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8권 21~22

나단비 | 2024.04.18 10:54:26 댓글: 0 조회: 52 추천: 0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61947
21
사랑은 너무 끔찍해



1916년 6월 20일
잉글사이드

우리는 너무 바빴고, 좋든 나쁘든 오늘도 내일도 가슴 죄는 소식만 날아들어 몇 주일 동안이나 일기를 쓸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일기를 규칙적으로 써나가고 싶다. 아빠는 전쟁 기간에 일기를 써서 자손에게 남기면 매우 뜻있는 일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일기장에 내 자손이 읽지 말았으면 하는 내 사적인 일도 몇 가지 적고 싶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이 일기장에 적당한 내용인지 아닌지를 내 자신보다는 내 후손을 생각해 정하고 있는 것 같다.
6월 첫 주도 괴로운 나날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은 금방이라도 이탈리아를 점령해버릴 기세다. 유틀란트 전투29)소식이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기가 막히게도 독일군이 대승을 거두었다고 했다. 수잔 아줌마만이 좌절하지 않고 흥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카이저가 영국 해군을 패배시켰다는 말은 틀림없이 독일 놈들의 거짓말일 거예요. 내 말을 믿어요.”
그리고 이틀 정도 지난 뒤 우리는 아줌마 말대로 영국이 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국이 참패를 당한 것이 아니라 영국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했다. 우리는 ‘내가 그러지 않았느냐.’는 아줌마의 말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지만 모두들 기꺼이 참았다.
아줌마의 두 손을 들게 만든 일은 키치너 경의 죽음이었다. 아줌마가 낙담에 빠져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우리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아줌마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다. 이 소식은 밤중에 전화로 전해졌지만 아줌마는 다음 날 <엔터프라이즈>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한 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줌마는 울거나 기절하거나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수프에 소금 집어넣는 일을 잊어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줌마가 전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엄마와 올리버 선생님과 나는 울었지만 아줌마는 우리에게 돌처럼 차가운 비난의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카이저와 여섯 아들은 모두 살아서 팔팔해요. 그러니 이 세상이 완전히 쓸쓸하게 내버려진 것은 아니라고요. 울긴 왜 울어요, 사모님?”
아줌마의 이 무감각한 절망 상태는 하루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 다음 소피아 아줌마가 나타나 수잔 아줌마를 상대로 한탄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소식이야, 수잔. 우리는 이제 곧 닥칠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수잔이 언젠가 말했었지. 나는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어, 수잔 베이커. 하느님과 키치너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고. 아, 이제는 수잔 베이커, 하느님밖에 남지 않았어.”
소피아 아줌마는 마치 전 세계가 위기에 처하기라도 한 듯 비통한 얼굴로 손수건을 눈에 갖다 댔다. 수잔 아줌마에게는 소피아 아줌마가 구원이었다. 그 덕분에 수잔 아줌마가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소피아 크로퍼드, 그만두라고! 소피아가 바보일지도 모르지만 불경한 바보가 될 필요까진 없잖아. 연합군을 지켜줄 분이 하느님뿐이라고 해서 그렇게 울고불고 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야. 키치너 경이 죽은 것은 물론 큰 손실이야. 나도 그렇지 않다고는 하지 않아. 하지만 이 전쟁의 결과는 한 사람의 목숨에 달린 일이 아니라고. 이제 러시아군이 다시 전선으로 나서고 있으니 곧 무슨 소식이 올 거야. 기다려보자고.”
수잔 아줌마가 호되게 나무랐다.
아줌마는 자기 자신에게도 그 말을 믿게 하려는 듯 아주 활기차게 외치고 정말로 곧 활기를 되찾았지만 소피아 아줌마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앨버트 안사람이 아기 이름을 보로실로프라고 짓고 싶다지 않아. 그래서 내가 좀 기다려보라고 했어. 그 보로실로프라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 좀 더 지켜보고 나서 그 이름을 쓰라고 했지. 러시아 사람은 걸핏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버릇들이 있잖아.”
그렇지만 러시아군은 훌륭하게 싸워주고 있고 이탈리아를 구한 것도 러시아군이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와도 우리는 이제 예전처럼 뛰어나가 국기를 내걸 마음은 들지 않는다. 올리버 선생님 말대로 베르됭이 우리의 기쁨을 모두 죽여버렸다. 서부전선에서 승전보가 들려오기만 바라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올리버 선생님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영국군은 언제나 공격을 감행할까? 우리는 너무 오래 기다렸어. 너무 오래.”
