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탐내도 될까? (54회)

죽으나사나 | 2024.04.07 08:25:10 댓글: 0 조회: 210 추천: 1
분류연재 https://life.moyiza.kr/mywriting/4559194
너를 탐내도 될까? (54회) 좋아하는 사람 있어?

“하정이니?”

휴대폰 알람 소리에 깬 정연은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하정이가 안 보여서 의아해하는 사이, 현관문이 열리는 인기척에 거실로 나갔다. 

올 블랙의 츄리닝을 차려입은 낯선 하정의 모습을 보았다. 나가는 건지 들어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하정은 운동화를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정연이 의문스레 묻자 하정이 입매를 늘리면서 답했다. 

“조깅하고 왔어. 너 출근 준비하고 있어. 아침 간단히 챙겨줄게.“

조깅?

운동을 싫어하는 하정인데…

조깅을 했다고?

갑자기?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하며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있는 하정에게 정연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하정아. 나 무서워. 네가 이상해서. 

긴 한숨이 새어나갔다. 

하정에 의해 간단한 조식이 금방 식탁 위에 차려졌다. 적당하게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와 노랗게 잘 익힌 스크램블 에그가 꽤 맛깔스러워 보였다. 

“우유도 마셔.”

아침에 편의점에서 갓 사 온 우유를 컵에 따른 하정이가 정연이 앞에 슥 내밀었다. 

“어. 고마워.”

정연은 떨떠름하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하정의 앞에 조용히 앉았다. 
하정은 어느새 토스트 위에 딸기잼을 바르고 거기에 스크램블 에그도 얹고 있었다. 그런 하정을 쳐다보던 정연이도 토스트를 입안에 넣어 천천히 씹어 물었다. 

“빨리 먹어. 너 맨날 늦어서 뛰어나가잖아. 그리고 나도 설거지 하고 바로 나가야 돼.”

“어딜 가?“

”강은서와 같이 엄마가 있는 납골당에 가보기로 했어.”

“아…”

정연의 마음이 숙연해졌다. 

하정이는 괜찮다고 몇 번이나 답했지만 또 한 번 묻고 싶었다. 

“하정이 너 괜찮은 거 맞아?”

“응. 괜찮지 그럼. 날 버린 줄 알았던 엄마가 사실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는데. 근데 아빠 유골은 언니를 돌봐주던 이모가 바다에 뿌렸대. 엄마만 거기에 계셔.”

그냥 남의 이야기를 하 듯 하정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래.”

