렇게 나의 곶에 서 있었다.
마치 사랑스러운 손길이 나에게 건넨 상자가, 부끄러워하면서도 존경하는 눈을 황홀하게 하도록 열어놓은 상자 하나를 건네는 것처럼, 세계는 오늘 그렇게 내게 건네졌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쫓아낼 만큼의 수수께끼 같지도 않고, 인간의 지혜를 잠재울 만큼의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닌, 인간들이 그토록 험담을 퍼붓는 이 세계가 오늘 나에게 인간적으로 좋게 보였다!
이른 아침에 이렇게 세계를 달아보게 해주니 나의 아침 꿈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마음을 위로해 주는 이 꿈은 인간적인 선으로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낮에도 똑같은 일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의 가장 좋은 점을 흉내 내고 배우기 위하여 이제 나는 세 가지 가장 나쁜 것을 저울에 올려놓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재보려고 한다.
축복하는 것을 가르친 자는 저주하는 것도 가르쳤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세 가지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들을 저울에 올려놓으려고 한다.
육욕, 지배욕, 이기심. 이 세 가지는 지금껏 가장 저주받아 왔고, 최악의 왜곡된 평판을 받아 왔다. 나는 이 세 가지를 인간적인 과정에서 제대로 달아보려고 한다.
자! 여기에는 나의 곶이 있고, 저기에는 바다가 있다. 저 바다가 나에게 넘실거리며 다가온다. 내가 사랑하는 충실하고 해묵은, 머리가 백 개나 되는 괴물 같은 털북숭이 개가 애교를 부리며 굽이친다.
자! 여기서 나는 굽이치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저울을 들고 있으리라. 그리고 지켜볼 증인으로 그대 은둔자인 나무를 택하리라. 향기가 진동하고 가지가 벌어진, 내 사랑하는 그대를!
어떤 다리를 지나 현재는 미래로 가는가? 어떤 충동이 높은 것을 낮은 것으로 구부러지도록 강요하는가? 그리고 더없이 높은 것을 더 자라도록 명령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저울은 수평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묵직한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넣자, 다른 쪽 저울판에 세 가지 묵직한 대답이 올라온다.
2
육욕. 그것은 육체를 경멸하며 세마포를 입고 다니는 고행자들에게 가시이자 형벌의 기둥이며, 저편의 세계를 믿는 자에게는 '속된 것'으로 저주를 받는다. 육욕은 혼란과 오류를 가르치는 모든 자들을 비웃고 바보로 만들기 때문이다.
육욕. 그것은 천민들에게 그들의 몸을 서서히 태우는 불이고, 벌레 먹은 모든 목재와 악취를 풍기는 모든 누더기에게는 욕정에 불을 붙여 끓어오르게 하는 난로다.
육욕. 그것은 자유로운 마음을 지닌 자에게 순진하고 자유로운 것, 지상 낙원의 행복이자 모든 미래가 현전하는 넘쳐흐르는 고마움이다.
육욕. 그것은 시들어버린 자에게 달콤한 독이지만, 사자와 같은 의지를 지닌 자에게는 훌륭한 강장제이며 소중히 지켜온 포도주 중의 포도주이다.
육욕. 그것은 보다 높은 행복과 최고의 희망을 보여 주는 크나큰 행복을 비유한 말이다. 말하자면 수많은 인간에게 혼인과 혼인 이상의 것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보다 더 낯선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낯선지 누가 완전히 알아차렸단 말인가!
육욕. 하지만 나는 내 사상의 둘레에, 그리고 내 말의 둘레에도 울타리를 치려고 한다. 돼지와 광신자들이 내 정원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지배욕. 그것은 더없이 냉혹한 자들을 후려치는 벌겋게 달아오른 채찍이고, 잔혹하기 그지없는 자가 자신을 위해 남겨 놓는 무시무시한 고문이며,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장작불의 음산한 불꽃이다.
지배욕. 그것은 허영심에 넘치는 군중에게 달라붙는 성가신 쇠파리이고, 어느 말(馬)이나 어느 자부심을 타고 가는 모든 막연한 덕을 비웃는 자다.
지배욕. 그것은 무르고 속이 빈 모든 것을 부수고 무너뜨리는 지진이고, 구르고 으르렁거리고 벌하면서 회칠한 무덤을 파괴하는 자며, 섣부른 대답에 붙은 섬광 같은 의문부호다.
지배욕. 그것의 시선 앞에서 인간은 설설 기고 머리를 조아리고 힘써 일한다. 그리고 뱀과 돼지보다 더 비굴해진다. 마침내 그의 내부에서 경멸의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올 때까지.
지배욕. 그것은 커다란 경말을 가르치는 무서운 선생이다. 그는 도시와 국가의 면전에 대놓고 "너 물러가라!" 라고 설교한다. 마침내 그것들의 내부에서 "나는 물러가겠다!" 라고 외칠때까지.
지배욕. 그런데 그것은 또한 순수한 자와 고독한 자를 유혹하고, 저 위의 자족하고 있는 고귀한 자에게 올라간다. 대지의 하늘에 유혹하듯 보랏빛 행복을 그리는 사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며.
