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화원 ㅡ 디콘

단밤이 | 2024.01.10 08:43:06 댓글: 6 조회: 907 추천: 4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38986
The Secret Garden

(비밀의 화원)


디콘
일주일 가까이 비밀 정원에는 햇살이 따사롭게 빛났다. '비밀 정원'은 메리가 생각해낸 이름이었다. 아이는 그 이름이 좋았다. 하지만 오래된 아름다운 담장들이 주위를 둘러서서 아무도 메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느낌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온 세상에서 멀어져 동화의 나라에 있는 것 같았다. 메리가 읽고서 마음에 든, 얼마 안 되는 책들은 모두 요정 이야기였다. 게다가 어떤 이야기에는 비밀 정원이 나오기도 했다. 때로 사람들은 그런 정원에서 백 년이나 잠이 들었다. 메리는 그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메리는 잠을 청하러 그곳으로 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미슬스웨이트에서 보내는 매일매일을 점점 더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게 되었다. 밖으로 나가 보내는 시간을 점점 사랑하게 되었다. 더는 바람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다. 전보다 더 빠르게 더 오래 달렸고, 줄넘기는 백 개까지 쉬지 않고 하게 되었다. 비밀 정원의 알뿌리들은 몹시 놀랐을 것이다. 주위 잡초가 다 뽑혀 말끔해진 덕에, 원하는 만큼 실컷 숨을 쉴 공간이 생겼으니 말이다. 메리 아가씨는 몰랐지만, 그 뿌리들은 땅속에서 잔뜩 신이 나서 맹렬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햇살이 땅속까지 파고들어 뿌리들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비가 오면 빗물이 알뿌리가 있는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래서 알뿌리들은 살아 있다고 맹렬하게 느꼈다.
메리는 엉뚱하고 결단력 있는 아이였다. 이제 그 결단력을 발휘할 흥미로운 일이 생기자, 그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메리는 차근차근 흙을 파고 잡초를 뽑으며 일을 했다. 그 일이 지겹기는 커녕, 정원을 가꾸는 일이 한 시간씩 늘어갈수록 더 즐겁기만 했다. 정원 일은 메리에게 매혹적인 놀이처럼 느껴졌다. 그 정원에서 메리는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작고 연푸른 새싹들을 찾아냈다. 사방에서 싹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메리는 매일 자그마한 새싹을 또 찾아낼 거라고 자신했다. 어떤 싹은 어찌나 작은지, 흙 위로 아주 조금 솟아 있는 정도였다. 그런 싹들이 어찌나 많은지, 메리는 마사가 '몇천 송이나 되는 아네모네'라고 한 말과 알뿌리가 퍼져또 작은 싹을 틔운다고 한 이야기가 기억났다. 이 알뿌리들은 10년 동안 버려져 있었지만, 그동안 아네모네처럼 몇천 개로 불었을지도 몰랐다. 메리는 그 뿌리들이 꽃을 보여줄 때까지, 얼마나 오래 땅속에 있어야 할지 궁금했다. 가끔 메리는 일을 멈추고 정원을 둘러보며, 그곳이 활짝 핀 꽃 몇천 송이로 뒤덮이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상상해보았다.
해가 빛나던 그 주에, 메리는 벤 웨더스태프와 한층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메리가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하듯 옆으로 홀연히 다가와, 벤을 놀라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실은 메리가 자신이 오는 것을 보고 벤이 농기구를 챙겨서 가버릴까 봐 최대한 살금살금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벤도 처음처럼 메리를 무턱대고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어린아이가 벤 같은 노인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에 맘속으로 우쭐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메리는 전보다 훨씬 예의 바르게 굴었다. 벤은 메리가 자신을 처음 본 날, 원주민에게 대하듯이 말을 했다는 걸 몰랐다. 메리 또한 뚱하고 심지가 굳은 요크셔 노인이 주인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익숙하지 않고, 단지 해야 할 일을 지시만 받는다는 것을 몰랐다.
"아가씨는 꼭 울새 녀석 같구려." 어느 아침 고개를 드니 어느새 메리가 다가와 있자 벤이 말했다. "언제 아가씰 보게 될지, 아가씨가 어느 쪽에서 올지 감을 못 잡겠다오."
"울새는 이제 내 친구에요!" 메리가 말했다.
"그것 참 그 녀석답구려." 벤 웨더스태프가 불퉁하게 말했다. "허영심에 취해서 잘난 척하려구 숙녀분들에게 알랑방귀를 뀌다니, 꽁지깃을 살랑거리구 뽐을 낼 수만 있다면 저 녀석은 무슨짓이라도 헐 것이오. 속이 꽉 찬 달걀처럼, 그 녀석은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오."