최근 사람들의 최대 관심거리는 이 지역에서 출병하는 부대가 해외로 나가기 전에 하는 거리 행진이었다. 이들은 샬럿타운에서 로브리지로, 그다음은 항구 어귀와 글렌 윗마을을 지나 세인트 메리 역으로 행군했다. 모두들 집 밖으로 나와 이 행군을 지켜보았다. 몸져누워 지내는 패니 클로 할머니와 프라이어 씨만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지난주 합동 기도회 밤 이후로 프라이어 씨는 교회에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병사들의 행진을 보고 있자면 멋지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마음이 아프다. 행진하는 군인 중에는 젊은이도 있고 나이가 지긋한 중년 남자도 있다. 항구 건넛마을의 로리 매컬리스터는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군대에 가려고 나이를 열여덟 살로 속였다. 또한 윗마을 앵거스 맥케너스지는 나이가 쉰다섯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마흔넷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로브리지에 사는 남아프리카 전쟁에 참여했던 퇴역군인 두 사람도 있었고, 항구 어귀에 사는 백스터네 세쌍둥이도 끼어 있었다. 모두들 행진해가는 병사들을 향하여 환호성을 올렸다. 스무 살 된 아들 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는 마흔 살의 포스터 부스에게도 격려의 환호를 보내주었다. 찰리의 어머니는 찰리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다. 찰리가 지원했을 때 포스터 씨는 여태까지 자기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 찰리를 보낸 일이 없는데 플랑드르의 참호에 찰리를 혼자 보내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다며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다.
역에서는 먼데이가 자기 집에서 나와 젬에게 안부의 말이라도 전해달라고 하는지 미친 듯이 이 사람 저 사람 사이를 뛰어다녔다. 메러디스 목사가 연설을 하고 레터 크로퍼드가 <피리 부는 사나이>를 암송했다. 병사들은 미친 듯이 레터에게 갈채를 보내며 소리쳤다.
“우리도 간다. 우리도 간다. 우리는 우리의 충성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훌륭하고 감동적인 시를 쓴 사람이 바로 우리 오빠라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자랑스러웠다.
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둘러보면서 저 키 크고 군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정말로 나와 같이 웃고 놀고 춤추고 나를 놀리던 그 남자들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가 저들을 내게서 데려가 버렸다. 저들은 모두 피리 부는 사나이가 부는 피리 소리를 들었다.
보병대대에는 프레드 아널드도 끼어 있었다. 나는 프레드 일로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마음이었다. 프레드가 저런 슬픈 얼굴로 떠나야 하는 것이 모두 내 탓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난 몹시 안타깝고 슬프기도 했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레드는 떠나기 마지막 날 밤에 ‘잉글사이드’에 와서 나를 사랑한다고, 만일 자기가 돌아오면 자기와 결혼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간절하게 자기 진심을 고백했지만 난 그 순간처럼 부담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난 그에게 그런 약속을 해줄 수 없었다. 꼭 케네스 오빠 때문이 아니더라도 난 프레드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전선으로 떠나보내는 것은 너무 잔인하고 무정한 일인 것 같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아기처럼 울어버렸다. 아, 그런데 내 마음에는 구제불능으로 천박한 데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엉엉 울고, 프레드는 미칠 듯 비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중에도 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불쑥 떠오른 것이다. 만일 프레드와 결혼하게 되면 저 코를 날마다 아침 식탁에서 보아야 할 텐데 그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내 일기장에서 내 후손이 읽기 원치 않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부끄럽더라도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사실이다.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좋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프레드가 가여운 마음에 당장 후회할 터무니없는 약속을 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프레드의 코가 그의 눈이나 입처럼 잘생겼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내가 얼마나 큰 곤경에 처해야 했겠는가!
내가 그런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여운 프레드는 이해했고, 훌륭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만약 프레드가 기분 나쁜 태도를 보였다면 나는 그렇게 슬퍼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왜 자꾸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내가 프레드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그 사람이 날 좋아하게 만든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난 마음이 아프고 자꾸 죄책감이 들었다. 만약 프레드 아널드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이런 죄책감은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프레드는 내 사랑을 전선으로 갖고 가지 못한다면 적어도 우정만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그가 가기 전에 작별의 키스를 해달라고 했다. 이것으로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내가 전에는 어떻게 사랑이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일이 라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은 너무 끔찍하다. 나는 케네스 오빠와 한 약속 때문에 프레드에게 가벼운 키스조차 해줄 수 없었다. 그가 얼마나 실망하고 마음이 아플지 뻔히 알면서 그의 청을 들어줄 수 없는 내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프레드에게 우정은 줄 수 있어도 키스할 수는 없었다.
