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전 8

나단비 | 2024.03.09 13:30:11 댓글: 7 조회: 548 추천: 2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2730
화랑전 8
이연은 가게를 나서서 걸었다.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남자와 마주 앉아있던 화랑의 당황스러워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 뒤로 오래전 꿈속에서 본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오래전 나타나서 그의 일상을 뒤흔든 신비한 여자는 화랑의 동네로 이사오기 전을 마지막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눈 뜨고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전생의 기억이라는 걸 알고 나서 꿈을 돌이켜봤을 때, 꿈속에서 본 장면은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고. 이연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에 자기를 죽인 여자라니.
이연은 자기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전생의 복수? 받은 만큼 돌려준다라. 그게 가능할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으로 어릴 때부터 오로지 경쟁심과 오기로 모든 것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겉으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친한 친구가 자기보다 성적이 잘 나오는게 죽기보다 싫었다. 하필 고2 때 아버지의 사업체가 망하면서 빚에 시달리며 다니던 학원을 다 그만두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사태가 당황스러웠다. 절망한 것도 잠시, 그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 덕분에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다행히 그가 대학에 입학한 뒤로 아버지가 다시 일군 사업이 성공하면서 든든하게 서포트해 주게 되었다. 모든 게 그가 생각한 대로, 계획해 온 대로 잘 흘러가고 있던 참이었다. 2년 전 사고를 당할 뻔한 그날 전까지 그의 인생은 의문부호 하나 없었다.
술자리에서 화랑을 처음 본 순간, 그는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자기를 끌어당기는 걸 느꼈다. 꽤 복잡한 감정이었다.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모르던 그는 술 몇 잔을 연거푸 마시고는, 친한 친구 은석에게 대신 계산을 하라고 카드를 건네주고 나왔다.
이상했다.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도 그의 감정은 여전히 정리되지 못했다.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화랑은 청초한 얼굴에 수수한 패션으로 평범한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녀와 눈을 잠시 마주친 순간 느낀 그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버스 정류장에서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긴 이연은 문득 조금 전에 지나간 버스가 자기가 타야 했을 버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광판을 다시 쳐다보던 이연은 멀리서 걸어오는 화랑을 발견했다. 처음 들어오던 때와 다르게 가까이 올수록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어쩐지 하얗게 질려있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이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에서 본 화랑은 지금과는 사극에 나올법한 복식의 높은 신분으로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연이 한 걸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여자도 그를 보며 다가왔다. 기쁨에 두 팔을 벌리고 그녀를 안았다. 순식간이었다. 통증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에게서 물러난 순간 여자의 입가엔 비소가 걸려있었다. 눈앞이 차츰 흐려지며 이연은 쓰러졌고 암전되듯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면서 잠에서 깼다.
꿈에서 본 화랑의 모습과 현재 그녀의 모습은 차이가 컸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전생과 다르게 현생의 그녀는 무르다 못해 맹해 보이기까지 했다. 일부러 도발해 보아도 당황스러워서 쩔쩔매는 반응을 보면 전생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 어리석긴."
의식이 흐려지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전생의 그녀에게서 들은 차가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현생의 화랑의 말투는 느릿하고 순진무구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식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 혼란스러웠다.
충동적으로 그녀가 타는 버스를 따라 탔다. 그가 사는 곳과 다른 곳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그 동네를 한바퀴 돌아보던 이연은 이 동네로 이사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녀를 처음 볼 때 든 감정은 그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전생의 원한으로만 치부하기엔 그리 단순한 부류의 감정 같진 않았다. 그걸 알아야 했다. 이대로 넘어가기엔 찝찝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다. 후배들한테 묻다가 화랑과 친한 친구가 같은 과 후배라는 걸 알게 되었다. 황서연. 어딘가 나사 빠진 듯 속없이 말이 재잘재잘 많다고 생각했던 여자애였다. 반면에 화랑은 늘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차분하고 유유해 보였다. 상반된 성격의 그 두 사람이 친하다는 게 의아했다.