벤은 원래 말수가 거의 없었고, 가끔 메리가 질문을 하면 끙 하는 소리 말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벤은 허리를 펴고 서서 삽위에 징을 박은 구두를 신은 발 한쪽을 올리고는 메리를 빤히 보았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셨소?" 벤이 불쑥 물었다.
"한 달쯤 된 것 같아요." 메리가 대답했다.
"드디어 미슬스웨이트의 공이 나타나기 시작했구려." 벤이 말했다. "전보다 더 통통하구 혈색두 그렇게 누리끼리하지 않구려. 아가씨가 첨 이 정원 오셨을 때만 해두 털이 다 뜯긴 까마귀 새끼 같았다니깐. 저렇게 못생기구 심술궂게 생긴 아이는 난생처음 봤구먼, 이렇게 생각했다오."
메리는 허영심이랄 게 없어다. 게다가 애초에 제 외모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없기에,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내가 살이 더 쪘다는 건 알아요." 메리가 말했다. "양말이 전보다 꽉 끼거든요. 전에는 헐렁해서 주름이 생겼는데, 저기 울새가 왔어요. 벤 영감님."
정말로 그곳에 울새가 와 있었다. 메리가 보기에 울새는 전보다 더 예뻐진 것 같았다. 녀석의 붉은 조끼가 공단처럼 윤이 반지르르했다. 녀석은 날개와 꼬리를 퍼덕거리고 고개를 갸웃한 채, 생기 가득한 우아한 자태로 여기저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울새는 벤 웨더스태프가 감탄을 하게 하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벤은 빈정거릴 뿐이었다.
"아이쿠, 이 녀석아!" 벤이 말했다. "너를 더 잘 받아줄 사람이 없으면 나랑 있는 것두 견딜 만허다 이거구먼. 지난 두 주 동안 가슴 조끼는 더 붉어지구 깃털은 윤기가 더 자르르하구먼. 네 꿍꿍이를 모를 줄 알구? 너는 미슬 황무지에서 젤 잘생긴 수컷 울새구, 다른 울새들하구 언제라두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단 감언이설루다가 황무지 어딘가에서 대담헌 젊은 마담 울새를 유혹허려는 작정이겠지."
"오! 울새를 봐요!" 메리가 소리쳤다.
그 울새는 확실히 대담하고 매력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녀석은 점점 더 폴짝거리며 다가왔고, 벤 웨더스태프를 더 열렬하게 바라보았다. 울새는 가장 가까운 까치밥나무가지로 포르르 날아가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벤을 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루다가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구 생각하는구나." 벤은 얼굴에 한가득 주름을 지으며 말했는데, 메리는 꼭 유쾌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는 아무두 너보다 돋보일 수 없을 거라구 생각허지, 아마 그렇게 생각헐 거야."
울새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 순간 메리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울새가 곧장 벤 웨더스태프의 삽 손잡이로 날아오르더니, 거기에 내려앉은 것이다. 그러자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며, 다른 표정으로 바뀌었다. 노인은 숨 쉬는 것조차 두려운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이 숨을 쉬기라도 하면, 이 세상이 뒤흔들려 벤의 울새가 푸드득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는 듯 말이다. 벤이 속삭이듯 말문을 열었다.
"이런, 빌어먹을!" 말은 그래도 말투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 온화했다. "친구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잘 아는구먼. 그렇지?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깐. 너두 그걸 알 거야."
그러더니 벤은 숨도 거의 쉬지 않는 것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마침내 울새가 다시 날개를 퍼덕이고 날아갔다. 벤은 우두커니 서서 삽 손잡이에 마법이라도 일어난 듯 바라보았다. 이윽고 벤은 다시 땅을 갈기 시작했지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간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기 때문에. 메리는 겁내지 않고 벤 영감에게 말을 걸었다.
"영감님도 정원이 있어요?" 메리가 물었다.
"아니, 나는 홀몸이라 정문에 있는 숙소에서 마틴하구 함께 산다오."
"정원이 있다면 뭘 심고 싶으세요?" 메리가 물었다.
"양배추하구 감자하구 양파를 심을거라오."
"꽃이 피는 정원을 가꾸고 싶으면요?" 메리가 끈질기게 물었다. "그러면 뭘 심으실 거예요?"
"구근하구 향기가 달콤한 꽃들. 하지만 주로 장미를 심을 거라오."
메리가 얼굴이 환해졌다.
"장미를 좋아하세요?" 메리가 물었다.
벤 웨더스태프는 잡초를 뽑아서 옆으로 던지더니 대답했다.