“케네스 때문이야?”
프레드는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을 해야 하는 내 마음은 괴로웠다. 나와 케네스 오빠 둘만의 신성한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프레드가 떠난 후, 나는 돌아와서 2층 내 방으로 올라가 오랫동안 비통하게 울었다. 내가 너무 오래 우는 것을 알고 엄마가 올라와 이유를 물었다. 난 내 심정을 이야기했고, 엄마는 ‘세상에, 이런 아기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이해심도 동정심도 많고 상냥하다. 난 엄마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요셉의 종족’은 참 다정한 사람들이다.
나는 울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엄마, 프레드는 이별의 키스를 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어요. 그것이 무엇보다 더 내 마음을 괴롭게 해요.”
“이런 상황에서는 키스를 해주어도 괜찮았을 텐데 왜 해주지 않았니?”
엄마는 차분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엄마. 난 케네스 오빠가 떠날 때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에게도 키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걸요.”

내 말에 엄마는 무척 놀라며 물었다.
“릴라, 너 케네스 포드와 약혼한 거니?”
“나도 모르겠어요.”
나는 흐느꼈다.
“너도 모른다고?”
엄마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난 케네스 오빠와 있었던 일을 모두 들려주었다. 그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내가 더 바보처럼 느껴진다. 케네스 오빠와 아무 일도 없는데 내가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를 끝내자 내가 바보 같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엄마는 잠깐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런 다음 내게 가까이 다가와 앉아서는 나를 안아주었다.
“울지 마라, 릴라, 나의 릴라. 넌 프레드에게 조금도 너 자신을 나무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어. 레슬리 웨스트의 아들이 자기 외에는 아무한테도 키스하지 말라고 했다면 너는 케네스와 결혼 약속을 한 것으로 생각해도 될 것 같구나. 하지만 아, 우리 아기, 마지막 남은 내 아기, 난 내 아기를 잃은 거야. 전쟁 때문에 네가 너무 일찍 여자가 되어버렸어.”
내가 아무리 여자가 되었다고 해도 엄마 품에서 위안을 받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틀 후 프레드가 대열에 끼어 행진해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또 견딜 수 없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내가 케네스 오빠와 약혼한 것으로 아는 것이 기뻤다.


29. 1916년 여름,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독일 함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




22
먼데이는 알고 있다






미스 올리버 대신 소피아가 대답했다.
“잭 엘리엇이 등대 댄스파티 무도회장으로 전쟁 소식을 가져왔던 그날로부터 꼭 2년이 지났어요. 그날 밤 기억하세요, 올리버 선생님?”
“물론이지. 나는 그날 밤 일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네가 예쁜 드레스를 자랑하려고 부엌으로 뛰어내려 왔던 일도 기억난다. 내가 우리 인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고 주의를 주지 않았니? 그날 밤 너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거다.”
“누가 그런 일을 생각하며 살아요.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예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사람이 살면서 괴로운 일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쯤은 예지 능력이 없어도 누구나 아는 일이지요. 나도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어요.”
수잔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때는 모두들 전쟁이 두세 달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렇게 간단히 생각한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어요.”
릴라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2년이나 지난 지금도 전쟁은 그때나 다름없이 끝이 보이질 않아요. 조금도 끝에 가까워지질 않았다고요.”
미스 올리버가 음울하게 말했다.
“이봐요, 미스 올리버. 지금 한 말은 이치에 맞는 것 같지 않군요. 전쟁이 언제 끝나든 우리는 2년 더 그 끝에 가까이 왔어요.”
수잔이 뜨개바늘을 딱딱 치며 말했다.
“앨버트가 오늘 <몬트리올> 신문에서 봤는데, 어떤 군사 전문가가 이 전쟁이 앞으로 5년은 더 계속될 거라고 했대요.”
소피아도 암울한 전망에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럴 리 없어요.”
릴라가 외쳤다. 그리고 다시 한숨지으며 덧붙였다.
“2년 전에도 우리는 전쟁이 2년이나 갈 리는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5년이나 더 계속되다니요.”
“루마니아가 참전해주기만 한다면 5년이 아니라 5개월이면 끝낼 수 있어요. 지금 추세로 봐서는 루마니아가 참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수잔이 말했다.
“난 외국인은 믿지 못해.”

소피아가 한숨을 쉬었다.
