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2 격정시대 하-57

더좋은래일 | 2023.11.10 18:33:03 댓글: 0 조회: 196 추천: 4
분류장편소설 https://life.moyiza.kr/fiction/4516489


57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중국공산당의 지하조직이 생긴것은 성재수가 비밀한 사명을 띠고 온 뒤의 일이였다. 성재수는 중공신사군 대홍산정진종대사령부위원회의 파견을 받아가지고 온것인데 지하조직은 그를 중심으로 하고 차차 뿌리를 내리고있었다. 성재수가 제9전구에서 북상해온 대원중에서 서선장이와 오쎌로를 시련을 거친 믿음직한 동지로 지목한것은 당연한 일일것이다. 7년전 상해에서 적에 대한 비타협성과 용감성을 보여주었기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에게 피의 빚을 진 사람들을 아니 믿고 누구를 믿으랴. 그들은 일본제국주위자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살인죄로 사형을 당할것은 받아놓은 당상이였다.

선장이과 마점산이 전후하여 지하당조직에 흡수된 뒤 얼마 아니하여 그들에게 하나의 임무가 맡겨졌다. 당조직의 련락임무를 띤 강진세를 호송하여 적구나들이를 하라는것이였다.

늦은여름의 어느날 세 사람은 대홍산을 향하여 길떠났다. 갈적 올적 다 비밀문서를 휴대해야 할뿐아니라 일본군의 점령구역을 지나야 하므로 오쎌로가 우스개소리로 한것처럼 사자밥을 걸머지고 다녀야 하였다. 강진세는 전에도 수차 다녀보았지만 선장이와 오쎌로는 초행길이였다. 한수를 물길따라 의성까지 배로 내려오고 그 나머지는 륙로를 걸어야 하는데 이때 종상, 경상, 안륙 일대는 다 적군에게 강점되여있었다. 세 사람은 아군의 최전선에 이르기까지는 군복차림을 하였을뿐아니라 장관사령부의 통행증을 휴대하였으므로 어디를 가나 거치는게 없었다. 조선의용대의 특수한 성질 즉 국제적성질로하여 세 사람은 장관사령부의 기입란이 공백으로 되여있는 통행증을 수의로 사용할수가 있었다. 게다가 또 세 사람은 그 <<가장 거룩하신>> 교장님의 <<제자>>들이였으므로 직계부대에서는 열정적이로 맞고 바래고 방계부대에서는 또 방계부대나름으로 감히 태만하지를 못하였다.

적구에 한발을 들여놓는 그 시각부터 세 사람은 처처에서 신경을 써야만 하였다. 군복과 군모를 편복과 삿갓으로 갈아입고 쓰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거니와 말도 될수 있는 한 적게 해야 하였다. 당지의 사투리말을 배우느라고 하기는 했지만 까딱 잘못하면 이내 본바탕이 드러나기때문이다. 세 사람이 거쳐가는 장가집이라는 장터거리는 꽤 흥성흥성하였다. 선장이와 오쎌로는 초행인 까닭에 각 점포들에 일본상품이 그들먹이 들어찬것이 몹시 놀라왔다. 제국주의 총칼은 자본이 나갈 길을 개척한다는 말이 과시 헛말이 아니였다. 그러나 선장이는 이목이 번다한 장터거리를 한시바삐 벗어날것만 바라는터였으므로 그 이상 더 거기다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앞서 가던 강진세가 어느 자그마한 음식점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두 사람을 돌아보고 의노나는 어투로 묻는것이였다.

<<시장들 하잖아? 우리 아무데나 들어가 요기를 좀 하구 갈가 응?>>

오쎌로가

<<아무려나.>> 하고 따라서 발을 멈추는데 선장이는 구석구석에 위험이 도사리고있는것 같은 장터거리에 한시도 더 머무르기가 싫어서 가타부타 말이 없이 그저 강진세 얼굴을 한번 쳐다보기만 하였다. 얌전하면서도 약삭바른 강진세가 선장이의 속을 선뜻 짐작하고

<<좋아 그럼. 우리 요기할걸 아무게나 좀 사가지구 가면서 먹지?>>

말하며 오쎌로를 바라보니 오쎌로는

<<좋두룩 하는게지.>>

두동싸게 말하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세 사람은 마을과 한끈에 꿰는 소로길을 걸어가며 돼지고기 당면소를 넣은 찐만두루 끼니들을 에웠다. 강진세가 길에 오가는 사람이 없는것을 보고 얼굴에 웃음기를 띠며 나직한 목소리로 선장이에게

<<너무 생소해 좀 떨떠름하지?>> 하고 묻는데 선장이는 쓴웃음을 웃으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번연히 속으로 무섬증이 나는걸 아닌보살하기가 쑥스러워서였다.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런 법이야.>>

강진세는 량해하는 어투로 말하며 씩 웃는 바람에 선장이도 할수없이 따라웃으며

<<실상은 칼산지옥에 들어서는 그낌이 없지 않아.>> 하고 실토를 하였다. 오쎌로는 데시근하게도 여기지 않으며

<<어서 이것들이나 까먹어라.>> 하고 보따리속에서 수박씨 말린것을 봉지채로 꺼내여 앞으로 내밀었다.