"그럼, 좋아허지. 정원사로 일하면서 모시던 젊은 부인에게서 배웠다오. 그 분은 몹시 좋아하는 장소에 장미를 한가득 심으셨다오. 그 장미들이 아이들이나 울새라도 되듯 사랑하셨소. 그분이 허리를 굽혀 장미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본 적두 있다오." 벤은 또 뽑아든 잡초를 쏘아보았다. "그것도 10년 전 일이라오."
"그 부인은 지금 어디 있어요?" 메리가 흥미가 동해 물었다.
"천당이라오." 벤 영감은 이렇게 대답하더니, 삽을 흙 속으로 깊이 박아 넣었다. "목사님 말씀으론 그렇다니깐."
"그럼 장미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메리는 그 어느 때보다 궁금해 물었다.
"그대로 방치되었다오."
메리는 점점 흥분이 되었다.
"그러면 죽었겠죠? 장미들은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죽죠?" 메리가 슬쩍 물어보았다.
"음, 나는 그 장미들이 좋아졌다오. 나는 그분을 좋아했으니깐. 그분은 장미를 좋아허셨구 말이오." 벤 웨더스태프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1년에 한두 번 가서 손을 좀 보았소. 가지를 치구 뿌리 주변 흙도 갈아주구. 장미들은 제멋대로 자라지만, 그곳 토양이 비옥하다오. 그러니 일부는 살아 있겠지."
"이파리도 없고 시들어서 누렇고 칙칙하게만 보이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아요?" 메리가 물었다.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려보구려. 빗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구 햇빛 위로 비가 쏟아지면 절로 알게 될 테지. 그때까지 기다리구려."
"어떻게?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메리는 조심하기로 한 다짐을 까맣게 잊고 물었다.
"잔가지나 굵은 가지들을 살펴보구려. 가지 여기저기에 갈색 덩어리 같은 게 점점 커지면은 따스한 비가 내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관찰해보시오." 벤이 느닷없이 일손을 멈추고는 호기심으로 잔뜩 흥분한 메리의 얼굴을 보았다. "갑자기 왜 장미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거요?" 벤이 물었다.
메리 아가씨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대답하기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나는, 나는 놀고 싶어서 그래요. 내 정원이 있으면 좋겠어서." 메리가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장난감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러게 말이오." 벤 웨더스태프가 메리를 찬찬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건 옳은 말이오. 아가씨한테는 아무것두 없지."
벤의 말투가 너무 이상해서, 메리는 벤이 정말로 약간 불쌍하게 여기는 건가 궁금했다. 메리는 자신이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일들이 너무 싫어서 늘 지겹고 짜증만 났다. 그러나 지금은 온 세상이 변한 것 같고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비밀 정원이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으면, 메리는 언제까지고 즐거울 것 같았다.
메리는 10분이나 15분 정도 더 벤 옆에 붙어서, 할 수 있는 질문을 모두 했다. 벤은 질문 하나 하나에 묘하게 툴툴거리듯 대답했지만, 진짜로 짜증이 난 것 같지도 않았고 삽을 챙겨 가버리지도 않았다. 메리가 가려고 할 즈음 벤이 장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말을 듣자 메리는 벤이 좋아했다고 말한 장미들이 떠올랐다.
"요즘도 그 장미들을 보러 가요?" 메리가 물었다.
"올해는 안 갔다오. 류머티즘 때문에 관절이 너무 뻣뻣해져서는."
벤 영감은 평소처럼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메리에게 화가 난 듯 보였다. 메리는 벤이 왜 그러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말이다.
"어이쿠, 이보시오!" 벤이 날카롭게 말했다. "질문 좀 그만 하구려. 질문을 그렇게 하다니 아가씨첢 형편없는 처자는 처음 보았소. 저기 가서 혼자 놀구려. 오늘은 말을 너무 많이 했으니깐."
벤이 워낙 퉁명스럽게 말해서, 메리는 더 곁에 있어 봐야 소용이 없겠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천천히 줄넘기를 하며 담장 밖 산책로를 뛰면서 벤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그렇게 심통을 부리는데도 좋아진 사람이 또 생겼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메리는 벤 웨더스태프 영감이 좋았다. 그랬다. 정말 좋았다. 늘 벤 영감이 말을 걸어오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벤 영감은 이 세상 꽃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믿게 되었다.