정연이 하는 수없이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

"어머... 진짜 은지네? 은지야..."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우희가 하정을 보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릴 때도 똑같았던 둘은 같이 살지도 못했음에도 너무나도 똑같았다. 분위기만 조금 다를 뿐이지 길에서 혹시라도 마주쳤다면 그냥 은서라고 생각했을 거 같았다.
"이모, 지금은 윤하정이에요. 하정이라고 불러요."
말은 그래도 은서 역시 은지라는 이름이 더 예쁘고 정겨웠지만 어릴 적 기억을 못 하는 하정한테는 자꾸 은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낯설게 느껴질 거 같아 우희에게 귀띔을 했다.
"어... 응. 알았어. 미안해. 하정아. 나 우희 이모인데. 기억 안 나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정을 보며 우희는 기억이 안 돌아왔다는 은서의 말을 들었으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하정은 작은 미소를 보이며 그냥 머리를 끄덕이었다.
그래, 어색하겠지.
기억을 못 하는 너에게는 난 처음 보는 사람일 텐데 이렇게 반가워하는 것마저도 불편할 수 있지.
우희는 씁쓸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은서를 돌아봤다. 
"이제 갈까? 너희들 엄마 만나러."
은서는 머리를 끄덕이었다.
무더운 8월이다.
하늘엔 구름 하나 없는 맑은 날씨의 연속이었다. 비도 한동안 안 내려 대지는 더욱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은서가 운전하는 차는 고속도로를 한참이나 달렸다.
"내 허리에 밖에 안 오던 너희 둘이 이렇게 커서 다시 만났다는 게 너무 꿈만 같아. 감격스러워."
우희는 저랑 같이 뒷좌석에 앉은 하정의 손등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렸다.
하정은 그저 말없이 웃었다.
"기억을 못 하면 어때. 너희들 쌍둥이라는 건 앞을 못 보는 맹인 빼고는 다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차츰 추억을 만들어가면 되는 거지. 괜찮아질 거야. 기억이라는 건 다시 만들면 돼."
추억...
기억.
인자한 미소를 흩트리며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우희와 마주한 하정은 속으로 그 단어들을 떠올리다 그녀를 향해 다시 입매를 올렸다.
"네."
짧지만 또박하게 답을 했다. 기대가 가득 찬 그 얼굴에 응대를 해야 할 거 같았다.
도시 전경이 점점 사라지며 저마다 푸르른 나무들을 품고 있는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지나,
차가 멈추며 하정은 엄마가 잠들어있는 납골당에 왔다는 걸 알았다.
이들은 자주 와봐서 익숙할 그곳을 하정은 낯선 발걸음을 하며 뒤따라갔다.
"우리 엄마야."
조용히 앞에서 걸어가던 은서가 한곳에 우뚝 멈추며 그곳을 가리켰다.
쌍둥이 아기들을 양쪽에 각각 한 명씩 끌어안은 젊은 여자가 사진 속에서 티끌 하나 없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쁘다...
멍하니 바라본 하정의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온 생각이었다.
"엄마는... 정말 예뻤구나."
넋이 나간 듯한 하정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응. 예뻤지. 아빠를 만나기 전에 엄청 인기가 많으셨대. 어렸던 나한테 엄마가 그랬었는데."
은서도 사진 속에서 속도 없이 밝게 웃는 엄마를 고요하게 들여다보며 피식 웃었다.
"언니. 누군지 말 안 해도 알지? 은지가 찾아왔어. 매번 은지 없이 우리만 찾아와서 언니한테 미안한 마음이 컸었는데 이제 좀 괜찮아질 거 같아. 은지를 보니 어때? 여전히 어릴 때랑 똑같이 예쁘지? 애들이 언니를 닮아서 참 다행이야."
옷소매로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우희는 나지막이 저 자신이 그리도 좋아했던 언니를 불렀다.
언니가 그리될 줄은 몰랐지만 우희는 언니랑 같이 쌍둥이들을 잘 키우고 싶었다. 그렇게 갑자기 가버린 언니를 대신해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리하지 못했던 건 비인간적인 사채업자 놈들한테 평생을 옥죄어 살 쌍둥이들이 걱정되어 도망을 치기로 결심했다.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았고 은지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큰 자책을 했는지 몰랐다.
적어도 은서는 제 옆에 있는데...
은지는 따뜻한 밥이라도 제대로 먹고 있는지 많은 걱정을 했었다. 한 편으로는 그 자들 손아귀에서 벗어난 걸 다행이라 여기며 모순되는 나날들을 반복해왔다.
이제 그 걱정거리가 싹 가시는 거 같다.
은지가 이리 눈앞에 다시 나타났으니 은서도 이제 유일하게 남은 동생을 찾아서 못 이루었던 소원을 이룬 셈이니.
이제 진짜 좋은 날만 남은 거 같았다.
"다 언니가 착하게 산 덕분이야. 은서랑 은지가 이렇게 무탈하게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언니한테 항상 고마워."
우희는 사진 속에 그녀를 보며 저도 활짝 웃어 보였다. 울다가 웃는 우희를 힐끔 보던 은서도 어느새 눈가에 고인 눈물을 삼켜버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연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하정에게 시선을 꽂았다.