해가 서쪽 지평선에 가라앉자 얼마 오래지 않아 동쪽하늘 끝간 곳에서 희멀건 쟁반달이 불쑥 솟아올랐다. 모색이 창연한중에 세 사람은 그리 멀지 않은 전방에 거뭇거뭇한 큰 마을 하나를 발견하고 거기 가 밤을 드새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런데 세 사람이 길을 조일즈음에 그 마을에서 홀지에 듣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무어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비명 같은것이 들려왔다. 의심할바 없이 그것은 수백명 남녀의 가슴팍에서 터져나오는 절망적인 부르짖음이였다. 뿐만아니라 그 부르짖음의 사이사이 무슨 속이 먹은 나무통-타악기 같은것을 치는 소리도 섞이여 들려왔다.

선장이가 경황하여 미루어 헤아리기를

(일대 도륙이 시작된거나 아닌가?)

다음 순간 그는 또 자신이 아프리카 오지의 열대밀림속에서 창을 들고 활을 든 악귀 같은 야만인들의 습격을 받지나 않나 하는 한각에 사로잡혔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 길가에 외딴집 한채가 있어서 세 사람은 그 집에 가 주인을 찾았다. 집주인은 상냥히 길손들을 맞아들여 자리를 권하고 또 마시라고 끓인 물을 갖다 따라주었다. 방은 그리 넓지 않으나 거두기는 말끔히 거두어서 흠잡을데가 없었다. 주인의 나이는 한 50 되였을가. 그 생김생김이나 옷차림이 어뜩 보기에도 례사 농군 같지는 않았다. 강진세가 수인사를 마치고 잇달아서 저 건너마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났느냐고 주인에게 물어본즉

<<아, 저 소리 말입니까? 녜 저건 지금 몹쓸 돌림병이 돌아서... 두억시니를 몰아내느라고 저러는겁니다.>>하고 주인은 정색을 하고 손으로 두억시니를 몰아내는 형용까지 해보이는것이였다.

세 사람은 어이가 없어 서로 돌아보고 쓴웃음을 웃었다.

(노루가 제 방귀에 놀랐구나!)

선장이는 마음이 놓이는 한편 또 한심한 생각이 들어 눈살이 절로 쪼프려졌다.

(저 전염병이 창궐하는 마을의 우매한 백성들의 운명은 장차 어찌될것인가?)

강진세가 주인에게 미안하지만 저녁 한때 신세 좀 질수 없겠느냐고 청을 든즉 주인은 선뜻

<<좋습니다 좋습니다. 시장들 하시더라두 조금만 참구 기다려주십시오.>>

허락하고 곧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끝에 저녁밥들을 달게 먹고나서 강진세는 너무 약소해 미안하다고 겸사하며 얼마간의 돈을 주인에게 건네주었다(괴이하게도 아방의 중앙은행권도 적구에서도 통용이 되였다). 그런 연후에 페를 끼쳐 미안하다고 재차 치사하고 보따리를 집어드니 주인이 관곡하게 붙들며 하는 말이

<<이앞에는 몇십리 어간에 객주집이구 주막거리구 다 없습니다. 인제 날두 저물었는데 아무데서나 하루밤 두새시구... 래일 어둑새벽에 저레 조반요기까지 하구 떠나시면 좋지 않습니까.>>

주인의 말을 듣고 선장이와 오쎌로는 길에 삐치여 다리맥이 없던터이라 속으로 옳구나 생각하고 집어들었던 보따리들을 슬그머니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강진세는 두 사람에게 넌지시 눈짓하고 보따라를 둘러메며

<<고맙습니다 주인어른. 그렇지만 우린 긴한 볼일이 있어 밤길을 좀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다시 또 뵙지요.>>

말하고 앞을 서서 밖으로 나가는것이였다.

선장이와 오쎌로는 그의 처사가 맞갖잖아 찜부럭을 부리고싶었으나 하릴없이 그대로 따라나섰다. 세사람은 길을 따라 10분 좋이 잠자코 걷기만 하였다. 이윽고 강진세가 두 사람을 둘러보고

<<고달프지들?>> 하고 위로하여 묻는데 선장이는 앵돌아져 대꾸를 아니하고 오쎌로는

<<남이 일껏 붙드는데 뿌리치구 나올건 무어람.>> 하고 볼멘소리를 하였다. 강진세가 상냥스레

<<그렇지만 이제 그 집주인의 친절이 너무 좀 지나치다구들 생각잖아?>> 하고 물으니 오쎌로는

<<지나치긴 쥐뿔이 지나쳐!>> 하고 게먹였다. 강진세는 한결 더 목소리를 낮추어가지고

<<이봐, 그러지 말구 내 말을 들어.>> 하고 차근차근 일깨워주는것이였다.

<<피점령구역 주민들은 일반적으루 근지가 분명찮은 사람에 대해선 될수 있는 한 멀리하려구 애를 쓰는 법이야. 공연한 시비에 걸려들어 화를 입을가봐서 말이야.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은 부득부득 우릴 붙들어 묵히려는거거던. 이게 그래 수상하잖구 뭐야?-고런 꾀에 넘아갈 바보는 따루 있지!>>

선장이와 오쎌로는 저들도 모르게 이야기에 끌려들어 귀들이 솔깃해졌다.

