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17~18

나단비 | 2024.04.18 10:53:12 댓글: 0 조회: 59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945
17

전쟁의 나날






릴라는 ‘무지개 골짜기’의 전나무 그늘 아래 자기만의 구석지를 찾았다. 처음으로 받은 연애편지를 읽기 위해서였다. 나이 든 사람에게야 연애편지가 별일도 아니겠지만 십대 후반 아가씨가 처음으로 받은 연애편지는 엄청나게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케네스의 부대가 킹스포트를 떠난 후로 2주일 동안은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일요일 저녁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찬송가를 불렀다.

“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외침을 들어주소서!
위태하게 바다를 헤쳐 가는 이들을 보호하소서!”

릴라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그 노래를 부를 때면 인정사정없이 휘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려 끝없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배와 군인들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불안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에 케네스의 부대가 무사히 영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여기 그의 편지가 있다. 편지는 릴라를 더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말로 시작되었고, 흥분과 기쁨으로 릴라의 볼을 붉게 물들일 말로 끝났다. 하지만 중간 부분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특별한 사람에게 썼다고는 볼 수 없는 그저 이런저런 소식이었다.
릴라는 이 첫머리와 마지막 부분 때문에 몇 주일 동안이나 편지를 베개 밑에 넣고 자면서 한밤중에 잠이 깨면 베개 밑에 손을 넣어 편지를 만져보고는 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을 안됐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의 연인은 이 절반만큼도 멋진 편지를 쓰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케네스가 괜히 유명한 소설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글은 단 몇 마디를 쓰더라도 말로 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담겼고, 마음에 파고들었다. 아무리 읽어도 지루하거나 무미건조하거나 바보스럽다는 느낌이 없었다. 릴라는 ‘무지개 골짜기’에서 날 듯이 집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그해 가을은 기분 좋은 날이 드물었다. 그래도 9월의 어느 날에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잔은 달려 나가 국기를 내걸었다. 러시아 전선이 무너졌던 날 이후로 국기를 내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며 또 그 이후로 어두운 몇 달을 지내야 했다.
“마침내 대공세가 시작되었어요. 틀림없어요, 사모님. 흉악무도한 독일군이 최후의 날을 맞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요. 우리 아이들도 크리스마스까지는 돌아오겠군요. 만세!”
수잔이 외쳤다.
수잔은 자기가 채신머리없이 만세 소리를 외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는 너무너무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와 버렸다고 얌전하게 변명했다.

“그렇지만 사모님, 러시아군이 여름내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거나 갈리폴리 퇴각 따위의 소식만 들려왔던 후라서요.”
“좋은 소식이라니요! 전선으로 나간 남편이 죽음을 당했다거나 하는 소식을 들어야 하는 것이 기쁜 소식이라고요. 죽음을 당한 남자들이 우리 남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들이 목숨을 내놓은 대가로 얻은 승리를 기뻐해야 하나요?”
미스 올리버가 쓰디쓰게 말했다.
“아이구, 미스 올리버. 이 일을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돼요. 우리에게는 요즘 기쁜 일이 없었잖아요. 우리가 기쁘게 생각하건 슬프게 생각하건 남자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미스 올리버도 소피아처럼 모든 일을 너무 나쁜 쪽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소피아도 그 기사를 읽고는 그러더군요. ‘아, 이 일은 구름 사이로 태양이 잠시 보인 것에 불과해. 다음 주면 또 나쁜 소식이 올 거라고.’ 그래서 내가 한마디 쏴주었지요. 나는 결코 소피아에게 지지 않으니까요. ‘하느님도 그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골짜기를 만들지 않고는 두 개의 언덕을 만드실 수 없다는 말을 들었어. 그렇다고 언덕에 올라가서 언덕의 좋은 점을 즐겨서 안 될 이유는 없잖아.’라고요. 그렇지만 소피아는 신음소리를 내며 그러더군요. ‘갈리폴리 전투는 실패했고, 니콜라이 대공은 항복했고, 러시아 황제가 독일 편을 든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어. 거기다 연합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고. 불가리아도 연합군에게 반기를 들 거야. 그게 다가 아니지. 영국과 프랑스는 군복을 입고 참호 진흙 바닥에서 회개할 때까지 그들이 지은 죄에 벌을 받아야 해.’
그래서 내가 독일군들도 군복을 입고 참호 진흙 바닥에 엎드려 회개해야 할 죄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해주었지요. 그러니까 소피아는 독일군들은 곡식 창고를 정화하려고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사모님. 그 말을 듣자니 몹시 화가 나서 또 쏘아 주었지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건 그런 더러운 도구를 쓴다고는 난 절대로 믿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요. 난 소피아가 성스러운 성경말씀을 그런 일에 거침없이 쓰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해요. 소피아는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더군요.
소피아에게는 기개라는 것이 없어요. 항구 건넛마을에 사는 조카딸인 딘 크로퍼드 부인과는 아주 다르죠. 딘 크로퍼드네는 아들만 다섯이나 되는데 이번에 태어난 아기가 또 아들인 것은 알고 계실 거예요. 친척들이 다 실망이 아주 큰데, 그중에서도 딘 크로퍼드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래요. 딸이 태어나길 몹시 바랐으니까요. 그래도 딘의 안사람은 웃으며 그러더래요. ‘올여름에는 어디를 가나 ‘남자 원함’이라는 표찰이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봐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딸아이를 낳을 수 있겠어요?’ 굉장한 기개가 아니겠어요, 사모님? 하지만 소피아는 그 아이도 대포 밥이 될 거라고 하지 뭐예요.”
그 암울한 가을, 소피아의 비관주의는 극도로 치달아 그 누구도 못 말리는 낙관주의자인 수잔도 소피아의 생각을 밝은 쪽으로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독일 측에 가담했을 때 수잔은 경멸하듯 말했다.
“패배하고 싶어 안달 난 나라가 또 하나 생겼군.”
하지만 그리스 내분 소식에는 어떤 나쁜 일을 침착하게 견디어내는 수잔의 인생철학도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베니젤로스22)가 패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을 때 수잔은 격노해서 소리쳤다.
“그리스의 콘스탄티누스 국왕의 아내는 독일 사람이에요, 사모님. 그런 사실이 희망을 꺾어버린다고요. 내 평생 그리스의 콘스탄티누스의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갖게 되는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얼마나 못난 인간이면 자기 부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요! 어떤 남자라도 그런 일은 모양새가 좋은 일이 아니에요. 나도 처녀로 늙었지만 노처녀는 독립심이 강해야 해요. 아니면 기가 꺾이고 마니까요. 그렇지만 만약 내가 결혼했다면 나는 얌전하고 조심성 있게 굴겠어요. 내 생각으로는 이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는 너무 건방져요. 잘못을 뉘우치도록 콘스탄티누스의 엉덩이를 두들겨 패주고 그다음으로는 산 채로 가죽을 벗겨주었으면 좋겠어요.”
“오, 수잔. 그런 말을 하다니요. 그런 일이 온당하다고 생각해요?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것은 몰라도 엉덩이를 두들겨 패주는 게 말이에요?”
블라이드 의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콘스탄티누스가 어렸을 때 충분히 엉덩이를 맞았더라면 좀 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왕자가 엉덩이를 두들겨 맞으며 크지는 않았을 테지요. 그건 정말이지 유감스러운 일이에요. 연합군이 콘스탄티누스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더군요. 뱀 같은 콘스탄티누스의 가죽을 벗기려면 최후통첩 같은 것으로는 안 돼요. 연합군이 꼼짝 못 하게 찍어 누르면 그 사람 머리에도 분별력이라는 것이 좀 들어가겠죠. 하지만 그때까지 시간이 걸릴 텐데 그동안 세르비아는 어떻게 될까요?”
수잔의 걱정대로 세르비아는 고통을 겪었다. 세르비아 소식을 들으며 수잔이 어찌나 분통을 터트리는지 같이 사는 사람들이 괴로울 지경이었다. 너무 분개한 수잔은 키치너 아기 말고는 모든 사람과 물건을 상대로 닥치는 대로 분풀이를 해댔다. 그중에서도 윌슨 대통령이 가장 극심한 공격을 당했다.