도서관까지 따라가서 화랑을 지켜보았다. 성실하고 평범한 별다른 것 없는 사람이었다. 첫만남에서 느꼈던 강렬한 감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멍하니 비 내리는 바깥을 보며 서 있던 그녀에게 우산을 빌려주고 그걸 핑계 삼아 식사 한 번, 자기가 샀다는 걸 명분 삼아 술도 한 번 같이 마셨다. 술을 마시고 흐트러지면 다른 뭔가를 보아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주사가 좀 특이하긴 했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인다고 한다던가. 그날 알게 된 건, 특이한 주사와 빠른 달리기 실력 말곤 없었다.
더는 불러낼 명분도 사라졌고 이연은 비교적 접촉이 쉬운 서연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화랑이요? 제가 제일 친하죠."
밥 한 번 사니, 서연은 화랑에 대해 술술 불었다.
"걔는 아르바이트하느라 바쁘죠.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어요."
"아. 그래? 다른 건 없어?"
"아. 맞다. 화랑이 얼마 전에 헌팅 당했어요. 그 남자 꽤 훈훈하고 잘생겼더라고요. 하하."
이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듯했다가 원위치로 돌아갔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묘하게 거슬렸다. 서연은 둘이 어디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까지 덧붙였다.
미친 짓이다 생각하면서도, 이연은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가게까지 와버렸다. 대체 뭘 어쩌려고? 무작정 끼어든 자리에서 그 헌팅남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연은 그 남자의 시선에서 은은한 경멸까지 읽어냈다. 그 남자. 처음 본 사람인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장면이 교차했다. 설마. 저 사람도 전생 속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걸까.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화랑의 핸드폰은 또 울렸다. 며칠째 안 받고 있는 전화였다. 더는 못 참겠다 싶었다. 전화가 끊기고 잠시 후 또다시 진동음이 울리기 시작하자 화랑은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저 안 한다고요. 왜 이러세요? 언제까지 이러실 거냐고요."
"네? 저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뭐지? 예상과 다른 목소리가 들리고 화랑은 핸드폰을 내려서 확인해 보았다. 통화 상대는 정해영이었다. 며칠 전 헤어진 뒤로 까딱 문자 한 통 없던 그였다.
"아, 죄송해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이요? 그래요. 그건 그렇고 우리 잠깐 볼래요?"
"네? 갑자기 말씀하시면 좀. "
"갑작스럽죠? 죄송해요. 화랑 씨. 뒤돌아봐요."
말로는 죄송하다면서 전혀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던 화랑이 돌아서니 멀리서 걸어오는 해영이 보였다. 흰 셔츠에 잘 어울리는 정장을 입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편한 옷차림을 하고 오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보니 그제야 사회인 느낌이 제대로 들긴 했다.
"오랜만인 것 같네요, 우리."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해영은 그전 만남에서는 못 느꼈던 성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정장 차림으로 향수도 뿌린 것 같고 소개팅이라도 하러 가는 건가 생각하며 멍하니 그를 쳐다보던 화랑이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
"뭐야. 왜 이렇게 어색해해요?"
해영은 화랑을 빤히 쳐다보다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혹시 오늘 어디 가세요?"
"소개팅이요."
"네? 정말이에요?"
놀라서 묻는 화랑을 보던 해영은 잠깐 뜸 들였다.
"신경 쓰여요? 장난이에요. 회사 면접 다녀오는 길에 들렀어요."
"네? 전혀 신경 안 쓰이는데요."
화랑은 엉겁결에 강하게 부정했다.
"전혀 라고 하면 좀 섭섭한데. 뭐 됐고 우리 점심이나 같이 먹을래요?"
해영은 뭐가 진심인지 모를 정도로 화제전환이 빨랐다.
"그게 저는 친구와 약속이."
"친구 누구요? 같이 먹으면 되죠."
화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저와 먼저 약속 있는데요. 오늘은. "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윤이연이 왜 나타난 거야. 놀란 눈으로 돌아본 화랑의 시야에 이쪽으로 걸어오는 이연이 들어왔다.
"저번에는 선배라고 하더니 언제 친구가 된 거에요?"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해영이 물었다.
"아. 그게요."
"친구 맞아요. 남자 친구."
"네?"
느닷없이 폭탄을 던진 이연이었다. 이건 무슨 황당한 소리지?
​​
추천 (2)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3/11 05:23:52

이연이 작정하고 화랑한테 접근햇네요.전생의 웬수가 현생의 커플로 될수잇을지.
君子报仇十年不晚。아니면 화랑을 철저히 망가뜨릴지 궁금증이 생기는 스토리네


지고는 못사는 이연한테 라이벌 해영이 등장햇네요.

나단비 (♡.252.♡.103) - 2024/03/11 11:43:47

저도 어떻게 될지 궁금해요.

힘나요 (♡.208.♡.170) - 2024/03/16 06:19:15

잘 보고 갑니다ㅋㅋㅋ

힘나요 (♡.208.♡.170) - 2024/03/16 06:19:34

잘 보고 갑니다ㅎㅎㅎㅎ

힘나요 (♡.208.♡.170) - 2024/03/16 06:19:44

잘 보고 가요

힘나요 (♡.208.♡.170) - 2024/03/16 06:19:49

ㅎㅎㅎ

힘나요 (♡.208.♡.170) - 2024/03/16 06:19:53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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