<<...우리를 붙들어 묵혀놓고 한밤중에 살그머니 일어나 가 적병 한분대를 청해오면... 그 꼴 참 보기 좋겠다. 전에두 그런 례가 없지 않았거든. 여기는 적구야., 경각심을 잠시두 늦춰서는 안돼.>>

선장이와 오쎌로는 서로 쳐다보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할수 있나... 오늘밤은 한둔을 하는 밖에.>>

강진세가 혼자말처럼 지걸이는것을

<<풍찬로숙두 이야기거리지.>>

오쎌로가 셈평 좋게 뒤받았다.

세 사람이 몸에 지닌 무기라고는 모두해서 권총이 석자루뿐. 이렇게 단출하고 외로운 병력으로 들판에서 로숙을 해보기는 참전후 처음이라 선장이는 환한 달빛아래 야색이 꿈속같이 으늑하건만 <<머리 들어 명월 쳐다보고 머리 숙여 고향을 생각>>할 흥취가 없었다. 눕자 곧 잠이 들어 코까지 고는 오쎌로가 부럽기만 하였다.

샐녘에 원촌의 닭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올 때 세사람은 몸을 털고 일어나 또다시 길에 올랐다. 한낮때가 거의 되여 앞길을 가로막는 어느 내가에 다달았다. 내가 그리 넓지는 않아 기껫해야 한 팔구메터쯤 될가. 물의 깊이도 어른의 키로 배꼽에 찰가말가할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건늘 다리가 없는것이다. 세사람은 할수없이 옷들을 벗고 물을 건늘 차비를 하였다. 아, 그런데 이때... 하느님 맙소서! 선장이는 심장이 돌연 고동을 멈춘것 같았다-바로 지척에... 100여메터 하류에... 스무명쯤 되여보이는 한무리의 적병을 발견한것이다!

강진세가 잽싸게 바지를 벗으며 선장이와 오쎌로더러도 빨리 벗으라고 재촉을 하였다. 그러나 선장이는 마음이 몹시 급하고 당황하여 바지를 벗을 겨를도 없이 그냥 입은채록 물속에 들어섰다. 이것을 보자 허리띠에 손을 대였던 오쎌로도

<<옜다 모르겠다.>> 하고 선장이의 본을 따랐다.

<<고인의 가라사대 `군자는 죽어도 관을 벗지 않는다`구 했거늘 내 어찌 혁명군인의 몸으루 아래도리 벗은 송장이 될건인가!>>

사후에 생각이 나서 오쎌로는 익살을 부리느라고 이런 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적군의 보초의 턱밑에서 내를 건느게 된 고비판에서는 그의 말대로

<<어느 하가에 케케묵은 천백년전 고인을 다 새각해내!>> 였던것이다.

건너편 내뚝에 올라서자 강진세는 눈 깜박할 사이에 바지와 신발을 다시 입고 신고 오금에서 불이 나게 길을 조였다. 선장이와 오쎌로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를 그냥 입은채로, 물이 꼴딱 들어찬 신발을 그냥 신은채로 부지런히 그의 뒤를 따랐다.

내뚝우의 일본보초병은 세 사람을 발견하고도 무슨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중국백성 셋이 제 갈길을 가고있는데 거기 무슨 탈을 잡을 건데기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싱거운것은 그옆의 하얀 세수수건을 든 벌거숭이놈이였다. 보초는 오히려 가만있는데 아무 상관도 없는 ㄱ놈이 도리여 중뿔나에 나서서 세 사람을 보고 손짓을 하며 돼먹지도 않는 중국말로

<<오-이! 니디니디 라이라이디유. 콰이콰이 라히아리디유!>> 하고 소래기를 지르는것이였다.

(가기는 어디를 가?)
세 사람이 몸에 지닌 무기와 보따리속의 군복(근복차림을 하지 않고서는 국민당군대의 방서선을 통과할수가 없으므로 거치장스럽지만 군복은 가지고 다녀야 하였다)도 그렇지만 더위기는 비밀문서들이 세 사람 위해 무슨 변명을 해줄거라구? 세 사람은 들은체하고 계속 제 갈길만 갔다. 같잖은 왜병놈은 세 사람이 들은체 않는것을 보자 실 한오리 안 걸친 알몸뚱이로 금세 쫓아올 시늉을 하였다. 세 사람은 지체없이 삼십륙계를 놓았다. 그러니 등뒤에서는 뒤쫓는 발자국소리 아닌 하하 웃는 웃음소리가 났다. 그 벌거숭이 왜병망나니는 신명이 나서 철썩철썩 제 볼기짝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니디 좌! 니디니디 좌!>>

세 사람은 그제야 그 망나니가 지신들을 놀리느라고 그러는줄 알고 걸음들을 늦추었다. 선장이가 뒤를 돌아보니 그 망할 개돼지 놈은 먼발치기로 선장이에게 손짓, 몸짓으로 외설한 동작을 해보였다.

(저 야만의 짐승!)

얼마 아니 가가지고 서남-동북 방향으로 뻗은 군용도로 하나가 나섰다. 길섶을 따라 대막대기전주를 세운 군용전화선이 늘어졌는데 그 높이가 불과 두어메터 밖에 안되여 팔을 뻗으면 손이 닿을만하였다. 도로는 무인지경처럼 잠잠하여 행인의 그림자도 차량의 그림자도 눈에 띄지를 않았다. 비록 창황중이기는 하였으나 선장이는 속으로 괴이쩍어하였다.