“윌슨이 자기 의무를 다해 좀 더 빨리 전쟁에 뛰어들었더라면 세르비아가 그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거예요.”
수잔은 딱 잘라 말했다.
“온갖 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 같은 큰 나라가 전쟁에 개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에요, 수잔.”
가끔씩 윌슨 대통령을 변호하고 나서는 블라이드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윌슨을 위해서가 아니라, 짓궂기는 하지만 수잔을 골려주는 게 재미있어서였다.
수잔은 한 손에는 스튜 냄비를, 또 다른 손에는 국자를 들고 힘차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야 그렇겠지요, 선생님.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옛날이야기 하나가 생각나네요. 어떤 아가씨가 할머니에게 결혼하겠다고 말을 했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결혼이란 심각한 일이다.’ 하고 대답했대요. 그 말에 아가씨는 ‘맞아요. 하지만 결혼을 못 하면 더 심각한 일이지요’ 했다더군요. 내 자신의 경험으로 봐서도 그 대답이 맞아요. 그러니까요, 선생님, 내 생각에는 양키들이 나 몰라라 하고 빠져 있는 것이 더 심각한 일이라고요. 전쟁에 참여하는 것보다요. 그래도 우드로 윌슨이건 누구건 일단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 더 이상 점잔빼고 앉아 있지만은 못할 거예요. 양키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잘 몰라도 전쟁이란 것이 편지 쓰는 법이나 가르치는 곳은 아니니 그렇지 않겠어요?”
연노랑 색깔이 퍼진 10월의 어느 바람 부는 날 저녁, 칼 메러디스가 전선으로 떠났다. 칼은 열여덟 살 생일을 맞자 당장 군에 지원했다. 존 메러디스 목사는 굳은 표정으로 칼을 보냈다. 아들이 둘이나 떠나갔다. 남은 건 어린 브루스뿐이었다. 목사는 브루스와 그의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렇더라도 제리와 칼은 젊은 시절 그의 신부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칼은 아이들 중에 유일하게 세실리아의 눈을 닮은 아이다. 그 눈이 군복 위에서 애정 어린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창백한 얼굴의 목사는 갑자기 자기가 칼을 회초리로 때리려 했던 그날 일이 생각났다. 손에 매를 든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바로 그날 목사는 칼의 눈이 세실리아의 눈을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러디스 목사는 오늘 새삼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 아들의 얼굴을 통해서 죽은 아내의 눈을 다시 볼 날이 또 올 것인가? 얼마나 다부지고 멋지고 잘생긴 청년인가! 그 아들이 떠나는 것을 보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존 메러디스는 열여덟 살에서 마흔다섯 살 사이의 튼튼하고 굳센 남자들의 시체가 갈라지고 움푹 파인 들판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칼은 ‘무지개 골짜기’에서 곤충을 찾아 헤매고 도마뱀을 침대로 데려가고, 호주머니에 개구리를 넣고, 주일 학교에 가 글렌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말썽꾸러기였다. 그런데 그 칼이 군복을 입은 굳센 남자니 어쩌니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칼이 꼭 가야겠다고 했을 때 존 메러디스는 아들을 말리려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릴라는 칼이 떠나는 것이 전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둘은 언제나 동무였고 소꿉친구였다. 나이도 칼이 릴라보다 조금 많았을 뿐 비슷했고, 둘은 언제나 함께 ‘무지개 골짜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둘이 했던 짓궂은 장난들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면서 릴라는 무거운 걸음으로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면서 기분 나쁜 빛을 던졌다. 거센 바람에 전화선이 을씨년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울타리 구석에서는 잿빛으로 시든 키 큰 미역취 꽃대가 바람에 건들거리며 미친 듯이 릴라를 손짓해 부르는 모습이 꼭 저주의 마법을 부리려는 늙은 마녀 무리를 연상케 했다. 오래전 이런 밤이면 칼은 ‘잉글사이드’에 와서 휘파람을 불어 릴라를 불러냈다.
“달밤이야. 신나게 놀자, 릴라.”
칼은 그렇게 말했고 둘은 ‘무지개 골짜기’로 달려 내려갔다.
릴라는 칼이 갖고 다니는 풍뎅이며 벌레들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나 뱀만큼은 절대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둘은 못 하는 얘기가 없었다. 학교 아이들은 둘을 놀려댔다. 열 살 정도 되었던 어느 봄날 저녁, 둘은 ‘무지개 골짜기’ 샘가에서 서로 결혼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고 굳게 맹세했다. 그날 학교에서 앨리스 클로가 석판에 두 사람의 이름을 짝지어 썼는데 그것은 둘이 결혼한다는 의미였다. 릴라와 칼은 그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아 ‘무지개 골짜기’에서 그렇게 맹세했다. 둘의 행복을 방해할 것은 없었다. 이 오래된 추억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런던에서 들어온 외신에 따르면, 전쟁이 시작된 이래 지금이 가장 최악의 상황이라고 했다. 릴라는 앞날이 너무 암담하게만 느껴져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집에서 마냥 기다리거나 봉사하는 일 말고 뭔가 더 적극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도 남자여서 군복을 입고 칼과 함께 서부전선으로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젬이 떠날 때도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그때는 로맨틱한 기분에 쫓겨 진심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진심이었다. 집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때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을 때가 많았다.
유난히 검은 구름과 그림자 사이로 달이 의기양양하게 얼굴을 내밀어 글렌 마을 위로 은빛 물결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릴라는 어린 시절 어느 달밤에 엄마에게 달님 얼굴은 너무너무 슬퍼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달은 고통스럽고 걱정에 찌든 듯이 보였다. 달이 끔찍한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부전선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보고 있을까? 세르비아가 점령당했나? 갈리폴리가 폭격을 받았나?
그날 미스 올리버는 다른 날과는 다르게 더 힘든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날마다 긴장감 속에 살아야 하다니.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나요. 절 책망하듯 보지 마세요, 블라이드 부인. 오늘은 씩씩한 척하기가 힘들어요. 슬럼프에 빠졌나 봐요. 벨기에의 운명이 어찌 되건 내버려두지 않고 왜 영국이 상관하고 나섰는지 모르겠어요. 캐나다 병사를 한 명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요. 우리 남자들을 전부 앞치마 끈으로 묶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막았더라면 좋았을걸요. 제가 지금 이런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30분만 지나도 부끄럽게 여기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게 제 진심이에요. 연합군은 언제나 공격에 나설까요?”
“인내라는 암말은 아무리 지쳐도 계속 앞을 향해 달려 나가요.”
수잔이 깨우쳐주었다.
“아마겟돈 중에 군마가 우리의 가슴을 짓밟고 지나가요. 수잔 아주머니, 말 좀 해보세요. 아주머니는 소리를 지르고 싶거나 욕을 하고 싶거나 뭔가를 깨부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나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비명을 내지르고 싶도록 고통스러울 때가 없느냐고요?”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나는 욕을 한 적도 없고, 욕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 미스 올리버. 하지만 나도 인정하지요. 문을 꽝하고 세차게 닫아버리면 속이 후련해지는 일은 있어요.”