지배욕. 그렇지만 고귀한 것이 권력을 탐해 아래로 내려오고 갈망한다면, 누가 이를 병적 욕망이라고 하겠는가? 참으로 그러한 갈망과 내려감에는 병적인 것도 병적인 욕망도 없다!
고독함을 느끼는 높은 것이 영원히 고독을 맛보며 자족하지 않고, 산은 골짜기로 내려오고, 높은 곳의 바람은 낮은 곳으로 내려오려고 한다.
오, 그러한 그리움에 대한 올바란 세례명과 덕의 이름을 누가 발견하겠는가! '베푸는 덕' ㅡㅡ 일찍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을 그렇게 불렀다.
그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ㅡㅡ 정말이지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힘찬 영혼에서 솟아나는 온전하고 건강한 이기심을 복된 것이라고 칭찬했다.
주위의 만물에게 거울이 될 만큼 아름답고 승리감에 넘치며, 새로운 몸이자 거룩한 몸에 어울리는 힘찬 영혼에서 솟아나는 이기심을.
유연하고 설득력 있는 몸, 춤꾼의 형상과 정수가 스스로 즐거워하는 영혼. 이러한 몸과 영혼의 자기 희열이 스스로를 '덕' 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자기 희열은 신성한 작은 숲으로 자신을 둘러싸듯, 선악의 교리로 자신을 가린다. 즉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희열은 나쁜 것, 그것은 "비겁하다!" 라고 말한다. 자기 희열은 늘 걱정하고 탄식하며 슬퍼하는 자, 하찮은 이익에 연연하는 자를 경멸스럽다고 여긴다.
자기 희열은 슬픔에 잠긴 지혜도 경멸한다. 정말이지 어둠속에서 피어나는 지혜, 밤의 그늘과도 같은 지혜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혜는 "모든 것은 덧없다!" 라고 늘 탄식한다.
자기 희열은 꺼리며 불신하는 것을 하찮게 여긴다. 그리고 눈길이나 손길 대신에 맹세를 바라는 자도 하찮게 여긴다. 너무 불신하는 모든 지혜도 하찮게 여긴다. 이러한 지혜는 비겁한 영혼이라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자기 희열은 재빨리 영합하는 자, 툭하면 벌렁 드러눕는 개 같은 자, 굴종하는 자를 더욱 하찮게 여긴다. 이처럼 비굴하고 개 같고 위선적이며 재빨리 영합하는 지혜도 있는 것이다.
자기 희열은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자, 독성 있는 침이나 사악한 눈길을 달게 받는 자, 너무 인내심이 강하고 모든 것을 참는 자, 무슨 일에든 만족해하는 자를 미워하고 구역질을 느낀다. 말하자면 그것은 노예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신들과 신들의 발길질에 굴종하든, 인간들과 인간들의 어리석은 견해에 굴종하든, 이렇듯 명예로운 이기심은 모든 노예의 속성에 침을 뱉는다!
열등함, 명예로운 이기심은 기죽어 소심하게 굴종하는 모든 것과 부자연스럽게 깜빡거리는 눈, 억눌린 마음, 두툼하고 비겁한 입술로 입맞춤하며 굴복하는 저 거짓된 속성을 이렇게 부른다.
명예로운 이기심은 노예이자 노인이며 염세적인 자의 감정을 거짓 지혜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히 불량하고 헛소리나 지껄이며 가식적인 성직자의 어리석음을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거짓 현자들, 모든 성직자들, 세상에 지친 자들, 영혼이 여자나 노예의 속성을 지닌 자들. 오, 예로부터 이들의 장난질이 이기심을 얼마나 괴롭혀 왔던가!
그런데 이기심을 괴롭히는 것, 바로 그것이 덕이었고, 덕으로 불린 것이다! 그리고 "사심이 없는 것" 즉 세상에 지친 모든 비겁한 자들과 십자거미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자들에게 이제 낮과 변화가, 심판의 칼이, 위대한 정오가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분명히 드러나리라!
그리고 자아를 건전하고 신성하다고 일컫고, 이기심을 명예롭다고 일컫는 자, 참으로 그 예언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보라. 그것이 오고 있다. 가까이 왔다. 위대한 정오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추천 (0) 선물 (0명)
IP: ♡.252.♡.103
23,512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2-10
1
192
나단비
2024-02-10
1
270
나단비
2024-02-10
0
115
나단비
2024-02-09
0
104
나단비
2024-02-09
0
107
나단비
2024-02-09
0
117
나단비
2024-02-09
0
92
나단비
2024-02-09
0
116
나단비
2024-02-08
1
117
나단비
2024-02-08
1
101
나단비
2024-02-08
0
133
나단비
2024-02-08
0
99
나단비
2024-02-08
0
101
나단비
2024-02-07
0
121
나단비
2024-02-07
0
124
나단비
2024-02-07
0
95
나단비
2024-02-07
0
105
나단비
2024-02-07
1
131
나단비
2024-02-06
3
547
나단비
2024-02-06
2
188
나단비
2024-02-06
2
169
나단비
2024-02-06
2
138
나단비
2024-02-06
2
142
나단비
2024-02-05
2
104
나단비
2024-02-05
2
100
나단비
2024-02-05
2
143
나단비
2024-02-04
2
116
나단비
2024-02-04
1
151
나단비
2024-02-04
2
136
나단비
2024-02-04
2
208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