“프랑스인도 외국인이야. 그리고 베르됭을 봐. 올여름에 승리를 거두었던 솜므 전투도 생각해보라고. 이제 곧 대공세가 펼쳐질 것이고, 러시아군도 잘해주고 있어. 헤이그 장군도 포로로 잡힌 독일 장교들이 이 전쟁은 독일이 진 거라고 인정했다고 했어.”
수잔이 응수했다.
“독일사람 말은 한마디도 믿을 수 없어. 믿고 싶다고 해서 믿는 것은 분별없는 짓이야, 수잔 베이커. 솜므 전투에서 영국군은 병사를 몇 백만이나 잃었어. 사실을 직시하라고, 사실을 직시해.”
소피아가 반격했다.
“그렇게 해서 독일군들을 지치게 하려는 거야.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동쪽으로 진격했든 서쪽으로 물러났든 문제가 안 되는 거라고. 난 군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소피아 크로퍼드, 나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모든 것을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면 소피아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이 세상에서 영리한 사람이 그 흉악한 독일군만은 아니니까. 윗마을 사는 앨리스테어 매컬럼의 아들 로드릭 이야기 못 들었어? 지금 독일에 포로로 잡혀 있는데 지난주 어머니한테 편지를 보내왔대. 심한 대우도 받지 않고 음식도 잘 주고 다 좋다고만 썼더래. 그렇지만 자기 이름을 쓰면서 로드릭과 매컬럼이란 이름 사이에 ‘모두 거짓이다.’라는 의미의 갤릭어 두 자를 써 넣어 보냈대. 독일군 검열관이 갤릭어는 모르니까 그 글자도 로드릭의 이름인 줄 알고 편지를 통과시켜준 거지. 자기들이 속은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야. 난 이제 전쟁 일은 그만 헤이그 장군에게 맡기고 초콜릿 케이크에 설탕 옷이나 입혀야겠어. 이번엔 완성되면 선반 맨 위에다 올려놓을 거야. 저번 날에는 아래 선반에 올려놨더니 키치너 아기가 들어와 설탕 옷을 몽땅 벗겨 먹어버렸어. 그날 밤에 손님이 와서 케이크를 가지러 가보니 케이크가 그 꼴이 되어 있지 뭐야.”
“그 가여운 고아의 아빠는 여태 소식이 없니?”
소피아가 물었다.
“7월에 편지를 받았어요. 아내가 죽었고 아기는 제가 맡아 돌보고 있다는 소식을 메러디스 목사님이 편지로 알려주어 알고 있었대요. 즉시 답장을 보냈지만 소식이 없어 자기가 쓴 편지가 도중에 없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더군요.”
릴라가 말했다.
“그 생각을 하는 데 2년이나 걸리다니. 어떤 사람은 생각을 참 느리게도 하네. 짐 앤더슨은 2년이나 참호에 있으면서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니 옛 속담이 하나도 그르지 않아. 왜 바보는 운이 좋다고 하잖아.”
수잔이 비웃듯 말했다.
“짐스를 무척 좋게 썼더라고요. 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아이 일을 자세히 써 보냈고 스냅 사진도 찍어 보냈어요. 다음 주면 짐스가 두 살이 돼요. 저렇게 귀여운 아이는 또 없을 거예요.”
릴라가 말했다.
“릴라가 전에는 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소피아가 말했다.
“전에는 아기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짐스는 좋아해요. 짐 앤더슨 씨의 편지를 받고 아이 아빠가 건강하고 무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별로 기쁘지 않더군요. 저도 제가 이럴 줄 몰랐어요.”
릴라는 솔직히 말했다.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란 건 아니겠지?”
소피아가 끔찍한 소리 말라는 듯 외쳤다.
“아, 아니, 아니요! 그분이 그냥 짐스를 잊어버렸기를 바란 것뿐이에요.”
“그렇게 되면 릴라 아빠가 짐스의 양육비를 대야 할 거야. 젊은 사람들은 정말 생각이 없다니까.”
소피아가 나무라듯 말했다.
바로 그때 짐스가 달려 들어왔다. 발그레한 볼에 곱슬거리는 머리.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입을 맞추어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소피아마저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좋은 말은 아니었다.