수잔이 속 시원히 다 털어놓겠다고 마음먹은 듯이 말했다.
“그것도 일종의 욕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아주머니? 문을 사납게 꽝 닫아버리는 것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무슨 차이지요?”
“미스 올리버!”
수잔이 미스 올리버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거트루드 올리버의 마음을 구해보려는 비장한 결심에서였다. “미스 올리버는 너무 지쳐서 마음이 약해진 거예요. 무리도 아니지요. 온종일 그 악동들을 가르치느라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데, 쉬지도 못하고 또 나쁜 소식이나 들어야 하니 말이에요. 자, 이제 2층에 올라가 좀 누워요. 내가 따뜻한 차와 토스트를 갖다 줄게요. 그러면 곧 문을 꽝 닫아버리고 싶다거나 욕을 퍼붓고 싶다는 마음은 사라질 거예요.”
“아주머니는 참 좋은 분이에요. 아주머니처럼 좋은 사람은 다시없을 거예요. 하지만 아주머니, 제가 속이 시원하도록 욕을 조금만, 아주 작은 소리로 조금만 하면 안 될까요?”
“내가 발을 따뜻하게 해서 영혼까지 따뜻하게 할 수 있도록 뜨거운 물주머니를 가져다줄게요. 그런 나쁜 말을 해봐야 기분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요. 그것은 분명해요, 미스 올리버. 내 말을 믿어요.”
수잔은 단호히 말했다.
“그러죠. 그럼 뜨거운 물주머니부터 시험해볼게요.”
미스 올리버가 수잔을 놀린 것을 후회하며 말하고는 2층으로 모습을 감췄다.

수잔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아주 불길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뜨거운 물주머니를 채웠다. 이 전쟁은 분명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미스 올리브마저도 불경스러운 말을 쓸 뻔하지 않았는가.
“미스 올리버의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야. 이 물주머니로 고쳐지지 않으면 겨자찜질로 효과가 있나 봐야겠어.”
거트루드 올리버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일상생활을 해나갔다. 키치너 경이 그리스에 가서 콘스탄티누스 국왕도 이제 곧 생각을 바꾸게 될 거라고 수잔은 예언했다. 수잔은 또한 로이드 조지23)가 병기와 대포 문제로 연합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으니 이제부터 로이드 조지가 어떤 일을 해낼지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용감한 안작군24)이 갈리폴리에서 퇴각했는데, 수잔은 조건부로 이 조치에 찬성했다. 쿠트 알 아마라 공략도 시작되었다. 수잔은 메소포타미아의 지도를 눈이 빠져라 살피면서 터키를 비난했다. 헨리 포드는 유럽으로 달려갔고25) 수잔은 그에게 호된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 존 프렌치 경 후임으로 더글러스 헤이그 경이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 일을 두고 수잔은 강을 건너가는 도중에 말을 바꾸는 것은 졸렬한 정책이라고 평했다.
“하긴 헤이그라는 이름은 좋지만 프렌치는 외국 이름 같아요.”
수잔의 눈은 큼직한 장기판 위의 왕이며 말이며 졸의 움직임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런 수잔도 전에는 글렌 세인트 메리 소식 외에는 읽지 않았다.
“전에는 프린스에드워드 섬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러시아나 중국의 왕이 치통을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걱정을 하는 형편이에요. 이렇게 사는 것이 선생님 말씀대로 지식은 넓어질지 모르지만 감정상으로는 참 괴롭네요.”
크리스마스가 또다시 찾아왔건만, 수잔은 이제 빈자리를 만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빈자리가 두 군데나 되는 것은 아무리 굳센 수잔일지라도 견딜 수 없었다. 올 크리스마스에는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지난 9월부터 장담했던 수잔이었다.
그날 밤 릴라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월터 오빠가 간 후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다. 젬 오빠는 보통 에이번리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서 해마다 없었지만, 월터 오빠가 집에 없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늘 케네스 오빠와 월터 오빠에게서 편지가 왔다. 둘 다 아직은 영국에 있지만 머지않아 참호로 들어갈 듯하다. 여기 있는 우리는 그런 대로 견디고 있다.
1914년 이후로 내가 가장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져도 받아들이고,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계속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젬 오빠와 제리 오빠가 전선 참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케네스 오빠와 월터 오빠도 곧 참호로 들어갈 것이다. 만일 그들 중 하나라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난 견디기 힘든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래도 난 살아갈 것이고, 앞날을 계획하고 가끔씩은 삶을 즐기기도 할 것이다. 잠깐씩 나쁜 기억을 잊게 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슬픔 속에서도 즐거운 순간은 있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기억은 곧 되살아나 버릴 것이다. 그래서 기억이란 것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밤은 시꺼먼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올리버 선생님의 말처럼 살인이나 애정도피 행각과 같은 선정적인 문제를 찾아내려는 소설가가 좋아할 만한 거친 분위기가 감돈다. 빗방울은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보이고, 바람은 쇳소리를 내며 단풍나무 숲을 빠져나가고 있다.