기억에 없어서 그런지 하정의 표정은 한없이 가라앉아있었지만 어떠한 동요가 없어 보였다. 당연히 기억이 없으니 감정이 없을 테고, 그래서 하정은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런 하정의 어깨에 은서는 손을 얹었다. 하정이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자 은서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었다. 괜찮다고.
조급해 하지 말자. 
아저씨 말대로 아주 천천히 헤쳐나가면 돼.
기억을 못 하면 어때? 
이모 말이 맞아.
지금부터 추억을 만들어 나가면 되는 거지.
하정은 눈매를 접어 보이는 은서를 그저 무감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납골당에서 나오고 이들은 근처 식당으로 갔다.
"여태 어떻게 지냈어? 은지... 아니, 하정아."
음식 주문이 끝나자마자 하정의 앞자리에 앉은 우희가 이름을 바꿔가며 급하게 물어왔다.
"아... 그게..."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될지 몰라 하정이가 머뭇거리자 은서는  얼굴 가득 궁금증을 담은 우희의 팔을 잡았다.
"이모, 우리 천천히 알아가자. 우리한테 날이 많잖아. 하정이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시간을 주자고."
"어? 응. 그래. 네 말이 맞네. 내가 성급했어. 미안해."
그제야 갑자기 훅 들어간 자신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우희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시설에 잠깐 있다가 지금의 부모님이 저를 입양했어요."
하정이가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구나. 좋은 분들이셔?"
묻지 말아야지 하면서 우희는 또 본능적으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저한테는 은서나 은지 모두 자식 같은 존재였으니. 너무 궁금했다. 은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네. 좋은 분들이세요."
딱 3초 정적을 두었던 하정이가 금세 웃으며 답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우희는 또 코끝이 저려오는 걸 느꼈지만 애들 앞에서 주책맞게 자꾸 울 수는 없었는지라 일부러 고개를 돌려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숙이 금방 식탁에 올라왔고 이들은 잔잔한 일상 얘기를 하며 식사를 했다.
하정은 엄청 친해 보이는 은서와 우희를 이따금씩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 같은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은서한테나 저한테 보내는 그 시선은 그래 보였다.
강은서도 다행히 '엄마'는 있었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희네 집 앞에 차가 멈추었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
우희가 하정의 손을 잡았다. 난감해진 하정이가 아래 입술을 살짝 말았다.
"다음에요. 저 약속이 있어서요."
"아... 그래."
"이모 우리 다음에 또 올게."
은서는 우희의 등을 쓸어주며 못내 아쉬워하는 그녀를 위로했다.
"그래. 조심해서들 가. 다음에 꼭 놀러 와."
"네."
하정이 고개를 숙이며 예의 깊게 인사를 했다. 
집으로 들어간 우희의 모습이 사라지자 하정과 은서는 다시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가?"
"아까도 말했 듯이 그냥 택시를 타고 가도 되는데."
"내가 하정이 너를 데려다주고 싶어서 그래."
저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간절함이 묻어있는 듯해서 하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소를 알려주었다. 
택시를 타고 은서가 있는 곳으로 오는 길에 서울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오후에 외근이 있는데 일은 금방 끝날 거고 그 길로 바로 퇴근을 할 수 있으니 만나자고 했다. 
이미 늦은 오후가 되어버린 이 시간, 서울은 자기가 알려준 카페로 가서 조금만 기다리면 끝날 거라고 문자가 왔었다.
"누구랑 약속이 있어?"
운전에 집중을 하던 은서가 조수석에 앉아 무심하게 밖에만 시선을 둔  하정에게 물어왔다.
"아는 동생."
답은 짧았다.
박서울이라는 그 남자인가,
자연히 그 얼굴이 떠오른 은서가 머뭇거리다 또 한 번 질문을 했다.
"남자친구?"
창밖에서 은서에게로 시선이 돌려졌다.
"아니. 그냥 동생이야."
"아..."
"그럼 남자친구는 없어?"
"응."
"좋아하는 사람은?"
"..."
답이 없는 그녀를 힐끗 쳐다본 은서는 아차 싶었다.
이제 만나지 몇 번 안 되었는데 너무 사생활까지 캐고 들었나 싶었다.
"미안. 난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너는?"
너...
나이가 같으니 너라고 부르는 게 맞다. 
은서의 몸이 잠깐 움찔했던 건 하정이가 너라고 부른 게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어릴 적의 은지는 항상 살갑게 저 자신을 '언니' 라고만 불렀기에 그냥 그렇게 한 번 은지한테 불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순간 온몸을 덮쳤다. 조바심을 내지 말자고 하면서 저 자신은 그게 잘 안되고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하정의 고개가 은서에게 다 돌려졌다.
"... 있어."
있다고 답하는 은서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예쁜 입술은 곱게 휘고 있었다.
순간 또 가슴이 저려오는 하정은 급히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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