(도대체 우리 부대는 무얼 하느라구 이 거저 주느니나 진배 없는 전선도 걷어가지를 않을가? 걷어가면 일석이조가 아닌가!)

(국민당군대 같으면 누가 시킬 때를 기다려? 벌써 어느 옛날에 해치웠지!)

이 수수께끼는 나중에 강진세의 해석을 거쳐서야 풀리였다. 적군은 전화선을 가설하던 당일에 벌써 그것을 보호할 책임을 린근 백성들에게 분담을 시켰던것이다. 즉 일단 사고가 나면 그 구역을 분담한 백성들이 추궁을 받게끔 해놓은것이다. 그래서 신사군은 그 전화선을 절단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여 수고스럽게 보호를 해주어야 할 야릇한 처지에 놓여졌다. 까딱 잘못하면 숱한 백성들의 목이 날아날판이였으므로(아닌게아니라 후에 선장이는 부대가 이동할 때 한 중대지도원이 축 늘어진 왜놈의 전화선을 손으로 떠받치고 서서 그밑을 통과하는 전사들에게 닿지 않게 조심들 하라고 당부하는것을 보았다).

세 사람은 날랜 걸음으로 그 중국경내의 일본군용도로를 건넜다. 선장이와 오쎌로의 흠뻑 젖은 홑바지는 넙적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우글쭈글 거부기잔등모양이 되였는데 물을 흠씬 먹은 편리화는 발을 옮길적마다 질컥질컥 소리를 내여 톡톡히 망신들을 시켰다.

길섶을 따라 흐르는 물도랑에서는 밀짚모자, 대삿갓 따위를 머리에 쓰고 웃통들을 벗은 대여섯명의 농부가 무자위로 묵묵히 논에다 물을 대고있었다. 그 볕에 타 거무테테한 얼굴들은 탈바가지처럼 아무러한 표정이 없었다. 선장이와 오쎌로의 아래도리가 똑 무엇 같은 꼴을 보고도 보았는지 말았는지 그저 잠자코 무자위만 디디고들 있었다. 그들은 이족침략군의 총칼밑에서 마소와 같은 생활을 하고있었다. 만약 그들에게도 분노가 있다면 그것은 아무도 엿볼수 없는 가슴속 깊은 곳에다 간직해두는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것이다.

이날 밤 세사람은 한 자그마한 농가집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을 잘 잤다. 해가 댓발이나 올라와서야 겨우 정신들을 차렸다.그 집주인은 환갑이 지난 로인으로 성은 막을 두자 두가요 식구는 량주뿐인데 농사를 지어가지고 근근히 호구를 하는 형편이였다. 강진세작은아씨는 한 1년전에 그 두 로인내외를 수양부모르 정한터였으므로 매번 지날결에는 꼭 하루밤씩 들려서 묵군 하였다.

두 로인은 왜놈들을 미워하였다. 그래도 드러내놓고 반대를 하지는 못하였다. 두 로인은 신사군을 동정하였다. 그래도 역시 드러내놓고 옹호를 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강진세는 그들을 절대로 믿었다. 이번에 떠나오기 바로 이틀전의 일이다. 강진세가 거리에 나가 금계랍따위 나들이에 별로 소용이 닿지 않는 약품들을 사모으기에 그런걸 구입해 무얼 하느나고 물었더니 강진세는

<<우리 양아버지네 거기는 의사구 약이구 다 구경을 못하는 고장이야. 더구나 여름철에는 학질이 류행을 해 여간만 고생들을 하잖아. 농사철에 앓아서 일을 못하면 한해 생계가 랑패 아닌가.>> 하고 얼굴빛이 흐려졌었다.

강진세는 진심으로 두 로인내외를 공경하였다. 그래서 이웃에서들도 두 로인네는 수양아들을 잘 두엇다고 모두 칭찬들 하엿다. 순박한 두 늙으이는 수양아들과 그 동행들을 정말 친자식같이 살뜰히 돌봐주었다. 그 따뜻한 보실핌에 겨워 선장이는 불현듯 고국에서 외아들의 소식을 몰라 애타하실 어머니의 생각이 났다.

(가엾은 어머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 선장이는 천리만리 먼 타국으로 떠나온뒤 전쟁판에서 해가 바뀌고 또 바뀌여도 감감무소식으로 편지 한장을 못 띄웠었다.

이날 세 사람은 해가 떨어지기전에 마지막 로정인 30리 평지길과 20리 산길을 무난히 답파하여 마침내 목적지인 대홍중의 종대사령부에 득달을 하였다. 사령부에서는 여러해 갈라졌던 여해암키꺽다리와 해후상봉을 하였다. 여해암의 별명은 <<오줌대장>>이다. 중앙군교에서 장개석교장각하의 훈유를 들으며 빨병에다 오줌을 눈 용사다. 그는 이때 산사군대홍산정진종대에서 대(对)적군공작과 과장으로 사업하고있엇다. 성재수의 후임이였다.

밤에 오쎌로가 여해암이에게 안날 길에서 겪은 아슬아슬한 장면을 묘사해들리는데 강진세와 선장이는 한옆에 앉아 싱글거리기만 하고 말참녜는 하지 않았다.