어쨌든 올해 크리스마스는 기분 좋게 보낼 수 없었다. 낸 언니는 이가 아팠고, 수잔 아줌마는 눈이 뻘게져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너무 어색해 보여 언짢을 정도였으며, 짐스는 심한 감기에 걸렸다.
나는 짐스가 후두염에 걸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짐스는 지난 10월 이후로 후두염에 두 번이나 걸렸다. 첫 번째는 너무 놀라 거의 죽는 줄 알았다. 엄마와 아빠 두 분 다 집에 계시지 않아서 더 그랬다. 아빠는 집에 앓는 사람이 있을 때만 골라 집을 비우는 것 같다. 그러나 수잔 아줌마가 침착하고 차분하게 짐스를 돌보아준 덕에 아침이 되자 짐스의 증세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저 아이는 사랑스러운 점과 아주 못된 점을 다 갖고 있다.
이제 짐스는 1년하고도 4개월이 되어 아장아장 안 돌아다니는 곳 없이 다 돌아다니고 말도 곧잘 한다. 짐스는 나를 보고 “윌라! 응?” 하고 부르는데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케네스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짐스가 울어대는 바람에 짜증나고 안타깝던 심정이었던 밤이 생각난다. 난 짐스한테 화가 났다가 예쁜 마음이 들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짐스는 분홍빛 볼에 피부는 하얗고 눈은 커다랗다. 머리는 곱슬곱슬하고, 날마다 몸 여기저기에서 새로운 보조개가 나타난다. 내가 수프 단지에 담아 집으로 데려온 그 여위고 노르스름한 못생긴 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아무도 짐 앤더슨 씨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만일 짐 앤더슨 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짐스를 언제까지나 내 곁에 둘 작정이다. 집안 식구들 모두 짐스를 무척 귀여워해서 아이 버릇을 망치고 있다. 아니, 모건과 내가 그런 집안 식구들을 가차 없이 막지 않았다면 망칠 뻔했다.
수잔 아줌마는 짐스처럼 영리한 아이는 본 일이 없으며, 짐스가 악마를 가려낼 줄 아는 아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언젠가 짐스가 박사를 2층 창문으로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가엾게도 박사는 떨어지는 도중에 하이드 씨로 변했고, 월귤나무 덤불로 떨어져 욕이라도 하는 듯 씩씩거렸다. 나는 접시에 우유를 담아 박사의 기분을 맞추어주려 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날 온종일 하이드 씨로 지냈다. 짐스가 최근에 이룬 업적 중에 가장 위대했던 것은 일광욕실에 있는 커다란 팔걸이의자 쿠션에 당밀을 잔뜩 발라놓은 것이었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몰랐는데 프레드 클로 부인이 적십자 활동 때문에 할 일이 있어 왔다가 덜컥 그 위에 앉아버렸다. 부인은 새 실크 드레스를 망쳐버렸기 때문에 심하게 화를 냈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클로 부인은 심하게 화를 내며 기분 나쁜 소리를 해댔다. 내가 짐스의 응석을 너무 받아주어 아이 버릇을 다 버려놨다면서 어찌나 성화를 해대던지 나도 하마터면 화를 폭발시킬 뻔했다. 하지만 클로 부인이 가버릴 때까지 뚜껑을 꾹 닫아두고 있다가 나중에 폭발시켰다.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못생긴 뚱뚱보 할머니 같으니라고!”
큰 소리로 외쳐버리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저 부인은 아들을 셋이나 전선으로 보낸 분이다.”
엄마는 나를 나무랐다.
“엄마는 그거면 어떤 무례한 행동을 해도 다 용서가 된다는 거예요?”
내가 대꾸했다. 하지만 난 곧 그런 말을 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클로 부인의 아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가 있고, 부인이 그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꿋꿋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높이 살 만한 일이다. 거기다 부인은 적십자 활동에도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어떤 사람의 훌륭한 점만 기억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지금은 누구나 절약과 봉사 정신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하는 때임에도 그 망친 옷은 클로 부인이 올해 벌써 두 번째로 새로 맞춘 실크 드레스다.
다시 초록색 벨벳 모자를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은 파란색 밀짚 세일러 모자를 썼지만, 이제 더 이상은 도저히 쓸 수 없게 낡아버렸다. 이 초록색 벨벳 모자는 정말이지 싫다. 너무 고급스럽고 눈에 잘 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꼴사나운 물건에 마음이 끌렸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이 모자를 쓰겠다고 맹세했다. 맹세한 이상은 쓸 것이다.
오늘 아침 셜리 오빠와 함께 먼데이에게 크리스마스 음식을 주려고 역에 다녀왔다. 먼데이는 여전히 희망과 신념을 버리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씩 먼데이는 역사 주위를 돌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비좁은 자기 집에 앉아서 기찻길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지낸다. 이제 우리는 먼데이를 집으로 데려오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소용없는 짓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젬 오빠가 집으로 돌아오면 먼데이도 같이 돌아올 것이다. 만일 젬 오빠가 돌아오지 않으면 먼데이도 자기 심장이 살아 뛰는 한 거기서 주인을 기다릴 것이다.
어젯밤 프레드 아널드가 집에 들렀다. 프레드는 11월이면 열여덟 살이 된다. 그러면 그도 자기 어머니의 수술이 끝나는 대로 전쟁터로 떠날 것이다. 요즘 프레드는 나를 자주 찾아온다. 난 프레드를 좋아하긴 하지만 불편하다. 혹시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에게 케네스 오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할 얘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곧 떠날 프레드에게 차갑게 거리를 둔 채 대하기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연인을 열둘 정도 두고 산다면 무척 신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둘만 있어도 너무 많아서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요즘 수잔 아줌마에게 요리를 배우고 있다. 전에도 요리를 배우려고 한 적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수잔 아줌마가 요리를 가르쳐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정말 다르다. 그때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되지 않아 정말 절망스럽기만 했지만, 오빠들이 전쟁터로 나간 뒤로 난 내 손으로 과자나 다른 먹을거리를 만들어 오빠들에게 보내고 싶어 요리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놀라울 정도로 잘되었다.

아줌마는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요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하고, 아빠는 이번에는 내 잠재의식이 진심으로 요리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난 두 사람 말이 다 맞는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난 지금 멋진 쇼트브레드와 과일 케이크도 만들 수 있다. 지난주에는 아주 야심차게 크림 퍼프 만들기에 도전했다. 하지만 완전히 실패였다. 케이크가 아주 납작하게 나왔다. 크림을 넣으면 다시 봉곳하게 부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부풀지 않았다.
아줌마는 틀림없이 속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아줌마는 크림 퍼프를 잘 만들기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자기 못지않게 잘 만들어내면 자기 명성에 금이 갈까 봐 싫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줌마가 일부러 날 실패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의심이 든다. 아니, 아니다. 그런 의심을 해선 안 된다.
이삼일 전 오후에 미란다 프라이어가 ‘해충 셔츠’라는 멋진 이름으로 불리는 적십자 옷 재단하는 일을 도와주려고 우리 집에 왔다. 수잔 아줌마가 그 이름은 점잖지 못하다고 해서 내가 하일랜드 샌디 할아버지처럼 ‘이 샤쓰’라고 부르자고 했다. 그러자 아줌마는 고개를 흔들더니 나중에 엄마에게 자기는 ‘이’니 ‘샤쓰’니 하는 말은 어린 아가씨들이 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줌마는 특히 지난번에 젬 오빠가 엄마에게 보내온 편지를 보고 끔찍해했다.
‘수잔 아줌마에게 제가 오늘 아침에 이를 엄청나게 많이 잡았다는 말을 좀 전해주세요. 쉰세 마리나 잡았거든요!’
그 말을 듣고 아줌마는 완두콩처럼 새파래져서 말했다.
“사모님, 우리 젊었을 때는 점잖은 사람들이 혹시 그런 해충을 잡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비밀로 했거든요. 내가 소견머리 좁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지만요, 난 아직도 그런 일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미란다는 해충 셔츠 일을 하며 내게 자기 고민을 모두 털어놓았다. 미란다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다. 조 밀그레이브와 약혼했지만, 조는 10월에 군에 지원해서 지금 샬럿타운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미란다의 아빠는 조가 입대했을 때 몹시 화를 내며 미란다에게 절대로 조를 만나거나 연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조는 곧 해외로 떠나야 하고, 미란다는 조가 떠나기 전에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곧 구레나룻 난 보름달의 위협이 있는데도 미란다가 조와 연락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미란다는 조와 결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고 말했다. 나는 “조와 달아나서 결혼하면 되잖니?” 하고 말했다. 그런 충고를 하면서도 조금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았다. 조 밀그레이브는 훌륭한 사람이고, 프라이어 씨도 전쟁 전에는 조를 마음에 들어해서 미란다가 몰래 조와 결혼한다 해도 곧 용서할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일 테고, 자기 가정부가 얼른 집에 돌아와 주기를 바랄 테니까. 하지만 미란다는 수심에 잠겨 은빛 머리를 흔들었다.
“조도 그걸 원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어머니가 임종하실 때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절대로 도망치지 말라는 거였거든. 난 어머니에게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버렸어.”
미란다의 어머니는 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미란다 말에 따르면 미란다의 아빠와 어머니가 도망쳐 결혼했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구레나룻 난 보름달을 애정도피 행각을 벌인 영웅으로 그리기는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프라이어 부인은 평생 그 일을 후회하며 살았던 모양이었다. 미란다의 어머니는 프라이어 씨와 힘들게 살면서 도망쳐 결혼한 죗값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란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게 만들었다.
물론 죽어가는 어머니와 한 약속을 깨버리라고 충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은 미란다의 아빠가 집에 없을 때 조를 집으로 오라고 해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란다는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미란다가 그런 비슷한 일을 꾸미지나 않을까 아빠가 의심하고 집을 비우는 일도 없이 감시한다는 거였다. 더군다나 이 작전을 쓰려면 조에게 한 시간 전에 연락해서 휴가를 얻으라고 해야 할 터였다.
“난 조를 이대로 전쟁터로 보낼 수 없어. 그는 죽어버릴 거야.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면 내 가슴은 찢어져 버릴 거야.”
미란다는 눈물을 주르르 흘려 해충 셔츠를 흠뻑 적셨다.
내가 가여운 미란다를 동정하는 마음이 없어 이런 식으로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젬과 월터 그리고 케네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가급적 재미있게 쓰려고 하다 보니 무슨 일이든 우습게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그러는 것뿐이다. 나는 정말 미란다가 너무너무 가엾다. 미란다는 진심으로 조를 사랑하고 아빠가 독일 편을 드는 것을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미란다도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란다가 자기 고민을 내게 모두 털어놓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나도 지금까지 미란다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씩은 내가 정말 그랬나 싶기도 하다. 나란 사람은 이기적이고 생각도 별로 하지 않고 사는 아이였는데. 그때를 돌아보면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은 옛날처럼 내 멋대로만 행동하지 못한다.
내가 미란다를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쟁 중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무척 낭만적인 일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난 구레나룻 난 보름달과 한판 겨뤄볼 수 있는 일이라면 꼭 나서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2. 1909~1916년까지 개혁 정치를 펼쳤던 그리스 총리.
23. 영국의 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군수장관으로 활약하면서 징병제를 실현시켰다.
24. 1차 대전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ANZACS).
25. 포드 자동차를 설립한 미국의 자동차 선구자.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촉구하려고 ‘피스 십(the peace ship)’으로 널리 알려진 배를 전세 내어 유럽으로 갔다.