비밀 정원을 둥그렇게 감싸듯 이어지는 월계수 울타리 길이 있었다. 그 길은 미슬스웨이트 저택과 이어지는 숲으로 난 문에서 끝이 났다. 메리는 그 길을 따라 줄넘기를 하며 가다가, 토끼들이 뛰어다니지는 않는지 숲 쪽을 살펴보았다. 줄넘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마침내 작은 문에 도착하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기한 휘파람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와, 무슨 소리인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소리의 정체는 정말 신기했다. 메리는 소리가 나는 곳을 보자, 숨을 삼키며 우뚝 멈춰 섰다. 한 소년이 나무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소박한 나무 피리를 불고 있었다. 열두 살 정도로 보이는, 재미있게 생긴 아이였다. 소년은 매우 깔끔해 보였고, 코끝이 살짝 들렸으며, 두 볼은 양귀비꽃처럼 발그레했다. 메리 아가씨는 그렇게 동그렇고 새파란 눈을 남자아이의 얼굴에서 처음 보았다. 소년이 기대 있는 나무줄기에 갈색 다람쥐 한 마리가 매달려서 소년을 지켜보았고 근처 덤불 아래에는 장끼 한 마리가 우아하게 목을 빼 소년을 몰래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장끼 바로 곁에는 토끼 두 마리가 앉아서 코를 찡긋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정말로 이 야생동물들은 소년을 관찰하고 작은 피리가 내는 듯한 기묘하고 나지막한 소리를 듣기 위해 홀리듯 나타났다.
소년이 메리를 보자 손을 들더니 그 피리 소리만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거기 가만 있으셔요." 소년이 말했다. "움직이면 얘들이 놀라니깐."
메리는 꼼짝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소년은 피리 연주를 끝내고 흙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찌나 조심조심 일어나는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침내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자, 다람쥐가 폴짝거리며 나뭇가지들 사이로 돌아갔고, 장끼는 머리를 쑥 집어넣고, 토끼들은 네 발로 엎드려 깡충깡충 뛰어갔다. 아무도 겁을 먹고 도망치는 것 같지 않았다.
"저는 디콘이여요." 소년이 말했다. "메리 아가씬 줄 안다구요."
그러자 메리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그 아이가 디콘인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콘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뱀을 부리는 인도의 원주민처럼 토끼와 꿩들을 부릴 수 있겠는가. 디콘의 입술은 크고 붉고 반달처럼 둥글었고, 미소를 지으면 온 얼굴로 환하게 퍼졌다.
"왜 천천히 일어났냐 허면요." 디콘이 설명을 했다. "너무 빨랑 움직이면 동물들이 겁을 먹으니깐 그래요. 야생동물이 주위에 있을 때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구 말두 조용조용 해야 허지요."
디콘은 메리와 난생처음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 전부터 잘 아는 사람이라도 되듯, 친근하게 말했다. 메리는 남자아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어쩐지 부끄러워서 조금 퉁명스럽게 말이 나왔다.
"마사의 편지는 받았어?" 메리가 물었다.
디콘이 곱슬거리는 새빨간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래 온 거여요."
디콘은 피리를 불 때 옆의 땅바닥에 두었던 있었던 것을 몸을 굽혀 집어 들었다.
"원예 도굴 가지구 왔어요. 작은 삽 하나, 갈퀴 하나, 쇠스랑 하나 그리고 괭이 하나. 전부 다 좋은 물건들이에요. 그리고 모종삽두 있구요. 꽃씨 사는데, 가게 여자 점원이 흰 양귀비 씨앗하구 푸른 미나리아재비 씨앗두 끼워줍디다."
"그 씨앗 보여줄래?" 메리가 말했다.
메리는 디콘처럼 말하고 싶었다. 디콘은 말투가 빠르고 편안했다. 디콘은 덕지덕지 기운 옷을 입었고, 재미있게 생긴 얼굴에 손질도 제대로 안 한 붉은 머리를 한 볼품없는 황무지 아이지만, 메리를 좋아한다는 듯, 메리가 자기를 싫어할 거라는 걱정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 듯 말했다. 디콘에게 다가가자 히스 꽃과 풀과 나뭇잎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마치 디콘이 그것들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메리는 그 향기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두 볼은 발그레하고 두 눈은 동그랗고 파란 재미있는 얼굴을 들여다본 순간, 자신이 쑥쓰러워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통나무에 앉아서 같이 살펴보자." 메리가 말했다.
두 아이는 통나무에 나란히 앉았고, 디콘은 외투 주머니에서 갈색 종이로 엉성하게 포장한 꾸러미를 꺼냈다. 끈을 풀자 안에는 더 작고 단정하게 포장한 꾸러미가 잔뜩 들어 있었는데, 꾸러미마다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목서초하구 양귀비꽃이 무진장 많아요." 디콘이 말했다. "목서촌 자랄 때 세상에서 젤 달큰한 향기가 나구요. 양귀비꽃처럼 아무 데나 뿌려놔두 자랄 거여요. 아가씨가 휘파람만 불어주면 꽃이 활짝 핀다니깐요. 그렇게 이쁜 모습은 어디에두 없다 이 말이죠."