<<어느 하가에 바지를 다 벗어, 그대루 물속에 들어섰지. 그런데 일수가 사나우려니까 젠장... 서둥지둥 물을 건느는중에 무엇인가 발이 걸려 휘뚝 나자빠지잖았겠나. 옹이에 마디지. 꼴깍꼴깍 물을 먹으면서 아무리 애를 써두 어디 일어나져야 말이지. 다행히 두 작은아씨가 잽싸게 내 이 귀때리를 쥐여당기기에 망정이지... 그러잖았더면 젠장... 거기 그냥 빠져죽어 렬사가 될번했지 뭐야...>>

오쎌로가 너무 허풍을 떠니까 그제는 참을수가 없던지 강진세가 웃음보를 터뜨리며 한마디

<<또 시작했군!>>

말하고 여해암을 돌아보며

<<저거 하는 말 하나두 곧이들을게 없어.>> 하고 손을 내저었다.

<<곧이들어?>> 하고 여해암이는 익살맞은 눈으로 먼저 오쎌로를 한번 보고 다시 강진세를 돌아보며

<<저 인간이 콩으루 메주를 쑨다면 내가 곧이드을줄 알아?>> 하고 맞장구를 치는것이였다.

네 친구는 서로 돌아보며 깔깔 웃었다. 방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이 안개처럼 자욱해졌다.

이튿날저녁무렵에 마을밖 잔산밑 잔디밭에서 사령부직속단위의 전체 인원이 참가한 무슨 모임이 있었다. 세 사람이 초청을 받아 참가한것은 더 말할것도 없고 여해암과장 관할하의 일본포로 둘도 여해암이를 따라왔었다. 포로들은 신사군의 초록색 새 군복을 입고있어서 모르고보면 신사군의 전사로 알기 쉬웠다. 개회벽두에 전체가 기립하여 <<인터나쇼날>>을 불렀다. 그것은 선장이가 생후 처음 공개적인 집회에서 큰소리로 불러보는 <<인터나쇼날>>-언제나 힘을 북돋아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프로레타리아의 노래였다. 그리고 또 선장이는 바로 그 회장에서 난생처음으로 자기 당의 기발-망치와 낫이 수놓인 붉은기를 보았다. 격동되여 글썽한 눈물을 머금으며 선장이는 가슴속에 부풀어오르는 파도를 가라앉히느라고 한동안 애를 썼다. 세 사람을 배행한 근무원동지는 선장이의 격동한 모양을 보고 의미있게 빙그레 웃었다. 그의 나이는 아직 스물이 채 못되였어도 이런 경력으로 말하면 대여섯살 나이 우인 선장이보다도 선배였다. 그 집회에서 선장이는 또 녀자 부사령원 하나를 보았다. 그전 같으면 선장이로서는 군대에서 녀성이 지휘관노릇을 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가 없는 일이였다. 그 녀부사령관의 소경력을 선장이와 오쎌로는 근무원동지에게서 들었다. 세 사람이 대홍산에 두류하는 동안 식사, 세탁을 비롯한 모든 생활상의 허드레일은 다 근무원동지가 맡아서 해주었었다.

날마다 같이 일기만 좋으면 의례히 해가 설핏할무렵에 전군의 단엽정찰기 한대가 날아와 공중을 선회하군 하였다. 그 정찰기는 석도도 느리기가 시속 령킬로메터가 아닌가 의심이 들 지경이였다. 하건만 지상에서는 단 한방의 총도 쏘지를 않아 산골짜기는 쥐죽은듯 괴괴하기만 하였다. 전술적인 의도에서 목표를 드러내지 않을려고 일부러 그러는걸로 짐작이 가기는 하였으나 선장이는 그 오만무례한 정찰기를 통쾌하게 쏘아떨구지 못하는것이 못내 분하였다.

세 사람이 대홍산에 머무는 한주일 남짓한 동안에 모두 스무나문끼 식사를 하였는데 주식은 입쌀이였으나 반찬은 시종일관 숙주나물 한가지뿐이였다. 그래서 선장이가 오쎌로를 보고

<<여기 취사관리원량반이 숙주나물에서 무슨 특수한 영양가를 발견해낸게 아니야?>> 하고 웃으니 오쎌로도 이죽거리며

<<숙주나물집 아들인지는 모르지.>> 하고 맞장구를 쳤다.

<<별명이나 하나 지어주고 갈가보다.>>

<<무어라구?...>>

<<비타민A-Z.>>

<<아하하!... 만능비타민이란 말이지? 아하하!...>>

대홍사근거지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고있는 조선의용대 두친구는 기회가 어긋나 만나보지를 못하여 아쉬웠으나 할수없는 일이였다. 대홍산을 떠날 림시하여 선장이는 소지폼중에서 손거울 하나와 접칼 하나를 근무워동지에게 선사하여 다소나마 사의를 표하였다.

세 사람이 로하구에서 돌아와 미처 로독도 풀기전에 락양에서 사람이 와 흉보를 전하였다. 락양분대 분대장 리세영과 지도원 김정희가 형양전선에서 한날한시에 전사를 하였다는것이였다. 리세영이나 김정희와 남달리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심란해 말을 아니하여 지대본부는 갑자기 나간 집같이 썰렁해졌다. 망제(望祭) 일체로 추도회를 열고 모두 비장한 마음으로 두 전우의 명복을 빌었다.