18
전쟁 신부 미란다






수잔이 분노로 얼굴까지 하얘져서 말했다.
“사모님, 독일 놈들 하는 짓이 갈수록 꼴불견이네요.”
모두들 넓은 ‘잉글사이드’ 부엌에 모여 있었다. 수잔은 저녁에 먹을 비스킷 재료를 섞고 있고, 블라이드 부인은 젬에게 보낼 쇼트케이크를 만들고 있었으며, 릴라도 옆에서 케네스와 월터에게 보낼 캔디를 만드는 중이었다. 전에는 릴라의 머릿속에 ‘월터와 케네스’의 순서였는데 이제는 자기도 모르게 케네스의 이름이 먼저 떠올랐다. 소피아도 음울한 얼굴로 뜨개질을 하며 함께 있었다. 소피아는 젊은 남자들이 머지않아 모조리 죽고 말 것이라고 여겼지만 죽더라도 시린 발보다는 따뜻한 발로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이 평화로운 장면에 블라이드 의사가 불쑥 뛰어 들어오더니 오타와에 있는 의사당이 불타버렸다면서 분노했다. 수잔도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분노를 터트렸다.
“그 흉악무도한 독일 놈들이 다음에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요? 이런 데까지 와서 우리 의사당 건물을 불태워버리다니요! 그런 극악무도한 짓거리가 어디 있어요.”
수잔이 소리쳤다.
“독일군이 한 짓인지 어떤지는 아직 몰라요. 화재는 원인을 알 수 없이 발생하는 경우가 흔하잖아요. 지난주 마크 매컬리스터 씨네 헛간도 불에 타버렸잖아요. 그 일도 독일군 탓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수잔?”
그렇게 말하는 의사의 말투가 그런 짓을 한 무리는 분명 독일군일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맞는 말이지요, 선생님. 나도 불이 왜 났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바로 그날 저녁에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거기 있었대요. 그 사람이 거길 떠난 지 30분 후에 불이 났대요. 그것만은 사실이지요. 나도 증거 없이 장로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누구네 집 헛간에 고의로 불을 질렀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마크 씨의 아들 둘이 다 군대에 갔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리고 마크 씨도 나서서 지원병 모집 연설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도요. 그러니 선생님, 독일 놈들이 그 사람에게 앙갚음하고 싶어 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수잔이 천천히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내 양심으로는 도저히 지원병 모집 연설에는 나서지 못해요. 남의 아들더러 전쟁터로 나가라, 가서 죽여라, 가서 죽임을 당해라, 라고 어찌 말을 해요.”
소피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왜 못 해? 소피아 크로퍼드, 난 어젯밤 폴란드에서 여덟 살 미만인 어린아이들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고는 아무나 붙들고 가라고 하고 싶었어. 그 일을 생각해봐, 소피아 크로퍼드.”

수잔이 밀가루투성이 손가락을 소피아에게 흔들어대며 말을 이었다.
“여덟 살 미만인 아이가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을!”
“독일군 놈들이 모조리 잡아먹어 버렸나 보군.”
소피아는 한숨을 쉬었다.
“글쎄, 그렇지는 않겠지.”
수잔은 그렇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라도 한 듯 주저하며 대꾸했다.
“독일군이 아직 식인종으로 변하지는 않았다고. 내가 알기로는. 그 아이들은 굶주리고 내버려져 죽은 거야, 소피아 크로퍼드. 그런 일을 생각하면 마음 편히 먹지도 마실 수도 없어.”
“로브리지의 프레드 카슨이 공로훈장을 받았다는군요.”
신문을 읽고 있던 블라이드 의사가 말했다.
그 말에 수잔이 대꾸했다.
“그 소식은 나도 지난주에 들었어요. 프레드는 보병대대 전령이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특별하고 용감한 행동을 했대요. 그런데 그 일에 관해 써 보낸 편지가 마침 프레드 할머니가 임종하려고 할 때 도착했다지 뭐예요. 막 숨이 넘어가려는 할머니를 보고 임종을 지키려고 와 있던 감독교회 목사가 ‘아직 임종 기도를 올리지 말까요?’ 하고 물었더니 그 할머니가 ‘아니, 아니, 기도해요.’ 하고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더래요. 그 할머니는 딘 집안사람이잖아요. 딘 집안사람은 원래가 다 그렇게 성미가 급해요. ‘기도를 하는 건 좋은데 조용히 작은 소리로 하세요. 나한테 방해되지 않도록. 난 이 기쁜 소식을 생각하며 좀 즐겨야겠어요. 내게는 그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그러더래요. 정말 앨미러 카슨답지 뭐예요. 프레드를 끔찍이도 사랑했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할머니는 나이가 일흔다섯 살인데도 흰 머리칼 하나 없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네요. 오늘 아침 내 머리에서 흰 머리칼 하나를 발견했어요. 처음 난 흰 머리칼이에요.”
블라이드 부인이 말했다.
“나도 얼마 전부터 그 흰 머리칼을 보았어요, 사모님. 그런데 말은 하지 않았지요. 그냥 우리 사모님이 마음고생이 심해서 흰머리가 났구나 하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사모님도 그 흰 머리칼을 보고 말았으니 말씀드리는데 흰 머리칼이란 건 명예로운 거예요.”
“나도 늙어가고 있어요, 길버트. 요즘 들어 사람들이 나더러 젊어 보인다고 말하거든요. 정말로 젊은 사람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법이잖아요. 그렇지만 흰머리가 났다고 우울해하진 않겠어요. 난 내 빨간 머리를 좋아한 적이 없거든요. 내가 ‘초록 지붕 집’ 시절에 내 머리를 염색했던 이야기를 해줬던가요? 그 일은 마릴라 아주머니와 나만 아는 일인데.”
블라이드 부인이 쓸쓸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래서 그때 머리를 짧게 잘랐었던 거로군.”
“맞아요. 독일계 유대인 행상에게서 염색약을 한 병 샀어요. 난 머리가 검은색이 될 줄 알고 염색했는데 초록색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머리를 잘라버려야만 했죠.”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요. 물론 그때는 어렸으니까 독일 사람이 어떤 인간들인지 몰랐겠죠. 그것이 독약이 아니고 초록색 염색약이었던 것만도 신호 가호가 있었던 거예요.”
수잔이 소리쳤다.
“‘초록 지붕 집’에 살던 그 시절이 백 년도 더 지난 일처럼 느껴지는군요. 그 시절이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져요. 전쟁 때문에 삶이 양분되고 말았어요.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겠지요. 옛 세상에서 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던 우리가 새로운 세상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블라이드 부인이 한숨지었다.
“전쟁 전에 쓰인 이야기들은 지금과는 아주 동떨어진 얘기로 느껴지지 않나요? 일리아드처럼 아주 아득한 옛날 일을 읽는 것 같아요. 이 워즈워스의 시도 말이에요. 상급반 학생들 입학시험 때문에 훑어보고 있는데 한 행 한 행에 감도는 고전적인 한가로움과 아름다움이 이 땅에서가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 일로 느껴지거든요. 저 초저녁별처럼 이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로 느껴져요.”
미스 올리버가 읽던 책에서 눈을 들고 말했다.
“나도 요즘엔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책은 성경뿐이에요. 성경책에 보니까 꼭 흉악한 독일 놈들을 말하는 구절이 아주 많더라고요. 하일랜드 샌디 영감님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적그리스도가 틀림없이 카이저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 생각에 카이저에게는 적그리스도도 너무 과분해요.”
수잔은 오븐에 비스킷을 넣으며 말했다.