“이 아이는 정말 튼튼해 보이는구나. 하긴 혈색이 좀 지나치게 붉은 것 같기도 하고. 폐병 앓는 사람들 얼굴빛이 보통 그렇게 볼그스레하지. 이 아이를 데려온 다음 날 내가 이 애를 봤는데 그때는 릴라가 이 아이를 키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릴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는데. 내가 집에 돌아가서도 앨버트 안사람에게 그렇게 말했지. 그러니까 앨버트 안사람이 릴라 블라이드는 생각보다 훨씬 꿋꿋한 데가 있다고 하더구먼. 하긴 그 사람은 전부터 릴라를 좋게 생각했으니까.”
소피아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앨버트의 아내 한 사람뿐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소피아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피아 자신도 릴라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당히 좋아했다. 하지만 젊은 것들은 너무 칭찬을 해주어 띄워주면 안 되는 법이다. 젊은 아이들 기를 눌러놓지 않으면 이 사회는 도덕적인 기강이고 뭐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2년 전에 네가 등대에서 걸어 돌아왔던 일 기억하니?”
거트루드 올리버가 릴라를 놀리듯 속삭였다.
“기억하고 말구요.”
릴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릴라의 미소가 점차로 희미해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모래사장에서 케네스와 함께했던 시간.
오늘 밤 케네스는 어디에 있을까? 젬과 제리 그리고 월터는? 포 윈즈 곶에서 달빛 아래 같이 즐겁게 춤을 추었던 다른 젊은이들은? 그 마지막 밤은 그림자 하나 없이 즐거웠다. 이제 그들은 네드 버의 바이올린 소리 대신 솜므 전선의 처참한 참호에서 포성과 부상병의 신음소리를 듣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푸른 바다 대신 번쩍이는 조명탄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 젊은이들 가운데 윗마을 에릭 버어와 로브리지의 클러크 맨리 두 사람은 플랑드르의 양귀비꽃 밑에 잠들어 있다. 부상을 입고 병원에 들어가 있는 젊은이들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목사관과 ‘잉글사이드’ 젊은이들은 아직까지 위험한 사고 없이 지내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몇 주일, 몇 달이 지나도 불안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릴라는 한숨을 쉬었다.
“이것은 열병과는 달라요. 2년 정도 지났다고 해서 이제 면역이 되었으니 안심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처음으로 참호에 들어간 날이나 매한가지로 위험하고 앞날을 내다볼 수 없어요.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괴롭지 않은 날이 없어요. 하지만 여태까지 다치지 않고 버티어왔으니 끝까지 이대로 무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 올리버 선생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은 어떤 소식이 올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젠 그런 날이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2년 전에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이라는 새로운 날이 내게 어떤 기쁨의 선물을 가져다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제 삶은 그저 재미있는 일만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런 기대로 가득했던 2년을 전 괴롭게만 보냈어요.”
“지금 그 2년을 재미있는 일로 가득한 2년과 바꾸고 싶니?”
“아니요. 바꾸지 않을래요. 좀 이상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끔찍한 2년이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2년의 세월에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뭔가 소중한 것을 저에게 가져다준 것 같아요. 그 고통과 함께요. 2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순진무구한 소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럴 수 있다고 해도요. 제 자신이 훌륭하게 발전했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적어도 그때처럼 이기적이고 가벼운 아이는 아니거든요. 그때도 제게 정신세계란 것이 있긴 있었겠지요, 올리버 선생님.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잘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그것은 큰 가치가 있는 거예요. 2년 동안 겪었던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디어낼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도 여전히…….”
릴라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조금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전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요. 제 정신이 더 성장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요. 앞으로 2년이 더 지난 다음 되돌아보면서 그동안 더 성숙된 제 자신에게 감사한 생각이 들지 몰라도요. 하지만 지금은 고통이 싫어요.”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성숙시키는 수단이나 방법을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게 된 거겠지. 고통을 겪고 깨달은 교훈이 아무리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라 해도 그 괴로운 가르침을 또 받겠다는 생각을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자, 수잔 아줌마의 말처럼 희망을 갖기로 하자. 사실 이제 전쟁 상황도 점점 나아지고 있어. 여기서 루마니아가 참전하면 우리가 모두 깜짝 놀랄 정도로 순식간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미스 올리버가 말했다.
루마니아는 참전했다. 수잔은 루마니아의 국왕과 왕비처럼 멋진 국왕 부부 사진은 본 일이 없다고 칭송했다. 그렇게 그해 여름은 지나갔다. 9월 초 캐나다군이 솜므 전선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들어와 걱정이 한층 더 깊어져 갔다. 처음으로 블라이드 부인도 용기를 잃고 침울해졌다. 불안한 나날이 거듭되는 동안 블라이드 의사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블라이드 부인을 바라보며 적십자 봉사 일도 이것저것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다.