리세영의 후임으로는 <<전쟁할 때>>문정이가 임명되였다. 문정이는 이때 조선의용대 련락원의 자격으로 제1전구 장관사령부에 주재하고있었다. 제1전구의 사령관은 위립황이였다. 문정이가 새로 분대장에 취임한 뒤 하달 가량 지나가지고 로하구에다 생각지 않은 호소식 하나를 전해왔다. 문정이가 전 지대 대원들의 우편대리인이 되여준것이다. 그는 위립황의 장관사령부에 주재해있으면서 조선의 가족들과 서신거래를 할수 있는 구멍수를 뚫어낸것이였다. 그 구멍수란 별게 아니라 프랑스제국주의의 강도질에 힘입는것이였다. 이때 중국은 반식민지상태에 놓여있었으므로 그 우정권은 몽땅 프랑스제국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가있었다. 그리고 일본강도는 아직 프랑스강도에게 득죄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가능하였던것이다. 프랑스국기-삼색기발이 나붓기는 우편렬자가 중일 량군이 대치한 전선을 거침없이 통과하는 판국이였다.

중일 량국이 교전을 하는데 조선의용대는 중국편에 선 까닭에 그 가족들은 거의 례외가 없다싶이 다 전선 저쪽에 살고있었다. 그래서 로구교사변이 발생한이래 찍어서 말하면 <<8.13>>이래 조선의용대성원들은 모두 그 가족들과 련신이 끊겼었다. 아무리 밤낮없이 총을 들고 전장을 달려다닌다고 해도 역시 더운 피가 몸속에 흐르는 사람들인데 부모형제를 그리는 마음이 어찌 없으랴. 더구나 부모들은 위험한 일에 종사하는 자식들의 소식을 몰라 주야로 속을 태울것이 아닌가. 옛사람도 <<봉화련삼월(烽火连三月) 가서저만금(家书抵万金)>> 즉 전쟁이 오래도록 그치지 아니하니 집소식이 귀하기가 만냥값이 나간다고 하잖았던가. 바로 이런 시기에 문정이가 특수한 역할을 놀게 된것이였다.

모두들 기회를 놓지치 않고 여러해만에 집에다 편지들을 썼다. 나중에 알고보니 문정이는 우편물검열에 통과되기 쉽게 하느라고 그 숱한 조선문편지들을 일일이 한문편지로 번역을 해가지고 부쳤던것이다. 수고스럽게도! 그래서 달포씩 지나가지고 받은 답장들에는

백화체한문으로 내리적은 글을 보아낸다는 재간이 없어 화교가 경영하는 주단포목점에를 들고 가 좀 보아달라고 청을 들었더니 서사인듯싶은 사람이 두말없이 받아들고 조선말로 번역을 해가며 찬찬히 일어주었더라.

이와 대동소이한 사연들이 적혀있었다.

서선장이는 고향 원산에서 누나 정실이가 보내온 답장을 받는 즉시 강남전선에 있는 양씨동이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 형님네 집에서는 다들 무고하시며 원동이형님은 벌써 장가들어 아이들이 형제라오. 쌍년이누나는 야마다가 뇌일혈로 죽은 뒤 내처 혼자 살다가 작년에 개가를 하는 즉시 상인인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하오. 우리 집에서도 별고는 없는 모양이나 매부 한정희가 요시찰인으로 된데다가 집안의 형세까지 크게 기울어져 파산몰락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오. 한선희는 김영하선생이 출옥한 뒤 결혼하여 서울서 사는데 김영하선생도 요시찰인. 한선희는 아이낳이를 못하는 모양. 한은희는 법전(법학전문학교)을 나와 변호사가 되였고 또 약방집아들 곽복덕(뺑덕할미)이는 의전(의학전문학교)을 나와 개업의가 되였다오...

선장이의 반가운 누나의 편지외에 생각지 않은 옜친구의 편지 한장을 받았으니 그는 곧 정실이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개업의 곽복덕이가 써보낸것이였다. 곽복덕이는 그 편지에서 선장이를 면려하기를

<<선장군, 우리는 동심협력하여 동아신질서의 확림을 위해 분투하세. 운운...>>

곽볻덕이의 말하는 <<동아신질서>>란 일본제국주이가 침략을 할 목적으로 내건 구호다. 선장이는 기가 막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곽복덕이는 선장이가 항일전사라는것도 모르는 모양 또는 잊은 모양이였다. 이런 우습강스러운 편지를 받은것은 선장이 하나만이 아니였다. 김찬만이도 그 형의 편지를 받아들도 어이가 없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하였다. 그 형은 편지에서 동생을 타이르기를

<<우리는 이미 창씨를 하여 `가나야마` 가 되였으니 동생도 앞으로 김씨성을 쓰지 말고 `가나야마`를 쓰도록 하게. 명심하기 바라네. 운운...>>

이른바 창씨라는것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민족의 얼을 말살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망발이다. 그런데 그 형님이란 량반은 제 아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모양 또는 잊은 모양이였다.

두사람의 이 가관의 편지를 돌려본 장난군들이 조신할리가 없었다. 중구난방으로 떠들며 밤에 오락회가 있을 때 전체가 보는 앞에서 그 편지를 꼭 랑독을 해들려야 한다는것이였다. 등살에 못이겨 선장이와 김찬만이가 일어나 각기 편지 한통씩을 소리내여 읽으니 그제는 좋아라고 손벽을 치면서

<<걸작이다. 걸작!>> 하고 웃음판을 벌이는것이였다.