며칠 뒤 아침 일찍 미란다 프라이어가 살그머니 ‘잉글사이드’로 찾아왔다. 겉으로는 적십자 옷 바느질을 같이 하자는 핑계를 댔지만 속마음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고민이 있어서였다. 이해심 많은 릴라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미란다는 너무 많이 먹어 살이 찌고 안짱다리인 자기 개도 함께 데려왔다. 새끼 강아지 때 조 밀그레이브가 준 것이라 미란다는 그 개를 아주 소중히 여기고 귀여워했다.
프라이어 씨는 개라면 다 싫어했지만 그 무렵엔 조에게 호의를 갖고 있어서 이 개를 기르도록 허락했다. 미란다는 너무 기쁘고 감사한 나머지 아빠가 숭배하는 정치가인 자유당 당수 윌프리드 로리어 경의 이름을 따서 개의 이름을 짓고 줄여서 윌피라고 불렀다. 윌프리드 경은 건강하게 잘 자라서 토실토실해졌다. 하지만 미란다가 지나치게 응석을 받아주어 버릇을 버려놓아 아무도 이 개를 좋아하지 않았다. 릴라도 이 개를 싫어했다. 특히 이 개가 네 발을 들고 발랑 드러누워 매끌매끌한 배를 만져달라고 하는 꼴은 정말로 가관이었다. 릴라는 미란다의 부석부석한 얼굴을 보고 밤새도록 울었다는 것을 당장 알아챘다. 릴라는 얼른 미란다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갔다. 하소연할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윌프리드 경에게는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오, 우리 윌피도 함께 가면 안 될까? 우리 윌피는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기 전에 발도 깨끗이 잘 닦아주었어. 낯선 곳에서 내가 보이지 않으면 윌피가 정말 쓸쓸해하거든. 게다가 이제 곧 조의 추억이 될 것은 윌피밖에 없을 거야.”
미란다는 슬픈 얼굴로 부탁했다.
릴라가 양보해서 윌프리드 경은 꼬리를 얼룩덜룩한 등 위로 꼿꼿하게 쳐들고 의기양양하게 앞장서 층계를 올라갔다.

“오, 릴라. 나는 괴로워. 얼마나 괴로운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 정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둘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미란다는 울음을 터뜨렸다.
릴라는 미란다 옆 안락의자에 앉았다. 윌프리드 경은 두 사람 앞에 웅크리고 앉아 건방지게 분홍 혀를 내민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미란다?”
“조가 오늘 밤에 마지막 휴가를 얻어 온대. 토요일에 편지를 받았어. 그 사람은 밥 크로퍼드라고 이름을 써서 내게 편지를 보냈어. 너도 알잖니, 우리 아빠 때문에. 아, 릴라. 시간이 4일밖에는 없대. 금요일 아침에는 떠나야 한다고.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몰라.”
“그 사람이 아직도 너와 결혼하고 싶어 하니?”
릴라가 물었다.
“오, 그럼. 조는 편지에서 같이 도망이라도 쳐서 결혼하자고 간청했어.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릴라. 조가 원한다고 해도 말이야. 내게 그나마 위로가 되는 일은 내일 오후 잠깐 동안 조와 만날 수 있다는 거야. 아빠가 볼일이 있어 샬럿타운에 가셔야 하거든. 이별의 말은 제대로 주고받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릴라, 우리 아빠는 금요일 아침에 내가 조를 배웅하러 역에 나가는 일마저도 허락하시지 않을 게 뻔해.”
“그럼 내일 오후 집에서 조와 결혼식을 올리면 되잖니?”
릴라가 말했다.
미란다는 훌쩍이다 너무 놀라 목이 멜 뻔했다.

“어떻게? 그건 불가능해, 릴라.”
“왜 안 돼?”
적십자 소녀단을 조직하고 수프 단지에 아기를 운반해온 경험이 있는 릴라가 간단한 일이라는 듯 물었다.
“왜라니? 우린 그런 일을 생각해보지도 않았어. 조는 결혼 허가서도 갖고 있지 않다고. 그리고 난 웨딩드레스도 없어.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잖니. 난 그래, 아니 너, 아니 우리 다 그래.”
미란다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린 듯했고, 윌프리드 경은 주인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을 알고는 목을 길게 빼고 우수에 젖은 소리를 내며 짖었다.
릴라 블라이드는 몇 분 동안 재빨리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다음 결론을 내고 말했다.
“미란다, 만일 네가 너의 운명을 내 손에 맡겨준다면 내일 오후 4시 전에 네가 조와 결혼하게 해줄게.”
“오, 넌 할 수 없어.”
“난 할 수 있어, 그리고 꼭 할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네가 해주기만 하면.”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어. 우리 아빠가 날 죽일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화를 많이 내실 거야. 하지만 넌 네 아빠가 화내는 것이 조가 너에게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 더 무섭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미란다가 갑자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거니?”
“그래, 그럴게.”
“그럼 지금 당장 조에게 장거리 전화를 걸어. 그리고 오늘 밤에 집에 올 때 결혼 허가서와 결혼반지를 갖고 오라고 해.”
“오, 난 못 해. 그건, 그건 말이야, 너무, 너무 무모해.”
미란다가 겁에 질려 다시 꼬리를 내렸다.
릴라는 순간 작은 흰 이를 꽉 악물었다.
“하느님, 부디 제게 인내심을 주소서.”
릴라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미란다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할 테니 그동안 너는 집에 가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준비를 해. 그리고 내가 바느질을 도와달라고 전화하거든 곧바로 와야 해.”
미란다가 겁에 질려 창백해진 얼굴이었지만 결의를 굳히고 집으로 돌아가자, 릴라는 전화기로 달려가 샬럿타운으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연결되어서 릴라는 하느님이 자기를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훈련 캠프의 조 밀그레이브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조와 연결되기를 기다리며 릴라는 누군가 엿듣는 사람이 있어 조와의 통화 내용이 구레나룻 난 보름달에게 들어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며 안절부절못하며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조예요? 나는 릴라 블라이드예요. 릴라, 릴라요. 아니,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오늘 밤 돌아오기 전에 결혼 허가서, 결혼 허가서, 네 그래요, 결혼 허가서예요. 그리고 결혼반지를 준비해주세요. 벌써 준비해두었다고요? 그럼 정말로 하실 거죠? 좋아요. 틀림없이 일을 처리해야 해요. 이것은 단 한 번뿐인 기회라고요.”
릴라는 조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일이 성공적으로 되어가는 것에 의기양양해졌다. 다음으로는 프라이어 씨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운이 따라주지 않아 구레나룻 난 보름달이 전화를 받았다.
“미란다니? 어머나, 프라이어 씨군요. 저, 아저씨, 죄송하지만 미란다에게 오늘 오후에 와서 바느질을 도와달라는 말을 좀 전해주시겠어요? 매우 중요한 일이거든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미란다를 귀찮게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오, 감사합니다.”
프라이어 씨는 약간 기분이 언짢은 목소리였지만 승낙했다. 블라이드 의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미란다에게 적십자 일을 못 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 글렌에서 편히 살지 못하게 될 것이란 계산이 섰다. 릴라는 부엌으로 가서 이상한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수잔은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봤다.
“아줌마, 오늘 오후에 결혼 케이크를 만들어줄 수 있어요?”
릴라는 엄숙하게 말했다.
“결혼 케이크라고!”
수잔이 놀라 멍해졌다. 릴라가 전에는 말도 없이 전쟁고아를 데려오더니, 이제는 또 그 일 못지않게 갑작스럽게 남편이라도 데려오겠다는 말인가?
“그래요. 결혼 케이크요. 아주 훌륭한 결혼 케이크요, 아줌마. 건포도와 달걀이 듬뿍 들어간 보기 좋고 통통한 결혼 케이크 말예요. 다른 것들도 준비해야 해요. 내일 오전에는 저도 도울 수 있겠지만, 오늘 오후에는 도울 수 없어요. 웨딩드레스도 만들어야 하고, 시간이 너무 없거든요. 시간이 문제라고요, 아줌마?”
수잔은 자기처럼 늙은 사람은 도저히 이런 충격을 견뎌낼 수 없다고 느꼈다.
“릴라야, 누구와 결혼할 생각이니?”
수잔은 힘없이 물었다.
“어머나, 아줌마. 그 행복한 신부는 내가 아니에요. 미란다 프라이어가 내일 오후에 조 밀그레이브와 결혼하기로 했어요. 미란다 아빠가 시내에 가고 없는 틈을 이용해서요. 전쟁 중의 결혼이에요, 아줌마. 너무 가슴 뛰고 낭만적이지 않아요? 내 생애에 이렇게 흥분된 일은 처음이에요.”
그 흥분감은 곧 ‘잉글사이드’ 전체로 퍼져 나가 심지어는 블라이드 부인과 수잔마저 감염시켰다.
수잔이 시계를 흘낏 보며 말했다.
“당장 결혼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해야겠어요. 사모님, 과일을 좀 준비해주시고 계란도 좀 깨주실래요? 그것만 해주시면 오늘 저녁에 케이크를 오븐에 넣을 수 있어요. 내일 아침에는 샐러드를 만들고 다른 것도 준비해야지요. 구레나룻 난 보름달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일이라면 밤새도록이라도 일할 수 있어요.”
미란다가 눈물을 흘리며 뛰어왔다.
“내 하얀색 드레스를 네 웨딩드레스로 고쳐야 해. 조금만 고치면 너한테 잘 맞을 거야.”