디콘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잽싸게 돌렸다. 양귀비꽃처럼 볼이 빨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울새가 우릴 부르구 있구먼. 지금 어디에 있을까나?" 디콘이 말했다.
곳곳에 선홍색 열매가 맺혀 생기가 넘쳐 보이는, 무성한 호랑가시나무 덤불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메리는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저 새가 정말 우리를 부르는 거야?" 메리가 물었다.
"그치요." 디콘은 그건 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투로 대답했다. "울새가 친구들을 불러요. '나 여기 왔어. 날 봐. 잠시 수다를 떨구 싶어.' 이런 이야길 하구 있죠. 저기 덤불 속에 울새가 있구만요. 누구 친구일까나?"
"벤 웨더스태프 영감님의 울새야. 아마 나에 대해서도 조금 알 거야." 메리가 대답했다.
"맞네. 저 녀석은 아가씨를 알아요." 디콘이 또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구 아가씨를 좋아하구. 아가씨한테 흠뻑 빠졌구만요. 1분이면 나한테 아가씨에 대해 전부 다 말해줄 것인데."
디콘은 메리가 방금 전 본 것처럼 천천히 움직여서, 덤불에 상당히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더니 울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거의 비슷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울새는 잠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니, 질문에 대답을 하듯 지저귀기 시작했다.
"맞네, 울새는 아가씨 친구구만요." 디콘이 깔깔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메리가 감격해서 물었다. 메리는 그 대답을 당장 듣고 싶었다. "울새는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러지 않으면 아가씨 곁에 가지두 않았을 거라니깐." 디콘이 대답했다. "새들은 친구를 잘 안 사귀니깐. 게다가 울새는 사람보다두 더 고약허게 사람을 무시하기두 허지요. 보셔요. 녀석이 지금 아가씨 관심을 끌려구 그러는구만요. '넌 친구가 보이지 않냐?' 이렇게 말하구 있어요."
그말을 듣자 정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울새는 옆걸음을 치며 지저귀더니, 고개를 갸웃한 채 덤불 위를 폴짝거리며 뛰어다녔다.
"너는 새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니?" 메리가 물었다.
디콘이 환하게 웃자, 어느새 얼굴에는 크고 붉고 둥글게 흰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디콘이 더벅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그런 것 같어요. 그리구 새들도 내가 알아듣는다구 생각허구요." 디콘이 말했다. "난 줄곧 이 황무지에서 새들허구 함께 살았으니깐요. 그 녀석들이 알을 깨구 나와서 깃털이 나구 나는 법을 배우구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다 지켜보았으니깐요. 나두 그 새들 중 하나라구 생각하여요. 가끔은 내가 새나, 여우나, 토끼나, 다람쥐나 아님 딱정벌렌 것 같어요. 사실 잘은 몰르구요."
디콘은 깔깔 웃더니 통나무로 돌아와, 다시 꽃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디콘은 씨앗에서 꽃이 피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씨앗을 심는 법이며, 지켜보면서 물과 양분을 주는 방법도 가르쳐주었다.
"잘 보셔요." 갑자기 디콘이 메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가씨 대신 내가 이 씨앗들을 심어줄게요. 아가씨 정원은 어디여요?"
메리는 여윈 두 손을 서로를 꽉 쥔 채 무릎 위에 놓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그래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비참한 심경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백짓장처럼 하얗게 되는 것 같았다.
"정원이 있긴 하죠. 그치요?" 디콘이 말했다.
메리의 얼굴이 벌게졌다가 챙백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디콘은 메리의 얼굴빛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메리가 잠자코 있자, 디콘은 점점 어리둥절해졌다.
"땅을 좀 주지 않던가요?" 디콘이 물었다. "아직 암것두 못 받으셨어요?"
메리는 양손을 더 꼭 움켜쥐더니 디콘을 바라보았다.