이무렵에 리정호도 그 누이동생의 편지를 받았다. 그 누이동생은 소학교 교원이였다. 그런데 그 편지를 읽어본 친구들은 거의 례외도 없다싶이 다 리정호에게 달려와가지고 누이동생의 얼굴이 이쁜가 미운가, 키가 큰가 작은가, 성정이 깔깔한가 부드러운가... 꼬치꼬치 캐여묻는것이였다. 꼴을 보아하니 다들 랑만적환상에 사로잡힌 모양이라 리정호는 짐짓

<<미워미워. 아주 박색이야.>> 하고 단념들을 시켰다

그러나 어디 곧이들 들어줘야 말이지. 부득부득 바른대로 말을 하라고 사람을 못살게 구는것이였다. 리정호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에라, 인간의 일생이 얼마나 된다구 남의 속을 태워주랴. 공연한 달련받지 말구 속시원히 원들이나 풀어주자.)

그래 말을 고쳐가지고

<<아니다. 실상은... 소문난 미인이다.>> 하고 말해주었더니 아니나다를가

<<그러면 그렇겠지!>> 하고 그들은 매우 흡족하여 리정호를 놓아주고 싱글싱글하며 돌아서는것이였다.

기실 리정호의 누이동생은 인물이 그리 예쁘지를 못하였다. 그래도 곧이들 들어주지를 않으니 하는수 있나! 그런데 어찌 알았으리, 그로 인하여 하늘에서 복덩이가 떨어질줄을. 보잘것없는 무명소절이던 리정호가 갑자기 인기를 끌기 사작한것이다. 이러저러한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서는 친해보자고 수작들을 붙이는데 그 골자인즉 례외없이 다 그 누이동생을 저를 달라는것이였다.

<<수천리 밖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 더구나 전선이 가루막히구 국경이 가루막혔는데...>> 하고 리정호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고개를 외치면

<<아니아니... 전쟁이 끝난 뒤에... 귀국을 해가지고 그러잔 말이지.>> 하고 그들은 낚시줄을 길게 늘이는것이였다. 오뉴월 소불알 떨어지면 구워먹을 놈들도 다 많지. <<그럼 좋아. 그렇게 하지.>>

친구지간에 너무 각박하게 굴수가 없어서 리정호는 누이동생의 혼사를 제 주장으로 정해버리는 궁지에 빠졌다. 맑스주의자답지 않게.

<<틀림없겠지?>>

<<두말이 왜 있어.>>

그래도 그 멍청이녀석은 마음이 안 놓여 기어이 리정호더러 수결을 두고 손도장을 찍으라는것이다.

<<그럼 약정이야.>>

<<두말하면 군말이지.>>

인생일생이 얼마나 된다고 야박스레 굴것 있나, 빈껍데기수표 한장 선선히 떼여주고 너도 좋고 나도 좋아 안될것 무에 있나.

그 멍청이녀석은 체결한 협정을 공고화할 목적하에 굳이 리정호를 끌고 나가 천진고기만두 한턱을 잘 내는것이였다. 마치 그렇게 하면 저도 적탄에 맞아죽지 않고 또 리정호의 누이동생도 영원히 딴데로는 시집을 아니 갈것처럼. 제가 내켜서 하는 대접을 어찌 아니 받으랴, 두말없이 따라나설 밖에, 경사기분에 잠시 도취 되여보는것도 해로울거야 없겠지.

한달이 채 못되여 리정호에게는 장래매부가 예닐곱이나 생겼다. 천친고기만두도 얻어먹으리만큼 얻어먹고 얼음사탕련밥도 언어먹으리만큼 얻어먹었다. 다 저희가 혼약을 공고화할 목적하에 자진해 갖다바치는거니까 누구를 나무랄거야 없겠지.

그동안에 리정호가 한 일은 단 한가지 즉 그들더러 절대로 비밀을 지켜라, 아무에게도 루설을 말하고 당부를 하는것뿐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시종 저만이 유일한 행운아-합격자인줄 알고 저마끔 속으로 흐물흐물해하였던것이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멍청이들 같으니!

이해 추석을 제2지대성원들은 란장판으로 쇠여야 하였다. 수현전선에서 퇴각을 하다가 한가위날을 맞이한것이다. 퇴각하는 길에서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며

<<이런 제길한 놈의 팔자 좀 봤나.>> 하고 쓴입들을 다신것이다.

전선에서의 태평한 나날이란 결국 살륙과 살륙 사이의 덧없는 쉴참이였다. 어느날 오전, 적의 진지 뒤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기구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는것이 눈에 띄였다. 그것은 적군의 포병관측소였다. 미구에 하늘땅을 뒤흔드는듯한 무더기 포성이 울리는것과 동시에 무수한 포탄들이 날카롭게 공기를 헤가르며 날아와 태평한 나날-덧없는 쉴참은 박산이 나버렸다.

일찌기 대아장회전에서의 적의 정예부대인 이다가끼, 이소야 두 사단에 괴멸적인 타격을 줌으로써 명성을 떨친바 있는 광서부대의 통수 리장군이 이번에는 어쩐 일로 지휘가 신통치를 못하여 그만 망신스러운 패전을 하고말았다.