릴라가 말했다.
둘은 옷을 잘라내고 맞추어보고 꿰매며 열심히 일했다. 애쓴 보람이 있어 7시쯤에는 드레스가 완성되었다. 미란다는 릴라의 방에서 드레스를 입어보았다.
“굉장히 아름답구나. 하지만 나한테도 베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전부터 희고 아름다운 베일을 쓰고 결혼식을 올리는 꿈을 꾸었단다.”
미란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느 마음 착한 마녀가 전쟁 신부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란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블라이드 부인이 안개 같은 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미란다, 내일 결혼식에 내 베일을 써라. 내가 ‘초록 지붕 집’에서 신부가 된 지 24년이 지났구나. 난 그때 누구보다도 행복한 신부였지. 행복한 신부의 베일은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지 않니?”
“어머나, 정말 고맙습니다, 블라이드 아주머니.”
미란다의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란다는 베일을 써보았다. 수잔은 잠깐 방에 들러 아름답다는 말을 했으나 오래 있을 틈은 없었다.
“케이크를 오븐에 넣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중이에요. 니콜라이 대공이 에르즈룸을 함락시켰다고 하네요. 이제 터키는 곤경에 빠졌지요. 니콜라이 대공을 거절하다니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냐고 러시아 황제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수잔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엄청나게 큰 쿵하는 소리와 귀를 찢는 비명 소리가 울렸다. 모두 부엌으로 달려갔다. 블라이드 의사와 블라이드 부인, 미스 올리버와 릴라, 베일을 쓴 미란다가 부엌에 모였다. 수잔은 부엌 바닥 한가운데에 멍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아 있고, 하이드 씨로 화한 박사는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등을 둥글게 높이 세운 채로 앉아 있었다. 꼬리도 평상시의 세 배는 되게 부풀어 있었다.
“수잔, 무슨 일이에요? 넘어졌어요? 어디 다쳤어요?”
블라이드 부인이 놀라 외쳤다.
수잔이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아니요, 다치지는 않았어요. 온몸이 덜덜 떨리기는 하지만요. 놀랄 필요는 없다고요. 무슨 일이 났느냐면, 내가 저 빌어먹을 고양이 녀석을 두 발로 걷어차려다가 그런 거예요.”
수잔이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들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블라이드 의사는 도무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오, 수잔, 수잔. 내가 수잔이 욕하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블라이드 의사가 웃음을 참으며 겨우 말했다.
“죄송해요. 어린 아가씨들이 둘이나 있는 데서 내가 그런 말을 쓰다니. 하지만 저 짐승은 빌어먹을 놈의 짐승이라고요. 악마예요.”
수잔은 있는 대로 화가 나서 말했다.
“언젠가는 저 고양이가 펑하는 소리와 함께 지옥 속으로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수잔?”
“언젠가 때가 오면 제 갈 곳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내가 장담해요.”
수잔은 무뚝뚝하게 내뱉고 몸을 추스르고는 오븐 쪽으로 갔다.
“내가 쿵하고 앉아버려 케이크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케이크는 무거워지지도 딱딱해지지도 않았다. 신부를 위한 케이크다웠다. 수잔은 케이크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다음 날도 수잔과 릴라는 오전 내내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미란다가 전화로 아빠가 외출했다고 알려오자 준비한 것들을 조심스럽게 포장해 프라이어 씨 집으로 옮겼다. 얼마 안 있어 군복을 입은 조가 엄청나게 들뜬 모습으로 나타났다. 들러리로 맬컴 크로퍼드 하사도 함께 왔다. 손님은 꽤 많았다. 목사관 식구들과‘잉글사이드’ 식구들이 모두 참석했고 조의 어머니인 ‘죽은 앵거스 밀그레이브 부인’은 물론이고 친척들도 열 명은 넘게 모였다. 조의 어머니는 다른 살아 있는 앵거스 부인과 구별하려고 그런 이상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죽은 앵거스 부인은 구레나룻 난 보름달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마침내 미란다 프라이어는 전쟁터로 떠나기 전 마지막 순간에 조 밀그레이브 병사와 결혼했다. 당연히 낭만적인 결혼식이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낭만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이 많았다. 릴라마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은 미란다가 자기 소원대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쓰고서도 신부답지 못하게 얼굴을 펴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두 번째로는 조가 결혼식 내내 몹시도 슬프게 울어댔다.