“일을 하게 해줘. 난 일을 해야 해, 길버트. 일하는 동안은 그런 생각을 좀 잊게 되거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면 온갖 일을 다 상상하게 된다니까. 쉬는 것은 내게 고문이야. 내 아들 둘이 그 끔찍한 솜므 전선에 가 있어. 셜리는 밤이고 낮이고 항공 잡지만 들여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하지만 난 셜리 눈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다 읽을 수 있어. 난 쉬고 있을 수 없다고. 제발 나더러 쉬라고 하지 마, 길버트.”
블라이드 부인은 애걸했다.
그러나 블라이드 의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당신이 자신의 목숨을 단축시키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앤 아가씨. 우리 아이들이 집에 돌아올 때 따뜻하게 맞아줄 수 있는 어머니로 있어줬으면 좋겠어. 이것 봐, 당신은 너무 말라서 피부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렇게 당신이 무리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어. 수잔에게도 물어봐.”
블라이드 의사는 말했다.
“아, 수잔과 당신 둘이 함께 나한테 덤벼드는 데는 못 당해.”
앤은 무기력하게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캐나다군이 쿠르셀레트과 마르텐퓌히 두 도시를 점령하고 많은 포로와 무기를 포획했다는 것이었다. 수잔은 달려 나가 국기를 달고 헤이그 장군이 어려운 임무를 어떤 병사에게 맡겨야 하는지 잘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승전보에도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그 승리에 어떤 대가와 희생을 치렀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이었다.
릴라는 그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깬 무거운 눈으로 릴라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녘의 세상은 다른 시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슬을 머금은 공기는 차갑고 과수원과 숲 그리고 ‘무지개 골짜기’에서는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동쪽 언덕 너머 골짜기는 황금빛이 돌고 저지대는 은빛이 도는 분홍빛으로 빛났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불현듯 역 쪽에서 구슬픈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먼데이일까? 먼데이가 왜 저렇게 울지? 릴라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소리에는 뭔가 불길하고도 슬픈 울림이 있었다. 언젠가 미스 올리버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둘이 어둠 속을 걸어 집으로 돌아올 때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 미스 올리버는 개가 저렇게 짖을 때는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는 분명 먼데이가 짖는 소리였다. 릴라는 확신했다. 누구의 죽음을 애도하여 먼데이가 울고 있는 것일까? 누구의 영혼에 먼데이가 저토록 슬픈 이별의 인사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릴라는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으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릴라는 온종일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두려움에 떨며 기다렸다.
먼데이를 보러 역에 갔더니 역장이 말했다.
“아가씨네 개가 한밤중부터 새벽녘까지 기분 나쁜 소리로 짖더군. 왜 그렇게 울었는지 모르겠어. 우리 집사람도 잠을 깼어. 한 번은 나가서 소리를 질러 말려도 보았지만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더라고. 저기 승강장 끄트머리에 달빛을 받고 멍하니 앉아서는 2~3분마다 코를 위로 쳐들고 마치 가슴이 찢어지기라도 한다는 듯 짖어댔지. 그런 일은 여태 한 번도 없었는데. 언제나 자기 집에 얌전히 엎드려 있다가 기차가 들어오면 나와서 마중하고는 했어. 어젯밤 저 개의 마음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해.”
먼데이는 자기 집에 누워 있었다. 릴라를 보자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릴라 손을 핥았다. 하지만 릴라가 준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먼데이가 아픈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었다. 먼데이를 두고 혼자만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나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나쁜 소식은 없었다. 이제 릴라도 마음을 놓았다. 먼데이도 더 이상은 짖지 않았고 기차가 들어올 때마다 마중을 나가는 자기 일상을 재개했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났을 때 ‘잉글사이드’ 식구들은 다시 유쾌하게 지낼 수 있었다. 릴라는 부엌으로 달려 들어가 수잔이 아침 준비하는 것을 노래를 부르며 도와주었다. 릴라가 유쾌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길 건너 소피아는 앨버트 부인에게 투덜대며 말했다.
“밥 먹기 전에 노래를 불렀어도 잠자기 전에 울 일이 생긴다는 말이 있지.”
하지만 릴라 블라이드는 밤이 오기 전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날 오후 아빠가 갑자기 늙어버린 잿빛 얼굴로 들어와서 월터가 쿠르셀레트 전투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고 릴라는 자비롭게도 아빠 품으로 쓰러져 버려 의식을 차리지 못하다가 몇 시간 후에야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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