사령부의 군사회의에서 참모부성원들과 쏘련고문들이 작전지도를 앞에 놓고 한동안 분주하였다(이때 각 전구에는 대개 다 외국고문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고문들이 회의실문밖으로 사라지기가 바쁘게 리장군은

<<너희는 군사는 알아두 정치는 모른다.>>하며 뇌까리며 작전지도에다 고문들이 방금 꽂아놓은 몇몇 부대번호기들을 제 맘대로 이리저리 바꿔 꽂는것이였다. 그 결과 적군의 주공지점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방계부대들이 곤두박질쳐와가지고 터진 구멍을 막아야만 하였다. 그와 반대로 리장군의 직계부대들은 험한 모퉁이에서 멀리 빼돌려진 까닭에 불벼락을 아니 맞게 되였다.

이러한 내막은 장관사령부에서 <<참고소식>>을 편집하고있는 심성운이를 통하여 알게 되였다. 심성운이는 중앙군교에 입교하기전에 상해무선전학교를 졸업하였었다.

정치와 군사가 모순이 생기는통에 방어선의 중앙은 돌파를 당하고 좌우량익도 따라서 붕괴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찌된 셈판인지 적은 얼마 아니하여 곧 추격했던 부대들을 도로 다 걷어들였다. 그래서 전선은 다시금 원래의 대치상태로 되돌아갔다.

처음에 적에게 빌리여 퇴각을 할 때 패군의 정형은 뒤죽박죽으로 혼란하였다. 기동성이 강한 적의 기병대에서 퇴로를 차단당할 념려가 불무한데다가 밤만 되면 지방무장들이 자위를 하느라고 불문곡직 함부로 총질을 하는통에 하루밤사이에도 몇차례씩 놀라는 까닭에 거의 초목이 다 적병으로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선장이가 령솔하는 분대 전원도 지칠대로 지쳐가지고 어느 길가 자그마한 잡목림속에서 하루밤 로숙을 하게 되였다. 오쎌로가 맨 먼저 군복외투의 깃을 단단히 여미고 풀밭에 드러누워 잘 차비를 하며 롱담조로 말하는것이였다.

<<눕는 길루 곧 잠이 드는건 바보가 아니면 영웅이야.>>

선장이는 비록 극도록 지치기는 하였지만 그대로 누워가지고 한동안은 좀체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말 아닌게아니라 바로 곁에 누운 오쎌로는 숨결도 고르롭게 이미 꿈나라려행을 하고있었다. 이튿날 꼭두새벽 날도 채 밝기전에 모두 부지런히 일어나 길떠날 차비들을 하였다 그런데 그때에야 비로소 분대성원 호유백이가 손련중부대의 한 병사의 시체하고 하루밤을 같이 잔것을알게 되였다(밤중에 숨이 진 모양이였다). 이것을 알자 모두들 중구난방으로 호유백이를 놀려주었다.

<<재수가 있겠구먼.>>

<<상대자를 참 잘 골랐군.>>

<<백살 사는건 인제 떼놓은 당상일세.>>

<<바로 옆에서 자는 놈이... 사람이 운명을 하는것두 몰라? 멍청이!>>

한주일이 지나서 생각지 않은 경사가 벌어졌다. 전구사령부소재지에 가지각색 꽃으로 장식을 한 아치들이 세워지고 잇달아서 승전을 경축하는 등불놀이가 성대하게 벌어진것이다. 조선의용대 성원들은 눈을 끔벅끔벅하며 그 장관의 공연(쇼)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우롱당하는 백성들을 마음속으로 동정하였다. 그들은 압박과 착취를 받는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또 릉멸을 당하고 기만을 당해야 하였다. 하건만 그 사령장관각하께서는 매 월요일 오전에 거행되는 손중산기념회에서 불쌍한 당지의 백성들을

<<이건 갈데 없는 유태구역이야! 자린고비들 같으니라구...>>

분기가 충천하여 꾸짖었다.

조선의용대 성원들은 이번 패전을 몸소 겪었으므로 그 속내평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경축대회가 끝난 장관사령부에서는 아무래도 좀 창피하였던지 대성 한알짜리 정치부주임을 조선의용대에 파견하여 사연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더 말할것도 없이 량해를 얻을 목적에서였다. 그 소장주임이 보고를 할때 정치위원 김학무는 관례대로 회의기록원 두 사람을 포치하였다. 그들-리달과 리정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원석에 단정히 앉아 맡은바의 직책을 가장 충실히 수행하려는듯이 부지런히 펜들을 달리고있었다. 보고가 끝이 나서 례의바르게 손님을 바랜 뒤에 두 기록원더러 여태 적은것들을 한번 좀 읽어들리라고 한즉 그들은 기꺼이 그 요청에 응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읽는것을 듣고는 다들 허리를 잡고 웃다가 나중에 눈물까지 내였다. 그들의 그 엉터리기록은 내용이 완전히 서로 다른것으로서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가 다 욕설인데 그 어휘와 풍부함과 다채로움은 가히 욕설대사전이라고도 할만하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리백, 두보로부터 하이네, 마야꼽스끼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이름난 시인들의 가지각색 시구들을 모은것인데 동아에서 서구라파로 가로 뛰는가 하면 또 오늘에서 천년전으로 세로 뛰여서 엉망진창 불성모양의 잡동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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