미란다는 그런 조를 보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미란다는 릴라에게 그 자리에서 당장 조에게 “나와 결혼하는 게 그렇게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요.” 하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조가 운 이유는 이제 곧 신부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셋째로는 다른 때는 사람들 앞에서 얌전하게 굴었던 짐스가 낯가림을 하면서 “윌라! 윌라!”를 목청껏 외치며 생떼를 쓰고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두 결혼식을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에 짐스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들러리인 릴라가 결혼식이 거행되는 동안 줄곧 짐스를 안고 있어야 했다.
넷째로는 윌프리드 로리어 경이 경련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윌프리드 경은 미란다의 피아노 뒤에 있는 자기 집 한구석에 틀어박혀 발작을 일으키는 내내 야릇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를 냈다. 맨 처음에는 꺼억꺼억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그다음에는 발작을 일으키면서 켁켁 소리를 냈고, 이어 이상한 끅끅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목을 졸리는 듯한 울부짖음으로 마무리했다.
그 소리 때문에 간간이 윌프리드 경이 숨을 쉬려고 울부짖음을 그칠 때 말고는 아무도 메러디스 목사님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수잔을 빼고는 아무도 신부를 바라보는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개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수잔은 신부에게 매혹된 듯 미란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미란다는 윌프리드 경이 발작을 일으키자마자 불안으로 몸을 떨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자기의 사랑하는 개가 죽어가는데 가보지도 못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결혼식 주례사는 미란다의 기억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
릴라는 짐스를 안고 있었지만 전쟁 신부의 들러리로 어울리는 흡족하고 낭만적인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곧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버리고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릴라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특히 전혀 숙녀답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와 버릴까 두려워 죽은 앵거스 부인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했다.
어쨌거나 둘은 결혼했고, 모두들 식당에 모여 결혼식 만찬을 들었다. 음식은 한 달이나 걸려 마련한 것처럼 풍성했다. 모두들 음식을 가져왔다. 죽은 앵거스 부인은 커다란 애플파이를 가져왔는데, 파이를 식당 의자 위에 놓았다는 사실을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위에 덜컥 앉아버렸다. 그 일로 죽은 앵거스 부인 기분도, 검정 실크 드레스도 모두 엉망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파이 없이도 잔치는 떠들썩하고 즐거웠다. 결국 죽은 앵거스 부인은 그 파이를 집으로 다시 가져갔다. 누가 뭐래도 반전주의자인 구레나룻 난 보름달네 돼지 따위에게 자기 파이를 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조 부부는 기운을 되찾은 윌프리드 경을 데리고 포 윈즈 등대로 향했다. 조의 삼촌이 지키고 있는 이 등대에서 두 사람은 짧게나마 신혼여행을 보낼 작정이었다. 우나 메러디스와 릴라 그리고 수잔은 뒤에 남아 설거지며 뒷정리를 했다. 일을 다 마친 다음에 프라이어 씨를 위해 차갑게 식은 저녁 식사와 미란다의 편지를 식탁에 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겨울날의 황혼이 아련하고 신비로운 베일처럼 글렌 마을을 덮어왔다.
“나도 전쟁 신부가 되어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아.”
수잔이 감상적인 말을 했다.
하지만 릴라는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지난 36시간 동안 흥분된 마음으로 서두른 데 대한 반동인지도 몰랐다. 뭔가 좀 실망스럽기도 했다. 결혼식이 우스꽝스럽기만 했고, 미란다와 조는 눈물만 흘리고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미란다가 저 밉살스러운 개에게 먹을 것을 너무 많이 주지만 않았어도 그 개가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거야. 내가 미리 경고를 했건만 미란다는 그 가여운 개를 굶길 수 없다고 했어요. 곧 그 개가 자기가 가진 전부가 될 거라고 하면서. 미란다를 정신 차리도록 마구 흔들어주고 싶었어요.”
릴라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신랑 들러리가 신랑인 조보다도 더 흥분했더라. 미란다에게 앞으로 행복하게 살기 바란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하더라고. 그런데 미란다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 그런 난리 속에서 결혼을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수잔이 말했다.
“어쨌든 이 일은 젬 오빠랑 모두에게 멋진 편지를 쓸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거예요. 윌프리드 경이 발작을 일으킨 이야기를 써 보내면 젬 오빠가 죽어라고 웃겠죠.”
릴라는 전쟁 중의 결혼식에는 좀 실망했지만 금요일 아침 글렌 역에서 미란다가 신랑을 배웅할 때는 전혀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날 새벽은 진주처럼 하얗고 다이아몬드처럼 맑았다. 역 뒤로 향내를 풍기며 서 있는 어린 전나무들은 서리에 덮여 있었고, 차디찬 새벽달은 눈 덮인 서쪽 들판 위에 걸려 있었다. 황금빛 솜털 같은 아침 해는 ‘잉글사이드’의 단풍나무 숲 위에 빛나고 있었다.
조는 창백한 얼굴의 신부를 끌어안고 미란다는 얼굴을 들어 조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릴라는 가슴이 감동으로 먹먹해졌다. 미란다가 평범한 처녀에 평범한 얼굴이라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안 되었다. 구레나룻 난 보름달의 딸이라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미란다의 눈에 어린 열정적인 희생의 불꽃이었다. 사랑과 헌신과 용기의 불꽃을 언제나 타오르게 하겠다고 말없이 조에게 약속해주고 있었다. 미란다뿐만 아니라 남편이 서부전선을 지키고 있는 동안 몇천의 다른 여자들도 자기 집에서 그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으리라. 릴라는 그 성스러운 장면을 지켜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자리를 비키려고 윌프리드 경과 먼데이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승강장 끄트머리로 갔다.
윌프리드 경은 짐짓 점잖은 체하며 물었다.
‘너는 왜 이런 허름한 곳에서 얼쩡거리고 있냐? ‘잉글사이드’ 난롯가 카펫 위에서 뒹굴며 화려하게 살 수도 있잖아. 잘난 체하는 거야, 아니면 그렇게 해야만 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먼데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누구를 만나야 해.’
기차가 떠나자 릴라는 몸을 떨고 서 있는 미란다에게로 갔다.
“그 사람이 떠났어.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그 사람 아내야. 그 사람이 자랑스러워할 아내가 되어야 해.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어.”
미란다가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릴라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미란다와 조의 결혼을 프라이어 씨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니야, 조가 그 흉악한 독일 놈들과 싸울 수 있다면 나도 우리 아빠와 맞서 싸울 수 있어. 군인의 아내는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돼. 윌피야, 가자. 어서 집에 가서 최악의 상황을 당해버리자.”
미란다가 용감하게 말했다.
하지만 맞서야 할 무서운 상대는 없었다. 아마도 프라이어 씨는 미란다를 잃고 나면 가정부를 얻기가 쉽지 않고, 밀그레이브의 집이 여러 채라는 것, 거기다 부재자 수당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어쨌든 프라이어 씨는 미란다에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으니 평생 후회하며 살게 될 거라고 투덜거리듯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조 밀그레이브 부인은 앞치마를 두르고 늘 하던 대로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잠시 다녀온 등대가 겨울에 살기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던 윌프리드 로리어 경은 땔나무 창고 뒤 한구석 자기 자리에 들어앉아 잠에 빠졌다. 전쟁 중의 결혼이 끝난 것에 감사하면서.



추천 (0) 선물 (0명)
IP: ♡.252.♡.103
23,520 개의 글이 있습니다.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조회
나단비
2024-04-18
0
54
나단비
2024-04-18
0
59
나단비
2024-04-18
0
63
나단비
2024-04-18
0
72
나단비
2024-04-17
0
79
나단비
2024-04-17
0
65
나단비
2024-04-17
0
54
나단비
2024-04-17
0
68
나단비
2024-04-17
0
54
나단비
2024-04-16
0
84
나단비
2024-04-16
0
129
나단비
2024-04-16
0
82
나단비
2024-04-16
0
80
나단비
2024-04-16
0
67
나단비
2024-04-15
0
86
나단비
2024-04-15
0
65
나단비
2024-04-15
0
106
나단비
2024-04-15
0
72
나단비
2024-04-15
0
64
나단비
2024-04-14
0
79
나단비
2024-04-14
0
182
나단비
2024-04-14
0
85
나단비
2024-04-14
0
70
나단비
2024-04-14
0
58
나단비
2024-04-13
0
46
나단비
2024-04-13
0
43
나단비
2024-04-13
0
48
나단비
2024-04-13
0
52
나단비
2024-04-13
0
77
나단비
2024-04-12
0
47
모이자 모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