"나는 남자애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메리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비밀을 하나 알려주면, 넌 그걸 지킬 수 있니? 이건 정말 중요한 비밀이야. 누구에게 들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곘어. 아마 나는 죽어버릴 거야!" 마지막 말을 할 때 메리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디콘은 그 어느 때보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덥수룩한 머리칼을 다시 문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꽤 쾌활하게 대답했다.
"언제까지구 비밀을 지키지요." 디콘이 말했다. "내가 여우 새끼들이며 새들 둥지, 야생동물들 굴에 대한 비밀을 딴 친구들한테 알려주기라두 허면 황무지에 안전한 덴 없을 테니깐요. 그래요, 난 비밀을 지킬 수 있어요."
메리 아가씨는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엉겁결에 손을 뻗어 디콘의 소매를 잡았다.
"정원을 훔쳤어." 메리가 빠르게 말했다. "그곳은 내 정원이 아니야.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야. 아무도 그곳을 원하지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아. 아마 지금쯤 식물들이 다 죽었을지도 몰라. 잘 모르겠어."
메리는 감정이 폭발했고, 예전처럼 고집불통이 된 것 같았다.
"나는 신경 안 써. 신경 안 쓴다고! 내가 아끼는 한, 아무도 관심 없는 정원을 내게서 빼앗아 갈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어. 그 누구에게도! 사람들은 그 정원이 죽어가도록 내버려 뒀어. 담장 안에 가둬버린 채로." 메리가 열정적으로 말을 끝맺었다. 그러더니 양팔로 얼굴을 감싸고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가여운 메리 아가씨.
호기심으로 가득 찬 디콘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자, 자, 자!" 디콘이 천천히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디콘의 태도에서 놀라움과 동정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나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메리가 말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내가 혼자 그 정원을 찾아냈고 혼자 들어갔어. 난 꼭 그 울새와 같아. 누가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겠어."
"그 정원이 어디여요?" 디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메리 아가씨는 통나무에서 얼른 일어났다. 메리는 또다시 짜증이 나고 고집불통이 된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메리는 인도에서처럼 오만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지만, 동시에 감정이 끓어오르고 서글펐다.
"따라와. 보여줄게." 메리가 말했다.
메리는 디콘을 데리고 월계수 길을 돌아서, 담쟁이덩굴이 점점 더 무성해지는 산책로로 돌아갔다. 디콘은 동정심이라고 해도 좋을 묘한 표정을 하고, 그 뒤를 따랐다. 매우 기이한 새의 둥지를 보라고 안내받는 듯했고,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가 담으로 다가가 축 늘어진 담쟁이덩굴을 들어 올리자, 디콘은 흠칫 놀랐다. 그곳에 문이 있었다. 메리가 살며시 문을 밀어 열었고, 두 아이는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메리가 쑥쓰러운 듯 멈춰서서 손으로 정원을 빙 둘러 가리켰다.
"바로 여기야." 메리가 말했다. "여기가 비밀 정원이야. 이곳이 되살아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오직 나뿐이야."
디콘이 주위를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둘러보고 둘러보았다.
"우와!" 디콘이 거의 속삭이다시피 말했다. "이곳은 정말 묘하구 예쁜 곳이여요! 뭐냐, 꿈속에 있는것 같어요."
​​
추천 (4) 선물 (0명)
IP: ♡.252.♡.103
뉘썬2뉘썬2 (♡.169.♡.51) - 2024/01/13 08:10:35

비밀정원에 장미꽃이 만발하여 꽃바다가 되면 얼마나 황홀할까요?빨리
봄이왓음 좋겟어요.우리동네 담벼락에 피는 장미라도 다시보게.

단밤이 (♡.252.♡.103) - 2024/01/13 08:19:36

얼마나 사랑스러울까요? 봄이 기다려지네요.

뉘썬2뉘썬2 (♡.169.♡.51) - 2024/01/13 08:26:16

빨갛게 다닥다닥 피는게 동네가 막 환해지는 느낌이죠.

단밤이 (♡.252.♡.103) - 2024/01/13 08:29:50

역시 봄이 좋아요. 겨울의 좋은 점 중의 하나는 봄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에요.

뉘썬2뉘썬2 (♡.169.♡.51) - 2024/01/13 08:38:29

봄에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죠.

단밤이 (♡.252.♡.103) - 2024/01/13 08:39:50

벚꽃 피는 것도 이제 두달 남았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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